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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장산곶매
rn**** 조회수 3,494 작성일2003.10.19
장산곶매라는 영화 집단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멤버가 누구였으며 어떤 일을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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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곶매는 80년대 영화운동을 주도하던 단체로서..

한마디로 <민중영화>를 만들던 독립영화단체이라고 해야겠죠..

전교조의 도움을 받아 제작되었다고한 ..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오! 꿈의 나라>(88년)와
한국 노동영화의 절정 이라는 <파업전야>(90년)를 만들었는데..
옛날 전경들이 관람을 막기위해 최루탄과 대학교정문을 장악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주류들임과 동시에 비제도권적인 영화를 지향했고..
많은 탄압을 받았다합니다.
사람들은 이를 보면서..
영화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현실을 고발하는 진보적 매체가 될 수 있음을 실감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겠죠..

장잔곶매에 몸 담으시던 감독님들의 인터뷰를 몇개 따왔습니다..
도우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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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장산곶매라는 이름의 영화집단이 있었다. 너무나 까마득한 옛날 옛적이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소위 1980년대라는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나?
구보씨조차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밀레니움을 바라보는 지금, 2002년의 월드컵 개최권을 따놓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천년왕국을 기다리는 지금,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야단법석을 떨던, 군사파쇼와 양키제국주의자들은 물러가라고 온몸을 던지고 심지어 불사르던(이건 단지 수사법이 아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여당도 대통령후보를 완전한 자유경선으로 선출하고, 경선에서 탈락한 후보가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탈당해도 무사하고, 심지어 전라도출신의 야당대통령후보가 몇 달째 지지율 1위를 차지하고 있어도 쿠데타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흑색선전조차 돌지 않는, 이런 태평성대를 살다보니 우째 그런 시절이 있었는가 의아스러울 따름이다.
혹시 그런 시절은 없었던 게 아닐까?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단지 끔찍한 우화에 불과한 건 아닐까? 사람들은 그런 무섭고도 황당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던가. 드라큘라나 에이리언 이야기를 영화로 보며 재미있어 하지 않는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나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를 읽으며 재미있어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 무섭고 황당한 이야기를. 그렇다고 드라큘라나 에이리언이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나 오즈의 마법사가 진짜로 있는 건 아닌 것처럼,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노태우도 사실은 없었던 게 아닐까.
구보씨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드라큘라나 에이리언이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나 오즈의 마법사보다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노태우의 이야기는 더 비현실적인 것 같다. 오히려 드라큘라나 에이리언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의 마법사가 있다면 믿을텐데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노태우가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말은 믿어지지 않는다. 너무나 무섭고 황당해서,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게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도 웬만해야 믿지. 이건 좀 너무 한다 싶으면, 너무 지나치게 무섭거나 황당하면, 심지어 너무나 재미있어도, 이상한 거라고 생각하잖아. 믿어지지가 않는 거지.
구보씨는 여러분께 한 번 권하고 싶다. 드라큘라나 에이리언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오즈 마법사를 다시 읽어보시라고. 그리고 박정희와 전두환과 노태우의 이야기를 또 읽어보시라고. 그리고 나서 그 중에 어느 것이 더 진짜 같은지 비교해보시기를.
각설하고, 아무튼 그 거짓말 같은 1980년대라는 시절에 그 이름도 괴상한 장산곶매라는 불법영화집단이 있었으니, 그들이 만들었던 영화는 어떤 영화들이었는가 하면, 그 괴상한 이름만큼이나 괴이하기 짝이 없는 영화들이었던 거디었던 거디다. [오 꿈의 나라]나 [파업전야]라는 영화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 [오 꿈의 나라]는 그 시절에 벌어졌던 광주라는 지방도시에서의 끔찍한 사건이 다 양키제국주의자들 때문 아니겠느냐는 뜬금없는 주장을 했다고 전해지며, [파업전야]는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이야말로 악마 같은 존재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몽키 스패너를 들고 몰려나가는 매우 폭력적인 마지막 장면으로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구현한 전설적인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어떻게 그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일이야. 더더욱 믿기 힘든 사실은 그런 영화를 보기 위해 꽤 많은 숫자의, 그것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경찰들의 제지를 무릅쓰고 몰려들었다는 거야. 도대체 믿을 수가 없어.
구보씨는 불과 10년 전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지금도 가끔 절망적인 사고가 터지곤 하지만 대체로는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나라에, 그런 비정상적인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희한하다. 그리고 그 영화들이, 장산곶매라는 이름의 영화집단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는 것도 희한하다. 사실은 없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감쪽같이.
구보씨가 왜 소위 1980년대라는 시대와 장산곶매라는 영화집단과 그들이 만들었다는 괴상한 제목의 영화들을 자꾸 들먹이며 귀신 씨나락 까먹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바로 우리가 그 장산곶매고 그 시절 그 괴이한 영화를 만든 장본인들이요, 라고 주장하며 두 명의 사나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짠! 이은과 장윤현. 한 사람은 프로듀서가 되고 한 사람은 감독이 되어 다시 영화 한 편을 찍었다는데, 그게 바로 요즘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접속]이라는 영화다. [접속]이라는 영화는 정말이지 장안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불법으로 복제한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리어카마다 요즘 그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였다는 사라 본의 [Lover's Concerto]가 거의 합법적으로 버젓이 정말이지 시끄러울 정도로 울려 퍼지고 있으니 말이다. 관객이 60만을 넘어섰고, 며칠전 대종상 수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하여 무려 6개 부문의 상을 휩쓸었다고도 한다.
이 사나이들은 유령이 아닌 게 확실해. 그들은 정말 있는 거야. 그렇다면 1980년대도 장산곶매도 꿈의 나라와 파업전야도 박정희와 전두환과 노태우도 있었던 거네. 빌어먹을.
구보씨는 그 두 사나이 중 감독으로 데뷔한 장윤현이란 사나이를 만났다.

구보: 당신이 정말 꿈의 나라와 파업전야를 만들었다는 장산곶매 중의 한 사람인가?

사람: 그렇다.

구보: 그 동안 뭐했나? 어디 있었는가?

사람: [오 꿈의 나라]는 이은씨 장동홍씨와 공동연출을 했었고, [파업전야]는 장동홍씨가 감독하고 이은씨가 제작하고 나는 감독과 제작책임자를 연결하는 일을 했었다. [파업전야] 제작이 마무리 될 무렵, 그러니까 1990년 초 헝가리로 영화수업을 위해 유학을 떠났었다.

구보: 왜 헝가리였나?

사람: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고, 헝가리국립영화학교에는 [메피스토][엠마와 부베의 사랑]이란 영화를 만든 이스트반 자보가 교수로 있었다.

구보: 가보니 어땠나?

사람: 아니었다. 사회주의는 이미 몰락했고, 이스트반 자보도 이미 그 학교를 떠나고 없었다.

구보: 유학에 실패했다는 말인가?

사람: 그런 셈이다. 졸업하지 않고 그냥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2년 정도 고독한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을 했다는 거, 그러면서 내 자신과 한국사회에 대해 객관적 성찰을 할 수 있었다는 거, 동구의 문화중심지인 부다페스트의 미술관을 돌며 그림 구경한 거, 이런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구보: 언제 돌아왔나?

사람: 1993년 초에 완전히 귀국해서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1995년부터 [접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구보: 2년이나 걸린 셈인데, 왜 하필 [접속]이었나? 며칠 전 [접속]을 보았다. 깔끔하고 무리가 없어 보였다.

사람: 무리가 많다.

구보: 아니, 전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깔끔하고 무리가 없는 게 문제라는 거다. 젊은 감독의 데뷔작이 그렇다는 건 매우 문제 있다고 본다. 더구나 장산곶매였던 감독이. 제작자의 말을 너무 잘 들은 건 아닌가? 하기는 제작자도 장산곶맨데. 자본가의 말을 잘 들어주는 착한 감독이 되고 싶은 건가?

사람: 헝가리에 다녀오고, 다시 90년대의 서울을 경험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영화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구보: 사이버공간을 매개로 한 멜로드라마가 신선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봤다. 그런데 20분이 넘어가면서 지루해졌다. 그 정도만 해도 될 이야기를 너무 오래했다. 삶이 그렇듯 사소한 감정의 굴곡만으로, 그렇듯 달콤한 센티멘털리즘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이상한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끝에 가서는 거의 지긋지긋했다. 많은 관객이 들었지만, 이 영화는 마케팅의 성공이지 작가의 성공은 아니다.

사람: 나는 상업영화의 구조를 선택했고, 거기에는 많은 책임이 따른다. 단편영화나 독립영화라면 다르게 찍었을 것이다.

구보: 당신은 원만한 성격을 가진 것 같다.

사람: 그렇다는 말을 듣는 편이다.

구보: 낙관적인 것 같다.

사람: 그런 편이다. 어떤 일이든 사람이 합리적으로 노력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보: 나는 당신에게 80년대의 장산곶매를, 사회주의나 혁명적 세계관을 기대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작가는 순응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사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구보: 아무튼 성공을 축하한다.

사람은 장윤현감독.
1967년생. 한양대 전기공학과 재학 중에 '소나기'라는 영화써클에 가담하여 [인재를 위하여]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곧이어 서울예전과 중앙대의 영화과 출신 젊은 영화인들과 함께 [오 꿈의 나라]를 만들면서 '장산곶매'라는 영화집단을 조직했다. [파업전야]라는 영화를 만들고 헝가리국립영화학교로 유학 갔다가 돌아와 처음 만든 상업영화가 바로 [접속]이다.
대종상 신인감독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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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 다룬 영화 ‘선택’홍기선 감독

영화는 단순한 오락물인가 아니면 사회적 메시지 전달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는가. 홍기선 감독은 영화가 둘의 경계쯤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업영화의 틀 속에서 영화의 메시지를 분명히 하겠다는 게 그의 연출철학이다. 2000년에 북송된 최장기 비전향 장기수였던 김선명씨의 이야기를 다룬 그의 두번째 작품 ‘선택’(24일 개봉)에는 이런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주제는 둔중하지만 결코 폼잡지 않는 연출로 만들어진 ‘선택’은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며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쉽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찍었어요. 기교도 많이 부리지 않았고 대중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보통사람의 시각에서 바라봤습니다”


김선명씨는 한장의 전향서 쓰기를 거부하고 45년을 감옥에서, 그중 21년을 0.5평의 독방에서 지냈다. 홍감독은 “우리 사회의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립을 본질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사상범들이 수감된 감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오랜 세월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신념을 지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고 영화화 동기를 밝혔다.


1996년 비전향 장기수가 이슈화되면서 관심을 가진 그는 아내인 이맹유 작가와 장기수들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그는 “김선명씨는 지조굳은 선비같은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99년 시나리오를 완성했지만 영화화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뒤에야 가능해졌다. 그동안 3~4편의 상업영화 연출제의를 거절하면서까지 ‘선택’에만 매달렸다. 그는 “이 작품을 못하면 다른 작품을 못한다고 생각했다”면서 “방송대본 등을 쓰며 생활했고, 아내의 격려도 힘이 됐다”고 말했다.


정치적 환경이 갖춰졌다고 상업적 뒷받침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다. 몇몇 제작사에서 나섰지만 펀딩문제로 도중에 포기했다. 지난해 8월에야 총제작비 10억원 중 영화진흥위원회 지원금 3억7천여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액수를 신씨네에서 투자키로 하면서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해 10월 촬영을 시작해 50일 만에 마쳤고, 지난 3월 후반작업을 끝냈다”면서 “리허설을 많이 했고, 촬영이 시작되면 늘 밤을 샜다”고 기억했다.


지난달 24일에는 보수단체와 진보단체들이 영화를 함께 관람했다. 편향됐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나는 인생을 꽃밭에서 살았다”고 한 보수단체 임원도 있었다고 한다. 2일 개막되는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 ‘새로운 물결’에도 초청됐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계기로 분단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박광수·김홍준 감독 등과 서울대 영화서클 ‘얄라성’에서 활동한 그는 80년대 ‘장산곶매’ ‘서울영상집단’ 등에서 영화운동을 하며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린 ‘오! 꿈의 나라’, 농촌의 현실을 묘사한 ‘파랑새’ 등을 만들었다. 92년 장편데뷔작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는 멍텅구리배에 잡힌 청년의 이야기였다. 앞으로도 사형수, 미국문제 등 현실에 발을 디딘 영화들을 만들 계획이다. 그는 “한국 영화계는 양적으로 발전했지만 10년 전보다 ‘선택’ 같은 작품은 만들기가 더 어려워졌다”면서 “주류와 비주류가 순환해야 한국영화가 발전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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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화제의 인물:세계 연감 1997



姜憲

1996년 헌법재판소가 영화사전심의제도는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함으로써, 영화를 일반인에게 공개 상영하기 전에 반드시 심의를 거치도록 해왔던 이 제도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한국 영화 80년사에서 가장 크고도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이 제도가 오랫동안 한국 영화인들의 창작 의욕과 자유로운 소재 선택의 장애였을 뿐만 아니라 심의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가위질등은 유무형의 부당한 압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제시대 때부터 활동사진 취체규정이란 명칭으로 행해져온 영화에 대한 검열 제도는 1996년을 기점으로 마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판결을 이끌어낸 주체는 정치권의 야당도 아니고 충무로로 통칭되는 기성 영화계에서 일하던 영화인들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적·상업적 한계가 분명한 기성 영화계 바깥에서 영화를 만들던 ' 장산곶매'라는 영화운동집단과 대표 강헌이었다. 강헌은 장산곶매의 대표로 있던 1992년 영화사전심의제도의 위헌심판을 법원에 청구했고 이를 받아들인 재판부는 1993년 10월 6일에 헌법재판소에 위헌 심의 제청을 했다. 헌법재판소는 만 3년 만인 1996년 10월 4일에 영화에 관한 사전 심의제도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길고도 험난했던 법정 투쟁을 주도했던 강헌은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한 후 장산곶매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오 꿈의 나라〉와 〈파업전야〉의 제작에 참여했고 이후 장산곶매의 대표를 맡으면서 〈닫힌 교문을 열며〉를 제작했다.

〈오 꿈의 나라〉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동두천 미군 부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연결시켜 만든 영화였고, 〈파업전야〉는 어느 공장의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투쟁을 그린 작품이었다. 두 작품 모두 사전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영금지처분을 받자 법원에 사전심의제도의 위헌 심판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닫힌 교문을 열며〉는 전국교원노동조합 운동을 지지하는 영화로서 한 학교에서 일어난 비교육적인 모습과 이를 극복하려고 애쓰는 교사와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 역시 같은 이유로 상영금지처분을 당했고 이 단체의 대표인 그가 재차 법률적으로 대응했던 것이 1996년에야 결실을 본 것이다.

위헌판결 이후 영화의 심의에 관한 논란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심의의 주체였던 공연윤리위원회는 관객의 보호라는 차원에서 심의기구 운영의 부분적인 개선을 통해 심의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논리를 개진했다. 반면 장산곶매와는 별개로 영화관계법의 개정을 위하여 노력을 하던 일부 영화인들은 심의 주체를 민간으로 전격 이관하고 보다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심의제도 운영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등 시민단체들까지 가세한 이 논란은 해를 넘기면서도 뚜렷한 합의점에 다다르지 못했다.

영화사전심의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이끌어낸 강헌은 장산곶매의 대표로 있으면서도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93년부터 본격적인 대중음악평론 활동을 시작해 국내의 대표적인 대중음악 평론가 중 1명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그는 팝 음악과 록 음악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 대중음악의 지형 속에서 서로의 가치와 교류를 인정하면서도 록 정신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왔다. 특히 한국 대중음악계는 일본과 미국의 대중음악을 편협하게 수용하고 있으며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장의 논리에 지나치게 장악되는 팝 위주로 흐르고 있다고 보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한국 록의 대부라고 부를 수 있는 신중현을 본격적으로 재평가했으며 위안적이거나 소비적이었던 대중음악을 현실과 역사 속으로 끌어들인 김민기에 대해 대중음악의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그는 록 정신을 관철하고 있는 신해철·김종서 등의 음악과 민중가요의 긍정적인 측면 등을 널리 소개하고 평가하는 데 평론활동의 대부분을 할애해왔다. 영화와 대중음악을 넘나들면서 활동해온 그는 매체 자체에 매몰된 작업보다는 그 매체가 갖는 역사적 의미와 사회적 역할에 대한 실천적 활동에 보다 더 힘을 쏟고 있다.

200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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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경향신문, "강헌:화제의 인물:세계 연감 1997"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세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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