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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선덕여왕 연대표 구해요
pmy2**** 조회수 1,157 작성일2004.12.07
선덕여왕에 대해서 프로젝트를 하는데..

연대표가 좀 필요해서요.

선덕여왕 연대표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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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o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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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대 선덕왕(善德王 632~647 재위기간 15년)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덕만이며,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명민하였다. 진평왕이 붕어하였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덕만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성조황고라는 칭호를 올렸다. 전 임금 때 당 나라에서 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얻어 덕만에게 보인 적이 있었다. 덕만은 "이 꽃이 비록 곱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왕은 웃으면서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기에 이를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로서 국색을 갖추고 있으면 남자가 따르는 법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는 법입니다. 이 꽃이 무척 고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틀림없이 향기가 없는 꽃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씨앗을 심었는데 과연 그녀가 말한 것과 같았다. 그녀의 앞을 내다 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원년(632년) 2월, 대신 을제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자 비가 왔다.
겨울 10월, 특사를 보내 국내의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으로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에게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다.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대사령을 내렸다. 모든 주와 군의 1년 납세를 면제하였다.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3년 봄 정월, 연호를 인평으로 고쳤다. 분황사가 낙성되었다.
3월, 크기가 밤알 정도 되는 우박이 내렸다.

4년,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황제의 신임표를 가지고 와서 왕을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하여, 아버지의 봉작을 잇게 하였다. 영묘사가 낙성되었다.
겨울 10월, 이찬 수품과 용수[용춘이라고도 한다.]를 보내 주와 현을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로하게 하였다.

5년 봄 정월, 이찬 수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3월, 왕에게 병환이 났으나 약과 기도가 모두 효험이 없었으므로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열고, 중을 모아 인왕경을 강의하고, 중 1백 명에게 도첩을 허락하였다.
여름 5월, 개구리 떼가 대궐 서쪽 옥문지에 많이 모였다. 왕이 이를 듣고 좌우 측근들에게 "개구리의 성난 눈은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찌기 서남쪽 변경에 옥문곡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고 들었다. 이웃 나라 군사가 혹시 이 골짜기에 잠입한 것이 아닌가 싶구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 장군 알천과 필탄으로 하여금 그 곳에 가서 수색하게 하였다. 그 곳에는 과연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기 위하여 군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숨어 있었다. 알천이 이를 습격하여 모두 죽였다.
자장 법사가 불법을 탐구하기 위하여 당 나라에 갔다.

6년 봄 정월, 이찬 사진을 서불한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알천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7년 봄 3월, 칠중성 남쪽에 있던 큰 돌이 저절로 35보 거리를 이동하였다.
가을 9월, 노랑 색의 꽃비가 내렸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범하였다. 백성들이 놀라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령하여 이들을 안심시켜 다시 모여 살도록 하였다.
11월, 알천이 고구려 군사와 칠중성 밖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이 싸움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8년 봄 2월, 하슬라주를 북소경으로 만들었다. 사찬 진주로 하여금 이 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가을 7월, 동해의 물이 붉게 변하고 더워져서 고기가 죽었다.

9년 여름 5월, 왕이 자제들을 당 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태종은 천하의 유명한 학자들을 모아 학관으로 임명하고, 국자감에 자주 가서 그들에게 강론을 하게 하였으며, 학생들 가운데 [예기]나 [춘추좌씨전] 가운데 한 가지 이상 능통한 자에게는 모두 관직을 주고, 학사 1천 2백 간을 증축하고, 학생을 3천 2백 60명으로 증원하였다. 이리하여 사방의 학자들이 서울로 모였다. 이 때 고구려, 백제, 고창, 토번도 자제들을 보내 입학시켰다.

11년 가을 7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8월에 다시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 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왕이 사신을 당 나라로 보내 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통보하였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도독 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용석 등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대야성의 패배를 보복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이찬 김 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애초에 대야성이 패했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가 여기서 죽었다.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온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사람이나 물체가 앞을 지나가도 알아 보지 못했다. 그는 얼마 후에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이길 수 없으랴!"하고는 곧 왕에게 나아가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제가 고구려에 가서 군사의 파견을 요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고구려왕 고장은 원래 춘추에 대한 명성을 듣고 있었다. 그는 먼저 군사의 호위를 엄하게 한 뒤에 춘추를 만났다. 춘추가 말했다.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대악당이 되어 우리 국토를 침범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임금이 귀국의 군사를 얻어 치욕을 씻고자 하여, 저를 보내어 하집사에게 명령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고구려왕이 말했다.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인데 너희들이 만약 죽령 서북땅을 돌려 준다면 군사를 파견할 수 있다."
춘추가 대답했다.
"제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빌리고자 하여 왔으나, 대왕께서는 이웃의 환난을 구원하여 이웃과 잘 지낼 뜻은 없고, 다만 남의 나라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니, 저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이 공손하지 않자 고장은 분노하여 그를 별관에 가두었다. 춘추는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본국 왕에게 이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왕은 대장군 김 유신에게 명령하여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가도록 하였다. 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고구려의 남쪽 변경으로 들어가자, 고구려왕이 이를 듣고 춘추를 석방하여 돌려 보냈다.
유신을 압량주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12년 3월, 당 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탐구하던 고승 자장이 돌아왔다.
가을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말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폐국을 침공하여 수십개의 성이 누차 공격을 당했습니다. 이제 이들 두 나라 군사가 연합하여 우리 나라를 필히 빼앗고자, 이번 9월에 군사를 크게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나라의 사직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삼가 저의 신하를 보내 대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오니, 일부의 군대라도 빌려 주어 구원해주기를 원합니다."
황제가 사신에게 말했다.
"너희가 두 나라의 침략을 받는 것이 진실로 애통하다. 그렇기에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 세 나라가 화친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사신이 발길을 돌리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있다. 이는 너희 나라를 빼앗고 너희 나라를 나누어 갖자는 데에 뜻이 있는 것이다. 너희 나라에는 사직을 보전할 수 있는 무슨 특별한 대책이라도 있는가?"
사신이 말했다. "우리 임금께서는, 상황은 급하고 대책이 없으므로 급한 사정을 대국에 말하여 나라의 보전을 바라는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내가 변방의 군사를 조금 내고, 거란·말갈과 함께 곧장 요동을 치면, 너희 나라에 대한 포위가 자연히 풀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1년 동안은 포위 상태를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후에 군사를 계속하여 보내지 않을 것을 그들이 알면, 도리어 함부로 침략을 할 것이다. 이리되면 네 나라가 모두 소란해지고 너희 나라도 편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첫째 계책이다. 내가 또한 너희 나라에 우리 나라가 사용하는 붉은 옷과 붉은 기 수천 벌을 주고, 고구려 백제의 두 나라 군사가 올 때 이것을 벌려 세워 놓아라. 그리하면 저들은 이를 우리 나라 군대로 여기고 반드시 모두 도주할 것이다. 이것이 두번 째 계책이다. 백제는 바다의 험한 요새를 믿고 병기를 수리하지 않은 채 남녀가 난잡하게 뒤섞여 놀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수십 수백 척의 배에 무장한 군사를 싣고 소리없이 바다를 건너 바로 그 나라를 습격할 것이다. 너희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이웃 나라로부터 경멸을 당하고 있으며, 주인을 잃은 채 도적이 들끓고 있으니 편안한 시절이 없다. 내가 나의 친척 한 명을 보내 너희 나라의 임금을 삼겠다. 그러나 그가 혼자 임금 노릇을 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당연히 군사를 파견하여 보호하다가 너희 나라가 안정되면, 너희 나라에 맡겨 스스로 나라를 지키도록 할 것이다. 이것이 세번 째 계책이다. 장차 어느 계책을 따르겠는지 그대는 잘 생각하여 보아라."
사신은 다만 "예"할 뿐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의 사람됨이 용렬하여, 군사를 요청하고 급한 상황을 호소할 만한 인재가 못됨을 개탄하였다.

13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에게 조서를 주어 고구려에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라는 운명을 우리 나라에 맡기고, 조공을 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너희 나라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곧 거두어 들여야 한다. 만약 또 다시 신라를 공격을 한다면 내년에는 틀림없이 군대를 동원하여 너희 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개소문은 현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와 신라는 사이가 나빠진지 이미 오래이다. 과거 수 나라가 침범하였을 때, 신라는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땅 5백여 리를 빼앗고,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그 땅과 성을 돌려주지 않으면 이번 전쟁은 그만 둘 수 없을 것이다." 현장은 "지나간 일을 어찌 따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으나, 개소문은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가을 9월, 왕이 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하였다. 유신은 크게 승리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14년 봄 정월,유신은 백제를 치고 돌아와서, 아직 왕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대부대의 백제군이 다시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유신에게 출정을 명하였다. 유신은 집에도 가보지 못한 채 출정하여 백제군을 격파하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3월에 유신이 돌아와 왕에게 복명하고 아직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백제가 다시 침노한다는 급보가 왔다. 왕은 사세가 급하다고 판단하고 유신에게 말했다. "나라의 존망이 공의 한 몸에 매었으니, 노고를 마다하지 말고 가서 대책을 도모하라!" 유신은 또 다시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밤낮으로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가 서쪽으로 행군하는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통과하게 되었다. 온 집안 식구들이 나와 유신을 바라보고 눈물지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 보지도 않고 싸움터로 갔다.
3월, 황룡사 탑을 세웠다. 이는 자장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여름 5월, 당 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 3만을 동원하여 이를 도왔다.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서쪽의 일곱 성을 빼앗았다.
겨울 11월, 이찬 비담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16년 봄 정월,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을 도모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8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지냈다.

출처 : 삼국사기

200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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