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3학년 여학생입니다.
선생님께서 숙제를 내주셨는데요.. 통 잘 안돼서요.
인물과 관련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알아야해요.ㅠ.ㅠ
잘 부탁드립니다ㅠ.ㅠ
(추신:오늘 까지 급해요!!)
내공은 50걸어요.......ㅠ.ㅠ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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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이 한일
유관순은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 등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탑골공원까지 나가 만세를 부르고 돌아왔다.
1919년 3월 2일 학생대표들이 이화학당에 와서 1919년 3월 5일 학생단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고했다.
유관순과 5인 결사대는 1919년 3월 5일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학생단 시위도 참여했다.
이날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은 지금의 남산에 있었던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지만
외국선교사들이 아이들을 내 놓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자 학생들을 풀어주었다.
이렇게 유관순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관순은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 병천으로 내려갔다.
고향으로 내려온 유관순 열사는 동지를 규합했다.
유관순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아주머니들처럼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니면서
병천(竝川), 목천(木川), 천안(天安), 안성(安城), 진천(鎭川), 청주(淸州) 등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총 궐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종용하여 약속을 얻어냈다.
드디어 거사일로 정한 음력 3월 1일의 하루 전인 2월 그믐날 저녁
용두리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 올렸다.
이 횃불이 내일의 거사 신호이며 밀약된 동지들과의 연락 신호이었다.
매봉을 중심으로 구밋들 우각산, 강단산, 백전리 돌산, 세성산, 아우내 장터 뒤 갓모봉, 봉화대, 개목산 등 일곱 개의 산에서 불길이 솟아 올랐다. 거의 같은 시간에 광덕산, 덕산, 화산, 진천의 덕유산, 구도산, 서림산 동남편의 약사산, 청주방면의 수리봉, 남쪽의 백석봉, 남산, 발산, 망경대, 연기지방의 율산, 서남으로 마산, 장명리의 장산에서 또한 횃불이 치솟았다. 모두 24개소나 타 올랐다고 한다. | |
유관순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자주 독립 쟁취를 위한 연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이 동하여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했고 감격에 휩싸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고 이 소식을 듣고 온 일본 헌병들은 평화로운 시위를 하는 군중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다. 이날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총공격에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죄없는 주민 3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유관순도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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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이 한일에 본받을 점
비록 여자의 몸이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3.1운동에 앞장서는 용맹함과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대한민국 독립'을 외쳤던 유관순의 애국심을 본받아야 한다.
200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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