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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천안에서 태어나거나 살아온 역사적 인물은 누가있나요?
smin**** 조회수 2,160 작성일2008.10.19

저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3학년 여학생입니다.

선생님께서 숙제를 내주셨는데요.. 통 잘 안돼서요.

인물과 관련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알아야해요.ㅠ.ㅠ

잘 부탁드립니다ㅠ.ㅠ

 

(추신:오늘 까지 급해요!!)

 

 

내공은  50걸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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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의 일생

12월 16일(음력 11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옛 지명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 여사이다.

이해 12월 2일부터 10일간 광무황제 재위 40년 기념행사와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기념비전이 건립되고, 스웨어러 선교사는 목천지역에서 교회의 사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고했다.
 

12월 7일 유관순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둘째 아들 유인석(柳仁錫)이 태어났다.

2월 9일 러시아와 일본사이의 전쟁이 발발했다. 불안한 사람들이 안전을 구하기 위해 기독교로 많이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관순은 이 전후 시기부터 약 5~6세까지 탑원리에서 살았다는 증언이 있다.

11월 17일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해 감리교 지령리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용두리의 조병옥이 영명소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2월 목천군 청년회에서는 민영환과 조병세 두 충정공에 대한 분향소를 설치하고, 이분들과 같이 순국한 분들을 위하여 군내 복귀정에 사당을 만들었다.

 

7월 19일 광무황제는 일본의 압력에 의해 칙령을 발표하고 퇴위하였다.
4월부터 12월까지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8월 ‘충남 목천 이동면 대지령 야소교당’의 이름으로 82명의 교인과 동리사람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 조인원, 유중무와 유우석의 이름으로 유중권 등 3.1운동의 주역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9월 3일 아침 조치원 북쪽의 소정리 정거장이 의병부대의 공격을 받아 불탔다. 하반기부터 의병운동이 병천 주변에서 격화되었다.
가을(10월 말경) 목천 교회가 일본군의 방화로 불타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군의 총살형을 받고도 구사일생으로 한 사람이 살아나왔다.

 

9월 27일 목천군 기호흥학회가 출발했다. 목천군에서는 이 시기에 보명학교, 수신학교, 녹동학교, 진명학교, 장명학교, 명진학교, 병진학교와 그 후신 홍호학교 등 여러 학교가 설립되고 매우 활발하게 교육운동이 진행되었다. 지령리 유관순의 동리에서는 지령리예수교회에서 ‘진명(명진)학교'를 설립하였다.

 
6월 12일 충북 진천의 다섯 개 학교와 병천학교가 연합운동회를 열었다.
 
이복언니 이계출이 시집가다.
사촌 유경석이 공주 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하고, 조병옥이 평양 숭실학교 입학했다.
8월 29일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다.
 
막내 남동생 유관석(柳冠錫)이 1911년 1월 10일 태어났다.
 
오빠 유우석이 진주 유(柳)씨와 결혼했다.
사촌 유경석이 공주 영명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조병옥은 배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5월 27일 유우석의 어린 신부 유씨가 전염병에 걸린 친정부모를 간호하다 전염되어 사망하였다.
 
6월 6일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되어 목천군, 직산군이 천안군에 통합되고, 면리에 큰 변화가 있었다.
조병옥이 미국 유학을 떠나다. 그는 『신한민보』3.14일자에 「독립의 희망봉」이란 글을 기고했다.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4월 1일 유관순이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서울 정동교회에 손정도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인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오빠 유우석이 공주 영명학교에 입학하였다.
4월 3일 사촌 유경석(유중무의 장남)이 영명학교 출신의 노마리아와 결혼하였다.
 
유경석과 노마리아 사이에 조카 유제경이 출생하다. 유관순은 조카를 위해 뜨개질로 모자를 만들어 선물했다.
 
유관순이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4월 1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진학하였다
6월 감리교 연회에서 정동교회에 이필주 목사를 파송하였다.
8월에 미가 폭등으로 8월 28일 종로소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경성구제회미염매소의 판매소에서 민중소요가 일어났다.
10월부터 스페인독감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인은 전체인구의 3명 중 한명꼴인 742만 2,113명의 환자가 발생해 그 중 13만 9,128명이 사망했다.
11월 11일 4년간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3월 1일 3.1운동이 발발하였다. 유관순은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3월 3일 광무황제 국장례가 거행되었다. 이날은 시위가 자제되었다.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친구들과 함께 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3월 10일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3월 13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 천안으로 왔다. 유예도는 이 때 학교 선배그룹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모금의 사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3월 14~31일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각 부락을 다니면서 시위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3월 31일 유관순,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4월 1일 아우내 만세시위 발발하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 속장 조인원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오빠 유우석은 공주에서 시위운동에 참여하다 부상당해 붙잡혔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다.
6월 유관순과 아우내 만세 주역들이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이에 따라 유관순과 이들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6월 30일 유관순은 경성 복심법원 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유관순은 상고를 포기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8월 29일 유우석은 공주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9월 11일 유관순을 제외한 병천과 수신.성남지역 시위 주도자들의 상고가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었다.
1월 22일 광무황제가 갑자기 서거하였다.
2월 8일 일본 동경 유학생 400여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였다.(2.8독립선언)
3월 14일 오후 4시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명(목천 기미독립운동기념 사업회에서는 171명이라 함)이 교정에서 시위운동을 하였다.
11월 6~11일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천안지역 3.1운동 피해보고와 함께 수감 교역자에게는 20원, 기타 수감자에게는 5원의 구제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유관순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4월 28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결혼기념 특사령으로 형기가 절반인 1년 6개월로 단축되었다.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혔다.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유관순이 한일

유관순은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 등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탑골공원까지 나가 만세를 부르고 돌아왔다.

1919년 3월 2일 학생대표들이 이화학당에 와서 1919년 3월 5일 학생단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고했다.

유관순과 5인 결사대는 1919년 3월 5일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학생단 시위도 참여했다.

이날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은 지금의 남산에 있었던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지만

외국선교사들이 아이들을 내 놓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자 학생들을 풀어주었다.

이렇게 유관순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관순은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 병천으로 내려갔다.

고향으로 내려온 유관순 열사는 동지를 규합했다.

유관순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아주머니들처럼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니면서

병천(竝川), 목천(木川), 천안(天安), 안성(安城), 진천(鎭川), 청주(淸州) 등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총 궐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종용하여 약속을 얻어냈다.

드디어 거사일로 정한 음력 3월 1일의 하루 전인 2월 그믐날 저녁

용두리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 올렸다.

이 횃불이 내일의 거사 신호이며 밀약된 동지들과의 연락 신호이었다.

매봉을 중심으로

구밋들 우각산,

강단산,

백전리 돌산,

세성산,

아우내 장터 뒤 갓모봉,

봉화대,

개목산 등 일곱 개의 산에서 불길이 솟아 올랐다.

거의 같은 시간에 광덕산,

덕산,

화산,

진천의 덕유산,

구도산,

서림산 동남편의 약사산,

청주방면의 수리봉,

남쪽의 백석봉,

남산,

발산,

망경대,

연기지방의 율산,

서남으로 마산,

장명리의 장산에서 또한 횃불이 치솟았다.

모두 24개소나 타 올랐다고 한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3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유관순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자주 독립 쟁취를 위한 연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이 동하여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했고 감격에 휩싸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고

이 소식을 듣고 온 일본 헌병들은 평화로운 시위를 하는 군중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다.

이날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총공격에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죄없는 주민 3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유관순도 체포되었다.

 

★유관순이 한일에 본받을 점

비록 여자의 몸이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3.1운동에 앞장서는 용맹함과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대한민국 독립'을 외쳤던 유관순의 애국심을 본받아야 한다.

200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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