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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대림절 부활절 사순절... 교우님들 부탁해요~
yust**** 조회수 12,854 작성일2004.12.05
대림절 부활절 사순절 또 무슨 OO절이 있나요?

그리고 그 순서와 의미, 기타 등등 정보 부탁드려요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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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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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을 준비하고, 재림할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대림 시기로 한 해의 전례 주기를 시작하는데, 그 기간은 4주간이다.

 

[유래]

교회 안에서 대림 시기의 풍습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4세기 말경에 스페인과 갈리아 지방에서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6주간 동안 참회의 기간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때의 대림 시기는 전례와는 상관없이 성탄을 준비하기 위한 금욕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6세기 이후 로마와 라벤나에서 비로소 대림 시기가 전례 안에서 거행되기 시작하였으나 그레고리오 대 교황이 4주간으로 고정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대림 시기가 한 해의 끝 무렵에 거행되었고, 그 의미도 때가 차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기쁨에 찬 시기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차츰 다른 지역 교회의 영향으로 구세주의 성탄을 준비하는 금욕적 성격도함께 지니게 되었다.

[전례]

 

예수가 승천한 후부터 다시 올 때까지 깨어 기다리는 것이 교회의 삶이라면 대림 시기는 이런 교회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기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오고 우리 구원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확신하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림 시기의 전례는 구세주의 탄생 전 4주 동안 미사와 성무 일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 완성될 마지막 날까지 교회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도해 준다.

교황청의 전례 성사성은 1970년에 개정한 \'로마 미사 경본\'에 수록된 <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 지침>

(Normae universales de anno litrugico et novum calendarium romanum generale)에서 로마 전례가 지녀온 대림 시기의 두 가지 성격을 보존하여 \"대림 시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들 사이에 오신 것을 기억하는 성탄의 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기요, 동시에 그와 같은 기억을 통하여 마지막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도록 영혼이 인도되는 시기이다\"라고 설명한다.

이어서 \"이와 같은 이중적 성격 때문에 대림 시기는 간절하고 감미로운 희망의 시기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39항).

이 지침에 따라 현행 로마 전례에서는 대림 시기를 4주간으로 고정하고 전례의 성격에 따라 두 부분으로 구별한다.

대림 첫 주부터 12월 16일까지의 전반부는 종말론적인 면을 강조하면서,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도록 준비하는 기간이고, 12월 17-24일의 후반부는 임박한 구세주 탄생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대림 시기의 각 주일의 주제도 이와 같은 전례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대림 제 1주일은 오실 구세주를 깨어서 기다려야 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자세를 강조하고,

제 2주일은 구세주의 오심에 대비하여 회개하도록 촉구한다.

제 3주일은 구세주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기뻐하라고 권고하며,

제 4주일은 예수 탄생의 예고와 그분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대림 시기의 미사와 성무 일도의 기도문들은 주로 이사야 예언서와 세례자 요한의 설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사야 예언서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렵고 쓰라린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메시아와 구원 시간의 도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례자 요한도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세주가 오셨음을 선포하여 신약의 시간을 여는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이미와 계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었다. 사람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알리며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세례자 요한은 \'대림 시기의 설교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대림 시기는 천주의 어머니 마리아와 구원 신비와의 관계를 두드러지게 보여 주는 시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에, 오롯한 마음으로 성자를 기다리는 마리아는 오시는 구세주를 맞기 위하여 준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협력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대림 시기 전례에서 잘 부각된다. 대림 시기에 거행되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12월 8일)은 대림 시기를 중단하는 축일이 아니라, 구원의 신비의 한 부분을 구현하는 축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죄에 물듦이 없이 잉태된 마리아는 구원된 인류 중의 첫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오심의 결정적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을 대림 시기에 거행 하도록 허용한 것이다.

또한 대림 시기에는 제대 주위의 화려함을 피하고 대영광송을 하지 않는다. 오르간이나 다른 악기는 성가를 도와 주기 위해서 사용하며 단독 연주는 피한다. 사제는 회개와 속죄의 뜻으로 자색 제의를 입는다.

그리고 이 식에는 대림초를 켜는데 사철나무 위에 4개의 초를 마련한다. 사철나무는 인간에게 내려질 하느님의 새로운 생명을 뜻하고 4개의 초는 구약의 4천 년을 의미한다. 구세주가 어느 정도 가까이 오셧는지 알려 줌으로써 마음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기 위하여 매주마다 촛불을 하나씩 늘려 켜간다.

[신학적 의미와 영성]

 

대림 시기는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지속적인 대림 시기를 살아야 하는 교회에 깊은 신학적 의미를 보여 주는 전례 시기이다.

구원 신비의 종말론적 차원이 강조되는 시기 : 인간 역사는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실현되는 장소이다.

그리스도는 육신을 취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구세주가 되셨다. 이 부활하신 분이 시간이 다 찼을 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을 믿고 그것이 바로 창조의 완성임을 증언하는 것이 대림 시기이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에서 순례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과, 아울러 모든 신앙인 안에서 장차 실현되어야 할 구원과 마지막 날 구세주요 심판자로 다시 오시어 완료하실 구원 경륜의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끊임없이 산다. 대림 시기의 전례는 이와 같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구세주를 깨어 기다리는 신앙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도록 강조한다.

희망에 찬 기다림의 시기 : 대림 시기는 신앙인으로서 항상 지녀야 할 자세. 즉 희망에 찬 기다림의 자세를 가르쳐 주는 영성의 학교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전례는 신앙인들에게 구세주의 오심을 기쁨과 희망 속에서 깨어 기다리도독 강조한다. 첫 주부터 \"야회여,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뵈옵니다. 나의 하느님, 당신만을 믿사오니,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않게 하시고 원수들이 으스대는 꼴 보지 않게 하소서\"(시편 25편)라고 고백한다.

계시의 하느님은 약속에 충실한 분이기에 약속한 구세주를 깨어 기다릴 때 신앙인 개개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러나 교인들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드러난 실재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구세주가 오고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구원의 소식은 신앙인들에게 기쁨으로 가득 찬 새로운 미래를 약속한다.

지금은 거울을 통해서 희미하게 보지만 어느 날 얼굴을 맞대고 볼 날이 올 것이기에(1고린 13,12) 교회는 이 만남을 깨어 기다리며 기쁨 가운데 살아간다. 대림 시기에 교회가 드리는 기도문 \"오소서, 주 예수여!\"(묵시 22,20)는 기쁨에 차서 기다리는 교회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회개의 시기 : 주님께로 향하는 회개 없이는 그분의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삶을 정비하고 새롭게 주님께로 향하여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대림 시기의 영성이다.

가깝게는 임박한 성탄을, 더 나아가서는 마지막 날에 오실 구세주를 만나 뵈올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은 당신과 친교를 맺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당신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 다시 당신께로 향하도록 끊임없는 회개를 촉구한다.

대림 시기는 이렇게 회개를 재촉하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 응답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소리는 참으로 대림 시기의 소리이다. 회개하고 주님의 길을 닦아, 오시는 그분을 영접하라고 재촉하는 외침이다.

길을 닦는 방법은 무엇인가?

겸손하고 온유하고 봉사하는 사람들, 즉 예수가 \"복된 사람\"이라고 선포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됨으로써 하느님과 형제들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 성탄절

 

1.역사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 예수님의 성탄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대림시기가 구제주의 탄생을 준비하는 기간이라면 성탄시기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시어 이세상에 오심을 기념하는 시기로서,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부터

주임 공현 대축일 주간 또는 주님 세례축일 까지이다. 그리스도 탄생으로 온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이 시기에 사제는, 어둠을 물리치고 새 생명과 새로운 광명이 떠오름을 찬미하며, 기쁨과 결백을 상징하는 백색 제의를

입는다. 성탄 시기는 4세기 중반부터 보편적으로 지내게 되는데,대림시기가 사순시기 관습을 본받아 생긴 것처럼

성탄시기 역시 부활시기를 모방한 기간으로서, 특별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시기는 예수 성탄과 주님 공현의 역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수 성탄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2천년 전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사건을 기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예수님의 탄생일에 대해서는 복음서도 아무런 자료를 제공하지 않으며, 초세기의

문헌에서도 일체 언급이 없다. 12월 25일을 예수 성탄 축일로 지낸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한 자료는 354년에 로마에서

기록된 연대기이다. 이 책은 12월 25일을 로마 제국의 축일인 무적의 태양신 탄일(Nativitas Solisinvicti)이라 부르고

335-337년에 로마에서 예수 성탄 축일을 지냈음을 암시하고 있다. 무적의 태양신 탄일은 275년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완공한 태양신전 축성식을 기회로 12월 25일로 지정하였다.

4세기 초엽에 도입된 예수 성탄 축일이 태양신 축일과 같은 이유는 아마도 이 날이 세상의 빛(요한 8,12)이시며 정의의

태양(말라 3,20)이신 예수님의 축일로 지내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확한 역사적 배경은 아직 잘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후 4세기 말엽이나 5세기 초엽에 이 축일은 동방교회에도

전파되었다. 7세기 경에는 성탄 한주간 뒤인 1월 1일을 성탄 제 8일 축일로 지내기 사작하였는데, 이날에는 천주의 모친

마리아의 탄생도 함께 기념하였다.

같은 7세기에 성탄 축일은 성탄 팔일 축제로 확장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부활과 성령강림 팔일 축제의 영향이 컸다.

한편 동방에서는 서방보다 조금 먼저 1월 6일을 주님 공현 축일로 지내기 시작하여 동방교회의 성탄 축일이 되었다.

 

 

2.현행 전례 제도

 

성탄시기는 예수 성탄 전날인 12월 24일의 제1저녁기도 또는 예수 성탄 전야 미사부터 시작하여

주님 공현주일 다음주일인 주님 세례 주일까지 계속된다. 그 기간은 약 2주간으로 부활 축제기간인

부활시기보다 훨씬 짧다.

교회는 성탄 대축일을 12월 25일 하루만 지내지 않고 다음 해 1월 1일까지 한 주간 동안 계속되는 팔일 축제를 지낸다.

이 팔일 축제는 부활 팔일 축제와 함께 전례주년의 2대 팔일 축제이다. 따라서 이 기간은 성탄 본날을 한 주간 더 연장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이 기간은 성탄 본날을 한 주간 더 연장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부활 팔일 축제는 대축일임에 비해 성탄 팔일 축제는 한 등급 낮은 축일에 속한다. 또 사실상 이 축제기간의

대부분은 성인 축일로 구성되어 있다. 순수한 팔일 축제일은 12월 29-31일 사흘뿐이다.

그러나 다른 날에도 성탄 감사송을 바치는 등으로 축제 전례는 계속된다.

1) 팔일 축제 중의 주일, 주일이 없으면 12월 30일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2) 성탄 다음 날인 12월 26일 : 성 스테파노 츳 순교자 축일.

3) 12월 27일 :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4) 12월 28일 :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

5) 1월 1일 :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이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6) 1월 2일과 5일 사이의 주일 : 성탄 제 2주일.한국 교회에서는 이날을 주님 공현 대축일로 지냄.

7)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주일 : 성탄시기를 마감하는 주님 세례 축일.

이 축일 다음 날인 월요일부터 연중시기에 들어간다.

성탄시기는 축제 기간이기 때문에 성탄 전야 미사부터 백색 제의를 사용하며 (성 스테파노축일과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은 순교자 축일이기 때문에 홍색 제의 사용), 대림시기 중에 중단했던 대영광송을 노래한다.

특히 성탄 대축일의 모든 미사 중에 신앙 고백문을 외우거나 노래하는데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부분에서는

다른 날보다 특별히 고개를 깊이 숙인다. 성탄 본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성탄, 천주의 성모 마리아, 주님 공현,

주님 세례 등의 축일과 성인 축일 미사 외에 이 기간의 미사 제1독서는 요한 1서이다. 요한 1서를 사용하는 이유는

요한 1서가 성탄과 공현의 신비를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의 표현으로 선포하기 때문이다.

 

3.성탄의 의미

예수 성탄 대축일은 천주 성자께서 동정 마리아 태중에서 혈육을 취하여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탄생하였음을 경축하는

날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성탄 축일에 예수님의 성탄과 밀접한 목동들의 방문, 동방 박사의 조배, 헤로데의 어린이 살해

등의 사건도 함께 기념하였다. 그런데 라틴어의 \'성탄(Nativitas)\'은 이러한 생일의 의미 외에 신들이나 통치자가

공적으로 모습을 드러냄, 영광을 받음, 신이 됨(epiphaneia, theophaneia)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나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의 즉위일을 그가 신이 된 날로, 황제가 어느 도시를 공식 방문하면 신이

당신 모습을 드러낸 날로 기념하곤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서방교회의 성탄 축일은 동방교회의 공현 축일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날로 간주되었다.

단지 서방에서는 예수님의 역사적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 축일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반면 동방에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공현 축일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어디에 더 비중을 크게 두든지 성탄 축일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비천하고 연약한 인간으로

태어나신 날이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신 날이다.

 

하느님께서 비천한 인간이 되신 궁극적인 목적은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고 인류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또 다른 성탄의 신비가 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산의 지존하신 본성을 더없이 낮추시어 죄와 고통과

죽음의 본성을 지닌 인간이 되시어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분의 자녀가 되는 터전을 마련하셨다. 그래서 성탄을

하느님과 인간의 \'기묘한 교환\'이라고도 한다.

이 기묘한 교환은 성탄과 부활의 깊은 관계를 들어낸다. 예수님께서는 탄생과 더불어 당신의 지상 생활의 목적인

십자가와 수난을 통한 부활의 여정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 축일과 공현 축일은 파스카 여정의

준비이자 시작이라 할 수 있다.

 

 

4.구유 예절

 

구유는 어린이와 어른 할것없이 모든 이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구유에 누워계신다. 그 주위에는 나귀도 있고 소도 양도 있다. 이 모습은 하느님께서

두려운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을 보는 이는 정겨움과

사랑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성탄을 묘사하는 그림들은 이미 카타콤바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석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후대의 예술가들이 구유를 어떻게 꾸몄든지 그것은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데에 초점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다. 중세기의 많은 성화들 안에서

예수님의 성탄을 묘사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지만 가장 잘 알려진 구유의 증거는 성 프란치스코가

그레쵸(Greccio: 이탈리아의 동네 이름)에 만든 것이다.

그는 예수님 탄생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했다. 성 프란치스코는 여기에서 미사를 드리고 강론을 했다.

구유와 성화로 예수님 탄생의 현장을 재현해 놓고 거기에서 미사를 드리는 관습이 중세기의 신심과 연결되어 빠르게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 장면을 바라보는 이는 단순히 구유의 아름다움만을 감상하며 흐뭇해 하는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신 비를 믿음으로 깨닫고 그 신비에 젖어들어야 한다

 

 

 

 

▶ 사순절

 

1. 사순 전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사람들은 살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많이 갖게 된다. 일상적인 사람에서 반성을 하고 또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신앙인 들에게는 전례를 통하여 더욱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많이 갖는다. 특히 사순 시기의 전례는 인생의 광야를 체험하도록 하고 있다.

허영과 위선에 가득찬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듯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생화하기 위한 40일의 기간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신앙과 인간적 성숙의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세속적 유혹과 불안으로 인해 앓기 쉬운 신앙인의 자세를 사순 기간의 삶을 통해서 되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순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에 모든 신앙인 들은 “사람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창세기 3,19)는 말씀과 함께 머리에 재를 얹게 되는 상징적인 표현 속에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지점을 생각하고 거기에 비추어 자신들의 사람을 바로잡기를 요청 받고 있는 것이다. 즉 세례 때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되찾아 바른 양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이 사순 시기이다.

2. 사순 시기의 의미와 유래

부활 축제를 준비하기 위한 40일 간의 기간으로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 전야제까지 계속된다.

사순 시기(40)의 의미는?

구약 성서에는

①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정화하기 위하여 40일 동안 비를 내리셨다.(창세기 6,5-7,22)

②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 생활을 벗어나 하느님이 약속한 땅에 들어가기까지 그들은 40년 간 광야 생활을 하며 준비해야 했다.(신명기 29,4)

③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받기 위하여 40주야를 재를 지켜야 했다.(신명기 9,18)

④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가기 위하여 40일 간을 밤낮으로 걸어야 했다.

신약 성서에는

①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을 하며 준비를 하셨다.(마태 4,1-11)

② 그리고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셨다.(사도행전 1,3)

앞에서와 같이 성서에서 나타나는 40이라는 수의 의미는 참회와 속죄로 우리 생활 전체를 혁신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합당한 준비를 하는 기간의 수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사순 시기 40일의 의미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돌아오기를 초대하는 하느님이 마련한 은총의 시기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사순 시기에 우리가 조용한 마음으로 지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만 결코 부정적인 시간이 아니라 희망에 부풀어 생명의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시기인 것이다.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40일이 되었을까?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현재와 같은 40일이 초대 교회로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① 박해 시기였던 초대 교회로부터 3세기 초 까지는 기한을 정하지 않고 부활 전 2-3일 간을 예수의 수난을 기억하며 지내던 것이 사순 시기의 전부였다.

② 그런데 313년 로마제국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처음으로 열린 니체아에서의 공의회(325년) 이후 부활을 준비하기 위하여 40일을 지내야 한다고 정하게 되었다.

그때의 40일을 계산하는 방법은 지금과는 차이가 있었다. 즉 성삼일로부터 거꾸로 계산하여 40일을 정하였다. 그러므로 사순 시기의 시작이 오늘과 같은 수요일이 아니라 오늘날의 사순 제1중에 해당되는 날이었다. 5주간 35일에 성주간의 성목요일 낮까지 하여 40일을 계산한 것이다.

사순절이 40일로 정해진 후에도 초기에는 이 기간에 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차차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재를 지켰다는 생각, 그리고 대죄를 지은 사람에게 보속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또 새로 영세 받을 사람들을 잘 준비시키기 위하여 사순시기에 재를 지키게 된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도 주일만큼은 주님의 부활 경축하는 시기라는 생각에서 재를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주일을 제외한 나머지 34일에다 전에부터 지켜 오던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을 포함해서 36일 간 재를 지키며 지내 왔다.

③ 그 후 7세기경 교황 그레고리오 1세(재위 590-604)때에 온전히 간 재를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이미 지켜 오던 36일에다 4일을 추가하여 지금과 같은 사순 시기가 확정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사순 시기의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되어 46일이 된 것이다.

3. 사순 시기에는 어떻게 살고 어떤 준비를 하는가?

40일이라는 기간은 속죄로 우리의 생활을 바꾸고 하느님과의 새로운 만남을 위하여 합당한 준비를 하는 기간이며, 장차 이루어질 중대 사건인 부활을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기간이다. 그러기 위해 합당한 준비가 필요한데 크게 보면 외적 준비와 내적 준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준비를 모두 일컬어 넓은 의미로 사순 시기에 재를 지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 재를 지킨다고 할 때는 대재인 단식과 소재인 금육을 말하는 것이다.

1) 외적 준비 이러한 준비는 소극적인 준비로 교회가 정한 단식과 금육을 실천하는 것이다. 본래 단식과 금육은 교회법규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실철하던 것을 교회가 법규로 도입을 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동기에서 자발적으로 재를 지켜 왔다. 예를 들면 기도에 열중하기 위해, 죄를 보속하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리고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재를 지켜 왔다. 특히 부활 축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초창기부터 신자들 스스로 몇일 동안 재를 지켜 온 것이다. 본래 단식은 그 날 한 끼만 식사를 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저녁 식사만 하도록 하였다. 그 후 점차로 교회의 단식 규정이 세분화되면서 육식을 금하는 금육 규정이 첨가되었다. 오늘날 단식의 규정을 보면 단식은 만21세부터 만60세까지의 모든 사람이 지키도록 하고 있다. 그 방법은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제대로 먹고 저녁은 요기만 하는 것으로 하고있다. 그 시기는 재의 수요일고 성금요일 1년에 2일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환자나 수험생 혹은 의무 복무중인 병사 등에 대해서는 단식을 관면하고 있다. 그리고 육식을 금하는 금육 규정만은 만14세로부터 죽을 때까지 지키도록 하고 있다. 금육에서 우유, 계란, 생선 등은 제외되며 금육을 하는 시기는 과거에는 우리 나라에서만 재의 수요일과 사순 시기의 매 금요일에 지키도록 하였으나 현재에는 재의 수요일과 연중 모든 금요일에 지키도록 하고 있다. 단식과 마찬가지로 예외의 사람들에게는 관면을 하고 있다. 외적 준비 없이 내적 준비를 갖추기는 힘들다고 보기 때문에 외적 준비인 음식 절제로부터 자신의 준비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금육과 단식을 단순히 그 자체를 위해서 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위한 단신과 금육을 강조하고 있다.

2) 내적 준비 이 준비는 적극적인 준비로서 하느님을 행하는 마음과 전례 예절을 통한 준비라 할 것이다. 회개와 속죄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쇄신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의 전례는 사람들이 이런 적극적인 준비를 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미사 때나 말씀의 전례에서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을 하지 않으며 사제가 입은 제의의 색도 회개와 보속을 상징하는 자색(보라색)이다. 그리고 전례의 말씀들은 온통 이런 준비를 계속할 수 있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인들은 이 시기에 평일 미사에 까지 참석하며 하느님을 향한 회개의 삶을 다짐하고 교회가 배려한 사순절 특별 강론을 등에 참가하며 고백 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이 부활을 앞둔 시기에 꼭 고백성사를 보고 부활 시기에 영성체를 하는 것을 교회법상의 의무규정으로 두고 있다.

4. 사순 시기에는 꼭 알고 참석해야 하는 특별한 전례는 어떤 것이 있나요?

1) 사순 시기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 사순 시기의 시작은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 이마에 재를 받으며 시작된다. 재의 수요일에 사용되는 재는 지난 해 성지 주일에 축성하여 한 해 동안 각 가정의 십자 고상 위에 걸어 두었던 성지 가지를 미리 걷어서 태운 후 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다. 재의 수요일 미사의 강론이 끝난 후 사제는 기도를 하여 재를 축성한 다음 그 재를 찍어 자신의 이마에 십자 표시를 그으며 바르고 다음 모든 신자들에게 발라 준다. 이 때 사제는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시오.\"(창세기 3,19)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라는 권고를 한다. 이는 \"그리하여 제 말씀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욥 42,6)는 말씀처럼 우리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와 보속의 마음 자세로 재를 얹고 사순 시기를 지내라는 초대의 말씀인 것이다.

① 성서에 나타나는 재의 의식 구약 성서에는 욥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을 받으면서 자신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잿더미에 앉았고(욥기 2,8)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의 태도도 그러하였다.(요나 3,6) 신약 성서에서도 같은 의미가 마태 복음 11장21절에 나타난다. 이런 성서의 말씀과 같이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 이마에 재를 얹으며 인생의 무상함을 깨우치고 조에 대한 보속을 준비하고 앞으로 다가올 부활을 준비하는 새로운 시작의 시간인 것이다.

② 재의 의미 성령의 지시에 따라 예수께서 광야로 들어섰듯이 우리도 머리에 재를 얹고 사순 시기의 광야로 들어서게 된다. 이 사십일 동안 우리는 화려함과 풍족함을 피하고 광야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사람들이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신앙인이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즉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이마에 재를 받은 인간은 죽으면 모두 결국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예식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재의 수요일에 재를 받으며 우리는 인생이 무상함인 것을 인정하며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확고한 생사관을 확립하려는 결심이 필요한 것이다. 2) 사순 시기의 절정인 성 주간 재의 수요일로 시작한 사순 시기는 성 주간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성 주간은 성지주일부터 시작되는 사순 시기의 마지막 한 주간이다.

성주간 전례는 우리 신앙 생활의 중심이 되는 전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성 삼일과 부활 성야의 전례가 그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생전에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었는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수난과 죽음,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그 분의 행적을 다시 더듬게 되고 생전에 하신 말씀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말씀과 행적들을 공동체 안에서 생활 속에 표현하고 생활화한 것이 바로 전례인 것이다.

 

 

▶ 부활절

 

1. 전례와 상징

부활은 신비이다.

교회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밤(부활성야)에 구원의 신비에 감추어진 모든 이야기를 집중시키려 한다.

즉 말과 상징의 언어를 총동원한다.

부활 성야의 예절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1부 빛의 예식,

제2부 말씀의 전례

제3부 성세 예식,

제4부 성찬의 전례이다.

빛의 예식에는 불 축성과 초 준비가 있다. 이 모든 예식은 밤에 거행된다.

즉 밤이 시작되기 전에 시작하지 말고 날이 밝기 전에 마쳐야 한다.

이밤은 오랜 관습에 따라 주님을 기억하는 밤이고, 루가복음(12, 35)의 권유에 따라 등불을 밝혀 들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성스런 종처럼 깨어 준비하는 밤이다.

불의 축성은 고대 로마 전례에는 없었다. 아마도 프랑크 지역의 이교적인 봄맞이 불로 잡신에게 풍년과 다수확을

기원하던 관습에서 나왔을 것이다. 빛은 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의 선물이었고 이스라엘 백성 역시

야훼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리스도인들도 춧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촛불은 자신을 소모하여 빛과 따스함을 준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에 빛과 사랑을 주셨다.

불을 축성하여 부활 초에 붙이는 것도 자신을 봉헌하는 빛의 상징이다.

부활 초는 초기부터 로마와 기타 지역에서 부활 성야를 밝히는 데 사용하였다. 이 초는 스스로의 빛을 통하여 죽음의

`밤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원래는 사람 키만한 두 개의 초를 사용했었다. 빛의 예식은 부활 초의 품위와 상징을 표면에 나타낸다.

십자가 표시는 그리스도를, 알파와 오메가는 시작과 마침 또는 영원을 뜻한다.

그 해의 연수는 인간의 시간 생활을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연결하고 있다.

다섯 개의 붉은 향덩이는 예수님의 다섯군데 상처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광명\" 을 노래하며 춧불을 붙여 행렬함은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를 연상케 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 12).

또 다른 의미는 구약성서에서 에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밤길을 비추는 횃불을 연상케 한다.

주님이 몸소 밤길을 비추며 앞서 가신다. 그분은 죄악의 어둠을 몰아내는 불기둥이시다. 그분은 죄악의 어둠을

몰아내는 불기둥이시다. 신자들이 촛불을 들고 뒤따를 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린다.

부활 찬송은 밤과 빛의 대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하느님과 세상과 만남, 승리자로서의 하느님,

암흑의 세상에 파견된 빛이신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세상이 구세주를 주범으로 판결하고 진리와 사랑을 사형에

처했지만 부활을 통하여 빛이 승리를 거둔다. 부활 찬송은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기쁨의 노래이며 부활 예식의

정점이다. \"... 영원한 대왕의 광채 너를 비춘다. 비춰진 땅아, 모두 깨달으라. 세상 어두움 사라졌다...\"

1)성수 축성

초기 그리스도교는 부활주일에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준비가 되면 언제라도 예비자에게 세례를 준다.

이때 성세수를 사용하는데 부활 성야에는 성세 준비자들이 없더라도 성세수를 축성한다.

물은 낙원과 풍요를 연상시킨다. 또한 생명체의 시작도 물에서 비롯된다(창 1, 1-2;2,6-7).

태초에 모든 생명이 바다에 있었듯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태아도 바닷물 같은 양수에서 자라게 하시고, 영세자의

천성적 탄생 역시 물에서 시작하신다. 성세수는 부활 초를 세 번 물에 담가 축성한다. 셋이란 수는 완전을 뜻하고

성스러운 숫자로 사용된다. 물은 세탁, 풍요, 소생, 생동의 힘을 가지고 있다.

세례를 받을 때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은총의 샘물이 흐른다. 세상의 값진 원천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온다.

성수축성 때에 부활 초를 물에 담그는 것은 하늘과 땅이 상징적으로 결합하는 뜻이다. 태양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물에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운 면모를 이미 체험하고 있다.

2)알렐루야

사순절 동안 보류했던 알렐루야를 오늘 밤 다시 노래한다. 힘을 다하여 아름답고 즐겁게 하느님을 찬미한다.

부활 찬송, 부활 성가, 알렐루야 등의 노래는 근본적으로 기쁨의 표현 이외에 별다른 것이 아니다.

진정한 비쁨의 노래는 인간 이성의 벽을 뚫고 무아지경에 이르게 한다. 여러 성가 중에서 알렐루야가 가장 순수한

마음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알렐루야란 원래 \"하느님 야훼를 찬미하다\"란 뜻이다. 그러나 이 밤 예절에서는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알렐루야\'는 번역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자기 표출이다.

말이 필요없고 기뻐 용약할 뿐이다. 사순절 동안 절제했던 대영광송과 종도 함께 즐거이 울려 퍼진다.

 

2. 부활주일의 변동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사건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망일이 현재의 달력으로 어느 날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유다교의 해방절 주간 금요일이라고만 되어 있다.

유다인들은 음력으로 니산월(유다 면력으로 7월, 우리나라 3-4월에 해당) 14일을 빠스카 축일로 지냈으나

서방 교회는 그 다음날인 일요일을 부활절로 경축하였고

니체아 공의회(325년)에서는 춘분(3월 21일) 이후 만월이 되면서 맞는 첫주일을 부활축일로 규정하였다.

신학자들은 가장 신빙성있는 날짜로 예수의 사망일을 기원 후 30년 4월 7일이라고 보고 있다.

이 의견을 그대로 믿는다면 30년 4월 9일 일요일이 예수 부활날이 된다.

그렇다면 4월 둘째 토요일이 지난 후 주일은 4월 9-15일 사이이고,

4월 둘째 주일이라면 4월 8일-14일까지이니 이 중 하루를 부활주일로 고정시키면 어떠냐는 주장이 많았다.

부활주일을 고정시키면 매년 달라지는부활축일 때문에 겪는 혼란과 어려움도 없어지니 신자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지 않겠는가?

춘분 이후 부활 주일이 될 가능성은 3월 22일-4월 25일 사이의 5주간이나 된다.

그래서 매년 사순절의 시작과 부활, 승천, 성신 강림 축일이 우리 달력에서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전례헌장 부록에 보면 제2차·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빠스카 축일을 일정한 주일로 고정시키자는

많은 사람들의 원의를 중요시하였다. 숙고한 결과 당시(1965년두 가지 결론이 나왔다.

① 공의회는 갈라진 형제들이 동의한다면 빠스카 축일을 일정한 축일로 정하는데 반대하지 않는다.

② 동시에 국가적으로 영구 달력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반대하지도 않는다. 물론 주일을 포함한 7일로 구성된

주간이어야 한다.

축일을 고정시키는 문제로 프로테스탄트 교파와 합의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이미 마르틴 루터는

부활시기의 변동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였다. 그래서 이동 축일들을 그네처럼 왕복한다고 보아 \'그네 축일들\'이라고

불렀다. 난관은 동방 교회에 있다. 1923년 이스탄불에서 열린 범그리스 정교회 총회에서 부활축일의 고정을 하자는

주지시켰으나 현행 그레고리오력에 맞추기를 원치 않았다. 1965년에는 부활축일을 4월 둘째 토요일 다음 일요일로

설문조사에서도 각 교회들의 전반적인 찬성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1975년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세계 기독교

교회 일치 위원회의 노력도 허사가 되었다.

이미 가톨릭 교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동방 교회에 관한 교령\' 20항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같은 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툭일을 지내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바라는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는 잠정적으로

같은 지방이나 같은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나마 같은 날에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총주교들과 그 지방교회

지도자들에게 맡기는 바이니, 관계자들끼리 의논해서 주일 부활축일을 지내는데에 만장일치로 합의하기를 바란다.\"

이처럼 갈라진 교회 가운데 동방교회 특히 그리스 정교회가 찬성하지 않고 있다.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지만

무리하게 앞당길 필요는 없다고 본다.

 

3. 구원의 표징

예수 부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표징은 무엇이가? 예수께서는 돌아가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사흘만에\'란 표현은 하느님이 예수를 부활케 하셨다는 뜻이며

의인이 구제받도록 몸소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이다.

즉 이는 구원의 역사란 점이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란 체험은 신앙에 입각한 \'뵈옴\'임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부활 수 40일 중 \'여러날 동안\'(사도 13,31)발현하셨다. 발현은 사건을 구체화한다.

즉 발현하신 분은 확실히 나자렛 예수이며 사도들은 그분을 보고 만지고 그리고 그분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

그런데 `민중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목격하였으나 부활 우의 발현은 보지 못하였다.

그분은 스스로 선택한 증인들에게만 발현하셨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사실 묘사가 거의 불가능하다. 역사적 사건이란 다의적이고 애매한데가 있다.

따라서 싫증되지 않은 사건과 관련된 말들은 증명이라기 보다 표지나 표징 또는 징표하고 표현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의 표징은 \'말씀\'을 통해서만 살아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먹고 마실 수 있는 \'빵\'으로서 실재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성사라고 일컫는 표징을 통하여 살아 계신다. 특히 신자들은 세계로써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 새 생명에로 다시 태어나며, 성체성사를 통하여 살아계신 분과 빠그카 잔치를 나눈다.

그러므로 교회는 빵과 포도주로 표시되는 예수님과 공동유대를 갖는 생활 현장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희생적인 봉사와 사랑 가운데 살아 계신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무수한 사람들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 죽음보다 강한 사랑, 정의구현에 대한 희망은 사람이추구하는 원의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답은 종말에 가서야 얻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모든 답을 앞당겨 현실화하였으며 교회의 전례와 표징을 통하여 인간이 동경하는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고 있다.

 

4. 죽음의 세계와 부활

\"잠에서 깨어나라. 죽음에서 일어나라.\" 이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요, 사도 바오로의 외침이다. 얼어붙은 대지를

흔들어 깨우는 봄의 소리일 수도 잇다.

부활이란 글자 그대로 다시 살아남을 뜻한다. 좀 더 엄밀한 뜻으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남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점인 부활은 봄의 노래나 꾸며낸 환상이 아니다. 더욱이 고대동방 종교에 정해진 신화가 아니다.

부활은 하느님만이 우주의 주인, 모든 생명과 죽음의 유일한 본체이심을 드러내고 있다.

부활은 자연과 역사의 신앙 속에서도 약동하고 있다.

한민족이 일제의 속국이 되어 수탈을 당했던 것처럼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에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결사적으로 파라오의 폭정과 탄압을 벗어나 홍해 바다를 건너 자유와 해방을 찾았다.

신약시대의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려다가 잡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다.

이는 믿는 신자들은 육체의 죽음이란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고 있다.

새 세계를 위한 부단한 탈출과 여정, 이것이 바로 부활이다. 우리는 지금 죽음의 세계속에서 살고 있다.

부정과 불의, 이기주의, 권력, 금력, 학력 등의 노예가 된 상태이다. 이제 부활할 때가 왔다.

잠에서 깨어나고 죽음에서 일어나야 한다.

사도 바오로의 권고(에페 5, 6-20참조)처럼 허황된 이론에 속지 말고 선과 진실과 정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어둠의 세계에서 빛이 세계로 탈출해야 한다.

이것이 부활적을 맞이하는 신자들의 정신이다.

 

 

 

 

2004.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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