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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수원화성에 대하여....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6,536 작성일2007.04.13

 제가 학교숙제로 수원화성에 대하여 조사를 해가야 하는데 제가 좀.......

수원화성에 대한 모든것을 좀 가르쳐 주세요.......

                  엉뚱한 답변은 해주시지 말고요...

                채택되신 분은 감사내공도 드려요.  그니까 잘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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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의 건축

화성의 건축은 크게 나누어서 둘로 살필 수 있습니다.
우선 말 그대로의 화성을 들 수 있고, 관념적이면서 행정 기구인 화성인데, 여기에는 화성 행궁이 들어감으로써 화성의 건축을 더욱 주목받게 하였습니다.
화성의 건축은 과거의 축성 제도를 보완한 절정기의 축성 건축이랄 수 있습니다. 또 행궁의 건축은 기능적이면서 아름답게 짓고자 했던 의도가 엿보인다고 할수 있죠. 자연의 지세를 그대로 활용하면서도 법식을 잃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행궁의 거의 모든 건물은 팔달산의 동쪽에 의지하므로 동쪽을 향할 수밖에 없었으나 객사만은 그 제도의 특성으로 남쪽을 향했습니다.
수준 높은 화성의 건축 이면에는 당시의 뛰어난 문화적 능력이 있어서 뒷받침했다. 그래서 건축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화성 축조

화성의 전체 길이는 본래 약 4000보로 계획했습니다.
여기서 보步의 단위를 살필 필요가 있는데 일보一步는 미터법으로 약 1.18미터에 해당합니다. 한 걸음이라는 의미가 되겠는데 사람의 한 걸음이 일 미터를 넘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음양오행을 중시한 조선 사회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좌우 한 걸음을합해서 일보라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계산하고 보니 오늘의 미터법과 당시의 일보가 합치됩니다.

 

-시설완벽

성문의 제도와 수문, 그리고 샛문에 해당하는 암문의 제도는 완벽합니다.
꼭 필요한 자리에 알맞은 크기를 구사하여 문을 냈다는 것은 곧, 화성이 사람을 위한 성으로서의 기능성을 갖추었다는 반증입니다.
그리고 봉돈, 포루, 각루 등의 시설은 어느 하나 복합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만큼 건축적 능력이 복합적인 힘을 갖추었던 것인거죠.
봉돈이면서 치성이고 숙직소의 역할을 겸하는 것과, 포루이면서 치성의 역할과 망루로서의 기능에다가 중화기를 은닉해두는 중첩된 면모를 보이는 것입니다.

 

-행궁건립

행궁의 제도는 본래 국왕의 임시 처소로 시작된다는 것 아시죠? 화성의 행궁은 국왕이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도성을 떠나 수원에 행차하게 되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으로 계획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수원을 다스리기 위한 관아로서의 기능도 겸했다. 그러므로 화성을 이해하는데 있어 행궁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설입니다.
실제로 화성의 축성이 이루어지기 전에 행궁이 건립되기 시작한 것도 이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정조 퇴위후 위한 배후도시 기능성

정조는 1804년, 갑자년이 되면 퇴위하고 수원으로 낙향하려 한다는 마음을 여러 사람에게 말했던 듯합니다.
갑자년이라는 육십갑자의 출발점에다 부모의 칠순을 맞이한다는 공통점,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세자의 나이가 15세가 된다는 우연의 일치가 정조로 하여금 퇴위를 생각하게 했을 겁니다. 퇴위한 다음에는 상왕으로서 정사를 보필하면서 부모에게 못다한 효도를 하려고 했을 것이죠. 자신이 고향으로 생각하는 수원에서 나름대로의 생을 정리하는 한편, 국가 운영의 밑거름이 되는 학문 연구 등의 뒷받침을 계획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수원은 조선 제2의 도시가 되면서 학문 연구의 장으로 각광 받았을 것이고, 조선 후기 실학의 실험장이 됐을 겁니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1800)은 수원의 몰락을 동반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사진들-

 

 

 

 

 

 

여기 까지이구요^^

http://www.cosguide.com/culture/hawsung/는 수원화성 홈페이지

입니다^^

꼭 채택 해주세요~

2007.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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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제 머리와 수원화성 홈페이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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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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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

 

  우리나라의 문화재중 가장 많이 찾아가고 애착을 느끼는 곳이다.

성벽주위에 공원 등 많은 녹지공간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주는 화성은  97.12  우리나라에서 5번째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수원시민들의 화성에 대한 사랑과 자긍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해마다 10월이면 화홍문화제가 열리며 정조의 어가행렬이 시가를 지나곤 한다. 98년도 금융기관 구조조정의 여파로 머리가 아플때면 나는 성벽을 따라 걷곤하였고 2백년전 정조의 큰 이상을 담고 건축된 화성은 무언의 격려를 나에게 보내주는 듯 하였다.

 


 

 조선의 마지막 현왕(賢王) 正祖


정조는 영조 28년(1752) 창경궁에서 태어났다.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맏아들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곧고 영특하여 일곱살에 세손에 책봉이 되나 불과 열살에 아버지의 쓰라린 죽음을 목격했고 영조승하후 1776년에 왕위에 오른다.
정조는 49세(1800)의 젊은 나이로 승하할때까지 불꽂같은 삶을 정치에 바쳐 재위 25년간은 찬란한 문예부흥기였고 어린날의 상처와 한을 감내하여 효성과 치적으로 승화시켰다.
극심한 당쟁의 결과였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겪은 그는 일차적인 혁신기구로 규장각을 설치하여 당파에 관계없이 개혁성향의 인재를 등용하였다. 혁신정치와 왕권강화는 그의정치적 야망이었고 심지어 집무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로 이름했을 정도였다.
수많은 치적을 남긴 정조는 시.서.화에 고루 능하여 파초도(보물 제743호) 국화도(보물 제744호)등을 남기고 있다.

(보물 제743호 정조대왕필파초도)

 

(보물제744호 정조대왕필국화도)


 효성이 지극한 그는 초라한 부친의 묘(양주 배봉산)를 생각하여 화성군 花山으로 이장하여 만년유택(萬年幽宅, 현륭원)을 정하고(훗날 정조 자신의 유언으로 부친의 곁에 묻혀 현재의 사적 제206호인 융건릉이 됨) 또 융릉에서 가까운 용주사(龍珠寺)를 크게 중수하여 원찰(願刹)로 삼고 당대의 화원 김홍도에게 불화를 그리게 하여 그 유명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과 후불탱화는 태어난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수원일대에서 그립고 존경할만한 이들의 문화적체취를 지금도 느낄수가 있는 것이다.

(융릉,건릉: 사적 제216호,  융릉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무덤이며,

건릉은 정조와 그의 부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능행이 잦은 정조는 개혁.효도.왕권강화등 다목적을 구상하여 자신의 재위 20주년과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맞아 1795년 윤2월9일부터 16일까지 화성에서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이 <을묘원행>은 애뜻한 효심과 왕조중흥의 자신감을 과시한 문화적 친위구테타였다.

당시 원행때의 세세한 기록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규장각)에 실려 있는데  이 책은 행차의 결과보고서로 6개월에 걸쳐 모두 8책으로 제작되어 있는데 가마를 제작한 장인의 이름과 근무일수, 춤을 춘 기생이름, 정조의 식사재료비 까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행사모습도 63페이지에 걸쳐 묘사되어 있는데그림과 기록속의 수행원과 말의 숫자까지 일치한다고 한다. 

(정리의궤:  정조의 모친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책)

2005 복원된 청계천(광교와 삼일교 사이)에는 정조반차도라는 작품이 눈을 끈다.

가로 30cm X 세로 30cm의 세라믹 자기타일 5,120장으로 구성되었다. <설명문을 옮긴다>

1795년(정조19년)에 어머니 혜경궁과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이하여 화성과 현륭원에 다녀와서 만든 8일간의 행차보고서이다. 1,779명의 인물과 779필의 말이 행진하는 모습을 담은 63쪽의 반차도는 김홍도 지휘 아래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 쟁쟁한 화원들이 합작으로 그린 작품으로 문화적 예술성이 매우 높다.

 

華城을 완성하였으나 미처 꿈을 다 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후 세도가들은 자기들 구미에 맞는 왕을 선택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으나 나라는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에 대하여 史家들은 독살설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은 이를 묘사한 글이다.

 

 성곽문화의 백미 : 華城(세계문화유산, 사적 제3호)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초기 군사건축물의 뛰어난 모범이다. 이는 세계유산위원회 집행이사회의 화성에 대한 평가의 일부이다.
 원래의 수원은 지금보다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산이었으나 정조가 生父인 장헌세자(속칭 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후에 융릉이 됨)이 옮겨옴에 따라 민가들을 현재의 팔달산 아래로 집단이전 시킴으로서 현재의 수원이 형성되었다.

 

화성은 정조가 부왕인 장조에 대한 효심과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정조 18년(1794) 1월에 착공하여 정조 20년(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성의 둘레는 5,744m , 면적은 130ha로 기능에 따라 48개의 시설물이 축조되었으며 주요시설 23개소에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한국고유의 누각을 설치하였다.  성의 모양은 가로로 길게 비스듬하여 봄의 버들잎 같으니 이것은 유천(柳川)의 지명에서 취하였고, 성의 이름을 華城이라 한 것은 장조의 원침이 있는 花山의 花」와 華」가 서로 통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이전에는 성벽을 돌로만 쌓았으나 화성에서 처음으로 벽돌을 사용하였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4-6m이며 평균 5m정도이며 순수한 성벽은 돌로 쌓았고 방어시설은 벽돌을 이용하였다. 성벽위의 담장모양의 여장(女墻)은 높이가 1-1.3m정도이며 모두 벽돌로 쌓았고 총구를 규칙적으로 뚫어놓았다.


화성의 특징과 우수성은 대체로 다음 3가지 정도로 간추려진다.


 1) 뛰어난 군사적 방어시설이다. 조선의 대부분의 성은 임진왜란때 대부분 무참히 허물어졌다.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후 저서 징비록에서 "성곽에는 반드시 옹성(甕城)과 치성(雉城)이 갖추어야 한다."고 거듭 역설하였다. 화성은 동서양 성곽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장점을 취하였으며, 공심돈(空心墩)과 현안(縣眼)은 화성에만 있는 시설물이다.


  (용어해설)
  (1) 옹성 : 성문에 접근한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성문밖에 한겹 더 성벽을 쌓아 이중으로 지키는 시설물로 모양이 항아리를 반으로 자른 것 같아 옹성이라 함.
  (2) 치성 : 성곽중 일부가 돌출한 구조로 성곽 아래의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수 있다.
  (3) 공심돈 : 원거리 상황을 볼수 있는 초소.
  (4) 현안 : 적대의 위쪽바닥에 眼口를 두고 외벽면을 수직으로 뚫어 성벽에 접근해 기어  오르는 적을 물리칠수 있게한 구조물.


 축성당시의 주요 군사시설물로는 문루(팔달문,화서문,장안문,창룡문) 4, 암문(暗門) 5, 수문(水門) 2, 적대(敵臺) 4, 공심돈(空心墩) 3, 봉돈(烽墩) 1, 포루(砲樓) 5, 장대(將臺) 2, 노대 2, 치성 9, 은구 2, 각루(角樓) 4, 포루(㉿樓) 5 등 총 48개가 있었고 성내에는 行宮도 마련하여 왕이 머물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수해와 전란으로 복원되지 못한 시설물도 7개(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개가 있어 41개 시설물이 남아있다.

(복원한 화성행궁)

 

2) 정치.경제.문화적인 기능도 강하다. 도시기반 시설인 4대문, 도로, 수문과 교량, 상가를 설치하고 생산기반 시설인 저수지와 둔전을 경영하여 세계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를 이루었다.


3) 건축사적 가치이다. 화성은 한국전통건축의 완성품으로 축성의 계획, 제도, 법식, 인력, 재료의 출처와 용도, 공사일지 등이 완벽하게 남아있다. 정조는 공사가 끝나자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케 하였으니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바로 그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축성을 감독.계획하였는데 당시 규장각 문신인 그는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삼았고, 특히 다산의 발명품인 활차와 거중기(요즘의 크레인으로 2만5천근의 무게를 들어올릴수 있었다.)가 큰 역할을 하여 공사기간을 종전의 5분의1로 단축시킬수 있었다. 성역공사는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가 지휘하였다.
役事에 참가한 인부에 대하여는 일체의 부역을 금하고 임금을 주어 부려 사기를 높혔다. 당시 동원된 인원, 연 동원일수, 사용된 벽돌의 수, 임금, 설계도 등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당시의 경제. 사회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건축실명제가 실시된 최초의 건축물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파손된 성곽의 복원이 가능하였던 것도「화성성역의궤」10권 10책에 근거함인데 이처럼 중요한 서적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지 않고 있음은 유감이다.

 

(화성성역의궤)


현재 팔달문과 동남각루 사이의 493m 구간은(실제 가보면 팔달문에서 동남각루 쪽으로 200m, 남포루쪽으로 100m가 정확함) 이미 민간건물이 들어서 복원치 못하였고, 행궁과 화령전은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장안공원에는 두개의 기념비가 있으니 1975년 5월에 시작되어 1979년 9월에 마친 복원사업의 완성을 기념하는 「華城復元淨化紀念碑」와 화성성역의궤의 비문을 요약하여 새긴 「華城紀蹟碑銘」이다.
기념비는 1979년 9월에 세워졌으며, 전면에는 박정희대통령의 題字가 있고 측면에는 擧重器와 火車의 全圖가 그리고 후면에는 최영희 선생의 글을 如初 김응현(金膺顯)선생이 쓴 비문이 있는데 건립당시 '수원성'이라 칭한 부문은 근래 모두 '화성'으로 바꿔놓은 흔적이 보인다.

기념비의 높이는 약 4.5m이며 흑색벽돌로 8각으로 쌓았는데 밋밋한 첨성대와 비슷한 모습이다. 화성기적비명은 1991.12에 수원시장이 건립하였고 높이는 약 2m이다.

 

 화성의 주요 시설물


1) 4 城門(팔달문,장안문,화서문,창룡문)
화성에는 4개의 城門이 있는데 북쪽에 장안문(長安門), 남쪽에 팔달문(八達門), 동쪽에 창룡문(蒼龍門), 서쪽에 화서문(華西門)이 있다. 그중 화성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팔달문(보물 제402호)과 장안문으로 규모도 크고 홍예위의 누(樓)가 2층의 팔작지붕으로 되어있어 화려하고 장중하며, 창룡문과 화서문은 아담한 단층이다.
네곳의 성문은 모두 안팎으로 아치형의 홍예문을 이루렀고 그위에는 火攻에 대비하여 물탱크를 준비하였는데 구멍이 5개있어 五星池라 하였다. 성문밖에는 좌우로 반원형의 옹성을 쌓고 좌우에 적대(敵臺)를 설치하여 분위기가 웅장하게 보인다. 옹성과 적대는 성문을 향해 오는 적의 측면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시설물이다.
 팔달문은 화성의 남문으로 옹성을 와양이 서울의 동대문과 비슷하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원래 적대가 있었으나 복원치 못하였다.
 장안문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며 수원시의 상징으로 정면 10칸 측면 5칸으로 우람한 인상을 주며 명칭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에서 연유된다.  96.5.5 화성축성 200주년을 맞아 복원된 적대에서 성문까지 보도육교를 설치하여 시민들이 자유로히 성문안을 관람하게 하였다. 문루의 높이는 13.5m, 정면너비 18m(5칸), 측면너비 9m(2칸)이며,  옹성은 전(塼)으로 쌓고 높이 6.6m, 바 둘레 67.5m 현안 16개가 설치되어 있다.


(장안문, 수원시의 상징)


또한 장안문과 창룡문은 왕이 원행(園幸)하는 연로(輦路)로서 한양성과의 거리는 약 40km이다. 그러나 팔달문이 보물급 문화재로 지정됨에 반하여 장안문과 창룡문은 한국전쟁 당시 훼손이 심하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화서문은 화성의 서문이다. 반원형의 옹성과 기타 시설규모가 동문인 창룡문과 유사하다.
공심돈은 화성에만 있는 원거리 초소로 성벽보다 높은 2층 망루로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은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어 있고, 동북공심돈은 벽을 따라 나선형 계단이 설치되어 일명 「소라각」이라 불리웠고 다양한 모양의 총구가 있는 독특한 외모를 지닌 시설물이다.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보물 제403호 )

 

2) 장대(將臺)
성안의 사령본부로 화성에는 2곳이 있다.  특히 鎭山인 팔달산(143m)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서장대는 총지휘본부로 일명 華城將臺라고도 하며 독특한 외양을 갖춘 2층 누각이다. 이곳에서는 성안은 물론 사방 100리의 관측이 가능하였고 뒤에 남아있는 서노대(弩臺)에서는 쇠뇌(여러개의 화살이 한꺼번에 나가는 활의 일종)를 발사하는 곳이다.



(서장대와 서노대)

 

 동장대는 일명 연무대라 하며 솟을삼문에 정면 5칸의 잘생긴 기와집으로 화성 시설물중 가장 위용이 있고 평상시에는 군사들을 훈련하고 지휘하는 곳이다. 연무대 성벽밖으로는 넓은 활터가 있다. 정조도 활쏘기를 즐겼다하며 지금은 궁술을 아끼는 수원시민들이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동장대에서 바라 본 동북공심돈)

 

200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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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ㆍ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8세기에 완공된 짧은 역사의 유산이지만 동서양의 군사시설이론을 잘 배합시킨 독특한 성으로서 방어적 기능이 뛰어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약 6km에 달하는 성벽안에는 4개의 성문이 있으며 모든 건조물이 각기 모양과 디자인이 다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등록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 (Ⅱ), (Ⅲ)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유산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2008.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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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위치는 충북 청주시 개신동에 있습니다. 그리고 백과사전에 있는 내용을 올릴게요;;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둘레 5,744m, 길이 5,520m, 높이 4.9m~6.2m이며, 면적은 18만 8048㎡이다. 수원성은 단순히 토축()된 읍성()이었으나, 조선 정조 때 성곽을 새로이 축조함으로써 이후로는 화성()이라 하였다. 성내에 어목헌지()·관청전지()·문루전지()·객사후지() 등의 못이 있었다.

화성이라 할 때는 그 안에 장안문(팔달문()·화홍문()·장악당(), 북동()·북서포루(西), 봉수당()·낙남헌(서장대(西)·방화수유정()·강무당()·북옹성()·북포루()·남암문()·적대()·남옹성(만석거(남장대()·영화정()·창룡문()·남공심돈(화서문(西)·남수문()·서북공심돈(西)·북암문()·동북노대()·서포루(西) 등을 갖추게 되었다.

정약용()의 성설()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채제공()을 중심으로 조심태() 등의 진력으로 이룬, 뛰어난 과학적인 구조물이다.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방법, 거중기() 등의 기계를 크게 활용하고 용재()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주무기로 하는 공용화기 사용의 방어구조 등은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화성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천봉하고 화산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의 전돌, 건조물의 기와 등이 독특한 방법으로 제작되어 있어 현재의 기술로 이를 재현하기 어려워 보수시 문제점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으며, 또한 수원화성은 철학적 논쟁 대신에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고 노력한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돌의 교축, 현안·누조의 고안, 거중기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당대학자들이 충분한 연구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하여 축성하였기 때문에 그 건축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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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가치: 사적 제 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그중 팔달문은 보물 제 402호,화성문은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수원화성 전체는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화성을 지은 유래 : 원래 수원은 무덤터가 제일 좋아 효심깊은 정조 대왕이 아버지의 무덤을 위해 모든 백성들을 이사하도록 하고 정착할곳 없는 백성들을 살수 있는 수원 화성을 만들었다.

위치 : 팔달산 아래. 팔달산아래는 당이 평탄하고 남쪽지방의 물자를 서울로 옮기기 좋은 곳이여서 지금의 대전 같은 역할을 했다.

특징 : 문들앞에는 둥그런 웅성이 있어서 적이 오는 지 볼수 있고 또 그 간격이 넓지 않아서 적이 성문을 열기 어렵게 설계됨 그리고 웅성위에는 사람이 오갈수 있게 되어 있음

화성의 성벽은 무조건 차례로 쌓은것이 아니고 제가각의 모서리에 맞게 설립하여 성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공심돈은 조선에서 화성에만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맞써 싸우고 또 기이한 구멍으로 끓는 물을 부어 적을 퇴치하기도 했다

성안에는 봉돈이 있어 굴뚝의 연기로 신호를 보낸다

화성은 적 몰래 드나들 암문이라는 것이 있다. 문이 성곽 보다 안에 있어서 찾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화성을 짓는대는 정약용이 거중기 유형거등 기구와 계획을 짜고 시설들은 박지원이나 박제 같은 학자들이 만들었다

=중요 볼거리

팔달문:여러가지 지혜를 볼수 있다

화서문:여러가지 지혜를 볼수있다

공심돈:조선에서 하나 밖에 없는 것이라 가치가 높다

방화 수류정:매우 아름다운 지붕을 볼수있다

용연:풍경이 아주 좋다

모양: 성벽이 길게 시가지를 싸고 있어 버들잎 모양을 닮았다.

*시가지란 시가(인가나 상가)룰 두루고 있는 지역

200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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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정조가 화성을 계획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정조는 억울하게 희생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남달리 컸습니다..

그래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이장한후 묘이름을 현륭원이라 했습니다..

효심이 깊은 정조는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화성 행차때 마다 화성에 머물며 행사를 거행하고 수십건의 민원을 처리해 주었습니다...

그러던중 정조는 화성으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우고 정조 18년 (1794년)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2년뒤인 1796년에 성을 완성하였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약용과 유형원이 설계를 하고 정약용이 발명한 신기재 거중기를 이용하여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쌓은 성입니다...

정조는 새로 쌓은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연도 아주 성대하게 베풀었고 화성 행차시에는 군복차림으로 말을 탄채 행렬을 이끌었습니다...

화성행렬에 동원된 군사는 정조가 직접 창설한 장용영의 군사였습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화성에서 열고 화성으로 자주 행차를 나선이유는 화성행차때 군복을 입고 말을 타면서 장용영의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개혁의지를 만천하에 보이고자 한것입니다..

.장용영의 외영이 화성에 설치된것은  장용영과 화성이 군제개혁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조는 수원 화성을 쌓으므로써 자신의 개혁정치를 완성 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2)정조와 노론파의 갈등원인과 선택한 정치적 방향은 무엇인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노론의 음모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당쟁에 의해서 희생을 당한것이지요...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을때 만 열살의 나이였지만 사건의 대강을 파악 하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즉위전까지 노론 벽파의 암살음모에 시달렸습니다..

노론 벽파는 정조가 즉위하면 자신들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일로 정조가 자신들에게 복수 할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정조의 외가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 과 작은 외할아버지   홍인한은 그당시 노론 벽파로  노론 벽파가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죽이는 것을 못본체 하였습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도 남편이 죽는 것을 외면 하였습니다.외면 하지 않으면 자신의 친정이 화를 당할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론과 정조의 사이는 극과 극을 달렸습니다...

정조는 왕으로 즉위하면서 남인과 서얼들을 등용하였습니다..

대표적인 남인 출신이 채제공과 정약용이었고 서얼출신으로는 박제가가 있습니다..

정조즉위후 핵심세력으로 남인과 성얼출신 학자들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당시 노론측에서 보면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지요... 남인과 서얼의 중용이라,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정조 즉위 후에도 노론의 정조 암살 계획은 계속 행하여 졌고 정조는 1800년 즉위 24년 되던해 죽었는데 노론의 암살설이 제기되는 이유입니다..

정조는 당파정치를 근절시키고 왕도정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 왕입니다.

정조가 좀더 오래살아 개혁정치를 완성 시켰으면 조선은 일본의 침략도 받지 않았을테고...

부강한 나라가 되어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는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것입니다..

정조는 조선시대 가장 위대한 개혁군주입니다

 

2008.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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