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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렘브란트의 야경 미술사적의미
akan**** 조회수 9,021 작성일2004.06.06
화가 렘브란트의 그림 야경의 미술사적 의미 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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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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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1669.10.4 )

네덜란드의 화가. 레이덴 출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17세기 유럽 회화사상 최대의 화가이다.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레이덴대학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레이덴의 화가인 야콥 반 스바넨부르크에게 배우고, 이어 암스테르담에 나와 P.라스트만의 문하에 들어갔다. 1624년 레이덴으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독립하여 아틀리에를 열었다.

32년까지 완전한 독학으로 친척, 이웃노인,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1632년 암스테르담 의사조합으로부터 위촉받은 《툴프 박사의 해부》의 호평을 계기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였다. 그 후 약 10년 간은 생활이나 명성에 있어서도 가장 혜택받은 시기였다. 1634년 명문가문의 딸 사스키아 판 오이렌부르흐와 혼인하여 당시의 세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첫째 가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많은 수입과 제자를 모았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함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 기호였던 평면적인 초상화 등에 만족할 수 없게 되어 외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 인간성의 깊이를 그리고 싶은 생각이 절실해지면서 종교적(또는 신화적) 소재나 자화상이 많아졌다. 따라서 1642년의 명작 《야경(夜警)》의 제작을 고비로 갑자기 세속적 명성에서 멀어졌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 사수협회(射手協會)의 주문에 의한 단체초상화인데 렘브란트는 당시 유행하던 기념촬영적 단체초상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특유의 명암 효과를 사용하여 대담한 극적 구성을 시도하였다. 더욱이 이해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가 죽음으로써 인기와 아내를 동시에 잃은 그의 생활은 차차 고통스럽게 되었으나, 정작 그의 위대한 예술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사스키아의 유아(遺兒) 티투스의 성장과, 1645년경에 맞은 마음씨 착한 둘째 부인 헨드리키에의 내조는 그의 예술을 더욱 원숙하게 하여, 오늘날 대표작이라고 하는 대부분은 164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으며, 1656년 파산선고를 받아 일찍이 사스키아와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구입한 저택도, 예술적 영감을 한없이 자극하던 여러 가지 미술품도 모두 그의 손에서 떠나게 되었다.

1662년에는 헨드리키에가 세상을 떠나고, 1668년 티투스마저 죽자, 그도 이듬해 10월 유대인 구역의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죽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이 발견되기까지는 10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현존하는 렘브란트의 작품은 유화·에칭·소묘로, 종교화·신화화·초상화·풍경화·풍속화·정물화 등 모든 종류에 걸쳐 있으며, 중년 이후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졌으나,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더구나 그의 예술은 시대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그는 그 나름의 깊은 빛과 그늘을 창조하였다. 즉 그의 작품에 있어서 색이나 모양이 모두 빛 그 자체이며, 명암이야말로 생명의 흐름이었다.

종교적 소재에서도 렘브란트만큼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네덜란드의 시정생활에서 구한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에 높은 종교적 정감과 깊은 인간 심정의 움직임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그 특유의 명암법 때문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인간애 정신이 넘치고 있어, 그가 그리는 작품은 한없는 따뜻한 애정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렘브란트만큼 많은 자화상(약 100점)을 그린 사람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에 대하여 겸허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가 설혹 유화를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에칭만으로도 유럽 회화사상 최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에칭의 모든 기술은 렘브란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밖의 작품으로 《엠마오의 그리스도:Christ at Emmaus》(1628) 《야곱의 축복》 《유대인의 신부(新婦)》(유화) 《세 그루의 나무》 《병자를 고치는 그리스도》 《3개의 십자가:The Three Cross》(에칭) 등이 있다.

2004.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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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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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서양화, 조소 99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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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시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렘브란트의 ‘야경’(1642)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시민대가 주문한 ‘집단초상화’였다.

그런데 어두운 쪽에 그려진 사람들의 불만때문에 작가와의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던 에피소드가 있다.


렘브란트의 이 [야경]이라는 그림은 어두운 화면에 스며든 광선을 미묘한 색채로

처리하여, 깊은 공간감을 주는 독특한 기법을 사용하였다.


::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발췌한 렘브란트의 '야경'에 얽힌 얘기 ::

.... 내가 그 명화를 향해 다가가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미술관의 에레 갈레레이(명예의 전당)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그 곳은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의 최고 걸작을 전시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방이었다. 내 왼쪽과 오른쪽에 프랑스 할스, 페르디난드 볼, 페테르 파울 루벤스 같은 쟁쟁한 화가의 여러 걸작들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모든 관객의 눈길은 전시장 끝에 걸려 있는 인상적인 그 그림에 쏠려 있었다.

나는 그 작품 앞에서 넑을 잃은 채 화폭을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인도의 뉴델리에서 온 크리스타 디메르는 실로 오래 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암스테르담을 찾아왔다면 '야경(夜警)'을 보아야죠. 운하를 따라 산책하는 것도 멋지지만 이에 비할 수는 없지요."

디메르는 웅장한 화폭을 황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요. 하지만 렘브란트가 어떻게 이 작품을 완성했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저 모든 색채를 보세요. 저 황금빛, 저 아름다운 빨간 장식띠." 디메르는 두 손을 활짝 벌리고 말을 더듬었다.

그 구도는 17세기에 흔히 그려진 민병대 작품(민간 수비대의 집단 초상화)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렘브란트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무엘 반 호그스트라텐은 그 구도를 이렇게 극찬했다. "단칼에 모든 사람의 목을 벨 수 있을 것 같은 일렬 구도가 아니라는 데에 그 묘미가 있습니다."

생생한 장면을 위해 렘브란트 반 라인(1606-1669)는 단순히 소총수들만 그리지 않고 수많은 인물들을 추가했다. 인물들 개개인이 아니라 그림 전체가 화가에게 중요했던 것이다.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미술관에서 "야경"을 안내하는 유리 반 데어 린덴은 이렇게 설명한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인물들을 배치했어도, 한 눈에 누가 중요한 인물인지 알 수 있지요. 그들은 전면에 나와 빛을 받고 있습니다."

프란스 바닝 코크(검은 정복에 빨간 장식띠를 두르고 있는 사람)은 1634년 당시 시의회였던 시원로원의 일원이었다. 뒷날 그는 암스테르담의 시장 4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 빌렘 반 로이텐부르흐(밝은 노란색 옷차람의 사람)는 성공한 사업가 집안 출신으로 1639년 시원로원에 들어 갔다.

반 데어 린덴이 해설을 이어 나갔다. "눈에 띄는 또 다른 인물은 왼쪽 소녀 곁에 있는 붉은 옷의 남자에요. 그를 보노라면 렘브란트가 소총병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소총에 화약을 장전하고 있는 소총을 마치 무게가 나가지 않는 것처럼 들고 있거든요. 실제로 저 총은 무게가 6kg이나 되는 괴물이지요."

이 날 미술관에는 어린이들이 많았지만 "야경" 앞에 앉아 있는 어린이들은 무척 조용했다. 그림에 매혹된 학생들은 안내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그림에서 특별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슈테판 데 그라프(11세)는 사람들이 특별하다고 했다. "모두가 무얼 하느라 바쁘거든요. 다른 그림에서는 우리를 쏘아 보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아요. 모두가 너무 바쁜 거에요!"

슈테판의 말이 옳다. 렘브란트는 가만히 서 있는 보통 사람들을 그린게 아니다. 막 행진하려는 민병대의 생생한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들이 곧 다른 장소로 이동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에는 18명의 민병대원들이 있다. 그들은 그림에 실리는 대가로 각자 약 100길더를 냈다. 당시 보통 사람들의 3개월분 월급과 맞먹는 돈이라 누구나 그림 안에 실릴 수는 없었다. 바닝 코크와 반 로이텐부르흐는 아마도 돈을 더 냈을 듯 하다. "렘브란트가 완전히 정장을 한 그들을 공짜로 그려주었을 리는 없지요. 아마도 200길더를 냈을 거에요" 반 데어 린덴의 말이다.

17세기에 민병대는 사회적 기능을 지녔을 뿐 아니라 행사들도 담당했다. 사격대회를 열기도 하고 시가 행진에 참가하기도 했다. 아울러 군대 성격이 짙어 도시방어 임무를 맡기도 했으며 전투에 투입되기도 했다. 1600년과 1650년 사이에 암스테르담 인구는 5만명에서 16만명으로 늘어 났다. 민병대도 함께 성장하여 1638년 민병대 수용시설인 둘렌은 시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홀로 확장 되었다. 사방 9미터, 18미터의 벽에는 민병대 6개 중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렘브란트는 프란스 바닝 코크 대위의 깃발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둘렌에서는 파티와 리셉션이 열릴 경우 그림이 쉽게 손상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야경"은 당시 시청 건물이었던 도심 제방 위의 궁전으로 옮겨졌다. 1885년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그 작품은 새로 지어진 레이크스 미술관으로 옮겨져 오늘날까지 관람자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그 옆에는 게리트 룬덴스가 그리고 바닝 쿠크가 의뢰한 모조품 한 점이 걸려 있다. 이 모조품과 비교해 보면 둘렌에서 옮겨 오느라 "야경"의 일부를 잘라냈음을 알 수 있다. 왼쪽의 인물 3명이 들어 있던 부분과 위쪽과 아래 쪽의 일부가 잘려 나갔다.

15살 된 학생 벤테 보르가 두 그림을 정확히 비교했다. "모조품은 원화보다 표현력이 훨씬 떨어져요. '야경'은 몹시 아름다워요. 사람들이 아주 잘 그려져 있기 때문이에요." 다른 그림들과의 또 다른 차이점이 있다. 그림 속의 대상들에게 빛이 똑같이 비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렘브란트는 빛의 심오함과 미묘함을 표현하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빛의 표현이야말로 그의 스타일을 결정 짓는 수단이다. "빛으로 인해서 깃발이 밖으로 나와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렘브란트의 위대한 독창성이지요." 레이크스 미술관의 회화 책임자 얀 피에트 필레트 코크의 말이다.

예를 들어, 관람자들은 드리워진 빛을 보고 해가 어디 있는지 짐작 할 수 있다. 그림의 전면 왼쪽이다. 반 로이텐부르흐의 의상에 드리워져 있는 바닝 코크의 왼손 그림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쭉 뻗은 손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하다.

나는 레이크스 미술관을 나와 30분 정도 걸어서 렘브란트 하우스로 갔다. "렘브란트 이외에 그런 손을 그릴 사람이 없지요." 렘브란트 하우스의 학예사 보브 반 덴 보게르트가 날 맞으며 말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바뀐 이 건물에서 렘브란트는 아내 사스키아, 어린 아들 티투스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바로 이 곳에서 "프란스 바닝 코크 대위와 빌렘 반 로이텐부르흐 중위 휘하 중대"를 그렸다. 보통 "야경"이라고 불리는 이 그림에는 이상하게도 야경꾼이 없다. 이러한 명칭이 등장했던 18세기 당시 이 그림은 상당 기간동안 청소되지 않았고, 색채가 무척 흐렸다.

나는 박물관에서 안마당을 내다 보았다. 렘브란트가 건물을 달아내어 지은 갤러리가 있었다. "바로 저 건물에서 "야경"을 그렸을거에요. 집안에는 원래 5미터, 3.87미터 크기였던 어마어마한 캔버스를 세울 공간이 없었으니까요." 반 텐 보게르트가 말했다.

"그는 화가로서는 다할 나위 없이 잘 살았습니다. 집의 너비와 똑같은 북향 작업실이 있었으니까요." 반 덴 보게르트의 설명이다. 렘브란트는 제법 많은 돈인 1만 3000길더를 주고 그 집을 샀다. 자신의 작품과 미술품 거래로 번 수입에다 해마다 제자 한 사람으로부터 100길더를 받고 있어 경제적으로는 괜찮았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종이 공예품, 조개껍질, 그리고 다른 화가의 그림을 사들이느라 돈을 헤프게 썼어요." 반 덴 보게르트의 말이다.

미술사가이고 렘브란트 연구의 귄위자인 게리 슈워츠도 렘브란트가 재산 관리 능력이 부족했다고 이야기 한다. "그는 빚을 갚지 않았고 이자마저 주지 않았어요."

이처럼 재산관리를 엉망으로 하던 네덜란드의 가장 유명한 화가는 1656년 드디어 파산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렘브란트의 유산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 2003년 12월부터 레이크스 미술관을 역사상 가장 대대적인 보수 작업에 들어간다. 미술관은 완전히 개조되어 2008년 여름 다시 문을 연다. 그때까지 네덜란드 걸작은 모두 필립스 분관에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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