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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프랑스에 대해서...학교 숙제 입니다
haie**** 조회수 6,243 작성일2006.11.02

저는 6학년 인데요,,,프랑스에 대해서 조사를 해야 하거든요...도와 주세요!

1.프랑스의 수도와 인구에 대해서

2.프랑스의 음식과 언어 그리고 문화 유산

3.프랑스의 국기와 우리나라와의 문화교류

꼭~~!! 정확한 정보만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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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님..6학년 2학기 사회책 88쪽에 보시면 아주 자세히 나왔습니다 ^^..

 

그걸로 참고하시면 좋을실것 갖습니다..^^^^^*

 

 

그럼 열공하세요 ~

200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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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
--> 

<!-- 프랑스-->

France

공식 이름은 프랑스 공화국(French Republic/République Française).

서유럽 최대의 국가.

국기
국가
지도
수도는 파리이다. 북동쪽으로 룩셈부르크·벨기에, 북서쪽으로 영국 해협, 서쪽으로 대서양과 비스케이 만, 남쪽으로 스페인·안도라·지중해, 동쪽으로 이탈리아·스위스·독일과 맞닿아 있고,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을 포함한다. 면적 543,965㎢, 인구 59,773,000(2003).

자연환경

지형

프랑스의 국토는 3대 지질지역, 즉 헤르시니아 산괴들(아르덴 고원, 보주 산맥, 마시프상트랄, 아르모리캥 대산괴)을 이루는 고기 산맥의 잔구지역, 북부와 서부의 평야지역(파리 분지, 루아르 평야, 아키텐 분지, 알자스 평야), 남부와 남동부의 보다 높은 신기 습곡산맥지역(피레네·쥐라·알프스 산맥들과 인접한 손 평야와 론 평야 포함)으로 대별될 수 있다. 헤르시니아 산괴들 가운데 가장 큰 마시프상트랄은 면적이 약 9만 1,000㎢이고, 퓌드상시(1,886m)에서 최고 높이를 이룬다. 저지들은 해발 300m 이하이며 전국토의 2/3를 차지한다. 마시프상트랄의 북쪽과 북서쪽에 자리잡은 파리 분지에는 센 강과 그 지류들이 흐른다. 450km 이상에 걸쳐 뻗어 있는 피레네 산맥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자연 국경을 이룬다. 스위스까지 이어지는 쥐라 산맥은 습곡된 석회암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고봉은 프랑스에 있는 네주 산(해발 1,723m)이다. 프랑스령 알프스는 제3~4기까지 계속된 일련의 습곡작용으로 형성되었으며, 최고봉은 몽블랑으로 해발 4,807m에 달한다. 이 신기 산맥들 사이에는 남쪽으로 론 강 삼각주까지 뻗은 손 평야와 론 평야가 있다. 삼각주의 서쪽에는 랑그도크 해안평야가 단조롭게 펼쳐져 있고, 동쪽에는 프랑스령 리비에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휴양지대인 코트다쥐르 지역이 있다. 프랑스의 하계(河系)는 북동부에 있는 보주 대산괴의 남쪽 부분으로부터 남부에 있는 마시프상트랄까지 뻗어 있는 주분수계(主分水界)에 의해 결정된다. 이 분수계에서 센 강과 루아르 강을 포함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의 대부분이 발원한다.

기후

프랑스령 리비에라에 있는 니스의 자갈 해변
프랑스는 대체로 대서양·지중해·대륙의 영향이 결합된 온대기후를 보인다. 겨울은 산지와 북동부의 알자스 지방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온화하다. 북서부는 기온의 월교차가 적어 브레스트에서는 1월 평균기온이 6℃, 7월 평균기온이 16℃이다. 이곳은 습도가 매우 높지만 연강우량 900㎜로 적당한 편이며, 세찬 바람이 빈번하게 부는 것이 특징이다. 파리 분지는 해양성과 대륙성의 혼합기후를 나타낸다. 파리의 연평균기온은 11℃이고, 연평균강우량은 약 585㎜이다. 남동부의 지중해성 기후는 온난한 겨울, 강우량이 많은 봄·가을, 건조한 여름, 미스트랄이라고 하는 맹렬한 북풍을 특징으로 한다. 지중해 연안에 있는 니스는 1월 평균기온이 8℃이고, 불과 2, 3일밖에 서리가 내리지 않는다. 연평균강우량은 국토의 대부분에서 760~1,000㎜에 이르며, 산지에서는 1,500㎜ 이상, 때로는 2,000㎜에 이른다.

동·식물

식생은 생물지리학상 전북구(全北區)와 지중해 지역으로 나뉜다. 프랑스의 대부분은 전북구 식물지리구에 속하며, 이는 다시 3개 지역으로 나뉜다. 파리 분지 대부분을 포함하는 서프랑스에서는 참나무·밤나무·소나무·자작나무가 수목의 주류를 이룬다. 전북구 제2의 식물구인 동프랑스의 식생은 중유럽형에 가까워 노르웨이단풍나무·자작나무·유럽졸참나무·잎갈나무 등이 흔하다. 3번째로 고산지대의 경우 고도가 낮은 곳은 자작나무 숲으로 덮여 있고, 높이 올라갈수록 젓나무와 산소나무(mountain pine)가 많아진다. 수목한계선 위로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나무와 목초지가 있다. 한편 또다른 식물구는 지중해성기후대 안에 있는데, 이곳에서는 여름에 가뭄으로 인해 구근식물은 죽고, 건생식물이 잘 자란다 . 흔히 볼 수 있는 건생식물은 가시나무류, 코르크참나무, 히속(─屬)의 각종 식물과 물푸레나무류인 시스투스 라벤더 등이다.

프랑스에 서식하는 비교적 큰 포유동물로는 붉은사슴·노루·멧돼지가 있다. 알프스 산맥의 고지에는 영양류인 샤무아와 야생염소가 서식한다. 삼림과 들에는 토끼를 비롯한 각종 설치류가 있다. 육식동물로는 여우, 사향고양이류, 희귀종의 유럽살쾡이가 있다. 외래 조류종 분포지의 북쪽 경계선에 해당하는 남프랑스에서는 홍학류·이집트민목독수리·장다리물떼새·벌잡이새류·파랑새류를 볼 수 있다.

정착유형

농촌 지역은 전통적으로 강우량이 많고 경작하기 어려운 토양의 토지를 산울타리로 구획한 보카주와, 평평하고 배수가 잘 되는 평야 및 고원의 구획되지 않은 들판지역인 샹파뉴로 구분된다. 그밖에 지중해 지역은 산울타리 없이 블록 모양으로 구획된 땅뙈기들을 특징으로 하며, 산간지역에서는 양지바른 계곡 비탈면의 경작지인 아드레와 숲으로 덮힌 냉습한 비탈의 경작지인 위바크로 구분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부는 농업을 대규모화·기계화하기 위해 흩어져 있는 작은 농장들을 보다 큰 구역으로 통합하는 계획을 실행했고, 동시에 수많은 농민들이 농사를 포기함으로써 촌락의 성격이 바뀌었다. 보다 인기 있는 지역에서는 버려진 농가들이 별장으로 팔렸고, 또다른 곳은 농민들이 도시 통근자가 되어 창고와 가축우리를 차고와 같은 용도로 개조했다. 정부는 도시 발전에 대해서는 양면 전략을 취해 파리를 유럽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릴·보르도·마르세유와 같은 도시를 지역 발전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 파리로부터 루아르 강 계곡 등지로 공업 분산화가 이루어지고, 남프랑스 해안지역으로 은퇴자가 이주하면서 중소 규모 마을들의 무계획적인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국민

민족구성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과거 여러 시기에 걸쳐 중동과 아프리카로부터 지중해를 건너오거나 중앙 아시아와 북유럽으로부터 유럽을 가로질러 이주해와 영구적으로 정착한 다양한 이민들의 후손이다. 이러한 이주 외에도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전쟁과 장기간의 이민족 점령을 겪었으며, 특히 20세기에는 다른 대륙에서 유럽으로 몰려드는 이민들의 주요 목적지가 됨으로써 더욱 다양한 인종들이 모이게 되었다.

언어

국어인 프랑스어는 전국 어디에서나 쓰고 가르친다. 농촌지역에서는 여러 가지 방언이 널리 쓰인다. 동부와 북부에서는 독일어와 관련 있는 알자스어와 플랑드르어(네덜란드어)가 쓰이며, 남부에서는 라틴어의 영향을 받은 프로방스어·코르시카어·카탈루냐어가 쓰인다. 영국 서부의 일부 지역(특히 웨일스)에서 쓰이는 언어와 유사한 켈트계 언어인 브르타뉴어와 바스크어는 고유한 언어이다.

종교

전체국민의 3/4이 로마 가톨릭교도이지만 규칙적으로 성당에 다니는 신도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중에서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예배에 참석한다. 100만 명을 상회하는 개신교도는 여러 종파로 갈라져 있다. 유대교도도 50만 명이 넘으며 그들의 절반이 파리 대도시권에 거주한다. 북아프리카로부터 영구정착이나 돈벌이를 위해 건너오는 사람들 때문에 이슬람교도도 상당수에 달한다. 그러나 노동자층과 청소년층에서는 특히 무신론자가 상당히 많다.

인구동향

1801년까지만 해도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로서 유럽 대륙 전체인구의 1/6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인구증가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낮아졌으며, 1911년에 4,000만 명이던 인구가 1950년대까지도 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전쟁, 제1제국 전쟁,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 제1차 세계대전(1914~18), 제2차 세계대전(1939~45) 등 거듭된 전쟁으로 인구성장이 억제되었다. 1938년부터 프랑스는 인구감소를 막기 위한 조처를 취했다.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에게 수당과 그밖의 물질적인 혜택을 주기 위한 계획들의 입법화가 추진되었다. 그결과 출생률이 증가하기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까지 그 추세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40년대말부터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한 출생률은 1974년경부터 현저하게 감소하여 1980년대까지 1/3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인구의 장기적인 현상유지가 어려운 선에 이르렀다. 출생률의 감소에는 많은 요인이 작용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피임약의 발명이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소가족을 선호해 아이갖기를 기피한 전후 프랑스인의 태도 변화였다.

다른 인접국들과 달리 프랑스는 국제 이민의 주요 공급국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7세기에는 종교적인 박해 때문에 40만 명이 넘는 위그노 난민들이 프랑스를 탈출하여 주로 프로이센·영국·네덜란드·아메리카로 피난 갔다. 또한 17세기에 이민도 시작되었는데 비교적 소수였던 이민이 처음에는 북아메리카의 캐나다 동부(퀘벡)와 루이지애나에 정착했으며, 후에는 프랑스 식민지의 일부가 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도 정착했다. 인구의 국외 이동은 비교적 적었던 반면 외국인의 국내 이주는 19세기 중반부터 상당히 활발했다.

1850~1914년에 약 430만 명의 외국인이 프랑스에 들어왔으며,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는 총인구의 6%에 달하는 300만 명 가량의 이민이 들어왔다. 프랑스는 20세기초까지도 유럽에서 이민들에게 가장 개방적인 나라였으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인을 배척하는 경향이 높아졌다.

19세기초 이래 낮은 출생률로 인해 인구의 노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출생률이 증가하고 외국에서 젊은 근로자층 이민들이 들어와 인구의 전반적인 노령화가 어느 정도 억제되었지만, 1970년대부터의 출생률 감소는 또다시 노령화를 가속시켰다. 프랑스의 인구구조에서 또다른 특징은 전 연령층에서 남자보다 여자가 많고 노년층에서 특히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남녀 분포의 불균형은 전쟁과 선천적인 평균 수명의 차이 때문이다. 프랑스의 여성은 출생시 평균 수명이 세계 최고 수준인 반면 남성의 평균수명은 훨씬 낮다.

인구밀도가 특히 낮은 곳으로는 마시프상트랄, 남부 알프스, 피레네 산맥, 코르시카와 같은 산악지역을 꼽을 수 있으며, 저지 농촌지대 가운데도 파리 분지의 동부와 남부 및 아키텐의 대부분 지역에는 주민이 적다 (→ 색인 : 인구분포). 인구가 가장 적은 4대지역인 코르시카·리무쟁·프랑슈콩테·오베르뉴의 면적은 전국토의 12%에 해당하지만 인구는 총인구의 6%에 불과하다. 반면 가장 인구가 많은 4대지역인 일드프랑스(파리 지방)·론알프·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노르파드칼레에는 총인구의 40% 이상이 몰려있는데 전국토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18% 정도이다. 18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1세기 남짓한 기간에 농촌인구는 1/3 이상이 감소했다. 1980년대에는 인구의 3/4이 도시민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농촌 인구의 감소를 촉진한 것은 농업의 현대화였다. 영농기계화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남으로써 농촌인구가 노령화되고 그만큼 출산율도 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30년 동안 도시인구는 최소한 1,600만 명이 증가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도시 성장에 따른 교외주택화는 미국이나 영국보다 늦은 시기인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났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파리의 외곽 교외 인구가 일드프랑스 지역 총인구의 39%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감소하는 내곽 교외의 인구와 맞먹게 되었다.

경제

프랑스는 전후부터 1970년대 중엽까지 상당 기간에 걸쳐 계속된 유례 없는 성장으로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 되었다. 이 기간에 경제구조는 농공업 대신 3차산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경제성장의 중심지도 북부와 북동부 지방에서 남부지방으로 바뀌고, 서부지방도 어느 정도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47년부터는 일련의 국가경제개발계획이 프랑스 경제를 이끌게 되었다. 4, 5년을 단위로 하는 이 계획들은 성장 목표와 개발 전략을 부과하기보다는 지시하는 방향으로 수행되었다. 전환기인 1944~46년에 파리국립은행(BNP)과 크레디리오네은행 등 몇 개의 대은행, 르노와 같은 일부 대기업, 가스와 전기를 공급하는 공익사업체들이 잇달아 국유화됨으로써 공공부문이 프랑스 경제에서 최초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982년에는 사회당 정부가 국유화 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한 결과 확대된 공공부문이 산업 근로자의 1/5 이상을 고용하게 되고, 신용기관의 80% 이상이 국립금융기관들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뒤이어 수립된 자크 시라크의 보수당 정부(1986~88)는 국영기업을 대폭 민영화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여 거의 100만 명의 고용처를 민간부문으로 돌려놓았다. 1960년대부터 노동직에서 사무직으로의 전업률이 높아졌으며, 이러한 변화와 함께 여성의 취업률이 현저하게 높아져 현재는 전체 일자리의 2/5를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시간제 근로와 계약제 취업을 하는 경향도 상당히 높아졌다. 이러한 경제활동의 변동은 프랑스에서 노동조합의 지위를 크게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어 현재는 노동조합원수가 프랑스 전체근로자의 1/5에도 훨씬 못 미친다.

자원

약 57%가 가경지 또는 목초지이고 약 27%가 삼림인 프랑스의 광대한 국토는 농업과 임업에 매우 유리하다. 다양한 지형과 토양, 대조적인 기후 역시 농업에 유리하게 작용하며, 강수량도 풍부한 편이다. 대서양과 지중해에 접해 있어 수산물이 풍부하다. 그러나 에너지 자원은 상당히 빈약한 편이다. 석탄 매장량은 3억 8,100만t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생산량은 얼마 안 된다. 프랑스의 석탄은 채굴하기가 어렵고 품질도 나쁜 편이다. 따라서 오래 전부터 수입 석탄으로 국산 석탄의 부족량을 메워왔으며, 1980년대초부터는 수입량이 국내 생산량과 맞먹거나 능가하게 되었다. 천연가스·석유·우라늄 등 그밖의 에너지 자원 역시 공급부족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나 고지대로부터 흘러내리는 강들은 유속이 빠르기 때문에 수력발전에 매우 적절하다.

과거에는 철광과 보크사이트의 주요 생산국이었지만 현재는 광물자원이 국내 금속공업의 수요를 채우기에도 부족하다. 1960년대초 주로 로렌에서 6,000만t 이상이 생산되었던 철광의 경우 1990년대에는 생산량이 1/6로 떨어졌다. 보크사이트의 생산도 수요에 미치지 못하며 자원이 고갈됨에 따라 감소해왔다. 납·아연·은 등을 포함한 다른 광성들이 소량으로 채굴되며, 보다 많은 양의 칼리·소금·황 등이 생산되지만 보유량이 줄어듦에 따라 생산량이 정체 또는 감소하고 있다. 도처에서 돌·자갈·모래의 공급이 이루어진다.

농업

샹파뉴 지방 에페르네 근처의 아이 포도원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노동인구의 약 7%로 비교적 적으며,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 미만이다. 그런데도 프랑스는 유럽 경제공동체(EEC)의 주요농업국으로 약 31만 3,970㎢의 농경지에서 EEC 총생산가의 1/4을 생산하고, 유료종자·곡물·포도주는 1/3 이상을 생산한다. 농산품의 세계적인 수출국 가운데 하나로 수출총액 중 6% 이상이 농업에 관련되어 있다. 프랑스의 가경지 가운데 약 절반이 곡물재배에 이용되며, 곡물은 농업 총생산액의 약 17%를 차지한다. 밀과 옥수수가 주종을 이룬다. 포도·과일·채소는 적은 면적에서 재배되지만 농업 총생산액의 1/4 이상을 차지한다. 포도재배와 포도주 양조는 랑그도크루시용과 보르도 지역에 주로 집중되어 있다. 사과·배·복숭아 등의 과일 생산은 론 강 계곡과 가론 강 계곡, 지중해 연안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채소는 서부의 브르타뉴 지방과 북부의 노르파드칼레·피카르디 지방에서 대부분 산출된다.

지중해 연안지방들을 제외한 프랑스의 대부분 지역에서 목축업은 중요한 경제활동이며, 우유와 쇠고기 생산은 농업 총생산액의 1/3 가량을 차지한다. 그러나 EEC에서 우유 할당제를 실시한 결과 1980년대초 이래 소의 수가 계속 줄고 있다. 흔히 집약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돼지와 가금의 사육도 활발하여 농업 총생산액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양의 사육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농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변화했다 . 많은 작은 농원들이 사라지고 농장구조도 많이 바뀌어, 농장의 평균 규모는 26㏊ 이상으로 대폭 늘었고 대규모 소작지의 비율이 증가했다. 관개, 시비, 조절된 환경에서 재배하는 법 등 영농기술의 발전은 생산량과 소득의 현저한 증가를 가져왔다.

임업·어업

프랑스는 임야 면적이 14만㎢가 넘는 서유럽 최대의 조림지 보유국으로, 8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민간인 삼림 소유주의 수가 워낙 많고 그들 상당수가 자기 자산의 상업적 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이 광대한 자원의 개발은 일반적으로 부진하다. 삼림청이 관리하는 임야는 전체조림지의 25% 미만이다. 해안선이 길고 항구가 많지만 프랑스의 어업은 비교적 소규모 산업에 머물고 있다. 연평균 어획량은 1970년대 중반 이래 70만t 정도를 오르내리고 있으며, 1980년대말 어민수는 1만 8,000명 미만으로 집계되었다. 어업이 안고 있는 문제점 중 일부는 어선단의 영세성 및 어선·항만 시설의 낙후성에 있다. 남서해안 지역에서는 굴 양식이 이루어진다.

에너지

각종 에너지에 대한 수요가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한 변천을 겪었다. 석탄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와는 달리 현재 적은 양만이 사용되고 있을 뿐이며, 1970년대초에 사용량이 절정에 달했던 석유도 천연 가스와 원자력 에너지로 일부 대체되면서 수요가 떨어졌다. 원자력은 현재 1차 에너지 소비량의 30%를 차지한다. 이러한 변천의 주요한 결과로 과거에 높았던 에너지의 외부 의존도가 줄어들었다. 프랑스 정부가 1970년대 초에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하면서부터 원자력 발전은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그후 해안과 내륙 곳곳에 20개의 원자력발전소가 건립되었으며, 1990년 현재 프랑스의 전력은 세계 최고의 비율인 75%를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하고 있다.

공업

프랑스의 공업은 오랫동안 전후 경제 회복의 추진력이 되어왔다. 그러나 1970년대말과 1980년대에 경기가 후퇴하면서 상당한 재편과 조정을 겪은 후로 이 부문(건축·토목 사업 포함)은 전체노동력의 1/3에 약간 못 미치는 인구를 고용하고 GDP의 약 30%만을 차지하는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1980년대 말 생산이 다시 증가하고 고용도 안정되었으나 경제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축소되었다.

1960년대 이래 공업 입지에도 변화가 생겼다. 1960, 1970년대에 일어난 공업 팽창은 공장들을 수도로부터 파리 분지의 여러 지역으로 이전시키는 대대적인 지방분산화를 수반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전통적 공업지역에서 고용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트노르망디에서 론알프까지 프랑스의 북부와 동부를 가로질러 넓은 원호를 그리며 뻗어 있는 이 지역은 지금도 이 나라에서 가장 공업화된 곳이다. 고용과 자본회전율에서 특히 중요한 산업으로 부각되고 있는 제조업은 자동차공업, 화학·약품공업, 야금업, 기계공업, 전기·전자 공업, 식품공업, 직물·의류업 등이다. 자동차 및 관련 산업에 총노동인구의 10% 가량이 종사하며, 그밖에 초고속전철망의 확대에 따라 철도 기관차 및 차량 제조업 역시 중요한 산업으로 부상했다.

서비스업

프랑스에서는 다양한 서비스업, 즉 3차산업이 총고용의 약 2/3와 GDP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이 부문은 지방행정·보건·교육 같은 사회복지 및 관리 사업, 도매·유통·운수·통신업, 소매·숙박·요식업 등 대소비자 서비스, 은행업·금융업·광고업·전산업 및 데이터 처리업 같은 업무 서비스를 포함한 다양한 활동을 포괄한다. 3차산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전해 왔으며, 지역적으로도 편중되어 도시지역, 특히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집중현상은 수도인 파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전체 인구의 18% 정도가 거주하는 파리에 3차산업 종사자의 1/4 이상이 거주하며, 대기업들의 본사 가운데 2/3 이상과 고위 간부 및 연구진의 대부분이 몰려 있다.

관광업은 직접·간접으로 노동인구의 약 7%를 고용하고 GDP에서 약 8%를 차지한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프랑스에 안겨주는 소득은 프랑스인 관광객들이 외국에서 쓰는 돈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관광업은 여가시간이 증대된 1960년대 이후 빠른 속도로 발전했으며, 전통적으로 소규모로 이루어지던 것에서 점차 대규모로 호텔과 휴양시설들로 대체되었다. 관광지로는 여전히 파리와 지중해 연안지역이 선호된다. 대다수의 프랑스인이 여행철로 선호하는 시기는 7~8월이다. 대규모 관광업에 따른 환경파괴로 산간·해안 지역 보존을 위한 공식적인 노력들이 생겨났다.

은행 업무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은행을 통해 정부의 엄격한 규제를 받아왔다. 그러나 규제철폐법이 제정되면서 1960, 1970년대에 은행의 지점과 예금계좌 소지자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주식 거래는 대부분 파리 증권거래소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국제 기준으로 볼 때 프랑스의 증권시장은 규모가 작다. 이는 국유회사의 주식은 상장되지 않으며, 중소기업이 전통적으로 다른 방식의 투자를 선호하여 증권시장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금융 규제 철폐, 유럽 단일시장을 향한 움직임, 국제무역의 전반적인 자유화 등이 프랑스 회사들의 국외투자와 국외투자 자본의 국내유입을 촉진시켰다. 외국인의 국내투자는 대부분 엔지니어링·전자·화학 분야에 관련되며, 보다 도시화된 지역들에 집중되고 있다.

무역

주요 무역국인 프랑스는 세계적인 선진 수출국으로 성장하여 수출액이 GDP의 1/4 이상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주요 수출품은 자동차를 비롯한 제조품, 산업용 전기기기, 군사장비, 화학약품, 금속제품 등이다. 한편 주된 수입품은 기계류·화학제품·농산물·기구·운송장비 등이다. 1970년대초 이후 수입 초과로 인해 무역적자를 기록한 해가 많았다. 대외무역은 주로 다른 선진국들과 이루어진다. 거래의 약 80%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과의 사이에서 이루어지며, 특히 총수출과 총수입 가운데 60% 이상이 EEC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상대국은 독일이며, EEC를 제외하고는 미국이 중요한 무역상대국이다.

교통

프랑스의 고속열차 테제베는 시속 300km로 주행하며 도시 중심간 ...
투르누와 마콩 사이의 부르고뉴 지방을 횡단하고 있는 고속전철
프랑스는 밀집되고 다양화된 교통망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교통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직도 과도하게 수도로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육상 이동에서 도로망의 비중이 꾸준히 증가해왔다. 예를 들어 물동량과 물자의 이동거리면에서 전체의 절반을 훨씬 상회하는 화물이 도로로 수송된다. 도로의 이같은 비중 증대는 철도와 내륙 수로의 비중을 상대적으로 떨어뜨렸다.

간선도로의 교통량은 1970년 이래로 2배 이상이 증가했으며, 간선도로를 이용하는 차량 가운데 1/5이 화물수송차량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교통체증에 대처하기 위해 도로체계는 더욱 발달해왔다.

19세기말에 부설된 현재의 철도망은 대부분 파리를 중심으로 본선들이 팔방으로 뻗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사용되지 않는 많은 농촌지역 노선들이 폐쇄되었다. 반면 1980년대초 이후 고속전철(trains à grande vitesse/TGV)을 개통하고 파리와 여러 지방도시를 연결하는 몇 개의 새로운 노선을 개통했으며, 이에 따라 여행시간이 크게 단축되었다. 제네바와 로잔 등지로 가는 국제선도 있으며, 세계 최장의 해저 터널인 채널 터널을 지나는 철도가 영국과 프랑스를 잇고 있다. 그러나 자가용과 항공 서비스의 증가로 철도를 이용하는 여객수의 증가는 더딘 추세이다.

센·라인·론 강 등의 큰 강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륙 수로의 물동량은 미미하며, 보다 값싸고 빠른 교통수단들이 생겨남으로써 내륙 수로의 역할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프랑스에 상당히 많은 임해 항구는 대외 수송량의 약 60%를 담당한다. 그러나 운임이 싼 타종 운수회사들에 밀려 상선 수는 계속 줄고 있다. 여객운송은 영국해협을 왕복하는 노선이 중심이 되며, 주로 칼레 항에 집중되어 있다. 화물과 여객의 항공운송은 급신장했으며, 특히 여객수송은 1977~87년에 거의 2배로 증가했다. 다른 운송들과 마찬가지로 항공운송도 파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수도 파리의 2대 공항인 루아시(샤를 드골) 공항과 오를리 공항은 서유럽에서 런던 다음으로 큰 공항단지로, 프랑스 전체 항공여객수송의 2/3를 취급한다. 국토가 넓은 프랑스에는 광범위한 국내선 항공망이 갖추어져 있으며, 니스와 마르세유는 리옹·보르도·툴루즈·스트라스부르와 더불어 가장 분주한 지역 항공 중심지이며 중요한 국제선 공항이기도 하다.

정치·사회

정부

1958년 5월 13일 당시의 식민지인 알제리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프랑스 정세가 불안해지자 샤를 드골 장군은 이를 이용해 대통령이 되었으며, 새로운 헌법을 기초할 책임을 부여받았다. 1958년 10월 4일 발효한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은 국민의 의사가 선거와 국민투표에서 반영되는 서구 민주주의의 원리를 기초로 하고 있다. 21세 이상에게 주어진 보통선거권이 남자에게는 1848년부터, 여자에게는 1944년부터 인정되었으며, 1974년에는 선거 연령이 18세로 낮아졌다. 입법권은 하원과 상원으로 구성되는 국회에 있다. 대통령은 행정부로 통칭되는 내각(각료회의)의 구성원들을 임명한다. 국민은 헌법 국민표결(헌법 제89조)을 통해 국회의 양원을 이미 통과한 헌법수정안을 비준할 수 있다. 헌법은 법률국민표결 조항도 신설했으며, 이 조항에 따라 공화국 대통령은 국가의 전반적 조직에 관한 법률안을 국민투표에 부칠 권한을 갖는다(제11조). 이 국민투표 절차는 알제리 문제의 해결을 위해 1961,1962년에 2차례, 그리고 1969년에 사용되었으나, 1970, 1980년대에는 단 2차례만 사용되었다. 1972년 덴마크·아일랜드·노르웨이·영국을 가입시켜 EEC를 확대하는 안에 대한 것과, 1988년 해외 준주인 누벨칼레도니의 장래 지위에 대한 안 등이었는데, 투표율은 모두 저조했고 후자의 경우는 특히 낮았다.

1958년 헌법은 의회제도를 유지하는 한편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했다. 하원은 일반투표에 의해 5년 임기로 직접 선출되는 577명의 의원으로 구성된다. 상원은 선거인단을 통해 9년 임기로 간접 선출되는 32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선거인단은 대개 프랑스를 구성하는 지방행정단위의 하나인 주(departement)의 지방의회 의원들로 이루어진다. 국회는 입법과 행정부 감독이라는 이중의 기능을 갖지만 과거보다 활동영역이 줄어들었다. 입법 영역(제34조)은 민법·회계법·형법·선거법·시민기본권법·노동법·사면법·예산관계법 등에 관한 기본 규칙과 근본 원리를 정하는 데 국한된다. 이런 입법부문에서는 국회가 최고의 권위를 갖지만, 법률의 구체적 적용·시행을 위한 명령·규칙 등은 정부에서 제정할 수 있다. 정부는 헌법 제37조에 따라 모든 문제들에 책임을 지며, 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노동조합, 사용자·농민기구 등 다양한 집단의 대표 230명으로 구성된 경제사회이사회(Economic and Social council)가 경제·사회 문제와 관련된 법안이나 장기계획 등에 대해 정부와 의회를 자문한다. 헌법은 대통령에게 총리·각료·고급공무원·법관들을 임명하고, 각료회의의 의장직을 맡으며 하원을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대통령은 또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조약을 체결·비준할 수 있다. 그밖에 고위 국방회의의 의장직을 맡으며 국군의 최고 사령관이기도 하다. 국가 비상사태시에는 헌법 제16조에 의거하여 국가의 모든 권한이 대통령에게 집중된다. 총리는 정부의 정책결정권을 가지며 공무원감독권·국군통수권을 행사한다. 헌법위원회는 대통령과 국회의 양원이 각각 3명씩 임명하는 9년 임기의 9명의 위원들로 구성된다. 이 위원회는 국회의원과 대통령 선거를 감독하고, 정부조직법과 의회운영절차에 관한 법규의 합헌성을 심사한다. 또한 국제협약, 정부와 의회 사이의 분쟁,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률의 합헌성에 대한 자문에 응한다. 헌법위원회는 이러한 권한이 해를 거듭할수록 증대되어 미국의 연방 및 주 대법원의 지위에 필적하는 권위를 얻게 되었다.

지방행정

프랑스의 행정조직은 지방(region)·주·코뮌(commune)·해외주(overseas territories)로 분류된다. 프랑스 정부의 주요특징 가운데 하나인 지방분권은 22개 지방의 창설을 통해서 발전되었다. 1982년의 한 제정법은 이전까지 중앙정부에 속했던 많은 기능을 지방정부에 위임하기도 했는데, 특히 중요한 것이 경제·사회 개발 및 교육·문화에 관한 기능들이다.

1790년에 설정된 주는 지금도 중간급 정부로 취급되고 있으며 본국에 96개, 해외에 4개(과들루프, 마르티니크, 프랑스령 기아나, 레위니옹)가 있다. 각 주는 하나의 면(面 canton)에서 6년 임기로 1명씩 선출되는 의원들로 구성되는 주의회에 의해 운영된다. 면은 한 주에 13~70개가 있다. 주의회는 복지·보건·행정·취업 등 주 내의 모든 주요 서비스를 책임진다. 또한 조례를 제정하고 공사(公私)의 재산을 관리하며 예산을 편성한다. 1982년에 통과된 법률은 주의 권한과 권위를 확대시킴으로써 지방분권을 공고히 했다.

프랑스에서 민주주의의 최소 단위인 코뮌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 존재했던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교회구(敎會區)에서 비롯되었다. 근대적 체제는 1884년의 법에 근거하며, 6년 임기로 선출되는 9명 이상의 의원으로 구성된 코뮌 의회를 두고 '코뮌의 내정(內政)'을 담당한다. 코뮌 의회는 공유지를 관리하고 공공사업을 기획하며 자체 예산을 편성한다. 또한 코뮌의 시장과 그 직원들을 선출한다. 코뮌 시장은 코뮌 의회의 행정수반이자 중앙정부의 코뮌 대표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중앙정부의 감독이 극심했으나 1982년을 기점으로 많이 약화되었다. 프랑스의 코뮌은 규모가 매우 작으며 전국적으로 3만 6,500개 이상이 있다.

해외주는 옛 프랑스 제국의 잔재로 1970년대에 여러 주의 지위가 바뀌었다. 현재까지 해외주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타히티 섬의 파페에테를 수도로 하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1998년에 그 지위에 대한 주민투표가 실시될 예정인 누벨칼레도니, 태평양상의 월리스푸투나 제도, 그리고 프랑스가 영유권을 주장하는 남극 대륙의 아델리 해안뿐이다. 이 해외주들은 프랑스 본국이 안고 있는 외교와 국방 등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다른 문제들에서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다. 이들은 의회나 집행부의 구성면에서 대체로 유사한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지만 프랑스 공화국 대표의 감독을 받는다.

정당

수많은 중소 정당이 난립했으며, 이는 제5공화국이 출범하기 이전까지 내각이 빈번히 무너지던 원인이었다. 1958년 드골이 권력을 잡은 후 어느 정도 합리화되었으나, 여전히 개인에 의존하는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는 중도좌파인 사회당, 온건보수 정당인 공화국연합, 중도파 정당들의 연합체인 프랑스 민주연합, 우익인 국민전선, 좌익인 프랑스 공산당 등 대표적인 정당들이 선거전을 주도하고 있다. 드골의 집권으로 시작된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는 프랑스의 정당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안정은 아직도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남아 있다.

사법

프랑스에서는 사법재판과 행정재판으로 재판관할권이 나뉘는데, 전자는 개인간의 소송을 심판하고 형법 위반을 처벌하며, 후자는 국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들 사이와 이들 기관 및 민간인 사이의 소송을 해결한다. 민사사건을 담당하는 법원은 상급심법원과 하급심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형사사건에 대해서는 경미한 범죄를 다루는 경범재판소가 있으며, 중죄에 해당하는 사안은 각 주에 3명의 법관과 9명의 배심원으로 구성·설치된 순회법원에서 담당한다. 이들 법원과 산업상 조정 문제를 다루는 법원이나 군사법원과 같은 전문 법원은 모두 파기원(破棄院, cour de cassation)의 통제를 받는데, 파기원은 법이 제대로 적용되었는지를 심사한다. 한편 행정재판소는 공공행정에 관련되는 사안에 대한 프랑스의 최고재판소인 국참사원(콩세유 데타)의 지휘를 받는다. 행정쟁송에 대한 상고심을 담당하는 국참사원은 오늘날 국가최고행정재판소이자 내각법제처(內閣法制處)와 같은 지위에 있다. 경찰은 주로 공공 법규와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을 맡으며, 경찰력은 공안대과 풍기사범 단속반 같은 특수경찰대로 나뉜다.

행정공무원

단일 조직으로서 가장 많은 근로자가 종사하는 곳은 국가교육기관과 체신기관이다. 공무원은 다양한 집단과 다양한 계급으로 분류되며, 신규모집 수준에 따라 4개 부분으로 나뉜다. 채용은 기회균등의 원칙에 따라 사험을 통해 이루어지며, 고위직 공무원들은 국립행정학교를 통해 선발된다.

군사

국방의 총책임자는 대통령이다. 1964년에 공포된 법령에 따라 대통령은 공군과 전략군의 전투 참가를 명할 수 있다. 프랑스는 1960년부터 원자폭탄, 1968년부터 수소폭탄을 보유하고 있으며, 1966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통합사령부로부터 탈퇴했다. 프랑스의 모든 성년 남자는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군복무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1970년에 통과된 법률은 징집연령을 18세로 정하고, 복무 기간을 12개월로 단축했다.

교육

프랑스에는 공교육과 사교육이 공존한다. 공교육은 일체 무료이며 교육부가 관리한다. 교육부는 교과과정을 작성하고 교직원을 채용하며 학교 장들을 통해 권위를 행사한다. 6~16세의 아동들은 무상의무교육을 받는다. 5년제 초등교육을 마치고 11세가 된 학생들은 중등교육의 제1단계에 들어간다. 15세에 이 과정을 마치면 제2단계인 직업교육 면허증을 딸 수 있는 2년 과정과 대학입학자격시험(바칼로레아)을 볼 수 있는 고등교육인 3년 과정 중에서 택일하여 진학한다. 프랑스에는 세계적인 명문인 소르본대학교(1257경 설립)를 포함하여 많은 종합대학교와 프랑스 제일의 이공과학교가 된 에콜 폴리테크니크(1794)를 비롯한 여러 개의 권위 있는 고등전문학교가 있다 . 사교육은 주로 로마 가톨릭 계통이다. 프랑스 헌법이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선언하고 있지만, 1959년에 제정된 법률에 의거하여 사립학교는 정부의 일정한 간섭을 받는 대가로 재정 지원을 받는다.

보건·사회복지

거의 모든 국민이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는다. 1930년에 사회보험이 실시되고 1932년에 가족수당이 지급되기 시작했지만, 종합적인 사회보장의 원칙이 확립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이었다. 사회보장제도의 재원은 주로 임금에서의 강제 공제금과 고용주의 부담금으로 충당되며, 그 기금은 대부분 연금, 부양 자녀를 위한 가족수당, 의료보조비 등으로 지출된다. 프랑스는 1945년부터 지속적인 주택난을 겪고 있는데, 전국의 주택 가운데 40% 이상이 1948년 이전에 건립된 것이다. 중앙정부가 할증금, 융자, 감세 혜택 등을 통해 건축사업을 장려하는 한편, 지방자치단체와 그밖의 공법인들이 특히 1960, 1970년대에 대대적인 공영주택 건설계획을 추진해왔다. 1950년에 최저임금법이 발효되었으며, 1970년부터는 최저봉급액을 물가상승률보다 빠른 속도로 인상시키는 규정( SMIC)이 최저임금법에 추가되었다. 모든 고용주는 해마다 책정되는 SMIC의 수준을 지켜야 한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봉급이 적다.

문화

문화환경

프랑스 문화는 켈트, 그리스-로마, 게르만의 요소들이 복합된 고대문명에서 유래한다. 19세기말에 초등교육의 무상의무제가 도입되어 국민 대다수가 최소한 문맹을 면함으로써 전반적인 문화수준이 향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6세까지 중등교육을 무상의무제로 실시하고, 빈민층에 대해 재정 지원을 강화한 결과 저소득 집단들의 지적·사회적 성장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프랑스에서 파리는 과거부터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다른 지방도 문화색이 강하며 때로 이것을 강력하게 고집한다. 최근 들어 특히 1960년대에 북아프리카로부터 건너온 이민들이 프랑스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파리와 마르세유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슬람 공동체들은 회화·음악·무용·문학에 기여했다. 프랑스의 요리는 지방에 따라 독특하며, 일부 지방 요리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마르세유의 해산물 수프인 부야베스, 리옹의 소시지의 일종인 앙두예트, 알자스의 양배추절임 요리인 슈크루트, 보르도의 오리가슴살 요리인 마그레 드 카나르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요리에는 부르고뉴, 보르도, 론 계곡의 포도주들이 곁들여진다.

예술

프랑스 문학은 장구하고 풍부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842년에 루트비히 2세와 대머리왕 카를 2세간에 맺어진 스트라스부르 서약을 프랑스 문학의 기원으로 간주하고 있다. 중세에는 〈롤랑의 노래 La Chanson de Roland〉와 같은 서사시들과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아서 왕에 얽힌 로맨스들로 유명하다. 16세기에는 시인 피에르 드 롱사르, 풍자시인이자 유머 작가인 라블레, 에세이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미셸 드 몽테뉴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후 100년 동안에는 피에르 코르네유와 라신의 비극, 몰리에르의 희극, 장 드 라 퐁텐의 교훈시들이 유명했다. 18세기의 프랑스 문단은 볼테르, 드니 디드로, 장 자크 루소가 풍미했으며, 이 가운데 특히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 Candide〉는 독보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19세기에는 세계적으로 문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작가들이 연이어 배출되었다. 소설가로는 오노레 드 발자크, 스탕달, 귀스타브 플로베르, 에밀 졸라가 나왔고 시인으로는 샤를 보들레르, 스테판 말라르메, 아르튀르 랭보가 있었다. 특히 낭만주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창조적 힘은 모든 문학 형식과 회화로까지 표현되었다. 20세기에는 소설과 소설창작기법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서 새로운 방향을 얻었다. 그것이 1950년대에 누보 로망(신소설)으로 발전하여 알랭 로브그리예, 나탈리 사로트, 미셸 뷔토르, 클로드 모리아크, 클로드 시몽, 사뮈엘 베케트 같은 누보 로망 작가들을 배출했다. 1970년대 이후로는 미셸 투르니에, 파트리크 모디아노가 대표적인 소설가로 등장했고 엘렌 식수, 아니 르클레르크, 잔 샹피옹, 마리 카르디날을 포함한 일단의 여성해방론 작가들이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극문학에는 3개의 중요한 사조가 있다. 전통적인 극작은 주로 장 아누이, 클로델, 장 지로두, 앙리 드 몽테를랑과 카뮈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들도 형식이나 내용에 실험을 가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장 콕토가 특히 명성을 날렸지만 페르낭도 아라발, 아르튀르 아다모프, 베케트, 장 주네, 외젠 이오네스코 등이 극작에 혁신을 가져왔다. 철학과 비평은 프랑스의 지적·문화적 생활에서 항상 중심 역할을 했다. 앙드레 브르통이 누구보다 앞장서 이끈 초현실주의 운동이 1920, 1930년대에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20세기 중엽에는 사르트르, 에티엔 질송, 가브리엘 마르셀, 카뮈를 주축으로 한 실존주의 운동이 세력을 떨쳤다. 예술작품, 특히 문학작품에 대한 역사적 연구의 전횡에 도전한 신비평은 롤랑 바르트에 의해 꽃을 피웠으나, 그의 업적은 언어·유전·성격분석·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으로 분산된 흠이 있다(→ 프랑스 문학).

회화·조각·음악·건축·사진술 등의 예술활동이 국가의 지원하에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회화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부터 다수의 종교화와 궁중 초상화를 제작해온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17세기에는 농부를 주제로 삼았던 루이 르 냉, 우화와 고대의 신화를 주제로 했던 니콜라 푸생, 전원 풍경을 주로 그렸던 클로드 로랭의 활약으로 프랑스 미술이 독자적인 특성을 갖기 시작했다. 그후 100년 동안은 회화의 양식이 훨씬 더 광범위해져 프랑수아 부셰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다소 선정적인 작품들, 앙투안 바토의 〈광대들 Gilles〉과 같은 불가해한 정경의 그림들, 장 바티스트 샤르댕의 실내풍경화,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광경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고전주의 작품 등이 나왔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회화도 이때까지는 대부분 프랑스 아카데미가 정한 규칙과 관례에 따랐다. 그러나 19세기에는 반동이 일어났으며,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에 나타난 이국풍, 귀스타브 쿠르베와 오노레 도미에의 작품에 두드러진 사실주의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특히 인상주의 운동은 국제적 명성을 얻은 인상파 화가인 폴 세잔,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알프레드 시슬레, 에드가 드가 등과 후기인상파 화가인 앙리 마티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폴 고갱, 조르주 쇠라 등을 배출했다. 조각에서는 단연 오귀스트 로댕이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로댕은 인상파 화가들과 동시대인으로, 그의 조각품들에는 인상파의 원리가 반영되어 있다. 동시대의 조각가 아리스티드 마욜은 보다 고전적인 양식의 조상(彫像)들을 만들었다.

프랑스의 음악은 일찍이 루이 쿠프랭, 장 필리프 라모, 장 바티스트 륄리 등의 작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는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엑토르 베를리오즈, 카미유 생 상스, 모리스 라벨, 클로드 드뷔시, 폴란드 태생의 프레데리크 쇼팽 같은 작곡가들은 프랑스 음악에 큰 기여를 했다. 1960년대부터 전자음악과 음향학에 많은 실험이 행해지고 있으며, 작곡가 겸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즈는 파리에 있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음악·음향학 실험연구소(IRCAM) 소장으로서 음악의 혁신에 전념하고 있다. 한편 프랑스의 낭만적인 발라드인 샹송의 전통은 쥘리에트 그레코, 에디트 피아프, 자크 브렐, 조르주 브라상 같은 뛰어난 가수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건축 분야에서 프랑스는 최근 다른 서방 국가들에 비해 국제적인 명성이 높은 건축설계자를 많이 배출하지 못했다. 프랑스에 많은 작품을 남긴 르 코르뷔지에는 스위스 사람이었으며 퐁피두 센터, 루브르의 피라미드 등 주요 건축물들은 외국인 건축가들이 설계한 것이다.

자크 다게르는 사진예술에 큰 공헌을 했다. 1950년대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로베르 두아스노 같은 사진작가들의 작품에 의해서 사진술이 신문보도와 상업적 목적을 넘어선 차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1969년 아를에서 연례 사진 축제가 시작되었고, 1976년에는 국립사진박물관이 세워졌다.

프랑스의 문화에서 영화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20, 1930년대에 시적 사실주의로 유명해졌고, 1960년대에 누벨 바그를 통해 프랑수아 트뤼포와 같은 감독을 배출했다. 이러한 영화의 '지성화'(知性化)를 반영하여 새로운 평론지가 창간되고, 파리와 지방에서 여러 개의 영화전문학교가 설립되었으며, 파리에 시네마테크(Cinémathéque)와 같은 영화박물관이 세워졌다. 트뤼포 외에도 장 르누아르, 자크 타티, 장 뤼크 고다르, 에리크 로메르, 루이 말 등이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감독이다.

문화기관

민간 부문으로부터 받는 지원이 늘고 있기는 하지만 교육·문화·통신을 담당하는 중앙정부의 여러 부처가 문화활동의 진흥을 담당하고 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종합대학교와 지역단체들도 상당한 후원을 하고 있다. 프랑스의 주요 박물관들은 파리에 몰려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오르세 박물관은 19세기와 20세기초의 미술품과 인공물 전시관으로 유명한 반면, 조르주 퐁피두 국립미술문화 센터에는 20세기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많은 국가기관에서 다른 문화권에 속하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데, 1980년대에 문을 연 아랍 세계박물관과 아프리카·대양주 미술관 등이 있다. 1950년대부터 중요한 사적지를 보존·복원하는 전국적인 사업이 실시되고 있는데, 리옹에 있는 중세의 '옛 동네들'(vieux quartiers)과 보르도에 있는 18세기의 의회광장을 우아하게 복원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언론·방송

1989년에 사회당 정부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의 조정을 위한 최고시청각위원회(Conseil Superieur de l'Audiovisuel/CSA)를 구성했다. 방송은 공영방송과 민영방송으로 나뉜다. 프로그램은 인공위성을 통해 방송·수신되며, 1987년에 유선방송이 시작되었다. 텔레비전은 문화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전국민의 3/4이 주당 평균 16시간 시청한다. 텔레비전과 비디오에 의해 크게 잠식되었지만 라디오도 아직까지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프랑스 퀼튀르와 프랑스 뮈지크에서는 특유한 문화 프로그램을 내보내며, 프랑스 앵테르(공영)와 유럽 제1(민영) 라디오 방송국 등은 대중음악, 뉴스 보도, 퀴즈, 토크 쇼를 적절히 섞어 방송 빈도를 높이고 있다.

프랑스에서 신문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최초의 신문은 1631년 테오프라스트 르노도가 발행한 〈가제트 La Gazette〉이다. 그러나 250년이 지난 1881년에 언론자유의 확대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면서부터 신문 발행이 크게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에는 파리에서만도 약 30개의 일간지가 발행되었다. 그중에는 전국 각지에서 구독되는 신문도 많았고, 대부분이 뚜렷한 정치색을 띠고 있었다. 전후에는 정치적인 이유, 기업 인수나 합작, 텔레비전과의 경쟁이 원인이 되어 신문과 정기간행물의 수가 격감했다.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된 1944년 창간된 〈몽드 Le Monde〉는 현대 프랑스에서 가장 정통하고 영향력 있는 신문이 되었다. 그밖에 영향력 있고 발행부수가 많은 파리의 일간지로는 〈피가로 Le Figaro〉·〈프랑스 수아르 France-Soir〉가 있다. 1950년대에는 삽화가 든 잡지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대중지 외에도 여성지인 〈엘 Elle〉·〈마리 클레르 Marie-Claire〉, 정치 전문잡지인 〈엑스프레스 L'Express〉·〈푸앵 Le Point〉 등이 포함되었으나 〈파리 마치 Paris-Match〉 이외에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며 널리 보급된 잡지가 거의 없었다.

역사

투르 동쪽의 루아르 강 계곡에 있는 빌랑드리 성(1532)과 ...
프랑스 앙제에 있는 멘 강가의 성
프랑스는 유럽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한 인류사를 지니고 있다.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최고 10만 년도 더 된 것으로, 프랑스 지방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정착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BC 1200년경에 켈트계 갈리아인이 라인 강 유역으로부터 현재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지역을 향해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BC 600년경에는 이오니아계 그리스인이 마실리아에 상업식민지를 건설했다. 현재의 남프랑스 지역에서 수세기 동안 번창한 많은 이오니아인 취락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이 식민지가 오늘날 마르세유로 발전했다. BC 121년에 시작된 로마인의 갈리아 정복은 BC 58~5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복으로 끝났다. 갈리아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 철저히 로마화되었다.

로마가 쇠퇴하면서 갈리아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5세기말까지는 프랑크계 살리족(支族)이 루아르 강 북쪽 지역을 점령했고, 서고트족이 아키텐과 프로방스를, 부르군트족이 론 강 유역을 차지했다. 살리족은 6세기에 메로빙거 왕조의 영도하에 갈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8세기에 이르러 메로빙거 왕조의 왕권이 카롤링거 왕조로 넘어갔는데, 이 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인 샤를마뉴는 9세기초 서유럽의 대부분까지 제국을 넓혔다. 그의 죽음은 제국의 분할을 야기했다.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샤를마뉴 제국의 가장 서쪽에 해당하는 영토는 프랑키아 오키덴탈리스로 알려지게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이 987년에 죽자 위그 카페가 프랑키아 오키덴탈리스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카페 왕조는 처음에는 힘이 약했지만 1328년까지 존속했으며, 플랑드르·브르타뉴·부르고뉴·아키텐을 제외한 현대 프랑스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328년에 프랑스의 왕위는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에게 넘어갔으며, 이것이 백년전쟁(1337~1453)으로 알려진 잉글랜드와의 투쟁을 촉발했다. 이 전쟁으로 발루아 가문은 프랑스의 왕가로 확고히 자리잡았고,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영지를 전부 상실했다. 15세기말 부르고뉴와 브르타뉴가 발루아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감으로써 프랑스의 영토는 오늘날과 거의 같게 되었다.

16세기에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어 일련의 종교전쟁과 내란을 야기했다. 프로테스탄트(위그노)와 로마 가톨릭교도 사이의 전쟁은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야에 파리에서 약 3,000명의 위그노교도가 학살당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뒤이은 혼란 속에서 부르봉 가문의 프로테스탄트인 앙리 드 나바르( 앙리 4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결국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는 낭트 칙령(1598)을 공포하여 위그노교도에게 상당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17세기에는 추기경 리슐리외와 마자랭 같은 뛰어난 정치가들이 국왕을 보필하여 프랑스를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부르봉 가문의 후기 왕들, 특히 루이 14세는 베르사유에 호화로운 궁전을 꾸미고 태양왕을 자임함으로써 프랑스의 절대왕권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18세기에 막대한 비용을 들인 해외원정이 연이어 실패한 결과 프랑스는 여러 개의 해외영토를 상실하고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1789년에 일어난 혁명은 왕을 몰아내고 '인권선언'을 발표했으며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무너뜨렸다. 프랑스 혁명은 유혈사태를 거쳐 5인 총재(總裁)의 약체 정부가 들어서는 것으로 끝났다. 정권은 이내 나폴레옹에게 넘어갔는데, 나폴레옹은 1799~1814년에 처음에는 통령으로, 후에는 황제로 프랑스를 지배했다. 나폴레옹의 대대적인 군사원정은 1815년 그의 몰락과 함께 끝났다. 제한적으로 복고된 왕정은 짧은 공화정 기간(1848~52)을 제외하고는 1871년까지 계속되었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의 패전으로 인해 제3공화정이 들어섬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프랑스는 1871년에 알자스-로렌 지방을 독일에 빼앗겼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이곳을 되찾았다.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략한 후 비시 프랑스의 필리프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친독일 정권이 수립되었다 . 영국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 장군의 영도하에 '자유 프랑스'가 결성되었고,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1944년 연합군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해방되었으며, 이어 제4공화정하에 의회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제4공화국은 1950년대에 인도차이나에서 민족주의자 게릴라들을 상대로 한 값비싼 전쟁과 알제리를 비롯한 프랑스의 식민지들에서 대두한 민족주의 운동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58년 공직생활로 복귀한 드골은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프랑스의 해외식민지들을 대부분 독립시키는 데 앞장섰다. 1981년 사회당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988년에 재선되어 1995년 물러났다(→ 프랑스사).

한국과의 관계

개항 이전

프랑스는 가톨릭을 통해서 서유럽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조선과 접촉했다. 1831년 로마 교황청이 조선교구(朝鮮敎區)를 창설했고, 1836년에는 앵베르 신부를 비롯한 3명의 선교사가 잠입하여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을 탄생시키는 등 선교활동을 폈다. 1839년 선교에 종사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희생당한 사건(기해박해)은 프랑스가 조선에 간섭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866년 신부박해사건이 일어나자 그해 11월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했다 . 그러나 이 싸움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개항 이후

1886년 6월 4일 프랑스측 전권특사 코고르당, 조선측 한성판윤(漢城判尹) 김만식(金晩植), 고종의 외교고문관 데니 사이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국교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조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양국은 천주교 문제로 만만찮은 갈등을 겪었으며, 특히 청일전쟁(1894~95) 후 프랑스는 러시아·독일과 더불어 3국간섭의 일원이 되어 경의선 부설권, 광산채굴권, 조선정부에 대한 차관공여 등 막대한 경제적 이권을 얻었다. 또한 조선의 농상공부 우체사무주임(우체국장, 1888. 12)에 클레망세가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철도·광산 등의 기술분야 및 법부고문에 프랑스인들이 등용되었다. 조선교구의 제8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뮈텔 주교는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종현성당(지금의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을 준공시켰고 드망주 신부는 1906년 10월 19일 주간지 〈경향신문 京鄕新聞〉을 창간했다. 주한 프랑스 총영사관에 근무한 쿠랑은 3,821권의 한국문헌을 〈조선서지〉(1896)로 펴내어 한국의 서지문화를 유럽에 처음 소개했다. 1905년의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이 모두 박탈되고 한국·프랑스 간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도 끝났으나 프랑스는 주한공사관을 조선영사관으로 격하시킨 상태로 유지했다.

일제강점기

프랑스의 대한정책은 원래 극동에서 팽창해가는 일본 세력을 막아 자신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를 보존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과는 무관하게 프·일협상(1907. 6. 10)을 체결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한인들의 망명·정치 활동을 묵인했으며, 조선은 독립을 요구하는 외교 채널로 프랑스를 이용하였다.

8·15해방 이후

프랑스는 1949년 2월 15일 대한민국을 정식승인하면서 국교를 재개했고, 같은 해 4월 상주공관을 설치했다. 6·25전쟁 때는 국제연합(UN)군 산하 프랑스 지상군이라는 특수부대를 파견했다. 1958년 10월 10일 한국·프랑스 양국은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키는 등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1960년대에 한국은 명분위주의 1950년대 외교방식에서 탈피해 프랑스·서독·영국 등 서구 선진국과의 경제외교에 주력하게 되었으며 한국·프랑스 간에는 상표협력협정(1961. 2), 관세협정(1963. 4), 특허권 상호보호협정(1963. 4), 문화 및 기술협력협정(1968. 5), 한국-프랑스 기술초급대학설립협정(1971. 12), 민간항공협정(1974. 6),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협력협정(1974. 10), 투자보장협정(1975. 1), 이중과세방지협정(1979. 6), 어업협정(1980. 9), 과학기술협력협정(1981. 4) 등이 체결되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은 외교적인 면에서도 프랑스 주재 대사관을 아프리카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프랑스는 한국의 주요 교역상대국으로 1996년 현재 대한 수입 11억 9,698만 달러(송신기기, 컴퓨터 부품, 섬유류, 선박), 대한 수출 22억 574만 달러(원자로·전동기·철)를 기록했다. 1989년 10월부터 한국인들의 프랑스 입국사증(비자)이 폐지되었으며, 1997년 현재 교민 1,099명, 체류자 9,643명이 거주하고 있다.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에는 418명의 선수단이 참가했다. 1986년 전두환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에 이어 1989년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파리를 방문했고 1993년에는 미테랑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데 즈음하여 경부고속전철차량선정에 프랑스의 TGV가 지정됨으로써 양국 협력관계는 매우 긴밀해졌다. 1995년 3월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다.

북한과의 관계

북한과 공식적인 수교관계는 없으나 1984년 12월 파리 주재 북한통상대표부를 총대표부로 승격시켜 주었다. 따라서 북한은 외교적 지위만 갖지 않을 뿐 내용면에서 일반 대사관에 준하는 대표부를 갖게 되었다. 이는 프랑스가 북한을 승인하기 위한 전단계 조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으나 1985년초 파비위스가 프랑스 총리로는 처음 내한해 북한불승인을 재확인했다. 북한의 대프랑스 주요수출품은 금·아연·연괴 등이며, 수입품은 각종 기계류와 밀가루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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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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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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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프랑스에 대해서 답변해드리겠습니다 *^^*

 

가 보고 싶은 나라 <프랑스>

 

지형 : 프랑스는 유럽의 서쪽에 위치한 나라로, 국토의 모양이 육각형에 가까운데, 3면은 바다로, 3면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국기 : 프랑스의 국기는 파랑, 하양, 빨강의 3가지의 색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색깔들은 각각 자유, 평등 , 박애를 뜻합니다.

수도 : 프랑스의 수도는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 인정 받고 있는 파리입니다. 센 강이 흐르는 파리에는 유명한 에펠 탑, 개선문 등 많은 문화재와 볼거리들이 있습니다.

 

특히 가보고 싶은 곳 :

베르사유 궁전 : 세계 유산 중의 하나인 유명한 궁전입니다. 정원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칸 : 바닷가에 위치한 관광 도시로, 세계적인 영화제가 열립니다.

몽블랑 산 :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위치한, 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입니다. '몽블랑'은 '흰 산'이라는 뜻인데,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아 붙여진 이름 입니다.

 

 

2006.11.07.

  • 출처

    6학년 2학기 동아전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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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문 어느 면에서도 다양성이 풍부한 프랑스가 정치·행정면에서 재빨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 것은 언뜻 보면 역설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주변 국가들과의 접촉이 쉬워 다른 문명·제도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적지 않은 데다(예컨대 일부에서 게르만관습법을 채용한 사실 등), 지역적 차이가 컸기 때문에, 이를 통일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프랑스인의 본질적인 기질로 알려진 주지주의()와 법률주의()의 2대 흐름이 이와 같은 체제 확립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주지주의야말로 프랑스 문화의 근본 모습이다. 프랑스어()는 라틴어가 점차 골(Gaul)화하여 형성된 것인데 이미 스트라스부르의 선서(842)에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다.

12,13세기에는 프랑스어에 의한 최초의 중요 문학작품 《롤랑의 노래》로 대표되는 서사시가 나타났으며 이에 뒤이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른바 ‘로망 쿠르투아’의 시대를 맞이하는 등 당시의 중세 봉건사회에서 기사들의 생활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동안에도 사고()·이론을 제일로 하고 표현의 이론 정연함을 추구하는 주지주의가 중세 봉건제의 확립·발전과 더불어 점차 프랑스인의 기질에 침투하여 16세기의 프랑스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는 명료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 경향은 프랑스 문화의 명석한 논리와 비판을 즐기는 지성, 구체적인 것을 존중하는 실증적 정신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이와 동시에 한편에서는 행동으로 옮기기 전 사고의 과정에서 ‘참된 인생’을 터득하려는 경향 때문에 눈앞의 사실을 분석하는 측면에서 후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바로 여기에 프랑스가 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오히려 ‘원형(:prototype)의 나라’이고 ‘양산()의 나라가 될 수 없는’ 일면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주지주의의 보편성과 추상성 때문에 프랑스 문화의 이념은 세계적으로 넓게 받아들여져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프랑스가 계승한 로마 문명의 보편성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풍부하고 다양한 국토와 천혜의 기후 아래, 프랑스인들은 조화와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이 북돋워지는 한편, 중앙권력이 점차 확립됨에 따라 권력을 두뇌로 하는 유기체로서 국가를 이해하는 추상적인 국가관이 생겼다. 또 나아가서는 어떤 어려움에 부닥치더라도 창조력을 소생시켜 이것을 헤쳐나가야 할 ‘우리 프랑스’라는 관념이 프랑스인의 마음속에 뿌리 깊게 심어졌다. 이것이 ‘교회의 장녀()’라는 종교적인 의식과 결부되어 쇼비니즘(배타적 애국심)의 전통으로 해석되는 경향도 적지 않다. 또한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추상적 관념이 법률주의로 정착되었다.

교회의 신성()을 배경으로 한 국왕 아래에서도, 또 이것을 공화제의 이념으로 바꾸어 놓은 뒤에도 이 독자적 국가관은 존속되었으며, 프랑스인 스스로도 너무나 현실을 무시하고 추상화해버린 이 사실을 반성하는 반면, 그것을 소중히 아끼는 모순을 되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파리에 강력한 뷰로크라시(관료정치)가 확립되는 정신적 밑바탕이 완성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다양성을 인정하는 한편 명료한 카테고리의 설정을 즐기는 정신은 동질의 것을 통한 조직에 대하여는 편향성이 있다. 예컨대 종적() 방향의 전국조직, 즉 중앙집중의 경향은 행정뿐이 아닌 직업 등에서도 아직까지 명확하며, 현재의 프랑스가 국토의 재편성이라는 큰 문제를 앞에 두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수평() 방향의 조직, 즉 이질()의 것을 포함한 ‘지역’이라는 견해는 프랑스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범위의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국왕 사이의 역사적 관계, 또 교회의 이념으로부터 평등을 출발점으로 하는 프랑스 사회에 개인주의의 정신이 생긴 뒤 근세에는 자유와 법률주의의 사상에 뒷받침되어 강력하게 사회와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대혁명을 완수하고 정치적 ‘자유’의 대원칙을 수립한 프랑스인이 근대 산업혁명에는 비교적 냉담한 반응을 보인 원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에 시작된 인구 정체로 말미암아 산업 근대화의 필요성이 적었다는 사실과 병행하여 기업에서 개인의 주도권, 나아가서는 ‘인간성’의 상실은 프랑스의 개인주의에 반()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강대해진 프랑스에서는 드 말레르브 궁전을 중심으로 한 활동의 영향 아래 국민문화로서의 고전주의가 개화되었지만, 여기에서도 보편적 요소를 찾아낼 수 있으며 당시 프랑스의 군사적·정치적 우세와 더불어 유럽의 문화중심지가 되었다. 종교개혁도 르네상스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칼뱅의 엄격한 종교생활을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휴머니즘(인문주의)이 나타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미 12세기에 파리를 중심으로 발달한 고딕 양식이 각지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포함하는 추상의 산물이었던 점도, 이 시대에 체계화되고 파리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스콜라철학 역시 흐름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어서 고전주의의 조락 이후 18세기에 시작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출발점으로 디드로의 《백과전서()》에 의해 대표되는 새로운 움직임은 과학적 탐구심과 동시에 자유검토의 정신을 진작시켜 사회적으로는 대혁명의 1단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 나폴레옹의 독재시대를 거쳐 19세기에는 왕정()이 복고되기도 하였으나 서민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는 루이 필리프가 즉위함으로써 프랑스는 ‘부르주아 계급’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때는 어떤 의미에서 확실히 대립적인 낭만주의가 활발해졌지만, 이것을 가리켜 반드시 반동적() 또는 히스테리컬한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프랑스 사회 자체가 18세기 말의 소란스러운 동란()의 생활로부터 탈피를 바라고 있었고 루소샤토브리앙 등에 의하여 이미 탄탄대로가 닦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낭만주의가 문학과 정부 및 사회적 현실의 연관성을 강조한 운동이었고, 진보적 운동인 동시에 조국이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애국주의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그 감상적 측면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이다. 1848년의 혁명에 의해 제2공화국이 성립되고, 그 뒤를 이어 제2제정()이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패전하여 제3공화국으로 교체되는 시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과학·기술의 분야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룩하는 동시에 문예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도 마치 12세기의 프랑스에서 본 바와 같이 또다시 세계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세계의 문학·예술·음악·연극 등의 모든 예술활동은 파리에 집중되고, 각각 반발과 공명()을 되풀이하면서 새로운 틀 속에서 다시 창조되었다. 다다이즘·미래파()·추상주의에서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표현을 통하여 잇달아 저마다의 에너지를 발산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프랑스 문화에 존재하는, 많은 요소의 복합성을 느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실존주의 등을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프랑스는 가톨릭국가인 동시에 칼뱅의 나라이고 디드로의 나라이며, 한편에서는 지드와 사르트르가 있다. 또 한편에서는 페기·베르나노스도 태어난 나라이다. 이것은 추상과 보편성을 기본으로 각 시대를 뛰어넘어 온 프랑스 문화의 두께를 짐작하게 하는 특성인것이다.

2006.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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