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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양산을 빛낸 인물
song**** 조회수 4,337 작성일201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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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을 빛낸 인물)

 

1.이상환 선생(1897. 4. 17 ~ 1943. 2. 20)

 

1897년 4월 17일 양산 동면에서 태어난 선생은 지역청년회 활동과 양산 3·1운동 주도자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탄신 101주년을 맞아 자랑스러운

우리고장출신 이 달의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으며, 주요공적은 다음과 같다.

 

1) 양산장날 거사결의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을 때 이곳 출신인 선생은 청년회 간부인 엄주태, 전병건, 박삼도 등과 만세시위를 계획, 1919년 3월 27일 양산장날 거사할 것을 결의하고 독립선언서 등사와 태극기 제작 등 비밀리에 거사준비를 진행해갔다.

 

2)장꾼 3천여 명과 독립만세 시위

거사날인 3월 27일 양산장날 아침, 선생을 비롯한 주도했던 청년들은 장터에 잠입, 각처에서 장꾼들로 가장 붐비는 오후 1시를 기해 독립선언서, 공약서 등을 배포하고 대형 태극기를 장터 한가운데 세우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운집한 3천여 장꾼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선생을 비롯한 주동청년들은 고조된 군중의 기세를 선두에서 지휘하여 시가행진을 하던 중 출동한 일경에 의해 엄주태, 전병건, 박삼도 등이 체포되었다.

 

3) 2차 독립만세 시위 중 체포

1차 시위 때 검거되지 않은 선생은 류계문 등과 다시 거사하기로 하고 4월1일 오후 2시 장터에 운집한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던 중 헌병 분견소로 몰려가서 구속동지 석방을 요구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1919년 5월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이원수 선생

 

이원수선생님께서는 1911년 음력 11월 17일 양산시 북정동에서 출생, 양산초등학교 2학년 재학 중 마산으로 이주하시어 창원ㆍ김해ㆍ함안ㆍ대구 등지에서 거주하기도 하셨으며 주로 서울에서 생활하시다 1981년 1월 24일 71세를 일기로 작고하셨습니다.

 

15세 되던 1926년에 작가활동을 시작하신 선생님께서는 이후 수많은 동시와 동화는 물론, 수필ㆍ소설ㆍ평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 걸쳐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쳐 주옥같은 명편을 남겼으며 문학적으로 볼 때 주요 저작으로는 동시집 <종달새> <너를 부른다> 등과 수필집 <영광스런 고독> 외에 <숲속의 나라> <오월의 노래> <해와 같이 달과 같이> <얘들아. 내 얘기를> 등 많은 업적을 남겼고, 주요업적으로는 1926년 동시 고향의 봄 이<어린이> 4월호에 당선, 발표되었다. 이 노래는 단순한 한편의 동요가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가 곱게 스며드는 마음의 그림이며, 동시에 한국인의 기본율동이 용해되어 있는 현대의 가락이다. 1973년 한국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78년 예술원상을 수상했고, 한국문학가 협회의 창립회장을 지냈으며, 이외 다수의 작품을 썼다.

 

음악적으로 볼 때는 1920년대 창가시대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을 때, 자연스런 숨을 쉬고 싶어 하는 멜로디의 흙 밭에 씨앗을 뿌린 문인이었다. 바로 이런 노래, 그리움이 우물처럼 깊이 담긴 대표적 동요를 한국인들 가슴에 깊게 새겨준 작사가가 이원수 선생이다. 또한, 이러한 선생의 시정을 기리고자 1968년 마산 산호공원과 1986년 양산 춘추공원에 <고향의 봄 노래비>를 세웠으며 묘사는 경기도 용인 공원묘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3.이몽란 장군

 

국우리 고을은 낙동강 하구인지라 왜병들은 호포에 상륙하여 양산성을 순식간에 잡아 삼켰다. 남녀 노소들의 아우성치는 소리는 아랑곳없이 왜놈들의 만행으로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처참한 모습을 본 이몽란은 묵묵히 일하는 것 외에는 모르는 어진 백성들을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왜놈들과 대전하였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군민들과 재산과 생명을 보위하는 향토방위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운문산전투에서는 적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고 1516년 팔공산에서 각 지방 의병대장들과 회맹하여 공동전선을 펼쳐 왜병을 격퇴하는데도 큰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때에는 화왕산성 전투에서 곽재우장군진에 합세하여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종전 후 공은 선무원종공신 3등의 녹훈을 받았다. 이몽란은 양산군 이징석의 4대손으로 1589년 무과급제 한 후 훈련원 첨정 등을 역임하였다. 공의 묘소는 양산읍, 명곡 선령 산소 옆에 있다.

 

4.이징석 장군

 

양산읍 명곡리의 이징석장군의 무덤 옆에 서있는 묘비에 국왕이 내리신 사제문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생각하건대 경은 큰 산봉우리에서 뽑아낸 정기를 모은 시대적 영웅호걸이라 성품은 단정결백하고 기국은 활발하였으며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특진중시에도 급제하여 금군이 추앙하고 복종하였으며 무예는 육도삼략에 달하였고 재능은 버들잎을 뚫는데 이르렀도다. 일찍이 선왕 세종대왕을 섬겨, 호랑이의 발톱과 어금니처럼 힘을 길러 남쪽으로는 왜구를 치고 북쪽으로는 오랑캐를 치며 바람과 같이 날고 달려서 뛰어난 공적을 훌륭히 세웠기에 만백성들은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힘입었고 나라에서는 그대를 기둥과 주춧돌처럼 의지했도다.

선왕 세종대왕께서는 그대를 특별히 사랑하여 환대했으며 더욱 의를 돈독히 하셨도다. 내가 왕업을 잇기에 이르러서는 나를 돕고 나를 호위하였도다.

내 그대의 공적을 아름답게 여겨 종에 새기고 공신각에 그리게 하여 황하와 같은 큰 강이 말라서 띠처럼 되고 태산이 닳아서 숫돌이 되도록 기쁨과 슬픔을 길이길이 그대와 함께 하려고 하였더니 하늘도 어찌하여 한 늙은이를 돌봐 남기지 않고 갑자기 불행하게 하였는고, 부음을 접한 이래로 진실로 애석하기에 여기 예관을 보내어 변변치 못한 재물을 베풀도록 시켰으니 영혼이 어둡지 않으면 이 한잔을 흠향하기 바라오.」

 

세조 7년 4월 24일 국왕 세조 씀이라고 적혀있다.

『역사시대 이후 국왕이 신하의 죽음을 슬퍼하여 하사한 제문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내용처럼 무게 있는 제문은 보기 드문 일이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이 사제문은 한 폭의 그림처럼 한눈으로 이징석 장군이 평생에 쌓아 올린 업적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장군은 후세에 빛을 남긴 사람 중의 한사람이라 한다. 장군은 1395년에서 1461년 사이의 인물로서 세종3년 8월에는 연일진 병마절제사가 된 후 경상좌우도 병마절제사를 역임했고, 도원수 최윤덕장군의 부장인 『조전절제사』가 되어 당시 상황으로 3,010명이란 최대의 병력을 지휘한 명장이 되었다. 그 후 중추원사 함경도 및 평안도절제사, 병조판서, 판중추원사, 도총관 등을 지낸 후 1458년 하야하니, 세조는 그 공을 치하하여 장강공의 시호를 하사함과 동시에, 숭록대부 양산군으로 책봉하였다.

 

계유정란(1453년) 당시 장군의 동생 이징옥이 세조에 반기를 든 관계로 장군은 이에 억류되어 옥고를 치른 일도 있고 그 후 열세차례 이상이나 세조측근중신들의 상소에서 장군의 삼대구족까지 연좌주살 하라는 소란을 겪었으나, 세조의 반대로 구명되었고, 도리어 세조는 장군에게 도진문의 중책을 내리게 되니 세조측근중신들은 안절부절못 하였다. 단종 원년 11월 6일 실록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중신들이 이징석의 『좌익공신3등』의 녹훈을 모략하는 진언을 했으나 세조가 이를 물리쳤다고 하는데, 이 점에 있어서 후세사가들이 평하기를 『고려의 충신 정몽주선생의 유덕을 무너뜨릴 수 없어서 이 태조는 그의 유족들을 두둔한 사실이 있었던 것처럼 당시의 이징석 장군의 유덕을 세조는 무너뜨릴 수 없어서 두둔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때문에 윤갑식선생이 쓴 한국 인물사에서 이징석 장군을 생육신과 같은 수난의 공신으로 예우하고 있다.

 

5.안덕원 선생

 

서기 1898년 7월 9일 양산면 산막리에서 출생. 서울 중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22세의 피 끓는 청년으로서 거국적으로 일어난 독립만세 운동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마침 향리 양산에서 엄주태, 전병건, 박삼도, 정주봉, 이귀수, 강재호 등이 주도하는 독립시위운동에 가담하였다.

 

즉 3월 27일 그전부터 미리 연락을 받고 그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마음에 다짐을 하고 아침 일찍 양산장터로 나갔다. 엄주태,전병전, 박삼도, 정주봉, 이귀수, 전병한, 강재호 등과 장터 한복판에서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깃발을 높이 든 것을 신호로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군중을 선동하였다. 군중은 그에 호응하여 열광적으로 독립만세를 불렀다. 홍수같이 시가로 흘러나오는 시위군중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드디어 양산군청, 경찰서(양산 헌병분견소도 같이 있었다.)앞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왜놈 헌병과 경찰은 갖은 폭행으로 시위를 제지하려 했으나 막무가내라 놈들은 맞은 편 우편소를 향하여 실탄을 발포했다. 이에 주춤한 군중을 총대와 대검으로 치며 갈기며 주동인물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이때 그도 놈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부산 헌병대로 이송되어 부산감옥에 수감되었고 동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의 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동지들과 함께 대구이심법원에 공소를 하여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었다. 동년 5월 28일 대구이심법원에서도 일심과 같은 징역 8월의 선고를 받았다. 혹독한 옥고를 치르고 출감은 했으나, 여독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그렇게도 갈망하고 염원하던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1922년 8월 23일 25세의 아까운 나이로 서거하였다.

 

양산의 인물은 많습니다.아래는 양산의 인물입니다.이름을 클릭하시면 잘아실 수 있습니다.

 

이상환 선생김말복 선생권 만 선생이원수 선생윤현진 선생
 윤복이 선생김갑조 선생김상헌 선생김여택 선생김옥태 선생
 김철수 선생나진석 선생박문량 선생박문영 선생박세민 선생
 박제상 선생백수회 선생서현준 선생손군호 선생심상옥 선생
 안 근 선생안덕원 선생안만춘 선생안병원 선생안현중 선생
 윤빙삼 선생이몽란 장군이영우 선생이징석 장군임씨 부인


 

201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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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양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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