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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러시아에 독립 한국을 세우려고 했나요?
5m**** 조회수 1,085 작성일2003.12.30
김진명씨의 소설 가즈오의 나라를 읽고 있는데 이 분의 소설에서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바탕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도 그랬고요..
지금 책을 읽다보니 일제강점기때 러시아에 사는 한국인들이 우리나라가 해방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러시아에 따로 독립 한국을 만들려고 했다고 하는데요. 뭐 완전한 국가는 아니고 한국인 자치구역같은거요...
정말로 이런일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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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오늘을기억할까
물신
한국사 52위, 예금, 적금, 강남구 14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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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권업회(러시아, 연해주의 자치기관 지위 부여)
- 권업회는 1911년 12월19일 이상설, 이종호, 이동휘, 최재형, 최봉준, 이 범윤, 유인석, 홍범도, 윤해, 정재관 등 당시 신한촌 한인사회에서 가장 신뢰를 받고 영향력이 있는 애국인사들의 여러 계열의 단합된 노력에 의하 여 결성되었으며 임원에는 회장에 이상설, 부회장에 이종호가 선출되었다. 여기서 여러 계열의 지도자들의 단합이라 함은 상당한 의의가 있다. 왜냐하 면 많은 애국지사들이 신한촌을 중심으로 운집해 있었으나 그들의 주장과 입장이 각기 달라 통일된 단일의견을 도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 니었기 때문이었다.
- 권업회는 그 명칭이 말해주듯 극동 노령 한인들에게 실업을 권장하고 근검절약정신을 기르며 교육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이 단체가 명칭을 권업이 라고 한 것은 일본의 방해를 피하고 러시아 당국의 허가를 얻어 합법적으 로 활동하기 위한 위장술이었고 실제는 독립운동이 주목적이었다. 따라서 권업회는 급진적인 의병항전을 하거나 울분과 감정에 의한 극렬적인 항일시위 를 하기보다는 민족의 힘을 길러 장기적인 전략으로 독립전쟁을 해야한다는 데 역점을 두었다.
- 그리고 그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실업부, 교육부, 선전부, 검사부 등의 부서를 두고 교육진흥, 신문간행, 한인 자치활동, 토지조사, 귀화문제 등의 업무를 추진하였다. 러시아 총독은 한인들의 이와 같은 활동이 극동 노령지역에 있어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도움을 주 는 요소로 간주하고 권업회 활동을 적극 권장하였고 한인들은 이에 고무되 어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극동 노령당국은 권업회로 하여금 "연해주 한인의 자치기관의 지위를 부여"하고 러시아당국의 행정 업무를 대행케 하였다.
- 이처럼 권업회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역동적인 활동을 함으로써 연해주 한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러 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으로 제휴함으로써 권업회를 강력히 탄압하여 그 활동 이 위축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영사관에서는 이동휘, 이상설, 이종 호, 유동열, 이강 등 중요인사들을 연해주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하고 러시 아 당국은 권업회를 해체시킴으로써 1914년 8월 단명의 비운을 맞았다. 한편 권업회와 신한촌민회에서는 이에 맞서 신한촌 내 일본인의 상점을 철수케 하고 일본인의 출입을 금지했으며 만약 출입하는 일본인이 발견되 면 한인 청년들이 사정없이 위해를 가했다. 이러한 한인의 강렬한 의기의 소식이 만주로 미주로 본국으로 전해지면서 온 민족의 독립의지는 더욱 결 연해졌다.
- 이러한 운동이 진척되어가던 중 1919년 3월1일 본국에서 독립선언과 만 세시위가 일어났으며 이 소식은 즉각 러시아 한인사회에 전달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1919년 3월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를 개최하고 독립선 언 발표와 경축시가행진을 하였다. 이어 3월21일에는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 의 각료 명단을 발표하고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임시정부 각료명단: 대통령-손병희, 부통령-박영효, 국무총리-이승만, 군무 (및 선전)총장-이동휘, 탁지총장-윤현진, 내무총장-안창호, 산업총장-남형우, 참모총장-유동열, 강화대사-김규식 결의문: 1.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한민족의 자주독립 2.일본통치철폐 3.파 리강화회의에 독립정부 승인 요구와 국제연맹 참가 4.독립운동의 실정과 정 부수립의 사실을 각국에 통고 5.이상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할 때 대일혈전 포고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체제를 참작하여 국민의회가 입법, 행정 , 사법을 모두 관장하도록 하고 그 안의 행정부를 임시정부로 설정했다.

★ 전로한족대표자회(全露韓族代表者會) - 한인 자치 승인 요구
- 1918년 6월 13일부터 24일에 걸쳐 니콜리스크에서 제2회 전로한족대표자회(全露韓族代表者會)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그해 1월 아령한인회(俄領韓人會)와의 통합회의에서 5개월 이내에 헌장회의를 개최하기로 한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노령의 각 지방 단체 대표와 학교 대표 등 129명이 참석한 이 대회는 한인사회당측과 다수파 원호인들의 입장 차이가 다시 노정되었는데, 특히 시세문제와 토지문제에서 첨예한 입장 차이가 드러나 결국 한인사회당은 대회장을 떠나고 6월 22일, 23일에 선출된 전로한족중앙총회의 주요 간부는 원호인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대회를 탈퇴한 한인사회당(韓人社會當)은 기관지 『자유종』제2호를 통해 대회의 결정을 격렬히 비난하였다.37)
- 니콜리스크 제2차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적백내전(赤白內戰)에 대해 중립을 선포하고 극동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에 한인들의 자치를 승인해 주도록 요청하면서 자치의 중심지를 니콜리스크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은 거부되었다.

http://www.yeongnam.co.kr/series/east/east-20010426.html
http://www1.suwon.ac.kr/~hwpark/rusia/rusiare1.htm
http://www.independence.or.kr/NEW/media_data/thesis/1997/199705.html

2003.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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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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