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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경북 도시들의 운화재 알려주세요
sue2**** 조회수 2,857 작성일2013.07.17
 경북 도시마다 하나씩 유명한 문화재 알려주세요~~ 제가 좀 급해서... 가능하면 자세하게, 또 사진까지 올려주시면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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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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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의 각 시군에서 한가지씩 올려드립니다.

 

(경상북도의 문화재)

 

증촌리 석불입상


종 목  보물  제11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 258-2 
시 대 통일신라


경상북도 상주의 용화사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광배와 불상이 하나의 돌로 조각된 높이 1.98m의 석불입상으로 마멸이 심해서 세부수법을 자세히 살펴 볼 수는 없다.

 

불상의 머리는 확실히 구별할 수 없지만 민머리처럼 보이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길고 풍만한 모습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지만 단정한 인상이다. 체구는 단정하며, 양 어깨에 걸쳐 있는 옷자락은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 역시 많이 마모되어 가장자리에 새겨진 불꽃무늬만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단정한 체구에 다소 경직되고 현실적인 면이 강해진 특징을 가진 불상으로, 통일신라 후기 석불입상의 경향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금동육각사리함

 

종 목 국보 제208호

지 정 일 1982.12.07

소 재 지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 직지사

시 대 통일신라

 

경상북도 선산군 도리사에 있는 종 모양의 세존사리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함이다.

 

사리함은 높이 17㎝로 기단, 탑몸,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고, 표면에 도금이 잘 남아 있다. 평면 6각형으로 각 면의 기단에 안상을 뚫었다. 2면의 탑몸에는 불자와 금강저를 든 불교의 수호신인 천부상을 선과 점으로 새겼다. 남은 4면에는 사천왕상을 선으로 새겼다. 이들의 배치는 사천왕상 중에서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부상을 배치하여, 다문천이 정면이 되게 한 듯 보인다.

 

지붕 처마와 추녀에는 고리가 있어 장식을 달았던 것처럼 보인다. 꼭대기에는 연꽃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그 중심에 꼭지만 남아 있어 원래 꽃봉오리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8각이 유행하던 시기에 6각형의 사리함이 나타났다는 점이 특이하며, 시대를 달리하는 종 모양 부도에 안치되었던 것도 특이하다 하겠다.

 

경산 병영유적

 

종 목  사적  제218호 
지 정 일 1971.04.28
소 재 지 경북 경산시  압량면 압량리 179 
시 대 삼국시대


김유신이 압량주 군주로 있을 당시 군사 훈련장이었다고 전해오는 유적이다. 압량리, 내리, 선화리, 두룩산 유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유적은 서북쪽의 구릉지대에 높은 대를 쌓은 고대식 광장과 동남쪽에는 무덤처럼 흙을 쌓아올려 높은 대를 만든 토축 고대가 연결되어 있다. 고대식 광장은 거의 원형이며 평탄한 넓은 장소를 광장으로 하고있다. 광장은 병사들이 무술을 익히고 심신을 연마하던 장소로 보이며 토축 고대는 장군의 지휘장소로 보인다.

 

자연구릉상에 흙을 쌓아올려서 마치 성처럼 보이지만 성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작으며, 윗면이 평탄한 광장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훈련장으로 보여진다. 다만, 토성을 훈련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고쳐 쌓았을 가능성도 있다.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종 목 국보 제1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622 은해사 거조암

시 대 조선시대

 

은해사는 통일신라 헌덕왕 1년(809) 혜철국사가 지은 절로 처음에는 해안사라 하였다고 한다. 여러 차례 있었던 화재로 많은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들의 대부분은 근래에 세운 것들이다.

 

거조사는 은해사 보다 먼저 지었지만, 근래에 와서 은해사에 속하는 암자가 되어 거조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돌계단을 오르는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은 영산전은 거조암의 중심 건물이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처음 지었으며, 석가모니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앞면 7칸·옆면 3칸 크기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부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영산전은 고려말·조선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

 

종 목  국보  제264호 
지 정 일 1991.03.15
소 재 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342-1 신광면사무소 
시 대 신라


지금까지 남아있는 신라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89년 마을주민이 밭갈이를 하던 중 발견하였으며, 재산분배를 확인하는 증명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형태는 네모난 자연석으로 밑부분이 넓고 위가 줄어드는 모습이며, 앞면과 뒷면, 그리고 윗면의 3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문은 거의 닳지 않아 눈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다. 글자는 총 231자이고 서체는 해서체로 보이나, 예서체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글씨체면에서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 울진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와 매우 비슷하다.

 

비문은 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소유와 유산상속문제를 결정한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공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각 부의 여러 귀족들이 참여하여 재산권 분쟁을 처리하고 있는데, 이는 왕권을 강화하기 이전에 미약했던 신라왕권의 한계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제천의식을 행하던 당시 풍속제도의 실상이 잘 담겨져 있다.

 

내용중 ‘계미’라는 간지와 ‘지증왕’등의 칭호가 나오고 있어 신라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서 세운 비로서 신라의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신라역사 연구와 금석학 연구에도 중요한 유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종 목  국보  제1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안동하회마을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22호 
지 정 일 1984.01.14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시 대 조선시대


풍산 유씨의 씨족마을로 유운룡·유성룡 형제 대(代)부터 번창하게 된 마을이라고 한다. 낙동강 줄기가 S자 모양으로 동·남·서를 감싸 돌고 있고 독특한 지리적 형상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유씨가 집단 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 안씨 등이 씨족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유의 '하회별신굿탈놀이'로 유명한 이 마을은 크게 남촌과 북촌으로 나눌 수 있으며 유서 깊고 제법 크기를 갖춘 많은 문화재를 잘 보존하고 있다. 특히 별신굿에 쓰이던 탈들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제작 연대를 고려 시대로 추정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가 뿌리 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대표적 가옥이라 할 수 있는 양진당(보물 제306호), 충효당(보물 제414호), 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 남촌택(중요민속자료 제90호),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 겸암정사 (중요민속자료 제89호) 등 많은 건축들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생활상과 발달된 집 구조 등을 연구하는데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더할 수 없이 멋스러운 경치에 민속과 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정신 문화의 연구·보존·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안동하회마을과 경주양동마을은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Historic Villages of Korea : Hahoe and Yangdo ng)’이라는 이름으로 2010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주양동마을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89호

지 정 일 1984.12.24

소 재 지 경북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시 대 조선시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양대문벌로 이어 내려온 동족마을로 경주에서 형산강 줄기를 따라 동북 포항쪽으로 40리 정도 들어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넓은 안강평야에 풍수지리상 재물복이 많은 지형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제법 큰 양반 가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산등성이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큰 집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ㅁ자형이거나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간혹 대문 앞에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혼합배치 양식으로 ㄱ자형이나 一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 따위가 영남지방 가옥이 지니는 특색을 띠고 있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향단(보물 제412호), 관가정(보물 제442호)를 비롯해 많은 옛 건물들이 귀중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산계곡을 따라 펼쳐진 경관, 자연과 어울려 오랜 전통을 간직한 집들, 양반 계층을 대표할 수 있는 자료들과 유교사상, 관습들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

 

경주양동마을은 안동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와 양동(Historic Villages of Korea : Hahoe and Yangdo ng)’이라는 이름으로 2010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봉암사 지증대사 탑비


종 목  국보  제315호 
지 정 일 2010.01.04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번지 
시 대 통일신라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비로, 최치원의 4산비 중 하나이다.

 

거북모양의 비받침은 머리는 용의 형상이고 몸은 거북 모양이며, 등 위에는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갖추고 있다. 비몸 위로 올려진 머릿돌에는 연꽃무늬와 함께 서로 다투듯 얽혀 있는 8마리 용이 장식되어 생동감이 느껴진다.


비문에는 지증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데, 통일신라 후기의 문장가인 최치원이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인 승려 혜강이 글씨를 썼다. 글씨는 왕희지체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꾸밈이 없고 우아하다.

 

이 비는 통일신라 경애왕 원년(924)에 세웠으며, 조각과 비문의 글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종 목 국보 제130호

지 정 일 1968.12.19

소 재 지 경북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505-2

시 대 통일신라


 선산 시내에서 서쪽으로 약 2㎞ 떨어진 죽장사터에 있는 석탑으로, 주변에 석재와 기와조각이 널려 있어 건물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닥돌에서 머리장식에 이르기까지 100여 개가 넘는 석재로 짜여져 있으며, 전탑형의 5층탑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높이가 10m에 이른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리장식을 얹고 있는 거대한 모습이다. 탑신부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불상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는 감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 주위로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지붕돌의 아래·윗면은 전탑(벽돌로 쌓아올린 탑)에서와 같이 계단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양식인 2단의 기단을 형성하고 있지만, 기둥조각을 새기지 않은 탑신의 몸돌이나 지붕돌의 모습은 전탑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안동과 의성지역에서 유행했던 모전석탑(전탑의 양식을 모방한 석탑) 계열로 보여지며, 웅장하고 세련된 통일신라 석탑의 우수한 조형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산애리 오층모전석탑

 

종 목  국보  제187호  
지 정 일 1977.08.22
소 재 지 경북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391-5 
시 대 통일신라


경북 영양군 산해동 강가의 밭 가운데에 서 있는 탑으로, 이 마을을 ‘봉감’이라고 부르기도 하여 ‘봉감탑’이라 이름붙여졌다. 석탑 주변의 논밭에 기와조각과 청자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어, 이 일대가 절터였음을 알수 있다.

 

탑은 벽돌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으로,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흙과 돌을 섞어 낮게 바닥을 깔고, 10여 개의 길고 큰 돌을 짜서 쌓았다. 그 위의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 모두 벽돌 모양의 돌로 쌓았다.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을 두었는데, 감실 양쪽에 둔 2개의 화강암 기둥과 이맛돌의 섬세한 조각이 장식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2층 이상의 몸돌은 독특하게도 중간정도의 높이마다 돌을 돌출되게 내밀어 띠를 이루고 있다. 지붕돌은 전탑의 양식에 따라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으며, 처마의 너비는 좁아져 있다.

 

1단 기단의 모습과 돌을 다듬은 솜씨, 감실의 장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균형과 정연한 축조방식을 갖추고 있으며,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 

 

청도 봉기리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11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청도군 풍각면 봉기리 719-4
시 대 통일신라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석탑이다.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8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위·아래층 기단 모두 각 면 가장자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안쪽에는 가운데기둥 2개씩을 새겼다. 그 위로 뚜껑처럼 덮어놓은 넓적한 윗돌도 8개의 돌로 구성되어 짜임새가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 몸돌의 높이가 지나치게 높은 반면 2층부터는 급격히 짧아져 보기 좋은 비례라고 볼 수 없다. 지붕돌은 넓고 얇은 편이며, 지붕돌 밑면받침은 5단이고 처마끝은 수평으로 되어 있어 경쾌하다. 처마끝에는 작은 구멍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 방울이 달려 있던 옛 모습을 떠올리면 흥미롭다.

 

전반적인 탑의 모습은 민가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몹시 기울어져 있는 상태이다. 이 석탑은 기단의 위·아래층에 모두 2개의 가운데기둥을 조각한 것으로 보아 초기석탑의 형식을 따른 통일신라시대 8세기 중엽의 작품이다.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18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의성군  단촌면 관덕리 889 
시 대 통일신라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석탑으로, 각 부분의 장식이 풍부하다.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하나씩 새기고, 조각에 의해 나누어진 8곳에 비천상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윗층 기단에도 각 4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후, 기둥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4천왕상을, 오른쪽에는 천부상을 배치하였다. 사천왕과 천부상은 모두 부처의 법을 보호하고 지키는 신으로 이들을 이렇게 복합적으로 표현한 것은 보기 드문 모습인데, 이는 통일신라 후기에 가져온 변화인 듯 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1층 몸돌의 4면에보살상을 돌아가며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과 2층은 4단, 3층은 3단으로 줄어 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젖혀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없어지고 이를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만 거꾸로 놓여져 있는데, 이는 후대에 와서 흐트러진 것으로 보인다. 그 위로 얹혀있는 돌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원래 위층 기단 윗면의 네 귀퉁이 마다 암수 2마리씩 돌사자 네 마리가 있었으나 이 중 2마리(보물 제 202호)만 남아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렇듯 동물을 등장시키는 경우는 경주분황사 모전석탑이 가장 앞서고 이후 통일신라 후기까지 그 양식이 줄곧 이어져 내려왔다.

 

탑에 장식적인 화려함을 더하게 되는 본격적인 시기인 9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웅장한 기상은 덜하나, 많은 조각을 새겨 놓아 화려하고 아름답다. 

 

울진 봉평 신라비

 

종 목  국보  제242호 
지 정 일 1988.11.04
소 재 지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 
시 대 신라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으로, 1988년 봉평리 논 객토작업으로 2-3개월 방치되어 있던 것을 마을 주민(권대선)이 발견하고 신고하였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에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나,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비는 자연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깝다. 비문은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는데, 글자수는 400자 정도이다.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의 영향을 받은 해서체이나, 예서체의 모습도 보인다.

 

내용은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체를 사용하여 파악이 어렵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만하다. 기본 줄거리는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들어감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이 일어나자, 신라에서는 육부 회의를 열고 대인을 보내어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신라가 동북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로,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사회 전반에 걸치는 여러 면들을 새롭게 검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또한 법흥왕 때의 율령반포와 육부제의 실시, 왕권의 실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가산산성


종 목  사적  제216호 
지 정 일 1971.03.26
소 재 지 경북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산98-1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서 세워진 성이다.


성은 내성·중성·외성을 각각 다른 시기에 쌓았고, 성 안에는 별장을 두어 항상 수호케 하였다.


하양, 신령, 의흥, 의성, 군위의 군영과 군량이 이 성에 속하며 칠곡도호부도 이 산성내에 있었다. 내성은 인조 18년(1640)에 관찰사 이명웅의 건의로 쌓았으며, 칠곡도호부가 이 안에 있었다. 중성은 영조 17년(1741)에 관찰사 정익하가 왕명을 받아 쌓은 것으로 방어를 위한 군사적 목적이 크다. 중요시설은 내성 안에 있으며, 중성에는 4개 고을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를 보관해서 유사시에 사용하게 하였다. 외성은 숙종 26년(1700)에 왕명에 의해서 쌓았다.


성은 외성 남문으로 들어가게 되고, 성의 주변에는 송림사를 비롯한 신라때 절터가 많이 남아있다. 1960년의 집중 폭우로 문 윗쪽의 무지개처럼 굽은 홍예문이 파손되고 성벽의 일부가 없어졌으나 그 밖에는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가산산성은 험한 자연지세를 이용한 조선 후기의 축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산성이다.

 

울릉 나리동 너와집 및 투막집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56호 
지 정 일 2007.12.31
소 재 지 경북 울릉군  북면 나리 111-1번지 외 
시 대 일제강점기


이 집은 울릉도 개척당시(1883년)에 있던 울릉도 재래의 집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너와집으로 1940년대에 건축한 것이다. 이집은 5칸 일자집으로 지붕은 너와로 이었다. 큰방, 중간방, 갓방은 전부 귀틀구조로 되어있는데 큰방과 중간방은 정지에서 내굴로 되었고 갓방은 집 외부에 돌린 우데기를 돌출시켜 별도의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집 주위에는 전부 우데기를 돌리고 앞부분에는 폭을 넓게 잡은 죽담이 있다.

 

또한, 투막집은 1945년대에 건립한 것으로서 본래 3칸 집이었으나, 한칸을 달아내어 현재는 4칸으로 되어있다. 지붕은 새로 이었으며 큰방과 가운데 방의 벽은 귀틀로 되어있고 정지의 부뚜막은 아궁이에서 내굴로 되어있는데 정지 바닥은 죽담보다 낮게 하여 계단을 한단 놓아 오르내리게 하였다. 정지에는 별도의 벽을 두지 않고 옥수수대로 세워 돌린 우데기로 가렸다. 방 주위의 죽담은 앞쪽만 더 넓어져 활동하기 편하게 되어있다.

 

영덕 충효당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68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465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성종 때에 처음 세운 집으로 이애 선생이 짓고, 이황 선생의 성리학을계승·발전시킨 이현일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뒷쪽으로 옮긴 것이라고 하며 충효당(사랑채)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건물이다.

 

안채, 사랑채, 마구간, 사당, 정자 등이 넓은 대지 위에 남향으로 자리를 잡았고, 후원에도 상당히 넓은 대밭이 있는 대규모집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어울려서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의 사랑채가 마주 놓여 있는데 사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앞쪽 들판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 왼쪽에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가 있고 안채 뒷쪽에 사당이 있다. 사당은 담장으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높직한 기단 위에 지금도 후학의 교육장으로 이용되는 충효당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이 고루 갖추어 있는 조선시대 양반집으로 처음 지은 것은 조선 초기로 추측되나 이 집은 후대에 옮긴 건물이다. 그러나 안채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시기가 조선 중기로 짐작되는 건물로, 다소 변형된 듯 보이지만 조선 시대 주택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용문사 대장전 


종 목  보물  제14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391 용문사 
시 대 조선시대


용문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두운선사가 세운 절이다.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대장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지은 시기는 알 수 없고 전하는 기록에 조선 현종 11년(1670)에 고쳤다고 하며, 그 후에도 여러차례 수리되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의 모서리 부분에는 용머리, 연꽃 봉오리와 같은 조각을 해 놓았고, 안쪽 부분에는 더욱 화려한 장식을 하여 당시의 정교한 조각과 장식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삼존불 뒤의 나무로 조각한 벽체는 건물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으며, 불단 양쪽 옆으로 불경을 보관하는 회전식 윤장대를 만들어 놓았다.

 

작은 규모의 건물로 뛰어난 조각 솜씨와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종 목  국보  제10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산15 
시 대 통일신라


경상북도 군위군 팔공산 절벽의 자연동굴에 만들어진 통일신라 초기의 석굴사원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경주 석굴암 석굴(국보 제24호)보다 연대가 앞선다. 이 석굴에는 700년경에 만들어진 삼존석불이 모셔져 있는데, 본존불은 2.18m, 왼쪽 보살상은 1.8m, 오른쪽 보살상은 1.92m이다.

 

가운데 본존불은 사각형의 대좌 위에 양 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발바닥이 위로 향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있으며, 얼굴은 몸에 비하여 큰 편으로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던 친근한 미소가 사라지고 위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옷은 얇게 걸치고 있어서 당당한 신체의 굴곡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며, 옷자락은 넓은 무릎을 거쳐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인데, 우리나라 불상에서 나타나는 최초의 예로써 의의가 크다.

 

같은 양식을 보여주는 좌우의 보살상은 각각의 머리에 작은 불상과 정병이 새겨진 관을 쓰고 있다. 가슴 앞에는 목걸이를 걸치고 팔에는 팔찌를 끼고 있으며, 옷은 길게 U자형의 주름을 그리면서 내려오고 있다. 이들 보살상은 날씬한 몸매에 어울리는 신체 비례와 목·허리·다리 3부분을 비틀고 있는 모습에서 새롭게 수용된 중국 당나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삼국시대 조각이 통일신라시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높은 문화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자연 암벽을 뚫고 그 속에 불상을 배치한 본격적인 석굴사원이라는 점에서 불교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종 목 국보 제201호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 경북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657-1

시 대 신라

 

경상북도 봉화군 북지리에는 신라시대의 ‘한절’이라는 대사찰이 있었고,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500여 명의 승려들이 수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자연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거대한 방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다.

 

넓고 큼직한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박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다소 움츠린 듯하지만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에서 U자형의 굵직한 주름을 이루면서 양 팔을 거쳐 길게 늘어져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까지 덮고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에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큼직하게 표현되어 불상의 장중한 멋을 더해주고 있다.

 

불상 뒤편의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였으며, 곳곳에 작은 부처를 표현하였고, 머리광배의 중심에는 정교한 연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불상을 만든 시기는 얼굴이나 신체에 표현된 부드러운 모습 등을 고려할 때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영주가흥리마애삼존불상(보물 제221호)과 함께 이 시기 영주·봉화 일대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신라 불교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장기리 암각화


종 목  보물  제605호 
지 정 일 1976.08.06
소 재 지 경북 고령군  고령읍 장기리 813 
시 대 선사시대


알터 마을 입구에 있는 높이 3m, 너비 6m의 암벽에 새겨진 바위그림이다. 바위그림은 암각화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이나 바램을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것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바위그림은 동심원, 십자형, 가면모양 등이 있는데, 동심원은 직경 18∼20㎝의 삼중원으로 총 4개가 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신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십자형은 가로 15㎝, 세로 12㎝의 불분명한 사각형안에 그려져 있어 전(田)자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부족사회의 생활권을 표현한 듯하다. 가면모양은 가로 22∼30㎝, 세로 20∼40㎝로 머리카락과 수염같은 털이 묘사되어 있고, 그 안에 이목구비를 파서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의미로 새긴 듯하다. 상징과 기호를 이용해 제단을 만들고 농경을 위해 태양신에게 소원을 빈 농경사회 신앙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전사 보광전


종 목  보물  제1570호 
지 정 일 2008.07.28
소 재 지 경북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 200 
시 대 조선시대


대전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보광전은1976년 중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여 그 건축년대(1672년, 강희 11년 임자 5월초 119일, 현종 13년)가 밝혀져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조선 현종 13년(1672)에 중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송 대전사 보광전의 건물 구조는 화강석 기단위에 화강석 초석을 놓고 약간 흘림이 있는 원주를 세워 구성된 정면3칸, 측면3칸의 건물이다. 지붕은 전면에만 부연을 단 겹처마의 맞배지붕이고, 구조는 2고주 5량가구이며, 다포계 양식으로 외 2출목 3제공, 내 2출목 3제공을 이루는데 전면은 앙설형이고 배면은 교두형으로 되어 있어 조선 중기 이후 목조건축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청송 대전사 보광전은 건축연대가 명확한 조선중기 다포양식의 목조건물로서 공포양식 등에 있어서 중기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내부단청과 벽화는 회화성이 돋보이는 빼어난 작품으로 건축당시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조선중기 불교미술의 중요한 자료로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성주 금봉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종 목 보물 제1121호

지 정 일 1992.01.15

소 재 지 경북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 산11-2

시 대  신라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의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는 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석조불상이다.

 

머리 위에는 넓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으며 얼굴은 둥글고 단정한 인상이다.

 

단아한 체구에 양 어깨를 감싼 옷은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높직한 무릎으로 인하여 신체는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쥔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였는데, 머리광배에는 연꽃무늬를 몸광배에는 불꽃무늬와 작은 부처를 세밀하게 조각하였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 원당형대좌로 사자와 구름무늬를 새겨 넣었다.

 

중대의 북 모양이나 상대·하대에 새겨진 연꽃무늬는 표현기법에서 대구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상(보물 제244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보인다.

201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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