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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내공100)천안의역사와 천안의역사인물
비공개 조회수 8,324 작성일2010.08.29

중학생입니다, 역사신문을 만들어가야 되는데요

제가 사는 지역인 천안의 역사를 신문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서요

구석기시대때부터 현대까지의 천안의 역사를 알고싶습니다.

천안의 역사 인물도 알고싶구요

아,그리고 만화도 그리려고 하는데 천안의 능수버들(?) 그이야기나

천안에 관한 이야기(?)도 해주셨으면 합니다^^

정리하자면,

 

1)천안의 역사

 

2)천안의 역사인물

 

3)천안의 이야기(?) [능수버들..이런이야기 능수버들이야기도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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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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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의 역사)

 

고대

 

광덕면 대평리에서 동검, 병천면 봉황리에서 소형마제석부, 두정동에서 마제석검 유구석부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천안 지역의 역사가 기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삼한시대로서 마한의 맹주격인 목지국의 터전이 현 직산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이곳은 신라시대에는 대록군과 그 영현이었던 순치현이 있던 지역이다.

 

대록군은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을 경덕왕이 개명하여 목주라 한 곳이다. 또, 백제의 온조가 옛 마한지역을 통일하고 백제를 이룩할 때 환성이라 한 곳으로, 또 위례성이라고도 불렀는데 지금의 천안 입장면 호당리와 북면 운룡리에 있는 위례산성이 바로 그 유적이라고 전하나, 일부 학자들은 부인하고 있다.

 

뒤에 고구려가 세력을 장악했을 때에는 사산현이라 하였다. 순치현은 백제의 감매현을 경덕왕이 개명한 것으로 풍세현이라 부른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천안지역은 천안부와 그 영현인 풍세현과 직산현, 그리고 청주의 목주가 있었다. 천안부는 930년(태조 13) 삼국의 전략적 요충지인 동서 두솔을 합해 천안부로 하고 도독을 두었다.

 

995년(성종 14) 환주로 고치면서 도단련사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단련사를 폐하고, 1018(현종 9) 다시 천안이라 하고 지부사를 두었다. 1310년(충선왕 2) 영주로 고쳤다가 1362년(공민왕 11) 다시 천안부라 했는데 별호는 임환이었다.

 

직산은 신라의 사산현을 고려 초에 직산이라 했으며, 1018년(현종 9)에 천안부에 내속했고 뒤에 감무를 두었다. 풍세현은 신라의 순치현을 고려 초에 풍세현이라 했으며, 1018년에 천안부에 내속했는데, 별호를 자천(?川)이라 하였다. 목주는 신라 때 대록군을 고려 초에 목주라 하여 청주에 예속시켰고,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었는데 별호를 신정이라 하였다.

 

성환읍 대흥리에 홍경사지가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이곳은 갈래 길의 요충인 데다가 사람 사는 곳과 떨어져 있고, 무성한 갈대숲이 들판에 가득하여 행인을 자주 약탈하는 강도가 많으므로 고려 현종이 형긍스님에게 명해 절을 세우게 하고, 병부상서 강민첨 등이 이를 감독하여 집 200여 칸을 세우고 봉선홍경사라고 칭했다는 내용이 있다.

 

조선시대

 
지금의 천안지역은 청주목(淸州牧)에 속했던 천안군, 목천현, 직산현의 지역이었다. 천안군은 고려 초의 천안부로 태종이 1413년(태종 13)에 영산군으로 고쳤다가 1416년에 다시 천안군으로 하여 인접 풍세현을 속현으로 하였다. 당시 천안의 호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506호에 2,385명이었다.

 

목천은 고려시대 목주로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 목천이라 하고 1413년에 현감을 두었다. 조선 초 목천의 호구 수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404호에 2,286명이었다. 직산현은 고려시대의 직산인데 1393년(태조 2)에 환관 김연(金淵)이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신이 되어 돌아오자 직산을 지군사로 승격시켰다가 1401년(태종 1) 다시 낮추어 감무를 두었다.

 

1413년 직산에 현감을 두었으며, 1505년(연산군 11)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1507년(중종 2) 다시 충청도로 환원되었다. 임진왜란 후 평택현이 폐현되면서 직산에 합병되었으나, 6년만인 1618년(광해군 10) 다시 분리되었다. 조선 초 직산의 호구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553호에 2,111명이었다.

 

동면 구도리에서 살았던 세조 때의 문신 김일손은 춘추관의 기사관으로 있을 당시 ≪성종실록≫의 사초에 세조의 잘못을 직필했다는 연유로 무오사화 때 희생당하였다.

 

인조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이 난을 피해 공주로 몽진하던 중 며칠 간 머물던 곳에 화축관을 세웠다. 그리고 이곳에 역대 제왕의 입비를 세우고 봉안하고 고을 원으로 하여금 매년 삭망에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천안은 조선시대 삼남대로의 분기점으로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 목천에서 태어난 목천상씨 상진은 명종 때의 영상으로서 조선조 3대 정승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근대


1895년(고종 32) 공주부 천안군이 되었다가 이듬해 충청남도 천안군으로 되었다. 1914년 천안·목천·직산 3군을 통합해 천안군이 되었다. 1920년 영성면을 천안면으로, 성산면을 직산면으로 고쳤다. 1931년 천안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아우내는 한때 이름났던 고장으로 이동녕·조병옥·유관순 등을 배출시킨 곳이기도 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은 일제에 항거하여 3,000명의 시골주민들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끝내 순국하였다.

 

현대


1963년 행정구역 변경 때 천안읍과 환성면을 합쳐 천안시로 승격 분리되고, 나머지 지역은 천원군으로 되었다. 1969년부터 1973년에 걸쳐 병천면 탑원리에 유관순열사의 애국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사우를 세웠다. 1973년 성환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2년 군청이 천안시에서 성거면의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1983년 충세면 구룡리가 천안시에 편입되었고, 1985년 성거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2읍 10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85년 독립기념관을 목천면 남화리 일대에 1987년에 완공하였다. 1991년 천원군이 천안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95년 5월 10일 도농통합에 따라 천안시와 천안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천안시가 되었다. 2002년 1월 1일 시조례 제508호로 직산면과 목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8년 6월 23일 시조례 제860호(2008.3.21공포)로 2개 일반구(동남구, 서북구)설치 및 청사 개청하였다.

 

(천안의 역사인물)

 

1.유관순 열사- 세계적인 여성독립운동가, 우리민족의 영원한 횃불

 

1902년 12월 16일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교사 샤프부인의 추천으로 서울 이화학당(현 이화여고)에 가서 신학문을 배우며 애국심을 키워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만세를 부르겠다고 학장에게 강하게 요청하였다.

총독부 휴교령으로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에 내려와 1919년 4월 1일 김구응,조인원 등과 함께 아우내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로 열사의 부모를 포함한 19명이 순국하고 3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수감중에도 옥중에서 끊임없이 독립만세를 불렀고 이로 인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체포당시 상처와 고문으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유관순 열사는 비폭력 투쟁,삼일정신의 상징으로 존경받고 있다.

 

2.충무공 김시민- 천안을 빛낸 역사적인 인물, 진주대첩의 명장

 

고려 충신 김방경 장구느이 12대손이며 조선을 사명현 김충갑선생의 셋째 아들로 1554년 8월 27일(음력)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잣밭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25세 때인 1578년(선조11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를 제수 받았고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격해오는 왜군을 크게 격파한 공로로 7월말 진주목사로 발탁.

1592년 10월 18일 39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국.

1604년(선조 37년)6월 25일에 선무공신 2등에 올랐고, 10월 29일에는 장군의 영정을 그려 후세에 전하게

하였으며 관작과 품계를 2등급 올렸다.

1702년(숙종35년) 6월 16일에는 상락부원군으로 추봉되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공의

시호를 하사받았다.

 

3.석오 이동녕- 천안을 빛낸 역사적인 인물, 임시정부를 이끈 독립운동가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서 1869년 2월 17일에 태어났다

석오는 총명하고 출중하다는 칭찬을 한몸에 받으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를 치름.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이 있은 후 기울어져가는 조국을 도저히 좌시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서울에 올라가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나라를 바로 잡고 이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기르면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생각하여 북간도를 활동 무대로

정하고 용정에 서전의숙을 설립하였으니 이것이 북간도 최초의 한국인 학교 였다.

1907년 안창호,신채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1919년 상해임시정부 초대의장이 되었으며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동안 의정원 의장 3회, 주석 4회를 역임.

1940. 3. 13 중국 사천성에서 급성폐렴으로 서거하여 국장을 거행.

1948. 9. 22 김구 선생 주도로 봉환하여 효창원에 안장.

1962. 3. 1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추서

 

4.담헌 홍대용- 천안을 빛낸 역사적인 인물, 조선후기 북학파 실학자

 

1731년(영조7년)에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에서 태어났으며 10여세 때부터 김원행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오랜 세월동안 사사관계였다.  북학파 학자들인 박지원,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과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유학보다는 실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전환의 계기는 1765년(영조41년) 청나라에 가는 서장관 홍억의 군관으로 수행하여

북경에 다녀왔던 일이다.

북경에서 엄성,반정균,육비 등과 사귀면서 청조의 문물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배청의리론을 극복하고

주체적 세계의식으로 전환하여 의산문답을 저술하였다.

44세가 되던 영조 50년(1755년)에는 과거를 통하지 않고 특별히 임명되는 음관으로 종9품의 선공감의

말직인 감역이 되었다.

이어 세손을 보필하는 세손익위사의 사직으로 지내다 정조가 즉위한 뒤 사헌부의 감찰, 태인현감,영주군수

등을 지내다가 정조 7년(1783년)2월 풍으로 세상을 떠나 천안땅에 묻혔다.

지구 자전설을 주장하였고 오행설과 음양설을 극복하여 서양과학의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을

닦았으며, 서양과학이 수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주해수용을 저술하였다.

 

5.유석 조병옥- 최초의 장관, 최초의 박사, 민족운동의 지도자

 

1894년 갑오년 3월에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한 농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서재필,이승만 등과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특히 안창호의 인격과 애국연설에 감복하여 흥사단에 가입,

활동했었다.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본부 재정총무겸 경성지회 책임자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으며

광주 학생 사건에 관련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고 39세에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조만식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잠시동안 전무 겸 영업국장으로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광산사업에 4년간 손을 대기도 하였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유세기간중 신병으로 미국에서 치료를 받던 중 사망.

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 저서; [민주주의와 나], [나의 회고록] 등이 있다.

 

6.황혜성- 천안을 빛낸 여성, 조선왕조 궁중음식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1920.7.5 천안에서 출생. 천안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주공립고등학교,일본경도여자고등전문학교를 졸업.

1939년 대전 대동공립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42년 조선조 최후 주방상궁 한희순으로부터

궁중음식을 전수 받았다.

1946년 부터 1990년까지 숙명여대,서울대,명지대,한양대,성균관대 등에서 교수를 역임.

1971년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하여 1973년 1월 5일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로 중요무형문화재

38호로 지정되었다.

궁중음식발표회를 여러차례 가졌으며 1986년 국민훈장 목련장, 1990년 10월 대통령표창 보관장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는 궁중음식,한국민속종합조사,한국음식 등 수십권이 있다.

 

7.이봉주(1970년 10월 11일 - )

 

충남 천안 출생으로 마라톤 선수이다. 1998년 4월 19일 로테르담 마라톤에서 2시간 7분 44초로, 2000년 2월 13일 도쿄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7분 20초로 대한민국 신기록을 세웠다. 2001년 제105회 보스턴 마라톤과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마라톤, 2007년 서울 국제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2008년 8월 24일 베이징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는 아프리카 선수들의 페이스에 밀리며 2시간 17분 56초로 28위에 머물렀다.개인 통산 서른여섯 번째 완주였다.

 

2009년 10월 21일 제 90회 전국체전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15분 25초 만에 완주해 1위로 결승점을 통과, 그의 은퇴 경기이자 41번째 완주를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천안의 이야기)

 

1.천안삼거리의 이야기

 

천안삼거리는능수버들가락이늘어지는흥타령이유명하여한편으로는매우풍류어린곳으로여결질법도하지만,사람들이교차하는곳에는언제나사람들의스쳐가는만남과이별이애달프게서려있게마련이니천안삼거리에관한이야기들도예외가아니다.
  

대표되는 이야기들은 다 '능수버들'과 관련된 것인데 하나는 충청도에서 살던 유봉서라는 홀아비와 어린 딸의 이야기이다.
  

아비가변방에수자리를가게되어하는수없이어린능소를삼거리주막에맡기고가면서버들가지를하나꽂고갔다.오랜세월이지나돌아와보니버드나무가자라아름드리나무가되어있고그아래아리따운처녀가된능소가기다리고있어부녀는감격의상봉을했다는이야기이다.그때부터'능수버들'이라는이름이생겨났다고한다.

다른하나는한젊은선비와삼거리주막의기생이야기이다.전라도고부땅에서과거를보러올라가던선비박현수가삼거리주막에서하룻밤을묵게되었다.밤이되어잠을청하는데어디선가청아한가야금소리가들려왔다.소리를따라가보니능소라는어여쁜기생이타고있었다.하룻밤에백년가약을맺은박현수는과거에장원급제하여돌아왔고흥이난능소가가야금을타며"천안삼거리흥~능수나버들아흥~"하며흥타령을읊조렸다는것이다.
  

또한 아비와 능소가, 선비 박현수와 기생 능소가 끝내 만나지 못하고 능소가 기다림에 지쳐 쓰러진 자리에 자라난 것이 능수버들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2.어룡리의 전설

 

성환읍에서 평택쪽을 향해 국도로 따라가다가 철길을 건너면 어룡리가 나온다. 이 마을은 그 형태가 용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마을의 뒤에는 수리조합이 있고 앞은 탁 티어져 있다. 이 마을의 내에 고기가 살다가 변하여 용이 되어서 승천했다고 하여서 어룡리가 되었다고 하는데 매년 정월 초사흘 밤 12시가 되면 안에 있는 공동우물에서 정제를 지낸다. 제관은 생기복덕을 가려서 제주 1인을 선정하고 이장, 새마을 지도자, 반장이 함께 참석하며 딴 사람들은 참석할 수가 없다. 제관은 정월 초하루부터 제를 지내는 시간까지 일체 문 밖 출입을 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에 보여서는 안된다. 집안에서 근신하고 있어야 하며 금줄은 샘과 동리의 길가와 제주집 문전에 느리며 동리의 입구에는 황토를 펴 놓는다.

 

제수비용은 대동회에서 정제비로 염출하며 제물은 돼지머리와 떡, 삼색실과, 탕을 쓰고 술은 제주집에서 조라술을 담구어 사용한다. 전에는 소머리를 썼으나 요즈음에는 돼지머리를 쓴다. 제일이 되면 마을 안에 있는 공동우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금줄을 띠어 놓았으므로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는데 제가 끝나고 나면 제주의 소지를 먼저 올리고 다음으로는 세대주의 소지를 고령자부터 나이순으로 올려준다.

 

다음날 새벽 1시쯤 정제가 끝나면 마을회관에 모여서 노인들께 먼저 음식을 드리고 모여서 먹는다. 이 마을에서는 제가 끝나면 밤, 대추 등을 우물에 집어 넣는데 그것을 제일 먼저 건져다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서 부녀자들이 서로 먼저 물을 뜨려고 한다.

 

3.위례산의 이야기

 

입장면 호당리에는 백제군이 고구려군에게 패하고 울었다는 위례산이 있다. 위례산 둘레에는 지금도 옛날을 말해주는듯이 백제의 성터가 남아 있다.

 

한편 위례산정에는 용이 놀았다는 용샘이 있는데 이 용샘은 공주까지 뚫려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고 서해까지 이어졌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서 샘바닥이 보이고 지름이 5m정도 밖에 안되는 조그마한 샘이지만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산마루에는 전쟁 때 백제 임금의 화살막이를 했던 3m정도의 높은 돌이 꽂혀 있고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말구유로 쓰였다는 큰 돌이 두쪽으로 깨어진 채 있으며 동쪽으로는 어느 장군이 시험하기 위하여 돌에 주먹질을 하여 주먹모양으로 파진 바위가 있다. 어쨌든 전쟁과 관련이 많은 이 산에 또 하나의 기이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정하고 있을 무렵 어느 임금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날로 남침해 오는 고구려의 군사를 막기 위하여 왕은 이곳 위례산까지 와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전쟁을 독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백제의 임금은 용왕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온갖 재주를 다 지닌 분이었다.

 

그렇기때문에 왕이 이곳에 올때는 용으로 화하여 공주에서 위례산 용샘까지 땅속 물줄기를 타고 단숨에 왔다고 한다.

 

그 때 백제의 국경선은 이곳까지 밀려와 고구려 군대는 틈만 있으면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왕은 산마루에 화살막이를 큰 돌로 만들어 세우고 그곳에서 백제군을 지휘했다. 백제왕은 천연적으로 유리한 이곳의 지형을 이용하고 온갖 조화를 부려 고구려 군사들이 침입해 올 때마다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야말로 고구려 군사들은 날로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수천명이 넘게 죽어간 것이다. 고구려군은 그래도 계속 이 위례산을 쳐들어왔다. 그것은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하면 지금의 천안까지 고구려의 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이곳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려 그대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고구려는 처음에는 500명씩 군사를 보내어 위례산을 공격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군사를 투입시켜도 고구려군은 계속 패하기만 했다. 백제군이 승리를 거듭하는 것은 두말 할것도 없이 백제 임금이 이곳까지 와서 여러가지 조화를 부려 전쟁을 지휘 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제 임금은 이처럼 날마다 새벽에는 용으로 변하여 공주에서 이곳 용샘으로 나와 전쟁을 지휘하고 밤에는 공주로 가서 낮에하지 못한 정사를 살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는 날로 강한 나라가 되고 있었다. 그간 두려웠던 고구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던 어느 날이었다. 이날도 백제왕은 새벽에 위례산으로 군사를 지휘하러 간 날이었다. 왕실에서는 날마다 낮에는 어디론가 갔다가 밤에만 나타나는 임금을 이상하게 여겼다. 특히 불만이 많던 처남은 동생인 왕비에게 임금이 간곳을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왕비는 자기 오빠에게 임금은 사람이 아니라 용이라는 말을 했다. 가뜩이나 왕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왕의 처남은 임금을 죽이기로 작정했다. 임금의 처남은 용이 좋아한다는 제비를 잡아 낚시밥으로 만들어 가지고 임금이 용으로 되었다가 사람이 되어 나오는 강가로 갔다.

 

마침 해가지고 어둠이 강가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임금이 돌아 올 시간이었다. 왕의 처남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놓고 용이 와서 물기를 기다렸다. 백제의 임금은 용이 되어 공주로 되돌아 오고 있었다. 하루종일 산성에서 소리를 지르며 전쟁을 지휘한 까닭에 그는 피로한데다 시장끼까지 느껴졌다. 그때 마침 용이 가장 좋아하는 제비가 보였다. 그는 너무도 배가 고팠기 때문에 얼른 그것을 물었다. 그러자 왕의 처남은 힘껏 낚시대를 당겨 용을 낚았는데 그 용은 우성면 동대리 마을에 가서 떨어져 죽었다. 그뒤 용이 썩는 냄새가 너무나 지독하여 이곳을 구린내라고 전한다.

 

한편 용을 낚은 장소를 지금도 조룡대라고 전하며 임금이 죽은 이튿날 위례산 전투에서는 백제군이 패하고 말았다. 백제군은 무릎을 꿇고 통곡을 했다. 이처럼 싸움에서 지고 울었다 해서 이 산을 위례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4.번개마을

 

병천에서 동면쪽으로 포장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동면소재지 700m정도 못미쳐 좌측이 화계리 번개마을이 된다.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열나흩날 밤 12시부터 보름날 1시 사이에 지내는데 제사를 지낼 제관은 축관 1인과 제관 1인 그리고 불대장이라 부르는 유사 1인을 선정한다.

 

예전에는 마을에 사람이 들어오면 밖으로 나가지 못했으나 요즈음엔 많이 완화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제일 당일에는 정성을 다하는데 제는 제관 외에는 아무도 참석할 수 없다. 우물을 깨끗하게 청소한 후에 제관의 집과 우물 주위에 황토를 펴고 제장은 마을의 방위로 따져서 제일에 손이 없는 방향에 차일을 치고 제장으로 삼는 완전한 노제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42호가 모여 사는 번개마을은 집집마다 쌀 한 되씩을 걷어서 제수비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제일 전날에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돼지머리와 삼색실과, 포와 미리 담그어 놓은 조라술로 제사를 올린다. 제의 순서는 유교식의 제로 강신-분향-초헌례-고축-아헌례-첨작-종헌례로 이어지며 제일 당일 제관들은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소지는 세대주마다 한 장씩 올리며 보름날이 되면 저녁에 전 주민이 모여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잔치를 벌인다.

 



 

2010.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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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천안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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