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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창녕군 창녕읍의 문화재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2,335 작성일2019.04.26

창녕군 중앙에 위치한 창녕읍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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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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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의 문화재)

 

1.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종 목 국보 제33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시 대 신라

 

빛벌가야(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빛벌가야는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어 하주로 바뀌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와 합쳐져 비사벌군 또는 비자화군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2.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종 목 국보 제3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시장2길 37 (술정리 120)

시 대 통일신라

 

 탑이 세워져 있는 창녕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영역에 속해 있던 곳이며, 진흥왕 때부터 신라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탑은 2단의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인해 충분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세부적인 수법도 정교하여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과 비길만한 기품이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 영역에 속해있던 창녕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볼 때,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3.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종 목 보물 제7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로 55-12 (송현리 105-4)

시 대 통일신라

 

큰 바위에 앞면을 돌출되게 조각한 마애불로 바위 자체를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로 이용하고 있다.

 

민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있으며, 둥근 얼굴에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어깨는 넓게 떡 벌어져 있고, 팔과 가슴은 넓고 풍만하지만 크기에 비해 어딘지 힘이 빠진 듯한 느낌이다. 왼쪽 어깨를 감싸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면서 입은 옷은 얇게 신체에 밀착되었는데, 형식적으로 처리된 계단식의 옷주름 때문에 사실성이 떨어진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으로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대체로 이 석불은 얼굴이나 얇게 밀착된 옷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열의 양식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보이지만, 석굴암 불상보다는 사실성이 줄어들고 힘이 빠져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양식을 보여준다.

 

 

4.창녕 관룡사 약사전

 

종 목 보물 제14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292) 관룡사

시 대 조선시대

 

관룡사는 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로 절의 역사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임진왜란 때 약사전만 남기고 다른 건물들은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한다.

 

약사전은 조선 전기의 건물로 추정하며, 건물 안에는 중생의 병을 고쳐 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 규모는 앞면 1칸·옆면 1칸으로 매우 작은 불당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간결한 형태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이와 비슷한 구성을 가진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 송광사 국사전(국보 제56호)과 좋은 비교가 된다. 옆면 지붕이 크기에 비해 길게 뻗어 나왔는데도 무게와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건물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몇 안되는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로, 작은 규모에도 짜임새가 훌륭하여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5.창녕 관룡사 대웅전


종 목  보물  제21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292) 
시 대 조선시대


관룡사는 통일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경치가 좋기로도 유명하다.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다 갑자기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이하게 이 관룡사 대웅전엔 비로자나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1965년 8월 보수공사 때, 천장 부근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이 건물은 조선 태종 1년(1401)에 짓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9년(1617)에 고쳐 세워, 이듬해에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가운데부분을 한층 높게 한 점이 특이하다. 

 


6.창녕 인양사 조성비


종 목  보물  제22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리 294 
시 대 통일신라


인양사를 비롯하여 이와 관련이 있는 여러 절의 범종, 탑, 금당 등의 조성연대와 쓰인 식량 등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비로, 통일신라 혜공왕 7년(771) 인양사 종을 만든 일로부터 이 비석을 세운 신라 헌덕왕 2년(810)까지 40년간 이루어진 일의 내용이 담겨 있다.

 

비는 직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커다란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 뒷면에는 스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사찰 조성에 관련된 당시의 승려를 기리기 위해 새겨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님은 애띤 얼굴에 자비로운 모습이며, 사람의 몸을 모방한 부드러운 선이 8∼9세기 조각수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문에 새겨진 글씨의 형태는 당시에 유행했던 해서체의 범주를 벗어나 여러 가지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새로운 서체의 전개를 살필 수 있다.

 

당시 일반적인 비의 형태를 벗어나고, 지나치게 큰 지붕돌이 원래의 것인지는 의심스럽지만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찰조성을 기록한 비석으로서 특수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7.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종 목  보물  제29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8  
시 대 통일신라


관룡사 근처의 용선대에 있는 석불좌상으로 산 꼭대기 높은 바위 위에 모셔졌으며 광배(光背)는 없어진 상태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단아한 인상이며 미소를 띤 표정에서는 자비로운 불심이 느껴진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몸에 밀착되었으며,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도식적인 모습이다. 전반적으로 신체의 양감이 줄어들고 약간 위축된 모습이지만 안정감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무릎에 놓인 손은 두툼하지만 섬세하게 조각되었으며, 앉은 자세에서는 다소 둔중함이 느껴진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반구형의 상대석은 연꽃을 새겼고, 8각 중대석은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두었으며, 하대석은 4각의 받침 위에 겹으로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양감이 줄어든 신체 표현, 도식적인 옷주름선, 8각 연꽃무늬 대좌의 형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 9세기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8.창녕 석빙고

 

종 목 보물 제31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시 대 조선시대

 

창녕군 교육청 앞의 개울 건너편에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이 석빙고이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해 두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로,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입구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밑바닥은 경사졌고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구멍을 두었으며, 바닥은 네모나고 평평하다. 내부는 잘 다듬어진 돌을 쌓아 양옆에서 틀어올린 4개의 무지개모양 띠를 중간중간에 두었다. 각 띠사이는 긴 돌을 가로로 걸쳐놓아 천장을 마무리하였다. 또한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어 바깥공기를 드나들게 하였다.

 

이 석빙고는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의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18년(1742)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후서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각 부 양식 또한 조선 후기의 모습이 잘 담겨져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9.창녕 관룡사 석조여래좌상


종 목  보물  제519호  
지 정 일 1970.06.24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292) 
시 대 신라


신라시대 8대 사찰 중 하나였던 관룡사의 약사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이다. 표현기법에 있어 절의 서쪽 계곡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용선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는 큼직하게 표현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이마 위쪽으로 반달 모양이 표현되어 고려시대 불상의 머리 형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내려오고, 목에 있어야 할 3개의 주름은 가슴 윗부분에 표현되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옷주름은 얕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겉옷 안에는 두 가닥의 접힌 옷자락이 역시 도식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른손은 왼발 위에, 왼손은 오른발 위에 놓여 있는 독특한 손모양이며 왼손 위에는 약그릇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상·중·하대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연속된 거북이 등모양으로 연꽃을 표현하고 있는 상대가 특이하다.

 

머리에 표현된 반달 모양과 형식화된 세부표현 기법 등에서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을 고려시대에 이 지방의 장인이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10.창녕 술정리 서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520호 
지 정 일 1970.06.24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술정서탑길 30-10 (술정리 309-1) 
시 대 통일신라


이 탑이 속해 있던 사찰의 이름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식 일반형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이 탑은 아래·위층 기단을 8개의 돌로 구성한 특이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아래층 기단은 바닥돌과 한돌로 붙여서 만든 8개의 돌을 짜 맞추었는데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그 사이로 가운데기둥을 2개씩 새겨 놓았다. 위층 기단도 8개의 돌로 구성되었고 각 면마다 중간에 작은 널돌을 한 장씩 끼웠으며, 모서리기둥을 두지 않고 4면에 2개씩의 안상을 조각하였다. 현재 남쪽면의 중간에 끼워져 있는 돌에는 거친 문짝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후대에 작업한 것으로 짐작된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얇고 평평하며 밑면의 받침은 5단씩이고, 네 귀퉁이가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어 경쾌하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진 노반(머리장식받침) 위로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 있다.

 

이 탑은 원래 술정리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과 함께 있었으나 그 위치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으며 같은 절터의 쌍탑이 아닌 별개의 탑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나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볼 때, 동삼층석탑보다 다소 떨어지며 조성시기도 훨씬 뒤지는 것으로 보인다. 

 

11.창녕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 


종 목  보물  제1730호 
지 정 일 2011.12.23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292) 관룡사 
시 대 조선시대


경상남도 창녕군 관룡사의 목조석가여래삼불상은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로 구성된 삼불상이다. 본존불의 대좌 밑쪽에 묵서를 통해 숭정 2년, 1629년(인조 7) 기사 10월에 불상조성을 시작해서 그 다음해(1630년) 5월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각에는 현진, 승일, 천민, 수영 등 8인이 참석하였는데 그중의 대표격인 현진은 17세기 초에 경남 함양 상령대보살상, 전라남도 구례 천은사의 목조보살상, 충청남도 보은 법주사 소조아미타여래삼불상조성에 참여하였으며 이 상은 비교적 현진의 말년에 제작한 상이다.


본존 석가여래불좌상은 높이가 150cm로 비교적 큰상에 속하며 양쪽의 불상들은 본존보다 크기가 작게 120cm정도의 크기이다. 불상들은 얼굴형이 네모나고 코가 유난히 높고 크며 입과 턱 사이의 간격이 좁은 편이어서 상의 인상이 약간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표정이다. 또한 불상의 옷주름 처리가 단순하고 넓은 면으로 율동감 있게 표현되었으며 결가부좌한 다리부분의 폭이 짧은 편으로 불상의 안정감과 위엄스러움이 약간 쇠퇴되었다.


조각승 현진의 초기불상에서 보이던 예쁘장함은 사라지고 대형의 법주사에서 보이던 엄숙한 표정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천진스러운 모습에서 현진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각승 승일과는 처음으로 같이 제작하였으며 승일이 제작한 전라남도 영광 불갑사석가여래삼불상, 경상남도 하동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조상과 같은 상에서 그 양식적 계승의 특징이 보인다. 17세기 전반의 불교조각으로 불상양식이나 조각승들의 사승관계와 양식의 계보를 잘 알려준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세 불상자체가 보여주는 종교적인 무게감으로도 중요하여 국가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여야 하다고 본다.

 


12.창녕 관룡사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

 

종 목  보물 제1816호

지 정 일  2014.03.11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292)

시 대  조선시대


‘창녕 관룡사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는 보타락가산에서 설법하는 관음보살을 선재동재가 방문하여 법을 청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벽면 전체에 관음보살을 채워 크게 부각시켜 그렸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보채가 이루어졌지만 좌우로 넓게 퍼진 보관과 영락장식, 옅은 수묵으로 그린 기암괴석과 대나무 표현,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의 모습, 유희좌로 단정하게 앉은 보살의 자세 등에서 조선후기 18세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얼굴 표현에 보이는 강한 음영은 보채가 이루어지면서 다소 강렬하게 표현되었는데, 이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 불화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영락으로 장식된 쌍개머리를 하고 상의에 천의를 걸치고, 백색 바지 위에 적색 치마를 입고 합장한 선재동자의 모습, 관음보살의 주처 보타락가산을 표현하면서도 특징적인 물가 표현을 하지 않은 것 등은 다른 후불벽 관음보살도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다. 


13.창녕 화왕산성

 

종 목 사적 제6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2

시 대 삼국시대

 

창녕 읍내의 동쪽 화왕산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처음 쌓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이전으로 보이며, 가야의 산성으로 생각된다. 험준한 북쪽의 바위산을 등지고 남쪽 봉우리 사이의 넓은 부분을 둘러싼 산성으로 둘레가 2,600m이다. 창녕은 낙동강 중류에 넓게 펼쳐진 곡창지대의 중심지이며 서부 경남 지방에 대한 교통·군사상의 요충지로, 이 산성이 당시 매우 중요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현재 동문·서문·연못이 남아있다.

 

조선 세종 때 성으로서의 기능을 잃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중요성이 인식되어, 곽재우가 의병 근거지로 왜병의 진출을 막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한두 차례 수리가 되어 지금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창령을 보호하는 진산으로 기록된 사실과, 영산·현풍을 포용하는 성이라는 점에서 군사적인 의미가 매우 큰 요충지였다.

  

 

14.창녕 목마산성

 

종 목 사적 제6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산5-2

시 대 조선시대

 

창녕 동쪽에 있는 화왕산의 북쪽 봉우리로부터 서쪽으로 뻗은 야산의 골짜기를 에워싼 산성이다.

 

쌓은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신라 진흥왕이 대가야를 완전히 정복하고 이곳에 하주를 두었는데 그 때 이미 이 성이 존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부근에는 가야 고분들이 많이 있어 연대추정의 자료가 되고 있다.

 

임진왜란(1592)과도 관계가 깊은 산성으로, 의병장 곽재우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산성터를 수축하였다. 둘레 1,900m로 산성으로서는 규모가 매우 큰 편이고, 비교적 석축의 상태가 잘 남아있는 편이다. 삼국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산성의 형태이며, 성의 앞면이 계곡 입구를 향하여 있는 것으로 보아 수비를 위한 산성으로 보인다. 산성의 이름이 목마산성이기 때문에 혹시 후대에 말을 기르기 위한 목마장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부근의 화왕산성(사적 제64호)과는 규모에서는 거의 같으나 그 형식이 달라, 같은 지방에 있는 산성의 양식을 비교하기에 좋은 자료이다.

 

 

15.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종 목  사적  제514호 
지 정 일 2011.07.28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리 129 등 209필지 
시 대  가야


경남 창녕군 교동과 송현동 일대에 걸쳐 있는 가야 시대의 고분군이다. 본래 사적 80호의 창녕 교동 고분군과 사적 81호의 창녕 송현동 고분군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인접 지역에 있는 두 고분군를 통합하고 사적 제514호로 재지정하였다.


창녕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한의 12개 나라 중 하나인 불사국으로, 고분군은 창녕군 송현동 구릉에서부터 북쪽 교동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수 기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 송현동 지역의 고분은 본래 80여기의 큰 고분이 분포되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도굴되거나 대부분이 논으로 개간되면서 현재는 16기 만이 남아있다. 무덤의 형태는, 3벽을 할석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로 뚜껑돌을 여러 개 놓은 뒤, 막지 않은 짧은 벽을 통해 시체를 안치하였다. 그런 다음, 나머지 벽을 쌓아 막고 그 위로 흙을 쌓아올려 봉분을 만든 앞트기식 돌방무덤으로 , 내부의 공간은 장방형이 되게 만들었다. 이러한 무덤 형태는 가야시대의 형식으로서, 창녕 일대가 예전에는 가야의 영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송현동에 인접한 교동의 고분군도 왕릉이라고 불리는 대고분을 중심으로 주위에 대소 수십 기의 고분들이 모여 있었으나, 주변이 경작지로 변하고 일본의 약탈적인 도굴행위로 인하여 현재는 8기만이 남아 있다. 이곳 고분은 1918년 5∼8, 21, 31호분이 발굴되어 마차 20대, 화차 2량분의 토공 등 껴묻거리를 캐냈으나 31호분 이외에는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다. 이 때 조사된 교동 31호분은 5.4m ×1.5m ×1.8m의 장방형 앞트기식 돌방으로서 실 중앙에는 경주보문리, 양산부부총 등에서 본 듯한 석관대가 있었는데 돌방의 입구가 남쪽이 아니고 북서쪽에 있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16.창녕 진양하씨 고택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10호 
지 정 일 1968.11.23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시장1길 63 (술정리 29) 
시 대 조선시대


창녕 지방에 있는 옛집으로 안채·사랑채·대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안채만 지정되어 있다. 안채는 현소유자 하병수 씨의 17대 조상이 이 마을에 들어와 세종 7년(1425)에 지은 건물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건륭 25년’<영조 36년(1760)>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이 때에 다시 지었거나 수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남향한 안채는 중부 이남지방에서 일반적인 앞면 4칸·옆면 1칸의 一자형 홑집으로, 왼쪽부터 작은방·대청·큰방·부엌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처마는 이 집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둥의 높이에 가까울 정도로 깊다. 이는 일조량과 강우량을 고려한 남부지방 가옥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살림집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지붕은 억새풀을 엮어서 얹은 초가로 수명이 길 뿐만 아니라 예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대청은 통나무를 윗부분만 편평히 깎아 깔았는데 매우 오래된 것이다. 또한 목재는 못을 쓰지 않고 구멍을 뚫어 연결하였으며, 천장은 흙을 깔지 않은 상태로 구성하여 가볍게 한 점 등이 내부의 특징이다.

 

앞마당에는 작은 텃밭을 가꾸었고 부엌 앞쪽에는 장독대가 있으며, 안채 뒤로는 꽃계단을 꾸며 몇그루의 오래된 나무들과 어울러 숲을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약간의 변형이 있지만 일반가옥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17.보부상 유품(6)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30-6호 
지 정 일 1992.07.28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교리 87-1) 창녕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구한말 갑신년(1884년) 이후 창녕중심으로 설치된 상무사에서 사용하던 전적과 인장 23건 35점으로 당시 경남북일원의 상업 실태연구에 귀중한 자료가치가 있다.


상무사는 우사는 보상, 좌사는 부상으로 구성되었으며 창녕의 보부상은 상무좌사 소속이다.


보부상은 보상(봇짐장수)과 부상(등짐장수)으로 나뉜 보상은 주로 방물, 장신구 등 귀중품을 주로 취급하였고, 부상은 대체로 부피가 큰 물건을 취급하며 등짐을 지어 나르며 장사를 했었다. 창녕지역은 낙동강을 끼고 있어 선박으로 조달해오는 곡류, 해산물, 목재 등을 주로 취급했었다고 한다.

 

 

18.창녕 퇴천 삼층석탑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

지 정 일 1972.02.12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23 
시 대 통일신라


민가 안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 10월에 해체, 보수하여 창녕의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탑이 있던 마을 주변에서 기와조각과 자기조각들이 발견되어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절이름이나 역사를 전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탑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위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기단의 일부가 약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통일신라의 석탑 변천 과정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19.창녕 관룡사 약사전 삼층석탑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

지 정 일 1972.02.12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292) 
시 대 고려시대


관룡사 약사전 앞에 있는 3층 석탑이다. 관룡사는 구룡산 중턱에 자리한 절로, 많은 문화재를 전하고 있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절의 역사에 관한 기록은 전하고 있지 않다.

 

석탑은 바위를 바닥돌 삼아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했고, 가운데기둥 양 옆으로 얇고 넓직하게 안상을 새겼다. 위층 기단 역시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부는 1층 지붕돌이 파손이 심한 편이며,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개씩의 돌로 쌓아 올렸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으로 간략화되었다.

 

규모도 작아졌고, 각 부분의 양식이 간략해진 모습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

 

 

20.청주양씨 세고목판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4호 
지 정 일 1976.12.20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교리 87-1) 창녕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청주 양씨의 공적 및 행적을 기록한 목판으로 제작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는 유어면 광산리 소재 광산서당에 보관되고 있었으나, 현재는 창녕박물관에서 위탁 보관하고 있다. 총 151매가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지역 또는 지방에 있어서 청주 양씨들의 행적을 증명해 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21.창녕 관룡사 사적기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3호 
지 정 일 1979.12.29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292) 
시 대  조선시대


신라시대 때 관룡사를 건립하면서 관룡사의 유래(由來)와 재산(財産) 등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길이 보존케하고자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간용 목판 11개와 서적 1권이 전하고 있으며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22.창녕향교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지 정 일 1983.08.06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향교길 54 (교리 440)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창녕향교를 언제 세웠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효종(재위 1649∼1659) 때 다시 세웠다고 전한다. 1904년에 보수하고 1987년에 동재, 서재를 복원하였다.


건물은 출입문인 외삼문,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서재, 사당인 대성전과 동·서무 등의 건물이 있으며, 앞에 명륜당이 있고 뒤에 대성전이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49) 이후 제사만 지내고 있다.


다른 향교에 비해 많은 전적을 보관하고 있으며, 특히 이 지방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많이 제공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23.창녕객사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1호 
지 정 일 1983.08.12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22 
시 대  조선시대


객사는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건물로 고을 수령이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정당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좌·우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고 1924년 군수 이장희가 시장용 건물로 쓰기 위해 창녕읍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 이곳 만옥정에 옮기고 보수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1층 건물로, 지붕 옆모습이 사람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바닥은 따로 마련하지 않고 기단 위에 곧바로 세웠으며 기둥 사이에는 벽을 쌓지 않아 주위의 경관을 볼 수 있게 했다. 앞면을 제외한 나머지 면들의 기둥 사이에 나무 2개를 가로로 설치해 행사 때 발이나 병풍을 치기 쉽게 했으며, 건물 전체에 쇠못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지어진 건물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건물로 추측된다. 

 

 

24.양산 통도사 창녕포교당 목조석가여래좌상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4호 
지 정 일 2002.08.14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신당2길 4-3 (말흘리 123-2) 
시 대 조선시대


통도사 창녕 포교당 법당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석가여래좌상이다. 이 불상은 원래 창녕 관룡사에서 삼존상으로 조성 봉안했던 것을, 6·25전쟁 후 지금의 창녕 포교당으로 이 불상 1구만을 옮겨왔다고 한다.


이 불상은 반가부좌한 좌상으로서, 곧은 상체에 머리를 약간 숙여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있다. 머리는 육계의 표현이 명확하지 않으며 정상계주와 중간계주를 표현하였고, 나발을 촘촘히 표현하였다. 얼굴은 방형이면서 턱선을 둥글게 처리하였는데 도드라지고 큰 백호, 가늘고 긴 눈, 완만한 콧등, 다문 입술, 양끝에 번진 미소의 표현이 전체적으로 조화로우며 부드러운 인상을 풍긴다. 짧은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를 정면에만 얕게 나타내었다. 옷은 양어깨를 모두 덮은 두꺼운 대의를 입었는데, 오른쪽을 어깨에서 팔꿈치 부위까지만 감아 내린 것이 특징적이다. 대의 내에는 양감 없는 가슴 아래로 수평의 군의가 보이는데, 옷주름선이 꽃잎형태를 띤다. 옷주름선은 어깨와 무릎 부위를 중심으로 간략히 표현되었고, 가부좌하여 드러난 오른발 밑으로 대의자락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특히, 양 무릎 아래의 옷주름선을 꽃잎형태로 표현한 것이 이색적이다.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데, 오른손은 종아리 위에 가지런히 놓고 왼손은 제1지와 제3지를 맞대고서 오른발 위에 얹고 있다.


복장에서 발견된 불상조성기에 의하면, 조선 영조 6년(1730)에 수화사 하천, 부화사 득찰·성찬·종혜 등이 참여하여 만들어졌으며 창녕 관룡사에 봉안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18세기 불상의 돋보이는 모습을 갖추고 있는 작품으로, 조선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에 필요한 학술자료로 평가된다. 

 

 

25.창녕 도성암 석조아미티여래좌상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7호 
지 정 일 2005.10.13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자하곡길 147 (송현동 8) 
시 대 조선시대


본 불상은 창녕 도성암 대웅전의 본존불로 안치되어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상은 1991년 현재의 대웅전을 신축하면서 새로 조성된 것이다.


별조된 대좌는 후대에 제작된 것으로 대좌는 가운데가 뚫려 비워져 있으며, 그 구멍 아래에는 현대 제작의 축원문을 적은 다량의 다라니가 납입되어 있다. 불상의 상태는 부분적으로 도금과 나발의 채색이 조금씩 벗겨졌을 뿐 전체적으로 매우 양호하다.


창녕 도성암 석조여래좌상은 지발과 육계의 경계 없이 완만하게 처리된 머리, 방형의 얼굴, 수평의 승각기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신체의 곡선와 양볼, 손발 등에 부분적으로 양감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석조라는 재질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조각기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26.창녕 신흥사 자치통감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65호

지 정 일  2015.01.15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동고분길 29 (교리 198)

시 대  조선시대


자치통감은 북송의 사마광(1019-1086)이 편찬한 편년체의 중국 통사로, 조선시대 세종의 명으로 윤회, 권제 등이 교정하고 주석을 덧붙이거나 빼서 세종연간에 주조된 갑인자(1434)로 자치통감을 간행한 초주갑인자본(1436) 중 ‘44~47권’ 1책으로 서지학적인 가치가 크다.


27.창녕 신흥사 대혜보각선사서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66호

지 정 일  2015.01.15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동고분길 29 (교리 198)

시 대  조선시대


대혜보각선사서장은 송나라 대혜보각선사(1089-1163)의 편지 모음집이다. 주변 사람들의 질의 편지에 대하여 보각선사가 간화선법에 바탕을 두고 일일이 그 요지를 설명한 답신들이다. 1책의 목판본으로 전체 138장으로 권수제는 ‘대혜보각선사서’, ‘판심제는 ‘서’이며 제첨은 ‘서장으로 확인된다.


본서는 귀중본의 기준이 되는 임진왜란(1592) 이전의 자료로써, 그 정확한 간행기록은 알 수 없지만, 발문의 간기가 1387년 즉 고려 말기에서 늦어도 조선 초기에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28.창녕 관룡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6호

지 정 일  2015.01.15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292) 
시 대  조선시대


창녕 관룡사 명부전에는 주존불인 목조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상과 무독귀왕상이 서 있으며 시왕상, 판관상, 귀왕상, 인왕상 2구 등 모두 17구가 서로 대칭을 이루며 봉안되어 있다.


이 가운데 무독귀왕입상과 제8평등대왕상에서 나온 원문에 의하면 명부전 존상은 모두 효종3년(1652)에 응혜, 계찬, 밀운, 인계, 축한, 해기, 사민 등 9명의 조각승에 의해 조성되어 관룡사에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함께 수습된 후령통과 1638년 밀양 영정사에서 간행된 『묘법연화경 권1』 등은 17세기 중반 불상에 납입된 복장유물로서 제작시기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관룡사 명부전 지장시왕상과 권속은 긴 신체비례에 방형의 얼굴 그리고 간결한 옷주름 등이 특징이다. 이 지장시왕상과 권속일괄은 봉안처와 조성시기, 조각승이 명확하여 17세기 명부전 존상 연구에 좋은 자료 가 된다.

 

29.창녕조씨 득성 설화지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246호 
지 정 일 2003.04.17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2 
시 대 신라


신라 진평왕(신라 제26대 재위 579-631)때 창녕 화왕산 정상의 연못에서 신라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 피부병을 얻어 그 치유를 위해 목욕하다 용의 아들과 사귀게 되어 그 사이에 아들을 얻게 되었으며, 그 아들의 겨드랑이 밑에 조자가 있으므로 성을 조라하고 이름을 계룡이라 하였으며 이분이 창녕조씨의 시조가 되시는 분이다. 이러한 득성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며 창녕조씨득성비와 용지(연못명) 3기가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득성설화는 1760년대(영조대)에 만들어진 <여지도설> 창녕조와 1832년에 작성된 <경상도 읍지> 창녕조 그리고 1895년에 작성된 <영남읍지> 창녕조 등에 기록되어 있다. 용지는 득성설화를 간직한 곳이며, 득성비는 득성지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1897년(광무1년) 당시 경상도 관찰사 조시영이 세웠다.


득성비는 길이 2.5m, 폭 1.46m의 자연석에 <창녕조씨 득성지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30.창녕 사직단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278호
지 정 일  2011.11.10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리 372번지 외 7필지
시 대 조선시대


창녕 사직단에 관한 기록은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하며, 이후 『여지도서』(1757~1765), 『경상도읍지』(1832), 『조선후기지방지도』(1872), 『교남지』(일제강점기) 등의 문헌에 꾸준히 보이고 있다. 그 공통된 사항은 사직단이 현의 서쪽 1리에 있고, 현감 이전수가 처음 세웠다는 점이다. 실제로 현존하는 사직단은 위치나 방향 등에서 기록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2006년 지표조사(경남대박물관)와 2011년 시굴조사(삼강문화재연구원) 결과를 보면 창녕 사직단에는 제단과 계단, 담장, 단과 석축 등의 유구가 남아 있다.


먼저 해발 102m의 작은 구릉 정상부를 깎거나 정리하여 평평한 대지를 만들고, 그 중앙에 제단을 만들었다. 제단은 대지 위에 흙을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구릉을 정지하는 과정에서 중앙부의 높은 곳을 방형으로 깎아서 만든 것이다. 구릉을 방형으로 깎는 과정에서 방형이 흐트러진 부분에는 흙을 쌓거나 할석을 덧대어 보충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제단의 크기는 각 변의 길이 8.5~9m, 최고높이 0.9m이고, 제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시설을 확인되지 않았다. 조성된 대지의 가장자리에는 담장(유)을 쌓았던 기초부가 확인되었고, 남쪽과 동쪽 단 아래에서 제단이 있는 대지로 진입하는 계단 시설이 확인되었다. 전면 발굴을 진행할 경우 4곳 모두에서 계단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 제단이 위치하는 대지 아래쪽 경사면은 수직에 가깝게 단을 지웠는데, 부분적으로는 돌을 쌓아 단을 보강하였다. 이 단은 구릉의 아래쪽에 이르기까지의 전체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현재 육안으로 대략 6~7단 이상이 확인되고 있다.

 

 

31.창녕 관룡사 석장승


종 목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83.08.12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309 
시 대  미상


관룡사로 가는 오솔길 양쪽에 서 있는 한 쌍의 돌장승이다.


사찰 입구에 두는 장승은 절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과 더불어 잡귀의 출입을 막고,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곳의 기운을 불어넣는 등의 기능을 하게 되는데, 이곳의 장승은 사찰의 경계표시·수문장의 역할과 함께 마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수호신이 되고 있다.


왼쪽에 있는 남장승은 높이 220㎝ 둘레 70㎝의 크기로, 상투를 얹은 듯한 둥근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다. 툭 튀어 나온 커다란 눈, 콧구멍이 뚫려있는 주먹코가 특이하며, 콧잔등에는 두 개의 주름을 새겨 놓았고,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송곳니 두개가 뻗어 나와 있다. 오른쪽의 여장승은 높이 250㎝, 둘레 80㎝로, 사다리꼴 모양의 받침돌 위에 구멍을 파서 세웠다. 상투모양이 조각되어 있지만 남장승과는 달리 관모가 없다. 두 장승 모두 몸체에는 아무런 글귀가 없으며, 육중한 몸매로 인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언제 만들어 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된 신앙물로 민간의 소박한 미의식이 잘 표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32.창녕 직교리 당간지주


종 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호 
지 정 일 1983.07.20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직교1길 8 (직교리 64-11) 
시 대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두는데, 이 깃발을 다는 길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남아있는 예가 있으나, 대개는 두 지주만이 남아있다.


이 당간지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술정리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서삼층석탑(보물 제520호)이 있어, 이 일대에 큰 절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절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마주보는 두 기둥의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두 개씩 있는데, 한쪽 기둥의 윗부분에 작은 기둥을 깍아 놓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33.창녕 관룡사 승탑


종 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 
지 정 일 1983.07.20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0-2 
시 대  고려시대


승탑이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둔다. 이 승탑은 관룡사 내에 있는 7기의 승탑 중 하나로, 절 북쪽의 화왕산으로 오르는 길 옆에 자리하고 있다.


2단의 바닥돌 위로, 아래·가운데·위의 세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을 쌓고, 공모양의 탑몸돌을 올린 후 사각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아래에 비해 윗부분의 몸집이 더 커 보인다. 아래 받침돌은 옆면마다 두 개의 공간을 만들어 무늬를 넣고,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둘러 새겼다. 가운데 받침돌 역시 조각을 두었으나 무늬가 뚜렷치 않고, 윗받침돌 밑면에 새긴 연꽃무늬 역시 많이 닳아있는 상태이다. 지붕돌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있었을 듯 하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승탑의 구조와 조각솜씨들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비록 많이 닳아있긴 하나, 창녕군의 대표적인 승탑이라 할 만큼 아름답고 정교한 작품이다.

 

 

34.창녕 석불사 석조보살입상


종 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0호  
지 정 일 1983.07.20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말홀리 산20-3 
시 대  신라말~고려초


원래 요바꼴 언덕 위에 서 있는 불상을 법당에 옮겨 놓았는데, 석불사의 명칭도 이로 인한 것이라 한다. 불신 뒤에 있는 광배에 아무런 무늬도 새기지 않아 소박함이 엿보이는 이 불상은 신라말이나 고려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5.창녕 관룡사 원음각


종 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 
지 정 일 1985.11.14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관룡사길 171 (옥천리 292) 
시 대  조선시대


관룡사는 신라시대에 지었으며 원음각은 조선 인조 12년(1634)에 세웠다. 그 이후 역사는 알 수 없지만 건물에서 발견한 기록을 보면 영조 39년(1763)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원음각은 대성전을 중심축으로 약간 서쪽으로 기울여 세운 것이 특색이다. 절 경내에는 관룡사 대웅전(보물 제212호), 관룡사 약사전(보물 제146호), 관룡사 석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519호),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 등의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다. 

 

 

36.창녕척화비


종 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8호 
지 정 일 1995.05.02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 
시 대 조선시대


척화비란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그러한 의지를 더욱 굳혀 국민들에게 서양세력의 침략을 더욱 강력히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만옥정 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땅위로 드러난 얇은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모습으로, 그 앞면에 대원군의 쇄국의지가 담긴 강한 어투의 비문을 적어 놓았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를 치른 후 같은 해 일제히 세운 것으로, 한일합방이 되면서 대부분 철거되거나 훼손되었는데, 이처럼 몇 기의 비들이 곳곳에 남아 그 역사적인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37.성안의 초상


종 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7호

지 정 일  1997.12.31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교리 87-1) 창녕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의병장이었던 성안의(1561∼1621) 선생의 초상화이다.

성안의는 선조 24년(1591)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녕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 휘하에 들어가 활약했으며 그후 광주목사 등을 지내었다.

초상화는 두 손을 소매안에 모으고, 약간 왼쪽을 향한 채 서 있는 전신상으로, 녹색의 명주 바탕에 채색하여 그렸다. 머리에는 상투가 보이고 길게 늘어진 수염과 가늘게 올라간 눈이 인상적이다. 분홍색 겉옷의 옷자락 밑으로는 팔(八)자 모양으로 벌린 가죽신의 끝부분이 보인다.


38.창녕박물관 소장 남평문씨 고문서


종 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9호 
지 정 일 2009.12.03
소 재 지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창밀로 34 (교리 87-1) 창녕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남평문씨 삼우당 문익점의 후손 문일태(1834-1888? 족보명 수성)의 효행을 현창하는 문제와 관련된 고문서로, 상서 12건, 소지 5건, 입안 1건, 관문 1건, 하첩 1건, 교지 2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19세기 후반의 자료이다.


문서들에 의하면, 문일태의 효행을 현창하기 위해 대구 유림과 동네 주민들이 정사년(1857) 이전부터 30년 이상 지속적으로 정장운동을 벌인 결과, 드디어 신묘년(1891) 조정으로부터 정려가 내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문일태가 사망한 후였다.(사망 연도는 상서와 족보에 각각 다르게 나타남) 그는 을유년(1885) 상서에 의하면, 그는 1883년에 아들이 없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 남평문씨 족보에 의하면, 동생 문정태의 아들 두언이 문일태의 계자로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는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보통 정려는 당사자가 거주하던 곳에 세워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 경우에는 다른 곳에 정려가 세워지고 있다. 문일태가 살던 대구 주민들의 노력에 의해 대구에 정려가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실제 정려는 창녕에 사는 동생 문정태의 호소에 의해 대구에 세워지지 않고 창녕의 고향 마을에 세워지게 된다.


 

2019.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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