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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번트 증후군, 놀라운 기억력의 비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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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번트 증후군, 놀라운 기억력의 비밀은…

2013.09.16 18:00
[강석기의 과학카페 144] 내 안에 잠자는 서번트를 깨우는 법

지난 토요일 저녁 ‘스타킹’이라는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놀라운 장면을 봤다.

 

IQ 50인 14세 정신지체 소년이 너무나 능숙하게 피아노를 치는가 하면, 수십 년 전은 물론 수 년 뒤 특정 날짜를 얘기하면(예를 들어 2025년 9월 17일) 불과 몇 초 만에 수요일이라고 정확히 이야기 하는 모습이었다.

 

또 지하철노선도를 통째로 외워 진행자가 ‘4호선’ 하면 오이도에서 당고개까지 수십 개의 역 이름을 줄줄이 읊어댔다.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 소년이 보이는 특성은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데, 예전에 책에서 서번트 증후군 사례를 읽은 적은 있었지만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서번트 증후군을 처음 발표한 사람은 영국인 의사 랭던 다운 박사. 21번 염색체가 3개일 때 나타나는 다운 증후군의 발견자이기도 한 그는 1887년 런던의학회가 초청한 강연에서 30년 간 의사생활 동안 만난 특이한 환자 10명의 사례를 소개하고 이들을 ‘백치박식가(idiot savant)’라고 불렀다. 백치박식가라는, 말이 안 되는 신조어임에도 이렇게 이름지을 수밖에 없었던 건 이들이 정말 그랬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카메라로 불리는 유명한 자폐성 서번트 스티븐 윌트셔가 2005년 도쿄 전경을 그리는 모습. 항공기에 풍경을 본 뒤 며칠 동안 기억에 의지해 그림을 그린다. - Stephen Wiltshire 제공
살아있는 카메라로 불리는 유명한 자폐성 서번트 스티븐 윌트셔가 2005년 도쿄 전경을 그리는 모습. 항공기에 풍경을 본 뒤 며칠 동안 기억에 의지해 그림을 그린다. - Stephen Wiltshire 제공

기본적인 대화도 어려운 지능 수준임에도 한 환자는 에드워드 기번의 대작 ‘로마제국쇠망사’를 마치 눈 앞의 책을 읽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줄줄이 외우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사진 같은 놀라운 묘사력으로 그림을 그렸다. 어떤 사람은 천재적인 음악성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놀라운 계산능력을 보이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은 흉내내기도 어려운 능력을 정신지체인 사람들이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해내니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IQ가 40~70인데 백치는 IQ25 미만인 경우를 뜻하는 거라, 훗날 이를 빼고 대신 증후군을 붙여 ‘서번트 증후군’으로 부르게 됐다.


●남자가 6배 더 많아


2009년 ‘영국왕립학회철학회보B’는 서번트 증후군을 특집으로 다뤘다. 서번트 증후군의 권위자인 미국 위스콘신의대 대럴드 트레퍼트 교수는 개괄하는 글에서 서번트의 절반은 자폐 증상을 보이고 나머지 절반도 뇌질환이나 선천성 이상 등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자폐인 사람 가운데 10% 정도가 서번트 증후군을 보인다. 또 남녀비율을 보면 남자가 6배 더 많은데, 참고로 자폐증의 경우도 남자가 4배 더 많다.


서번트는 전반적인 지적 능력은 떨어지지만 특정한 좁은 영역에서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는데 5개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즉 음악과 미술, 달력 계산, 수학(소수 계산 등), 공간 지각력(길찾기 등)이 그것이다. 보통 한 사람이 여러 방면에서 탁월한데, 스타킹에 나온 소년도 음악과 달력 계산, 길찾기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인 킴 픽의 뇌(아래)는 좌우뇌를 연결하는 뇌량(corpus callosum)이 없다. 그 결과 좌뇌가 우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위의 보통 사람 뇌를 보면 그 차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다(가운데 좌우로 길쭉한 부분이 뇌량 단면이다). - Scientific American 제공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인 킴 픽의 뇌(아래)는 좌우뇌를 연결하는 뇌량(corpus callosum)이 없다. 그 결과 좌뇌가 우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위의 보통 사람 뇌를 보면 그 차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다(가운데 좌우로 길쭉한 부분이 뇌량 단면이다). - Scientific American 제공

서번트의 공통점은 경이로운 기억력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자폐성 서번트를 주인공으로 한 1988년 영화 ‘레인맨’의 모델이기도 한 킴 픽은 책 9000권을 통째로 외우고 있는데, 한 페이지를 읽는데 8~10초 정도 걸린다고 한다. 한 마디로 살아있는 스캐너인 셈이다.


트레퍼트 교수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여러 서번트의 뇌를 연구했는데 그 결과 이들이 공통적으로 좌뇌에 문제가 있거나 좌뇌와 우뇌의 연결이 끊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결과 좌뇌의 지배에서 벗어난 우뇌가 능력발휘를 한 결과가 서번트 증후군으로 나타난다는 것.

 

뇌의 좌우비대칭성은 잘 알려져 있는데 좌뇌는 주로 논리적, 언어적, 추상적 사고를 하는 반면 우뇌는 감각적, 구체적 사고를 한다. 즉 좌뇌가 진화상 늦게 발달했음에도 사람에 이르러 지배적인 뇌로 군림하면서 우리는 ‘이성의 동물’이 됐다는 말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따른다고 좌뇌는 우뇌보다 늦게 성숙한다고 한다. 따라서 그만큼 더 취약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태아의 뇌가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문제가 되는데, 이때 특히 좌뇌가 손상을 입는다. 그 결과 자폐아나 정신지체아가 태어날 수 있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성호르몬이므로 이런 현상은 남아에서 더 많이 일어나고 따라서 자폐의 남녀비율이 큰 차이가 나는 이유다.


●의미가 사라져야 디테일이 산다


좌뇌에 문제가 생겨 정신지체가 된 것이 서번트 능력을 갖게 했다는 주장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물론 직접적인 증명은 어렵지만 그럴 것임이 거의 확실한 정황증거가 있다. 바로 후천성 서번트의 존재다. 즉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이 사고나 질병, 치매로 좌뇌가 손상되면서 동시에 서번트 능력을 갖게 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발성치매인 ‘전측두엽성 치매’로 좌뇌가 점점 손상돼 추상적 사고 능력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동시에 미술이나 음악에서 놀라운 예술성을 보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물론 시간이 더 지나면 우뇌까지 손상되면서 이런 능력도 사라진다.


호주 시드니대 마음센터 앨런 스나이더 교수는 특집에 실린 논문에서 우리 안에 잠재돼 있는 서번트 기술을 끌어내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즉 우리는 누구나 스타킹에 나온 소년 같은 잠재력이 있지만 강력한 좌뇌의 억압으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 즉 좌뇌의 ‘가공된 의식적 기억’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우뇌의 ‘날 것인 무의식적 기억’에 접근할 권한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 접근하려면 문지기인 좌뇌를 따돌려야 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어림없는 일이라고.


그런데 경두개자기자극(TMS) 같은 외부 교란을 통해 일시적으로 문지기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경두개자기자극이란 두피에 전극을 대고 일정 주파수의 자기장을 줘 해당 뇌 부위의 활동이 떨어지게 하는 작용이다. 좌뇌 전두측두엽에 경두개자기자극을 주면 우뇌가 활성화되고 따라서 서번트 능력이 발휘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실험을 한 결과 11명 가운데 4명이 그림을 훨씬 더 잘 그렸고 다른 실험에서는 12명 가운데 10명이 화면에 흩어져 있는 조각들의 숫자를 더 정확히 추측했다.

 

피카소가 그린
피카소가 그린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초상' -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제공

이런 장치가 아니더라도 좌뇌가 평소 우뇌의 서번트 능력을 얼마나 억압하고 있는가를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인지심리학자인 베티 에드워즈 미국 LA 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는 1989년 출간해 100만 부가 넘게 팔린 책 ‘오른쪽 두뇌로 그림 그리기’에서 사람들이 그림을 잘 못 그리는 건 우뇌의 묘사력을 억제하는 좌뇌의 추상화 성향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좌뇌는 대상을 개념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디테일을 무시하고 도식화한다는 것. 예를 들어 손을 그릴 때 새끼손가락이 가려져 안 보이더라도 ‘사람 손가락은 다섯 개’라는 개념이 관찰을 무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이 다 보이는 손을 도식적으로 그린다는 것.

 

그렇다면 좌뇌를 무력화시키면 그림을 더 잘 그릴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 그렇다.

 

 

우뇌에 대한 좌뇌의 통제권을 약화시키면 누구나 어느 수준 이상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림 실력이 비슷한 두 사람(왼쪽 위아래 그림)에게 피카소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초상’을 한 사람은 똑바로, 한 사람은 뒤집어 놓고 모사하게 하면 후자가 훨씬 그림을 잘 그린다. 좌뇌가 뒤집어 놓은 그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해 도식화 시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 Drawing on the right side of the brain 제공
우뇌에 대한 좌뇌의 통제권을 약화시키면 누구나 어느 수준 이상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림 실력이 비슷한 두 사람(왼쪽 위아래 그림)에게 피카소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초상’을 한 사람은 똑바로, 한 사람은 뒤집어 놓고 모사하게 하면 후자가 훨씬 그림을 잘 그린다. 좌뇌가 뒤집어 놓은 그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해 도식화 시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 Drawing on the right side of the brain 제공

예를 들어 피카소의 데생화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초상’을 모사할 때 위아래를 뒤집어 놓고 그림을 그린 뒤 180도 돌려보면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 그려져 있을 것이다. 옆의 그림은 그림 실력이 비슷한 두 사람에게(왼쪽 그림을 보라) 한 사람(위 오른쪽)은 제대로 된 피카소의 그림을, 다른 사람(아래 오른쪽)는 뒤집어 놓은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그리게 한 것이다. 뒤집어 놓은 그림을 보고 그린 게 묘사력이 월등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에드워즈 교수는 의식적인 좌뇌를 ‘의식적으로’ 억누르는 훈련을 하면 누구나 어느 수준 이상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이처럼 훨씬 뛰어난 능력을 억압해 자신이 그런 능력이 있는 줄도 모르게 진화, 아니 퇴화한 것일까. 역시 대답은 간단하다. 이런 방향이 생존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즉 변화무쌍하고 엄청난 데이터를 생산해내는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를 스캐너처럼 받아들이는 것보다 추상화하고 패턴화하는 것이 현실을 개괄하고 미래를 예측하는데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예술가들은 좌뇌가 활동하면서도 우뇌가 끼를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어떤 식으로든 찾아낸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서번트 증후군인 사람들은 대부분 혼자서는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 그럼에도 이들의 서번트 능력을 계발하면 전반적인 삶의 질도 개선된다고 한다. 스타킹에 출연한 소년도 음악 선생님이 아이의 음악성을 알아보고 끈질기게 피아노 앞에 앉게 해 이처럼 재능이 꽃피게 했다고 한다. 트레퍼트 교수 역시 “재능을 훈련시켜라! 그러면 당신의 결함도 가려질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비단 서번트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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