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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예수의 희생이 어떻게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될 수 있습니까?
adun**** 조회수 2,066 작성일2017.04.06


 

성경의 대답

 

예수의 희생은 죄와 죽음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마련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흘리신 피를 대속의 값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1:7; 베드로 전서 1:18, 19)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0:28, 개역한글판.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왜 필요했습니까?

 

첫 인간인 아담은 죄가 없이 완전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살 전망이 있었지만 하느님께 고의적으로 불순종하여 그 전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창세기 3:17-19) 그리고 후손들에게 죄라는 결함을 물려주었습니다. (로마서 5:12) 이런 이유로 성경에서는 아담이 자신과 후손들을 죄와 죽음의 종으로 팔았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7:14) 아담의 후손들은 불완전했기 때문에 아무도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도로 살 수 없었습니다.시편 49:7, 8.

 

하느님께서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아담의 후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지만 자신의 공의의 표준 때문에, 타당한 근거 없이 그들의 죄를 그냥 눈감아 주거나 용서해 주실 수 없었습니다. (시편 89:14; 로마서 3:23-26)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사랑하셔서, 인류의 죄를 용서하고 더 나아가 죄를 없애는 데 필요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셨습니다. (로마서 5:6-8) 그 법적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대속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성경에 사용된 대속이라는 개념에는 다음 세 가지 요소가 관련됩니다.

 

1. 대속은 무언가의 대가로 지불하는 값입니다.민수기 3:46, 47.

 

2. 대속의 값이 지불되면 구속 즉 해방이 이루어집니다.출애굽기 21:30.

 

3. 대속의 값은 구속하려는 대상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것 즉 그것을 정확히 덮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

 

이 세 가지 요소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에 적용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지불하는 값.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값을 치르고 사신 바 되었다고 알려 줍니다. (고린도 전서 6:20; 7:23) 그 값은 바로 예수의 피이며, 예수께서는 자신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민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서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요한 계시록 5:8, 9.

 

2. 해방. 예수의 대속 희생은 인류를 죄에서 석방 즉 해방시켜 줍니다.고린도 전서 1:30; 골로새서 1:14; 히브리서 9:15.

 

3. 동일한 가치를 지닌 것. 예수께서 희생으로 바치신 것은 아담이 잃어버린 것과 똑같은 가치를 지닌 것 즉 완전한 인간 생명이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21, 22, 45, 46)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5:19) 이 성구에서는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많은 죄인을 위한 대속의 값이 될 수 있는지 알려 줍니다. 사실 예수의 희생은 그 희생을 통해 유익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상응하는 대속물입니다.디모데 전서 2: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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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신
대속이란 있을수 없는겁니다.

자신이 지은 죄는 자신이 갚아야지
내가 돈이 많다고 다른사람에게 내 대신 교도소에 가게해서는 안되는겁니다.

대속이란 썩어빠진 구 시대의 유물입니다.

2017.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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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ki****
우주신 열심답변자
개신교 3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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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어서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는 거는 거짓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한 개를 따먹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하고 같이 된 거를 원죄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땀을 흘려가면서 일을 해야 먹고 살고, 여자는 해산할 때에 고통을 당해야 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3:16)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3:17)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세기 3:18)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세기 3:19)

 

원죄에 대한 속죄를 했으면 여자는 해산할 때에 고통을 당하지 않고 남자는 뒈지라고 고생을 하면서 일을 할 필요가 없어야지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은 후에도 여전히 남자는 땀을 흘려가면서 일을 해야 먹고 살고, 여자는 해산할 때에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원죄조차도 대속 못했습니다.

 

갓난 아기가 죽어도 지옥에 간다는 거는 원죄 때문이라는데, 선악과 한 개 따먹은 죄조차도 대속 못했다면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고 할 수 없지요.

 

그리고 불신지옥이라니까 죄를 대속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 천국은 꼬시는 말이고, 불신지옥은 겁주는 말입니다.

 

예수는 사기꾼 종교업자입니다. 일 안하고 헌금을 받아서 먹고 살겠다고 사기치다가 잡혀서 죽었습니다.

2017.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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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

# 구약에 이은 신약이라고 주장하는 연결 논리로써의 "공의 실현"


공의 실현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닫힌 구원의 길을 열었다는 주장으로, 그리스도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핵심인 것입니다.


이 설명은 성경 전체 구조를 설명하는 것과도 같으므로 최대한 축약하겠습니다.


1. '공의'란 창조자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생 사이'의 '일'에 대하여 '공평'하게 처리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2. 하나님이 만물과 사람을 창조한 것은 '자기가 좋기 위해서'가 먼저입니다. 그 일환으로 '자식을 얻기 위해서' 만물과 사람을 창조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었고, 또 하나님과 같은 '심성'의 상태로 만들었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사람이 본능적으로 '자식을 원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신'으로 '완전체'인데 사람은 흙으로 만든 피조물로 '불완전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식'을 얻기 위해서는 피조물인 '사람'이 '신'이 되는 결과를 도출해야 합니다.


4. '천사'는 선의 코드만 가지고 있고 사탄은 악의 코드만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과 사람은 선과 악의 코드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라는 피조물이 '자유 의지'가 없으면 '인형'에 불과하므로 '자유 의지'를 발현시킬 수 있도록 마음에 '선과 악'을 분별하도록 하였고, 그 선과 악에 대한 분별 기능을 발현시키기 위하여 '선악과'라는 금기 사항을 부여했습니다. (공의 실천의 일환입니다.)


선이나 악은 '상대성'을 가진 구분이므로 선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적으로 악이 존재해야 합니다. '신'이라는 조건은 하나님처럼 선악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악을 행하지 않고 선만 행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5. 그래서 선악을 모두 부여하고 부여한 것을 가동시키기 위해서 선악과라는 상대적 악을 부여한 것입니다.


6. 그런데 사람이 '불완전체'이므로 '필연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고 역시 당연한 귀결에 따라 신이 아니면 거할 수 없는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신이 되는 훈련장으로 '입소'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7. 세상에는 선의 코드를 가진 천사와 악의 코드를 가진 사탄이 활동하게 하고 뱀은 사람을 그 근원인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임무'를 띠게 되었고, 천사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신으로 복귀하는 것을 돕는 임무를 띠고 파견이 된 것입니다.


8. 그래서 이제 선악을 모두 마음에 가진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고 말 것인가?' 아니면 '마음에서 악을 온전히 이기고 신의 상태가 될 것인가?'를 선택하는 '한 판의 권투 경기'를 하기 위해 '링 위에'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9. 그런데 '사람이 나면서부터 악한 것만 계획한다'는 성경의 기록처럼 악에게 패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로 일단 노아만 남겨 놓고 인류를 흙으로 '원 위치'시킵니다. 다시 시작하기로 한 것입니다.


10. 그후에 하나님이 '이김'의 결과를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악을 이기는 방법인 '낮아짐과 비움'을 행하는 방법을 부여합니다. 그것이 모세율법입니다.


11. 하지만 사람들은 그 율법을 오히려 자기 배를 채우는 악의 수단으로 사용을 하면서 악에게 이길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한 '행위의 율법'인 모세율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습니다.


12. 이제 다시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관장자들을 힐책한 것입니다.


13.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준비한 '히든 카드', 곧 '예비된 작은 광명'으로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마음의 율법'을 부여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신이 되게 하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율법을 부여하는 것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따라서 살면 사람이 신이 될 수 있기는 한데 이것을 사람에게 부여하는 것은 '공의'라는 규칙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라는 규칙으로써의 대전제를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자기 맘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는 하나님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14.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낸 '공의'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이 먼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와서 이제 부여할 '마음의 법'을 따라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본'을 보이고 공의를 하나님 자신이 먼저 지키는 순서를 따릅니다. 그것이 육신으로 와서 '마음의 법'을 따라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악을 이기고 영이 사는 '시범'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그 법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로 따라가면 영이 살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공의 실현'이 되는 이유는 죽음에 대한 '철회'와, 살 수 있는 길의 '부여'라는 두 가지를 충족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결자해지'는 공의라는 하나님의 뜻을 수호하고, '정녕 죽으리라' 한 법을 철회하고 살 수 있는 방법인 '마음의 법'을 부여하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한 것입니다. 결국 그말은 "하나님의 공의도 지키면서 사람에게 신이 되는 방법도 부여하게 되었다."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중략....


위의 글은 성경의 모든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놓은 "마음의 율법"이라는 네이버 까페에 있습니다. 님의 질문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소개해 드립니다.^^

2017.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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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답변

우리가 생각하고 명상해야 할 정말 중요한 것이 예수님의 대속이 아닌가 합니다.

끊임없는 우리의 명상의 주제가 있다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십자가의 의미를 우리 각자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하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사람으로 준비될 것이락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모든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이 대속에 대한 참된 이해가 우리의 신앙에 큰 지표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더 깊이 알고 또 아는 그런 그리스도인으로 우리의 삶이 성장했음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십자가가 높이 들려져서 주님만으로 만족하며, 그분만을 높이는 일이 우리의 삶의 기쁨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대속을 이루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래의 글을 통해서 대속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보셨음 해서 옮겨왔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님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총제목: 십자가 대속의 참 의미


제1부:  꼭 십자가여야만 했을까요?



왜 십자가가 필요하게 되었을까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또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요? 무한한 지혜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인간을 구속하실 수 있는 다른 계획을 생각해내실 수 없으셨을까요?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도로 얻기 위하여서 다른 댓가를 마련하실 수는 없으셨는가 말입니다. 천사가 인류를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었을까요?


예수님께서 갈보리로 가신 것은 전혀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는 이 세상의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한 목적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사단 마귀와 싸우는 대우주적인 영적 전쟁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영적 전쟁은 십자가에서 최고도에 달하였었을 뿐 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아니했습니다.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무기는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혹시 인간이 자유 의지의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하게 될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은혜를 통하여 다시 구속할 것에 대한 계획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있었습니다.


십자가가 생긴 이유

십자가가 세워진 이유는 사단이 하늘에서 반역을 일으키고 전쟁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래 아름다운 그룹 천사 중 하나였습니다. 에스겔은 마귀의 타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청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 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28:13-15).


또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사단의 타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Lucifer, 루스벨)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라” (14:12-15).


위의 말씀들을 미루어 보아 그의 타락은 자아몰입에서 나오는 교만에서부터 비롯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을 비기면서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다른 천사들을 유혹하면서 하늘에서 반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천사들 중 삼 분의 일 정도를 미혹하는 데 성공한 사실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데, 요한 계시록 12장의 말씀이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꼬리가 (용의 꼬리 - 필자 주) 하늘 별 삼 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으로 던지더라...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12:4,7-9). 여기에서 미가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싸우는 장면에서 그리스도는 항상 미가엘 군장(임금 중 하나)으로 묘사되고 있음) 용은 말씀 그대로 사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단의 도전장

이 전쟁에서 사단이 인류를 유혹한 수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실과를 따 먹어도 괜찮다고 미혹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소홀히 해도 별문제가 없는 것이며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모든 실과들은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선악과 자체에 독이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고 우주의 조화와 질서를 성립하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존중성을 위하여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이 세상의 평화와 생명을 영원히 아름답고 질서 있게 보존할 수 있습니다. 법이 없는 사회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미혹하고 기만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마귀는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이라고 인류에게 이간하였습니다. 그 사실은 창세기 3장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사단은 아담과 하와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하고, 이것을 아는 하나님이 그것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시키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한 중상과 이간에 인류의 조상은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불신이 이 세상을 이러한 파멸로 몰고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다시 회복되어 에덴동산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분의 율법을 존중하여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악하여지고 불순종에 익숙하여졌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7).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사단의 이러한 참소들을 합리적이고도 공정한 방법으로 침묵시키셔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기적인 분이 아니고 인류의 평화와 영원한 행복을 원하시는 크신 사랑의 존재인 것을 증명해 주셔야만 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계명은 우주의 질서와 평화를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요, 그것을 무시하고 깨뜨리는 날에는 세상의 파멸과 슬픔이 온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응전, 십자가

바로 그러한 이유와 목적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속죄의 의미에 더하여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기적인 분이 아니라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참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하여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 버린 모든 인간들이 당신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율법은 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인류의 평화와 질서를 위하여 영원히 보존되어야 할 것을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결과가 어떠한지는 이 세상의 타락의 모습을 통하여서 지난 수천 년간 증명되어 온 바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에 하늘의 천사들과 거민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품성의 차이점을 너무도 명백하게 살펴볼 귀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사단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 것이며, 그의 주장들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를 온 우주가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인간들을 충동질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는 악랄한 마귀의 성품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그의 주장을 인정하는 자들이 없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악한 마귀의 본성과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품성의 큰 대조가 드러난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히 서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단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그는 영원히 패배자가 되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는 영원히 멸망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영원히 인류를 구원하는 표상이 된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를 십자가로 죽이려 했으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사랑을 통하여서 영원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제2부: 어린 예수와 십자가



죄가 시작되기 이전, 멀고 먼 태고 때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께서는 만약 인간이 불신과 교만의 죄에 빠진다면 이 지구를 자아추구의 이기주의의 멸망 속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구속의 협정을 맺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이 자아추구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추구하여 하늘 보좌에 앉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 깊이와 높이를 측량할 수 없는 십자가의 극적인 사랑의 표현을 죄짓지 않은 우주의 존재들에게 나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일에 그의 십자가를 지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들만의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사제나, 수도승, 성직자, 선교사, 교회 직원, 종교 지도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죄된 세상에서 배양된 깊은 자아본위적 사상을 버리고 빈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기를 싫어하는 씨는 결국 잃어버림을 당할 것이고, 땅속에 들어가 죽는 씨는 많은 열매를 얻을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 안에 바로 하늘 나라가 세워진 창조적 원칙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정부의 깃발은 바로 십자가이며 마귀가 하나님의 정부를 뒤엎기 위하여 십자가를 없애려 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서 벌어지는 선악간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전략은 십자가의 깃대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십니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십자가를 선택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만이 완전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의 독생자를 주시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그 길을, 인류를 위한 신성한 사랑으로, 따르기로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되신 것입니다(계 13:8, 참고).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 들어가든지 신성한 사랑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역사를 시작합니다. 죄에 대항하는 여러분과 나의 싸움은 창조주께서 하시는 똑같은 원칙에 근거하여서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어린 예수와 십자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의 인생을 통하여 보여주신 진리의 십자가는 깊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습니다. 비록 완전한 인간으로서 모든 종류의 시험을 당하셨지만 그의 마음은 죄 없으셨으며, 정결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놀라운 경이요, 사랑의 보고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이 세상의 모든 인간과의 다른 점입니다.


아기로서 태어나셨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가 하늘에 계셨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아기들처럼 태어나셔서 인간의 아기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는 목자들의 숭배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박사들의 방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큰 도시에 가보았던 운 좋은 아이처럼 시골 산 동네에 사는 친구들에게 하늘에서 천사들의 사령관이었던 때를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도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우리가 배웠던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라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눅 2: 40, 52).


예수님에 관한 신비는 바로 그의 태어나심에 있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시고 이 땅에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라나셔야 하시고, 죄 없이 사신 것은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태어나실 때에 그의 지식에는 어떠한 초자연적인 과거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하늘에 두고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아이가 12살이 되어 깊은 생각할 수 있는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장래의 일을 형성할 수 있는 어떠한 모형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유대 나라 명절이었던 유월절에 참석하였던 때는 12살 때였습니다. 처음으로 그는 유명한 사원들과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제사장들이 피 흘리는 희생 제물을 제단에 올려놓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어린 예수의 마음은 희생양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였습니다. 제사장도, 어느 누구도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재갈 물린 말처럼 묵묵히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의식을 행할 뿐이었습니다. 4000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짐승의 피를 바쳐왔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왜 이러한 일을 행합니까?”라고 물으면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신비로운 그 희생의식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 예수는 아마 “소나 염소의 피가 정말로 죄를 없앨 수 있을까?”하고 의아해하였을 것입니다.


어린 예수는 다른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잡담과 놀이를 하지 아니하고, 심지어는 부모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피를 뿌리는 그 장면이 그의 마음속 깊이 어른거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처음으로 짐승들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 마음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시기 전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이제 인간으로서도 무릎을 꿇고 깊은 심오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5-7).

“아버지여 당신에게는 이러한 짐승의 피가 필요 없나이다! 당신은 그 안에서 아무런 기쁨을 찾을 수 없으니, 그 이유는 이것들이 어떠한 인간의 죄도 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만드셨고, 내가 바로 그이오니 나는 줄 수 있는 몸이 있고, 나눌 수 있는 피가 있나이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아버지여.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게 하소서. 제가 세상 죄를 위하여 죽겠나이다. 제 피가 속죄제물이 되겠나이다. 제가 이사야가 말한 그 ‘고통받는 일꾼’이 되겠나이다. 저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상처받게 하시고, 멍들게 하시고, 채찍질 받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따르리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예수께서 구약의 표상적인 봉사를 제하여 버리시고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 세우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9,10).

영원 전에 미리 존재하였던 과거의 기억이 유월절 의식의 신비를 대신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이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평화의 협정”은 “그 두 사람 사이에” 있었으며 (스가랴 6:13),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삼아 세상의 죄를 씻기로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이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하신 그 계약을 기억해 내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더럽히지 않은 정결한 예수 마음은 유월절 의식을 통하여 본 상징들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9).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1).


“이것은 모두 비유이지...” 예수께서는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죄하고, 순결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누군가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여 잃어버린 인류를 대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의미 없이 계속되고 있는 무의미한 의식은 이제 극적인 마지막을 맞게 함으로 의식의 실제적인 의미가 거룩한 희생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박사들과 제사장들이 수 천년간의 의식을 통하여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보아왔던 상징을 단지 한번 봄으로서 12살짜리 어린 예수는 그 의미의 중심을 이해하였습니다. 그의 어린 마음은 강한 의지의 힘으로 감싸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 보려는 불쌍한 영혼들의 노력은 하나님의 은총의 자비 없이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그 공평이 없는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사 59:15,16)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14).

이 놀라운 사랑의 사업을 보세요! 그는 인간의 몸에 거하셨고, 영원 전의 모든 기억을 알지 못한 채 10년 동안 어린이로서, 단지 성경 말씀만 믿음으로써 사신 그리스도… 그는 영원 전 하늘의 사령관으로서 내리신 그 결정을 인간으로서도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시기를 선택하셨습니다.


2. 구원받을 수 있는 오직 한 길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 마음에 비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그 길, 또한 어린아이로서 옛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심하신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십자가)을 품든지, 이 세상 신(마귀)의 마음(자아숭배)을 품을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이고 결과는 오직 십자가의 길만이 부활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5).


두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강도가 졌던 그 십자가는 곧 우리들의 십자가입니다. 또한 갈보리에는 또 다른 세 번째의 십자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는 구원이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상의 또 다른 강도는 고통과 죽음 속에서도 그의 마음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반역적인 그의 정신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이 세상 신의 마음(자아숭배)을 선택하고 예수를 거절하고 저주하였습니다. 우리도 그 강도처럼 십자가의 사랑을 거절하고 그를 따라서 영원한 어둠으로 떨어질 것인가요?

우리의 거룩한 모본께서 보여주신 그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기에 쉽게 하십니다. 그의 십자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고 또한 기쁨으로 이것을 지게 하는 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3부: 십자가 대속의 참된 의미



우리는 베드로 전서 224절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어떻게 몸으로 타인의 죄를 질 수 있을까요?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의 경험을 이해하도록 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죄를 짓고 나면, 예를 들어서 거짓말을 하거나 물건을 훔치고 나면 어떠한 반응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되는가요?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며, 두려운죄책감이 마음을 사로잡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얼굴이 빨개지며 식은땀이 몸을 적시게 됩니다. 그리고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사라지게 됩니다.이러한 것이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나타나는 신체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그러한 것이 우리가 우리 죄를 우리의 몸으로 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들을 당신의 몸에 대신 지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십자가의 대속이란, 우리의 죄를 마치 예수님의 자신의 잘못이나 예수님 자신의 죄처럼 인정하여대신 전가시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의부채를 은행의 구좌 모양으로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넘겨 버리는 것 이상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의미는, 우리의 죄로 인한 결과와 심판을 대신 경험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러한대가를 다시 치러야 할 필요가 없도록 하셨다는 실제적인 맞바꿈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대하여 미리 예언한 말씀들 가운데 특히 시편 40편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합니다.

시편 4012절에서우리는 다음과 같은 부르짖음을 듣게 되는데, 그 부르짖음은 다름 아닌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고통에 대한 예언인 것을 보게 됩니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죄가 전혀 없으시고 한 번도 죄를 범해 본 적이 없으신구세주께서 나의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다고 말씀하고 계신 사실을 보세요! 다시 말해서 인류의 모든죄악들이 십자가 위에 달려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한꺼번에 전가되어 내리 누르는 형편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조금전에 생각해 보았듯이 우리가 죄를 범할 때 느끼는 죄책감과 같은 신체적인 반응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몸에 실제적으로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류들의 모든 죄를 지금 자신의 몸으로 짊어지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느끼는 절망감, 자비가 섞이지 않은 심판의 두려움과 그 죄책감의뼈아픔을 순결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갑자기 마음에 그리고 당신의 몸에 느끼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당하심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부르짖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것은 순교자의 부르짖음이 아니었습니다. 어느순교자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하여 죽어 가면서 그러한 외침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순교자들은 모두 다기쁨과 소망 속에서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다는 사실에 기뻐 찬미하면서화형대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그들이 받아야 할 죄의 결과를대신 받아 주시는 대속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한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된 경험이 없이 늘 아버지와하나이셨던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는 십자가에서 갑자기 하늘 아버지와 절연되는 느낌을 느끼신 것입니다. 죄는하나님과 그 인간과의 사이를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납하실 수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지신 예수께서 통렬하게 부르짖으신 이유는 죄가 예수님을 지옥 같은 어두운 심연의 절망으로 몰고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말씀으로 잘 알려진 이사야서 53장에서 우리는 더욱 명백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실로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당한다 하였노라” (4). 이 말씀에도 우리가 받을 죄의값을 예수께서 대신, 실재적으로 경험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말씀하여 주고 있지 않는가요? 예수께서 죄를 지신 것은 그 죄의 고통을 대신 경험하여 주신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를 대신 책임지기 위하여 전가시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또한이사야서 5312절 중반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보게 됩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범죄하여 죽어가는 인류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러, 대신 완전히 죽어 없어져버리더라도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기를 택하겠다는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한 사랑을 나타내어 준 것입니다. 이엄청난 사랑이 인류를 살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영원토록 연구와 경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바울은 예수께서우리를 대신하여서 죄 그 자체가 되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은 죄 그 자체가되셔서 형벌을 대신 받아주신 사실을 그렇게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그러한사실을 느끼셨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죄를 대신 몸에 지시는 경험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내 아버지여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탄원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아니, 하늘 그 자체와 영원히 분리되어 죽어버릴 가능성을 내다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고뇌의 아픔을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죄의 고통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를 기억해 봅시다. 예수께서는 신음하시다가 서서히 서서히 돌아가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십자가의양편 강도들은 금요일 저녁까지 아직 죽지 아니했기 때문에 속히 죽게 하려고 다리를 꺾었지만 예수께서는 벌써 운명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고는 갑자기 고개를 떨구시고 숨을거두셨다고 성경은 마지막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갑자기 파열되어 돌아가신증거입니다. 로마 군인이 죽었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하여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흘렀다고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장이 작동하기를 멈추고 파열되었기 때문에 혈구와 혈청이 나뉘어서 물과 피가따로 흘러내린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지시면서 그 괴로움과 죄의식을 더 이상 견디실 수가 없으셔서 예수님의심장은 그만 터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못박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바로 우리들의 죄가 찌르는 아픔들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죄악들이 바로 예수님을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4012절은 예수님의 고통의 장면을 그린 예언에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영어로는 “Therefore my heart failed me(그러므로 내 심장이 멈추었나이다-필자 번역)라고 번역하고 있어 예수께서 죄의 무게 때문에 심장이 멈추어 버린 표현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어린 양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일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엄청난 의미가 그 속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사실을 각자 개인의 마음속으로 믿고, 정말로 감사하며 눈물겹게받아들이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주께서 실제로 대신 져 주셨고 그래서 내가 죄에서자유를 얻고 그 정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위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아 심판당하시는 것으로 느끼셨습니다. 그것은 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은 떨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을위하여 죄를 대신 져 주시고 영원한 죽음을 받아야 할지, 아니면 그대를 포기하고 아름답고 고통이 없는하늘로 다시 올라가 버려야 할지를 선택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의 곁에서 주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감사치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는 인류들을 보여 주면서 예수님의 희생이 헛된 일이 될 것이요, 이제 이 대속의 죽음은 그를 영원히 멸망 당하게 만들 것이라는 절망적인 말들을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택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한 구속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감당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다시는 무덤 속에서 나와 부활하지 못할 것처럼 영원한 멸망의 운명을 느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도 더 이상 보이지 아니하는 깜깜한 영혼의 그늘 아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고민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생명과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 자신의영생과의 사이의 선택에서 촛불처럼 떨고 계셨습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믿음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는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소리치시며 고개를 떨구셨습니다. 선택은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너무나도 큰 사랑이 바로 여러분을 포기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차라리당신이 죽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분을 구하여 내시겠다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은이미 인류가 범죄하였을 때부터 결정해 놓으신 사실입니다. 그러한 주님을 하늘 아버지께서는 삼 일 만에부활해 내시었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아들을 영원한 구세주가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그리고 그분은 또한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과연 누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할 수가 있을까요?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 모든 풀들을 붓으로 만들어 기록하려 해도 그 사랑 다 기록할 수가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고 가슴 깊이 받아들여 감격해 하는 자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육신적인 고통 그 훨씬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것을이해할 때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려 가게 됩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12:32).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신앙합니다. 2000여 년을 거듭해 오면서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의 표상으로 삼고 믿으며 가르치며 전하여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고전2:2).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인류가 이렇게 은혜의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과 또한 주님의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고 살고 있는 것은 갈보리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토록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기에 합당한 구속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그 죄 값을 갚으신 주님의 고통을 상징합니다. 인류가 당하여야 할 처참하고도 자비가 섞이지 아니한 영원한 멸망의 죽음을, 우리를대신하여 지불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놀라운 희생을 나타냅니다. 십자가는 멸망 당하는 인간들을 그대로내버려 두실 수가 없어서 절규하시며 돌아오라고 탄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었습니다.


제4부: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사단의 기만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르긴 했으나 그것으로 아직 구속이 끝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마귀는 자기가 십자가를 없앨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그는 십자가의 능력과 의미를 없애 버리기 위하여 또 다른 작전을 세웠습니다. 십자가를 그리스도인들이믿더라도 십자가의 참뜻을 오해시켜 버리면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사단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주 교묘한 전략을 세웠는데, 그것은 오히려 아예 믿지않는 것보다 더 무서운 기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십자가를 없앨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의미를 자기의 주장에 맞게 색칠하여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사람들이 믿고 따르도록 만들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원래 인간들이 하나님의 율법은 꼭 순종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을 폐해도 큰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유혹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가 인류의 조상들을 기만한 방법이 아니었던가요! 그는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찬양하고 설교하며, 갈보리에 대하여 많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정적으로 십자가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찬송하며 설교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그 참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예배나 찬송은 사단에게 조금도 두려움이 되지않는 것입니다.


사단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졌다고가르치며 믿게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가 마치 인간의 불순종에 대한 좋은 핑계가 되도록믿게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는 한 하나님의 계명은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믿도록권합니다. 십자가를 믿는 한 죄를 계속 지어도 충분한 용서 속에 있으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믿고살도록 격려합니다. 사단은 갈보리의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에서 해방하였다고 믿게 만듭니다. 십자가가 마치 우리들을 죄로부터 구해낸 것이 아니라, 그 죄 가운데서구원을 준 것으로 믿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보혈이 우리를 죄에서부터 해방하여 낸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에 자유케 해 주신 양으로 생각케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그 죄에서부터 해방하여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십자가는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자로 만들어 주는 초자연적인능력이 있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브리서 9:14).

만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계명을 폐하신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예수께서 그 위에서 돌아가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율법을그렇게 쉽게 폐해 버리실 수 있으셨다면,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율법을 범한 인류들의 죄를 대신하여 그값을 치르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고, 죄에 대하여서하나님의 율법은 사망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들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다는사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폐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시고 높이신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냥쉽게 율법을 폐하여 버리실 수 있는 일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하여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셔야만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전케 세우신 사실을 알 수 있게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5:1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31). 사도 바울이 설명한 예수께서 십자가로 폐하셨다는 것은(2:14-16 참조)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의문의 율법 곧 유대인들이 지키던 모세의 율법 즉, 절기들이나 종교의식적인 절차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감추어 버리는 것

사람이 죽을 때 진정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상태로살게 된다는, 영혼은 절대로 완전히 죽지 않는다는 가르침은 큰 오류입니다. 단순히 비타민이 부족하여 어떤 병이 걸리는 것처럼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영혼 불멸적인 사상은 기독교회에 복잡한혼란을 만들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이 죄를 지을지라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고유혹하였습니다(2:17 참고). 지금도 사단은 우리에게 “너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3:4)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 어떤 인간도 결코 완전히 멸망 받을 수 없어. 영혼은 자연적으로불멸한다고.

이러한 사상이 이방인들의 종교의 기본사상이 되었으며 점차적으로기독교에 들어와 이제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이러한 생각이별 나쁜 결과를 끼친다고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여 보세요. 이 사상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라고 하신 로마서 58절의 말씀과 대치됩니다. 왜냐하면영혼불멸설 안에는 실제적인 “죽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사단이우리에게 이 사상을 통하여 속이려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겪으셔야만 하였던 경험은, 실제로 죽음이 존재하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릴 것도 없고, 포기해야 할 것도 없으며, 그래서 참을 만하였다고 사단이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희생은 어디에 있는가요? 희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 없는 쇼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노리는 것이며 십자가의 의미를 없애려는 것입니다. 나라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전쟁 용사들의 죽음보다도더 중요하지 않게 십자가를 만들어 버리는 사상이 바로 죽음이 없다는, 영혼 불멸의 사상입니다.

제5부: 십자가가 주는 진정한 의미


그리스도께서 경험한 십자가의 고통은 그 어떤 육체적 고통이나순교자들의 경험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어떠한 수치나, 억지로 믿어야만 하는 짐이 없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는 우리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악”이란 무엇인가요? 우리의 죄악은 우리로 하나님과 분리되게 만들었습니다. “오직 너희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하였습니다.(59:2)

죄는 우리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분리시키고 우리의 영혼을 빼앗기게 하였으며 담대함을 잃어버리게 하였습니다. 구주께서는 진정으로 우리들의 죄악을 자신에게 옮겨놓으셨습니다. 이의미는 죄악이 갖는 모든 죄책감과 외로움, 완전히 버림받은, 더이상 희망이 없이 멸망 받기만을 기다려야만 하는, 사형선고 받은 죄인의 처절함을 모두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시킨 요소들이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24).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그의 어깨에 우리의 짐을 지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그의 마음과 영혼 깊숙이 우리의 죄를 지셨습니다. 그의 모든 신경조직에, 그의 마음과 영혼에 우리의 죽음의 죄를 지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받으신 그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성경은 두 가지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보통말하는 죽음으로 “잔다”는 의미에서의 죽음 (11:11,13 참고)을 말하고, 두 번째 죽음은 완전한 죽음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1, 20:6, 21:8절에 나오는 이 두 번째죽음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며, 모든 빛과 즐거움과 생명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않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죽음은 바로 이 두 번째 죽음이었습니다. 영원히 이 땅과 온 우주에서 사라져 가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나거나창조함 받을 수 없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상태로 가버리는 죽음이었습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2:9). 예수께서는 인류 모두가 각기 당하여야 할 그 죽음을 맛보셨으므로, 그리스도께서당하신 죽음은 우리가 늙어서 죽는 그러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 한번은 죽어야 하기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만약 그들이 죄를 짓는다면받을 것이라고 말한 그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 지구에 그 동안 살았던 수 천억의 인류 개개인의 모든죄의 결과를 마음에 지시고 한 사람의 죄책감이 아니라 수 천억 명의 죄책감과 그들의 불안함과, 희망없음을 모두 느끼시며 영원한 죽음을 당하시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보세요. “그러므로 저가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2:17,18).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로부터완전히 가려졌습니다. 희망도, 빛도 두 번째 죽음 속에서완전히 사라졌으며, 다시 창조되는 부활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죄인의 죽음을 당하셨으므로 더 이상 부활을 기대하거나 용서를 바랄 수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부활의소망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면, 그는 모든 사람의 죽음을 맛보기에 부적합하였을 것이고, 진정으로 자신을 우리의 죄를 위하여 희생하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애원하실때에 그의 인성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8,39). 그리스도께서 마셨던 그 잔은 어떤 인간도 아직까지 맛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우주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소름 끼치도록 두렵고 절망적인 두 번째 죽음을 온전한 정신으로서경험하신 그리스도. 그의 손을 찌른 못도, 그의 뚫어진 발도, 매서운 채찍도 그를 죽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육체적 고통을거의 느끼실 수 없을 정도로 그 마음의 고통이 극심하셨습니다. 그를 죽인 것은 겟세마네부터 흘리시기시작한, 피땀 흘리는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훼방이 내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시편 69:20).

이 땅에서 사신 모든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부활에 관한 확신이 있으셨습니다. 그는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얼굴을 보실 수 있으셨으며, 이러한 영광의 햇빛 아래서 마음이 움츠러들수 있는 어떠한 큰 장벽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강도가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하였을때에도 예수께서는 즐거운 확신 속에서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곧 이러한 감흥은 사라지고 예수께서 마셔야 할 그 잔이 그의 몸과 마음을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급속한변화가 그에게 이르렀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믿겠노라.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내려오라 하며”(27:42, 40). 그리스도께서 마신그 쓴 잔은 이렇게 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들, 예수께서 구원하시려고 왔던 바로 그 사람들로 인하여 더욱쓰게 변하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러한 말씀을 들으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한 번 내려와 봐!” “하나님이 왜 너를구원해주지 않지?” 그리스도의 손은 넓게 벌려져 나무에 박혀 있었기에 귀를 막으실 수조차 없으셨습니다. 그저 기도할 수만 있었을 뿐. 승리의 기도가 아니라, 희망의 기도가 아니라, 버림받는 울부짖음의 기도뿐. 하늘은 닫혔고 어느 누구도 그를 돕는 손길을 뻗치지 않았습니다. “내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편 22:2).

여러 시간 동안 예수께서는 죄와 죽음의 짐과 싸우셨습니다. 구경꾼들의 잔인하게 모욕하는말이 들리기 시작한 조금 후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제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하나님과 자신과의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졌음의 절망을 선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의모욕은 독에 담겨 가시 돋친 화살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에 심한 고통을 일으켰으며,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어가는 예수의 영혼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제 완전한 죽음이 그리스도의 영혼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힌 손으로 자신의 눈물을 감출 수 없음을아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두움을 보내어 놀리는 군중들로부터 그의 얼굴을 숨기셨습니다. 오직 짙은암흑 속에서 들리는 것은 갈보리로부터 메아리치고 있었던 거의 사라져 가는 작은 신음뿐... 얼마나 잔인한인간들인가요? 또한 얼마나 자비로운 하나님이신가요? 아들의마지막 고통을 숨기시는 그 자상한 사랑. 천사들조차도 보기를 허락하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고통의 마지막장면들, 영원한 죽음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끝까지 그리스도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동정, 그러나 마지막 격정의 모습을 사람들로부터 숨기우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의 법과 구속과 사랑의 원칙을온 세상에 전하고 있었습니다. 희망은 영원히 사라졌지만, 사랑은견뎠습니다.

시편 22편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겪으셨던 그 고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믿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지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수난을 통과하실 때에 그 마음과 영혼은 오직 죽어 가는 인류를 위한 사랑으로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부활과 영생의 희망이 전혀 없었지만, 사랑은 그 영원한죽음을 끝까지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합니다. 순교자의 죽음이 아닌 죄인의 죽음을 택하시고, 희망 없는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 그의 얼굴을 돌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어떠함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마치면서




자가를 찬송합시다! 그것은우리의 구원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를 감사합시다! 그것은 우리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참 목적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 오늘날, 십자가에 대한 커다란 오해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뿌린 씨들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용서해 줄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진실된 그리스도인들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죄인들을 변화시키어 하늘에 있는 거룩한 천사들과 같이 살 수 있기에 안전한 자들로 만들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시는 것은 우리를 거룩하고깨끗한 자들로 만드시기 위하여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죄를 짓는 면허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이기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케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이것을 경험하는 자들이 바로 참된그리스도인들입니다. 

(www.sostv.net/index.php SOSTV 매거진 살아남는 이들 209호, 총제목: 십자가 대속의 참 의미 )



2017.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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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