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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고려 문화재
gusa**** 조회수 10,287 작성일2005.04.10

6학년 사회 선택학습에서요

고려 문화재 자료로 고려의 문화를 소개하는 홍보 책자를 만들어야되거든요..

고려 문화재 여러가지 사진이랑 간단한 설명과,,

고려의 문화 쫌 알려주세요

오늘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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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

개성 선죽동에 있는 돌로 만든 다리이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의 부하들에게 죽음을 당한 곳으로, 비가 오면 핏자국이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의 돌다리. 국보급 유산으로 개성시 선죽동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노계천에 있다. 원래 이름은 선지교였으나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 대나무가 났기 때문에 그 이름을 선죽교로 고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만월대

개성의 송악산 기슭에 있는 고려 시대의 왕궁터로 지금은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받침돌만 남아 있다.
만월대의 가장 큰 풍수적 특징은 건물을 배치할 때 인위적으로 균형을 잡으려 하지 않고 자연 지형의 흐름을 따르려 했다는 것이다.
원래 달을 바라보는 곳이라는 뜻에서 망월대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이 전해오면서 만월대로 되었다고 한다. 오늘 여기에는 궁터와 주춧돌만이 남아있다

->공민왕릉

만수산 언덕에 있으며, 고려 말에 왕권을 크게 떨쳤던 공민왕의 무덤으로, 고려 시대의 대표적 왕릉이다.
고려 31대 공민왕이 살아있을 때에 만든 왕과 왕비의 쌍무덤. 공민왕은 44살까지 살았는데 왕비가 죽은
다음 7년동안 이 무덤을 건설. 무덤의 아래쪽에는 구름무늬와 12지신을 부각한 화강암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그밖에 돌로 조각한 범과 양을 세워놓았다

->5 나성
도읍지를 둘러싼 성을 나성이라고 한다.
북한 개성직할시 개성시 외곽에 겹으로 둘러쌓은 외성.

-> 숭양서원
고려 말의 학자 정몽주를 기리기 위해 1573년에 세운 서원이다.
개성시 선죽동 소재. 사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이고,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었다.

-> 현화사 7층 석탑

고려 초기의 탑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탑을 쌓은 솜씨가 세련되었다.
개성시 장풍군 월고리에 있는 고려 초기의 석탑. 국보급 유산. 현화사는 1018년에, 현화사 탑은 1020년에 세워졌다. 각 탑신마다 불상과 연꽃을 조각했으며 기단부(받침대)에 벽돌처럼 돌을 쌓은 것이 이색적이다. 현재 현화사는 없어지고 그 터에 이 탐과 현화사비, 당간지주, 돌다리 등만이 남아 있다.

-> 경천사 10층 석탑

고려 말에 건립된 대리석 석탑. 국보 제86호.
석탑의 형식은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신라형식을 이은 평면직사각형이다.
당시에는 이미 새로운 양식인 다각 석탑이 나타났으나, 이 석탑은 그런 유형을 따르지 않은 특수한 형태를 갖추어 이색적이다.
기단 평면은 형으로 3단이고, 탑신부는 1∼3층이 기단과 같은 평면이나, 4층부터는 직사각형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체감되었다.
각 층마다 옥신 밑에는 난간을 돌리고, 옥개 밑에는 다포집 형식의 두공형태를 모각하였으며, 상면에는 팔작집 형태의 지붕 모양과 기왓골을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세부의 조각은 기단과 탑신에도 새겨져 있는데, 기단에는 부처·보살·인물·화초·용 등이, 옥신에는 13불회 외에도 부처·보살·천부 등을 빈틈없이 조각하였다.
그 수법이 장려하면서도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히고 우미한 풍취가 넘친다.
이러한 형태의 석탑은 조선 전기에도 나타나지만 유례없는 희귀한 일품(逸品)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원(元)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9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

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 보물 제218호. 화강석제.
커다란 불상이라는 점과 토속적인 조각이라는 점에서 대표적인 불상이다.
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삼각형이며 옆으로 길게 째진 눈, 넓은 코, 한일 자로 꼭 다문 큰 입이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목은 굵고 삼도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매달린 느낌이다.
몸은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돌덩이에 불과하여 인체라는 느낌은 전혀 없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관음보살인 것 같다.
어깨에 걸쳐 입은 법의는 어깨에서 양쪽으로 길게 내리고 있으며, 가로무늬가 있고 몸 중앙으로 몇 개의 U형 옷주름을 돌렸을 뿐 매우 단조롭다

200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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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봉선홍경사사적갈비

 

 

종 목 국보 제7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성환읍 대홍리 320

시 대 고려시대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이다. 절이름 앞의 ‘봉선(奉先)’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종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이 갈비만이 남아 있다.

 

2.봉정사극락전

 

 

종 목 국보 제15호 .2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 봉정사

지정일 1962.12.20

시 대 고려시대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72년 해체·수리할 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 지붕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적어도 1363년 이전인 고려 중기(12∼13세기)에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3.부석사무량수전

 

 

종 목 국보 제1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4.부석사조사당

 

 

종 목 국보 제1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5.해인사대장경판

 

 

종 목 국보 제32호

수량/면적 81,258매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 해인사

시 대 고려시대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6.용두사지철당간

 

 

종 목 국보 제4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시 대 고려시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7.부석사소조여래좌상

 

 

종 목 국보 제45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8.부석사조사당벽화

 

 

종 목 국보 제46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무량수전에 보관하고 있다.

 

9.월정사팔각구층석탑

 

 

종 목 국보 제4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1 월정사

시 대 고려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으로,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보살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0.수덕사대웅전

 

 

종 목 국보 제4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0 수덕사

시 대 고려시대

 

 수덕사는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11.강릉객사문

 

 

종 목 국보 제5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강원 강릉시 용강동 58-1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12.연곡사북부도

 

 

종 목 국보 제5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54-1 연곡사

시 대 고려시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 탑이라면, 수행이 높았던 스님의 사리를 두는 곳이 부도이다. 구성은 석탑과 비슷해서, 기단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게 된다.

 

이 부도는 연곡사 내의 북쪽 산 중턱에 네모나게 둔 바닥돌 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 초까지 스님들이 선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 곳에는 북부도 외에도 연곡사 동부도(국보 제53호), 연곡사 서부도(보물 제154호) 등이 더 모셔져 있다. 북부도는 그 중에서 가장 형태가 아름다운 동부도를 본떠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크기와 형태는 거의 같고, 단지 세부적인 꾸밈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13.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

 

 

종 목 국보 제5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74-2

시 대 고려시대

 

 법천사터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984∼1070)의 탑비로, 국사가 고려 문종 24년(107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현묘탑은 현재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14.청자사자유개향로

 

 

종 목 국보 제60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향로로, 높이 21.2㎝, 지름 16.3㎝이다. 향을 피우는 부분인 몸체와 사자 모양의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체는 3개의 짐승모양을 한 다리가 떠받치고 있는데, 전면에 구름무늬가 가늘게 새겨져 있다. 몸체 윗면 가장자리에도 세 곳에 구름무늬를 배치하였다.

 

15.청자비룡형주자

 

 

종 목 국보 제6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주전자로 높이 24.4cm, 밑지름 10.3cm이다. 용의 머리와 물고기의 몸을 가진 특이한 형태의 동물을 형상화했는데, 이런 물고기모양은 옛날부터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로 건축물에 많이 장식하였다.

 

내공은 안줘도 되고요.. (어차피 남이한걸 복사했으니깐)

내공 주시면 뭐 ㄳ하죠,...

 

 

2008.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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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죽교



개성 선죽동에 있는 돌로 만든 다리이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의 부하들에게 죽음을 당한 곳으로, 비가 오면 핏자국이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의 돌다리. 국보급 유산으로 개성시 선죽동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노계천에 있다. 원래 이름은 선지교였으나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 대나무가 났기 때문에 그 이름을 선죽교로 고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다리 난간의 너비는 2.54m, 길이는 6.67m.

3> 만월대


개성의 송악산 기슭에 있는 고려 시대의 왕궁터로 지금은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받침돌만 남아 있다.

만월대의 가장 큰 풍수적 특징은 건물을 배치할 때 인위적으로 균형을 잡으려 하지 않고 자연 지형의 흐름을 따르려 했다는 것이다.

송악산 남쪽기슭에 있는 고려의 왕궁 자리로 왕궁의 넓이는 125만㎡. 원래 달을 바라보는 곳이라는 뜻에서 망월대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이 전해오면서 만월대로 되었다고 한다. 오늘 여기에는 궁터와 주춧돌만이 남아있다

4> 공민왕릉

만수산 언덕에 있으며, 고려 말에 왕권을 크게 떨쳤던 공민왕의 무덤으로, 규모가 웅장한 고려 시대의 대표적 왕릉이다.

개성에서 서쪽으로 약 11km 떨어져있다. 고려 31대 공민왕이 살아있을 때에 만든 왕과 왕비의 쌍무덤. 공민왕은 44살까지 살았는데 왕비가 죽은

다음 7년동안 이 무덤을 건설. 무덤의 아래쪽에는 구름무늬와 12지신을 부각한 화강암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그밖에 돌로 조각한 범과 양을 세워놓았다

5> 나성

도읍지를 둘러싼 성을 나성이라고 한다.

북한 개성직할시 개성시 외곽에 겹으로 둘러쌓은 외성.

6> 숭양서원

고려 말의 학자 정몽주를 기리기 위해 1573년에 세운 서원이다.

개성시 선죽동 소재. 사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이고,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었다.

7> 현화사 7층 석탑



고려 초기의 탑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탑을 쌓은 솜씨가 세련되었다.

개성시 장풍군 월고리에 있는 고려 초기의 석탑. 국보급 유산. 현화사는 1018년에, 현화사 탑은 1020년에 세워졌다. 높이는 8.64m로 고려 시대 탑으로서는 큰 편에 속한다. 각 탑신마다 불상과 연꽃을 조각했으며 기단부(받침대)에 벽돌처럼 돌을 쌓은 것이 이색적이다. 현재 현화사는 없어지고 그 터에 이 탐과 현화사비, 당간지주, 돌다리 등만이 남아 있다.

8> 경천사 10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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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건립된 대리석 석탑. 국보 제86호. 높이 13.5 m.

원래 경기 개풍군(開豊郡) 광덕면(光德面)에 있었는데 한말에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가 불법으로 해체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그 후 반환되었으나 파손이 심하여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회랑에 방치되었다가 1959~60년에 재건되었고, 다시95년 해체된 후 문화재연구소·한국자원연구소·원자력연구소의 공동작업으로 98년까지 완벽 보존처리하기로 하였다.

석탑의 형식은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신라형식을 이은 평면직사각형이다.

당시에는 이미 새로운 양식인 다각(多角) 석탑이 나타났으나, 이 석탑은 그런 유형을 따르지 않은 특수한 형태를 갖추어 이색적이다.

기단(基壇) 평면(平面)은 ‘亞’형으로 3단이고, 탑신부는 1∼3층이 기단과 같은 평면이나, 4층부터는 직사각형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체감(遞減)되었다.

각 층마다 옥신(屋身) 밑에는 난간을 돌리고, 옥개(屋蓋) 밑에는 다포(多包)집 형식의 두공(枓) 형태를 모각(模刻)하였으며, 상면에는 팔작집 형태의 지붕 모양과 기왓골을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세부의 조각은 기단과 탑신에도 새겨져 있는데, 기단에는 부처·보살·인물·화초·용 등이, 옥신에는 13불회(佛會) 외에도 부처·보살·천부(天部) 등을 빈틈없이 조각하였다.

그 수법이 장려하면서도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히고 우미(優美)한 풍취가 넘친다.

이러한 형태의 석탑은 조선 전기에도 나타나지만 유례없는 희귀한 일품(逸品)이다.

초층 옥신의 이맛돌에 새겨진 조탑명(造塔銘) “至正八年戊子三月日”이란 기록에서 그 건립연대가 1348년(충목왕 4)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원(元)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9>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

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 보물 제218호. 화강석제.

높이가 l8.12 m나 되는 커다란 불상이라는 점과 토속적인 조각이라는 점에서 대표적인 불상이다.

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삼각형이며 옆으로 길게 째진 눈, 넓은 코, 한일 자로 꼭 다문 큰 입이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목은 굵고 삼도(三道)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매달린 느낌이다.

몸은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돌덩이에 불과하여 인체라는 느낌은 전혀 없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관음보살인 것 같다.

어깨에 걸쳐 입은 법의는 어깨에서 양쪽으로 길게 내리고 있으며, 가로무늬가 있고 몸 중앙으로 몇 개의 U형 옷주름을 돌렸을 뿐 매우 단조롭다.

이 불상은 968년(고려 광종 19)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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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8각 9층 석탑 :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국보 제48호

 

팔만 대장경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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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국보 제32호. 고려시대. 해인사 경내의 2동(棟)의 경판고(經板庫)에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1995년 12월 석굴암·종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부석사 무량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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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 국보 제18호. 고려시대.

 

 


- 흑룡강성박물관 소장의 <대완>, 고려에서 만든 것이다.
 
흑룡강성을 대표하는 박물관은 할빈시내에 있는 흑룡강성박물관이다. 흑룡강성박물관에는 숙신의 <석촉>에서부터 발해와 료 금 송 원 명 청은 물론이고 근래의 유물까지 전시되어 있다.

지금의 흑룡강성이 한때는 숙신과 부여,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이었음은 분명하나, 흑룡강성박물관에는 부여와 고구려의 유물을 진열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볼때 박물관에 신석기시대의 유물로 전시되어 있는 링안(寧安)시 출토의 흑요석 <석촉>은 숙신의 이름난 활촉이다.

흑룡강성박물관 2층의 원나라시기의 유물진열관에 <대완(大碗, 접시)>이 원나라의 자기로 전시되어 있다. 이 <대완>은 할빈시에서 출토된 것으로, 자기의 안쪽은 국화문이 백상감 되어 있고, 바깥쪽은 국화문이 흑백상감 되어 있다. 자기의 유약이라든가 상감기법을 보면 이는 원나라에서 만든 자기가 어니라 멀리 고려에서 만든 것이 원나라시기에 이곳까지 들어왔다가 출토된 것이다. 이 자기가 한반도의 남단인 전남 강진에서 만든 것인지는 검토되어야 하지만, 생산지인 고려에서 상당히 먼 곳까지 온 것만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흑룡강성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박물관은 할빈에서 떨어진 아성(阿城)시에 있는 <금상경역사박물관(金上京歷史博物館)>이다. 즉, 금나라의 첫 수도인 상경 인근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는 역사박물관이다.

여기에 전시되고 있는 아성의 백성(白城)에서 출토된 금대의 <항해경>과 <쌍용경>은 고려의 동경과 쌍둥이처럼 똑 같다. 고려동경이 금나라시기에 이곳에 온 것인지, 금나라의 동경이 고려로 간것인지, 아니면 당시에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것을 복제한 것인지가 연구되어야 할 유물이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아성에서 출토된 문진인 <구형진지(거북이형 문진)> 역시 고려시대의 유물과 유사한데, 고려의 것은 금나라의 것보다 약간 더 크고 더 뚜렷하게 잘 생겼다.

이러한 유물은 상당히 더 있을 것인데, 이들 일부만 보더라도 고려는 금나라나 원나라와 상당히 교역을 하였던 점을 잘 알수가 있다. 타국의 먼 북방에서 우리 선조들이 만든 유물을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서울=뉴스와이어)
 

- 금상경역사박물관 소장의 <항해경>, 고려의 것과 똑같다.

- 금상경역사박물관 소장의 <쌍용경>, 고려의 것과 똑같다.



- 금상경역사박물관 소장의 <구형진지(거북이형 문진>, 고려의 것과 거의 같다.

2008.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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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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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두 그숙제 오늘하는데....

2008.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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