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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5.18 광주민주화운동 공수부대
sill**** 조회수 12,209 작성일2007.08.13

안녕하세요,

근현대사 시간에 5.18민주화운동 부분을 배우면서, 일요스페셜(푸른 눈의 목격자) 영상을 보았습니다.

 

영상을 보면서 물론 분노와 슬픔이 앞섰지만

공수부대원들에 대해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이분들도 지금 사회생활을 하고 계실 거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실 분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때, 무슨 생각으로 시민들을 총칼로 제압한 건가요?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고, 무장 해제 상태인 시민들을요.

더운 초여름 전투복을 입고 여기 저기서 수없이 일어나는 시위를 막아야 하니

그것만으로도 이성을 유지하기는 어려웠겠지만.

 

단지 상부의 명령이라 거역하지 않고 따른 건지, 아니면 흉흉한 소문대로 공수부대원들의 음식물에 약을 탄 건지,  아니면 외부의 또 다른 압력이 있었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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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절대 복종 때문에 존나 잔인하게 사람들을 마구 죽여됬구나

이제야 알겠네 겨우 명령때문에 사람머리 터지고 여자 목을자르고

총을쏘고 터주고 패고 하는거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군대가면

사지다찢어라고 하면 해야겠네? 참 존경스러운 사회다

2007.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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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 우연히 5.18에 대해 알릴 기회가 있어서 준비한 5.18프레젠 테이션 자료를 참고해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참상을 담은 사진은 너무 잔인해 보다가 눈을 감고 컴퓨터를 끄고 말았지만 원하시면 주소만 알려드리죠. 

http://bbs2.hani.co.kr/board/ns_northkoreare/Contents.asp?Idx=63136&STable=NSP_001003010

 

 

5.18은 솔직히 한국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정부는 MBC 방송국등 모든 언론매체를 차단하여 국내 기자들은 광주에 출입금지 시키고 오직 CNN같은 외신기자들만 광주 출입을 허락했고 국내에는 북한 간첩이 선동한 반란이라고 선전했으니까요..

 

 

1.화려한 휴가가 작전명이라고 하던데 무슨의미인가요?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작전명이 화려한 휴가입니다.

공수부대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휴가라고 일컬은 것이죠.

답변을 위해 좀 더 검색해보다가 제가 가장 공감갔던 분의 답변을 스크랩하자면,

 

 

'너희는 시민을 죽이는게 아니라 폭도를 죽이는거다

이것은 살인이 아닌 휴가다 너희가 배운 총술등을 이 휴가에서 마음껏 펼치고오라

화려하게 휴가를 즐기다 와라 '

이의미로 볼수 있습니다.

 

2.왜 하필 광주 였나요?

먼저 1960년 벅정희 정권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독재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집착하였고 솟구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저곡가 저임금 정책은 경제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으며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압살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우선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은 전국적으로 그칠 줄 모르고 전개되었다.

마침내 한계에 도달한 박정희 독재정권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부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온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일당은 오히려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준비하여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다음, 당시 분출되고 있던 전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민주화운동세력과 야당의 정적을 제거해야 했다.

 

그 제물이 광주였다.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온 곳이며 야당의 정적 중에서 가장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있던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 전라도 광주였던 것이다.

전라도 광주는 70년대 박정희 개발 독재 때부터 희생양이었다. 철저히 소외되었고 경제에서는 낙후되었으며 우리 민족을 다시 동서로 가르는 지역감정의 볼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장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마저 내던지며 투쟁해 온 민주투사의 고장이었다.

 

전두환 신군부 일당의 학살만행에 맞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시민전체가 일심동체로 저항하였던 것은 정신적 측면에서든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든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피의 진압으로 5·18민중항쟁은 끝났지만 그 후 청년학생을 비롯한 양심적인 민주인사들과 민중운동에 의해 전두환 일당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움으로서 항쟁의 정당성은 온 천하에 입증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광주는

서울은 물론, 가까운 어느 도시(목포, 여수, 순천, 전주)와도 전혀 연락할수 없는 "고립된 외로운 도시"였습니다.-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

 

 


3.5.18이 발생한 이유와 결말을 알려주세요

1979년 10월 26일 독재 정치를 하던 박정희대통령이 당시 김재규 정보부장(head of the Korean Central Intelligence Agency)에게 암살당하자 전국적으로 민주화의 열망이 뜨겁게 올라오고 있었죠...(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하는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독재정치를 했던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음) 그래서 전국적으로 데모도 많이 일어났는데 이때 전두환이 12.12사테로 알려진 구데타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한 다음 임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에게 압력을 넣어 계엄령를 선포하게 하죠.

 

그리고 그 계엄령을 선포한 다음 데모가 심했던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당시 민주화를 열망하고 개혁을 원하던 대학생들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광주의 대학생들이 데모가 심하자 국가에서 대학교를 폐쇄했고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전남대 정문으로 몰려서 항의하자 군인들이 폭력으로 저지하자 진로를 바꿔 광주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도청광장으로 몰려갑니다. 거기서 시민들과 합세해 데모를 했는데 거기서 진압군이 발포를 시작한 것이죠.

 

(General Chun Doo-hwan declared martial law on May 17, 1980 to suppress student demonstrations around the country. The next day, students in Gwangju protested at the gate of Chonnam National University against the closing of the university, when armed forces blocking the university responded with violent means. After the incident, students moved into the downtown area, where they were joined by the citizens of the city. The growing crowd was met by the use of force, including gunfire, that caused some fatalities.)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덧붙일 내용은 그 사건 전에 김대중씨가 민주화 투사로서 정치판에서 박정희대통령과 맞붙었는데 부정투표로 밀렸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가 김대중대통령에게 억울한 죄명을 씌우고 사형시키려다 실패하자 김대중씨를 묶어서 헬기에서 바다에 떨어트릴려고 했는데 미국에서 이를 저지했죠.

(이는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가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비폭력시위를 하다가 군사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자 국제사회가 이를 비난하며 압력을 가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리고 5.18당시에는 계엄령아래서 계엄 사령관이 김대중씨를 포함한 수 많은 민주투사를 체포하여 시민 선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The Martial Law Command arrested several opposition politicians, including Kim Dae-jung, who was south Korea's president, and charged him with fomenting rebellion. He was eventually sentenced to death.) - from Western Media

 

 

이 이야기를 덧붙인 이유는 이 당시 민주화의 열망의 한 과제가 그 당시 민주투사로 신망이 높았던 김대중씨의 석방이 한가지 광주시민들의 요구였기에 덧붙임니다.

 

 

그리고 이 사건중 광주의 MBC건물이 광주 시민들에 의해 불타게 되는데 그 이유는 MBC가 정부의 간섭에 의해 당시 광주 사건을 간첩들에 의한 폭동으로 전국민들에게 보도를 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특전사들에게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폭도로 매도되자 이에 광분한 광주시민들은 경찰서 등을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여 스스로 무장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광주의 모 자동차공장의 창고에서 탱크를 발견하여 중무장을 하게 됩니다.

 

외신에 보도된 희생자는 191명에 불과하지만 당시 생존자들이나 광주 공무원들은 그 수가 2000에 달한다고 주장합니다.

 

(The government says 191 people were killed in the uprising, but Kwangju officials and survivors insist the figure is closer to 2,000.)

 

 

(너무 어렵게 말고 14살 여자얘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요.)

4.만약에 이런일이 또 생길수 있는 가능성이 있나요?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지않고 반성하고 고치려하지 않는다면 그역사는 또 반복되는것입니다.

전두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죠?

이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5-전두환을 누가 풀어줬는가???????????????/

-전두환 노태우 두사람은 구속2년여만인 1997년12월22일날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습니다.

많은분들이 김대중 전대통령으로 잘못 알고 있더군여.

200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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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이 꼭 지켜야 할것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절대복종' 입니다

 

즉, 상관의 말을 거역하면 군령에 의해 처벌될수 있습니다 물론 부정적 명령은 아니지만..

 

전두환이 명령한것입니다 다른 외부의 압력은 없었습니다 국내에서 일어난 것이기때문에

200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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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이나 처먹어라

2007.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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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m****
영웅
카메라, 캠코더, 풍유동 1위, 국방무기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1.

공수부대 지금은 특전사로 더많이 알려진 부대는 명령체계가 그어떤 부대보다 더 철저합니다. 특수전사령부예하의 직할대대는 비바람이 몰아치는날 그어떤 비행기도 이륙안하는데 위에서 명령이 내려오니까 죽을 줄 알면서도 비행기뛰어서 제주도에서 추락해서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그만큼 명령체계가 확실한 곳이 공수부대입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려지면 그것이 옳고 그름을 구분하기전에 무조건 수행하고 봅니다.

지금 참여정부에서 특전부대에 근무한 예비역들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

12.12반란이후 반란군도당들은 봄이되면 민주화운동이 격해질것을 예상하고 공수부대전장병들의 외박,외출,휴가를 금지하고 강도높은 시위진압훈련을 실시했습니다. 거의 반년을 외박외출휴가없이 지낸다는거 군복무를 해본사람이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겁니다.

거기다가 해당 초동진압부대는 익산에서 서울로 광주로 혹은 강원도에서 서울로 다시 광주로 이동하면서 많이 지친상태에서 광주에 내리자마자 진압활동을 실시해서 많이 피곤해 있었습니다. 그게 다 자신들의 교육받은 상태로 보자면 빨갱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그사람들 가만 두겠습니까? 이러한 이유가 과잉진압을 일으킨거죠

 

3.

지금이야 특전사령부의 노력으로 국민들은 검은베레모를 보면 멋있다.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아들들이다. 이런생각을 하지만 근 한 10여년전만 하더라도 그들이 스키장에 들어가면 아무도 돈을 못받았습니다. 그당시 스키장 이용비 엄청비싸죠 특히 통합위장복 이전에는 특유의 독사복(얼룩무뉘)와 검은베레는 경외감을 넘어 약간 공포의 대상이였습니다.

특전사보다 한수아래로 평가되는 해병대조차 두어명이 육군열차에 뛰어올라 모자에 돈을 걷고 반항하면 실컷두들겨 패는시절에 공수부대원들은 휴가시 권총을 차고 있을정도로 위용이 대단했고 그것은 전두환을 필두로한 끗발있는 장교들 때문이기도 하죠

말이 세었습니다. 그정도로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되는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에서 한사람 죽도록 패니 겁먹지 않고 수십수백명이 달려들면 당황하고 겁도 나죠. 부산마산에서만 해도 동일한 방법으로 진압하면 사람들이 우 달아나는데 정반대 현상이니.

그래서 겁을 먹은 공수부대원들이 과격진압을 하게 된이유 입니다.

 

상부명령 거역하지 않고 따른건 맞고 외부의 다른압력이란말을 모르겠고 중공군이 옛날 한국전쟁시 아편을 타서 먹였다는 기록은 있는데 공수부대원에세 무슨약을 탄건 아닙니다. 그런약을 탔다면 수많은 예비역이 그렇게 정신적 괴리감을 느끼며 살진 않겠죠

 

단지 약을 먹은놈들은 전사모인지 뭐니 해서 광주민주화의거를 폭동이라고 하는 놈들이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이상 migmfi2052의 답변이였습니다.

200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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