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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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평화의 종 상징
내부숫자22를 우뢰로 형상화
청색통일염원 평화상징

1 개요

대한민국 육군보병 사단. 거꾸로 돌아가는 눈룡부대. 외쳐EE!!

8군단 소속으로 부대의 별명은 율곡부대. 창설 당시의 별명은 뇌종레종부대였으나 2003년 변경되었다. 율곡 선생의 고향과 같은 영동 지방을 책임지는 부대라는 이유와 강릉은 23사단인데? 유비무환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 결정적으로 율곡 선생의 이름과 사단명이 같은 것이 주효했다. 22!!

이와는 별개로 부대 마크 때문에 생긴 콘돔부대라는 별명이 있다. 또한 아래의 무수한 사고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별들의 무덤으로도 악명이 높다.

2 역사

장교의 무덤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 4월 21일 강원도 양양에서 제25보병사단과 같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8년 12월 24일 해체되었다가 1975년 8월 1일 강원도 고성에서 동해안 경계강화를 위해 제88보병여단으로 창설된 이후 1982년 8월 16일 증편되어 다시 제22보병사단으로 재창설되었다.
최근 몇년간 다시 경계 여단으로 바뀐다는 소문이 돌고있다고 하는데 정확히 아는 사람은 추가바람. 2011년 1/4분기를 기점으로 인접 군단 및 예하 사단,22사단 및 8군단 관계자 간에 약식 토론을 수차례 진행 하였으나 별 다른 성과가 없이 끝이난 적이 있었다. 이후 2012년 경 경계여단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이 있었으나 흐지부지되었다. 사실 이전부터 사단이 이동하거나 전환 혹은 해체까지 별의별 말이 나온 상태였고, 심지어 영월로 이동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3 환경

현재의 주둔지는 강원도 고성군이며 휴전선의 동쪽 끝을 담당한다. 서쪽 끝의 제1보병사단과 함께 GP, GOP경계와 해안(1사단은 강안) 경계를 동시에 맡는 유이한 부대.

일단 강원도답게 환경은 혹독하다. 하지만 태백산맥 중턱에서부터 해안선까지 맡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고도가 낮아서 옆동네 부대만큼 악명 높지도 않고800고지 넘어가고 1000고지에서 진지공사 하는데? 동해안이라 강원도 중부 전선의 다른 부대들보다 춥지도 않다. 겨울에도 영하 10도로 내려가면 상대적으로 추운 날씨로 생각할 정도. 서울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여기는 강원도, 대한민국 최북단이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산맥이 바다로부터 부는 바람을 막아주는 벽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눈이 많이 내린다. 대표적으로 14년 영동 대폭설. 전방GOP지역에는 3미터가 넘는 눈이 쌓였다고 한다.2주동안 해가 한 번도 안 떴다. 진짜로 다만, GOP, 해안경계 지역은 바람을 그대로 두드려맞는다. 거기다 바닷가는 파도가 높을 경우 초소로 물방울까지 들어오면서 더 춥다. 체감온도 -40도는 우습게 내려가는 정도.
해안쪽은 여름에도 8월이 넘어가면 꽤 춥다. 야전상의를 못 입게 하기 때문에 안에 내복을 입고 위에 전투복을 입는 경우가 있다. 거기다 비까지 오면 진짜 추운 밤이 된다. 덕분에 낮에는 생각보다 덥진 않다.

지리적으로 대한민국 영토의 실질적 최북단이다. 서해 5도보다 위도가 높고 사리원과 비슷하다! 북쪽 끝에는 통일전망대를 운영하고 있으며 관광차 방문도 가능하다. 이렇게 위도가 높은 이유가 휴전선이 고성 부근에서 갑자기 위로 급커브를 틀기 때문인데 그렇기 때문에 22사단에서 철책경계 서는 병사들 대부분은 북쪽이 아니라 서쪽, 혹은 서북쪽을 보고 있다(...) 서쪽 끝은 산악지대, 동쪽 끝은 해안선이기 때문에 담당 지역의 고도차가 가장 큰 부대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좋은게 아니다 GOP 사단 중 담당 구역이 가장 긴 부대이기도 하다. 옆 번호 사단과 쌍벽 아래의 사건사고들은 이런 악조건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여담으로 부대마크 때문에 타 부대 출신들의 눈에 22사 출신들은 절대피임의 강자! 로 보이지만 그딴 건 없다. 근데 묘하게 설득력 있다... 외박나가도 사람을 만날 수가 없으니 당연하지

4 편성

  • 이전까지는 부대의 고유명칭을 작성하지 말라고 했으나 22사단의 경우 이미 뉴스 등을 통해서 부대편성이 알려졌으며 그 외에도 매체나 지휘관 취임 및 이임식 행사 등으로 언론에서의 고유명칭 노출이 일상화된 바 군사기밀을 보호하는 선에서 고유명칭을 기재하고자 한다.
  • 53연대(일명 북진연대) : 해안 경비를 맡고 있다. 책임 구역이 해안이라 평탄하다는 이유로 아래 두 연대에 비해 책임 구역이 길다. 거기다 책임 구역들 중에 해수욕장도 있어 여름만 되면 고역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단 내 연대 중에서 상근이 근무하는 유일한 연대이기도 하다. (97년 군번부터 상근이 들어와서 96년 군번보다 일찍 제대하기도 했다. 천하의 개불상놈들)
  • 55연대(일명 쌍호연대) : 내륙 GOP를 맡고 있다. 다른 두 연대와 달리 산악지역을 맡고 있어서 소초간 책임 구역이 짧은 편이다. 하지만 무릎 나가는 건 별 차이 없다 원래 현재 책임구간보다 더 짧았으나 조금씩 넓어져서 지금의 구역 처럼 되었다. 그래서 그 덕분에 연대의 섹터에는 말로만 듣던 천국의 계단 , V밸리 , 맥도날드가 다 있어 , 이 연대의 GOP에 투입되는 장병들은 투입3개월 내외로 전부 하체가 튼실(...)해진다. 노무현 벙커가 이 연대 책임 구간에 있다. 참고로 고 노무현 전대통령은 바로 옆 육군 제 12 보병사단 에서 근무 하였으며, 해당 책임구간은 12사단에서 22사단으로 소속부대가 변경되었다.

55연대 수색중대는 뜬금없이 2010년 하반기에 재창설 되다시피 했는데, 거의 대부분의 병력이 전출되고 극소수의 병력만을 남긴 상태에서 사단 내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재창설 하였다. 당시 연대내에선 별의별 소문이 돌았는데, 가장 유력한 소문은 "수색대 전입신병에게 선임들이 격려를 했는데, 신병은 이를 부조리로 인식하여 집에 알렸고, 신병의 아버지가 모 사단장과 막역한 사이라 술자리에서 이를 이야기 했다고 한다. 이 사단장은 결국 22사단장에게 이야기를 했고, 자기부대에서 일어난 일을 동료사단장에게 들은 22사단장은 격분하여 55연대장에게 수색중대 관리를 지시했고, 안그래도 이런저런 일로 시달리던 55연대장 역시 격분하여 수색중대 병력 대부분을 예하부대로 흩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역시 내려온 병력들이 그나마 이게 맞는 거 같은데 확실하진 않다라고 하여 진실인지 아닌지는 불명이나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한다.족발의 저주다족발이었다니(...)당시 3대대에서는 선임들이 밥 많이 먹으라고 줬고 신병 하나가 이를 부조리로 보고 외부에 알렸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하여튼 서로간의 교차검증이 엇갈리고 있다. 족발이라는 말은 중대회식이나 소대회식 당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인지.....
여담으로 55연대 수색중대의 GP시설은 사단 내 뒤에서 1등이라 카더라.[1]

특기할 점으로는 55연대 3대대는 2007년 과학화훈련 당시 3참호에 진입했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2010년 7월간에 실시한 훈련에서는 2참호에 진입하기 전에 타임아웃되었다. 이에 대해서 자세히 보자면, 해병대의 과학화훈련 승리소식에 묻혀서 별다른 반응은 없으나 55연대 3대대의 3참호 진입소식은 2007년 당시 사단 전체가 격동할 정도였고, 당시 대대장은 대대장 보직 이후 연합사 혹은 국방부로 옮겨갈 정도로 인사평정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에 반해서 2010년 당시에는 방어에서는 대대장이 대항군 이등병에게 저격당하질 않나, 전차는 줄줄이 터지질 않나, 나중에는 진격하기 귀찮았는지 대항군이 지휘부에 포탄을 쏟아붓다 끝나는 등 완전히 털렸고(당시 10중대장이 넋나간 상태로 구호소를 배회하던 장면은 대대원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절치부심하며 세운 공격계획에서는 본부중대의 보일러관리병, 중대와 참모부 행정병, PX병, 전투근무지원병, 정훈장교까지 동원한 '특공대'로 3참호까지 진격한다는 계획이 포함된다. 공격 전 상황을 말하자면, 대대장은 대대원들과 함께 계곡에서 씻고 수영하고 있었으며 작전과장 등 참모부장교들은 집에 한달째 들어가지 못해서 한탄하는 상황이었다. 통제관이 이걸보고 "이 부대는 훈련을 하러온거야? 놀러온거야?"라고 말한 것은 아직도 전역자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을 정도이다. 이후 공격이 시작되자 '본부특공대'도 10시간 넘는 야간산행을 시작했고, 심지어 훈련장을 벗어나기 까지 했다. 다행히 특전사 출신 전투지원소대장이 길을 잡고서는 산과 계곡을 통해 장애물을 뚫어가며 2참호선 근교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본부특공대'는 졸고있던 대항군 초병(병장)을 제압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교전음을 청취한 청음조와 분대병력이 포위공격하여 중대장과 통신병, 전투지원소대장을 제외한 전원이 전멸하고 말았다. 아직 3대대 모든 병력이 1참호선에 달라붙은 상태이다 보니 대항군 전투분대장은 놀란 표정으로"군단 특공대인가?" 물었고, 정훈장교와 본부중대 병력은 "대대 본부중대이다."라고 말했다. 대항군 전투분대장의 말은 이후 본부중대에 널리 퍼져 통신소대와 참모부장교들은 영화 'A특공대'에 빗댄 "HQ특공대의 활약'이라며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분전에도 불구하고 1참호선을 뚫기 일보직전에 타임아웃되었다. 참고로 전투지원소대장은 홀로 3참호선까지 접근했으나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다쳤으며 본부중대장은 통신병만 데리고 유유히 3참호를 향하여 사라졌다. 통신병 말로는 나중에는 중대장마저 사라져서 자기 혼자 기어다니며 도망쳤다고 증언했다. (당시 본부특공대원들은 중대장의 행동에 대해서 은연중에 분노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중대장 홀로 대항군 지휘부까지 도달했다고 하는데, 이 부분에서 전역자들의 기억이 엇갈린다. 혹자는 전투지원소대장만 도달했다고 하기도 한다.
이후 사후강평에서 과학화훈련단장은 "55연대 3대대가 본부중대까지 투입한 과감함은 인정하나 지휘부 경비를 포기한 점에선 너무 위험했으며 적절한 급양지원을 계속해서 유지한 점은 귀감이 될만하다."고 하였다. 이는 훈련 시작시 전 훈련부대가 버리고간(?) 쌀 7포대를 인수하면서 급양지원에 여유가 생겼으며 결정적으로 대대 주임원사가 트레일러(일명 밥차)가 포격파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짬으로 밀어붙이며 식사추진을 강행했던 점, 사단에서도 군수참모를 위시한 참모부가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군수지원에 미친듯이 열을 올린 점이 주효했다. 정말 엄청난 양의 급양물자가 취사장에 들어왔고, 남아도는 취식물로 오죽하면 취사병들이 "물 대신 맛스타만 마시니깐 당뇨 걸릴 것 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 56연대(금강산연대) : 내륙 GP, GOP와 해안 경비를 맡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GP, GOP와 해안 경비를 동시에 맡고 있는 유일한 부대. 그중 내륙1소초는 해안과 내륙을 동시에 맡는 유일한 소초. 아래에 설명되어 있는 사건들중 이번에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이 연대 책임 구역에서 일어난 일이다.[2] 연대의 이름답게 날씨가 맑은 날에 GP, GOP 구역에 따라서 금강산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북한과 가장 가까운 GP가 있는 곳이다.[3]
  • 포병연대 : 예하에 육군 제1512부대, 육군 제2129부대, 육군 제3150부대, 육군제5318부대(연대본부 파견이 꿀)가 있다. 육군 제 7830부대도 있다.(참고로 7830부대는 고성산불사건때 부대를 벗어날 수 없었던 슬픈 전설이 있으며 1997년에 드럼세탁기가 들어온 나름 선진적인 부분이 자랑.) 보병연대에 비해 포병연대는 사건사고가 '그나마' 적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추진포대(중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게다가 사단훈련 기간 중 기상 전에 사단장이 '침입'하여 사병식당을 턴 적도 있다.

참고로 2009년 당시 공지합동훈련 복귀행군에서 마좌리 대대를 지나던 55연대 3대대원들은 신식시설에 넋을 잃고 대학교로 착각하였다. 22사단 포병연대 주둔지는 송강포대 등을 제외하면 그 시설이 굉장히 좋다. 송강포대는 2012년도에도 나무관물대를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때 왜 여기만 후진시설을 사용하는지 열띤 토론이 벌어졌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 공병대대 : 과거 화학대가 사용하던 자리에 현재의 공병대대가 주둔하고 있어 막사는 아직까지 구막사를 사용 중. 한 때 영외중대[5]를 운영 하였지만 리모델링 이후 모든 중대가 현재의 위치에서 생활하고 있다. 여담으로 영외중대에 속해있던 중대는 본대와 떨어져 있던 관계로 부조리의 정점을 찍었으나 본대로 다시 돌아온 후 부터는 부조리가 점차 줄어들어 정상적인(?) 중대로 변하였다.

— 정비대대 : 사단내 모든 장비를 수리하는 곳으로, 전장비때 지겹게 볼 수 있다. 본래는 88여단 병기근무대로 출발하여 이후 사단으로 편제가 승격되면서 정비대대가 되었다. 정비 - 보수 -의근 대대는 사실상 담만 넘어가면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배치되어 있다.

— 보급수송대대 : 8군단에서 보내주는 밥과 각종 물자를 분배해준다. 위의 정비대대와 마찬가지로 보급계원이나 군수계원, 병기계원이면 셋트로 지겹게 다녀볼 수 있다. 묘하게도 보병부대에서는 보급수송대대원들이 남아도는 보급품이 많아서 풍족한 생활을 할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2010년 말에 당시 보급수송대대장이 직접 사단내를 시찰했는데, 사단내 보급이 너무 엉망이어서 이를 개선하고자 조사결과를 배포하였다. 그 중 하나는 면도날이 보급되지 않아서 수염을 기를 수 밖에 없었던 안습한 사례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세탁기를 보유하고 사단내 침낭을 주기적으로 세탁한다. 모 보급병은 세탁기 사이에 앉아 잡지를 보던 세탁병을 보면서 부러웠다 카더라....
— 화학지원대 : 원래 공병대대가 사용하던 부지에 커다란 통합막사를 구축하여 정보통신대대와 함께 사용 중이다. 자체적으로 NBCRV를 운용하나 주행교육 및 정비를 할 곳이 마땅치않아 바로 근처의 전차대대에 의탁하여 정비 및 교육을 실시한다.

— 수색대대 : 송중기가 갔다온 그곳이다. 지금은 수색병을 병무청에서 따로 뽑지만 불과 2011년 이전까지는 신병교육대에서 선발했다. 그때 당시에는 전방시설 위주로 홍보하여 모두가 신막사에 낚였다. 그러나 정작 페바에 위치한 대대건물은 다쓰러지기 일보직전으로 화장실조차 문짝을 보수하지 않는 수준이다. 어찌나 심한지 유격때마다 치중대로 온 인원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본 위키니트 역시 2009과 2010년, 유격으로 두 번 방문했는데 2009년에 부숴진 문짝이 2010년에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12년도 초기에는 아예 텅텅 비어있는 생활관이 있고 낮에도 내부가 어둑했다. 또한 한쪽 출입문은 다 때려부쉈는지 비닐로 문짝을 만들어 놓은 곳도 있었다. 깨끗하게 관리되는 시설도 있는 반면에 화장실만큼은 정말 유지보수가 안된다. 그에 반해 전방시설은 완전히 다른 최신식 시설로 깨끗하고 온수샤워가 가능하다. 유격장에서 제일 가까운 부대이다 보니 치중대가 수색대대 시설을 빌려서 사용하는데 그로 인한 마찰도 약간씩 있다. 마찰이 심해지면 훈련부대 취사병과 수색대대 취사병이 대판 싸우는 일도 발생한다. 가령 2009년에는 55연대 3대대 취사병과 수색대대 취사병이 대판 싸우기 일보직전까지 갔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식수였고 그다음은 잔반처리문제였다. 오죽하면 치중대 인원이 취사장내 정수기를 이용하려고 하면 사용을 불허하고 취사장 출입을 금지하였다. 그러다보니 3대대 취사병과 치중대 인원들은 나중에 주임원사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면서 이러한 견제를 해결해야 했다.

— 의무근무대 : 의무근무대 PX는 팍팍한 22사단 생활에서 유일하게 젖과 꿀이 흐르는 공간이다. 단 외진자 한정이다. 외진을 나가게 되면 통제가 잘 안되고 지루하다보니 결국 PX에서 먹는 것이 낙이다. 그러다보니 자대와 달리 별다른 통제가 없는 의무근무대 PX는 외진자들의 천국이었고 언제나 북적북적거렸다. 그러다가 외진 온 인간들이 PX에 몰려있는 것이 딱하다고 생각했는지 2010년 부터 PX에 조금씩 통제가 가해졌다. 의외로 대부분의 진료과목을 해결할 수 있으며 여기서 안되면 강릉병원으로 가야한다. 그에 반해서 시설은 깨끗하지만 오래 되었다. 특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대략 쌀과자 냄새와 비슷하다)
— 정보통신대대 : 앞서 서술한 화학대와 같은 건물에서 생활한다. 해당 건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기에 1, 2층을 동시에 사용하며 사단 본부대 전체 면적중에서도 정보통신대대가 사용하는 부지가 제일 많은 편. 사단 본부 내부에 큰 규모로 사단 PX를 운영하고 있지만 통신대대 자체의 PX도 자그마하게 운영하고 있다. 또한 통신 업무를 해결하기 위해 사단 지통실이 있는 벙커 근처에 통신센터를 운영, 병사들이 근무하고 있다(교환병, 설치병, 암호병, 팩스병, 무전병). 평소에는 창고에서 장비보수를 하거나 연병장에서 통신망 개통 훈련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저런 통신망 보수 작업이나 훈련, 이런저런 행사에도 필수적으로 참가하는 부대.
— 헌병대 : 사단 영창과 헌병들이 생활하는 생활관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안습하기 그지없는 본부대 보다는 사람이 살 수 있을 만한 환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한 때 영창 보수공사 관계로 사단에서 발생한 영창 입소자들은 군단 헌병대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 전차대대 : 제1야전군 예하 전방부대 답게 M48A5K2 전차로 무장하고 있다. 고성군에서 전차대대가 유명한 이유로는 학야리에 위치한 전차포 사격장 이전문제로 고성군민과 국방부의 줄다리기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학야리 전차포 사격장에는 비단 22사단 뿐만 아니라 23사단 전차중대와 102기갑여단 역시 훈련을 오는 통에 고성군에서 제일 큰 민원 중 하나이며 주민들의 청원이 이어졌다. 이후 2010년 학야리 전차포 사격장 확장사업이 취소되고 주민에 대한 피해실태 조사가 이루어졌다. 뒷문엔 일명 '학야리 할머니'라고 불리는 혼자 살고 계시는 할머니가 있는데 하필 사격장으로 가는 길에 집이 있어서 전차가 지나갈때 모래먼지가 심하다는 이유로 몸으로 막은 전설적인 사건이 있다. 이후 반드시 살수차로 땅을 적시고 이동한다. 카더라에 의하면 슬랫아머를 본 사단장이 '우린 저런거 없나'라고 말하는 바람에 담당이 된 선임중대의 정비반 간부들이 달려들어 후방 엔진용 탈착식 슬랫아머를 시험용으로 소수 만들었다고 한다. 어떤 의미론 야전개조. 수년 전만해도 x중대가 영외에 있었으나 태풍에 의해 막사가 크게 박살나서 본 전차대대 영내로 들어왔다. 때문에 3개 중대를 수용할 막사에 4개 중대가 억지로 낑겨서 사는 중(...) 때문에 신 막사 떡밥이 계속 나왔지만 매년 엎어진다. 그냥 막사 짓는다고 땅 파고 철골 박기 전까진 믿지말자. 사단 본부대와 가까워 사단본부를 찾은 면회객이 전차대대로 오고 전차대대를 찾으러 온 면회객이 사단본부로 잘못 찾아가는 경우도 종종 있는듯. 본부소대 및 본부 중대를 제외한 모든 병사가 상무대의 기계화학교를 거쳐서 월별로 묶여서 온 다음 중대별로 뿌리기 때문에 옆중대라도 같이 오면 동기라는 의식이 강하여 타중대라고 아무생각 없이 아저씨라고 불렀다간 그 아저씨가 당신의 선임한테 '얘가 나한테 아저씨라던데?' 라고 하고 선임이 '어 그럼 나도 아저씨라고 부르지 그래'라고 갈구는 공포체험을 할 수 있다. 옆중대라도 눈치봐서 나보다 선임이면 곱게 선임취급해주자.

— 신병교육대대 : 신병교육대대로 각 1,2,3,4,5중대로 구성되어있다. 시설은 2014년 기준 4중대가 제일 후지다(물이 없어서 대변을 옆 중대에서 해결할 정도였던 적도 있으니 ,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5중대는 분대장 교육생들이 사용하며, 본부중대 인원도 같이 생활한다. 경우에 따라서 주특기 교육을 받는 인원들(K3 , 60mm , 81mm , 4.2"박격포)이 주말동안 대기할때 사용하기도 한다. 이때 , 조교가 PX에 데려다 주는 경우도 있다. (본 위키니트가 그랬다.) 물론 저런 케이스는 극히 드물다. 참고로 신교대대 내에 재훈관이 있다. 이 재훈관은 고 정재훈 중위을 기리는 의미로 건축된 강당으로, 정재훈 중위는 1990년 북천 도하 중 휩쓸린 소대원을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정기적으로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별다른 특징은 없으나 마을과 굉장히 가깝고 신병교육대대의 위치가 관광지와 멀지 않아서 모텔이나 호텔의 네온사인이 밤에 보인다. 행군코스도 관광지와 마을을 경유하기 때문에 은근히 대민접촉이 많다. 문제는 두 가지로 시설이 열악하다는 점이다. 대체 돈을 어디로 쓰는 지 시설보수가 굉장히 느리다. 어떤 경우 아예 안하는 경우도 있어서 간부들도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단, 화장실 등은 리모델링하여 깔끔하다. 또한 생활교육내용과 현실이 달라서 신병교육대는 "잘 못 들었습니다"로 가르치는 반면 55연대는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라고 해야한다. 본 위키니트도 이게 입에 붙는 데 시간이 걸려 고생을 하였다. 짧으면 짧다고 갈구고 발음이 부정확하다 갈구고 갈굼의 주재료로 충분했다.(물론 짬좀 되면 저게 극단적으로 줄이고 빨리 말하는 것을 얼핏 옆에서 듣게 되면 "다시마스까?" 로 들리기도 한다.)어쩌면 같은 사단임에도 생활에 대한 전수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56연대의 경우는 조금 나은 경우로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신병교육대 식당 가는 길에는 약간 허름한 건물이 있는데, 브라이트 캠프이다. 신병들은 간판을 봐도 짐작조차 못한다.(이건 사실 브라이트 캠프를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면 22사단 전역자도 잘 모를 것이다.) [6]
— 보충대 & 브라이트 캠프 : 22사단 전입병력의 관리를 맡으며, 관심병사들의 적응을 촉진하고 심리치료를 위해 임시배속되는 부대이다. 보충대 자체는 별다른 특징이 없으나 브라이트 캠프는 사단내에서 유명하다. "너 브라이트 캠프 갈래?" 이 말은 지휘관이 "너 어딘가 문제있으니깐 거기가서 쉬다와라" 이 소리다. 의외로 가는 것이 어렵고 누군가는 "영창보다 가기 어려운 게 브라이트 캠프이다"라고 말했다. 갔다온 병사의 증언에 의하면 정말 힘들어서 온 병사도 있는 반면, 본인의 부주의와 병무행정의 무관심으로 군대에 안와도 되거나 오면 안되는 사람이 와서는 온갖 기행을 하거나 신체적 고통을 호소한다고 한다. 프로그램 자체는 끊임없는 상담과 외출, 봉사활동으로 단조로운 편이다. 브라이트 캠프에 입소하면 부대가 바뀌는 게 아니기 때문에 브라이트 캠프을 관리하는 관리병과는 아저씨(!)이고 관리병도 별로 간섭을 안한다. 관리병은 다시 보충대에서 관리하지만 자대에서 파견(!)된 형식으로 운영된다. 즉 관리병은 파견병력이기 때문에 전역 직전에 원복해야 한다. 실제로 상병 초에 파견가서 전역 이주일 전에 원복하여 말년휴가 갔다오고 3일 대기 후 전역한 사례도 있다. 브라이트 캠프 자체가 훈련이고 나발이고 다 씹어먹는 조직이다보니 관리병은 시간이 넘쳐흐른다고... 참고로 모 병사가 여기에 입소하는 위해 했던 삽질로는 불침번 근무시 잠자기, 선임에게 대들기(분대장이 아니니깐 지휘간섭을 할 수 없다라는 규정을 악용), 군생활을 하기 싫다며 심리검사 조작하기, 가는 곳마다 분쟁을 일으키고, 군 생활 하기 싫다며 구속시켜 달라고 땡깡부리기(당시 법무참모는 이런 사례가 없다면서 심사자체를 거부), 1종 창고내 부식을 제멋대로 꺼내먹고, 만나는 상담관마다 자살할 것 같다며 징징거리기, 그러면서 후임들에겐 폭언과 폭행을 가하기 등등이다. 이러한 삽질은 나중에 사단 인사참모가 대대장으로 부임하여 원큐에 영창+브라이트 캠프 패키지로 보내버려 약 2달간 부대가 편안했다. 입소기간은 해당 병사의 상태를 보고 탄력적으로 운용되는 데 장기입소는 불가하고 길어질 것 같으면 군사령부 복무심사대로 보내버려 택일하게 만든다.
— 제2 신병교육대대 : 기초군사훈련은 신병교육대대에서 전담하고, 주특기를 받아야 하는 인원들이 이곳으로 배속된다. 원래 북진연대 소속의 한 대대로, 주로 실거리 위탁사격이나 공용화기 사격등을 위한 거대한 사격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정책의 변화로 제2 신병교육대대로 변하게 되었다. 훈련병들이 생활하는 공간은 신막사로 신병교육대에 비하면 정말로 깔끔하다. 현재는 제1신병교육대대와 통합되었다.
— 본부근무대 : 사령부 내부에 있으나 건물이 매우 작다. 건물도 오래되고 보수도 잘 안되어 안습한 생활환경을 자랑한다.


— 해안감시장비운용대 : 군생활 내내 해도 만나기 쉽지 않은 부대이다. TOD와 같은 감시장비를 운용하는데 다른부대의 훈련에도 참여하기도 한다. 2년간의 페바 군생활 중 딱 1명의 운용대원을 봤을 정도로 꽤나 희귀하지만 전방에 올라가면 매일 같이 본다고 한다.


— 방공중대 : 큰 훈련때나 볼 수 있는 부대이다. 훈련때 지나가다 보면 길가에 대공포에 앉아 쉬는 방공중대원들을 볼 수 있다. 정보통신대대, 화학지원대와 같은 건물을 사용.

  • 동해선 경비대[7] : 금강산 육로관광을 맡고 있는 부대. 대한민국에서 유니크한 부대이다. 부대원이 많은 곳이 아니기에, 가끔 신교대에 신병 차출을 하러 올 때를 노려서 들어가야 한다. 그나마도 훈련병중 소수 인원을 사전에 선발하고, 해당 선발 인원중 지원 희망자만을 걸러낸 뒤 최종적으로 한두명이 합격한다.[8] 무엇보다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전입하기 힘든 부대. 사족으로 금강산 사업이 중단된 시점에서는 해당 부대 간부도, 훈련소 간부도 모두 인정하는 22사단 최고의 꿀부대. 그래서 高스펙을 모아놓는 것일수도 있다. 이러니 사고의 중심이지

동해선 경비대는 56연대 GOP 내륙 1소초와 바로 붙어있다. 노크 귀순 당시 귀순자가 동해선 경비대를 먼저 노크했지만, 워낙 꿀이 흐르는 부대이다보니 불침번도 없이 자고 있었고 귀순자는 옆에 있는 내륙 1소초로 와서 귀순하였다.

참고로 내륙1소초와 동해선경비대는 같은 보급로를 사용하는데, 눈이 와서 보급로 제설작전 시 조금만 도와달라고 해도 안 도와주고 그냥 지들끼리 족구하고 그랬던.. 일이.. (10~11년 사이)

각 연대 및 직할대들은 삼각형 모양의 비표를 사용하였으나 2011년 부로 비표 사용을 폐지 하였다.

5 사건/사고

육군 통틀어 부조리가 가장 심각한 부대. 사단계의 관심병사.
28사단과 영혼의 투톱. 별들의 무덤이자 악마의 보병사단.
들이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구나. 별똥별도 떨어지고 있어!

부대원 및 거동수상자가 철책선을 뚫고 월북하거나 북한군이 월남하는 사건이 다른 최전방 주둔부대에 비해 상당히 많다. 헌병대에서 내려오는 메일을 보면 22사단의 사건/사고 내용이 자주 들어가 있다. 한 마디로 22사단의 주요 임무인 동부전선의 경계에 문제가 있는 셈인데 동부전선에서도 최동쪽을 사수하는데다 해안경계까지 맡다 보니 아무래도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을 듯 하지만 휴전선을 사수하는 단일부대에서 이런 사건들의 빈도가 최근에 들어서 유독 높아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고 부대 입장에서도 곤혹스러운 상황이다.괜히 22사단이 별들의 무덤이 아니다. 덕분에 8군단장은 좌천이라는 소리까지 듣는다. 사실 8군단 예하중 사건사고 없는 부대는 102 기갑 하나다.

2009년 24대 이양구 소장, 2010년 25대 조보근 소장, 2011~2012 26대 조성직 소장, 2012~2014 27대 서상국 소장 중에서 유일하게 중장으로 진급한 사람은 조보근 소장이다. 김종대 군사평론가의 저서 서해전쟁과 위기의 장군들에 의하면 이양구 소장의 경우 민간인 월북사건 좌천되었는데, 여기에 노무현 정부 사람이라며 더 이상 등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양구 소장은 결국 2012년 10월에 예편하였다. 조성직 소장의 경우 그나마 국군사이버사령관을 역임하였고, 더 이상의 진급은 못한 채 15년 12월에 전역하였다. 서상국 소장의 경우 2015년 현재 육군 훈련소장을 역임하고 있다. 서상국 소장 후임인 28대 최병혁(육사 41기) 소장이 사단장으로 취임한 이후 일단 뉴스에는 나오지 않고있다. 최병혁 소장은 사단장 역임 이후 현재 육군본부 감찰실장으로 영전했으며 후임으로 29대 김정수(육사 43기) 소장이 2016년 5월 현재 취임하였다.

육군 법무실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이후의 경계소홀로 인한 징계 20건 중 16건이 22사단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병사들의 탈영자살 사건도 알게 모르게 많이 일어나는 사단이기도 하다.

5.1 1984년 조준희 일병 총기난사 및 월북 사건

1984년 6월 26일 오전 10-11시경 강원도8 동부전선 까치봉에 있는 22사단 56연대 4대대 TOC상황실에서 522GP로부터 아비규환의 전화보고 소리와 수류탄 폭음이 들리며 사건이 알려진다.초기접보시에는 북측의 강습으로 판단했으나, 해당 GP 소속 상황병인 조준희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M-16 총기를 난사한 뒤 휴전선을 넘어 월북한 것이었으며 사건 바로 다음 날 조 일병의 대남월북권유 방송을 통해 조 일병의 월북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다.

이 사고로 내무반에서 잠자던 사병들이 수류탄 파편과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지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특히 북으로 도주하던 조 일병을 뒤쫓던 13전초중대 수색대원들도 발목 지뢰를 밟거나 신병의 오발사고로 인해 현장에서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도 추가로 발생했다. 이 사고와 관련하여 모두 15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해당 GP 신임 소대장 소위는 몸을 숨기고 있다가 살아남았으며 이 사건으로 당시 사단장 장기하 소장, 연대장, 대대장 곽근용 중령 모두 보직해임/전역 조치되었다.

최전방 부대로 강제 배치된 조준희 일병의 범행 및 월북 동기는 여러가지로 조사되었지만 제5공화국 출범기였던 1984년 당시의 정치상황과 연계된 자생 공산주의자라는 설과 군대 내의 폭력 문화의 비극이란 설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강제입대한 상황인데다 월북 직전에 휴가 때 여자친구와 이별하는 등의 행동을 볼 때 전자가 범행동기로 강력히 대두되었으나 조 일병의 대남 방송 내용에 따르면 군대 내 폭력이 원인인데 자신이 대학교를 다니다 입대한 것을 가지고서 선임병들이 데모하다 끌려왔냐는 식으로 비아냥대며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한다. 제5공화국 당시에는 대학 교수의 울며 겨자먹기식 승인하에 운동권 대학생을 강제 입대시키는 지도휴학 제도가 있었다. 국군보안사령부가 학생운동을 와해시키기 위해서 주도한 일명 녹화사업으로 이는 역사 드라마 제5공화국 이나 삼김시대에서도 묘사된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 자는 자신의 전우를 살해한 중범죄자이다. 당시 시대가 암울한 상황이라고 이자의 범죄를 물타기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사건의 규모나 파급효과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국군 창설 이래 최악의 총기사고로 기록될 정도로 상당히 심각했다고 볼 수 있지만 5공 정권하에서 보도가 통제되는 바람에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고 일반 군 사고로 처리되어 피해자들은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한편 동료를 사살하고 월북했던 조 일병은 월북 이후 매일 밤 대남방송을 통해 월북을 권유하는 방송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22사단 부대원들은 매일 저녁 전방 경계근무를 설 때마다 조 일병의 대남방송을 들으며 치를 떨어야 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북한 방송에 종종 나온다고 한다.

5.2 2009년 민간인 월북 사건

2009년 10월 민간인 강동림(30세)이 22사단 지역 철책을 자르고 월북한 사건. #

거동수상자가 몰래 철책을 자르고 월북한 일은 2005년 철원 이후로 2번째다. 황당한 일은 북한이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방송할 때까지 철책에 구멍이 난 줄도 몰랐다. 참고로 범인은 22사단에서 근무했었다. 폭행 전과로 수배중이었으며 검거를 피해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 교도소 가기 싫다고 지옥으로 제 발로 걸어들어가다니

당연히 사단이 무너지고 국방부가 뒤집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해당 초병들은 징계받았으며 해당 소초는 공중분해되고 FEBA에서 지원자를 받아 새 소초를 꾸렸다. 여담이지만 월북 흔적은 먼저 발견한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월북자가 왔다고 광고하는 것을 본 국방부에서 철책 정밀점검 지시를 내렸고 그 결과 절단 흔적이 발견되었다. 때문에 최초발견자는 발견 직후 포상휴가 갈 수 있겠다고 좋아했지만 현실은... 어쨌든 일주일 뒤에 잡혀있었던 연대RCT는 취소되고 그 위로 소초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까지 줄줄이 보직해임되었다. 이후로 사단이 전반적으로 빡세졌다. 워낙 빡신데 뭐가 더 빡세질 게 있지? 있다. PX금지, 노래방금지, 운동금지를 시킴으로써 일과가 끝나거나 주말에는 우울한 분위기에서 부대내에서 TV시청만 하였다 물론 연등도 불가능

후일담으로 대남방송 나오고 철책 정밀검사로 뚫린 곳이 발견되었을때 당시 8군단장이 헬기타고 급하게 와서 "아...뚫렸구나..."라고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후일담으로 사건 당시 55연대 및 56연대 병력 대부분이 훈련은 죄다 때려치고 전방 철책 보수, 시야확보를 위한 불모지 작업을 하러 11월~12월에 9XX고지 언 땅에 텐트를 치고 혹사당하며 굴려졌다.(월북사고가 발생한 지점은 56연대 관할로, 내륙 9소초~10소초 구간이다,) 심지어 전역이나 말출을 앞둔 말년 병장들도 내내 작업하다가 전날 FEBA로 내려온 뒤에 다음날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55연대, 56연대 08년 4월에서 09년 09 군번 출신자들의 전투복들과 활동복엔 흰 페인트가 여기저기 묻어있다는 전설이...

위 후일담을 보다 정확하게 보충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해당 순찰섹터를 담당하고 있던 대대병력이 통째로 갈려나감에 따라 FEBA로 철수했던 대대의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10월 한 달간 순찰에 투입했는데, 같은 시기 이미 보수공사에 투입되어있던 병력[9]이 있었다. 문제는 이 보수공사라는 것이 순찰로를 완전히 갈아내고 새로 건설하는 수준이었는데, 이때가 공사 초기였으므로 계단이고 뭐고 다 부숴놓은 상태였다는 점. 따라서 순찰병력들은 원래 계단이 2백개쯤 있었던 경사를 계단도 없이 오르락내리락 해야했고, 해당 지역의 토질은 비만 오면 진창이 될 만큼 좋지 않았다. 즉 오르다 미끄러지고 내리다 구르기를 반복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장비 손실이나 부상을 경험한 장병이 많다. 거기에 순찰을 강화한다며 본래 2회였던 야간경계근무를 전반야, 중반야, 후반야 3회로 늘리면서 병사들의 부담이 가중되었고, 하루가 멀다하고 현장에 찾아오는 장성들을 맞이하기 위해[10] 자는 병사들을 깨워서 작업시켰으므로 일부 병사들의 수면시간은 일 3시간까지 줄어들었다.잠은 재우고 갈아넣어라 쫌!!!

한 달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대체경계에 투입되었던 이 병력은 이후 치를 떨면서 FEBA로 철수했는데, 1주 후 이번에는 철책 및 순찰로 보수공사에 부대 전체가 투입되어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11월에서 1월 초까지이며, 해당섹터는 해발 500미터 안팎의 고도로서 이미 땅이 단단하게 얼어있었으므로 길을 만들 때는 먼저 언 땅을 곡괭이로 부숴야하는 악조건이었다. 당시 체감온도는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갈 때가 많았는데, 이 추위에 대한 현장의 대처란게 면장갑을 두 겹으로 끼는 것이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그 면장갑이 맞다. 여기에 보급로조차 포장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차량에 의한 추진은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중간부터는 벽돌이나 기타 자재를 병사들이 인력으로(!) 수송했다. 이 작업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무릎연골이 닳아 의병제대 판정을 받은 병사까지 있었다. 해당 병사가 체중이 많은 편이라 산악지대에서의 작업에 무리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인간적으로 지나치게 가혹한 작업량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보수공사병력과 순찰병력이 동숙을 하면서 40명 정원의 막사[11]에 200명 이상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추운 계절에 난방도 되지 않는 바닥에서 칼잠을 자야했던 것은 둘째치고, 생활용수가 극도로 부족했다. GOP 근무 경험자들은 알겠지만 전방의 군사시설들은 상수도로 물을 공급받는 게 아니라 지하수와 저수조로 자체조달한다. 적정인원보다 엄청난 숫자가 투입되면서 위생용수는 커녕 식용수도 부족해진 것. 거기에 공사작업은 아침식사를 하기도 전, 새벽 5시부터 저녁식사 이후 추가작업을 통해 오후 9시까지 진행될 때도 있었다. 병사들은 그야말로 극한상황에서 굴려진 셈.

그러나 이것으로 병사들의 고난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공사 완료 후 일단 FEBA로 철수했으나 이번에는 제설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인이 눈 치우는게 뭐가 이상하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 제설작업은 GOP 보급로와 순찰로를 포함하는 제설작업이었다. 당시 상부의 지시는 이랬다. "경계력을 강화하려면 경계병력은 경계만 해야한다. 그러니 FEBA 대대들이 GOP 대대가 해야 할 제설작업까지 소화할 것." 이것만 해도 악조건인데, 이 때의 FEBA 대대들은 병력도 부족했다. 일부 보병중대의 경우 110명 정원이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용인원이 50명 아래로 내려갈 때가 있었던것. 50% 이하의 가용자원으로 두 배 이상 불어난 작업을 수행해야했던 당시 FEBA 대대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며, 이는 경계력 강화를 위해 GOP 대대의 병력을 120%까지 충원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FEBA 대대에 신병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한 중대는 중대 전체에 이등병이 없었고, 일부 소대는 꺾인 상병이 막내였을 정도. 더불어 이 해는 강원도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던 때다.(그만해...) 하루에 4~50센티미터는 기본, 1미터의 강설량을 기록한 날도 있다.[12] 이로 인해 야간 경계근무 외에 야간 제설근무(!)라는 것이 추가되어 하룻밤에 두 번의 근무를 서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한편 GOP 제설작전에 투입된 병사들은 현장에서 동숙을 하거나 텐트를 치고 자면서 며칠 단위로 교체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6개월에 걸쳐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당한 셈이다.

자랑스럽게 떠벌린 경계력 보강공사의 결과가 결국 이런 식으로 병사들을 가혹하게 몰아붙인 결과물이었다. 단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이후로도 22사단에서 빈발하는 사건사고들을 보면 지휘부가 생각하는 현장과 병사들이 경험하는 현장에 심각한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다.

5.3 2010년 귀순자 완전작전

2010년 3월 북한군 1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의사를 밝히자 통문으로 인도해 신병을 확보하고 추격해온 북한군과 교전을 벌여 격퇴한 사건.

사실 그렇게 엄청난 사건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 벌어진 위 사건 때문에 떨어진 사단 사기를 올리기 위해 대대적으로 선전했다.[13] 사단장이 신병 교육대를 방문하여 이 사건을 가지고 훈시를 몇 번 하였다. 사실 귀순자 유도와 추격조를 격퇴한 일이 FM대로 돌아간 건 대단한 거긴 하다.

타부대의 경우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는데, 주구장창 인트라넷에서 홍보하긴 했었다.

실제 작전 참여자의 증언에 따르면 모두 성공한 작전은 아니다. 만일 1년전 민간인 월북사건이 없었다면 유공보다 징계가 더 많았을 것이나 부대 이미지 개선이 필요했기 때문에 포상위주로 이루어졌다. 귀순자 유도는 초병들의 발견으로부터 해서 잘 이루어졌으나, 조명지원까지는 완벽했는데 추적조 소탕에는 실패하였다. 중대병력이 개인화기(K-1, K-2)와 공용화기(K-3, K-4)를 갈겼으나 한명도 사살하지 못했다고 한다. 추적조가 물러가고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후일담으로 기무사에서 조사과정중에 넘어온 북한병사에게 라면 4개를 끓여주었는데 앉은 자리에서 국물까지 싹싹비웠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날 기무대로 들어간 치킨 2+1은 누가 먹은걸까?

5.4 2012년 북한군 귀순 사건

파일:Attachment/knock knock.jpg
어쌔신 크리드?
바로 윗 항목을 무색하게 하는 사건. 노크 귀순 사건이라고도 한다.
택배왔어요

10월 2일 북한군 중급병사(상병) 1명이 동부전선의 철책과 경계를 넘어 주둔지에 들어와 자고 있는 소초장을 깨웠다고 한다. 실제로는 당시 상황근무를 서던 상황간부가 깨웠다. 당시 대략적인 상황은 이러하다. 상황근무를 서던 전투분대장 아무개 하사가 소초 주변 순찰을 목적으로 소초 밖으로 나왔고, 순찰을 마치고 들어가려다가 동해선경비대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보니 아무리 보아도 아군으로는 식별되지 않아 일단 소초로 들어와 소초문을 잠그고 황급히 소초장을 깨웠다. 잠에서 깬 소초장 아무개 중위는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용감하게 문을 직접 열어 귀순자의 신병을 인도하였고, 이윽고 근무중이던 부소초장이 급히 소초로 복귀하여 귀순 경위 및 경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귀순자가 요깃거리를 요구하자 당시 후반야 분대장의 관물대에 있던 크라운산도 크림맛을 꺼내주었고 그것을 처음 보는 귀순자는 포장 개봉법을 몰라 가위를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부소초장은 본인이 직접 포장을 개봉해 주었고 귀순자는 그것을 맛있게 먹고 하나 더 먹었다고 한다. 이후 A형 경계태세가 발령되고 취침 중이던 소초 취사병이 일어나서 삼양라면를 끓여줬다고 한다. 이는 6일 뒤인 10월 8일에야 김광진 의원에 의해 수면 위로 떠오르고 비로소 기사화 되었다. 기사. 물론 크라운산도와 라면 이야기는 기사화되지 않았다.

이 쯤 되면, 철책에 자동문이 설치됐나 의심해야 할 판. 귀순자였기에 망정이지 무장한 특수부대였으면? 흠좀무. 게다가 상부에는 허위보고가 들어갔다고. 기사. 게다가 밝혀지기로는 처음에는 동해선 경비대를 노크했으나 응답이 없어 근처의 내륙 소초로 갔다고 한다. # 이 쯤 되면 북한군이 그동안 이쪽으로 무력도발 안해준 게 다행일 정도다.

당연히 22사단은 또 다시 뒤집어졌다. 간다! 헌병대, 영창은 충분한가? 22사단 병사들은 망했어요. 09년에 사단이 싸악 뒤집어지면서 물갈이 되었을 간부들이 2년 정도의 임기를 거치고 싸악 물갈이 된 뒤 그 후임이 다시. 야 22사단 쪽이 좀 뚫기 편하다더라? 탈북자와 간첩의 성소

이 결과로 22사단에서는 사단장과 연대장, 대대장이 보직해임당했고 상급부대인 8군단, 1군사령부, 합참에서 작전 관련 장교들이 보직해임이나 징계, 수사의뢰 당했다. 이 5개나 떨어지고, 대나무잎 9장이 한방에 찢어졌다. # 당시 사단장이 해임 전날 해당 소초의 한 생활관에 소초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했던 훈시가 매우 인상깊다. 내용인 즉슨, "사단장은 황산벌 전투에 출전하는 계백장군의 심정으로 왔다"는 내용을 기반으로 한 훈시였다고 한다. 다만 병사들은 규정대로 근무한 것으로 밝혀져 처벌이 없다고 한다. 10월 14일 국방장관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여 재발 방지를 약속하였고 이로인해 1군 사령관, 제8군단장이 국방장관 명의의 엄중경고와 문책을 받았고 국방장관도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이 문제로 인해 문책을 받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장성들의 무덤. 자업자득이지만...

이 사건 이후 전 22사단 GOP에 1일 1장성 방문 캠페인이 이어졌다. 다만 이 사건 전후로 훈련없이 비상대기태세가 유지되며 유격 등의 훈련이 아예 취소가 되어서 일부 예하 대대 장병들은 좋아했다 카더라.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정승조 합참의장이 소초에 방문했을 때 귀순자가 귀순했을 당시의 상황을 재연했는데 말출까지 채 2주가 남지 않은 말년병장이 귀순자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해당 병사는 생활관에서 근무 준비를 하던 중 중대장이 헐레벌떡 생활관으로 들어와 "너 빨리 나와봐"라는 말을 듣고 얼떨결에 나갔다가 이런 봉변중책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합참의장이 방탄모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귀순자 역할을 맡은 병사가 '저 방탄을 벗으면 대머리(...)가 나오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을 참지 못할 뻔 했다는, 군생활 최대 위기를 맞을 뻔 했다는 말년에 영창이라니!! 그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위병소에서부터 장성들을 맞이해야 했던 초병들은 죽어나갔지만 22사단 GOP는 제진 검문소를 거쳐 GOP로 올라가는 구조라서 위병소는 없다.(아 그게 위병소인가?)

여담으로 사건이 발생한 2012년 10월경 병사들은 추석을 맞이하고 진지공사를 준비하던 중 사단내 훈련으로 부대의 전화와 사지방을 통제했었다. 대부분 병사들은 휴가나갔다가 복귀하는 병사들을 통해 이소식을 들었고, 발생 후 한달뒤인 2012년 11월 22사단포함 전 gop사단의 FEBA부대는 철책을 보수하러 올라갔다. 언론을 통해 귀순병사가 넘어온 과정이 공개됐는데 대략 철주를 잡고 철조망을 벌려서 틈으로 넘어온다는 방식이었다.[14] 이에 대해 기둥을 잡지 못하게하고 철조망이 벌어지지 못하게하고 하는등 약 한달간의 경계력 보강공사를 하였다. 철조망을 옮기고 치다보니 전투복이 찢어지는 경우도 많았다.[15]

노크귀순이 터지고 얼마뒤에 해당 연대의 수색중대에서 연대장이 방문해서 철책을 넘어보라고 했더니 한 병사가 몇초만에 넘어서 연대장 포상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놀랍게도 본 항목의 부소초장이 위 항목이 일어났을 때 전투분대장이었다. 그 말은 즉, 두 사건이 같은 소초에서 일어났다는 뜻. 실제로 본 소초에 사건, 사고 사례가 많다.

5.5 간첩선 은폐사건

09년에 발생했다는 사건. 그동안 22사단 예비역들 사이에서 도시전설 비슷하게 흐르던 이야기로 어느 날 아침 철책선에 간첩선으로 의심되는 배가 뒤늦게 발견되자 대대장이 이로인해 징계받을까 부대원들을 사사로이 동원해 이를 부숴서(!) 파묻어 버린(?!)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

노크 귀순 사건 이후로 JTBC 다큐로드-무너진 철책선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예비역들이 증언한 장소(군사분계선 안)에 수사의뢰를 하자 실제로 낡은 배의 파편이 나왔다고 한다. 이런 상황임에도 22사단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별 명확한 근거도 없이 일단 이건 간첩선이 아니라고 했다. 수상한 배가 아니라면 왜 묻었는데? 무엇보다 설령 이게 간첩선이 아니더라도 규정상 이걸 상부에 보고할 책임이 있던 대대장을 비롯한 이 일에 관련된 책임자들의 문책에 관해서는 한 마디 말도 없었다.

5.6 브라이트 캠프 폐쇄 시도?

이 외에도 사단장이 브라이트캠프와 그린캠프를 진급을 위해 여러차례 강제 폐쇄를 수차례 시도 했지만 결국 자살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은 사병들이 늘어났다. 12년도 14소초의 문이병 자살사건은 조용히 묻혔다. 서 단장의 횡령과 부도덕적인 횡패로 인해 조용히 죽음을 맞이해 군사기밀로만으로 남게 되는 사병들이 많았던걸로 기억이 난다.

- 의문점
위의 문구가 어느 사단장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지만, 브라이트 캠프 자체는 육군에서 시행하는 제도라서 일개 사단장이 캠프의 폐쇄를 시행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브라이트캠프에서 이후 8군단 그린캠프로 넘어가고 군단 그린캠프에서도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자원은 1군사령부 병역심사대로 넘기기 때문이다. 즉 캠프 자체는 사단-군단-군사령부-병무청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행정체계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단장이라 할지라도 이를 폐쇄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군 인권연대 측의 조사에 의하면 이러한 캠프의 입소와 치료, 퇴소 또한 지휘관의 인사기록에 반영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폐쇄가 가능한지 의문이다. 만일 폐쇄했다면 8군단이나 1군사령부, 육군본부에서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5.7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2014년 6월 21일 오후 8시 15분 경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대한민국 육군 제22보병사단 GOP에서 발생한 군무이탈 및 총기난사 사건. 지금까지 비슷한 류의 총기난사 사건은 많이 발생하였으나 전역이 가까운 병장에 의한 총기난사 사건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해당항목 참고.

5.8 이등병 자살 사고와 뇌종양 병사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사라지려는 마당에 다시 터진 사고. 2014년 7월 27일, 후방 근무요원이던 신모 이등병이 화장실에서 신발끈으로 목을 매 자살했다. 부대원들이 상황 근무에 나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 수색에 나서 찾아내 병원에 후송했으나 결국 27일 오후 5시 18분 숨졌다.#

...여기서 악재가 끝났어야 했으나 22사단에 근무한 한 병사가 지난 2월 어지럼증을 호소한 뒤 5개월이 지나고서야 뇌종양 판정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5.9 어천리 대대 취사병 화상사건

2010년 10월 경 사단내 전 취사장 안전점검이 있었는데, 그 원인으로 어천리에 주둔한 대대 취사장에서 튀김을 준비하던 취사병이 한창 끓어오르던 기름을 흠뻑 뒤집어쓰는 일이 있었다. 사고원인을 조사해보니 튀김솥의 부품 일부가 마모되거나 윤활유가 사라지는 바람에 제대로 잠겨지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당장 연대를 시작으로 사단내 모든 취사장에 대한 조사와 조치가 취해졌다. 어천리 취사장에 대한 소식은 추가바람.

6 출신 유명인물

용케 무사했다!

6.1 장교

소령~중령 시절 연대 작전과장과 대대장으로 일함.
중령 시절 55연대 3대대장을 거침. 이어서 사단 인사참모와 작전참모로 근무.
소장 시절 사단장을 거침.

6.2

1998년 입대하여 신병교육대 조교로 군복무를 마침.

7 기타

고성군이 영 듣보잡이다보니 위치를 설명할 때 애로사항이 있다. 대체로 고성군 하면 공룡 발자국으로 유명한 경상남도 고성군을 떠올리지 강원도 고성군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기 때문에 '동해안과 휴전선이 만나는 곳' 이라고 풀어서 써줘야 할 정도.그냥 속초 위에 라고 말하면 안됨? 물론 1군 출신 예비역들에겐 고성 하면 강원도 쪽이 제일 먼저 떠오르겠지만... 사단 위수지역고성은 놀 곳이 없어서 속초까지다. 그러나 이 위수지역은 2008년에 8군단과의 시비가 자주 붙는다는 이유로 간성읍내로 제한되었다. 망할 8군단 현재는 풀려서 속초까지이다.

GOP를 제외한 FEBA(Front Edge of the Battle Area : 즉 최전선이라는 뜻) 부대들도 편제상 격오지로 되어있기에 2008년 12월부터 정기휴가가 9박 10일에서 10박 11일로 하루 늘어났다가 다시 원상복구 되었다. 2,3차는 8박 9일

위에서 편성에 대해 읽어봤으면 알겠지만, 책임구역도 긴 주제에 예비연대가 없다! 전역자들은 예비연대란게 있는줄도 몰랐다고그거 먹는 건가요 그래서 전방에 가있지 않는 대대가 전방의 각종 작업등을 하게 되기 때문에 상기된 대로 이런저런 고생이 많다. 일부 부대는 작업, 경계지원을 이유로 전방에 올려보낼 병력이 모자라는 탓에 마구잡이로 병력을 올려보내기도 한다. 물론 남은 인원은 남은대로 근무나 일과를 소화한다.장신리는 노예 이건 사실 어천리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23사단은 사진이나 소식 등이 국방일보에 은근히 자주 나오는데 왜인지 22사단은 상대적으로 나오는 빈도가 적다.대신 TV 뉴스에 자주 나온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국방일보 많이 나와도 좋은 거 없다 사진 한 방 박는다고 일주일을 허리만 휘어지지 사고사례집에도 자주 나온다

사단본부에 TwoTwo치킨이 있다!!! 외쳐 EE
  1. 농담이 아니고 모두 뒤에서 수준급으로 좋지 않은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물론 한 군데 좋은 곳이 있긴 하다. 바로 옆 연대의 GP와 비교 하자면 그야말로 헬게이트
  2. 이번에 총기난사가 일어난 지역은 쌍호연대 소속이지만 도주후 교전지역이나 생포지역은 금강산연대 관할지역이다.
  3. http://cafe.chosun.com/club.menu.bbs.read.screen?page_num=4&p_club_id=bemiler&p_menu_id=21&message_id=581239
  4. 직할대 순서대로 작성. 오류 수정 바랍니다
  5. 중대 통합 막사였다. 그러니까 자대 배치를 받고 생활관문을 여는 순간 고참 100여명이 너를 바라 본다는 뜻
  6. 브라이트 켐프는 사단 사령부, 군악대 막사 근처에 있었는데 옮겼다면 재수정 부탁 드립니다.
  7. 수정 전 '동해선 출입국사무소(CIQ)'라고 표기되어 있었는데 남북출입사무소는 통일부 소속 기관이며, 여기서 작전수행을 하는 22사단의 군부대는 동해선 경비대이므로 혼동에 주의
  8. 소위 말하는 스펙이 좋은 병사를 뽑아간다. 이는 선발 담당 간부가 지원자 모집때 직접 언급하는 부분으로, 당연히 부대 내 병사들도 집안환경이나 스펙등이 좋은 병사들이 많다.
  9. 순찰병력보다 훨씬 더 많았다.
  10. 거의 매일 같이 찾아왔다.
  11. GOP는 소대별로 초소를 사용한다.
  12. 해발고도가 높은 산악지대의 기후라는 점을 다시 상기해보자. 직경 30센티가 넘는 나무가 위에 쌓인 눈의 무게를 못이겨 부러질 정도의 강설량이다. 당시 3대대가 주둔하던 막사에서도 이렇게 부러진 나무가 있었다.
  13. 선전했다는 게 내부적으로 잘 평가했다는 것이지 동네방네 소문 내고 다녔다는 뜻이 아니다. 당장 이 글을 보는 위키러들도 이런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검색해도 (위 사건이나 아래 사건에 비해) 변변한 기사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14. 이전까지는 사실상 철주와 윤형철조망이 맞닿는 부분만 고정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철책 위에 윤형철조망이 그냥 얹혀져 있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막대기로 윤형철조망을 위로 밀어버리면 철책과 윤형철조망 사이에 큰 빈틈이 생기고, 이 상태에서 철책을 넘으면 이론상으로는 아무리 초병들이 규정대로 근무를 서도 대충 경계병 없어보이고 경계등이 대충 안비치는곳에서 돌파를 시도한다면 이론상 들키지 않고 쉽게 돌파가 가능하다! 물론 한밤중이라면 실수할수도 있기 때문에 다치거나 옷이 찢어지던가 하겠지만 목숨걸고 귀순하는 사람들이 그게 무서울까...실제로 북한군은 철책을 통과하는 훈련을 한다고 한다
  15. 이때는 22사단 말고도 전방 GOP부대 전체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전투복 찢어지는건 약과다. GOP 철책 길이가 얼만데 FEBA부대가 GOP부대를 지원한다고 하루이틀만에 끝나는 공사가 아니다. 하지만 경계력 보강은 빨리해야되기 때문에 이 공사에는 부대마다 다소 다르겠지만 FEBA부대 말고도 GOP경계병들도 갈려들어갔다. FEBA부대는 주말이나 일과외시간에는 쉬었지만 GOP 경계병은 그런거없고 계속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거기에 날짜를 잘 보자. 11월이다. 강원도 전방의 경우 11월이면 눈이 내린다. 그야말로 이 기간에는 오전엔 보강작업하고 오후엔 눈쓸고 밤엔 근무나가고 수면은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악몽같은 일이 자주 벌어졌다. 여기에 지휘관들의 두뇌가 병신같아서 FEBA부대가 지원해주지 않는다던가(...), 안그래도 작업에 제설에 격무에 시달리는데 훈련을 예정대로 진행한다던가(...) 하는 경우까지 발생하기도 했는데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16. 필명이 펜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