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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강화도 화문석에 관하여
ki**** 조회수 1,972 작성일2009.05.17
안녕하세요? 저는 4학년 학생입니다. 다름 아닌 제가 일기를 강화도 화문석에 관하여 쓰려고 합니다. 강화도 화문석에 대해 설명도 해주시고, 또한 화문석이 무엇인지도 설명해주세요. 그리고 화문석은 어느 곳으로 수출 되는지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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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h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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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지석묘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의 하나로서 사적 제 137호로 지정되었다. 길이 710cm, 높이 260cm, 넓이 550cm의 커다란 돌을 사용했으며, 북방식 고인돌로서 상고사와 고대사의 좋은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2000.11.29 호주 케인즈 제 24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강화도에는 이 지석묘 말고도 송해면과 하점면에 걸쳐 고인돌군이 있는데, 고려산 북쪽 경사면의 높은 능선 위에서 그 기슭의 평탄한 대지에 이르는 지점에 약 20∼30기의 북방식 고인돌들이 분포되어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河岾面) 부근리(富近里)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유적. 강화도에는 이 지석묘 말고도 송해면(松海面)과 하점면에 걸쳐 고인돌군(지석묘군)이 있는데, 고려산(高麗山) 북쪽 경사면의 높은 능선 위에서 그 기슭의 평탄한 대지에 이르는 지점에 약 20∼30기(基)의 북방식 고인돌들이 분포되어 있다. 사적(史蹟)으로 지적된 고인돌은 도로에서 약간 떨어진 밭 가운데에 1기가 독립되어 있는 것으로, 경기지방을 비롯하여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탁자식(卓子式)이다. 뚜껑돌[蓋石(개석)]은 길이 7.1m, 너비 5.5m나 되는 큰 돌이고, 그 밑에 2개의 굄돌이 받치고 있다. 일반적인 북방식 고인돌의 굄돌이 4개인데 비해 이 고인돌은 돌방[石室(석실)]의 짧은 변을 이루는 2개의 굄돌이 없다. 이것은 과거에 파괴되어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의 지상으로부터의 높이는 2.6m이며, 긴 축은 남북 방향을 가리킨다. 사적 제137호.

* 강화도의 유래

 

  1) 오랜 옛날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2) 고려 시대 몽고가 침입하였을 때에는 임시 도읍지였다.

 

  3)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군사적 침입이 있었다.

 

  4) 약 100년 전에 '강화도'라는 지명이 생겼다.

 

 

* 강화도에 있는 문화재의 종류

 

  1) 선사 시대의 유적지 : 고인돌

 

  2) 단군과 관련된 문화재 : 참성단, 삼랑성

 

  3) 불교 문화재 : 전등사, 전수사

 

  4) 행정과 관련된 문화재 : 고려 궁터, 옛 관청터

 

  5) 전쟁 관련 문화재 :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정족 산성, 강화성

 

 

 

* 외적의 침입을 막아낸 강화도

 

  1) 해안가에 진을 치고 대포를 쏘았다.

 

  2) 육지에 오르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 성을 쌓았다.

 

  3) 전쟁 관련 문화재가 많은 이유

 

    - 서울과 가깝다

 

    - 한강을 따라 서울로 올라오는 길목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內可面) 오상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支石墓].

 

지정번호 인천기념물 제47호

지정연도 1999년 4월 26일

소재지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 산125 일원

시대 청동기시대

크기 12기

분류 지석묘

 

1999년 4월 26일 인천광역시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되었다. 강화도 고려산(高麗山:436m)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해발고도 75m의 나지막한 산에 고인돌 12기(基)가 한곳에 모여 있다.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양식인 고인돌은 지석묘, 돌멘(dolmen)이라고도

하며 대체로 북방식·남방식·개석식 등의 3종으로 분류한다.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의 고인돌 가운데 인천광역시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는 내가 지석묘(內可支石墓)는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로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대형 판석 한 장을 덮은 모양으로 고인돌의 돌방[石室] 축조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원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밖의 고인돌은 거의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다. 오상리 고인돌군은 내가 지석묘를 중심으로 고려산 서남쪽 능선에 북방식과 남방식 고인돌이 고루 분포해 있다.

강화도는 삼국시대에서부터 백제·고구려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자리잡아왔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최대 격전지로 생각되는 관미성이 강화군 교동도로 추정될 정도 강화도는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 개로왕이 죽고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었는데, 이로써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고, 강화도 또한 이때 고구려에 귀속되었으며, 당시 군 이름은 穴口(혈구) 혹은 甲比古次(갑비고차)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접 교동도는 고구려의 高木根縣(고목근현)이 되었다.



그 후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한강 유역을 되찾았고, 다시 신라의 영역을 들어가게 되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풍부한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을 확보하여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때 강화는 海口郡 또는 穴口鎭이라 했다.



강화도는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우리 민족사에서 잊지 못할 항쟁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고려는 1231년에 몽고의 침략을 당했고, 다음해인 1232년 고종은 왕실 귀족을 비롯한 조정관료들과 함께 모두 강화로 천도하였다. 그 후 강화도는 1270년에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 몽고군과 대치하면서 나라를 지킨 투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때부터 강화를 江都로 불렀으며, 지금도 강화도에는 고려시대 별도인 강도의 왕궁터가 남아 있고 몽고와 항쟁하던 흔적들도 성곽 곳곳에 남아 있다. 한편 고려 무인 정권의 군사적 배경이 되어 몽고와 항쟁해 왔던 三別抄는 개경 환도가 알려지자 즉시 대항하고 나섰다. 그들은 배중손을 중심으로 개경 정부와 대립하는 새로운 항몽 정권을 수립하였으나 곧 진도로 남하하고 말았다.



고려가 몽고와 항쟁하는 와중에서 남긴 가장 훌륭한 업적이라면 팔만 대장경을 조판하였던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당시의 조판을 진행했던 장소와 그 경과를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한편 고려 청자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보물들도 이곳 강화도에서 출토된 것이 많은데, 고려 청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국보 제133호 靑瓷辰沙蓮花紋瓢注子(청자진사연화문표주자)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은 일제시대 강화도의 최충헌 묘에서 도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고려시대 강화도에서는 남쪽 마니산 정상에 참성단을 다시 쌓아 하늘과 단군에 제사지냈다. 이는 우리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국난을 당해 나라를 지키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조선시대 1627년 금나라 3만 군사의 침입을 받은 인조는 평복 차림으로 강화로 피신하여 100일 동안을 머무른 적이 있는데 이 사건이 바로 丁卯胡亂이다. 1636년 청나라 태종이 쳐들어왔을 때는 인조가 미처 강화로 피란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퇴각했는데, 강화가 청에게 넘어가고 봉림대군과 빈궁 및 여러 대신등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자 항복하고 말았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때 강화도는 종묘 사직을 지키기 위한 背都가 되어 留守와 經歷을 갖추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뒤 효종은 인조 때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계획하고 강화 해안에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광성보, 인화보, 승천보 등과 같은 방어시설을 새로 쌓거나 고쳤다. 그리고 숙종은 강화도 해안 전역의 돌출부에 큰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 모양으로 53개(2개는 얼마뒤에 폐지되었다)의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강화도 전지역을 요새화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서양 세력이 조선을 넘보기 시작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먼저 항강 어귀 강화에까지 쳐들어온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를 침략한 신미양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때마다 강화의 백성들은 외세에 대항하여 번번이 나라를 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875년 일본 군함이 강화에 침입하여 이른바 운양호사건을 일으켰고, 다음해(1876년)에 강화도 조약이 강요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병자수호조약이다. 그로부터 35년 뒤인 1910년 조선은 일본에 의해 완전히 병합되고 말았다.
 

1.질문:강화도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답변:강화도니까 당연히 인천광역시의 강화군에 위치한다~

2.질문:면적,길이는??

답변:면적 302.14㎢, 남북길이 30㎞, 동서길이 12㎞, 해안선길이 99㎞이다~

3.질문:강화도에 대해서!!

답변: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였던 400년경에는 혈구(穴口)·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하였고, 신라에 귀속된 뒤에는 해구군(海口郡)·혈구진(穴口鎭) 등으로 개칭되었다. 939년 강화현, 1895년 강화군으로 개칭되었고, 1915년 교동면과 통합되었다. 1973년 강화면에서 읍으로 승격하였고, 1995년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고려시대 몽골항쟁의 근거지였으며, 조선시대에 병인양요(丙寅洋擾)·신미양요(辛未洋擾)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본래는 김포반도와 연결되어 있었으나 오랜 침식작용에 의해 구릉성 섬으로 분리되었다가, 한강·임진강에서 유출되는 토사가 쌓이면서 다시 김포반도와 연결되었다. 그후 염하(鹽河)가 한강에서 분류하여 김포와 강화 사이에 해협을 이루면서 다시 섬으로 독립되었다~

4.질문:강화도의 POINT(특징)!!!

답변:1.기후가 온화하다.

       2.남서부에 동백나무·초피나무·비목나무(보얀목)·탕나무 등의 난대림 자생한다.

       3.지질은 결정편암과 화강편마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니산·고려산·낙조봉·혈구산 등 산지가 있으나 험준하지는 않으며, 간척사업으로 인해 곳곳에 넓은 평지가 발달하여 벼농사가 활발하다.

       4.특산물:연근해에서는 민어·밴댕이·새우류·꽃게·어패류 등의 해산물이 많이 잡히고, 지역 특산물로 인삼·화문석·순무 등이 유명하다.

5.질문:보물 몇호로 지정되어 있을까??

답변:보물 제10호인 강화 하점면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수십 점이 넘는 국가지정문화재와 지방지정문화재들이 있으며, 강화 갑곶리의 탱자나무(78)·강화 사기리의 탱자나무(79) 등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마니산과 신선놀음·손돌풍·성토닦기노래 등 많은 설화와 민요가 전해지며, 시선뱃놀이·용두레질놀이·씨름굿·안택굿·별신굿 등의 민속놀이와 의례가 행해진다. 1998년 옛 강화교 북쪽 100m 지점에 4차로의 강화대교가 개통되어 차량들이 운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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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와 관련된 사진들*

200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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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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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도 4학년입니다.

강화도와 화문석에 대해 알려드릴께요.

강화도에서는 화문석이 유명하죠? ㅋㅋ

채택해주세요~^^*please~

 

강화도

 

강화도는 삼국시대에서부터 백제·고구려의 중요한 요충지로서 자리잡아왔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최대 격전지로 생각되는 관미성이 강화군 교동도로 추정될 정도 강화도는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 개로왕이 죽고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었는데, 이로써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고, 강화도 또한 이때 고구려에 귀속되었으며, 당시 군 이름은 穴口(혈구) 혹은 甲比古次(갑비고차)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접 교동도는 고구려의 高木根縣(고목근현)이 되었다.
그 후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한강 유역을 되찾았고, 다시 신라의 영역을 들어가게 되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풍부한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을 확보하여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때 강화는 海口郡 또는 穴口鎭이라 했다.
강화도는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우리 민족사에서 잊지 못할 항쟁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고려는 1231년에 몽고의 침략을 당했고, 다음해인 1232년 고종은 왕실 귀족을 비롯한 조정관료들과 함께 모두 강화로 천도하였다. 그 후 강화도는 1270년에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 몽고군과 대치하면서 나라를 지킨 투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때부터 강화를 江都로 불렀으며, 지금도 강화도에는 고려시대 별도인 강도의 왕궁터가 남아 있고 몽고와 항쟁하던 흔적들도 성곽 곳곳에 남아 있다. 한편 고려 무인 정권의 군사적 배경이 되어 몽고와 항쟁해 왔던 三別抄는 개경 환도가 알려지자 즉시 대항하고 나섰다. 그들은 배중손을 중심으로 개경 정부와 대립하는 새로운 항몽 정권을 수립하였으나 곧 진도로 남하하고 말았다.
고려가 몽고와 항쟁하는 와중에서 남긴 가장 훌륭한 업적이라면 팔만 대장경을 조판하였던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당시의 조판을 진행했던 장소와 그 경과를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한편 고려 청자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보물들도 이곳 강화도에서 출토된 것이 많은데, 고려 청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국보 제133호 靑瓷辰沙蓮花紋瓢注子(청자진사연화문표주자)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은 일제시대 강화도의 최충헌 묘에서 도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고려시대 강화도에서는 남쪽 마니산 정상에 참성단을 다시 쌓아 하늘과 단군에 제사지냈다. 이는 우리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국난을 당해 나라를 지키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조선시대 1627년 금나라 3만 군사의 침입을 받은 인조는 평복 차림으로 강화로 피신하여 100일 동안을 머무른 적이 있는데 이 사건이 바로 丁卯胡亂이다. 1636년 청나라 태종이 쳐들어왔을 때는 인조가 미처 강화로 피란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퇴각했는데, 강화가 청에게 넘어가고 봉림대군과 빈궁 및 여러 대신등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자 항복하고 말았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때 강화도는 종묘 사직을 지키기 위한 背都가 되어 留守와 經歷을 갖추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뒤 효종은 인조 때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계획하고 강화 해안에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광성보, 인화보, 승천보 등과 같은 방어시설을 새로 쌓거나 고쳤다. 그리고 숙종은 강화도 해안 전역의 돌출부에 큰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 모양으로 53개(2개는 얼마뒤에 폐지되었다)의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강화도 전지역을 요새화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서양 세력이 조선을 넘보기 시작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먼저 항강 어귀 강화에까지 쳐들어온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를 침략한 신미양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때마다 강화의 백성들은 외세에 대항하여 번번이 나라를 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875년 일본 군함이 강화에 침입하여 이른바 운양호사건을 일으켰고, 다음해(1876년)에 강화도 조약이 강요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병자수호조약이다. 그로부터 35년 뒤인 1910년 조선은 일본에 의해 완전히 병합되고 말았다.
 
화문석
 

화문석은 꽃돗자리라고도 한다. 신라시대부터 화문석의 생산을 담당하였던 석전()이라는 관청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로 오면 송()나라 사람들이 고려의 수출품 중 화문석을 인삼과 더불어 가장 좋아할 정도로 품질이 뛰어났다. 또한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만화문석(滿)을 깔았다고 한다. 조선시대로 오면 조정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선사품 중 수량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중국에 비해 그 규모는 적으나 일본에도 보내졌다.
제작방법은 크게 2가지로 나뉘는데, 그 중 강화() 화문석으로 대표되는 완초화문석()은 실을 고드레에 감아 자리알을 대면서 엮어나가는 노경소직법()으로 제작되며, 오늘날 사라진 등메는 돗자리처럼 실을 촘촘하게 건 뒤 바늘로 자리알을 꿰어넣으면서 바디로 쳐서 다지는 은경밀직법()으로 제작되었다.

8월 상순에서 9월 사이에 거둔 왕골을 바짝 말린 후 다시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속을 칼로 훑어낸다. 물들인 왕골은 문양에 따라 한 단씩을 한 죽으로 엮어 건조한 곳에 걸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뽑아쓰며, 자리에 올리기 전 왕골이 부서지지 않도록 물에 적신다. 세 사람이 너비 예닐곱 자의 화문석 한 장을 짜는 데 5일 정도 걸린다. 용, 호랑이, 원앙, 봉황, 학, 매화, 모란 등 수복() ·부귀() 등을 상징하는 문양을 사용하였다

200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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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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