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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4학년 국어 2학기 꽃잎으로 쓴 편지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4,390 작성일2005.10.04

제가 4학년이에요...

지금은 2학기구요,

국어 읽기에 보면 꽃잎으로 쓴 글씨나 , 편지가 있는데,

그것좀 써주세요...

책을 안가져와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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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4학년 2학긴데....

 

 

꽃잎으로 쓴 글자

 

                                                                                                              손연자

 

 

 

 

 

- 이 이야기는 나 오현지의 할아버지가 아홉 살이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일본이

우리 나라를 빼앗고 말도 글도 못 쓰게 하면서 괴롭히던 때였습니다. -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복사꽃이 하얗게 피었습니다.뒤꼍 우물가가 환해졌습니다. 승우는 창가에 서서 가만히 나무를 바라봅니다. 연한 복사꽃 향내가 코끝을 간질입니다. 오늘은 나뭇가지에 올라앉아 하루 종일 꽃만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침을 끝낸 승우는 누이들과 함께 솟을대문을 나섰습니다. 새로 담임이 된 다나카 선생님은 지각하는 걸 가장 싫어합니다. 아이들은 따귀를 맞기 싫어서, 또는 걸상을 들고 벌을 서거나 냄새 지독한 변소 청소를 하게 될까 봐 모두가 일찍들 옵니다. 북쪽 담 구석에 있는 3학년 1반 변소는 달걀 귀신이 나온다는 말도 있습니다.
누이들과 헤어져 교문을 들어선 승우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었습니다.
봄바람이 제법 매섭습니다.
화단에 있는 나무들이 쓰러졌다 일어났다 야단입니다.
걸상에 앉아 막 책가방을 내려놓는데 아침 조례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복사꽃에다 너무 한눈을 팔았나 봅니다. 하마터면 지각을 할 뻔했습니다.
아이들은 걸상 등받이에다 허리를 붙이고 가슴을 쭉 펴고 앉았습니다.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전에는 으레 칠판 쪽을 똑바로 보고 있어야 합니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복도를 울리더니 드르륵 교실 문이 열렸습니다. 국민복에 당꼬바지를 입은 선생님이 성큼 교단 위로 올라섰습니다. 빡빡 깎은 머리, 짙은 눈썹, 그 아래로 쏘는 듯한 눈빛이 차갑습니다.
"차렷, 경례!"
반장 준식이가 발딱 일어나 외쳤습니다. 아이들은 머리가 책상에 닿을 정도로 아침 인사를 했습니다.
"다 왔군. 좋아."
선생님은 교실을 휘둘러 보고 나서 싸늘하게 말했습니다. 그러곤 팔을 있는 대로 벌려 교탁 양쪽 끝을 움켜잡았습니다. 작달막한 키가 더욱 작아졌습니다. 아이들은 겁먹은 얼굴로 몸을 사렸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폭폭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너희들! 오늘부터 선생님이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하도록 해 주겠다."
뜻밖에도 선생님의 목소리는 쾌활했습니다. 더욱이 재미있는 놀이라는 건 더 뜻밖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웬일인가 싶어 서로를 흘깃흘깃 훔쳐보았습니다.
아침 조례 시간의 첫마디는 으레 일본과 조선은 하나이고, 천황폐하는 우리들의 어버이시니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천황이란 말을 할 때의 선생님은 불에 덴 것처럼 깜짝 놀라서 차렷 자세를 했습니다. 그러고선 일본 쪽을 향해 구십 도로 허리를 꺾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놀이라니요? 아이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걸 봐라."
가로 삼 센티, 세로 십 센티 정도의 나무패가 높이 치켜졌습니다. 횃불마냥 우뚝 솟은 나무패는 굉장한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선생님은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아주 천천히 나무패를 움직였습니다. 아이들의 눈동자는 작은 나무패가 가는 대로 이 쪽에서 저 쪽으로 따라갔습니다.
"이게 뭔지 알겠나?"
교실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반장, 일어나라!"
준식이가 발딱 일어섰습니다.
"받아."
나무패가 붕 떴습니다. 준식이는 두 손을 마주 펴 손목에다 찰싹 붙였습니다. 손바닥 안에서 척! 소리가 났습니다.
'위반.'
얄따란 나무패에는 일본말로 '위반'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준식이는 얼른 주먹을 쥐어 글자를 가렸습니다. 붓으로 쓴 까만 글자가 무슨 괴물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렸습니다. 곧이어 깐깐한 목소리가 아이들의 마음을 옭아맸습니다.
"반장은 잘 듣거라. 너는 그 패를 가지고 있다가 노는 시간에 조선말을 쓰는 자가 있거든 그걸 주어라. 그걸 받은 자는 조선말을 하는 동무가 눈에 띄는 즉시 다시 넘겨 주어라. 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누가 저 패를 가지고 있나 보겠다. 맨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자는 무조건 손바닥 열 대씩이다. 자, 서로서로 잘 살피도록. 알았나?"
재미있는 놀이를 기대했던 아이들은 실망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일어났습니다.
"조용히 해라!"
선생님은 얼굴이 빨개 가지고 출석부로 교탁을 탕탕 내려쳤습니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아이들은 모조리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칠판 바로 위에 걸린 일장기에 아침 햇살이 퍼졌습니다. 일장기 속의 둥근 해는 방금 솟은 듯 붉었습니다. 선생님 입가에 뜻 모를 웃음이 어렸습니다. 승우는 얼른 창 밖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인왕산 봉우리가 꺼칠해 보였습니다. 선바위는 잿빛 구름을 무겁게 이고 있었습니다.

1교시 수업이 끝나고 노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긴장을 했습니다. 잘못하여 조선말이 나오면 큰일입니다. 다나카 선생님의 몽둥이는 다른 반에 비해 훨씬 굵고 단단합니다. 아이들은 반이나 넘게 변소엘 가는 척 교실을 빠져 나갔습니다. 남아 있는 아이들은 아예 손으로 입을 막거나 책에다 얼굴을 묻었습니다. 그러나 나무패는 어렵지 않게 4분단에 앉아 있는 윤칠이한테로 넘어갔습니다.
"기무라 이치로!"
윤칠이의 일본 이름이 불려졌습니다.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든 윤칠이의 얼굴이 화르르 구겨졌습니다. 준식이랑 윤칠이는 골목을 사이에 둔 단짝 동무입니다. 그걸 모르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놈 봐라. 하필이면 날 노리다니.'
짝꿍한테 지우개를 주면서 '이거!'라고 한 것뿐이었습니다.
'귀도 밝지, 어떻게 그 소리를 들었담. 틀림없이 벼르고 있었던 거야.'
윤칠이는 기분이 울적했습니다. 그러나 나무패는 어떻게든 넘겨야 합니다. 윤칠이는 눈을 빛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걸려든 게 '야!'라고 동무를 부른 태성이였습니다.
'저 녀석, 그 동안 나한테 얻어먹은 엿이 얼마인데. 어디 이제 주나 봐라.'
얼결에 '위반'을 받아 든 태성이는 어깨로 숨을 몰아 쉬며 씨근거렸습니다. 윤칠이는 멋쩍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습니다. 선생님이 보실까 봐 태성이는 수업 시간 내내 엉덩이에다 나무패를 깔고 있었습니다.
다시 노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위반'의 나무패는 교실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고 돌았고, 그 때마다 동무를 원망하는 마음들을 어린 가슴에다 죽죽 긋고 떠났습니다. 그걸 넘겨받은 아이는 유리창을 스치는 바람결에도 고개를 홱홱 돌렸습니다.
하루의 수업이 다 끝났습니다. 선생님은 종례를 준비하러 교무실로 가셨습니다. 그제야 아이들은 호창이만 빼고 가슴들을 폈습니다. 호창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무패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어, 나비다!"
옆줄에 있던 명서가 손가락으로 맨 꼭대기 창문을 가리켰습니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창가를 날고 있었습니다. 올 들어 나비는 처음이었습니다.
"아리가토오(고맙다)!"
호창이는 들고 있던 나뭇조각을 잽싸게 던졌습니다. 명서가 제 머리카락을 움켜잡는 걸 보고도 호창이는 싱글벙글 웃었습니다. 종례 시간은 바짝바짝 다가왔습니다. 애가 단 명서는 혹시나 해서 귀를 활짝 열었지만 아이들은 꿈쩍도 안 했습니다. 복도에서는 슬리퍼 끄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 왔습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릴 겁니다. 안절부절못하던 명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아얏!"
하는 일이 굼떠서 별명이 칠득이인 재득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명서가 뺨을 꼬집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조선말이 나왔습니다. 느닷없이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이따이!'라는 일본말로 아픔을 표시하겠습니까? 명서는 다람쥐보다 더 빠르게 나무패를 떠넘기곤 손바닥을 탈탈 소리나게 털었습니다.
"비겁한 놈!"
명서의 짝꿍인 승우가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명서를 향해 달려들려던 재득이가 주춤했습니다. 다음 순간 입술이 벙긋이 벌어진 재득이는 좋아라 승우 손에 나무패를 쥐여 주고 제자리로 갔습니다.
승우는 반 동무들이 입을 모아 히도츠(하나) 후다츠(둘) 미츠(셋)를 외치는 소리를 들어 가며 고스란히 손바닥 열 대를 맞았습니다. 다나카 선생님이 몽둥이를 뗐을 때 승우의 여린 손은 피멍이 들어 푸르뎅뎅했습니다.

엄마가 승우의 손을 보신 건 저녁 밥상머리 앞에서였습니다. 엄마와 누이들은 놀란 얼굴을 감추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승우와 겸상을 한 아버지는 힐긋 곁눈질을 하셨을 뿐 표정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꼬치꼬치 캐물으셨습니다. 아무리 넘어져서 그랬다고 해도 영 곧이듣지를 않으셨습니다.
"선생님한테 맞았어요."
별수없이 털어놓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조, 조선말을 했거든요."
"너만?"
"아니오."
승우는 끝내 더듬더듬 '위반'의 나무패를 말씀드렸고, 엄마는 내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셨습니다.
"승우야."
"예."
아들을 불러 놓고도 아버지는 잠자코 계셨습니다. 방 안엔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버지는 슬픔이 담긴 눈으로 승우를 내려다보셨습니다.
누이들도 승우도 숟가락을 가만히 내려놓았습니다. 아버지는 두어 번 잔기침을 하셨습니다.
"오늘 보니 뒤울안에 복사꽃이 피었더구나. 승우야, 보았느냐?"
"예."
"아름답더냐?"
"예."
"그래, 꽃이 핀 나무는 다 아름답지."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무셨습니다. 멀리서 아련히 전차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냉냉냉냉! 꼬마 전차는 설 때나 떠날 때나 그렇게 코맹맹이 종을 쳤습니다. 식구들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보아라."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가 들창문을 여셨습니다. 복사꽃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두어 달 전 겨울에만 해도 저 나무엔 앙상한 가지밖에 없었다. 나무는 쌩쌩 부는 바람과 찬 눈을 고스란히 다 맞고 서 있었지. 꼭 죽은 것처럼. 그런 나뭇가지에서 저렇게 화사한 꽃이 필 줄을 생각이나 했겠느냐?"
"……."
"아무도 몰랐을 게다. 그러나 나무는 아무리 모진 겨울일지라도 뿌리만 얼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잎이 돋고 꽃을 피운다."
승우는 문득 서대문 감옥소가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얼어 죽지 않으면'이라는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었나 봅니다. 아까도 오랏줄을 두르고 용수(죄수를 밖으로 데리고 다닐 때 얼굴을 보지 못하게 머리에 씌우던 갓의 한 가지)를 쓴 조선 사람들이 일본 순사한테 떠밀리어 감옥소로 들어가는 걸 보았습니다. 감옥소는 봄인데도 음산해 보였습니다. 문고리에 손이 척척 달라붙도록 추운 겨울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승우는 누더기 옷을 입은 어른들이 불도 안 때는 저 속에서 어떻게 꽁꽁 얼음이 어는 겨울을 견디어 내나 그게 늘 궁금했습니다. 큰누이가 살며시 승우의 옷깃을 잡아당겼습니다. 승우는 얼른 앞에 앉아 계신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를 거다만 나라와 민족도 마찬가지란다. 승우야, 넌 나라와 민족의 뿌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
"얼과 말과 글이다. 너희들은 얼빠진 놈이라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을 게다. 맞는 말이다. 얼이 빠진 사람은 정신이 빠지고 없으니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 얼과 말과 글, 그것만 있으면 아무리 모진 비바람에 시달려도 언젠가는 반드시 살아나 꽃을 피울 것이다. 저 복숭아나무처럼. 마음에 새겨 두거라."
아버지는 사랑으로 나가셨습니다. 방 안엔 여전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습니다. 승우는 노랗게 결이 든 장판지만 내려다보았습니다.
"승우야."
큰누이가 다정하게 불렀습니다.
"많이 아팠지?"
"괜찮아요."
"괜찮긴. 느네 담임 참 모질다. 어린애 손을 어쩌면 이렇게 되도록 때리니."
작은누이가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누이들은 먹다 만 저녁상을 치우러 부엌으로 나갔습니다. 곧이어 달그락거리며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이리 온."
엄마가 손을 벌리고 오라는 손짓을 하셨습니다. 승우가 다가가자 엄마는 저고리섶을 들치시고 가슴에다 승우의 두 손을 갖다 대셨습니다. 아직도 알알한 손바닥으로 뚝뚝 엄마의 심장 뛰는 소리가 전해 왔습니다. 승우는 피멍이 살살 풀리면서 아픔이 가시는 걸 느꼈습니다. 엄마는 승우의 머릿결을 가다듬어 주며 등을 토닥이셨습니다.
"승우야, 이담에 어른이 되거든 넌 시인이 되거라. 조선말 조선글로 가장 먼저 시를 쓴 시인이 되거라. 남을 밟고 올라서지 말고 남의 아픔을 잘 이해하는 시인이 되거라. 오늘부터 엄마가 글을 가르쳐 주마."
승우는 엄마 품에다 와락 얼굴을 묻었습니다. 오늘 엄마의 말씀이 왜 한숨처럼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엄마는 오래도록 승우를 안고 계셨습니다.
멀리서 냉냉냉, 전차가 지나갑니다.
"승우야, 잠시만 있거라."
옥색 치맛자락을 여미시며 엄마는 버선발로 사뿐히 뒤꼍으로 나가셨습니다. 오래지 않아 치마 가득 꽃바람을 묻히시고 엄마는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엄마 손엔 복사꽃잎 소복한 백자 보시기가 들려 있었습니다.
엄마는 다락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만 내놓으시던팔각 소반을 꺼내셨습니다. 그러곤 꽃잎으로 그 위에다 글자를 쓰셨습니다.
"산."
"하늘."
"별."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습니다.
승우는 엄마가 쓰신 꽃글을 보았습니다.


'야마', '소라', '호시'로 불렀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산'과 '하늘'과 '별'로 불리자 그 말들은 두렷두렷 살아나 승우에게로 왔습니다.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눈앞으로 환한 빛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꽃잎으로 쓴 산이 우뚝 솟았습니다.
꽃잎으로 쓴 하늘이 새파래졌습니다.
꽃잎 별은 잘강잘강 맑은 소리를 냈습니다.


팔각 소반 위의 글자들은 향기롭고 보드랍고 고왔습니다.
아, 눈물! 엄마의 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승우는 꽃글이 쓰여진 소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200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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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으로 쓴 글자

 

                                                                                                              손연자

 

 

 

 

 

- 이 이야기는 나 오현지의 할아버지가 아홉 살이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일본이

우리 나라를 빼앗고 말도 글도 못 쓰게 하면서 괴롭히던 때였습니다. -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복사꽃이 하얗게 피었습니다.뒤꼍 우물가가 환해졌습니다. 승우는 창가에 서서 가만히 나무를 바라봅니다. 연한 복사꽃 향내가 코끝을 간질입니다. 오늘은 나뭇가지에 올라앉아 하루 종일 꽃만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침을 끝낸 승우는 누이들과 함께 솟을대문을 나섰습니다. 새로 담임이 된 다나카 선생님은 지각하는 걸 가장 싫어합니다. 아이들은 따귀를 맞기 싫어서, 또는 걸상을 들고 벌을 서거나 냄새 지독한 변소 청소를 하게 될까 봐 모두가 일찍들 옵니다. 북쪽 담 구석에 있는 3학년 1반 변소는 달걀 귀신이 나온다는 말도 있습니다.
누이들과 헤어져 교문을 들어선 승우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었습니다.
봄바람이 제법 매섭습니다.
화단에 있는 나무들이 쓰러졌다 일어났다 야단입니다.
걸상에 앉아 막 책가방을 내려놓는데 아침 조례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복사꽃에다 너무 한눈을 팔았나 봅니다. 하마터면 지각을 할 뻔했습니다.
아이들은 걸상 등받이에다 허리를 붙이고 가슴을 쭉 펴고 앉았습니다.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전에는 으레 칠판 쪽을 똑바로 보고 있어야 합니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복도를 울리더니 드르륵 교실 문이 열렸습니다. 국민복에 당꼬바지를 입은 선생님이 성큼 교단 위로 올라섰습니다. 빡빡 깎은 머리, 짙은 눈썹, 그 아래로 쏘는 듯한 눈빛이 차갑습니다.
"차렷, 경례!"
반장 준식이가 발딱 일어나 외쳤습니다. 아이들은 머리가 책상에 닿을 정도로 아침 인사를 했습니다.
"다 왔군. 좋아."
선생님은 교실을 휘둘러 보고 나서 싸늘하게 말했습니다. 그러곤 팔을 있는 대로 벌려 교탁 양쪽 끝을 움켜잡았습니다. 작달막한 키가 더욱 작아졌습니다. 아이들은 겁먹은 얼굴로 몸을 사렸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폭폭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너희들! 오늘부터 선생님이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하도록 해 주겠다."
뜻밖에도 선생님의 목소리는 쾌활했습니다. 더욱이 재미있는 놀이라는 건 더 뜻밖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웬일인가 싶어 서로를 흘깃흘깃 훔쳐보았습니다.
아침 조례 시간의 첫마디는 으레 일본과 조선은 하나이고, 천황폐하는 우리들의 어버이시니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천황이란 말을 할 때의 선생님은 불에 덴 것처럼 깜짝 놀라서 차렷 자세를 했습니다. 그러고선 일본 쪽을 향해 구십 도로 허리를 꺾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놀이라니요? 아이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걸 봐라."
가로 삼 센티, 세로 십 센티 정도의 나무패가 높이 치켜졌습니다. 횃불마냥 우뚝 솟은 나무패는 굉장한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선생님은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아주 천천히 나무패를 움직였습니다. 아이들의 눈동자는 작은 나무패가 가는 대로 이 쪽에서 저 쪽으로 따라갔습니다.
"이게 뭔지 알겠나?"
교실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반장, 일어나라!"
준식이가 발딱 일어섰습니다.
"받아."
나무패가 붕 떴습니다. 준식이는 두 손을 마주 펴 손목에다 찰싹 붙였습니다. 손바닥 안에서 척! 소리가 났습니다.
'위반.'
얄따란 나무패에는 일본말로 '위반'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준식이는 얼른 주먹을 쥐어 글자를 가렸습니다. 붓으로 쓴 까만 글자가 무슨 괴물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렸습니다. 곧이어 깐깐한 목소리가 아이들의 마음을 옭아맸습니다.
"반장은 잘 듣거라. 너는 그 패를 가지고 있다가 노는 시간에 조선말을 쓰는 자가 있거든 그걸 주어라. 그걸 받은 자는 조선말을 하는 동무가 눈에 띄는 즉시 다시 넘겨 주어라. 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누가 저 패를 가지고 있나 보겠다. 맨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자는 무조건 손바닥 열 대씩이다. 자, 서로서로 잘 살피도록. 알았나?"
재미있는 놀이를 기대했던 아이들은 실망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일어났습니다.
"조용히 해라!"
선생님은 얼굴이 빨개 가지고 출석부로 교탁을 탕탕 내려쳤습니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아이들은 모조리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칠판 바로 위에 걸린 일장기에 아침 햇살이 퍼졌습니다. 일장기 속의 둥근 해는 방금 솟은 듯 붉었습니다. 선생님 입가에 뜻 모를 웃음이 어렸습니다. 승우는 얼른 창 밖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인왕산 봉우리가 꺼칠해 보였습니다. 선바위는 잿빛 구름을 무겁게 이고 있었습니다.

1교시 수업이 끝나고 노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긴장을 했습니다. 잘못하여 조선말이 나오면 큰일입니다. 다나카 선생님의 몽둥이는 다른 반에 비해 훨씬 굵고 단단합니다. 아이들은 반이나 넘게 변소엘 가는 척 교실을 빠져 나갔습니다. 남아 있는 아이들은 아예 손으로 입을 막거나 책에다 얼굴을 묻었습니다. 그러나 나무패는 어렵지 않게 4분단에 앉아 있는 윤칠이한테로 넘어갔습니다.
"기무라 이치로!"
윤칠이의 일본 이름이 불려졌습니다.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든 윤칠이의 얼굴이 화르르 구겨졌습니다. 준식이랑 윤칠이는 골목을 사이에 둔 단짝 동무입니다. 그걸 모르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놈 봐라. 하필이면 날 노리다니.'
짝꿍한테 지우개를 주면서 '이거!'라고 한 것뿐이었습니다.
'귀도 밝지, 어떻게 그 소리를 들었담. 틀림없이 벼르고 있었던 거야.'
윤칠이는 기분이 울적했습니다. 그러나 나무패는 어떻게든 넘겨야 합니다. 윤칠이는 눈을 빛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걸려든 게 '야!'라고 동무를 부른 태성이였습니다.
'저 녀석, 그 동안 나한테 얻어먹은 엿이 얼마인데. 어디 이제 주나 봐라.'
얼결에 '위반'을 받아 든 태성이는 어깨로 숨을 몰아 쉬며 씨근거렸습니다. 윤칠이는 멋쩍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습니다. 선생님이 보실까 봐 태성이는 수업 시간 내내 엉덩이에다 나무패를 깔고 있었습니다.
다시 노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위반'의 나무패는 교실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고 돌았고, 그 때마다 동무를 원망하는 마음들을 어린 가슴에다 죽죽 긋고 떠났습니다. 그걸 넘겨받은 아이는 유리창을 스치는 바람결에도 고개를 홱홱 돌렸습니다.
하루의 수업이 다 끝났습니다. 선생님은 종례를 준비하러 교무실로 가셨습니다. 그제야 아이들은 호창이만 빼고 가슴들을 폈습니다. 호창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무패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어, 나비다!"
옆줄에 있던 명서가 손가락으로 맨 꼭대기 창문을 가리켰습니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창가를 날고 있었습니다. 올 들어 나비는 처음이었습니다.
"아리가토오(고맙다)!"
호창이는 들고 있던 나뭇조각을 잽싸게 던졌습니다. 명서가 제 머리카락을 움켜잡는 걸 보고도 호창이는 싱글벙글 웃었습니다. 종례 시간은 바짝바짝 다가왔습니다. 애가 단 명서는 혹시나 해서 귀를 활짝 열었지만 아이들은 꿈쩍도 안 했습니다. 복도에서는 슬리퍼 끄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 왔습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릴 겁니다. 안절부절못하던 명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아얏!"
하는 일이 굼떠서 별명이 칠득이인 재득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명서가 뺨을 꼬집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조선말이 나왔습니다. 느닷없이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이따이!'라는 일본말로 아픔을 표시하겠습니까? 명서는 다람쥐보다 더 빠르게 나무패를 떠넘기곤 손바닥을 탈탈 소리나게 털었습니다.
"비겁한 놈!"
명서의 짝꿍인 승우가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명서를 향해 달려들려던 재득이가 주춤했습니다. 다음 순간 입술이 벙긋이 벌어진 재득이는 좋아라 승우 손에 나무패를 쥐여 주고 제자리로 갔습니다.
승우는 반 동무들이 입을 모아 히도츠(하나) 후다츠(둘) 미츠(셋)를 외치는 소리를 들어 가며 고스란히 손바닥 열 대를 맞았습니다. 다나카 선생님이 몽둥이를 뗐을 때 승우의 여린 손은 피멍이 들어 푸르뎅뎅했습니다.

엄마가 승우의 손을 보신 건 저녁 밥상머리 앞에서였습니다. 엄마와 누이들은 놀란 얼굴을 감추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승우와 겸상을 한 아버지는 힐긋 곁눈질을 하셨을 뿐 표정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꼬치꼬치 캐물으셨습니다. 아무리 넘어져서 그랬다고 해도 영 곧이듣지를 않으셨습니다.
"선생님한테 맞았어요."
별수없이 털어놓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조, 조선말을 했거든요."
"너만?"
"아니오."
승우는 끝내 더듬더듬 '위반'의 나무패를 말씀드렸고, 엄마는 내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셨습니다.
"승우야."
"예."
아들을 불러 놓고도 아버지는 잠자코 계셨습니다. 방 안엔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버지는 슬픔이 담긴 눈으로 승우를 내려다보셨습니다.
누이들도 승우도 숟가락을 가만히 내려놓았습니다. 아버지는 두어 번 잔기침을 하셨습니다.
"오늘 보니 뒤울안에 복사꽃이 피었더구나. 승우야, 보았느냐?"
"예."
"아름답더냐?"
"예."
"그래, 꽃이 핀 나무는 다 아름답지."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무셨습니다. 멀리서 아련히 전차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냉냉냉냉! 꼬마 전차는 설 때나 떠날 때나 그렇게 코맹맹이 종을 쳤습니다. 식구들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보아라."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가 들창문을 여셨습니다. 복사꽃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두어 달 전 겨울에만 해도 저 나무엔 앙상한 가지밖에 없었다. 나무는 쌩쌩 부는 바람과 찬 눈을 고스란히 다 맞고 서 있었지. 꼭 죽은 것처럼. 그런 나뭇가지에서 저렇게 화사한 꽃이 필 줄을 생각이나 했겠느냐?"
"……."
"아무도 몰랐을 게다. 그러나 나무는 아무리 모진 겨울일지라도 뿌리만 얼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잎이 돋고 꽃을 피운다."
승우는 문득 서대문 감옥소가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얼어 죽지 않으면'이라는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었나 봅니다. 아까도 오랏줄을 두르고 용수(죄수를 밖으로 데리고 다닐 때 얼굴을 보지 못하게 머리에 씌우던 갓의 한 가지)를 쓴 조선 사람들이 일본 순사한테 떠밀리어 감옥소로 들어가는 걸 보았습니다. 감옥소는 봄인데도 음산해 보였습니다. 문고리에 손이 척척 달라붙도록 추운 겨울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승우는 누더기 옷을 입은 어른들이 불도 안 때는 저 속에서 어떻게 꽁꽁 얼음이 어는 겨울을 견디어 내나 그게 늘 궁금했습니다. 큰누이가 살며시 승우의 옷깃을 잡아당겼습니다. 승우는 얼른 앞에 앉아 계신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를 거다만 나라와 민족도 마찬가지란다. 승우야, 넌 나라와 민족의 뿌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
"얼과 말과 글이다. 너희들은 얼빠진 놈이라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을 게다. 맞는 말이다. 얼이 빠진 사람은 정신이 빠지고 없으니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 얼과 말과 글, 그것만 있으면 아무리 모진 비바람에 시달려도 언젠가는 반드시 살아나 꽃을 피울 것이다. 저 복숭아나무처럼. 마음에 새겨 두거라."
아버지는 사랑으로 나가셨습니다. 방 안엔 여전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습니다. 승우는 노랗게 결이 든 장판지만 내려다보았습니다.
"승우야."
큰누이가 다정하게 불렀습니다.
"많이 아팠지?"
"괜찮아요."
"괜찮긴. 느네 담임 참 모질다. 어린애 손을 어쩌면 이렇게 되도록 때리니."
작은누이가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누이들은 먹다 만 저녁상을 치우러 부엌으로 나갔습니다. 곧이어 달그락거리며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이리 온."
엄마가 손을 벌리고 오라는 손짓을 하셨습니다. 승우가 다가가자 엄마는 저고리섶을 들치시고 가슴에다 승우의 두 손을 갖다 대셨습니다. 아직도 알알한 손바닥으로 뚝뚝 엄마의 심장 뛰는 소리가 전해 왔습니다. 승우는 피멍이 살살 풀리면서 아픔이 가시는 걸 느꼈습니다. 엄마는 승우의 머릿결을 가다듬어 주며 등을 토닥이셨습니다.
"승우야, 이담에 어른이 되거든 넌 시인이 되거라. 조선말 조선글로 가장 먼저 시를 쓴 시인이 되거라. 남을 밟고 올라서지 말고 남의 아픔을 잘 이해하는 시인이 되거라. 오늘부터 엄마가 글을 가르쳐 주마."
승우는 엄마 품에다 와락 얼굴을 묻었습니다. 오늘 엄마의 말씀이 왜 한숨처럼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엄마는 오래도록 승우를 안고 계셨습니다.
멀리서 냉냉냉, 전차가 지나갑니다.
"승우야, 잠시만 있거라."
옥색 치맛자락을 여미시며 엄마는 버선발로 사뿐히 뒤꼍으로 나가셨습니다. 오래지 않아 치마 가득 꽃바람을 묻히시고 엄마는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엄마 손엔 복사꽃잎 소복한 백자 보시기가 들려 있었습니다.
엄마는 다락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만 내놓으시던팔각 소반을 꺼내셨습니다. 그러곤 꽃잎으로 그 위에다 글자를 쓰셨습니다.
"산."
"하늘."
"별."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습니다.
승우는 엄마가 쓰신 꽃글을 보았습니다.


'야마', '소라', '호시'로 불렀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산'과 '하늘'과 '별'로 불리자 그 말들은 두렷두렷 살아나 승우에게로 왔습니다.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눈앞으로 환한 빛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꽃잎으로 쓴 산이 우뚝 솟았습니다.
꽃잎으로 쓴 하늘이 새파래졌습니다.
꽃잎 별은 잘강잘강 맑은 소리를 냈습니다.


팔각 소반 위의 글자들은 향기롭고 보드랍고 고왔습니다.
아, 눈물! 엄마의 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승우는 꽃글이 쓰여진 소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2008.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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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으로 쓴 글자

 

                                                                                                              손연자

 

 

 

 

 

- 이 이야기는 나 오현지의 할아버지가 아홉 살이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일본이

우리 나라를 빼앗고 말도 글도 못 쓰게 하면서 괴롭히던 때였습니다. -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복사꽃이 하얗게 피었습니다.뒤꼍 우물가가 환해졌습니다. 승우는 창가에 서서 가만히 나무를 바라봅니다. 연한 복사꽃 향내가 코끝을 간질입니다. 오늘은 나뭇가지에 올라앉아 하루 종일 꽃만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침을 끝낸 승우는 누이들과 함께 솟을대문을 나섰습니다. 새로 담임이 된 다나카 선생님은 지각하는 걸 가장 싫어합니다. 아이들은 따귀를 맞기 싫어서, 또는 걸상을 들고 벌을 서거나 냄새 지독한 변소 청소를 하게 될까 봐 모두가 일찍들 옵니다. 북쪽 담 구석에 있는 3학년 1반 변소는 달걀 귀신이 나온다는 말도 있습니다.
누이들과 헤어져 교문을 들어선 승우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었습니다.
봄바람이 제법 매섭습니다.
화단에 있는 나무들이 쓰러졌다 일어났다 야단입니다.
걸상에 앉아 막 책가방을 내려놓는데 아침 조례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복사꽃에다 너무 한눈을 팔았나 봅니다. 하마터면 지각을 할 뻔했습니다.
아이들은 걸상 등받이에다 허리를 붙이고 가슴을 쭉 펴고 앉았습니다.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전에는 으레 칠판 쪽을 똑바로 보고 있어야 합니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복도를 울리더니 드르륵 교실 문이 열렸습니다. 국민복에 당꼬바지를 입은 선생님이 성큼 교단 위로 올라섰습니다. 빡빡 깎은 머리, 짙은 눈썹, 그 아래로 쏘는 듯한 눈빛이 차갑습니다.
"차렷, 경례!"
반장 준식이가 발딱 일어나 외쳤습니다. 아이들은 머리가 책상에 닿을 정도로 아침 인사를 했습니다.
"다 왔군. 좋아."
선생님은 교실을 휘둘러 보고 나서 싸늘하게 말했습니다. 그러곤 팔을 있는 대로 벌려 교탁 양쪽 끝을 움켜잡았습니다. 작달막한 키가 더욱 작아졌습니다. 아이들은 겁먹은 얼굴로 몸을 사렸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폭폭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너희들! 오늘부터 선생님이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하도록 해 주겠다."
뜻밖에도 선생님의 목소리는 쾌활했습니다. 더욱이 재미있는 놀이라는 건 더 뜻밖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웬일인가 싶어 서로를 흘깃흘깃 훔쳐보았습니다.
아침 조례 시간의 첫마디는 으레 일본과 조선은 하나이고, 천황폐하는 우리들의 어버이시니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천황이란 말을 할 때의 선생님은 불에 덴 것처럼 깜짝 놀라서 차렷 자세를 했습니다. 그러고선 일본 쪽을 향해 구십 도로 허리를 꺾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놀이라니요? 아이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걸 봐라."
가로 삼 센티, 세로 십 센티 정도의 나무패가 높이 치켜졌습니다. 횃불마냥 우뚝 솟은 나무패는 굉장한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선생님은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아주 천천히 나무패를 움직였습니다. 아이들의 눈동자는 작은 나무패가 가는 대로 이 쪽에서 저 쪽으로 따라갔습니다.
"이게 뭔지 알겠나?"
교실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반장, 일어나라!"
준식이가 발딱 일어섰습니다.
"받아."
나무패가 붕 떴습니다. 준식이는 두 손을 마주 펴 손목에다 찰싹 붙였습니다. 손바닥 안에서 척! 소리가 났습니다.
'위반.'
얄따란 나무패에는 일본말로 '위반'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준식이는 얼른 주먹을 쥐어 글자를 가렸습니다. 붓으로 쓴 까만 글자가 무슨 괴물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렸습니다. 곧이어 깐깐한 목소리가 아이들의 마음을 옭아맸습니다.
"반장은 잘 듣거라. 너는 그 패를 가지고 있다가 노는 시간에 조선말을 쓰는 자가 있거든 그걸 주어라. 그걸 받은 자는 조선말을 하는 동무가 눈에 띄는 즉시 다시 넘겨 주어라. 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누가 저 패를 가지고 있나 보겠다. 맨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자는 무조건 손바닥 열 대씩이다. 자, 서로서로 잘 살피도록. 알았나?"
재미있는 놀이를 기대했던 아이들은 실망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일어났습니다.
"조용히 해라!"
선생님은 얼굴이 빨개 가지고 출석부로 교탁을 탕탕 내려쳤습니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아이들은 모조리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칠판 바로 위에 걸린 일장기에 아침 햇살이 퍼졌습니다. 일장기 속의 둥근 해는 방금 솟은 듯 붉었습니다. 선생님 입가에 뜻 모를 웃음이 어렸습니다. 승우는 얼른 창 밖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인왕산 봉우리가 꺼칠해 보였습니다. 선바위는 잿빛 구름을 무겁게 이고 있었습니다.

1교시 수업이 끝나고 노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긴장을 했습니다. 잘못하여 조선말이 나오면 큰일입니다. 다나카 선생님의 몽둥이는 다른 반에 비해 훨씬 굵고 단단합니다. 아이들은 반이나 넘게 변소엘 가는 척 교실을 빠져 나갔습니다. 남아 있는 아이들은 아예 손으로 입을 막거나 책에다 얼굴을 묻었습니다. 그러나 나무패는 어렵지 않게 4분단에 앉아 있는 윤칠이한테로 넘어갔습니다.
"기무라 이치로!"
윤칠이의 일본 이름이 불려졌습니다.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든 윤칠이의 얼굴이 화르르 구겨졌습니다. 준식이랑 윤칠이는 골목을 사이에 둔 단짝 동무입니다. 그걸 모르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놈 봐라. 하필이면 날 노리다니.'
짝꿍한테 지우개를 주면서 '이거!'라고 한 것뿐이었습니다.
'귀도 밝지, 어떻게 그 소리를 들었담. 틀림없이 벼르고 있었던 거야.'
윤칠이는 기분이 울적했습니다. 그러나 나무패는 어떻게든 넘겨야 합니다. 윤칠이는 눈을 빛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걸려든 게 '야!'라고 동무를 부른 태성이였습니다.
'저 녀석, 그 동안 나한테 얻어먹은 엿이 얼마인데. 어디 이제 주나 봐라.'
얼결에 '위반'을 받아 든 태성이는 어깨로 숨을 몰아 쉬며 씨근거렸습니다. 윤칠이는 멋쩍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습니다. 선생님이 보실까 봐 태성이는 수업 시간 내내 엉덩이에다 나무패를 깔고 있었습니다.
다시 노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위반'의 나무패는 교실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고 돌았고, 그 때마다 동무를 원망하는 마음들을 어린 가슴에다 죽죽 긋고 떠났습니다. 그걸 넘겨받은 아이는 유리창을 스치는 바람결에도 고개를 홱홱 돌렸습니다.
하루의 수업이 다 끝났습니다. 선생님은 종례를 준비하러 교무실로 가셨습니다. 그제야 아이들은 호창이만 빼고 가슴들을 폈습니다. 호창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무패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어, 나비다!"
옆줄에 있던 명서가 손가락으로 맨 꼭대기 창문을 가리켰습니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창가를 날고 있었습니다. 올 들어 나비는 처음이었습니다.
"아리가토오(고맙다)!"
호창이는 들고 있던 나뭇조각을 잽싸게 던졌습니다. 명서가 제 머리카락을 움켜잡는 걸 보고도 호창이는 싱글벙글 웃었습니다. 종례 시간은 바짝바짝 다가왔습니다. 애가 단 명서는 혹시나 해서 귀를 활짝 열었지만 아이들은 꿈쩍도 안 했습니다. 복도에서는 슬리퍼 끄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 왔습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릴 겁니다. 안절부절못하던 명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아얏!"
하는 일이 굼떠서 별명이 칠득이인 재득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명서가 뺨을 꼬집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조선말이 나왔습니다. 느닷없이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이따이!'라는 일본말로 아픔을 표시하겠습니까? 명서는 다람쥐보다 더 빠르게 나무패를 떠넘기곤 손바닥을 탈탈 소리나게 털었습니다.
"비겁한 놈!"
명서의 짝꿍인 승우가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명서를 향해 달려들려던 재득이가 주춤했습니다. 다음 순간 입술이 벙긋이 벌어진 재득이는 좋아라 승우 손에 나무패를 쥐여 주고 제자리로 갔습니다.
승우는 반 동무들이 입을 모아 히도츠(하나) 후다츠(둘) 미츠(셋)를 외치는 소리를 들어 가며 고스란히 손바닥 열 대를 맞았습니다. 다나카 선생님이 몽둥이를 뗐을 때 승우의 여린 손은 피멍이 들어 푸르뎅뎅했습니다.

엄마가 승우의 손을 보신 건 저녁 밥상머리 앞에서였습니다. 엄마와 누이들은 놀란 얼굴을 감추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승우와 겸상을 한 아버지는 힐긋 곁눈질을 하셨을 뿐 표정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꼬치꼬치 캐물으셨습니다. 아무리 넘어져서 그랬다고 해도 영 곧이듣지를 않으셨습니다.
"선생님한테 맞았어요."
별수없이 털어놓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조, 조선말을 했거든요."
"너만?"
"아니오."
승우는 끝내 더듬더듬 '위반'의 나무패를 말씀드렸고, 엄마는 내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셨습니다.
"승우야."
"예."
아들을 불러 놓고도 아버지는 잠자코 계셨습니다. 방 안엔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버지는 슬픔이 담긴 눈으로 승우를 내려다보셨습니다.
누이들도 승우도 숟가락을 가만히 내려놓았습니다. 아버지는 두어 번 잔기침을 하셨습니다.
"오늘 보니 뒤울안에 복사꽃이 피었더구나. 승우야, 보았느냐?"
"예."
"아름답더냐?"
"예."
"그래, 꽃이 핀 나무는 다 아름답지."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무셨습니다. 멀리서 아련히 전차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냉냉냉냉! 꼬마 전차는 설 때나 떠날 때나 그렇게 코맹맹이 종을 쳤습니다. 식구들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보아라."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가 들창문을 여셨습니다. 복사꽃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두어 달 전 겨울에만 해도 저 나무엔 앙상한 가지밖에 없었다. 나무는 쌩쌩 부는 바람과 찬 눈을 고스란히 다 맞고 서 있었지. 꼭 죽은 것처럼. 그런 나뭇가지에서 저렇게 화사한 꽃이 필 줄을 생각이나 했겠느냐?"
"……."
"아무도 몰랐을 게다. 그러나 나무는 아무리 모진 겨울일지라도 뿌리만 얼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잎이 돋고 꽃을 피운다."
승우는 문득 서대문 감옥소가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얼어 죽지 않으면'이라는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었나 봅니다. 아까도 오랏줄을 두르고 용수(죄수를 밖으로 데리고 다닐 때 얼굴을 보지 못하게 머리에 씌우던 갓의 한 가지)를 쓴 조선 사람들이 일본 순사한테 떠밀리어 감옥소로 들어가는 걸 보았습니다. 감옥소는 봄인데도 음산해 보였습니다. 문고리에 손이 척척 달라붙도록 추운 겨울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승우는 누더기 옷을 입은 어른들이 불도 안 때는 저 속에서 어떻게 꽁꽁 얼음이 어는 겨울을 견디어 내나 그게 늘 궁금했습니다. 큰누이가 살며시 승우의 옷깃을 잡아당겼습니다. 승우는 얼른 앞에 앉아 계신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를 거다만 나라와 민족도 마찬가지란다. 승우야, 넌 나라와 민족의 뿌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
"얼과 말과 글이다. 너희들은 얼빠진 놈이라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을 게다. 맞는 말이다. 얼이 빠진 사람은 정신이 빠지고 없으니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 얼과 말과 글, 그것만 있으면 아무리 모진 비바람에 시달려도 언젠가는 반드시 살아나 꽃을 피울 것이다. 저 복숭아나무처럼. 마음에 새겨 두거라."
아버지는 사랑으로 나가셨습니다. 방 안엔 여전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습니다. 승우는 노랗게 결이 든 장판지만 내려다보았습니다.
"승우야."
큰누이가 다정하게 불렀습니다.
"많이 아팠지?"
"괜찮아요."
"괜찮긴. 느네 담임 참 모질다. 어린애 손을 어쩌면 이렇게 되도록 때리니."
작은누이가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누이들은 먹다 만 저녁상을 치우러 부엌으로 나갔습니다. 곧이어 달그락거리며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이리 온."
엄마가 손을 벌리고 오라는 손짓을 하셨습니다. 승우가 다가가자 엄마는 저고리섶을 들치시고 가슴에다 승우의 두 손을 갖다 대셨습니다. 아직도 알알한 손바닥으로 뚝뚝 엄마의 심장 뛰는 소리가 전해 왔습니다. 승우는 피멍이 살살 풀리면서 아픔이 가시는 걸 느꼈습니다. 엄마는 승우의 머릿결을 가다듬어 주며 등을 토닥이셨습니다.
"승우야, 이담에 어른이 되거든 넌 시인이 되거라. 조선말 조선글로 가장 먼저 시를 쓴 시인이 되거라. 남을 밟고 올라서지 말고 남의 아픔을 잘 이해하는 시인이 되거라. 오늘부터 엄마가 글을 가르쳐 주마."
승우는 엄마 품에다 와락 얼굴을 묻었습니다. 오늘 엄마의 말씀이 왜 한숨처럼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엄마는 오래도록 승우를 안고 계셨습니다.
멀리서 냉냉냉, 전차가 지나갑니다.
"승우야, 잠시만 있거라."
옥색 치맛자락을 여미시며 엄마는 버선발로 사뿐히 뒤꼍으로 나가셨습니다. 오래지 않아 치마 가득 꽃바람을 묻히시고 엄마는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엄마 손엔 복사꽃잎 소복한 백자 보시기가 들려 있었습니다.
엄마는 다락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만 내놓으시던팔각 소반을 꺼내셨습니다. 그러곤 꽃잎으로 그 위에다 글자를 쓰셨습니다.
"산."
"하늘."
"별."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습니다.
승우는 엄마가 쓰신 꽃글을 보았습니다.


'야마', '소라', '호시'로 불렀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산'과 '하늘'과 '별'로 불리자 그 말들은 두렷두렷 살아나 승우에게로 왔습니다.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눈앞으로 환한 빛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꽃잎으로 쓴 산이 우뚝 솟았습니다.
꽃잎으로 쓴 하늘이 새파래졌습니다.
꽃잎 별은 잘강잘강 맑은 소리를 냈습니다.


팔각 소반 위의 글자들은 향기롭고 보드랍고 고왔습니다.
아, 눈물! 엄마의 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승우는 꽃글이 쓰여진 소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2008.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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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으로 쓴 글자

 

                                                                                                              손연자

 

 

 

 

 

- 이 이야기는 나 오현지의 할아버지가 아홉 살이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일본이

우리 나라를 빼앗고 말도 글도 못 쓰게 하면서 괴롭히던 때였습니다. -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복사꽃이 하얗게 피었습니다.뒤꼍 우물가가 환해졌습니다. 승우는 창가에 서서 가만히 나무를 바라봅니다. 연한 복사꽃 향내가 코끝을 간질입니다. 오늘은 나뭇가지에 올라앉아 하루 종일 꽃만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침을 끝낸 승우는 누이들과 함께 솟을대문을 나섰습니다. 새로 담임이 된 다나카 선생님은 지각하는 걸 가장 싫어합니다. 아이들은 따귀를 맞기 싫어서, 또는 걸상을 들고 벌을 서거나 냄새 지독한 변소 청소를 하게 될까 봐 모두가 일찍들 옵니다. 북쪽 담 구석에 있는 3학년 1반 변소는 달걀 귀신이 나온다는 말도 있습니다.
누이들과 헤어져 교문을 들어선 승우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었습니다.
봄바람이 제법 매섭습니다.
화단에 있는 나무들이 쓰러졌다 일어났다 야단입니다.
걸상에 앉아 막 책가방을 내려놓는데 아침 조례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복사꽃에다 너무 한눈을 팔았나 봅니다. 하마터면 지각을 할 뻔했습니다.
아이들은 걸상 등받이에다 허리를 붙이고 가슴을 쭉 펴고 앉았습니다.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전에는 으레 칠판 쪽을 똑바로 보고 있어야 합니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복도를 울리더니 드르륵 교실 문이 열렸습니다. 국민복에 당꼬바지를 입은 선생님이 성큼 교단 위로 올라섰습니다. 빡빡 깎은 머리, 짙은 눈썹, 그 아래로 쏘는 듯한 눈빛이 차갑습니다.
"차렷, 경례!"
반장 준식이가 발딱 일어나 외쳤습니다. 아이들은 머리가 책상에 닿을 정도로 아침 인사를 했습니다.
"다 왔군. 좋아."
선생님은 교실을 휘둘러 보고 나서 싸늘하게 말했습니다. 그러곤 팔을 있는 대로 벌려 교탁 양쪽 끝을 움켜잡았습니다. 작달막한 키가 더욱 작아졌습니다. 아이들은 겁먹은 얼굴로 몸을 사렸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폭폭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너희들! 오늘부터 선생님이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하도록 해 주겠다."
뜻밖에도 선생님의 목소리는 쾌활했습니다. 더욱이 재미있는 놀이라는 건 더 뜻밖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웬일인가 싶어 서로를 흘깃흘깃 훔쳐보았습니다.
아침 조례 시간의 첫마디는 으레 일본과 조선은 하나이고, 천황폐하는 우리들의 어버이시니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천황이란 말을 할 때의 선생님은 불에 덴 것처럼 깜짝 놀라서 차렷 자세를 했습니다. 그러고선 일본 쪽을 향해 구십 도로 허리를 꺾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놀이라니요? 아이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걸 봐라."
가로 삼 센티, 세로 십 센티 정도의 나무패가 높이 치켜졌습니다. 횃불마냥 우뚝 솟은 나무패는 굉장한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선생님은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아주 천천히 나무패를 움직였습니다. 아이들의 눈동자는 작은 나무패가 가는 대로 이 쪽에서 저 쪽으로 따라갔습니다.
"이게 뭔지 알겠나?"
교실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반장, 일어나라!"
준식이가 발딱 일어섰습니다.
"받아."
나무패가 붕 떴습니다. 준식이는 두 손을 마주 펴 손목에다 찰싹 붙였습니다. 손바닥 안에서 척! 소리가 났습니다.
'위반.'
얄따란 나무패에는 일본말로 '위반'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준식이는 얼른 주먹을 쥐어 글자를 가렸습니다. 붓으로 쓴 까만 글자가 무슨 괴물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렸습니다. 곧이어 깐깐한 목소리가 아이들의 마음을 옭아맸습니다.
"반장은 잘 듣거라. 너는 그 패를 가지고 있다가 노는 시간에 조선말을 쓰는 자가 있거든 그걸 주어라. 그걸 받은 자는 조선말을 하는 동무가 눈에 띄는 즉시 다시 넘겨 주어라. 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누가 저 패를 가지고 있나 보겠다. 맨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자는 무조건 손바닥 열 대씩이다. 자, 서로서로 잘 살피도록. 알았나?"
재미있는 놀이를 기대했던 아이들은 실망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일어났습니다.
"조용히 해라!"
선생님은 얼굴이 빨개 가지고 출석부로 교탁을 탕탕 내려쳤습니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아이들은 모조리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칠판 바로 위에 걸린 일장기에 아침 햇살이 퍼졌습니다. 일장기 속의 둥근 해는 방금 솟은 듯 붉었습니다. 선생님 입가에 뜻 모를 웃음이 어렸습니다. 승우는 얼른 창 밖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인왕산 봉우리가 꺼칠해 보였습니다. 선바위는 잿빛 구름을 무겁게 이고 있었습니다.

1교시 수업이 끝나고 노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긴장을 했습니다. 잘못하여 조선말이 나오면 큰일입니다. 다나카 선생님의 몽둥이는 다른 반에 비해 훨씬 굵고 단단합니다. 아이들은 반이나 넘게 변소엘 가는 척 교실을 빠져 나갔습니다. 남아 있는 아이들은 아예 손으로 입을 막거나 책에다 얼굴을 묻었습니다. 그러나 나무패는 어렵지 않게 4분단에 앉아 있는 윤칠이한테로 넘어갔습니다.
"기무라 이치로!"
윤칠이의 일본 이름이 불려졌습니다.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든 윤칠이의 얼굴이 화르르 구겨졌습니다. 준식이랑 윤칠이는 골목을 사이에 둔 단짝 동무입니다. 그걸 모르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놈 봐라. 하필이면 날 노리다니.'
짝꿍한테 지우개를 주면서 '이거!'라고 한 것뿐이었습니다.
'귀도 밝지, 어떻게 그 소리를 들었담. 틀림없이 벼르고 있었던 거야.'
윤칠이는 기분이 울적했습니다. 그러나 나무패는 어떻게든 넘겨야 합니다. 윤칠이는 눈을 빛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걸려든 게 '야!'라고 동무를 부른 태성이였습니다.
'저 녀석, 그 동안 나한테 얻어먹은 엿이 얼마인데. 어디 이제 주나 봐라.'
얼결에 '위반'을 받아 든 태성이는 어깨로 숨을 몰아 쉬며 씨근거렸습니다. 윤칠이는 멋쩍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습니다. 선생님이 보실까 봐 태성이는 수업 시간 내내 엉덩이에다 나무패를 깔고 있었습니다.
다시 노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위반'의 나무패는 교실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고 돌았고, 그 때마다 동무를 원망하는 마음들을 어린 가슴에다 죽죽 긋고 떠났습니다. 그걸 넘겨받은 아이는 유리창을 스치는 바람결에도 고개를 홱홱 돌렸습니다.
하루의 수업이 다 끝났습니다. 선생님은 종례를 준비하러 교무실로 가셨습니다. 그제야 아이들은 호창이만 빼고 가슴들을 폈습니다. 호창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무패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어, 나비다!"
옆줄에 있던 명서가 손가락으로 맨 꼭대기 창문을 가리켰습니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창가를 날고 있었습니다. 올 들어 나비는 처음이었습니다.
"아리가토오(고맙다)!"
호창이는 들고 있던 나뭇조각을 잽싸게 던졌습니다. 명서가 제 머리카락을 움켜잡는 걸 보고도 호창이는 싱글벙글 웃었습니다. 종례 시간은 바짝바짝 다가왔습니다. 애가 단 명서는 혹시나 해서 귀를 활짝 열었지만 아이들은 꿈쩍도 안 했습니다. 복도에서는 슬리퍼 끄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 왔습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릴 겁니다. 안절부절못하던 명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아얏!"
하는 일이 굼떠서 별명이 칠득이인 재득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명서가 뺨을 꼬집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조선말이 나왔습니다. 느닷없이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이따이!'라는 일본말로 아픔을 표시하겠습니까? 명서는 다람쥐보다 더 빠르게 나무패를 떠넘기곤 손바닥을 탈탈 소리나게 털었습니다.
"비겁한 놈!"
명서의 짝꿍인 승우가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명서를 향해 달려들려던 재득이가 주춤했습니다. 다음 순간 입술이 벙긋이 벌어진 재득이는 좋아라 승우 손에 나무패를 쥐여 주고 제자리로 갔습니다.
승우는 반 동무들이 입을 모아 히도츠(하나) 후다츠(둘) 미츠(셋)를 외치는 소리를 들어 가며 고스란히 손바닥 열 대를 맞았습니다. 다나카 선생님이 몽둥이를 뗐을 때 승우의 여린 손은 피멍이 들어 푸르뎅뎅했습니다.

엄마가 승우의 손을 보신 건 저녁 밥상머리 앞에서였습니다. 엄마와 누이들은 놀란 얼굴을 감추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승우와 겸상을 한 아버지는 힐긋 곁눈질을 하셨을 뿐 표정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꼬치꼬치 캐물으셨습니다. 아무리 넘어져서 그랬다고 해도 영 곧이듣지를 않으셨습니다.
"선생님한테 맞았어요."
별수없이 털어놓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조, 조선말을 했거든요."
"너만?"
"아니오."
승우는 끝내 더듬더듬 '위반'의 나무패를 말씀드렸고, 엄마는 내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셨습니다.
"승우야."
"예."
아들을 불러 놓고도 아버지는 잠자코 계셨습니다. 방 안엔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버지는 슬픔이 담긴 눈으로 승우를 내려다보셨습니다.
누이들도 승우도 숟가락을 가만히 내려놓았습니다. 아버지는 두어 번 잔기침을 하셨습니다.
"오늘 보니 뒤울안에 복사꽃이 피었더구나. 승우야, 보았느냐?"
"예."
"아름답더냐?"
"예."
"그래, 꽃이 핀 나무는 다 아름답지."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무셨습니다. 멀리서 아련히 전차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냉냉냉냉! 꼬마 전차는 설 때나 떠날 때나 그렇게 코맹맹이 종을 쳤습니다. 식구들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보아라."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가 들창문을 여셨습니다. 복사꽃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두어 달 전 겨울에만 해도 저 나무엔 앙상한 가지밖에 없었다. 나무는 쌩쌩 부는 바람과 찬 눈을 고스란히 다 맞고 서 있었지. 꼭 죽은 것처럼. 그런 나뭇가지에서 저렇게 화사한 꽃이 필 줄을 생각이나 했겠느냐?"
"……."
"아무도 몰랐을 게다. 그러나 나무는 아무리 모진 겨울일지라도 뿌리만 얼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잎이 돋고 꽃을 피운다."
승우는 문득 서대문 감옥소가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얼어 죽지 않으면'이라는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었나 봅니다. 아까도 오랏줄을 두르고 용수(죄수를 밖으로 데리고 다닐 때 얼굴을 보지 못하게 머리에 씌우던 갓의 한 가지)를 쓴 조선 사람들이 일본 순사한테 떠밀리어 감옥소로 들어가는 걸 보았습니다. 감옥소는 봄인데도 음산해 보였습니다. 문고리에 손이 척척 달라붙도록 추운 겨울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승우는 누더기 옷을 입은 어른들이 불도 안 때는 저 속에서 어떻게 꽁꽁 얼음이 어는 겨울을 견디어 내나 그게 늘 궁금했습니다. 큰누이가 살며시 승우의 옷깃을 잡아당겼습니다. 승우는 얼른 앞에 앉아 계신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를 거다만 나라와 민족도 마찬가지란다. 승우야, 넌 나라와 민족의 뿌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
"얼과 말과 글이다. 너희들은 얼빠진 놈이라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을 게다. 맞는 말이다. 얼이 빠진 사람은 정신이 빠지고 없으니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 얼과 말과 글, 그것만 있으면 아무리 모진 비바람에 시달려도 언젠가는 반드시 살아나 꽃을 피울 것이다. 저 복숭아나무처럼. 마음에 새겨 두거라."
아버지는 사랑으로 나가셨습니다. 방 안엔 여전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습니다. 승우는 노랗게 결이 든 장판지만 내려다보았습니다.
"승우야."
큰누이가 다정하게 불렀습니다.
"많이 아팠지?"
"괜찮아요."
"괜찮긴. 느네 담임 참 모질다. 어린애 손을 어쩌면 이렇게 되도록 때리니."
작은누이가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누이들은 먹다 만 저녁상을 치우러 부엌으로 나갔습니다. 곧이어 달그락거리며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이리 온."
엄마가 손을 벌리고 오라는 손짓을 하셨습니다. 승우가 다가가자 엄마는 저고리섶을 들치시고 가슴에다 승우의 두 손을 갖다 대셨습니다. 아직도 알알한 손바닥으로 뚝뚝 엄마의 심장 뛰는 소리가 전해 왔습니다. 승우는 피멍이 살살 풀리면서 아픔이 가시는 걸 느꼈습니다. 엄마는 승우의 머릿결을 가다듬어 주며 등을 토닥이셨습니다.
"승우야, 이담에 어른이 되거든 넌 시인이 되거라. 조선말 조선글로 가장 먼저 시를 쓴 시인이 되거라. 남을 밟고 올라서지 말고 남의 아픔을 잘 이해하는 시인이 되거라. 오늘부터 엄마가 글을 가르쳐 주마."
승우는 엄마 품에다 와락 얼굴을 묻었습니다. 오늘 엄마의 말씀이 왜 한숨처럼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엄마는 오래도록 승우를 안고 계셨습니다.
멀리서 냉냉냉, 전차가 지나갑니다.
"승우야, 잠시만 있거라."
옥색 치맛자락을 여미시며 엄마는 버선발로 사뿐히 뒤꼍으로 나가셨습니다. 오래지 않아 치마 가득 꽃바람을 묻히시고 엄마는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엄마 손엔 복사꽃잎 소복한 백자 보시기가 들려 있었습니다.
엄마는 다락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만 내놓으시던팔각 소반을 꺼내셨습니다. 그러곤 꽃잎으로 그 위에다 글자를 쓰셨습니다.
"산."
"하늘."
"별."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습니다.
승우는 엄마가 쓰신 꽃글을 보았습니다.


'야마', '소라', '호시'로 불렀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산'과 '하늘'과 '별'로 불리자 그 말들은 두렷두렷 살아나 승우에게로 왔습니다.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눈앞으로 환한 빛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꽃잎으로 쓴 산이 우뚝 솟았습니다.
꽃잎으로 쓴 하늘이 새파래졌습니다.
꽃잎 별은 잘강잘강 맑은 소리를 냈습니다.


팔각 소반 위의 글자들은 향기롭고 보드랍고 고왔습니다.
아, 눈물! 엄마의 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승우는 꽃글이 쓰여진 소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200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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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으로 쓴 글자

 

                                                                                                              손연자

 

 

 

 

 

- 이 이야기는 나 오현지의 할아버지가 아홉 살이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일본이

우리 나라를 빼앗고 말도 글도 못 쓰게 하면서 괴롭히던 때였습니다. -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복사꽃이 하얗게 피었습니다.뒤꼍 우물가가 환해졌습니다. 승우는 창가에 서서 가만히 나무를 바라봅니다. 연한 복사꽃 향내가 코끝을 간질입니다. 오늘은 나뭇가지에 올라앉아 하루 종일 꽃만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침을 끝낸 승우는 누이들과 함께 솟을대문을 나섰습니다. 새로 담임이 된 다나카 선생님은 지각하는 걸 가장 싫어합니다. 아이들은 따귀를 맞기 싫어서, 또는 걸상을 들고 벌을 서거나 냄새 지독한 변소 청소를 하게 될까 봐 모두가 일찍들 옵니다. 북쪽 담 구석에 있는 3학년 1반 변소는 달걀 귀신이 나온다는 말도 있습니다.
누이들과 헤어져 교문을 들어선 승우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었습니다.
봄바람이 제법 매섭습니다.
화단에 있는 나무들이 쓰러졌다 일어났다 야단입니다.
걸상에 앉아 막 책가방을 내려놓는데 아침 조례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복사꽃에다 너무 한눈을 팔았나 봅니다. 하마터면 지각을 할 뻔했습니다.
아이들은 걸상 등받이에다 허리를 붙이고 가슴을 쭉 펴고 앉았습니다.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전에는 으레 칠판 쪽을 똑바로 보고 있어야 합니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복도를 울리더니 드르륵 교실 문이 열렸습니다. 국민복에 당꼬바지를 입은 선생님이 성큼 교단 위로 올라섰습니다. 빡빡 깎은 머리, 짙은 눈썹, 그 아래로 쏘는 듯한 눈빛이 차갑습니다.
"차렷, 경례!"
반장 준식이가 발딱 일어나 외쳤습니다. 아이들은 머리가 책상에 닿을 정도로 아침 인사를 했습니다.
"다 왔군. 좋아."
선생님은 교실을 휘둘러 보고 나서 싸늘하게 말했습니다. 그러곤 팔을 있는 대로 벌려 교탁 양쪽 끝을 움켜잡았습니다. 작달막한 키가 더욱 작아졌습니다. 아이들은 겁먹은 얼굴로 몸을 사렸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폭폭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너희들! 오늘부터 선생님이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하도록 해 주겠다."
뜻밖에도 선생님의 목소리는 쾌활했습니다. 더욱이 재미있는 놀이라는 건 더 뜻밖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웬일인가 싶어 서로를 흘깃흘깃 훔쳐보았습니다.
아침 조례 시간의 첫마디는 으레 일본과 조선은 하나이고, 천황폐하는 우리들의 어버이시니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천황이란 말을 할 때의 선생님은 불에 덴 것처럼 깜짝 놀라서 차렷 자세를 했습니다. 그러고선 일본 쪽을 향해 구십 도로 허리를 꺾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놀이라니요? 아이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걸 봐라."
가로 삼 센티, 세로 십 센티 정도의 나무패가 높이 치켜졌습니다. 횃불마냥 우뚝 솟은 나무패는 굉장한 힘이 있어 보였습니다. 선생님은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아주 천천히 나무패를 움직였습니다. 아이들의 눈동자는 작은 나무패가 가는 대로 이 쪽에서 저 쪽으로 따라갔습니다.
"이게 뭔지 알겠나?"
교실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반장, 일어나라!"
준식이가 발딱 일어섰습니다.
"받아."
나무패가 붕 떴습니다. 준식이는 두 손을 마주 펴 손목에다 찰싹 붙였습니다. 손바닥 안에서 척! 소리가 났습니다.
'위반.'
얄따란 나무패에는 일본말로 '위반'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준식이는 얼른 주먹을 쥐어 글자를 가렸습니다. 붓으로 쓴 까만 글자가 무슨 괴물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렸습니다. 곧이어 깐깐한 목소리가 아이들의 마음을 옭아맸습니다.
"반장은 잘 듣거라. 너는 그 패를 가지고 있다가 노는 시간에 조선말을 쓰는 자가 있거든 그걸 주어라. 그걸 받은 자는 조선말을 하는 동무가 눈에 띄는 즉시 다시 넘겨 주어라. 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누가 저 패를 가지고 있나 보겠다. 맨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자는 무조건 손바닥 열 대씩이다. 자, 서로서로 잘 살피도록. 알았나?"
재미있는 놀이를 기대했던 아이들은 실망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일어났습니다.
"조용히 해라!"
선생님은 얼굴이 빨개 가지고 출석부로 교탁을 탕탕 내려쳤습니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아이들은 모조리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칠판 바로 위에 걸린 일장기에 아침 햇살이 퍼졌습니다. 일장기 속의 둥근 해는 방금 솟은 듯 붉었습니다. 선생님 입가에 뜻 모를 웃음이 어렸습니다. 승우는 얼른 창 밖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인왕산 봉우리가 꺼칠해 보였습니다. 선바위는 잿빛 구름을 무겁게 이고 있었습니다.

1교시 수업이 끝나고 노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긴장을 했습니다. 잘못하여 조선말이 나오면 큰일입니다. 다나카 선생님의 몽둥이는 다른 반에 비해 훨씬 굵고 단단합니다. 아이들은 반이나 넘게 변소엘 가는 척 교실을 빠져 나갔습니다. 남아 있는 아이들은 아예 손으로 입을 막거나 책에다 얼굴을 묻었습니다. 그러나 나무패는 어렵지 않게 4분단에 앉아 있는 윤칠이한테로 넘어갔습니다.
"기무라 이치로!"
윤칠이의 일본 이름이 불려졌습니다.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든 윤칠이의 얼굴이 화르르 구겨졌습니다. 준식이랑 윤칠이는 골목을 사이에 둔 단짝 동무입니다. 그걸 모르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놈 봐라. 하필이면 날 노리다니.'
짝꿍한테 지우개를 주면서 '이거!'라고 한 것뿐이었습니다.
'귀도 밝지, 어떻게 그 소리를 들었담. 틀림없이 벼르고 있었던 거야.'
윤칠이는 기분이 울적했습니다. 그러나 나무패는 어떻게든 넘겨야 합니다. 윤칠이는 눈을 빛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걸려든 게 '야!'라고 동무를 부른 태성이였습니다.
'저 녀석, 그 동안 나한테 얻어먹은 엿이 얼마인데. 어디 이제 주나 봐라.'
얼결에 '위반'을 받아 든 태성이는 어깨로 숨을 몰아 쉬며 씨근거렸습니다. 윤칠이는 멋쩍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습니다. 선생님이 보실까 봐 태성이는 수업 시간 내내 엉덩이에다 나무패를 깔고 있었습니다.
다시 노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위반'의 나무패는 교실 여기저기를 바쁘게 돌고 돌았고, 그 때마다 동무를 원망하는 마음들을 어린 가슴에다 죽죽 긋고 떠났습니다. 그걸 넘겨받은 아이는 유리창을 스치는 바람결에도 고개를 홱홱 돌렸습니다.
하루의 수업이 다 끝났습니다. 선생님은 종례를 준비하러 교무실로 가셨습니다. 그제야 아이들은 호창이만 빼고 가슴들을 폈습니다. 호창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무패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어, 나비다!"
옆줄에 있던 명서가 손가락으로 맨 꼭대기 창문을 가리켰습니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창가를 날고 있었습니다. 올 들어 나비는 처음이었습니다.
"아리가토오(고맙다)!"
호창이는 들고 있던 나뭇조각을 잽싸게 던졌습니다. 명서가 제 머리카락을 움켜잡는 걸 보고도 호창이는 싱글벙글 웃었습니다. 종례 시간은 바짝바짝 다가왔습니다. 애가 단 명서는 혹시나 해서 귀를 활짝 열었지만 아이들은 꿈쩍도 안 했습니다. 복도에서는 슬리퍼 끄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 왔습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릴 겁니다. 안절부절못하던 명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아얏!"
하는 일이 굼떠서 별명이 칠득이인 재득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명서가 뺨을 꼬집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조선말이 나왔습니다. 느닷없이 일어난 일인데 어떻게 '이따이!'라는 일본말로 아픔을 표시하겠습니까? 명서는 다람쥐보다 더 빠르게 나무패를 떠넘기곤 손바닥을 탈탈 소리나게 털었습니다.
"비겁한 놈!"
명서의 짝꿍인 승우가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명서를 향해 달려들려던 재득이가 주춤했습니다. 다음 순간 입술이 벙긋이 벌어진 재득이는 좋아라 승우 손에 나무패를 쥐여 주고 제자리로 갔습니다.
승우는 반 동무들이 입을 모아 히도츠(하나) 후다츠(둘) 미츠(셋)를 외치는 소리를 들어 가며 고스란히 손바닥 열 대를 맞았습니다. 다나카 선생님이 몽둥이를 뗐을 때 승우의 여린 손은 피멍이 들어 푸르뎅뎅했습니다.

엄마가 승우의 손을 보신 건 저녁 밥상머리 앞에서였습니다. 엄마와 누이들은 놀란 얼굴을 감추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승우와 겸상을 한 아버지는 힐긋 곁눈질을 하셨을 뿐 표정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꼬치꼬치 캐물으셨습니다. 아무리 넘어져서 그랬다고 해도 영 곧이듣지를 않으셨습니다.
"선생님한테 맞았어요."
별수없이 털어놓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조, 조선말을 했거든요."
"너만?"
"아니오."
승우는 끝내 더듬더듬 '위반'의 나무패를 말씀드렸고, 엄마는 내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셨습니다.
"승우야."
"예."
아들을 불러 놓고도 아버지는 잠자코 계셨습니다. 방 안엔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버지는 슬픔이 담긴 눈으로 승우를 내려다보셨습니다.
누이들도 승우도 숟가락을 가만히 내려놓았습니다. 아버지는 두어 번 잔기침을 하셨습니다.
"오늘 보니 뒤울안에 복사꽃이 피었더구나. 승우야, 보았느냐?"
"예."
"아름답더냐?"
"예."
"그래, 꽃이 핀 나무는 다 아름답지."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무셨습니다. 멀리서 아련히 전차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냉냉냉냉! 꼬마 전차는 설 때나 떠날 때나 그렇게 코맹맹이 종을 쳤습니다. 식구들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의 다음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보아라."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가 들창문을 여셨습니다. 복사꽃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두어 달 전 겨울에만 해도 저 나무엔 앙상한 가지밖에 없었다. 나무는 쌩쌩 부는 바람과 찬 눈을 고스란히 다 맞고 서 있었지. 꼭 죽은 것처럼. 그런 나뭇가지에서 저렇게 화사한 꽃이 필 줄을 생각이나 했겠느냐?"
"……."
"아무도 몰랐을 게다. 그러나 나무는 아무리 모진 겨울일지라도 뿌리만 얼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잎이 돋고 꽃을 피운다."
승우는 문득 서대문 감옥소가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얼어 죽지 않으면'이라는 아버지의 말씀 때문이었나 봅니다. 아까도 오랏줄을 두르고 용수(죄수를 밖으로 데리고 다닐 때 얼굴을 보지 못하게 머리에 씌우던 갓의 한 가지)를 쓴 조선 사람들이 일본 순사한테 떠밀리어 감옥소로 들어가는 걸 보았습니다. 감옥소는 봄인데도 음산해 보였습니다. 문고리에 손이 척척 달라붙도록 추운 겨울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승우는 누더기 옷을 입은 어른들이 불도 안 때는 저 속에서 어떻게 꽁꽁 얼음이 어는 겨울을 견디어 내나 그게 늘 궁금했습니다. 큰누이가 살며시 승우의 옷깃을 잡아당겼습니다. 승우는 얼른 앞에 앉아 계신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를 거다만 나라와 민족도 마찬가지란다. 승우야, 넌 나라와 민족의 뿌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
"얼과 말과 글이다. 너희들은 얼빠진 놈이라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을 게다. 맞는 말이다. 얼이 빠진 사람은 정신이 빠지고 없으니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 얼과 말과 글, 그것만 있으면 아무리 모진 비바람에 시달려도 언젠가는 반드시 살아나 꽃을 피울 것이다. 저 복숭아나무처럼. 마음에 새겨 두거라."
아버지는 사랑으로 나가셨습니다. 방 안엔 여전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습니다. 승우는 노랗게 결이 든 장판지만 내려다보았습니다.
"승우야."
큰누이가 다정하게 불렀습니다.
"많이 아팠지?"
"괜찮아요."
"괜찮긴. 느네 담임 참 모질다. 어린애 손을 어쩌면 이렇게 되도록 때리니."
작은누이가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누이들은 먹다 만 저녁상을 치우러 부엌으로 나갔습니다. 곧이어 달그락거리며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이리 온."
엄마가 손을 벌리고 오라는 손짓을 하셨습니다. 승우가 다가가자 엄마는 저고리섶을 들치시고 가슴에다 승우의 두 손을 갖다 대셨습니다. 아직도 알알한 손바닥으로 뚝뚝 엄마의 심장 뛰는 소리가 전해 왔습니다. 승우는 피멍이 살살 풀리면서 아픔이 가시는 걸 느꼈습니다. 엄마는 승우의 머릿결을 가다듬어 주며 등을 토닥이셨습니다.
"승우야, 이담에 어른이 되거든 넌 시인이 되거라. 조선말 조선글로 가장 먼저 시를 쓴 시인이 되거라. 남을 밟고 올라서지 말고 남의 아픔을 잘 이해하는 시인이 되거라. 오늘부터 엄마가 글을 가르쳐 주마."
승우는 엄마 품에다 와락 얼굴을 묻었습니다. 오늘 엄마의 말씀이 왜 한숨처럼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엄마는 오래도록 승우를 안고 계셨습니다.
멀리서 냉냉냉, 전차가 지나갑니다.
"승우야, 잠시만 있거라."
옥색 치맛자락을 여미시며 엄마는 버선발로 사뿐히 뒤꼍으로 나가셨습니다. 오래지 않아 치마 가득 꽃바람을 묻히시고 엄마는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엄마 손엔 복사꽃잎 소복한 백자 보시기가 들려 있었습니다.
엄마는 다락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만 내놓으시던팔각 소반을 꺼내셨습니다. 그러곤 꽃잎으로 그 위에다 글자를 쓰셨습니다.
"산."
"하늘."
"별."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습니다.
승우는 엄마가 쓰신 꽃글을 보았습니다.


'야마', '소라', '호시'로 불렀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 '산'과 '하늘'과 '별'로 불리자 그 말들은 두렷두렷 살아나 승우에게로 왔습니다.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눈앞으로 환한 빛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꽃잎으로 쓴 산이 우뚝 솟았습니다.
꽃잎으로 쓴 하늘이 새파래졌습니다.
꽃잎 별은 잘강잘강 맑은 소리를 냈습니다.


팔각 소반 위의 글자들은 향기롭고 보드랍고 고왔습니다.
아, 눈물! 엄마의 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승우는 꽃글이 쓰여진 소반 앞에 무릎을 꿇었샵니당 ㅋㅋ

  아참 이거 배낀거인가?? ㅋㅋ

ㄱ-ㄱ-

2008.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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