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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보령의 문화재 이미지좀요...
두부 조회수 2,823 작성일2013.10.10

선생님이 대회가 있대서 보령의 문화재 그려오라는데

보령의 문화재 사진좀요

 

1. 기와집 대문 같은거

2. 돌석탑 같은거

3. 기타등등

4. 급하니 되도록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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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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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재)

 

1.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종 목 국보 제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2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하였다.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을 널리 알리어 절이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본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2.성주사지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1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이 절의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앞에 서 있으며, 뒤로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비슷하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편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수평을 이루다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둔 것은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형식이며,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각 층의 구성이 짜임새가 있으며 우아한 모습이다.

 

3.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2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성주사의 옛터에서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뒷편에 나란히 서있는 3개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상·하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 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4.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4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지에서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뒤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탑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석탑이다. 성주사는 구체적 유래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백제 땅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그 배치구조가 특이하며 이외에도 또 다른 3기의 탑과 석비, 귀부, 석축, 초석 등 많은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2단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맨윗돌에 1층 탑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받침돌을 두어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3층을 이루는 탑신의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짐승얼굴모양의 고리 1쌍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약간 치켜올라갔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남아 있지 않고, 장식을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노반)만 놓여 있다.

 

1971년 해체 ·수리 당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을 발견하였으나 그 안에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함께 위치한 다른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이 드는 탑으로, 기단이나 지붕돌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5.성주사지

 

종 목  사적  제307호 
지 정 일 1984.08.13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시 대 통일신라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산골에 자리잡고 있는 절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석등, 5층석탑(보물 제19호), 금당건물과 그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동삼층석탑,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6.죽도 앞 바다 고려청자 매장지역

 

종 목  사적  제321호 
지 정 일 1987.09.18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주포면 송학리 죽도앞바다 
시 대 고려시대


죽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 떨어진 바다 밑에 고려청자가 묻혀 있는 곳이다.

 

1987년 수중고고학 발굴 작업을 통해 상감청자 32점을 비롯해 많은 유물을 건졌다. 이곳에서 나온 청자류들은 약 100여 점에 이르며, 불법으로 흘러 들어간 것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 중 ‘기사(己巳)’라는 글씨가 새겨진 것이 있어 청자의 연대를 밝히는데 큰 도움을 주는데, 기사년을 1269년으로 보는 설과 1329년으로 보는 설이 있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이나 전북 부안군 보안면의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배로 운반하던 도중 이 부근에서 배가 난파된 것으로 보인다.

 

8.원홍주등육군상무사단제비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30-4호  
지 정 일 1992.07.24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청소면 죽림리 27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후기 전국에는 천여 개의 5일장이 열려, 필요한 물건을 사고 팔았다. 이들 시장을 찾아다니며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부상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조선시대 지방시장의 발달을 촉진시킨 사람들이다. 이들 보부상들은 상호간의 협력 필요성 때문에 상무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보령,홍성,청양 등지의 보부상들도 1851년 예산 대흥사람 임인손이 중심이 되어 홍주ㆍ결성ㆍ보령ㆍ청양ㆍ대흥ㆍ오천 등 6개의 군지역 보부상들을 모아 〈원홍주등6군상무사〉라는 보부상 단체를 조직하고, 이들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였다.
 

이 원홍주등6군상무사의 근거지를 보령시 청소면 죽림리 홍도원에 두고 휴식공간, 공동묘소 등으로 사용하였다. 지금도 홍도원에는 원홍주등6군상무사 소유의 1만여 평 토지와 건물, 묘지 비석 등이 남아있으며, 매년 한식날에는 위령비와 단제비에 제사를 지낸다. 또한 이들은 매2년마다 총회를 열어 회장인 접장을 선출하며,〈청금록〉〈선생안〉〈완문〉〈절목〉등의 많은 보부상 관련 문서들을 소장하고 있다.
 

한일합방이 되면서 우리나라의 모든 보부상 조직이 소멸하였으나 우리 지역의 보부상단체인 원홍주등6군상무사만이 소멸되지 않고, 위령비 단제비 등 홍도원 유적과 함께 지금까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오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마지막 보부상 단체인 셈이다.

 

9.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지 정 일 1979.07.03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시 대 신라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4기의 석탑 중 하나이다. 금당터 뒤에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석탑 중 가장 동쪽에 있는 것으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은 4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 ·위층 기단은 각각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위층 기단의 맨 윗돌과 탑신의 1층 몸돌사이에는 별도의 돌을 끼웠으며,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렸다. 각 층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고 1층 몸돌의 남 ·북면에는 자물쇠모양과 한 쌍의 고리모양을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이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들려 있다.

 

통일신라 후기 절을 새단장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 탑 역시 이 시기에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10.수부리 귀부 및 이수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2호

지 정 일 1974.09.01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웅천읍 수부리 13 
시 대 고려시대


영수암(예전의 단원사) 경내에 서 있는 비로, 근처의 절터에 있던 것을 수습하여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는 비몸을 잃어버린 채, 머릿돌만이 놓여 있다. 거북받침은 머리가 용 모양이며, 귀와 뿔을 새기고, 턱 밑의 수염은 목에까지 조각하였다. 등에는 벌집모양의 육각형을 새겼고, 중앙에 마련된 비몸을 꽂아두던 홈 주변에는 연꽃을 둘러 장식하였다. 머릿돌은 용과 구름무늬로 가득차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액자모양의 공간을 두어 다시 十자 모양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글씨는 적혀 있지 않다.

 

화려하고 세련된 조각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11.성주사지 석등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지 정 일 1974.09.01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지오층석탑(보물 제19호) 앞에 놓여있는 8각 석등으로, 석탑 앞에 각부분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71년 석탑을 수리하면서 현재의 자리에 세워 둔 것이다.

 

형태는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을 이루는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하나의 돌로 다듬어 놓은 바닥돌과 받침의 아랫부분은 그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렀다. 아무런 조각이 없는 가운데기둥은 가늘고 긴 편이다. 윗받침돌은 맨아래의 받침을 거꾸로 놓은 듯 서로 대칭을 이룬다. 화사석은 불빛이 퍼지도록 4곳에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1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다.

 

화사석에 마련된 창의 주변에 창문을 걸기 위한 구멍의 흔적이 없는 점이나, 가운데기둥이 가늘고 길어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지 않는 점 등으로 보아 뒤의 5층 석탑보다 시대가 늦어지는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12.보령 관아문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26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보령현의 외곽에 쌓았던 보령읍성의 남문 문루 건물로, 세종 13년(1431)에 현감 박효성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1층은 양편의 기둥을 성벽 위에 걸쳐 세워 성곽의 일반 문루처럼 가운데 1칸만 통행하도록 되어있다. 기둥과 같이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웠으며, 2층은 누각을 설치하고 간단한 난간을 사방에 둘렀다.

 

건물의 앞면에 ‘해산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중종(재위 1506∼1544)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이라고 한다.

 

13.남포관아문<진서루,내삼문,외동헌>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5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378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남포현의 관아 건물로 진서루와 내삼문, 외동헌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서루는 외삼문으로 옛 남포현의 출입문이다.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2층 문루인데,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아래층은 삼문을 달았고, 2층은 누마루를 깐 후 4면에 난간을 세웠다.

 

동헌의 출입문인 내삼문은 앞면 7칸·옆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가운데 1칸은 출입문으로 큰 대문을 달고 나머지 칸은 방으로 꾸몄다. 중앙칸은 한단 올려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좌우의 방은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남포현의 업무를 보던 외동헌은 대청으로 앞면 7칸·옆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건물이다. 앞면 중앙에 2칸의 대청이 있고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14.대천 한내돌다리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9호   

지 정 일 1992.08.17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동대동

시 대 조선시대

 

대천천 하류에 있었던 다리로, 예전에는 남포와 보령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물살에 쓸려 떠내려 가거나, 하천 제방공사를 하면서 파손되어 얼마남지 않은 것을, 1978년 수습하여 옮겨 두었다가, 1992년에 대천천 강변에 옮겨 일부만 복원해 놓았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근처에 있는 왕대산의 돌을 깎아내어 뗏목으로 운반해온 것으로 보인다. 다리의 몸체를 받치는 기둥은 거칠게 손질한 2∼3개의 돌을 쌓아 이루게 하여, 모두 6개의 기둥이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위로 넓적한 판돌을 걸쳐서 다리를 완성하였는데, 원래는 12칸 돌다리라 하나 적어도 22칸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리의 높이는 낮은 편이어서 바닷물이 밀려오거나 홍수가 질 때면 물에 잠기고, 보통 때에도 가끔 잠기었다 한다.

 

『동국여지지』,『신안읍지』,『여지도서』등의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18세기에는 이 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령에서는 해마다 향토문화축제가 열리는데 이 때 12칸 돌다리밟기제(祭)와 돌다리밟기에 많은 시민이 참여하고 있다.

 

 

15.오천 수영관아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지 정 일 1991.12.03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충청수영청의 관청건물이다.

 

조선시대 『여지도서』를 보면 중앙의 관리가 내려와 머무는 객사 82칸을 비롯하여 상서헌 9칸, 내동헌 10칸, 외동헌 10칸, 아사 5칸 등 많은 건물 이름과 칸수가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장교청, 진휼청, 공해관의 3건물만 전해지고 있다.

 

장교청은 순조 33년(1833)에 세워진 건물로 수영의 관리들이 의견을 논하던 건물로 1986년까지 오천면 사무소로 사용되다가, 1987년 원래의 위치인 서문 근처에서 동편 언덕의 정상으로 옮겼다.

 

진휼청은 수영에서 가난한 백성을 구제할 목적으로 곡식을 꾸어주고 거두어들인 곳이다. 오천성 서문 옆에 서 있으며 민가로 사용되어 왔다.

 

공해관은 수영의 내삼문으로 솟을대문 형식이며, 지금의 오천현 초등학교 정문으로 사용하였다.

 

오천현 관아는 조선 후기의 건물로 원래의 자리를 떠난 것도 있지만, 비교적 건물이 잘 남아 있다. 성내에 흩어져 있는 옛 비석들을 통해서 충청수영의 역사성을 엿볼 수 있다.

 

 

16.보령 오천성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9호

지 정 일 1973.12.24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시 대 조선시대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오천성은 해발 400m 정도의 구릉성 야산에 거북이 모양의 지형을 이용하여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1650m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조선 중종 5년(1510)에 성을 쌓아, 고종 33년(896) 군대 처소가 패쇄될 때까지 서해를 방어하는 성의 역할을 해왔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두었는데 모두 없어지고, 서쪽 망화문터에 입구를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게 만든 홍예문만이 남아 있다. 성 안에는 영보정과 망해루를 두어 바다와 주변의 크고 작은 섬들을 살피었고, 통신망을 구축하였다. 또한 성 안에 도로를 만들어 관사와 백성이 함께 살았다.

 

이 성은 해변의 구릉을 정점으로 쌓은 성이어서 바다를 관측하기에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다.

 

17.남포읍성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10호

지 정 일 1973.12.24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시 대 조선시대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남포읍성은 차령산맥 서쪽 끝자락의 구릉에 돌로 쌓은 성으로, 남포는 백제 때 사포현이라고도 불리었다. 이 읍성은 원래 고려 우왕 때 서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성이었는데, 공양왕 2년(1390) 군대가 머물 수 있는 진영을 추가하여 완성하였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바깥쪽 벽은 돌을 이용하여 직각으로 쌓았고, 성벽의 안쪽은 흙으로 쌓아올렸다. 동·서·남 세 곳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4m의 높이로 성 바깥에 설치하는 또 하나의 성벽인 옹성을 둘렀는데, 1m이상의 큰 돌로 축성하였다. 성벽이 꺾이는 부분에는 적의 접근을 빨리 관측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쌓았으며, 그 양쪽 성벽에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몇가지 시설을 해놓았다.

 

성 안에는 3채의 관아건물인 진남루와 옥산아문, 현청 보존되어 있으며, 동서에 80㎝ 높이로 배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우물이 세 군데 있었다고 한다.

 

이 읍성은 서해안의 요충지로 왜구를 경계하는 한편, 해상 교통을 보호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던 곳으로 여겨진다.

 

18.김좌진장군 묘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73호

지 정 일 1989.12.29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0외 3필

시 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의 묘소이다.

 

홍성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난 장군은 개화사상이 투철하여 15세 때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논밭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1905년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앞장섰으며, 1913년에는 군자금을 모금하다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17년 만주로 건너가 대한광복단에 가입한 이후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어 독립군을 훈련시켰으며, 이를 기반으로 청산리에서 일본과 전투를 벌여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승리를 이루었다.

 

조국광복을 위해 노력했던 장군은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암살 당했다. 암살 직후 만주땅에 묻혔다가 아내 오숙근 여사가 1940년 장군의 유해를 밀감상자로 위장해 비밀리에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하였다. 그 후 1957년 부인이 타계하자 아들 김두한이 현 위치에 합장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뒤편으로 담장이 설치되어 있으며, 봉분은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장명등(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옆에는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마석상 한 쌍이 세워져 있다.

 

19.남포향교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111호

지 정 일 1997.12.23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남포면 옥동리 9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남포향교는 조선 태종 13년(1413) 웅천면 대천리에 처음 지었다. 중종 25년(1530)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고 대성전의 규모를 넓게 수리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 명륜당, 외삼문, 내삼문, 동재·서재 등이다.

 

대성전은 제사지내는 공간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이며 가운데 3칸은 마루를 두고 양쪽 칸에 온돌방을 두었다. 전체적인 배치는 제사 공간이 뒤쪽에 있고, 교육 공간이 앞쪽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20.보령향교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112호 

지 정 일 1997.12.23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47-1

시 대 조선시대

 

보령향교는 조선 경종 3년(1723) 처음 지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다.

 

대성전은 제사지내는 공간으로 앞면 5칸·옆면 3칸의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이다. 동재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이고, 서재는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201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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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문화재청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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