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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나라는언제'폐하'에서'전하'로바뀌었나요?
ansa**** 조회수 1,060 작성일200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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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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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간섭기때 부터입니다.

 

그 전의 고려는 수도를 황도라고 부렀으며, 폐하나 태자(왕의 후계자가 아닌 왕자들 중에도 태자가 있었습니다. 왕의 후계자에 관해서는 지에서 왕태자라고 쓰고있죠.)라는 말을 쓰고, 짐이라는 말을 썼으며, 제후들을 두며 묘호를 사용했지만  몽골간섭기때 부터는 왕은 전하, 태자는 세자라고 불렀으며 묘호도 쓰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고려사 광종 경신 11년 기사를 보면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서경(西京)을 서도(西都)로 각각 고치었다.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인 진삼국사표를 보면 인종을 성상폐하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또, 명종 24년 12월 기사를 보면

 

12월 기미일에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요사이 천변이 많이 나타나니 짐작컨대 이것은 하늘이 폐하를 경고하는 뜻인가 봅니다. 폐하께서 마땅히 허물을 반성하시고 덕을 닦아서 하늘의 경고에 보답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재화가 또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두려워서 사방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신명에게 기도를 하게 하였다.

라고 구체적으로 폐하라는 용례를 찾을 수 있죠.

 

또, 고려사에 보면 왕이 임명한 후계자는 하나 같이 태자(지에서는 왕태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몇개를 올려보면

 

현종 계해 14년 여름 4월 경자일에 거란이 좌산기상시 무백(武白)과 야율극공(耶律克恭) 등을 파견하여 왕태자 흠을 보국대 장군 검교태사, 수태보 겸 시중, 고려국공으로 책봉하였다.

 

문종 계사 7년 11월 기축일에 왕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서경에 이르기를 임금(一人)이 아주 훌륭하면 온 나라 풍속이 발라진다고 하였다. 태자(太子)는 국가의 근본인바 후계자를 정함에 있어서 적서(嫡庶)의 차별을 가리는 것은 나라의 정통을 소중히 여기고 민심을 통일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 국가를 가진 자에게는 이 일보다 더 긴급한 일이 없으니 연덕 궁비(延德宮妃)의 맏아들 휴(烋)의 이름을 훈(勳)으로 고쳐 태자를 삼게 하라!”

 

또, 고려사 열전 3, 4 권을 보면 종실에 대해 담고 있는데 그 설명을 보면

 

고려 왕조에서는 종실(宗室) 중 촌수가 가깝고 또 존속친에 속한 자를 공(公)으로 봉하고 그 다음을 후(侯)로 봉하였으며 먼 친척은 백(伯)으로 봉하였고 어린 사람은 사도(司徒), 사공(司空)으로 봉하였는바 총칭하여 제왕(諸王)이라고 불렀으며 모두 다 사무를 맡지 않았으니 이것은 친척들을 친애하는 도의를 지킨 까닭이었다.

 

라고 전하며 뒤에 평양공, 낙랑후, 개성후, 금관후, 변한후, 조선공, 부여후 등의 구체적인 예를 찾을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왕의 후계자를 나타내는 태자 외에도 그냥 왕의 아들로서 태자라고 불린 예들도 많이 있습니다. 묘호역시 사용했는데 묘호란 태조, 태종 같은 것을 말합니다. 몽골간섭기 이후에는 거의 찾을 수 없죠.

 

위에서 보이는 고려는 폐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사실상의 황제국이었지만 몽골간섭기때부터는 전하, 세자 등의 명칭을  씁니다.

구체적인 예를 찾아보자면

 

우왕때의 기사에

 

전하도 그의 뜻을 계승하여 매년 조공하는 예물을 한결같이 황제의 지시대로 보내었으므로 특별히 현릉에게는 시호를 주고 전하의 작위를 봉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종묘 사직의 복이며 또 전하의 성덕입니다

 

전하는 특히 회군의 명령을 내려 전국의 기대에 부합되게 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우와 최영은 이를 듣지 않았다

 

라고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세자의 예는 충렬왕 17년 기사에

 

2월 정해일에 세자가 장군 오인영을 시켜 황제에게
“합단이 북계의 여러 성들을 함락하였다”고 보고하였더니 황제가 묻기를
“그대의 나라는 당나라 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으되 오히려 이기지 못한 나라요 또 우리 왕조가 창건된 초기에 귀순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왕조에서 정벌했으나 역시 쉽사리 이기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 조그마한 도적을 왜 그렇게도 무서워하는가?”라고 하니 오인영이 대답하기를
“옛날과 지금이 다르며 나라의 융성과 쇠약이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더니 황제는 야습전(夜襲戰)을 하라고 일러 주었다.

 

12월 기묘일에 상장군 유비, 장군 허평(許評)을 원나라에 보내 세자를 돌려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즉, 몽골의 간섭을 경계로 폐하와 전하라는 왕을 부르는 품계가 갈리는 거죠.

200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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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부터입니다.

 

정확히 따지면 고려 후기 몽고의 속국이 된 후  부터이죠.

 

폐하는 황제,  전하는 왕을 의미하는 만로 고려 때 몽고의 침략을 받으면서

 

우리나라 황제가 왕으로 전락해, 황제가 왕으로 전하, 황태자가 왕세자로 저하가

 

된것이죠. 그리고 고려 조기 부터 몽고 침략 전 까지는 조,종으로 나뉘었는데

 

몽고 침략이후 왕 이라는 한 차례 내린 칭호를 붙인거죠.

 

그후 공민왕 이후에 다시 조,종이 붙어서 조선 말 까지 이어졌습니다.

 

참고로 '마마'라는 칭호도 몽고의 속국이 된후 나온 말입니다.

 

몽고에서 고려로 온 시녀들이 마마라는 말을 퍼트렸고 그후 마마가

왕과,왕비 등 왕족을 높이는 말이 된것입니다.

 

 

200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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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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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왕에 대한 호칭은 폐하에서 전하로 바뀐 시기는 고려말 몽고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 때입니다.

 그 때 몽고와 강화하여 몽고의 속국이 되었던 상태입니다.

 

원래는

왕 : 폐하 / 왕세자 : 전하

 

바뀐후

 

왕 : 전하/ 태자 : 저하

 

전하는 폐하보다 한단계낮음~~

200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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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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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원(몽고)의 지배를 받으면서 낮춰 불러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전하 로 바뀌게 됩니다 또 왕에 칭호 앞에 충이 잇는데요 이거는 충성을 맹세한다는 뜻이 담겨잇습니다

200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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