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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고려와 조선의 왕호 명칭
cyan**** 조회수 2,296 작성일2008.12.30

 고려시대에는 폐하라고 하고 조선시대에는 왜 전하라고 했죠?

 조선에서 폐하라고 불러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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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몽골간섭기 까지는 페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몽고의 간섭을 받으면서 관제가 격하되죠.

 

몽골간섭기 이전의 고려는 수도를 황도라고 부렀으며, 폐하나 태자(왕의 후계자가 아닌 왕자들 중에도 태자가 있었습니다. 왕의 후계자에 관해서는 지에서 왕태자라고 쓰고있죠.)라는 말을 쓰고, 짐이라는 말을 썼으며, 제후들을 두며 묘호를 사용했지만  몽골간섭기때 부터는 왕은 전하, 태자는 세자라고 불렀으며 묘호도 쓰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고려사 광종 경신 11년 기사를 보면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로 각각 고치었다.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인 진삼국사표를 보면 인종을 성상폐하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또, 명종 24년 12월 기사를 보면

 

12월 기미일에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요사이 천변이 많이 나타나니 짐작컨대 이것은 하늘이 폐하를 경고하는 뜻인가 봅니다. 폐하께서 마땅히 허물을 반성하시고 덕을 닦아서 하늘의 경고에 보답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재화가 또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두려워서 사방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신명에게 기도를 하게 하였다.

라고 구체적으로 폐하라는 용례를 찾을 수 있죠.

 

또, 고려사에 보면 왕이 임명한 후계자는 하나 같이 태자(지에서는 왕태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몇개를 올려보면

 

현종 계해 14년 여름 4월 경자일에 거란이 좌산기상시 무백(武白)과 야율극공(耶律克恭) 등을 파견하여 왕태자 흠을 보국대 장군 검교태사, 수태보 겸 시중, 고려국공으로 책봉하였다.

 

문종 계사 7년 11월 기축일에 왕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서경에 이르기를 임금(一人)이 아주 훌륭하면 온 나라 풍속이 발라진다고 하였다. 태자(太子)는 국가의 근본인바 후계자를 정함에 있어서 적서(嫡庶)의 차별을 가리는 것은 나라의 정통을 소중히 여기고 민심을 통일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국가를 가진 자에게는 이 일보다 더 긴급한 일이 없으니 연덕 궁비(延德宮妃)의 맏아들 휴(烋)의 이름을 훈(勳)으로 고쳐 태자를 삼게 하라!”

 

또, 고려사 열전 3, 4 권을 보면 종실에 대해 담고 있는데 그 설명을 보면

 

고려 왕조에서는 종실(宗室) 중 촌수가 가깝고 또 존속친에 속한 자를 공(公)으로 봉하고 그 다음을 후(侯)로 봉하였으며 먼 친척은 백(伯)으로 봉하였고 어린 사람은 사도(司徒), 사공(司空)으로 봉하였는바 총칭하여 제왕(諸王)이라고 불렀으며 모두 다 사무를 맡지 않았으니 이것은 친척들을 친애하는 도의를 지킨 까닭이었다.

 

라고 전하며 뒤에 평양공, 낙랑후, 개성후, 금관후, 변한후, 조선공, 부여후 등의 구체적인 예를 찾을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왕의 후계자를 나타내는 태자 외에도 그냥 왕의 아들로서 태자라고 불린 예들도 많이 있습니다. 묘호역시 사용했는데 묘호란 태조, 태종 같은 것을 말합니다. 몽골간섭기 이후에는 거의 찾을 수 없죠.

 

위에서 보이는 고려는 폐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사실상의 황제국이었지만 몽골간섭기때부터는 전하, 세자 등의 명칭을  씁니다.

구체적인 예를 찾아보자면

 

우왕때의 기사에

 

전하도 그의 뜻을 계승하여 매년 조공하는 예물을 한결같이 황제의 지시대로 보내었으므로 특별히 현릉에게는 시호를 주고 전하의 작위를 봉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종묘 사직의 복이며 또 전하의 성덕입니다

 

전하는 특히 회군의 명령을 내려 전국의 기대에 부합되게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우와 최영은 이를 듣지 않았다

 

라고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세자의 예는 충렬왕 17년 기사에

 

2월 정해일에 세자가 장군 오인영을 시켜 황제에게
“합단이 북계의 여러 성들을 함락하였다”고 보고하였더니 황제가 묻기를
“그대의 나라는 당나라 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으되 오히려 이기지 못한 나라요 또 우리 왕조가 창건된 초기에 귀순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왕조에서 정벌했으나 역시 쉽사리 이기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 조그마한 도적을 왜 그렇게도 무서워하는가?”라고 하니 오인영이 대답하기를
“옛날과 지금이 다르며 나라의 융성과 쇠약이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더니 황제는 야습전(夜襲戰)을 하라고 일러 주었다.

 

12월 기묘일에 상장군 유비, 장군 허평(許評)을 원나라에 보내 세자를 돌려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즉, 몽골의 간섭을 경계로 폐하와 전하라는 왕을 부르는 품계가 갈리는 거죠.

 

나중에 공민왕의 개혁때 일시 관제가 복구되지만 다시 관제의 격이 낮춰지고,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조선은 명에 조공할것을 자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후에도 관제가 중국에 비해서 낮아지게 되었는데요. 그래도 조선시대때 부터는 조와 종이라는 왕의 호칭을 사용할 수 있어서 조선의 위신을 바로 세울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조선말에 고종이 조선이 주주국임을 선포하고 대한제국을 세우면서 저신을 황제라 하고 폐하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죠.   

200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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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이 황제를 부를때 폐하라고 표현합니다.

 

전하는 왕을 부를때 쓰는 말이고요.

 

고려는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였기에 폐하라는 표현이 가능하지만

조선은 왕이 다스리던 나라였기에 전하라는 표현뿐이 못한거죠

 

 

200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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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그 영향권에 있는 제후국들은 그 연호를 같이 사용합니다. 따라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냐 마느냐를 가지고 황제국가 인가 제후국가 인가를 정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초기에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태자칭호가 세자로 바뀐것은 고려초기 입니다. 처음에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황제국가임을 내세웠지만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면서부터 사실상 황제국임을 포기 했습니다.

 

광종은 고려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들과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확립, 국가의 재정 기반 안정을 위한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런데 광종은 950년에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의식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951년에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후주와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주체성을 살리기 위해 연호를 다시 정하여 준풍이라 하였다가(960년 - 963년), 송나라와 국교를 연 후에는 송나라의 연호인 "건덕을 사용하였습니다(963년 - 968년).

그러나 그때까지도 왕은 폐하. 세자는 태자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그후 원나라에게 패하고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낮추게 됩니다.그래서 전하는 고려 충렬왕때부터 왕에게 썻던말입니다.

 

그후 원나라영향을 받아 계솓해서 전하와 세자로 사용되다가 태조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개창됩니다..조선시대에는 한번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적이 없습니다. 사대교린정책을 외교의 방향으로 정한 조선은 고려말부터 정해진 전하와 세자로 호칭되면서 자주국임을 포기합니다.따라서 조선시대에는 폐하나 태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말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고종황제는 광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때 순종황제가 태자로 책봉되고, 나머지 왕자들은 왕이됩니다. 영친왕, 의친왕같은 분들입니다.

200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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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건국당시 중원에는 마땅한 패자가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려건국당시 태조왕건이 원유관을 썻다는 그림이 발견되면서 고려는 건국당시부터 황제국을 지향했습니다.

폐하와 전하의 차이는 바로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폐하는 황실에서 사용하는호칭으로 황제를 가르키는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사대의 예로 명국을 섬기는나라로 형식상 중국의 속국이였습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왕국에 국왕을 부를때 전하라고 합니다.

조선은 일반적인 왕국임으로 전하라고 부른것입니다.

 

폐하라는 호칭은 삼국시대부터 계속사용되었습니다.

백제,고구려,신라도 자신의 왕을 부를때 폐하라고 불렀습니다.

다만 백제는 황제,고구려는 태왕, 신라는 대왕등 독창적인 왕호가 등장하기도 하다가 신라는 후대에 당에 사대적인 외교를 보입니다. 물론 발해도 황제국이니 황제폐하라고 불렀겠죠..

 

말했듯이 고려건국당시 중원에 크게 패자가없었으므로 고려건국당시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황제국체제를 지향합니다.

 

고려광종때 개경을 황도로 고치고 서경을 서도라 고친것도 이와같습니다.

그리고 광덕,준풍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다가 형식상으로 송나라연호를 사용하기도 하고 경종등극후 태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연호는 성종이후로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후 문종이후로 보면 대량후,익양공등 봉군제가 아닌 봉작제를 사용하였고 고려의 수도를 황도라 불렀으며 송나라 사신이 쓴 고려도경에 보면 고려의 궁까지 들어가는데 5개의 문을 통과해야했다고하는데.. 조선은 3개의 문입니다. 3개는 왕이고 5개는 황제국체제에서 가능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가 세가가 아닌 본기로 기록된점.. 공식적인 문서에 성상폐하,폐하,태자 이런문구가 많이 보이고 이규보가 동방의천자라고 한점. 제왕운기에 금나라황제가 고려국황제에게 아뢰다라는 문구가 나올정도로

고려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완전한 황제국은 아니지만 주변국으로 부터까지 황제국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몽고제국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호라즘에 이어 서유럽까지 유린한후 고려에 천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몽고사신이 고려국경에서 죽은것을 빌미로 침공후 35년후 고려는 개경환도로 항복합니다.

처음에는 관섭이없었으나 충렬왕때부터 이모든 황실호칭이 철폐되고 조선시대에 사용된 왕실호칭이 사용된것입니다.

이후 고종황제가 칭제하기전까지는 단한번도 칭제한적이없습니다.

충렬왕부터 왕을 전하,태자는 세자로 바끼고 마마라는 호칭이 생겨났으며 옹주라는 말도 이때 생겨났습니다.

 

쉽게 말해서 918에 건국된 고려가 300년가까이 황제국 체제를 지향했다는것입니다.

918~1270년이 황제국인 시기고 이후 1270~1392년까지는 왕국으로 강등된 시기입니다.

당연히 조선건국당시 중국에대한 사대정책을 썻으니 황제라는 왕호를 사용할수없었던것입니다.

200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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