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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역사적 사건 또는 이유가 있는 지명
shtk**** 조회수 2,643 작성일2006.09.19

제목 그대로입니다.

 

여러가지 지명중 역사적 사건이 있거나 그 이름의 이유가 있는

 

땅덩어리를 찾습니다.

 

예를 들어 울산 옥동 => 옥이 많이나는 곳이라서 옥동

                    서울 종로 => 종이 있는 길가

 

이런식으로요 뭐 위에것들 보단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걸 더 중점적으로

 

써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잘해주심 감사내공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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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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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도덕 30위, 한국사, 음식다이어트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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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뒤 도성을 쌓는데 자리를 정하기 어려웠다.  어느날 아침, 밖을 보니 밤새 내린 눈이 성터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크게 기뻐서 눈이 쌓인 모양대로 성을 쌓게 하였다.  훗날 눈이 쌓여 울타리를 이루었다는 뜻에서 '눈설(雪)'자를 써 '설울'이라 하였고, 그 설울이 변하여 지금의 서울이 되었다고한다.

한양하면 빼놓을수 없는 일화 무학대사와 왕십리.  한양근처에서 무학대사가 지형을 살피는데, 백발노인이 소를 타고 가면서  " 에이 이놈의 소는 미련한게 꼭 무학을 닮았구나." 하는것이다.  놀란 무학대사는 "노인장, 소승이 바로 무학입니다, 혹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인지요?"  새 도읍지가 들어설 명당자리를 찾는데, 좋은터가 있으면 가르쳐 달라 하자 동북쪽을 가리키며 십리를 더 가라 하였다.  노인은 서둘러 소를 몰고 가버렸다.  무학대사는 노인의  뒤를 쫓았으나 무학봉에 사는 사람이라며 안개속으로 사려졌다.  무학봉으로 올라갔으나 작은 암자가 있었고, 도선대사의 화상만 모셔져 있었다.  노인은 신라말 풍수지리설의 대가 도선대사 였다.  동북쪽으로 십리를 더가니,  바로 북악산 밑의 경복궁 터였고,  그후, 이곳은 십리를 더 가라는 뜻으로 '갈 왕자에 십리를 붙여 지금의 왕십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잠실은 다른말로 '누에벌'이라 한다.  누에를 많이 쳤다는 기록은 없지만, 누에의 먹이가 되는 뽕나무가 무성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풍수지리상 남산주위에 뽕나무를 많이 심어야 한다하여  사방에 뽕나무 밭인 잠실이 생겼다.   마포구 도화동은 복숭아 나무가 많아 복사골,  '도화동'이라 부르게 된것.  종암동을 북 바위 마을이라 불렀는데, 고려대 뒤쪽 산에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북바위 마을' 또는 '종암마을'로 불린것이 종암동이 된것입니다.

마포에 있는 토정동은 토정비결을 쓴 토정 이지함이 살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이지함이 흙으로 만든 정자라는 뜻의 '토정'이란 호를 얻게된건 마포에 100척이 넘는 흙집을 지어 살면서 부터였다.    이집의 은둔지 둔촌동(숨을 둔자에 마을촌자로 '숨은 마을'이다  공민왕 17년(1368)요승 신돈이  나라를 망치고 있을때 신돈의 죄상을 파헤쳐  공격했으나, 공민왕은 신돈의 말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믿었으니, 진실이 통하지 않았고, 사실을 안 신돈은 공민왕을 꼬드겨 이집을 잡아들이라는 어명이 전국에 내려졌고, 아버지를 모시고 둔촌동에 있는 일자산, 굴바위라는 토굴에 숨었으나 신돈은 부하들을 풀어 금세 찾아냈다. 이집은 아버지를 등에 업고  영천까지 가게 되어 이집과 절친한 친구 최원도의 집에  2년동안 숨어지냈다. 이집은 신돈이 죽자 자유롭게 되었다.  이집이 숨어살던 토굴이 있던곳은 현재 방이동으로 강동대로에서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로 틀어가는 길가에 위치하고있다.

이태원이라는 유래에는 세가지가 있다.. 발음상으론 같지만 한자의 뜻이 모두 다르다.

배나무를 많이 심어 참배리(梨)자를 써  이태원이라 하였고,  또 자두나무도 많이 심어 '오얏리(李)를 써 이태원이라 했다.  마지막으로 다를'이'자와 아이밸 '태'자를 써 이태원이라 했는데, 슬픈 사연이 있다.  임진왜란때 왜군에게 한양까지 함락되어 여승들이 모여사는 이태원의 운종사에 쳐들어와 운종사의 여승들을 종처럼 부렸고, 비위를 거스를 경우엔 가차없이 목이 날아갔다.  곱게 물러나지 않고, 운종사에 불을 지르고 여승들을 죽이고, 남은 여승들중 대부분 왜군의 아이를 갖게 되었다.  자결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못한 여승이 많았다. 왜군이 물러난후 조정에서 이들에게 죄를 묻지 않고 부군당 근처에 움막을 지어  모여 살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고 나중에 태어난 아이들은 관아의 노비가 되었다.   또 항복한 왜군들이 자기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모여 살기도 해 한때 이타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세검정은 칼을 씻는 정자라는 뜻. 광해군을 몰아내기 위해 기회를 노리던 능양군(인조)과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북한산 계곡물에 칼을 씻어 바위에 간 다음 경복궁으로 쳐들어 갔다.  능양군은 칼을 씻은곳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세검정이라 했다.  석파정은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정자로, 흥선대원군의 호를 따서 붙였다.  원래 삼계정이라 불렸는데 철종때 세도를 누리던 김흥근의 집이었다.  흥선 대원군은 안동김씨 일가를 싫어하여 그 중에서도 특히 김흥근을 미워해 " 삼계정을 두어달만 빌려 달라 하여.  그곳 경치에 반한 대원군은 빼앗을 궁리를 하여, 고종에게 나랏일을 보느라 수고가 맣으니 경치 좋은 곳에서 머리를 식히라 하여, 고종도 삼계정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국왕이 한번 머무른 곳은 백성의 소유라 해도 다시 가질수 없는게 그때의 법이라 치사한 방법으로 삼계정을 손에 넣었다.

양재역이 말죽거리로 불린것은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으로 인조는 신하들과 피난길에 올랐다.  양재역을 지날 무렵,  그 지방 선비들이 소식을 듣고 급히 팥죽을 쑤어 임금께 바쳤고, 그뒤부터 양재역을 '말죽거리'라 불렀다 하며, 또 역의 말에게 죽을 먹이던 곳이라 하여 '말죽거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강동구 오금동은 사람의 뒷무릎을 가리키는 오금이란뜻을 지녔다.  병자호란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백토고개쯤에서 잠시 쉬어가며 인조가 '아이고, 내 오금이야.'하며 말에서 내렸다 허여 오금골, 지금의 오금동이라 부르게 된것이다.

종로구 관훈동은 옛날 관인방의 대사동과 충훈부가 있던 훈동을 합하여 부르게 된 이름

천주교를 탄압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절두산에서 천주교인들을 처형했다. 원래 절두산의  이름은 잠두봉이었다. 마치 누에가 머리를 쳐든것처럼 튀어나온 모양이라 해서 '누에잠' 자와 '머리두 자'를 써서 잠두봉이라 부른것이다. '용두봉' ,  '가을두'라 부르기도 했다.

옛날에는 종로를 '운종가로 불렀다. 사람이 마치 구름떼처럼 모였다. 흩어진다 하여

종로거리 뒷편에 좁은 골목길이 있는데, 백성들과 하급관리들이 벼슬아치의 행차를 만나면 피했다 하여 말이 피해다닐수 있는 길이라는 뜻에서 '피마골'이라 하였다.

명륜동은 성균관 대학교의 전신인 명륜학원이 있던 자리라 하여 붙여졌으며 지금의 명륜동1가를 갯골이라 불렀는데, 북한산에서 흘러오는 개울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성균관 근처에 사랑의 마을이란 '정골'이 있었는데,  세조의 외동딸 의숙공주의 몸종에게 딸이 있었는데, 성균관에 과거를 보러 온 안윤이라는 선비와 사랑하게 되었다.  엄격한 신분사회로 양반과 몸종이 사랑할수 없었다.  고민하던 몸종의 딸은 자렬하고, 안윤역시 온 동네를 떠돌다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정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종로구 탑골공원과 종묘사이에 돈의동이란 작은 마을이 있는데,  원래 돈녕동과 어의동이라 두개의 마을이 합쳐진곳이다.  돈의동은 채제공과 채제민이두터운 의리를 지키며 살았다 하여 두터울 돈에 의로울 의를 써 돈의동이란 이름이 생겼다.

관악구 봉천동 낙성대는 별이 떨어진 터라 하여,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다.

송파구 방이동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하여 '꽃다울 방' 자를 써 '방앗골로 불리다가 방이동이 된것. 몽촌 토성이 있던 자리이다. 사적 제 297호로 지정, 백제때의 성곽이다

 

 

2006.10.07.

  • 출처

    대교출판 '서울 600년 이야기 고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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