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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위진남북조시대의 인물소개좀요
ngs3**** 조회수 3,870 작성일2008.04.14

위진남북조시대의 어디나라 이름 서론 본론 결론 이거지켜서 답변좀해주세요 (A4한바닥정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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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晋南北朝의 인물중 서예가(書藝家) 를 알려드립니다.
 

위진남북조는 각종의 서체가 다양하게 발전한 만큼 서예가도 무척 많다.  먼저 魏나라의 서예가로는 위기(衛覬)․종요(鍾繇)․호소(胡昭)․위탄(韋誕)등이 있으며 오나라에는 황상(皇象)과 소건(蘇建)등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종요이다

 

종요(151~230)의 자는 원상(元常)이고 영천장사(潁川長社, 지금의 河南省 長葛)사람이다.  명제(明帝, 위나라 두 번째  황제로 이름은 조예이고 재위기간은 227~239년이다.) 때 태부(太傅)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종태부(鍾太傅)라고도 부른다.  서법은 한나라의 조희(曺喜)․채옹(蔡邕)․유덕승(劉德昇)을 배워 예서와 해서 그리고 행서에도 뛰어났다. 

 

양 나라 원앙(袁昻)은 《고금서평(古今書評)》에서 말하길 “종요의 글씨는 뜻과 기운이 조밀하면서도 아름다워 마치 나는 기러기가 바다를 희롱하며 학이 춤추면서 하늘을 노니는 것 같고 행간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어서 실로 지나가기가 어렵다.(鍾繇書 意氣密麗, 若飛鴻戱海, 舞鶴遊天, 行間茂密, 實亦難過).”라고 하였다.  종요의 해서가 순박하면사도 고아한 맛이 있어 진나라의 해서와는 다른 의취가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종요의 <천계직표(薦季直表)>에 대하여 육행직(陸行直)은 “고고하고 순박하여 묘함을 넘어 입신의 경지에 들어갔으니 晋․唐 때와 같이 머리에 꽃을 꽂은 미녀의 자태는 없다(高古純樸, 超妙入神, 非若後人姸媚纖巧之態也).”라고 하였다.  지금 유전되고 있는 작품은 모두 각첩(刻帖)으로 모본(模本)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미 원래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시표(宣示表)>만은 어느 정도 고박한 맛을 지니고 있다.  이<선시표(宣示表)>는 왕희지가 임서한 것이기 때문에 왕희지의 서풍을 지니고 있지만 이른바 “초나라의 음으로 한나라것을 배웠다고 해서 초나라의 것이 없을 수 없다.” 라는 이치와 같다.  종요의 서법은 이처럼 왕희지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당시 종요와 이름을 나란히 하였던 호소(胡昭)에 대하여 장회관은 “호소의 글씨는 살찌고 종요의 글씨는 파리하다.”라고 하였다.

 

위탄(韋誕, 179~253)의 자는 중장(仲將)으로 각종 서체에 뛰어났으며 제서(題書)에 가장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사체서세(四體書勢)》에 의하면 “위나라 보물이나 그릇의 題銘은 모두  위탄의 글씨로 씌여졌다.”라고 하였다.

황상(皇象, 생졸년대 미상)의 자는 휴명(休明)으로 강도(江都, 지금의 江蘇省 揚州) 사람이다.  그는 전서와 예서를 잘썼으며 특히 장초에는 더욱 뛰어난 솜씨를 발휘 하였다.  필세는 침착하며 종횡으로 자연스러운 서풍을 가지고 있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급취장(急就章)>이 있는데 오늘날에는 각본(刻本)만이 전해진다.  <천발신참비(天發神讖碑)>또한 그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진의 서예가로는 위관(偉觀)․삭정(索靖)․육기(陸機)등이 있다.

위관(偉觀, 220~291)은 하동안읍(河東安邑, 지금의 山西省 夏縣)사람으로 위항(衛恒)의 아버지요 위기(衛覬)의 아들이다.  그와 삭정은 모두 처서로 유명하여 당시에  “일대이묘(一臺二妙)”라고 일컬어졌으며 작품으로는《순화각첩(淳化閣帖)》에 <돈수주민첩(頓首州民帖)>이 전해진다.

 

삭정(索靖, 261~303)은 돈황(敦煌, 지금의 甘肅省)사람으로 장지(張芝)누나의 손자이다.  그는 장초로 유명하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장지 초서의 법을 배워 형태를 달리하였다고 한다.  그의 초서는 “회오리 바람이 갑자기 불어오고 솔개가 살짝 날아가는 것 같다.”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출사송(出師頌)>과 <순화각첩(淳化閣帖)>에 <대요(戴妖) >와 <칠월(七月)>등의 각첩(閣帖)이 전해진다.

 

육기(陸機, 261~303)는 오군(吳郡, 지금의 江蘇省 蘇州)사람으로 장초를 잘썼다.   왕승건(王僧虔)은 그를 일러 “육기의 글씨는 오나라 선비의 글씨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의 서법이 강남 선비들 간에 유행하였던 필세와 풍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전해지는 묵적으로는 <평복첩(平服帖)>이 있는데 이것과 출토된 한․진(漢․晋)의 간독에 씌여진 초서와는 서법이 서로 같으나 후대에 유행된 각첩(閣帖)에 나오는 장초와는 서로 다르다.  그리고 왕희지의 초서와도 다른 면모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 당시 서진시대 초서의 진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글씨는 진나라 떄가 가장 잘썼으며 서예가도 역시 이 당시에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당시 문벌을 대표하는 집안은 모두 서법의 전통이 있었는대ㅔ 예를 들면 유(庾)․치(郗)․왕(王)․사(謝)씨 집안들이 이를 대표하는 가문으로 그들의 선조와 부자 또는 자손들이 모두 서예로 이름이 높았다.  그 중에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왕희지 부자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외에도 왕도(王導)․왕흡(王洽)․왕순(王珣)․왕회(王會)․왕휘지(王鰴之)․왕이(王痍)․유량(庾亮)․유역(庾懌)․유익(庾翼)․치감(郗鑒)․ 사상(謝尙)․사안(謝安)․환현(桓玄)․양희(揚羲)등이 있다.

왕순(王珣, 350~401)의 묵적으로는 <백원첩(伯遠帖)>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동기창(董基昌)은 “꺠끗하고 담백한 것이 동진시대의 서풍을 보는 듯하다.” 라고 하였다.  이 <백원첩(伯遠帖)>과 이왕(二王)의 서법을 비교해 볼 때 왕순의 것이 훨씬 더 고체에 가깝다.

 

왕휘지(王鰴之, 왕희지의 다섯쨰 아들)은 자는 자유(子猷)이고 묵적으로는 <신월첩(新月帖)>이 당나라의 모본(模本)인 <만세통천첩(萬歲通天帖)>에 전해지고 있다.

남북조의 서예가 중에서 먼저 남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宋나라의 양흔(羊欣), 공림(孔琳), 소사화(蕭思話), 범엽(范曄)등이 있는데 이들을 당시에 「사묘(四妙)」라고 일컬었다.

양흔(羊欣, 370~442)의 자는 경원(敬元)으로 왕헌지의 글씨를 배워 왕헌지 이후 제일 명필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 “왕헌지를 사면 양흔을 거져 얻을수 있으니 실망이 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남제(南齊)의 서예가로는 왕승건(王僧虔, 426~485)이 가장 유명한데 그는 왕희지의 4대손으로 지금<태자사인첩(太子舍人帖)>의 모본이 유전되고 있다.  양나라 에서는 소자운(蕭子雲, 487~549)이 가장 유명하다. 그는 종요와 왕희지의 글씨를 배웠으나 이를 조금 변형시켰다.  소연(蕭衍)은 그의 서법을 평하여 말하길 “필력이 굳세고 달리는 듯하며 손과 마음이 서로 통하고 있으니 기교로는 두도(杜度)를 능가하고 아름다움은 최실(崔實)보다 나으니 종요와 서로 달려 앞을 다툴 만하다(筆力勁駿, 心手相應, 巧逾杜度, 美過崔實, 當與元常幷驅爭先).”라고 하였다.  양나라의 서예가로는 왕승건 이외에도 소연(蕭衍), 도굉경(陶宏景, 혹은 弘景이라고도 한다) 등이 있다.

 

북조의 서예가로는 北魏初 최․노(崔․盧, 흔히 서예사에서 崔盧하고 한면 일반적으로 북위 초기 사람인 崔宏과 盧諶을 일컫는다.) 양대 가문의 식구 중에서 주로 많은 유명한 서예가가 배출되었다.  그들은 모두 종요와 위관의 서법을 숭상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최호(崔浩, ?~450 崔宏의 아들이다.)가 가장 유명하며 북위의 서법은 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최호보다 조금 뒤에 정도소(鄭道昭, ?~515)가 나와 산동에 있는 운봉상(雲峰山)의 여러 비석들을 썼는데 그중에서도<정의하비(鄭義下碑)>가 가장 유명하다.  북주(北周)에는 조문연(趙文淵, 또는 文深이라도도 하는데 이는 당나라의 諱를 위한 것이다.)이 있는데 지금 전하는<서악화산묘비(西嶽華山廟碑)>가 그의 글씨라고 한다.

 

이외에 남북조의 서예가로 이름이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고 작품만이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시평공조상기(始平公造象記)>는 주의장(朱義章)이 썼고, <손추생조상기(孫秋生造象記)>는 소현경(蕭顯慶)이 썼고, <석문명(石門銘)>은 왕원(王遠)이 썼고, <이중선비(李仲璇碑)>는 패의연(貝義淵)이 썼지만 그들의 이름은 모두 역사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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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유례 없는 혼란의 시기

220년 후한 멸망 이후 중국은 위, 촉, 오의 삼국으로 분열되었다가, 위의 신하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이 265년에 위를 멸망시키고 진 왕조를 열었다.

진(서 진)은 280년에 중국을 다시 통일했지만, 정권 다툼으로 인한 팔왕의 난(291-306)과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316년에 그 수도 낙양이 흉노에 함락되었다.

이후 북방 이민족들은 각각 흉노가 한, 서하, 북량, 갈이 후조, 선비는 전연, 후연, 남연, 서연, 서진, 남량, 강은 후진, 저는 전진, 후량 등의 왕조를 세웠다. 한족 왕조는 전량, 서량, 북연에 불과했다.
흉노가 팔왕의 난을 틈타 독자적인 행동을 개시한 304년부터 북위가 장강 이북 지역을 통일한 439년에 이르는 136년의 시기가 오호십육국, 즉 북방의 다섯 이민족들이 세운 왕조들을 중심으로 열여섯 왕조가 난립한 시대이다.

멸망한 진의 왕족 사마예가 강남의 건강에 도읍을 정하고 동진(317-420)을 건국했다. 동진은 420년에 장군 유유에 의해 멸망했고, 유유는 송 왕조(420-478)를 세웠다. 이후 제(479-501), 양(502-556), 진(557-589)이 그 뒤를 이었다.

같은 시기에 장강 이북 지역에서는 북위(398-534), 동위(534-550), 서위(535-556), 북제(550-577), 북주(557-581) 등의 왕조가 교체되었다.

220년 후한 멸망 이후 수나라가 589년에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약 370년의 시기를 위진남북조 시대라 한다.

장강 이북의 여러 왕조들과 장강 이남 지역의 여러 왕조들이 병립한 시기를 가리켜 특히 남북조 시대라 일컫기도 하며, 장강 이남 지역에 들어선 오, 동진, 송, 제, 양, 진의 여섯 왕조를 일컬어 특히 육조라 하기도 한다.


*지배계층의 세습 귀족화

위에서 보았듯 위진남북조 시대는 중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혼란의 시기였다.

통 일 제국이 무너지고 오랜 전란과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렸으며, 장강 이북 지역은 이민족 왕조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강남, 강북을 통틀어 왕조 교체도 무척 잦았다. 때문에 학문과 사상이 꽃을 피우기 힘든 시기였다고 볼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중국 문화, 사상의 암흑 시기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문화, 사상적으로 볼 때 이 시기에서 위진, 육조, 북위 정권 등이 중요하며, 노장 사상과 불교 사상이 유교를 대신하여 유력한 사상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육조의 문화적, 사상적 기풍은 지식인이자 관리의 신분을 가진 지배계층이 귀족화 되었다는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한대의 지식인·관료들은 유교적 교양과 덕행을 쌓아 지방관의 추천을 받은 뒤, 중앙 정부에 의해 관리로 임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결 국 시험을 통한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기 때문에 추천자의 주관적인 판단과 정실이 개입할 수 있었고, 지방관의 추천을 받고 관리가 된 사람이 자신을 추천해주었던 지방관의 자제를 추천해서 그 은혜를 갚거나, 이미 고관의 자리에 있는 사람의 자제를 추천하는 일이 잦았다.


*문벌귀족들이 이룩한 문화

특히 위나라에서 시행되어 서진으로까지 이어지고 나중에 북위 왕조에서도 채택한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예로 들 수 있다.

구품중정제는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 9등급으로 평가 기준을 나누어 인재를 추천, 발탁하는 관리임용제도였다.

인재 선발의 책임을 맡은 각 지역의 중정관은 현지 사정에 밝은 그 지역 출신이었고, 관할 지역 내의 인물에 대한 평판을 중시하여 인재를 추천했다.

숨은 인재를 발탁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좋은 제도인지도 모르지만, 중정관들이 점차 부패해 갔고, 지방 호족 출신들이 중정관을 차지하면서 호족의 자제들이 고위 관리가 되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일이 여러 세기에 걸쳐 계속되면, 관리를 배출한 집안만 계속해서 관리를 배출할 수 있게 된다.

고위 관리를 배출한 집안에서 역시 고위 관리가 배출될 가능성이 높아지며, 낮은 지위의 관리를 배출한 집안이나 한 번도 관리를 배출하지 못한 집안은 계속해서 그런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고위 관리를 대대로 배출한 이른바 명문(名門), 명족(名族)과 그렇지 못한 한문(寒門)이 고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관리의 신분이 세습화, 귀족화 된다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육조 사회의 문화와 사상은 세습화된 지식인·관료, 즉 문벌귀족들의 문화와 사상이었다.


참고: 피지배민족인 한족과 지배민족인 이민족 사이의 관계에 비중을 두어, 오호, 북조, 수당(隋唐) 시대를 호한(胡漢) 체제로 파악하기도 한다. 호는 북방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2008.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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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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