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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help! 『기독교 믿는데 동성애 문제』로 혼란스러워요ㅠㅠ
rainyjain 조회수 22,525 작성일2004.03.21
샬롬~^^ 안녕하세요? 저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있고 피아노 반주를 하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방금 홍석천이 tv에 나와서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이상하게 보는 것이 싫다고 하더군요. 당연히 저같아도 힘들고 슬플 것 같아요. 동성애자라는 것을 숨기고 사는 것도 정체성 문제로 괴로울 것 같고.. 차라리 밝힌 것이 나은 것 같아요.
문제는 기독교.. 즉 성경을 보다 보면 이성간의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은 죄악이라고 나온다고 하네요. 혼란스러워요. 홍석천은 자신이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닐텐데.. 물론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보면 인간도 태어나기 전부터 원죄가 있죠. 하지만 아무리 나쁘게 보려고 해도 저는 홍석천이 하는 말들을 들으면 불쌍해요. 홍석천이 방금 뭐라고 했냐면요, "한국민들은 맨 처음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을 피하고 거부해요. 제가 커밍아웃 한지 4년이 됐는데, 그래도 요새는 조금씩 생각들이 변화되어가는 것 같아요. 요새 많은 분들이 동성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시는 같아서 좋아요. 그리고 저 때문에 많은 동성애자분들이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실 거라고 믿어요. 왜 주류가 비주류를 그렇게 비난하고 배척하는지 참.." 이래요. 여러분~ 기독교인으로써 홍석천과 동성연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나요? 또 이성간의 사랑만 합당하다고 생각해야 하나요? 하지만 동성연애에 대해 제 마음에 동정과 이해가 파고드는데 어찌할까요? 솔직히 말해 친구들이 "야, 넌 동성연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하면요~ 저는 "뭐, 자기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만 특히 꺼리잖아. 불쌍해. 같은 사람인데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따시키는 건 바보같다고 봐." 이렇게 말하고 싶거든요? 하지만 기독교인으로써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늘 우물우물거린답니다. 여러분~ 저는 성경에 대해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답변을 기다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구요, 성경과 기독교에 관해 확실한 지식을 갖고 계시다면 빨리 답변 버튼을 클릭해주세요^^. 그럼 언제나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2004.03.21.SUN
21:5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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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 답변
5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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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답변
구약에서는 가증한 일을 하는자는 죽이라고 했지만 신약에서는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부정한 짐승 또한 (돼지고기 포함) 먹을수 있게 됐죠..

실제로 고넬료를 만나기 직전에 베드로는 환상을 통해 부정한 것들을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죠..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사람이 부정하다 할수 없다며 하나님께서 시키

신 일이에요..

이걸로 미루어 볼때, 이세상은 하나님안에서 부정한 것들이 점차 믿음으로 깨끗하게

되고 있는것을 알수 있어요..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중에 용서받을만한 자들만을 위해 이땅에 오신것이 아니라, 에덴

동산시절이후 사탄에게 조종받고 있는 불쌍한 모든 인류를 위해 이땅에 오신것이

명백한데,,, 그런 사람을 특별한 집단에 속박해 놓고 미워한다면 주예수의 복음이

그사람에게 만큼은 무색해 지지 않겠어요?

이땅에 귀중한 생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모두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조금 다르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일은 없어야 할것 같아요..

우리 기독교인들이 먼저 앞장서서 포용해 나가야 하고..

남을 의식해서 마음은 아닐찌라도 이방인 처럼 정죄하는 일은 없어야 할것 같아요.

오히려 그들의 있는 모습그대로의 삶이 더욱 행복해 지도록 잠깐씩 기도해주고

그들의 변호인이 되어주는 용기가 있어야 할것 같아요..

친구들 앞에서 당당히 변호해 줄줄 알면 어떤 모습으로 이땅에 오시든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도 있을것 같아요..

그럼, 착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녀로 성장하시길 빌며...

200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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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mmm****
중수
대학 입시, 진학, 번역, 통역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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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기독교신자이기전에

한인간으로써한동물로써생각해보세요

자신의생각보다중요한건없어요 ^^

200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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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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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m****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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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자에게만 해당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순종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동성애자, 짐승과 교합하는자, 간통한 자 등을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기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심판 받게 된 도시나 나라나 이 세상의 말세에 나타날 징조 중에 하나가 동성애자들의 출현입니다. 말세가 다가오면 대머리도 는다고 했구요, 그때가 가까와지면 질병이 창궐한다고 하구요, 처처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했구요, 나라가 무화가 잎많큼 나뉜다고 했구요. 정확한 구절은 성경에서 찾아보세요.

언제인지는 사람에게 감춰진 비밀이라 아무도 모릅니다만, 그때가 가까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이 모든 족속과 방언에 전파되어야 비로서 그때가 온다고 말씀하셨고, 그때와 심판을 강도를 감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자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살인자를 용서해주시고, 도둑질한 자도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회개치 않는자를
또한 하나님은 성령을 훼방하는 자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은혜를 져버리고 배교하여 이단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하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하한 것 가증한 것이라고 한 것을 가증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죄가 바로 거짓 선생의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었는지 아닌지는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우리는 결코 알 수 없고, 판단해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현혹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세요.

2004.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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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이
식물신
개신교 18위, 생리, 피임, 사람과 그룹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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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이해해 준는 마음은 무엇보다 귀함니다.
개인적으로는 홍석천이던 하리수던 이해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생의 원리입니다.
짐승이던 사람이던 음양의 원리와 이성의 차이를 생각해야 합니다.

동성자들의 잘못은 그냥 정신적인 애정을 갖는 것에서 문제가 되는게 아닙니다.
이성간의 육체적 관계 문제가 있는 겁니다.

로마서에 동성을 금하라고 했습니다.
요즘까지 에이즈가 남모르게 확산되고 일부러 퍼트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전해지는 때에 동성자들은 더욱 곤역을 치루고 눈치를 보게 되는 겁니다.

여자는 여자끼로,남자는 남자끼리 다른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애정을 가지는 것이 또는 그런 상태가 된것이 본의가 아니고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므로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바꾸어 비교해 보면 과거에 나병 환자들은 일반인들과 가까이 있을수가 없어서 따로 집단을 이루던가 소록도 같은 외지에서 살았습니다.
또 정신병원 환자들을 생각해 보세요.
자기의 정신을 빼앗기고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며 모든것을 인정받지 못하고 삼니다.
육체 장애자도 그러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성자들의 경우를 정신적으로 보면 병의 일종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꽃이 이쁘다고 보는 것이 정상이라면,남자의 눈에 여자가 이뻐 보여야 하는데 남자가 이뻐 보인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죠.
이는 뇌의 작용에서 오는 겁니다.
눈이 그러는게 아닙니다.
뇌에서 판단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동성자들은 먼저 정신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요즘 복제 인간 운운도 문제이지만 동성이나 하리수 같이 인위적인 성전환도 문제입니다.

다만 이런 점에서 우리가 대해야 하는 입장은 그들을 위로 해야 하지만 그런 상태를 정당화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이는 위에 말한 것처럼 정신 이상을 정상으로 보는 경우와 같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곳의 여러 종교적 사상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주장하는 교주들의 경우도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백병원 담당 의사가 말한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른 사고를 가질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할일 입니다.

200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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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o****
초수
개신교, 가톨릭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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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관련 문제들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동성애 문제는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현제 전세계 기독교계에서 가장 첨여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지 옳다 그르다의 단순한 문제는 아닌 것같습니다. 아래 두 개의 글을 싣습니다. 전에 저도 동성애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인터넷을 뒤지다가 복사해 놓은 건데, 출처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처음 글은 어떤 목사님이 쓰신 동성애 반대론이고 두번째 글은 어떤 교수님이 쓰신 동성애 우호론입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적극적인 찬성론은 없는 것 같습니다. 두 입장을 비교해서 보시면서 생각을 정리해보시길... (참, 나도 궁금한게 있었는데, 성경적인 기독교인들은 하리수 나오면 TV 꺼버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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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본 동성애 :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난 죄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이 받았느니라"(로마서 1:26-27)

홍콩 영화배우 장국영의 자살. 그 배후에는 동성애가 원인인 삼각관계가 있었다. 동성애 문제는 더 이상 밀실에 있지 않다. 우리 사회 속에서 동성애는 이제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5년부터 대학 내에 동성애자 모임이 결성되기 시작한 이후 '동성애자 드러내기'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밀실을 뛰쳐나온 '동성애'는 이제 사회의 한 단면을 차지하려고 위험스런 날개 짓을 계속하고 있다.

동성애자들은 이제 밀실에서 벗어나 날개 짓을 하며 세상의 창공을 날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날개는 가상 날개일 뿐이다. 그런데도 동성애자들의 몸부림은 세상 풍조의 응원에 힘입어 수면 위로의 부상했다. 그들의 드러내기는 가상 날개인데도 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 '또 하나의 사랑' 인정해달라 아우성

신세대 동성애자들은 게이나 레즈비언을 "또 하나의 사랑"으로 인정해 달라고 사회를 향해 당당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동성애의 권리를 인정받는 미국이나 호주,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을 꿈꾸고 있는 듯 하다.

90년대 초반부터 우리 사회 속에서 '사포'라는 외국인 레즈비언 단체를 시작으로 93년 '초동회', 94년 게이 단체인 '친구사이', 레즈비언 단체인 '끼리끼리'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동성애 전문 월간지 '버디'가 탄생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공개적인 동성애 모임의 효시는 '초동회'였다. 93년 결성된 '초동회'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혼성 모임이었으나 게이와 레즈비언 회원간의 견해 차이로 '친구사이'라는 게이들의 모임과 '끼리끼리'라는 레즈비언들의 모임으로 이분화되었다.

그후 연세대 안에는 '컴 투게더' 서울대에는 '마음 001'이라는 모임이 활동하기도 했다. 동성애 월간지 '버디'에 따르면 인권단체, 친목모임 등을 합친 동성애 단체는 전국적으로 1백 개가 훨씬 넘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드러난 동성애자들은 5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밀실에 있는 동성애자들을 포함하면 상당한 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동성애 문화 공간들은 하나 둘 늘어만 가고 있다. 낙원동이 구세대 게이들의 집합 장소였다면 이태원, 신촌은 신세대 동성애자들의 놀이장이 되어 가고 있다.

신세대 동성애자들은 이태원, 신촌 등지에 새로운 문화 공간을 만들었다. 수십 개의 게이들만의 공간이 만들어졌고 수십개의 레즈비언 카페, 단란주점, 나이트 클럽 등이 생겨났다.

또한 사이버 공간도 이들이 만나는 새로운 교류의 장이 되고 있다. 인터넷의 게이, 레즈비언 사이트, 천리안 하이텔 등의 통신 모임, 153 전화사서함 등이 90년대 후반부터 동성애자들의 공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휴대폰, PC, 인터넷의 저극적인 등장으로 한국 동성애 문화의 혁명을 가져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동성애자 숫자는 5백50만 명에서 1천5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뉴욕,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등 25개 주요 도시에서는 93년부터 공식적으로 동성애자 부부에게 '동거인 증서'까지 내주거나 육아 휴가를 인정하고 있다.

이런 동성애자 인정하기는 동성애 관련 사업의 호황을 이끌고 있으며 인구 2억 6천만명의 6%로 추정되는 동성애자들이 새로운 소비 구매층으로 기업인들의 관심 있는 고객이 되고 있다. 영화, 여행, 술, 패션, 서적 등이 게이들을 표적으로 삼는 업종이다.

수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동성애자 자존심 회복운동'에는 전세계 15만 명의 동성애자들이 참석, 거리를 메웠다. 이날 행사장을 찾은 동성애자들의 동일한 주장은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지구촌의 동성애자들은 '또 하나의 사랑'을 묵인해달라고 아우성들이다.

그러나 그런 아우성은 동성애 행위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면에 파생되는 연관된 죄들을 인정해 달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동성애자들은 변태적이고 은밀하며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갖기 때문에 AIDS라든지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고 마약이나 코카인 등 약물을 이용해 몸과 영혼을 파괴하기도 한다.

# 커밍 아웃(Coming Out)
공개적으로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는 H씨는 전형적인 '이중 생활자'이다. 겉으로 보면 그는 명문이라 불리는 의대를 졸업한 유망한 예비의사이며 집안, 학벌, 장래 등 그 어느 하나도 거리낄 것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외형적 조건이나 모습이라는 가면 속에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살 수 밖에 없다. 이유는 우리 사회 속에서 호모로 손가락질을 받는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다. 이중적인 삶을 스스로 운명처럼 여기고 있다.

그의 선배 동성애자 의사들은 대부분 상류층에 살기 위해, 싫어하면서도 이성과의 결혼 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마치 노동하 듯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지만 그들의 욕망은 결코 그 속에서 충족되지 못한다.

구세대 동성애자들은 허기진 욕망을 채우기 위해 게이 문화의 메카라는 서울 낙원동이나 신당동, 창신동, 남산 등지의 게이바, 극장, 찜질방, 공중화장실, 숲 속 등 후미진 곳에서 광란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죽어서 무덤까지 가야할 비밀로 여긴다.

그러나 신세대 동성애자들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드러내는 커밍 아웃(Coming Out)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탤런트 H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을 상대로 커밍아웃을 했다.

의사, 간호사 등이 참여해 만든 '동성애자 의료인 모임'(동의모)이라는 반공개 모임이 있고 익명성이 보장되는 PC통신, 인터넷, 전화사서함 등 사이버 공간 속에서는 대담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편 게이 인권 단체인 '친구사이'에서는 "청소년 동성애 학교"를 열어 동성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성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동성애의 얼굴 들기 한 부분이며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인권을 내세워 동성애자들이 권리 주장을 할지도 모른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한국 대학 동성애자 인권 운동 협의회"라는 단체가 결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킴스넷에 따르면 남자 대학생의 71.%, 여자 대학생의 39.7%가 동성애에 대해 혐오스러우며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부분의 남자 대학생들은 동성애를 정상적이지 않은 행위로 보고 있으나 여자 대학생 쪽이 다소 우호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은 "용기"라고 볼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발가벗은 모습으로 대로를 뛰어 갔다면 그 사람이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들의 드러내기는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동성애가 생활화된 현 상황을 인정해달라는 시위일뿐 설득력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 왜곡된 성문화 대표선수
대부분의 기독인들은 성(性)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서 혼란 가운데 빠져 있고 당혹감을 느끼며 일관된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성에서 느끼는 긴장을 종종 사도 바울이 "육체의 욕정"이라고 이름 붙인 것과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헌신'이란 마치 성적 충동에 대항해서 하나님 편에 서야 하는 것으로 느껴지고 또한 성을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경쟁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들은 성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기독교의 오랜 전통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미친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에 대해 저항하라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성에 대항하라는 소명으로 해석했다.

모세의 율법에는 성에 관한 다른 흥미로운 도덕적 규범들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비극적으로 자신의 성기를 상실한 남자는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특권을 박탈당했다.

성경은 "신낭(腎囊)이 상한 자나 신(腎)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명기 23:10)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서 '신'은 신장, 콩팥, 남자의 생식기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아내의 월경 기간 중 부부가 성관계를 가진 것이 발각되면 추방되기도 했다. 성경은 "누구든지 경도(經度)하는 여인과 동정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었고 여인은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었음인즉 둘 다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레위기 20:18)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성이 창조 섭리의 일부라는 것을 생각할 때 성 자체의 문제보다는 왜곡된 성 개념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왜곡된 성문화의 선두주자는 '동성애'라 할 수 있다.

토머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동성애가 왜곡된 점은 임신의 가능성을 배제한 성행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오늘날 많은 이성애자들이 자식을 낳을 의도 없이 성 관계를 갖고 갖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퀴나스의 생각은 왜곡된 동성애 표현의 일부분일 뿐이다. 주목해야할 중요한 부분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역행한 불순종의 행위라는데 있다.

동성애는 성문화를 왜곡해 쾌락이라는 단어와 본질을 같게 만든다. 짐승들은 동성애가 없다. 본능적으로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오직 사람만이 성을 왜곡해 동성애를 하는 것이다.

또한 성행위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 따라서 바른 성행위는 이성간의 결합만이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애자들이 이성에게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늘 한결같이 "운명"이라는 단어로 일축하고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운명이라는 단어는 동성애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거역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운명이라면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의 모습으로 그 역할을 하며 창조주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 타락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보라
동성애자가 되는 경우, 흔히 알려진 것으로는 두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심리 분석적 이론인데 이들은 프로이드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공통점이다. 즉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망에의 공포증이나 혹은 오디포스 콤플렉스에서 온다는 것이다.

둘째는 비정상적인 가정 환경에서 온다는 견해이다. 예를 들면 어머니의 지나친 보호와 사랑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맛보지 못한 아들은 동성애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 분석적 견해와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우리는 동성애란 의식적 선택이 결과가 아니라 심리적, 사회적 콤플렉스의 결과로 오는 일종의 병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성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격의 총체적 발전으로 연합되어야 하며 결혼 과정을 통한 인격적 관계 내에서 표현하고자 해야하며 영속적인 이성애적 연합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인격이 없는 성은 부부 사이일지라도 겁탈일 수 있으며 동성끼리의 결합은 하나님의 순리를 역리로 사용하는 것이 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둘이 한 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의 성은 이성간의 결혼에서 그 절정을 이루도록 하나님은 계획하셨다.

우리는 성경적인 척도들이 하나님의 의도를 진실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믿음의 기초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의 상식이나 경험 가치관으로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동성애가 필요한 것이라면 허락하셨을 것이다.

타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은 성적인 타락과 극도로 사악한 행위에 대한 결과였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들려 오는 부르짖음을 듣고 그 사실 여부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두 천사를 보내셨다.

이미 소돔의 죄악을 낱낱이 아시는 주님께서 다시 한번 이를 확인하려 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이루려는 성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죄인들의 심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심사숙고하고 신중하게 처리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결코 경솔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보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자 그 백성들이 롯의 집을 애워싸고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과 상관하리라"(창세기 19:5)며 소란을 피웠다.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는 말은 다시 표현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알게 하라"는 의미이며 히브리어에서 '안다'는 의미를 쓰이는 '야다'는 성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동침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소란은 나그네의 모습을 한 천사들과 동성애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내어 달라는 것이었다. '소돔'(Sodom)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영어인 '소도미'(Sodomy)가 남자끼리 하는 성행위인 '남색'이나 '동성애'를 지칭하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불의하고 사악한 부르짖음 앞에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 했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성과 들 그리고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던 것이다.

# 가증한 일, "하나님의 유업 없다"
성경에서 동성애는 하나님 창조 섭리에 순리적이지 않고 부끄러운 일이며 무신론적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구약성경은 동성애적 행위를 금지하며 그것을 행하는 자의 머리를 요구하고 있다. 동성애를 행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

성경은 "누구든지 여자와 교합하듯이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위기 20:13)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위기 18:22)고 경고하고 있다.

신약성경이 동성애의 관행을 용납하지 않기는 구약성경과 마찬가지이다. 비난을 덜 받을 만한 여러 다른 행위와 함께 동성애는 그것을 행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을 잃게 한다.

성경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 辱)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린도전서 6:9-10)라고 말씀하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결정적인 판결은 하나님께서 성을 제멋대로 사용하게 내버려두었을 경우 인간의 삶에 일어난 일들을 묘사한 것이 로마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이 받았느니라"(로마서 1:26-27)

구약시대에서부터 이런 율법적 경고가 있었던 것을 보면 동성애가 오래 전부터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는 이면에는 늘 사단의 사악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단의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간의 형상은 하나님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최대 걸작품인 인간이 파괴되는 모습 속에서 사단은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정면으로 도전하는 배역행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가르치는 인간의 성규범은 인격적인 관계 내에서 부부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성애적 연합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는 어두운 영이 지배하는 사단적 요소의 산물이며 성경은 명백히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동성애의 경고 메시지를 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은 우리에게 좋은 예가 되고 있다.
< 나관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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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분이(한성신학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


1. 시작하면서

서구사회는 동성애(Homosexuality)라고 부르는 것을 용인하고 받아주는 사
회로 우리는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서구라파에서는 동성애운동이 적극적
이고, 긍정적 측면으로 표면화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
로 사회는 동성애적인 사고의 대중적인 표현을 ‘나쁜’, ‘죄가 있는’
혹은 ‘개인적인’것으로 통념화한다. 따라서 오늘날 동성애자들의 정치
는 이러한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드러난다. 요즈음 잡지나 영화 그리고 소
설과 같은 대중문화 속에서 이와 같은 도전들이 반영되는데 이것이 동성애
자들의 정치적인 발언일 때가 종종 있다. 이와 같은 운동의 목표는 그들
에 대한 지지뿐만 아니라 대중 인식의 변화를 도모하고, 성적인 억압에 대
한 문제를 공론화 시키는 것이다.

서구사회의 성혁명은 대체적으로 20세기 전반기에 발생했다. 그것의 특징
은 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 의학의 발전, 여성의 해방, 종교적, 사회적 이
완에 따른 성적 태도와 행위의 급변에서 찾을 수 있다.(1) 성혁명의 바람
이 우리 사회에서도 불기 시작했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세계적
인 조류로 이변해가는 상황에서 특히 동성애를 논한다는 것은 금지된 영역
으로 피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다만 공개적으로 정치, 사회, 종교, 집단
화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 동성애 그룹은 분명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며 이
미 동성애에 관한 담론이 나오고 있다.

이제 교회는 최근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던 인권문제, 민주화, 통일, 환경
문제와 더불어 더욱더 심각해질 성폭행, 성희롱, 여성성직자 임명, 낙태
그리고 특히 동성애 해방같은 문제들에다 서구 쪽같이 인간의 성성
(Sexuality)의 문화적-종교적 견해에 도전하는 문제들을 다루어야 할 때
가 임박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와 기독교 신학은 이제 동성애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해석
이 요청된다고 필자는 느끼고 있다. 동성애는 단순히 심리적으로 무엇인
가 잘못된 것으로 성서가 우리를 그렇게 가르쳐 왔다. 따라서 더 이상 동
성애는 개인적인 도덕의 문제로 취급할 수 없다고 믿는다. 오히려 그것은
공공연한 공동의 대책정책으로 그들을 다시 고려해야 한다. 사회에서 교회
에서 그들을 억압하거나 소외시킬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인간의 성성(Sexuality)을 논의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의 실재적 정의를 명심하여 혼란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Sex)이란 용
어는 보통 영어에서 생식 행위를 일컫는데 사용된다. 성성(Sexuality)이라
는 말은 남성과 여성으로 우리를 규정하는 행위 전반을 일컬어 사용되어진
다.(2) 연합 그리스도교회(United Church of Christ)가 인간의 성성에 관
하여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성성(Sexuality)이란 각 개인의 개성이 지니
는 중심적 차원이기도 하지만 그 개성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자
기 이해와 세상과의 관계의 핵심적 구성요소이다.”(3) 오늘날 성차별주의
는 선입관을 가지고 여성을 대하는데, 쾌락이나 번식을 위한 남성의 욕구
를 만족시키는데 이용되는 생식적 성행위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성차별주
의는 이성애주의로 이끌려지는데 이것은 동성간의 사랑을 선호하는 자들
을 열등하거나 인간의 존엄성이 결여된 자로 보는 사고 방식이다.(4) 그러
나 이제 우리는 동성애자들의 문제를 인권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하고 그
들의 주장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구에서는 동성애자들의
운동이 70년대에 비해 상당히 진행되었고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동성애
에 대한 법정 개정의 측면과 더불어 그만큼 동성애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우리는 문화적 측면에서 신학적 성찰이 요구되며 따라서 교회는 동성간의
사랑이 인간 사랑의 정당한 사랑의 형태가 되는 가능성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발제문을 통해서 동성애에 대한 성서적 입장
을 재조명함으로 동성애자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사고의 전환을 가져 보
려는 것이다. 성서는 도대체 동성애와 성에 대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교회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2. 성서와 동성애


동성애를 언급한 성서를 골라 해석할 때 우리는 몇 가지 해석상의 원칙을
마음에 둘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우리는 해석상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
이 인간 역사에 직접 참여하시고 온전한 인간해방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
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은 성서가 쓰여졌을 때의 역사적-문화적 배
경과 맥락을 이해하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로 재조명
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기독교인들의 경험과 사고와 그 문화와의 관계를 인식하면서 성서
연구에 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성서해석은 인간의 문제점을 풀어가는 과정 속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진리를 향해 완전한 개방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1) 구약의 입장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신구약에서 죄로 말미암아
멸망한 것으로 잘 알려졌다. 그 죄가 바로 동성애라고 이해하고 있다(창세
기 18:16∼19:38). 소돔의 이야기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내용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동성애의 개념이 가장 희박한 성서
구절이 바로 이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두천사가 두도시(소돔과 고모라)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두도시를 멸망시키시기로 결정한다. “소돔과 고모라
에서 들려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
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더 이상 어떤 류의 죄/죄들이라는 언급이 없
다.

소돔에 있는 마을에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롯(Lot)에게 소리치기를 “오늘
밤 너희 집에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들을 우리에게로 데리고 나오너
라. 우리가 그 남자들과 상관 좀 해야겠다.”(창 19:5). 그러나 롯은 남
자를 “알지 못하는” 딸을 주겠다는 대답을 한다. 여기서 우리나라 번역
으로는 ‘상관 좀 해야겠다’ 또 ‘알아보겠다’라고 되어 있으나 ‘안다
(Know)’라는 말은 이 히브리 성서(구약)에서는 수없이 썼다. 히브리어
‘Yada’라는 말은 “to know” ‘안다’라는 의미다. 성의 관계를 직접
하는 것으로는 ‘Yada’라는 말을 7번을 썼다(에덴동산과 같은 곳에서). 7
번을 썼을 때도 출산의 목적으로 했을 때였다.(5) 그 도시 사람들은 낯선
외지 사람으로부터 어떤 불미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 사
람들을 내놓으라고 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롯이 자기의 딸을 주겠다고
한 것으로 보면 그 사람들은 동성애자가 아닌 이성애(Hetero-sexuality)
혹은 양성애(Bisexuality)자들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틀림없이 남
성 동성애(Ga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
가 있다. 이 본문을 가지고 굳이 성적인 죄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동성애
의 행위가 아닌 오히려 양성애/이성애 경험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신약의 여러 곳에서 ‘죄’를 언급할 때 소돔/고모
라를 들어 말한다. 그러나 이곳들의 멸망의 죄가 ‘동성애’라는 언급은
없다.(6) 대부분의 성서 본문은 죄라는 것은 외지 사람들에게 불친절한
것,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것, 우상을 섬
기는 것 등등을 가리켰다.

다음과 같은 성서 본문 속에는 단순히 “소돔의 죄”라는 언급을 했을 뿐
이다. 예를 들면 신명기 29:22∼29, 에스겔 16:44∼50, 마태복음 10:14
∼15, 베드로전서 2:6∼8, 유다서 1:7 등등이다. 만일 동성애가 소돔의
죄였다면 그 본문에 언급을 했을텐데 전혀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다
만 소돔과 고모라에서와 같은 “무법한 행실, 비도덕한 행위”, “음란에
빠져”라는 표현을 썼다. 그것이 동성애인지 이성애인지 확실하지가 않
다. 오히려 롯의 태도로는 이성애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서는 이제 더 이
상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동성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동성애를 논하는데 더 이상 참고가 될 수 없다.

신명기 23:17∼18은 “이스라엘의 딸은 창녀가 될 수 없다. 또 이스라엘
의 아들은 남창이 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오히려 이성애
의 성관계를 언급한 것이지 동성애의 행위가 합법적인지 아닌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구약성서에서 특히 동성애를 확실히 정죄한 본문이 레위
기 18:22(원칙을 말함)에서 볼 수 있다. “너는(남자)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된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 또 레위기 20:13에는
형벌에 대한 언급이다. 즉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으로 반듯이 사형에 처해
야 한다. 그들은 자기 죄값으로 죽을 것이다.” 레위기에서 표현한 “망측
한 짓”, “혐오스러운 짓”이라고 언급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히
브리 민족의 문화적 배경에서 설명되어져야 한다.

레위기에서 정죄한 이유를 뒷받침 해주는 성서본문은 창세기 38:1∼11을
보면 알 수 있다. 창세기 38:1∼11에 나타난 오난(Onan)의 이야기는 직접
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고대 이스라엘 문화권에서 정죄하는
이유의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주는데 뒷받침을 해주고 있다.(7) 이 본문
에 나타난 중요한 사건은 “정액을 땅에 쏟아 버렸다”는 것이다. 형이 죽
은 후에 오난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해서 동침할 때마다 임신하지 못하도
록 정액을 땅에 쏟아 버렸다는 것을 창세기 저자는 대단히 심각하게 해석
하고 기록하면서 악한 일로 여기고 주께서 노하셔서 오난을 죽게 했다는
것이다.(8)

여기에서 우리는 세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로 히브리 사람들의 성의
관계는 인간을 출산/생산하는 목적에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작은 집단
의 족장들이 외부의 도전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필요한 다수의 인간
출생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잉인구로 고민하는 우리들의 상황과는 엄
청난 차이다. 출산에 대한 규범은 재검토되어야 할 우리들의 과제다.

둘째, 성서 전체를 통해서 생물학적인 무식에서 오는 잘못된 해석이다. 남
성의 정액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명을 낳게 하는 것으로만 믿고,
또 여성은 애를 갖는 공간으로만 즉, 씨받이로만 취급했다. 그러므로 비생
산적인 정액의 흐름은 인간생명의 파괴나 살인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성수음(Masturbation)과 남성 동성애의 행위는 생명을 죽이는 낙태와 살
인으로 인정했다.(9)

셋째, “남성이 여자와 교합하듯 남성과 교합하면”(레위기 18:22) 그것
은 특히 남성의 인격을 저하시키는 것으로 위태롭게 생각했다.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남성들까지 타락시키는 것으로 인정했다.(10) 그러므로
남성의 수음이나 남성의 동성애는 유대 기독교 전통에서 여성의 동성애보
다 훨씬 비판적이었다. 유대문화의 남성 우월주의인 가부장제는 계명에서
도 잘 나타나 있지만 남성의 동성애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언급하고 있으
나 여성의 동성애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은 찾아볼 수 없다. 성차별은 고
대 유대문화 속에 남성우월주의로 고정화되어 왔음을 엿볼 수 있다.


2) 신약에서 바울의 태도


신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예수 자신이 동성애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11)

고린도전서 6:9, 디모데전서 1:10에 나타난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희랍
어로 ‘Malakos’라는 뜻으로 문자 그대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다. 동
성애로 번역된 말은 바울 자신이 희랍어로 사용한 ‘arsenokoitai’이다.
희랍어 ‘malakos’는 신약성서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연약한으로’
번역하지 않고 가끔 방탕한 음란한 뜻으로 사용한다. 만약에 우리가 ‘연
약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로 썼다 할지라도 그것이 동성애자들만의
행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해당하는 우리 말 뜻으로는 동성애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연약한’, ‘부드러운’이라는 의미에는 이성애
자들도 포함된다.(12)

19세기 카톨릭에서는 ‘malakos’를 동성애와 관련해서 생각했다. 그 전에
는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mastubation’(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
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성서 번역도 ‘malakos’ 를 동성애로 해석한 것
은 원어인 희랍어와는 다른 해석인 것이다. 우리가 주의해서 희랍어 원전
을 보면 동성애로 해석하고 있는 희랍어로 ‘arsenokoitai’도 동성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특히 바울이 사용한 말이다. 바울이 동성
애에 해당하는 말을 희랍어로 찾아 쓸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고 생각한
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리스인들은 동성애에 대한 사랑과 이성애에 대한 사랑
을 배타적인 두개의 선택이나 근본적으로 다른 두개의 행동 유형으로 대립
시키지 않았다.(13) 즉 그리스 문화는 동성애에 대해서 수용적이며 개방적
이었기 때문에 희랍어에서 얼마든지 동성애를 표현하는 말들을 바울이 찾
을 수 있었다. 4세기에 성서가 라틴어로 번역되었을 때 ‘arsenokoitai’
라는 말을 남창으로 번역하였다.(14) 다시 말하면 고전 6:9, 딤전 1:10
에 나타난 동성애라는 언급이 원전의 의미와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있으므
로 동성애를 의미하는 것인지 매춘인지 확실하지 않다.

로마서 1:18∼32은 인간의 갖가지 죄를 언급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한 죄
를 강조하고 있다(22절). 주의해서 읽어보면 바울은 우리가 모든 만물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발 달린 짐승을 숭배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
므로 이러한 우상들 때문에 사람들을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는 것
이다(23절).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울 섬겼다는 이유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가 서로 ‘바른 관계’를 버리고 바르지 못한 관계로
욕정에 불탔으며(26절)로 표현되어 있으며 결국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벌
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이 성서 본문에는 두 남성 혹은 여성이 서로 사랑
을 주고받았다는 말이 전혀 없다. 이 본문에서 특히 우리는 세가지 관점
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로마 기독교인들이 이교도 신앙의 영향 때문에
바울은 동성애의 표현으로 우상숭배의 결과라고 보았으나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둘째, 이 본문에서는 동성애의 열망을 내포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으나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또 ‘서로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다’(25
절). 그러나 이 말들의 내용속에는 서로 서로 인격적인 관계에서 형성되
는 동성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바울이 한 말은 단순하다. 그는 이성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욕
에 빠지는 것처럼 동성애를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동성간
의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로 해석하기 어렵다. 바울이 언급한 중요한 단
어는 ‘바른 관계’, ‘바르지 못한 관계’라는 개념상의 문제다. 26절에
보면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바르지 못한 관계로 또 남
자들도 이와 같이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서 영어
에 해당하는 ‘natural(바른 관계)’을 아주 융통성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
고 있다. 바울은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하
다.(15)

로마서 2:14에서도 같은 희랍어 말을 쓴 ‘pushin’/‘natural’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에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실천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표준 새번역 성서에서는 희랍어에 해당하는
‘pushin’ 영어로는 ‘natural’을 우리 말로는 ‘본성에 따라’라고 번
역하고 있다.(16) 확실히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인간의
‘본능에 따라’라는 의미 이상은 없다. 여기에서 바울은 사람의 ‘본성
에 따라’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바른 관계를 갖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연법을 어긴 남성 혹은 여성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여성/남성의 동성애가 서로
좋아서 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강요에 의해서 자연스럽지 못한 관계가
된다면 오히려 그 관계는 바른 관계가 아닌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오히
려 동성간의 성의 관계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서로 깊은 애
정과 매력으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관계로 본다면 바울은 진실한 남성/
여성의 동성애의 관계를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3. 성서의 성에 대한 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동성애에 대한 시각은 확실히 부정적 입장을 취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동성애에 느끼는 반감은 그것을 바
른 관계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방종교문화가 유대생활에 침투한
것으로 반유대인으로 취급했다.(17) 그러나 이러한 결론이 오늘 동성애자
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의 해석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다. 왜냐
하면 성서에는 또다른 성에 대한 규범, 태도, 실행, 실천 그리고 금지 상
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더 이상 규범이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성서의 성관계에 대한 태도를 몇 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보겠
다.

1) 나체:유대교에서는 가족들에게까지도 비난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18) 아들이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창 9:20∼
27). 벗는다는 것이 부부관계에까지도 터부시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
체의 해수욕장을 흔히 볼 수 없을지 몰라도 집안에서 문을 잠그고 부부가
벗는다 해서 죄라고 할 수 있는가?

2) 구약의 율법은 여자가 월경하는 동안 불결하기 때문에 여자에게 가까
이 해서는 안되게 되었다. “그 여자가 불결한 기간에 눕는 자리를 앉는
자는 모두 부정하다.”는 것이다(레 18:19, 15:20∼23). 그리고 누구든
지 이것을 범하면 그 대가를 받는다. 그 사람과의 관계는 결별해야 한다.
오늘날 여성의 월경과 관계없이 성관계를 하기도 하고 그것을 부정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해서 그들
이 죄인인가?

3) 성서는 서로 동의한 미혼 성인들 사이에 성관계를 금지한 곳은 없다.
결혼하지 않은 두 남녀의 관계를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아가서 1∼8).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비유적으로 해석을 해서 사랑의 장면을 은폐하려고
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교회는 혼전/혼외 성관계를 금해왔기 때
문이다.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 독신자들, 과부나 이혼한 사람들이 옛법
을 지키지 않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보면서 성관계는 결혼한 사람들에게
만 속한 것으로 믿고 있다면 도대체 누가 옳은 태도인가?

4) 남성의 정액과 여성의 월경이 있는 동안 몸을 닿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
으로 표현했다. 월경하는 여자에게 닿는 남자는 모두 저녁때까지는 부정하
고 그리고 남자가 정액을 흘렸음은 부정하다. 그 사람은 저녁때까지 부정
하다. 남자와 여자가 동침하다 정액을 쏟으면 저녁때까지 부정하다는 것이
다. 여자의 몸에서 흐르는 월경이면 7일 동안 부정하다고 했다(레 15:16
∼24). 지금도 정액이나 월경이 부정하다고 느끼는 청교도적인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으
로 받아들인다. 다만 좀 지저분할 뿐이지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있
다.

5) 구약에서 간음, 근친상간, 강간, 매춘 등에 관한 사회 규범은 여성의
억압과 남성들의 재산권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여성은 남성의 재산권
속에 속했다. 남성은 창녀집에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드나들었으며 미혼녀
와의 관계는 그녀의 처녀성을 지켜준다는 의미에서 남성의 특권이었다. 창
녀는 죄인으로 취급을 받을지라도 창녀를 찾아가는 남자는 죄책감이 없었
다(창 38:12∼19, 수 2:1∼7).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많은 변화를 겪으
면서 여성들의 지휘가 향상되고 권리가 주장되는 사회로 발전하고 있다.
여성은 더 이상 남성들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과 상호
존경심으로 남성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체제로 변모해 가고 있다. 훨
씬 여권이 신장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 간음한 죄는 남성도 여성도 죽음의 형벌로 다스렸다(신 22:22). 한가
지 다른 점은 여기서 남성의 경우 결혼한 여자를 상대했을때 간음죄로 정
죄하지만 미혼여성과 성관계를 한 남성은 간음한 것이 아니다. 정을 통한
여자가 처녀가 아님이 증명되면 돌로 쳐서 죽이게 했다(신 22:13∼21).
여성의 순결에 대한 법은 모순성이 있다. 오늘날 소위 바람피는 남성들에
게는 피임약의 발전이 아니었다면 미혼녀와의 관계에서 일부일처제를 고수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현대에서는 유부녀보다는 처녀일 경우 문제가 심각
할 수 있다.

7) 구약시대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 신약시대에 바울은 감독 집사의
자격을 한 아내의 남편으로 일부일처제를 주장한다. 또한 이혼과 재혼을
금지했다(딤전 3:2, 12; 딛 1:6). 그러나 여전히 일부일처제를 주장하
는 사회도 있지만 현대에 와서까지도 아프리카에서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
고 있다. 또 우리는 다시 한번 율법의 모순성을 발견한다.

8) 고대 이스라엘 유대교에서는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
것은 결혼한 남자 형제 중에서 자식이 없이 죽으면 과부된 여인은 남은 다
른 형제와 결혼해서 죽은 형제를 위한 씨받이가 되었다(신 25:5∼10). 예
수께서도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고 있다(마 22:23
∼33). 오늘날 이 해괴망측한 법규는 가정파괴 또는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
된다.

9) 신약성서에서 바울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
것은 어디까지나 바울 자신의 충고이지 주의 계명은 아니라고 했다(고전
7). 바울은 혼인에 관한 문제들을 여러가지 면에서 가르치고 있다. 전반적
으로 성서는 남성 지배 문화의 가부장제를 규범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
나 현대에 와서 남성 우월주의의 가부장제는 우리를 영속시킬 수는 없다.

10) 유대인들은 열두지파 안에서 동족결혼(근친결혼)이 허용되었다. 최근
까지만 해도 인종간의 결혼을 반대하였던 미국 남부에서는 동족결혼이 시
작되고, 우리 사회에서도 동성동본 결혼을 허용할 조짐이 보인다. 인종간
의 결혼이 금지되었으나 지금은 인종을 초월해서 국제결혼이 자유로운 현
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우리의 성의 형태도 급진적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경
험한다.

11) 구약에서는 독신을 비정상적으로 여겼다. 예레미야에 대한 주님의 뜻
으로 독신을 예고한 것은 이스라엘의 가족들을 위해서 불길한 징조 때문이
었다(렘 16:1∼4). 바울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을 선호한다. 그러나 그것
은 이교들과의 관계를 두려워해서 한 경고로 이해한다(딤전4:1∼3). 아직
도 카톨릭 교회에서는 신부와 수녀는 독신을 정상으로 지키고 있다.

12) 성서는 또 다른 법을 제시하고 있다. “두 남자가 싸울 때 한쪽 남자
의 아내가 얻어맞는 남편을 도울 생각으로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어 상대
방의 음낭을 잡거든 너희는 여인의 손을 잘라라. 조금도 동정심을 가지지
말아라.”(신 25:11) 라고 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지금의 우리는 박
수 갈채를 보낼 수도 있다.

신구약에서 노예제도는 정상적인 법이 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노예제도야말
로 인간의 인권을 유린하는 악법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여
성 노예신분/첩/여성을 성적 장난감으로서 또 남성은 성의 주체자로 여성
은 성의 목적 대상으로만 취급될 수 없는 것이다. 여성은 노예신분인 낮
은 인간이하로 취급했음을 우리는 구약성서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 이것은 마치 미국이 100년 이상을 노예제도 밑에 인권을 유린시킨 것
과 같은 것이다.


4. 성서 권위의 문제


지금까지 논의된 여러 가지 성관계에 대한 사례들은 성서 권위에 대한 우
리들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혼란과 이중성과 모순성을 보기 때문이다.
구약시대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의 성생활을 이끌어 오는 법으로 존재했
다. 그러나 어떤 법은 신약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변화를 볼 수 있다. 구약의 이러한 율법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복음
이 아니라 율법 그 자체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하고 억압한
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새로운 법이 필요한 것이다. 아직도 살
아 있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또 어떤 권위를 가지고 우리는 선택할 것
인가?

우리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야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사
람들을 이롭게 해주시려고 율법의 맨 끝마침이 되셨다”(롬 10:4). 또 지
금은 우리가 우리를 얽매였던 것에서 죽어서 율법에서 벗어났고 우리는 문
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정신으
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모든 성의 관습은 성령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율법은 인간을 위해서 있어야지 인간이
그 법을 위해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20)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법의 의미를 우리는 택할 수 없을 경우도 있다. 바
울은 여성들에게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고 기도할 때 머리에 수건을 벗
지 말라는 말을 함으로서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들의 기를 살려 놓았기 때
문이다.

필자는 성서야말로 성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윤리만을 말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싶다. 그 사랑의 윤리는 어느 나라, 어느 문화, 어느 시
대에도 변함없이 지배해오는 진실한 사랑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랑이란 약속, 믿음, 존경, 신뢰를 서로 할 수 있는 근원이 되는 것이
다. 우리는 성(性)을 단순한 동물적 본능의 발산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두 사람의 인간 관계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성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깊
이 있는 사랑의 표현이다.

율법의 시각에서 성을 볼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때 우
리들의 왜곡된 사고는 전환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무엇이 허용되고 있
느냐라는 질문보다는 내 이웃인 동성애자들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
하느냐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 접근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의 새로운 시각으로 본다면 성서가 무엇을
명령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기보다는 성서, 전통, 신학, 심리학, 인류
학, 유전학 그리고 생물학 등등의 관점에서 지금 성령이 교회에게 말하려
는 그 말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앞에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동성애를 잘못된 판단과 해석으로 정죄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동성애에 대한 성서의 부정적인 판단이 어느 때 가서는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정죄라고 판단이 될 것으로 믿는다. 우리들은 성서
의 동성애의 부정적인 측면은 마치 구약성서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구약성서의 어느 곳에서 노예제도를 부정의한
인권유린이라는 언급이 없었다. 오늘날 노예제도를 논의할 때 그 법을 정
당화할 수 있는가? 또 성서는 여성은 언제나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일 뿐
만 아니라 남성의 소유물로 여겨졌던 유대문화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오늘날 인정할 수 있는가? 예수 자신이 간음한 사실을 제외하고
는 이혼은 절대로 안된다고 가르쳤다. 오늘 우리들이 ‘절대 안된다’라
는 예수의 가르침을 절대의 진리로 지킬 수 있는가?


5. 인간의 편견


하나님은 약한자, 힘없는자 편에 계셔서 눌린자를 해방시켜 주시고 고통받
는 자들과 함께 하시고 모든 만물을 화해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지금도 우
리의 역사속에 살아 계셔서 우리를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기를 원하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를 구현하신 분이시
다. 예수 자신이 동일시했던 세리, 창녀, 불구자, 병든자, 버림받은 사람
이나 가난한 자와 함께 하셨다. 그는 인간이 어떤 위치에 있을지라도 하나
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참 인간으로 인정해 주셨음을 우리는 믿는다.

우리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강한 편견
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냥 편견을 가지고 있다.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않고 옳지 않은 것처럼 보이
는 것뿐이다. 이성애만 옳다고 길들여진 사회 풍조에서 당연한 반응일지
도 모른다. 단순히 나와 생활양식이 다르다 해서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으
로 정죄할 수는 없다. 이성간의 성애가 옳다는 사고로 길들여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성애를 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정죄하는 것은 성서
적 윤리의 정당성을 찾을 수 없다. 동성애가 잘못이라는 사고는 인종차별
주의나 성차별주의에서 오는 근본적인 태도와 같은 것으로 인간의 억압으
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동성애와 이성애를 이렇게 비교하고 싶
다. 이 세상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른손을 사용하는데 더 익숙하지만
왼손잡이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또 양손 모두 잘
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6. 끝내면서


필자는 성서에서 말하는 성에 대한 태도를 재조명해 봄으로서 인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필자는 개인적으로 동
성애를 단순히 동성간의 성적 흥미라든지 성적 행위로만 그들을 규정하고
싶지 않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갈망하는 두 인간(人間)간의 의미있고 뜻있
는 관계의 형태로 보고 싶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늘어나고 있는 동성애자들을 정죄한다든지 은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동성애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을 더 사랑할 수 있도
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삶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
도하는 믿음을 통해서 그들을 향해서 우리들 자신을 활짝 열 필요가 있
다. 또한 교회는 개방적으로 동성애자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행위를 정죄할 수도 있고 금지할 수도 있다. 그것이 근본적으
로 인간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행위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을 어떤 행위로만 인정하고 정죄한다는 것은 하나의 인
간에 대한 억압이며 정신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
과 같고 도덕적 가치와 존경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
가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사랑도 귀중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동성애는 또 하나의 다른 사랑의 방식이기 때문이
다. 또 동성애라는 개념은 이성애와는 다른 가치 부여에서 또 다른 깊은
인간 관계의 양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성성(Sexuality)에 대한 연구
에 의하면 건전한 성은 통합을 향한 인간의 내적/외적 성장을 시켜준다는
것이다.(21)

하나님은 우리가 섬김속에서 동역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의도하
시는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은 섬김이지 결코 동성애/이성애라
는 성별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파트너쉽, 인간과 인간과의 파트너
쉽, 인간과 자연과의 파트너쉽,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갖가지 파트너쉽을
주셔서 우리의 삶속에 살고 있는 관계를 지어주고 있다. 톰 드라이버(Tom
Driver)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성에 의미를 논함에 있어서 다음에 취해
야 할 단계는 종말론의 영역에 있다고 하겠다. “오랫동안 기독교 도덕주
의자들이 성문제와 관련하여 물은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
가?’였다. 그러나 성에 관하여 다른 모든 윤리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물
어야 할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
다.”(2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약은 민족적, 계급적, 인종적, 성적, 성
적인 성향, 그 어떠한 경계라도 뚫고 나간다. 예수는 이러한 인간이 만들
어 놓은 억압과 편견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라 했다. 또 그러한 억압과 구
속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 해방자로 오셨다.

이제 우리는 동성애자들을 교회 밖의 사회 변두리로 소외시키기보다는 하
나님의 샬롬의 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는데 우리 다같이 동역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참 고 서 적


11. Baily, D. S. Homosexuality and Western Christian Tradition.
London: Longmans, Green and Co., 1955.

12. Carden, Maren Lockwood. The New Feminist Movement. New York:
Russell Sage Foundation, 1974.

13. Cole, William Graham. Sex and Love in the Bible. New York:
Association Press, 1959.

14. Driver, Tom E. “Human Sexuality” Chris-tian and Crisis, vol.
ⅩⅩⅩⅦ, no. 17(Oct.31, 1977).

15. Koshik, Anthony ed. Human Sexuality: New Directions in American
Catholic Thought. New York:Paulist Press, 1977.

16. Lorde, Audrey. “Scratching the Surface: Same Note on Barries
to Women Loving”, Black Schalar, vol.IX, no.7(April 1978).

17. McNeill, John J. The Church and the Homosexuality. New York: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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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Nelson, James B. “Homosexuality and the Church”, Christi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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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Siker, Jeffrey S. ed. Homosexuality in the Church:Both Sides of
the Debate. Louisville/Kentucky: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10. Wink, Walter. “Biblical Perspective on Homosexuality”, The
Christian Century (November7, 1979).

11. 귄터 아멘트(Gunter Amendt) 저, 이용숙 역. 「섹스북」 박영률 출판
사, 1995.

12. 미셀 푸코 저, 문경지/신은영 공역. 「성의 역사」 나남출판사,
1990.

13. 제프리 윅스 저, 서동진/채규형 역. 「섹슈얼리티:성의 정치」 현실
문화연구, 1994.


자료제공: 한국여신학자협의회

2004.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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