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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한대화를 잘 아시는 야구팬들 보세요....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1,885 작성일2003.03.28
아까 낮에 질문했었는데 답변이 1개뿐이고 내용도...ㅡㅡ;

전 LG팬이거든요..근데 제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때쯤부터 야구를 즐겨보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한대화가 LG로 트레이드 돼서 거의 은퇴할 무렵이었어요. 그래도 그가 중요할때 한방씩 터트리는 해결사역할을 하는것을 보며 정말 재미있었죠....그전부터 한대화는 해결사 였겠죠? 한대화 선수가 예전에 세계선수권대회인가? 거기서 일본전에서 역전홈런쳤었다매요? 그 장면을 봤었다면 얼마나 감동이었을까..그땐 제가 태어나지도 않았을때였거든요...

그 경기 직접 보신분들 그때 소감좀 알려주세요.

글구...한대화가 해결사로 불리게 된 동기같은것도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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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i****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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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보신분들 소감을 물으시니 말씀인데..
당시 제가 국민학교.. 이제는 초등학교군여.. 암튼 1학년 때였어여..
저희 형이 야구를 하도 좋아해서 저도 아주 어린나이부터 야구광이 되어버렸는데여.. 고등학교 야구 말이져..
당시 야구열기.. 지금하고 비교가 안됩니다..
요즘 특정팀의 열렬 팬들 외에는 그다지 열광하지 않잖아여..
하지만 당시에는 고등학교 야구 결승전.. 이런 거 열리면 그 고등학교랑 아무 상관없는 어른들도 일찍 퇴근해서 당시 대부분 가정에 티비가 지금은 구경하기도 힘든 나무문이 달려 있는 흑백티비.. 아니면 좀 사는 집에서는 三星이라는 한자가 박힌 14인치 컬러티비였거든여.. 상상은 가시나여? ^^ 암튼 일찍 퇴근해서 그 티비앞에 옹기종기.. 티비없는 전세방에 사는 형아들도 주인집 마당에 몰려와 보던 시절이었어여.. (저 서울사람입니다.. 이런 얘기 시골에나 있는 풍경이라 생각하지 마세영.. 진짜니까..)

자.. 운명의 그날..
어김없이 모든 집안에 야구보느라 옹기종기 모여있고.. 상가들도 문을 닫고.. 암튼 웬만한 야구경기보다 훨씬 중요했던 일본과의 한판승부!!
사실 우리나라 그날 거의 진 거였어여.. 일본투수.. 누군지 이름이야 모르지만 암튼 진짜 무시무시하게 잘 던졌거든여.. 여기저기 한숨소리.. 당시 일본에 대한 감정이야 제가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테고..
그런 경기에서 거의 끝나갈 때쯤 우리나라 타선이 폭발하기 시작했져.. 사실 말이 좋아 폭발이지 약간 어거지도 있고 행운도 따르고 그런 안타로 간신히 한점 쫒아간 상태였어여.. 글구 주자 3루.. 이 때 타석엔 우리나라 최고의 꾀돌이라는 김재박 현 현대감독이 나왔져.. 국민들은 당연히 술렁였고.. 그동안 일본투수의 공에 너무 놀아난 터라 큰 기대는 못가지면서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맘으로.. 지켜보는데..

혹시 보신 적 있나여? 개구리 번트... 후에 김재박은 선수로도.. 감독으로도 엄청난 명성을 날리지만 당시 그 머리에 부담스럽게 큰 헬멧쓰고 에어로빅복처럼 촌스럽게 딱 달라붙는 야구복입고.. 폴짝 뛰어 댄 번트.. 그때만큼 화려한 김재박은 이후로도 없다고 해야겠지여.. 물론 그처럼 기막히고 드라마틱한 번트는 메이저리그에도 없을 거라고 자신합니다!! ^^

그 번트 덕분에 우린 2:2로 동점이 되었지여.. 사람들 환장하고.. 집계야 안되었지만 아마 졸도한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을 거예여.. 이번 우리나라 월드컵보다 사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감동이었지여.. 나중에 알려진 걸로는 당시 그 번트가 김재박이 작전을 잘못봐서 댄 번트였다고 하는군여.. 재미있는 이야기지여..

암튼 그걸로 끝이었어여.. 아마 거기서 더 이상 득점을 못하고 졌다고 하더라도 우리 국민들 충분히 통쾌하게 웃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 정도로 극적이었다는 거지여..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여.. 이제부터 나올 선수가 바로 한대화져..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 한대화가 7번인가 9번타자던가? 암튼 하위타자였어여.. 당연히 기대도 그리 크지 않았지여.. 그런데 한대화가 3점 홈런을 야구장 좌측 펜스위로 훌쩍.. (지금 잠실야구장에 유지현존이라는 곳 아시져? 아마 그 부근에 떨어진 것 같아여.. 역시 확실하진 않네여.. 제 기억이..20년도 넘은 거라..)
암튼 그 3점 홈런으로 한대화는 스타가 되고 우리 야구는 우승하고.... 정말 멋진 날이었지여..

그럼 제가 왜 제목을 저렇게 지었을까여?
갑자기 지난번 월드컵 16강전이 생각나네여..
그때 우리 이탈리아한테 거의 다 졌지여? 그러다가 후반 끝나기 직전에.. 국민들도 대부분 포기했을 무렵.. 설기현의 동점골~~~~~
그때 이미 우리들 모두 뒤집어졌자나여.. 이길 수도 있다라는 희망이 아니라..
멋지게 이탈리아에게 본때를 보여줬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그러다가 안정환의 골든골~~~
그걸로 경기가 끝난 거자나여..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지만..
암튼 그때 기분이 옛날 야구 생각 나게 하대여..
설견의 극적인 동점골은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
안정환의 역전 골든골은 한대화의 끝내기 홈런..
비슷하지여? ^^
그냥 제 기분은 그래여..
설견의 동점골 다음에 이탈리아가 한골 더 넣어서 우리가 졌다해도 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을 거 같았거든여.. 물론 역전골 넣었을 때의 기분이란 말할 수도 없지만서도..


자..
한대화 선수.. 지금 동국대 감독이시져? (혹시 자리 옮기셨나?)
암튼 처음 한대화 선수 엘지에 올때 우리 엘지팬들(참.. 저도 엘지팬입니다. 23년째..) 대부분 반대했습니다..
그건 한대화 선수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우리 미스터 엘지.. 김상훈 선수와의 트레이드였기 때문이져.. (현 엘지 타격코치로 다시 오셨져..)
그렇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한대화 선수의 영입은 엘지가 지금까지 했던 트레이드.. (김상호-최일언.. 심재학-최원호.. 박종호-안병원, 손혁-양준혁 등등등등......) 중에 최고 작품이라 해도 이의를 제기할 분이 없겠져..
해결사.. 필요할 때 한방 처주는 사람.. 그 한방이 꼭 홈런이 아니라 희생타가 되더라도.. 또 그냥 범타가 되더라도 상대방 투수한테 그만큼 심리적 압박을 줄 수 있는 사람... 한대화밖에 없었져..

그런 해결사로서의 한대화 선수..
아마 20년이 넘는 우리 프로야구사에 한대화만큼 해결사라 불리기에 충분한 선수가 과연 있었을까여?
제 사견입니다만..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삼성의 마해영 선수...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삼성(삼성님들 죄송함다.. 그냥 제 사견임다..)의 선수지만..
해결사라는 이름을 붙일 때 가장 현역 선수로는 어울리는 선수 같네여..^^
에궁.. 올시즌 우리 4번타자.. 병규형이라던데..
병규형.. 야구천재지만.. 이상하게 찬스에서 비실대는 모습 너무 기억에 많이 남네여..
올시즌엔 부디 내가 마해영을 칭찬하듯.. 타팀 팬들 모두에게 칭찬받는 진정한 천재가 되시길...


*감정이 격해지네여.. 당시를 회상하니..^^ 그래서 내용중에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을 것 같네여.. 그냥 제 기억을 더듬다 보니.. 이해해주시길..

200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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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k****
초수
소아청소년과, 검도 65위, 세계사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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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중2때였습니다. 감동이었죠.. ..

지금도 김재박 선수의 날으는 번트는 기억에 선합니다.

그게 사인미스였었는지는 아래글 보고 알았네요..^^

한대화 선수가 해결사라 불리울만함은 워낙 찬스에 강한 선수였기때문이지요.

프로야구에서 해태의 독주는 한대화 선수가 없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겁니다.

 

아래 글은 http://www.yagoo114.com/yagoo114/contents/ggoljji/sub1/sub1-7.html 에서 발췌합니다.

 

"큽니다 큽니다."

MBC 아나운서의 다급한 목소리에 허구연 해설자의 말도 차분함을 잃고 있었다.

"네 홈런이에요, 홈런."

그 말과 함께 타구는 레프트쪽 파울폴을 튕기고 떨어졌다. 극적인 역전의 순간이었다.

1982년 9월 14일. 프로야구가 탄생한 첫해에는 갖가지 홈런들이 야구팬들을 열광시켰지만 가장 극적인 순간의 하나로는 그날 잠실구장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일본전에서 한대화가 때린 3점홈런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날 '한국에서 크게 된' 한대화의 장밋빛 인생이 펼쳐지기 시작한 날이기도 했다. 프로시대에 있었던, 프로경기보다 더 값진 제27회 세계선수권대회를 돌이켜보기로 하자.

우선 그 당시의 상황부터 설명해보자. 세계선수권 대회를 우리나라로 유치한 한국은 쿠바가 불참함에 따라 우승까지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회 첫날 당연히 이기리라고 생각하던 이탈리아에게 2-1로 역전패당하는 바람에 대표팀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 2승밖에 거두지 못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팀이 이긴 또하나의 팀은 일본이었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는 우승, 준우승국만 잡고 나머지 7개국에는 졌다.) 그러나 "더이상 지지 않으면 된다. 우승의 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결의로 한게임 한게임을 누른 한국은 일본과 나란히 7승1패를 기록하고 일본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이었다. 토너먼트방식이 아닌 풀리그로 벌어진 대회였지만 공교롭게도 이 게임이 최종일 마지막 게임으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한국 선발은 19세의 선동열 이었다. 고려대 2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미국, 자유중국 등 한국이 가장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강국을 차례로 꺾어준 대들보로서 이미 김시진이나 최동원을 넘어 대표팀의 에이스 자리를 굳히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동열은 2회에 2점을 뺏겼고 한국타선은 일본선발 스즈키에게 7회까지 1안타로 막혀 우승은 한낱 꿈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운명의 8회말. 8번 심재원이 중전안타를 때리고 나갔다. 9번 대타 김정수는 통렬한 중월2루타를 터뜨려 심재원을 홈으로 불러들여 답답해하던 3만관중을 술렁이게 했다. 1번 조성옥이 번트로 김정수를 3루로 밀어놓고난 다음에 등장한 것은 김재박 .

3루코치로 나가 있던 어우홍 감독의 왼손이 모자를 거쳐 가슴으로 내려갔다. 스퀴즈사인! 김재박은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오른손으로 했다면 작전이 하달된 것이었지만 왼손으로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김재박이 사인을 잘못 읽은 것이었다.

잘못 읽기는 일본투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깥쪽으로 높게 볼을 뺐고 김재박은 팔짝 뛰며 필사적으로 번트했다. 3루주자 김정수는 홈으로 스타트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수좋은 사람은 물에 빠져도 보물항아리를 안고 나온다'더니 김재박의 타구는 묘하게 라인 안쪽으로 굴러 들어가 안타가 됐고 이 사이 김정수는 홈으로 뛰어들어 동점을 만들었다. 이제 관중석은 역전을 고대하며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가 됐다.

큰 게임에 강한 이해창은 여기서 중전안타로 뒤를 받쳐 1사 1,2루를 만들었다. 큰 게임에 약한 장효조는 내야땅볼로 김재박을 3루에서 포스아웃시켰으나 병살은 면해 2사 1,2루. 여기서 등장한 것이 한대화 였다.

일본 구원투수 세키네와 대결한 그는 풀카운트의 씨름 끝에 6구째를 통타, 엷은 밤안개를 뚫고 솟아오른 한줄기 흰 포물선은 레프트 파울폴에 탄흔을 남기고 떨어졌다.

5-2 승리를 따낸 한국은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사상 아시아지역에서는 최초의 우승을 차지했으며 그날 5안타로 역투한 선동열은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여기서 밝혀둘 것은 그 게임이 홈그라운드에서 치러지지 않았더라면 한대화는 홈런을 치기 전에 삼진당했으리라는 얘기다. 투스트라이크가 된 후 야구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아이쿠" 비명을 질렀을만큼 안쪽으로 완벽하게 직구가 들어왔으나 구심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풀카운트까지 가기 전에 스트라이크가 4개 들어왔고 따라서 한대화는 삼진을 두 번 당할 뻔했다고 말하지만 한대화의 답변은 다르다.

"에이, 한번뿐이었어요."

아무튼 그의 홈런 한방은 마침 당시 교과서 왜곡사건으로 대일감정이 극도로 좋지 않는 국민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200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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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답변
한대화 선수는 제가 가장 좋아하던 야구선수 중 하나입니다.
덩치는 크지 않았지만 손목 힘이 강해서 스냅을 이용해서
기술적으로 홈런 등 장타를 많이 때려냈지요.
세계선수권 대회를 본 기억은 어렴풋합니다.
그 당시 저는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대충 한대화,김재박 등의 활약이 생각나네요.

나중에 프로야구에서 해태가 우승을 하면서 야구를 좋아하게 됐답니다.
당연히 해태의 주축선수였던 한대화선수를 좋아했지요.
'해결사'란 명칭은 그 당시 점수를 내야 할 시기나 위기시
마치 해결사처럼 홈런,안타를 때려내 해태를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붙인 명칭입니다.
해태가 상대 팀에게 지고 있는 경기시
누상에 주자가 나가있는 상황에서 한대화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면
관중석의 해태 팬들은 "해결사!해결사!"하고 외쳐댔지요.
한 방 날려주라는 뜻에서였죠.
그리고 귀신같이 한대화 선수는 장타를 쳐서 해결사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아마 한대화 선수 본인에게도 영광스러운 기억일 겁니다.




아래는 퍼온 글입니다.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올해로 출범 21년째의 한국프로야구. 그동안 수많은 스타가 명멸했지만 단 한명의 최고 스타를 뽑는다면 그 영광은 누구에게 돌아갈까. 그 해답이 지난 13일 나왔다. KBO(한국야구위원회)가 프로야구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실시한 '프로야구 20년 통산 포지션별 최고 스타' 선정 인터넷 투표 결과가 그것이다.
 지난 2월 1일부터 5월 10일까지 99일간 진행된 이 투표에서 3루수부문의 한대화(42ㆍ동국대 감독)가 투수부문의 선동열(39ㆍKBO홍보위원)을 1269표 차이로 제치고 유효표 6만5840표 중 3만5237표를 얻어 최다득표의 영예를 안았다. 20년 프로야구의 '왕별'로 공인 받은 것이다.
 한대화는 "은퇴한지 5년이 됐는데도 아직까지 잊지않고 기억해 준 많은 팬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며 스스로도 의외라는 반응이다. 한대화는 "3차까지도 내가 1위에 올랐지만 마지막 4차투표에서는 선동열 위원이 역전할 것으로 예상했다"며 "투수부문에는 많은 스타들이 있어 표가 분산된 때문"이라며 겸손해 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팬들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선수가 한대화였고, 이같은 이미지가 최다득표로 연결된 것이다. 프로시절 그의 이름앞에는 많은 수식어가 붙었다. '해결사' '개막전의 사나이' '3점홈런의 사나이' '우승을 몰고다니는 선수' 등.
 우선 "한대화"하면 떠오르는 것이 82년 9월 서울에서 벌어진 제27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결승 3점홈런이다. 우승을 다투던 일본전에서 2-2로 팽팽하던 8회말 2사 1,2루에서 역전의 3점 아치를 날려 한국에 우승을 안기면서 잠실구장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주인공이 동국대 4년생 한대화였다.
 83년 OB에 입단한 한대화는 프로데뷔전인 MBC와의 시즌 개막전에서도 또다시 3점포를 터뜨려 '3점홈런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83년에 이어 88, 89, 90, 92(4회와 7회), 97년 개막전에서 7개의 홈런을 쏘아올려 '개막전의 사나이'도 된다.
 그러나 84년 허리부상에 이어 85년 봄 간염에 따른 성적 부진으로 86년 해태로 트레이드된다. 한대화는 당시 출범을 준비중이던 고향팀 빙그레가 아니면 다른 팀으로 가지않겠다며 야구 포기를 선언하며 맞서다 임의탈퇴선수로 공시되는 우여곡절 끝에 해태선수가 된다. 자신을 동국대에 스카우트했던 당시 김인식 해태투수코치(현 두산 감독)의 설득에 의해서 였다.
 한대화가 또하나의 트레이드 성공사례로 꼽히면서 화려한 야구인생을 꽃피운 것은 해태시절이다. 86년부터 93년까지 8년간 만개한 타격솜씨를 자랑하며 프로 1년 선배 김성한(현 기아 감독)과 2년 후배 선동열 등과 함께 해태를 6번이나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 놓았다. '해결사'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때다. 그리고 94년 LG로 이적하면서 LG는 90년에 이어 두번째 챔프가 된다.
 88년 올스타 MVP에도 선정됐던 한대화는 골든글러브 통산 최다수상(8회)과 연속 수상기록(6회ㆍ86∼91년)이 말해주듯 최고의 3루수였다. 한대화는 3루수의 조건으로 순발력, 강한 어깨 그리고 순간적인 판단을 꼽는다. 98년 1월 프로출신 1호 대학감독이 되면서 동국대를 한차례 우승과 3번의 준우승으로 이끈 한감독은 생활신조인 '최후의 승리는 출발점의 비약이 아니라 결승점에 이르기까지의 결심과 노력임'을 후배들에게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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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찬스에 매우 강했습니다... 홈런 수에 비해 타점이 많은 타자죠

 

물론 홈런도 많이 쳤지만...

 

82 야구선수권대회를 비롯해 중요한 경기마다 하나씩 터뜨려주는 선수였죠

 

86~94년 해태와 LG에서 계속 4번을 맡았던 강타자였죠

2008.04.10.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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