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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정끝별 시인의 대표 작품
on**** 조회수 8,778 작성일2017.03.21
인터넷에 찾아보니 시집 같은 것 뿐이어서 구체적으로 어떤 시들이 있고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되면 시 만이라도) 알려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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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늑대
바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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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 담을 넘을 때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일획을 긋는

도박(賭博)이자 도반(道伴)이었을 것이다.




□ 출전 : 2005년 출간 시집 - 삼천갑자복사빛

2017.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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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날개
달신
시 8위, 미술 40위, 재즈, 뉴에이지 음악 17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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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집배원 문태준의 시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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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락

정끝별

창비 2008.11.10.


아래는 정끝별 시인님의 시 모은 것입니다.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사랑 - 정끝별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은 없는

뜨겁게 웅크린 내 늑골
저 천길 맘속에
들어앉은
수천년의 석순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향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몸의 가시가 만든
한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 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그앞에서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 연리지(蓮理枝) - 정끝별


 


너를 따라 묻히고 싶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열 길 땅속에 들 한 길 사람 속에 들어
너를 따라 들어
외롭던 꼬리뼈와 어깨뼈에서
흰 꽃가루가 피어날 즈음이면
말갛게 일어나 너를 위해
한 아궁이를 지펴 밥 냄새를 피우고
그믈은 달빛 한 동이에 삼베옷을 빨고
한 종지 치자 향으로 몸단장을 하고
살을 벗은 네 왼팔뼈를 베개 삼아
아직 따뜻한 네 그림자를 이불 삼아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오래된 잠을 자고 싶어
남아도는 네 슬픔과 내 슬픔이
한 그루 된
연리지 첫 움으로 피어날 때까지
그렇게 한없이 누워


 


 


* 강진 편지 - 정끝별


 
버석이던 갈대 잎은 바람에 쏠렸는데요
산벚꽃 웃음에 춘백春柏의 눈매는 헛헛히 무너졌는데요
그렇게 웃자란 꽃핌은 온통 상처라 당신 곁 무릎쯤만 내어주고 싶었는데요
몸끝 어쩌지 못하고 물오르는 풀인지 향기인지 모란 잎새 그늘 불현듯 꿈틀대던 꽃대도
그 꽃대 끝에서 떨던 소란한 저녁 물비늘도 몸안을 일렁이던 햇살도 죄다 한통속들이었는데요
그렇게 한백년 비껴 서 있던 당신 겨드랑이와 내 겨드랑이가 이제야 키 낮은 망대를 만들다니
 바라보는 일만도 망설임이었거늘 가슴에 서로를 묻는 일이야
만장輓章처럼 당신 쪽으로 누운 풀자국에 내내 가난할 것입니다
모란 냄새 선명한 하마 흔하디흔한 한 봄밤으로 나 내내 따뜻할 것입니다
 
 
 * 밀물 -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 집나방 - 정끝별

불빛은 열망을 부풀려요 젖은 열망의 덫이라지요 물보라치며 가라앉는 별들, 차창 밖 미아…… 허술한 날개 붙들린 채, 창이 덫인데요 불빛이 굴헝인데요 거처없이, 이 차창 저 차창 부딪는 비속에 난파, 길은요 서둘러 넘으려는 곳에서 잃게 마련인데요 상어떼처럼 천천히 몰려드는 헤드라이트…… 바퀴 밑에 누울 때까지 젖은 날개는 유일한 희망인데요 파다닥, 차창에 꽃처럼 핀 날개가루, 빗물은 모든 것을 쓸어가……집 가는 길 종일 막혀 있었고 닫혀진 창 안 환했지요 버드나무처럼 늘어진 두 팔, 내 발자국을 뒤따라오는 커다란 바퀴, 찬란한 밤비 되어


* 상강(霜降) - 정 끝 별

사립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너의
숫된 졸참 마음 안에서 일어난 불이
제 몸을 굴뚝 삼아
가지를 불쏘시개 삼아
타고 있다
저 떡갈에게로
저 때죽에게로
저 당단풍에게로
불타고 있다
저 내장의 등성이 너머로
저 한라의 바다 너머로

사랑아, 나를 몰아 어디로 가려느냐


 


 
 * 봄의 화단에서 - 정끝별

아파트 화단에 앉아 꽃씨를 심는다
다섯 살배기 흙손가락에서 피어나는 봄흙의
귓불에선 아직도 말간 배냄새가 난다
,나도 씨였죠?
,이 씨도 쑥쑥 자랄 거죠?
한껏 치켜올린 입술이 나팔꽃처럼 둥글게 피어나고
꽃씨를 품은 봄흙을
다독이는 살빛 떡잎이 둘

타클라마칸 고비의 황사를 견디며
지구의 저 저 저 모퉁이를 견디며
씨에서 잎으로 꽃으로 몸 바꾸며
,나이테처럼
,쑥쑥 높아지는 키의 눈금들이
,해님에게 가는 계단이래!
꽃씨를 묻은 플라스틱 화분을 안고
계단을 오르는 위태로운 흙물 엉덩이를 보며
목숨을 피우려는 모든 것들은
저리 온몸으로 뒤뚱이며 오르는 것이구나

바람에 휘청,
넘어진 피와 멍이 너의 꽃이고 잎이었구나
저 계단에서
잠시 붙잡고 선 난간이 너의 뿌리였구나

<2004년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2003
 
 
* 바람을 기다리는 일 - 정끝별

찔레와 포플러와 길과 물과 함께 있던
늘어진 버드나무 밑에 함께 기대앉던
자운영과 골풀을 쓰러뜨리며 함께 눕던
우포 물 언저리 빗방울로 맺히던

물위에 초록 기둥을 세우고
좀개구리밥꽃처럼 작은 방을 들이고
소금쟁이 지나는 길목에 덜컥 꽃을 피우고
개구리마저 튀어 오르는 물밑으로 열매를 맺고

큰물이 흔쾌히 거두어갈 때까지
빗방울이 화석이 될 때까지
늪이 물이 될 때까지
발목을 쥐고 있는
물에 뜬 사랑

눈이 머는 일
마음이 먼저 먹히는 일
먹먹한 물이 되는 일
저 갯버들 가지에 치마를 걸어놓고
오지 않는 바람을 기다리는 일
고여 있으되 오래 썩지 않는 일

여기 중독된 불멸
 

 
* 십이월의 사과꽃 - 정끝별 
 
달디단 사과 냄새를 피우며
삼천 창공의 구름밭에서 피어나는
천만의 흰 꽃들
너는 본디 내 몸에서 나온 물의 새끼들
한밤내 한 남자가 피워내는 일 억 송이
한평생 한 여자가 피워내는 수백만 송이
삼천 창공의 구름밭에서
한 생각이 왔다가는 깜빡 사이에
천불난 송이 송이를 씨뿌리고 있다니,
지금도 너는 사각사각 사과 깎는 소리를 내며
차디찬 이 약속의 별에 내려앉고 있다니,
밥 한술을 뜨고
국 한술을 뜨는 사이
천 조(兆)의 날개를 접었다 펴곤 하다니,
밤새 휘날리는
한 송이 송이에서
흰 사과꽃이 피어낸
연이어 붉은 사과가 열릴 것이다
한 송이 송이가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약속이다
 

* 늦도록 꽃 - 정끝별

앉았다 일어섰을 뿐인데

두근거리며 몸을 섞던 꽃들
맘껏 벌어져 사태 지고

잠결에 잠시 돌아누웠을 뿐인데

소금 베개에 묻어둔
봄 마음을 훔친
저 희디흰 꽃들 다 져버리겠네

가다가 뒤돌아보았을 뿐인데

흘러가는 꽃잎이라
제 그늘 만큼 봄날을 떼어가네

늦도록 새하얀 저 꽃잎이
이리 물에 떠서
 
 
*  바람을 피우다 - 정끝별
 
오랜만에 만난 후배는 기공을 한다 했다
몸을 여는 일이라 했다
몸에 힘을 빼면
몸에 살이 풀리고
막힘과 맺힘 뚫어내고 비워내
바람이 들고 나는 몸
바람둥이와 수도사와 예술가의 몸이 가장 열려 있다고 했다
닿지 않는 곳에서 닿지 않는 곳으로
몸속 꽃눈을 밀어 올리고
다물지 못한 구멍에서 다문 구멍으로
몸속 잎눈을 끌어 올리고
가락을 타며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렇다면 바람둥이와 수도사와 예술가들이 하는 일이란
바람을 부리고
바람을 내보냄으로써
저기 다른 몸 위에
제 몸을 열어
온몸에 꽃을 피워내는
그러니까 바람을 피우는 일 아닌가!
 
 
* 어떤 자리 - 정끝별
 
어떤 손이 모과를 거두어 갔을까
내가 바라본 것은 모과뿐이었다
잠시 모과 이파리를 본 것도 같고
또 아주 잠시 모과 꽃을 보았던 것도 같은데
모과 이파리가 돋아나는 동안
모과 꽃이 피어나는 동안
그리고 모과열매가 익어가는 내내
나는 모과만을 보았다
바라보면 볼수록 모과는 나의 것이었는데
어느날 순식간에 모과가 사라졌다
내 눈맞춤이 모과꼭지를 숨막히게 했을까
내 눈독毒이 모과살을 멍들게 했을까
처음부터 모과는 없었던 게 아닐까 의심하는 동안
모과는 사라졌고 진눈깨비가 내렸다
젖은 가지 끝으로 신열이 올랐다
신음소리가 났고 모과는 사라졌고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에 허공 한 주먹이 피었다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를 보고 있다
보면 볼수록 모과는 여전히 나의 것이건만
모과즙에 닿은 눈시울이 아리다
모과가 익어가던 자리에서
미끄러지는 차연次緣의 슬픔
이 사랑의 배후
 
 
* 자작나무 내 인생 - 정끝별
 
속깊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 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 놓고
뼈만 솟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데워 가며
제 멍을 완성해 하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廢家)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 물을 뜨는 손 - 정끝별
 
물만 보면
담가보다 어루만져 보다
기어이 두 손을 모아 뜨고 싶어지는 손
무엇엔가 홀려 있곤 하던 친구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북한산 계곡 물을 보며
사랑도 이런 거야, 한다
물이 손바닥에 잠시 모였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물이 고였던 손바닥이 뜨거워진다
머물렀다
빠져나가는 순간 불붙는 것들의 힘
어떤 간절한 손바닥도
지나고 나면 다 새어 나가는 것이라고
무연히 떨고 있는 물비늘들
두 손 모아 떠본 적 언제였던가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 왼손의 사랑 - 정끝별 
 
버린 사랑 왼손으로 쓰네
나는 사랑의 왼손잡이
                
CLOSE UP (느리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권태로운 방 쪽으로 열려진 창문 밑 반대로 놓인 수화기와
쓰다만 엽서 왼쪽에 거꾸로 깍다만 사과 물끄러미 왼손
끝에서 덧나는 희망 보이네 물고기뼈처럼 금지된 그녀

내가 희망하는 것은
그가 아니었네 그의 사랑도
단지 나를 향한 사랑
위태롭게, 내가 빠져들었네
나는 나의 노예
나는 금지되네
                
LONG SHOT (무미건조하면서 지루하게)
길 밖으로 상실한 그녀 흘러가네 지하철 타고 쇼핑을
하고 모퉁이를 돌아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설겆이
를 하다 뜨거운 두 손에 이마 묻네 털어내지 못한 사랑이
발목 적시네 차가운 그녀

내가 멀리 있네
내 사랑 피어 혼자서 젖고 있네
잊혀지고 싶은 나처럼 그를 잊고 있네
나는 나의 노예, 용서하라
 
 
* 동지1 - 정끝별
 
세상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리는 저녁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집들이 문을 여는 저녁내
저기 함부로 개켜놓았던 저녁 하늘을 반듯이 펴
세상 가장 먼 달 몸에
세상 가장 먼 구름 마음을 꿰어
길길이 끊겼던 길들을 깁습니다
세상 모든 부끄러운 속들을 뒤집어가며
세상 모든 떨어지고 헐고 구멍난
당신 겨드랑이와 내 겨드랑이를 맞대놓고
세상 모든 조각난 별들을 이리저리 붙여가며
세상 모든 너덜대고 버림받고 빛바랜
당신 가슴과 내 가슴을 포개놓고
 
세상 가장 아름다운 아이를 만드는 저녁내
 
 
   * 사람들은 물고기를 닮았다 - 정끝별
 
 비가 내려요 상처도 고이면 웅덩이가 돼요 항아리가 돼요 아이 간지러워라 항아리 속 물비늘들 자발없이 촐싹대다 오가는 구름과 배가 맞아요 배가 맞아 해가 묵으면 물이 차고 살을 낳아요 살이 있으니 들고나는 거죠 그렇게 들고나는 살들은 죄다 찌예요 바늘이에요 길게 오늘처럼 길게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물고기를 닮아요 흐흥 빠진 물에 빠지고 물린 곳에서 물려요 빠진 것에 또 빠지고 물린 것에 다시 물리려고 길길이 속살부터 젖는다는 거죠 그러니 천년내 사랑이라는 것이 죄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고나는 무자맥질이라는거죠 뭐, 저 저런
 
 
* 그만 파라, 뱀 나온다 - 정끝별
 
속을 가진 것들은 대체로 어둡다
소란스레 쏘삭이고 속닥이는 속은
죄다 소굴이다
속을 가진 것들을 보면 후비고 싶다
속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속을 끓이는지 속을 태우는지
속을 푸는지 속을 썩히는지
속이 있는지 심지어 속이 없는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
속을 알 수 없어 속을 파면
속의때나 속의 딱지들이 솔솔
굴러 나오기도 한다
속의 피를 보기 마련이다
남의 속을 파는 짓들은 대체로 사납고
제 속을 파는 짓들은 대체로 모질다
 
 
 * 안달복달 - 정끝별
 
펄떡이는
모래무지를 삼키고
체머리를 흔들며 견디는
검은머리 해오라기
긴 목의
꿈틀거림
 
검은 머리 해오라기
지루한 목
한가운데서
거세게 파들대는
은빛 모래무지의
용트림
 
저 살肉들
먹고 먹힘의 광휘
 
 
* 소금호수 - 정끝별
 
거꾸로 뿌리를 쳐든 바오밥나무가 웃는다
칼라하리사막 언저리의
거대한 보츠와나 소금호수는
일 년 중 열 달이 건기여서
바람이 모래를 쓸어올려 세운
끝없는 신기루들이 아른아른 웃는다
보아구렁이가 인간을 삼키면서 웃는다
소금호수를 향해 가는 길에는
맨발자국이 바다거북처럼 파여 있곤 한다
온통 소금밭이 씨앗처럼 빨아들였을까
수천 년 전의 바다를 기억하는
바닥에 젖지 않는
온 생의 물기를
소금호수를 나오는 맨발자국이 쭈글쭈글 웃는다
기억해보면
반짝이는 소금껍질을 우두둑
우두둑 부수며 달려온 것도 같다
맨발이었다
벗어놓은 신발이 웃는다
 
 
* 속 좋은 떡갈나무 - 정끝별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벌레들이 산다
그 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든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버섯과 이끼들이 산다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딱따구리들이 산다
그 속에 부리를 갈고 곤충을 쪼아먹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박쥐들이 산다
그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올빼미들이 산다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깐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오소리와 여우가 산다
그 속에 굴을 파고 집을 짖는다

속 빈 떡갈나무 한 그루의
속 빈 밥을 먹고
속 빈 노래를 듣고
속 빈집에 들어 사는 모두 때문에
속 빈 체 큰바람에도 떡 버티고
속 빈 체 큰 가뭄에도 떡 견디고
조금 처진 기지로 큰 눈들도 싹 털어 내며
한 세월 살 썩어내는
세상 모든 어미들 속
 
 
* 첫눈 - 정끝별
 
날선 삿대질을 되로 주고 말로 받던 그날밤의 창가에
느닷없는 점령군처럼 함박눈이 내렸것다
서로의 눈이 부딪치고 쨍그랑 겨누던 무기를 놓쳤던가
그랬던가 어둡던 창밖이 우연의 남발처럼 환해지는
저건 대체 누구의 과장된 헛기침이란 말인가
그래서 서로의 눈이 창밖을 마주 보게 되었단 말인가?
그러자 핸드폰을 귀에 댄 남자가 검은 허공을 향해 입을 벌리고
우산을 옆으로 든 여자가 흔들리는 네온싸인에 사뿐사뿐 제 얼굴을 비춰보고
오토바이를 세운 폭주족이 크라운 베이커리 앞에 서서 환한 라이터를 지피고
달리던 자동차가 멈칫 쌓인 눈을 쓸어내리고는 천천히 미끄러져가고
그렇게 무섭게 굴러가던 것들이 일제히 제 둥근 모서리를 쓰다듬고 있었더란 말인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에 내려앉으며
누군가의 어깨가 누군가의 어깨에 쌓이며
생애 첫눈을 뜬 장님처럼 서로의 눈을 맞추고 말았더란 말인가
염치를 잊고 손을 내밀고 말았더란 말인가, 용서라는
보고 또 보고도 물리지 않는
아 저건 누구의 신파였고
누구의 한물간 낭만적 연출이었던가
그리하여 창밖에 펼쳐진 단막의 해피엔딩이 끝날 즈음
뜨겁게 내리는 저 첫눈에게
그리고 또 다시 속아 넘어가버리고 말았더란 말인가
(현대시학 2006, 3월호)
 
 
* 공전 - 정끝별
 
별들로 하여금 지구를 돌게 하는
지구로 하여금 태양을 돌게 하는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져
문득, 별을 떨어지게 하는
저 중력의 포만
 
팔다리를 몸에 묶어놓고
몸을 마음에 묶어놓고
나로 하여금 당신 곁을 돌게 하는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져
기어코, 나를 밀어내게 하는
저 사랑의 포만
 
허기가 궤도를 돌게 한다
 
- 중앙일보 '12월 특집 사랑이 가득한 시' (2005.12.15 목요일 35면) -
 
패덤은 한때 길이를 재는 데 쓰였던 영어단어다. 그 단어의 본래 뜻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둘러싼 연인의 팔길이'였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뻗은 팔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돌게 하는 - 공전케 하는, 혹은 미치게 하는 최대의 중력. 팔이라도 저려 잠시 내릴라치면 어느덧 외로움이라는 허기로 응징하는 사랑의 궤도, 살아서는 이탈할 수 없지 않을까.
김경미<시인>
 
 
* 뒤돌아 보는 눈 - 정끝별

복도를 걸어나왔을 때
철지난 달력 그림 혼자 걸려 있다
우두커니 신발 한 켤레 남아 있다
계단을 내려왔을 때
금간 시멘트 벽 혼자 비칠 서 있다
빈 베고니아 화분 하나 웅크리고 있다
골목을 한참 걸어나왔는데 그때까지
묵은 눈더미 구석에 주저앉아 있다

구겨진 신문지처럼
지나간 마음 한 페이지처럼
눈길 끊긴 자리,
다시 읽을 수 없는

등뒤로 쏠린 눈꼬리
비어있는 자위가 그렁하다

묶인 줄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 사과 껍질을 보며 - 정끝별

떨어져 나오는 순간
너를 감싸 안았던
둥그렇게 부풀었던 몸은 어디로 갔을까
반짝이던 살갗의 땀방울은 어디로 갔을까
돌처럼 견고했던 식욕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식탁 모퉁이에서
사과 껍질이 몸을 뒤틀고 있다
살을 놓아버린 곳에서 생은 안쪽으로 말리기 시작한다

붉은 사과 껍질은
사과의 살을 놓치는 순간 썩어간다
두툼하게 살을 움켜쥔
청춘을 오래 간직하려는 과즙부터 썩어간다

껍질 한끝을 집어 든다
더듬을수록 독한 단내를 풍기는
철렁, 누가 끊었을까 저 긴 기억의 주름

까맣게 시간이 슬고 있다


* 둥지새 - 정끝별

발 없는 새를 본 적 있니?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에 쉰다지
낳자마자 날아서 딱 한번 떨어지는데
바로 죽을 때라지
먹이를 찾아 뻘밭을 쑤셔대본 적 없는
주둥이 없는 새도 있다더군
죽기 직전 배고픔을 보았다지

하지만 몰라. 그게 아니었을지도
길을 잃을까 두려워 날기만 했을지도
뻘밭을 헤치기 너무 힘들어 굶기만 했을지도

낳자마자 뻘밭을 쑤셔대는 둥지새
날개가 있다는 걸 죽을 때야 안다지
세상의, 발과 주둥이만 있는 새들
날개 썩는 곳이 아마 다정의 둥지일지도
못 본 곳 많은 데 나, 죽기 전 뭐가 보일까


* 고집 - 정끝별

참새는 천적인 솔개네 둥지 밑에 몰래 집을 짓는다
무덤새는 뜨거운 모래 밑에 제 몸 수백 배 집을 짓는다
고릴라는 잠이 오면 그제서야 숲속 하룻밤 집을 짓는다
너구리는 오소리 집을 슬쩍 빌려서 잔다
날다람쥐는 나무의 상처 속 구멍집을 짓는다
꿀벌과 흰개미는 집과 집을 이어 끝없는 떼집을 짓는다
수달을 물과 물 중간에 굴집을 짓는다
물거미는 물속에 텅 빈 공기집을 짓는다
바퀴벌레는 사람들 집 틈새에 빌붙어 산다
집게는 소라 껍데기에 들고 다니는 집을 짓는다

세상 모든 짐승들은
제 몸을 지붕으로 덮고
제 몸을 벽으로 세워
제 몸에 맞는 집을 짓고 산다
제 몸이 원하는 대로
제 몸이 기억하는 대로

큼직한 집을 짓는다 살아 있는 하루가 끔찍하다
하나 더 들여놓고 한 평 더 늘리느라 오늘도 나는



* 살구꽃이 지는 자리 - 정끝별

바람이 부는 대로
잠시 의지했던 살구나무 가지 아래
내 어깨뼈 하나가 당신 머리뼈에 기대 있다
저 작은 꽃잎처럼 사소하게
당신 오른 손바닥뼈 하나가 내 골반뼈 안에서
도리없이 흩어지고 있다

꽃 진 자리가 비어간다
살구 가지 아래로 부러진 내 가슴뼈들이
당신 가슴뼈를 마주보며 꽃 핀 자리
한 잎 뺨 한 잎 입술 한 잎 숨결
지는 꽃잎도 저리 인연의 자리로 쌓이고
문득 바람도 피해간다

누구의 손가락뼈인지
묶였던 매듭을 풀며 낱낱이 휘날리고 있다

하얗게 얼룩진 꽃 그늘 아래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부쳐준 오래된 편지 한 장을 읽으며

■ 살구꽃 흩날리는 날, 조금만 실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뢴트겐의 X선처럼 보였을까요. 검은 가지들 사이로 나부끼는 살구꽃은 추억을 투시하고 뼈를 반사해 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X선에 의해 나타난 뼈들은 빛의 파장에 의해 그늘 진 몸 속 풍경입니다. 그러니 살구꽃 진 자리의 그림자도 어쩌면 당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놀라운 것은 ‘한 잎 뺨 한 잎 입술 한 잎 숨결’의 표현에 있는데, 이 짧은 은유적 배치가 한 권의 연애소설보다 더 명징해 보입니다. 이 시가 오늘, 손만 대어도 파르르 떨렸던 청춘을 처방하는군요. (윤성택시인)

* 푸른수염고래 - 정끝별

밤이 바다를 거슬러 높아질 때
젖은 바다 날개 소리를 내며
조용히 수면 위로 부상하는 긴수염고래
백살난 지느러미로 모래를 휘저으며
불길 같은 꼬리로 바위를 후려치며
긴 수염을 성난 바다의 목구멍에 밀어 넣어
바다의 깊은 울음을 건져 올렸던가
바다의 담벼락이 하늘 높이 일어서
둥근 달을 베었던가 베어진 달이 떨어지며
긴수염고래의 횡경막에 박혔던가
긴 휘파람 소리
푸른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던가
수평선에 쌓인 달빛을 향해 꼬리를 돌렸던가
긴수염고래의 핏줄기가 새벽별로 부서지며
떨고 있는 떡갈나무 아래로 흘러내렸던가
밤이 바다를 거슬러 높아질 때
바다가 백년을 품고 있던 긴수염고래를 내밀고는
왜 빠르게 삼켜버렸는지는 비밀이다
바다가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도 비밀이다
썰물이 진다 이제 눈꺼풀을 걷는 바다여
청춘의 조난자로 하여금 울게 하라
삼켜버렸기에 한없이 푸른 것들을


*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 정끝별

쭉쭉 뻗은 봄솔숲 발치에 앉아
솔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자니
저 높은 허공에
부러진 가지가 땅으로 채 무너지지 못하고
살아있는 가지에 걸려 있다

부러진 가지의 풍장을 보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와 함께 무너지고 싶었을까
부러진 가지를 붙잡고 있는 저 살아있는 가지는
부러진 가지가 비바람에 삭아 주저앉을 때까지
부러진 가지가 내맡기는 죽음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살아있는 가지 어깨가 처져 있다

살아있는 가지들은 서로에게 걸리지 않는데
살아있다는 것은
제멋대로 뻗어도 다른 가지의 길을 막지 않는데

한 줄기에서 난
차마 무너지지 못한 마음과
차마 보내지 못한 마음이
얼마 동안은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
서로가 덫인 채
서로에게 걸려 있으리라

엉킨 두 마음에 송진이 짙다

 
* 풋여름 - 정끝별
 
어린나무들 타오르고 있어요
휘휘 초록 비늘이 튀어요
풋, 나무를 간질이는 빛쯤으로 여겼더니
풋, 나무 몸을 타고 기어올라
풋, 나무 몸에 파고들어요
가슴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을까요
어느새 휘감치는 담쟁이 덩쿨은?
온몸을 뒤틀며
뿌드득 뿌드득 탄성을 지르며
풋, 나무 힘줄 세우는 소리
용트림하는 풋, 나뭇가지
초여름 저물녘 입술 자국에
겨드랑이부터 뚝 뚝
초록 진땀을 흘리고 있어요
풀물냄새를 풍기는
저 풋, 나무
담쟁이 치마폭에 폭 싸여

 
* 여름 능소화 - 정끝별

꽃의 눈이 감기는 것과
꽃의 손이 덩굴지는 것과
꽃의 입이 다급히 열리는 것과
꽃의 허리가 한껏 휘어지는 것이

벼랑이 벼랑 끝에 발을 묻듯
허공이 허공의 가슴에 달라붙듯
벼랑에서 벼랑을
허공에서 허공을 돌파하며

홍수가 휩쓸고 간 뒤에도
붉은 목젖을 돋우며
더운 살꽃을 피워내며

오뉴월 불 든 사랑을
저리 천연스레 완성하고 있다니!

꽃의 살갗이 바람 드는 것과
꽃의 마음이 붉게 멍드는 것과
꽃의 목울대에 비린내가 차오르는 것과
꽃의 온몸이 저리 환히 당겨지는 것까지


* 개미와 꿀병 - 정끝별

부주의하게 살짝 열어둔 꿀병에
까맣게 들앉았네 개미떼들
어디서 이렇게 몰려들었을까
아카시아 단꽃내가 부르는
저 새까만 킬링필드

꿀에 빠진 개미떼를
몸에 좋다고
뚝, 떠먹는
저 오랜 숟가락들

꿀병에 꽂힌 숟가락을
靑春의 가는 손가락에 쥐어주는
저 시린 입술


* 개미와 앨범 - 정끝별

책장 꼭대기에 쌓여가는 앨범들
주저앉을 것만 같아
바닥에 내려놓으려는데
아이 앨범에서 시커먼 덩어리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다
파르르 바닥에 흩어지는 수천의 개미떼
앨범을 보던 아이가
먹던 비스켓과 함께 닫아두었나 보다
먹이를 찾아 몰려든 개미떼들
식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비스켓을 쏠고
앨범을 쏠고
환한 웃음을 쏠며
아이 얼굴에 주름집을 짓고 있었나 보다
에프킬러를 뿌린다

꿈틀거리는 개미 일가들아
비스켓만 먹고 가지,
휘발하는 검은 시간 벌레들아
추억만은 놓고 가지,


* 날아라! 원더우먼 - 정끝별

뽀빠이 살려줘요-소리치면
기다려요 올리브! 파이프를 문 뽀빠이가 씽 달려와
시금치 깡통을 먹은 후 부르르 알통을 흔들고는
브루터스를 무찌르고 올리브를 구해주곤 했어
타잔 구해줘요 타잔 - 외칠 때마다
치타 가죽인지 표범 가죽인지를 둘러찬
타잔이 아- 아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와
악어를 물리치고 제인을 번쩍 안아들던
아 정글 속의 로맨스
베트맨-. 슈퍼맨- 외치면
망토자락 휘날리며 날아와 조커와 렉스로더를 해치우고
마고트 키더나 킴 베신저의 허리를 힘차게 낚아채던
무쇠 팔 무쇠 다리 육백만불의 사나이들

그때마다 온몸이 짜릿했어, 헌데 말야
문 프린세스 헐레이션-
세일러문 요술 봉을 휘두르는 딸아이를 붙잡고
날 좀 풀어줘- 날 좀 꺼내줘-
허우적댈 때마다 기억나는 이름은 왜
어떻게든 살아나가 물리쳐야 할 악당들뿐일까
왜 난 부를 이름이 없는걸까, 꿈에조차, 왜.


* 더럭 터럭 - 정끝별

먹이가 들어가는 모든 입구에는 터럭이 없다
입이건 주둥이건 부리건 아가리건 터럭이 없다
먹이가 닿는 모든 부분에는 터럭이 없다
손바닥이건 발바닥이건 뱃가죽이건 터럭이 없다

따오기류에는 머리에 터럭이 없는 놈들이 많다
진흙탕이나 개펄에 머리를 박고 먹이를 구하기 때문이다
흰깃독수리나 콘도르라는 이름의 큰 매는
머리 전체는 물론 긴 목 상반부까지 터럭이 없다
죽은 짐승의 내장에 목을 박고 먹이를 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에는 터럭이 없다
아침 방바닥을 쓸 때마다
터럭이 한움큼씩 손바닥에 쓸린다


* 한 집 눈물이 키워 내는 생의 의미 - 엄경희
― 정끝별의 시세계

1. 욕망에 대한 자의식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사실은 한 존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악에 다가갈 수 있는 가능태이다. 욕망은 생을 가동시키는 에너지이면서 타인을 포함하여 자신의 생을 망가뜨릴 수 있는 에너지이기도 한 것이다. 욕망의 이율배반적 힘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생의 방향과 방식을 선택하고 실현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의 순수란 증식되는 욕망을 적절하게 다스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욕망의 수위는 쉽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실현은 언제나 자기 합리화를 동반하며, 자기 합리화가 과도해지면 욕망에 대한 자의식은 물러서게 마련이다. 더욱이 이 세계는 욕망을 자극하는 무수한 유혹의 성채가 아닌가. 내 안에 있는 욕망으로 나 자신의 생을 속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욕망에 시달리는 나를 마음으로부터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정끝별의 의식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는 문제는 다름 아닌 바로 욕망에 대한 자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두 권의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세계사, 1996)과 《흰책》(민음사, 2000)에는 거짓 세계, 가족, 사랑, 외로움, 일상, 어두운 추억과 유년 등 다양한 주제와 그것을 드러내는 다양한 형식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두의 기저에는 언제나 욕망에 부대끼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깔려 있다.

그는 시 〈국국물은 떨고 있다〉에서 “한 숟갈이라도 먼저, 숟가락을 쥘 때마다 / 내 영혼은 밑이 보이지 않는 큰 입”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시 〈독사뭉치〉에서는 “처음 그 자루는 작은 입을 둥글게 말아올리고 있었다, 그때 조심했어야 했다, 먹이를 향해 무작정 벌어진 채 영영 닫히지 않는, 주름투성이의 생가죽 구멍”이라며 인간 존재의 욕망에 대해 강한 혐오를 드러낸다. “입 속 가득 화려한 구름을 물고 있는 / 나는 낡은 삼류 가수”(〈내 안 녹나무〉), “아 늙은 암소의 지친 뱃속 열기가. 그것 참 안쓰러운 것이다”(〈나앉은 검은 비닐자루〉)와 같은 구절도 동일한 발상을 드러내고 있는 예이다. “눈과, 혀와 손끝을 씻고 / 밤새 똥줄까지 씻고 // 용서를……”(〈三彭이〉)이라고까지 말할 만큼 그는 이 문제에 시달리며 자기의 길을 닦는다.

2. 구멍과 옹관(甕棺) 사이

욕망에 대한 자의식이 강한 자는 자신의 욕망이 비대함을 스스로 인식하는 자이며, 그것을 견제하는 자이다. 시인은 시 〈길 섶 녹나무〉에서 “걸어온 길을 / 기억치 못하는 모든 / 보행자는 녹슬어간다”고 말한다. ‘걸어온 길’을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지향에 대한 성찰을 의미한다. 그것을 망각하고 맹목으로 삶의 길을 가고 있는 자는 자기와 자신의 욕망을 분리해서 사유할 수 없는 시간의 노예라 할 수 있다.

그때 무더기로 핀 녹(〈길 섶 녹나무〉)이 존재의 시간을 부식시킬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앎을 가로질러 가는 욕망의 강인한 힘이다. “봄 여름 더럽혀진 이빨이 길을 씹는다 / 얼마나 많은 욕과 녹이 꽃피어야 할까”(〈녹나무 아래 1〉)라고 털어놓는 솔직한 고백 속에 한 인간의 고뇌가 담겨 있다. 이 길이 진실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욕과 녹을 피워내며 끌려가는 인생의 길. 거기에는 갈등과 자기 부정 혹은 연민, 그리고 성취에 대한 회의와 같은 것이 끼여들 가능성이 크다.

마음 원했던 길

예나 지금이나 몸 따르지 못해
깊은 구멍
뱅그르 빠지는 나뭇잎
나 거기 사네

문 밖 지친 몸
아홉 구멍마다
손자욱 선명한 누수(漏水)소리
찌르 찌르 찌르르

누가 알았을까
술김에나 화해하고
마음 밖 몸 엿보며
거울처럼 서로 가여워할 줄

몸 밖 마음이 엿보는
굶주린 폐허

한 줌 흙으로 메울 수 있다면― 〈지루한 누수(漏水)〉 전문

“해마다 바다의 생살을 째고 / 두 손에 묻어나는 청어의 비린내”(〈칼레의 바다〉)가 가득했던 칼레의 바다와 “마지막 잔에는 태양을 담아 / 저 취한 하늘”(〈붉은 수수밭〉)에 던지던 고량밭이 이 시인이 ‘마음 원했던 길’인지도 모른다. 〈칼레의 바다〉나 〈붉은 수수밭〉과 같은 작품에서 보여지는 장쾌함이, 그것이 관념일지라도, 정끝별의 상상력 속에서 끝끝내 지속되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이다. 이런 세계를 꺾어놓은 것은 무엇일까? 그는 칼레의 바다도, 광활한 고량밭도 아닌 ‘깊은 구멍’에 갇힌다. 생활을 위해 ‘문’을 나섰던 몸은 지치고, 그 지친 폐허를 보는 마음은 슬픔에 잠긴다.

시인은 시 〈그림 속인 듯 4〉에서 이를 “쪽파처럼 매운 욕설로 몰려오는 삶의 수렁 속 웅크려 앉아 겹겹의 어둠 벗기면 벗길수록 작게 빛나는 눈물”이라고 반복 표현하기도 한다. 시적 자아를 가둔 구멍과 수렁은 욕망의 함정이기도 하다. 그의 또 다른 시 〈희망〉에서 “구멍에 빠져 본 사람은 / 구멍을 제 몸속에 넣고 다닌다”는 잠언적 고백을 읽을 수 있는데, 이는 함정을 만든 자가 자기 자신임을 뜻한다. 그러니 이 허방의 심연을 메울 수 있는 자도 자기 자신이다. 시인은 이 허방의 자리를 의미 변화시킬 생의 과제와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길은 항아리를 추억한다
해묵은 항아리에 세상 한 짐 풀면
해가 뜨고 별 흐르고 비가 내리는 동안
흙이 되고 길이 되고
얼마간 뜨거운 꽃잎
또 하루처럼 열리고 잠겨
문득 매듭처럼 덫이 될 때
한 몸 딱 들어맞게 숨겨줄
그 항아리가 내 어미였다면,
길은 다시 구부러져 내 몸으로 들어오리라
둥근 길
길의 입에 숨을 불어넣고
내가 길의 어미가 될 것이니,
내 안에 길이 있다
내가 가득찬 항아리다― 〈옹관(甕棺) 1〉 전문

시적 자아가 갇혀 있는 ‘구멍’에서 모든 길이 생성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함정일 수 없다. “둥근 길 / 길의 입에 숨을 불어넣고 / 내가 길의 어미가 될 것”이라는 이 오만한 정신은 생을 창조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를 함의한다. 내 안에 함정이 있는 것처럼, ‘내 안에 길이 있다’는 믿음을 그는 저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죽음과 결부되어 있는 옹관(甕棺)은 그런 의미에서 낡은 시간의 죽음과 새로운 시간의 생성이 교체하는 심리적 공간, 즉 함정과 길의 교체를 뜻하는 아이러니적 공간으로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관념적 지향이 “하얗게 식어가는 밑불에 / 환한 세상 한 장을 올려보지만 / 아직도 밑은 스물둘 겨울 구멍”(〈날리는 것은 쉬려 한다〉)을 이겨갈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3. 달리는 것과 지나가는 것 사이

구멍과 옹관 사이를 오가며 진실로 나를 배반하지 않는 삶이 무엇인가를 정끝별은 무수히 물었을 것이다. 그는 “숲에 가득하네 세월의 붉은 새 / 나는 많이도 속이며 살았네 / 낡아 묻히면 방문치 않으리 아무도”(〈졸참나무 숲에 살았네〉)와 같은 구절을 통해 덧없는 욕망과 그 속에서 낡아 가는 자신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첫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에는 덧없을지언정 그것에 이끌리는 자아와 그 자아를 벗어나려 하는 자아가 서로 강하게 충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시의 내용에서만이 아니라 그 내용을 형상화하는 언어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십일월 1〉 〈십일월 5〉 〈옹관(甕棺) 2〉와 같은 시편은 하나의 시적 분위기나 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과다한 이미지와 수사가 동원되고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단일한 시상을 분산시키고 시의 내용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는 감춤의 미학보다는 드러냄의 욕망이 강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생각한다. 아직은 그의 욕망이 ‘달리는 것’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운동회날부터 나는 달리고 있다
너를 지나
집과 담벼락을 지나
어둔 밤길을 지나
전신을 활처럼 제끼고
두 눈을 감고 가슴을 치며
가로막는 횡단보도를 넘어
달릴수록 에워싸는 빌딩숲을 넘어
내 나이를 넘어 달리고 있다
입술을 깨물며 재앙의,
넘어지는 것보다 처지는 일이 더 무서웠다
허파꽈리에 가득 차는 검은 연기
과거는 넝마 미래를 훔치며
화살보다 빠르게
달린다 내 열망의 한가운데를
눈부시게 난파할 그 순간까지
발바닥이 점점 가슴이 머리가
텅. 텅. 텅. 콘크리트처럼 굳어가며
삶이 빠르면 죽음도 발정난 고양이
예기치 못한 골목에서 튕겨 달겨드는― 〈다리는 달리고 있다〉 전문

과거를 벗어 던지고 미래를 훔치고자 하는 이 화자는 “넘어지는 것보다 처지는 일이 더 무서웠다”고 고백한다. 열망에 의한 것이든 욕망에 의한 것이든 이와 같은 질주는 현실을 돌파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존재를 위기에 빠뜨리는 부정적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자칫하면 생이 ‘난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시적 화자가 달리고자 하는 욕망과 그 욕망이 곧 죽음이라는 인식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갈등이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흰책》에서는 실존적 허무로 심화된다.

미끌하며 내 다섯 살 키를 삼켰던 빨래 툼벙의 틱, 톡, 텍, 톡, 방망이 소리가 오늘 아침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와 수챗구멍으로 지나간다 그 소리에 세수를 하고 쌀을 씻고 국을 끓여 먹은 후 틱, 톡, 텍, 톡, 쌀집과 보신원과 여관과 산부인과를 지나 르망과 아반테와 앰뷸런스와 견인차를 지나 화장터 길과 무악재와 서대문 로터리를 지나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지나간다 꾹 다문 입술 밖에서 서성이던 네 입술의 뭉클함도 삼일 밤 삼일 낮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던 배반의 고통도 끝장내고 말거야 내뱉던 악살의 순간도 지나간다 너의 첫 태동처럼 틱, 톡, 텍, 톡, 내 심장 한가운데를 지나 목덜미를 지나 손끝을 지나간다 지나가니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웃고 울고 입을 맞추고 쌀을 사고 종이와 볼펜을 사고 모자를 사고 집을 산다 한밤중이면 더욱 크게 들려오는 틱, 톡, 텍, 톡, 소리를 잊기 위해 잠을 자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틱, 톡, 텍, 톡, 날카로운 구두 뒤축으로 나를 밟고 지나가는 그 소리보다 더 크게 틱, 톡, 텍, 톡, 기침을 하고 틱, 톡, 텍, 톡, 노래를 하고 틱, 톡, 텍, 톡, 싸운다 틱, 톡, 텍, 톡, 소리가 들리는 한 틱, 톡, 텍, 톡, 나는, 지나가는 것이고 틱, 톡, 텍, 톡, 살아 있는 것이다 틱, 톡, 텍, 톡, 틱, 톡, 텍, 톡, 틱, 톡, 텍, 톡……― 〈지나가고 지나가는 2〉 전문

달리고 달리는 것이 지나가고 지나가는 것으로 바뀌는 과정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달리고 달린 끝에 만난 생의 의미를 이 시는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세월의 담금질이 있다. “쌀집과 보신원과 여관과 산부인과를 지나 르망과 아반테와 앰뷸런스와 견인차를 지나 화장터 길과 무악재와 서대문 로터리를 지나” 온 것은 다름 아니라 시간이며, 존재이다.

그런데 이젠 주체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체를 지나간다. 주체 또한 지나가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발자국 소리이며, 심장 소리이며, 시계 소리이기도 한 ‘틱, 톡, 텍, 톡’은 이 존재의 뇌리에서 울리면서 생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불면으로 이끄는 이 소리에 귀기울일 때 존재는 고통스럽지만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실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에서 드러내고 있는 허무는 감상적이기보다 존재론적이다. 〈아(我)집을 관(棺)통하다〉 〈지나가고 지나가는 1〉 〈얼굴을 파묻다〉 〈만두 속 달팽이〉 〈관망〉 등의 시편 또한 이와 동일한 의식을 동반하고 있는 예이다.

모든 것이 지나가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인식은 그것이 진리일지라도 한 존재를 편안하게 하지는 않는다. 정끝별은 이러한 존재론적 인식 앞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이 한 채의 집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거기에 생의 비통함과 세월이 들고나며(〈한 집 사랑〉), 병(病)과 아이와 욕망이 들고난다(〈한 집 눈물〉). 그러나 이 모든 고통의 그릇인 자신을 그는 부정하지 않는다. “흠, 집이군, 그래도 그리워, 내 늙은 한 집이”(〈그리운 한 집〉)라고 그는 담담하게 말한다.

《흰책》에 실려 있는 〈현 위의 인생〉과 같은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이 같은 자기 긍정에서 비롯한다. “내가 저 위태로운 낙엽들의 잎맥 소리를 내면 / 어이, 가장 낮은 흙의 소리를 내줘 / 내가 팽팽히 조여진 비명을 노래할 테니 / 어이, 가장 따뜻한 두엄의 속삭임으로 받아줘”라고 그는 노래한다. 또 시 〈겨울 바람은〉(《한국문학》 2003, 봄)에서는 “잘못 분 피리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 제 소리를 내며 들락일 수 있도록 / 창문을 열어주고 싶었습니다”라고 노래한다. 저 위태로운 것을 감내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속삭임을, 그리고 생이 드나드는 숨통을 그는 자신의 구멍에서, 한 집 눈물에서, 그 속 빈 허방에서 피워낼 정도가 되었는가.

4. 수사를 대신한 여백들

두 권의 시집 이후에 발표한 정끝별의 시에서 특히 나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여백’이다. 그 여백이 과다했던 수사와 이미지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 지닌 여백의 미를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 하여도 자신의 내면이 넘치면 여백의 미를 살려내기 어려울 것이다.

욕망에 대한 자의식과 싸우는 가운데 정끝별은 부질없는 것들을 걸러내고 있는 것일까? 그의 언어가 예전에 비해 간명해지면서 동시에 더 깊은 곳에 안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첫 시집에도 〈봄마늘〉과 같은 작품이 있었지만, 그것이 이제 만개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춘수(春瘦)〉와 같은 시가 대표적으로 그러하다.

마음에 종일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
질끈 감은 두 눈썹에 남은
봄이 마른다
허리띠가 남아돈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사랑이다
길이 더 멀리 보인다― 〈춘수(春瘦)〉 전문

말을 적게 하고도 그 뜻이 풍부함으로 넘쳐날 수 있다면 그것은 시의 묘(妙)에 다다른 말의 진경일 것이다.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로 되살려낸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은 남김없이 말하지 않는다. 남김없이 말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말을 감추고 그 뜻을 숨김으로써, 그리고 숨겼다는 사실을 내비치면서 언어화되기 어려운 것들의 본질에 시는 도달한다. 이는 시의 길이가 짧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길이가 아니라 표현된 말들이 일으키는 파문의 힘이다. 그 파문의 힘이 문면에 드러나지 않은 침묵을 능숙하게 경영할 때 시다운 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정끝별의 〈춘수(春瘦)〉가 그러하다. 이 시는 드러난 말의 지표가 이면에 감추어진 더 많은 말들을 가리킴으로써 그 울림을 극대화한다. 시인은 우선 한 행을 한 연으로 안배하여 행과 행 사이의 진행 시간을 최대한으로 늦추어 놓고 있다. 행간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여백은 봄날 ‘마음의 공테이프’를 종일 돌리고 있는 화자의 허함을 시각화하는 기표이면서, 동시에 독자의 마음이 들어설 자리이기도 하다.

이 여백 속에서 독자는 ‘공테이프 돌아가는 소리’에 귀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리는 맑고 처연하다. 봄날 앓는 상사몽의 덧없는 슬픔이 공테이프 소리처럼 화자의 몸과 마음을 텅 비워 놓고 있기 때문이다. 텅 빈 몸으로 맞이하는 봄날은 그렇기 때문에 화사함이 아니라 ‘마름’의 시간이 된다.

그것을 시인은 춘수(春愁)라 말하지 않고 춘수(春瘦)라 말한다. 근심이 아니라 근심으로 몸이 상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병들었으니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수척해지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화자는 “질끈 감은 두 눈썹”으로 그리움을 안으로 삭이며 마른다.

이처럼 병들어 상함을 시인은 “허리띠가 남아돈다”고 표현한다. 슬픔의 감정을 여러 번 걸러낸 후에 뒤따라 올 수 있는 자기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이 담담한 고백이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처연한 아름다움에 이르게 한다. 뒤에 이어지는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 사랑이다”라는 단호한 어조의 심정 고백은 이 시가 지닌 처연한 아름다움의 절정을 만들어낸다. 이는 앞에 “허리띠가 남아돈다”는 표현과 더불어 연을 바꾸는 여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즉 감정의 절제와 행간의 여백이 결정적 고백을 기대하고 갈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 사랑이다”라는 고백이 독자의 기대와 갈망을 채워줌으로써 시적 슬픔에 흠뻑 젖어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절정의 순간을 지나면 이 시는 다시 고요함 속으로 미끄러진다. “몸이 마르는 슬픔이다 // 사랑이다”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이 “길이 더 멀리 보인다”에 이르면 차분하고도 사색적인 어조로 바뀐다. 이때 “길이 더 멀리 보인다”고 표현된 이 시의 마지막 행은 긴 여운과 함께 복합적 의미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일차적으로 “길이 더 멀리 보인다”는 춘수(春瘦)의 고통이 끝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구절로 해석 가능하다.

즉 앞으로도 계속 감내해야 할 “몸이 마르는 슬픔”을 멀리 보이는 ‘길’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길이 더 멀리 보인다”가 함의하는 것은 봄날의 상사몽을 통해서 시적 자아가 성숙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구절로 해석할 수 있다. 먼 곳까지 내다 볼 수 있는 혜안을 허함과 슬픔이 가져다주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은 서로 다른 방향의 것이 아니라 내적 의식 속에서는 동일한 것일 수 있다. ‘길’이란 ‘보이다’로 표현될지라도 늘 ‘가다’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주체의 고달픈 행보를 암시하는 것이며, 고달픈 미래의 시간이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인다’는 사실이 곧 삶에 대한 혜안일 수 있는 것이다.

봄날에 꾸는 외롭고도 슬픈 상사몽을 이 시는 매우 담박한 언어와 행간의 여백으로 그려냄으로써 그 울림의 진폭을 오랜 동안 지속시킨다. 아픔과 상처도 이쯤 되면 아름다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슬픔도 질척하지 않게, 그리움도 끈끈하지 않게 걸러내면서, 그것으로 몸이 마르고 깊어지는 상사몽은 궁극적으로 우릴 마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맑음으로 젖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끝별이 〈춘수〉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 같은 여백의 아름다움은 시의 형식적 장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이제 채우는 쪽보다 비우는 쪽으로, 그리고 그 빈 자리에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를 품어내는 터전을 만들고자 한다.

5. 한 세월 잘 썩어내기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벌레들이 산다
그 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들인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버섯과 이끼들이 산다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딱따구리들이 산다
그 속에 부리를 갈고 곤충을 쪼아먹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박쥐들이 산다
그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올빼미들이 산다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깐다
속 빈 떡갈나무에는 오소리와 여우가 산다
그 속에 굴을 파고 집을 짓는다

속 빈 떡갈나무 한 그루의
속 빈 밥을 먹고
속 빈 노래를 듣고
속 빈 집에 들어 사는 모두 때문에
속 빈 채 큰 바람에도 떡 버티고
속 빈 채 큰 가뭄에도 썩 견디고
조금 처진 가지로 큰 눈들도 싹 털어내며
한세월 잘 썩어내는
세상 모든 어미들 속― 〈속 좋은 떡갈나무〉 전문

저 떡갈나무의 빈 속은 넓고 깊다. ‘한 집 눈물’을 잘 썩어내면 그 집은 만물이 들고나는 우주가 된다. “속 빈 채 큰 바람에도 떡 버티고 / 속 빈 채 큰 가뭄에도 썩 견디고 / 조금 처진 가지로 큰 눈들도 싹 털어내며” 가는 저 단단한 우주는 채우려고 해도 비기만 하는 욕망과 달리 비움으로써 채워진 존재의 집이다.

정끝별에게 욕망에 대한 자의식이 없었다면 이 넓고 깊은 마음의 우주는 생겨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비움으로 채워지는 이러한 삶의 역설이 미래에도 정끝별 시의 거처이길 희망한다. 부질없는 것들을 거둬 내고, 세간의 일을 위해 빽빽하게 짜여진 시간의 질서를 무너뜨리며 더 크고 깊은 빈 속으로 견딜 때 무상(無償)으로 빛나는 언어들이 거기서 숨을 고를 것이다. ■ 엄경희/1963년 서울 출생. 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 현재 숭실대 및 이화여대 강사. 저서로는 《빙벽의 언어》 《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 《질주와 산책》이 있음.
 
 
 * 정끝별
 
1964년 나주에서 출생하여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
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에 <칼레의 바다> 외 6편의 시가 당선,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었다.
시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며, 2005년 현재 명지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삼천갑자 복사빛」이, 시론.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산문집으로 「여운」과 시선평론집 「시가 말을 걸어요」평론집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등이  있다.









 

2017.03.21.

  • 출처

    본인 블로그 시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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