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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피라미드에 대해서 좀 갈켜주세요..ㅠㅠ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5,625 작성일2005.03.12
저기요... 저 중1인데요.. 기술시간에.. 피라미드에 대해서 조사하는데요.. 1, 건설기간  2, 피라미드의 갯수. 위치  3, 돌 운반방법 , 쌓은 방법  4, 피라미드의 내부구조  5, 피라미드의 신비한 힘   이것에 대해서 좀 갈켜주세요~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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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깡
물신
지구과학 25위, 수학, 대학 입시, 진학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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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는 어떻게 세워졌는가?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정점에 위치한 기자지역에 세계최고, 최대규모이면서 가장 정밀한 석조건축물이 우뚝 서있다. 주류고고학계에서도 4천5백여년전에 (비주류학계에서는 5천여년전이전이나 7천5백여년전까지라는 주장도 한다)건설됐다고 인정하는 건축물이다. 쿠푸왕 피라미드는 엄청난 수의 둘과 벽돌을 쌓아올려 만들어졌다.

도대체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어떻게 건설했을까? 정답은 아직까지 그 방법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류학계든, 비주류학계든 정확하게 이런 방법을 썼다, 혹은 이랬을 것이다라는 추측만 난무할뿐, 이렇다 할 힘있는 "설"은 나오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도.

예를 들어 '미라'라든지 다른 소장품 같은 건 연대 측정이 어느정도 가능하다. 대표적인 방법이 탄소동위원소분석법(라디오카본 데이팅:방사성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으로, 방사성 탄소 14C는 거의 일정한 농도로 모든 유기물에 함유되어 있다. 생물이 죽으면, 새로운 14C가 몸에 공급되어야만 하므로, 그 양은 시간과 함께 반감기에 따라 감소한다. 그 감소량에서 연대를 구하는 방법)이다.

쿠푸왕피라미드 건축방법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알려진 게 없고, 우리가 이해될 만한 어떠한 정보도 없으므로 여기에서는 "주류학계"와 "비 주류학계"의 주장을 같이 논해보기로 한다.

[읽기전에 알아둘 일]

※ 주류학계 주장의 글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겠지만 , 비 주류학계 주장의 글은 현실에 맞지 않거나 황당한 부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차피 알려지지 않고, 알 수 없는 것이니, 어느 쪽의 주장을 믿고 ,믿지 않고는 여러분이 판단하기 바라고, 두 학계의 주장의 방법을 비교해서 논해봅니다.


주류학계의 주장

■ 주류학계의 피라미드 건축법

1. 기초 만들기

피라미드의 완성 후 위로부터의 막대한 하중을 견디기 위해 암반 위에 세워졌다. 건설지에 가로 세로로 수로를 파고, 수면의 높이에 맞춰 지표의 요철을 깍는다. 마지막에 도랑을 메워 암반을 수평으로 한다.

2. 방위를 잰다

피라미드의 네 측면은 거의 정확히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올바른 북쪽 위치 측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건설지에는 원형의 벽이 만들어지고, 밤이 되면 관측자가 그 중앙에 서서 주극성 안에서 어떤 특정한 별을 선정한다. 그 별이 벽 위에 나타난 위치와 진 위치에 표를 하고, 정확한 남북 방위를 측정한다.

3. 현실을 만든다



현실이나 통로의 벽에는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돌쌓기와 병행하여 만들어졌다. 현실 천장의 합각머리 모양의 지붕은 현실에 모래를 채우고, 그 모래를 다시 빼내는 방법으로 꼭 겹쳐지게 하였다.

4. 경사로를 만들고 돌을 쌓아올린다



크고 무거운 석재를 높은 곳으로 운반하는 데에는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만든 경사로가 이용되었다(경사로의 형태에 대해서는 나선형 등 몇몇 설이 있다). 기울기가 항상 일정해지도록, 돌을 높이 쌓아올라감에 따라 경사로도 길게 만들었다.

5. 캡 스톤을 끼운다

6. 화장석을 연마하여 완성. 화장석을 위에서 아래로 차례로 깎아서 연마해 간다. 이렇게 하여 번쩍이는 듯한 아름다운 피라미드가 완성된다.


쿠푸왕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풍부한 기하학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부 고고학자들은 기하학의 요람이 이집트임에 동조하고 있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기하학이 발달한 이유의 하나로 나일강의 범람을 제시한다. 쿠푸왕피라미드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비록 현대인들에게 거대한 피라미드에 많은 비밀이 간직돼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에 의해 당시의 기술로만 건설된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논할 때마다 우선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신석기 후반으로 볼 수 있는 고대이집트에서 어떻게 커다란 피라미드를을 건설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피라미드를 만든 공구를 알아보자.

이집트인이 사용한 공구는 단단한 돌덩어리, 나무에 묶는 원형 망치나 도끼류, 날카롭게 갈은 칼과 같은 돌 종류와 동과 은 금속류로 만든 칼이나 가위이다. 구리와 같은 연한 금속의 경우 현재의 합금과 같이 몇가지 불순물을 사용해 강도를 높이는 방법을 알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연장의 대부분은 단단한 석재였다고 추측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원시적인 공구로 대형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돌 항아리의 숫자와 가공 기술을 근거로 특수한 기술을 가진 공구가 사용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사용된 돌덩어리의 거의 대부분이 석회암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석회암은 석화물질이 물밑에 쌓여 굳어진 퇴적암으로, 경도가 가장 무른 활석 다음으로 가공하기 쉬운 재료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초보적인 공구로도 충분히 자신들이 원하는 규모로 재단하거나 가공할 수 있다.

한 예로, 시카고 대학의 레너 교수는 50명도 채 안되는 인원과 3주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0.75톤에서 3톤에 달하는 1백86개의 돌로 8층짜리 피라미드를 고대의 연장만으로 건설했다. 즉, 고대인들이 충분히 피라미드를 고대의 공구만으로도 건설할수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을 했다.

어떤 사람은 피라미드 안에 단단한 화강암이 사용됐는데, 이것을 어떻게 가공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화강암도 돌의 형태와 결을 잘 알면 쉽게 가공할 수 있다는 것을 석공들은 잘 알고 있다. 화강암이 석회암 보다 단단한건 사실이지만, 화강암은 6각의 얇은 판모양의 운모, 기둥 모양의 석영, 두꺼운 판모양의 장석 등3가지 성분이 비균질적으로 섞여 있어, 어떤 때는 화강암이 설탕처럼 쉽게 조각나기도한다.

쿠푸왕의 치세가 시작되고 나서 17년이 되었을 때 바로 그 높이까지 건조된 것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의 높이는 146.5m이므로 완성되기까지는 20여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조의 노동력은 농민이었다. 왕은 나일강의 증수로 경지가 물에 잠기는 시기에 농민을 노동자로 고용한 것이다. 농한기에 식량과 의복, 일을 지급한다는, 말하자면 일종의 실업 정책인 것이다.

피라미드는 마치 모래 위에 세워져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 기자대지의 단단한 암반 위에 건설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50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피라미드 건조는 파라오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에 즉위하면 곧바로 착공을 시작했을 것이다.

우선 건설지가 선정되고, 설계도나 축소 모형도 작성되었다. 장소가 결정되면 우선 기초 다지기부터 시작하고 수로를 사용하여 암반을 수평으로 하고, 별을 관찰하여 정확한 방위를 측정하였다. 피라미드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국내에서 농민들이 징용되고, 마침내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일 강이 증수하여 경지가 물에 잠기게 되는 기간 동안 농민들은 피라미드 건설에 종사하였다. 노동자들에게는 주거와 의복, 식사가 제공되고, 피라미드 건설은 농한기에 실시되는 국가 사업이었다. 또 나일 강 수위의 상승은 석재를 운반하기에 적합하였다.

피라미드의 건재는 주로 석회암이었는데, 부분적으로는 아스완산 화강암도 사용되었다. 석회암은 기자 부근의 투라에서 좋은 질의 것이 채굴되었다. 대 피라미드는 약 270만개로 어림되는 석재를 사용하였다. 돌을 파 내는 일은 엄청난 작업이었을 것이다. 청동제의 끌과쇄기로 돌을 파내고, 현장에 운반되고 나서 모양이 다듬어 졌을 것이다.

석재의 운반에는 나무로 만든 썰매가 사용되었다. 돌을 어떻게 해서 쌓아 올렸는가는 피라미드의 큰 수수께끼 중의 하나인데, "람프"라는 경사로를 이용했다는 것이 유력한 주장이다.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만들어진 람프에는 썰매가 잘 미끄러지도록 석고를 뿌리거나, 역레일을 만드는 등의 고안이 되어 있었다. 썰매에 실린 석재는 기울기 10분의1(10m 에 1m 오르는 기울기)의 경사로로 운반되고, 위치를 결정할 때에는 산륜이 사용되었다. 기울기는 항상 일정하게 되도록, 높이가 높아지면 경사로의 길이도 연장된다. 내부의 구조도 돌을 쌓아올리면서 만들어 나갔다. 정상에 캡 스톤을 끼우면,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쌓아올린 석재를 발판으로 하면서 단을 깎고 표면을 연마하여 마침내 피라미드를 완성시킨 것이다.

여기까지가 주류학계가 주장하는 가장 현실적인 피라미드 건축법이다. 하지만 이 주장도 최근에는 근거없는 것으로 취급되고, 인정하지 않는 추세이다.


비 주류학계의 반박

많은 고고학자들은 당시가 절대왕권 체제로서 자본과 노동력, 그리고 시간을 무제한으로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피라미드의 건축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요점은 석기와 간단한 청동기 도구로 석회암을 채굴하고, 통나무와 지렛대, 그리고 윤활유를 사용해서 돌을 운반했으며, 완만한 경사로를 피라미드 상부까지 건설해서 돌을 쌓아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언뜻 생각하기에는 가능할 것 같아도 건축의 규모를 헤아려보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주류학계에서는 왜, 피라미드의 건축자인 파라오 쿠푸가 암석을 사막에 있는 공사장으로 운반하게 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못한다. 그 이유에 대해선, 원래는 그 지역에 천연의 암벽 협곡이 있었는데 거대한 공사로 인해 암석을 다 써 버렸다는 것과, 궁색하긴 하지만, 파라오가 여름 궁전에서 작업이 진척되는 것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라는 가정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힘으로, 어떤 "기계"와 기술을 사용하여 암석층을 수평으로 다듬었을까? 어떤 방법으로 건축가는 갱도를 파나갔을까? 그리고 무엇으로 갱도 안에 불을 밝혔을까?(주류학계의 방법대로 밑에서부터 건물 외벽과 안에 있는 현실을 같이 쌓아 올렸다고 하지만 어느정도 진척후에는 갱도 안의 내각을 맞추거나 갱도 앞에서 뒤까지의 길이를 직선으로 맞추려면 작업을 갱도안에서 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왕들의 계곡에 있는 암석 묘지에서도 횃불이나 그 어떤 유사한 조명기구는 사용되지 않았다. 더럽혀진 천장이나 벽도 없고, 그런 흔적이 제거됐을지도 모를 최소한의 증거조차 없다. 260만 개의 거대한 석재가 채석장에서 잘라지고 연마되어 운반되고, 건축부지에서는 밀리미터 단위로 정확하게 맞추어졌다.

피라미드를 세울 장소는 파라오가 마음대로 결정했으며, 피라미드의 비교할데가 없는 크기는 건축가에 의해 우연히 떠올랐으며, 몇 십만 명의 인부들이 12톤이나 되는 무거운 석재를 (지금은 없는) 밧줄로 (지금은 없는) 미끄럼 틀을 사용해 경사면 위로 밀고 당기고, 수많은 인부들이 (지금은 없는) 곡식으로 연명했으며, 파라오가 여름 궁전 앞에 짓도록 한 (지금은 없는) 오두막에서 잠을 잤고, (지금은 없는) 확성기로 140m 여미터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인부들에게 "영차 영차" 소리를 내어 인부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12톤짜리 석재를 하늘을 향해 밀어 올리게 하고, 인부들이 날마다 10개의 석재를 쌓아 터무니 없는 도급일을 달성 했을까?

만약 이런 식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했다면, 20년은 고사하고, 약 250,000일(684년)에 걸쳐 대충 250만 개의 석재를 그 멋진 피라미드에 쌓아 올렸을 것이다.

방위각 즉, 정확한 북쪽을 별의 움직임으로 측정을 했다.? 눈대중으로 어떻게 0.몇%의 오차를 극복했을까. 네모난 석재를 도르래로 이동시켰다고 한다(그것도 나무도르래로). 하지만 그 당시 이집트에서 주로 자라던 몇 그루 안 되는 종려나무를 벌채해서, 그것을 가공해 미끄럼 도르래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려나무의 열매는 식량으로 꼭 필요했고, 그 줄기와 잎은 말라 버린 대지에 그늘을 제공하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학계에서는 나무 도르래가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피라미드 건축에 관해 가장 뻔한 공학적 설명조차 찾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무를 수입한 것일까? 외국에서 나무를 수입하려면 상당히 큰 선박이 필요하며, 선박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서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 카이로까지 나무를 운송해야 했을 것이다. 육지에서는 어떻게 운송했을까? 역시 도르래로 밀면서? 그럼 말과 마차로 옮기지 않았냐고? 말과 마차가 이집트에 도입된 건, 기원전1600년, 제17왕조 때 일이다.

● 주류 고고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의 절대 군주가 1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서 나일강 건너 수킬로미터 떨어진 채석장에서 굴림대, 로프, 나무썰매, 뗏목 등을 이용해서 이 돌들을 20여 년 동안 운반해 쌓았을 것이라지만, 이런 거석들을 1톤당 몇 명이 며칠 걸렸을 것이라는 식으로 산술적인 계산을 하여 책상 앞에서 상상만으로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는 고고학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는 토목 공학에 조금이라도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토목 공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대피라미드는 노예나 일반인을 마구잡이로 불러다가 건설된 것이 아니라 극도로 효율적인 관리 체계와 고도의 기술이 제공된 아래에서 매우 숙련된 노동력이 투입된 것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굴림대, 나무 썰매, 뗏목, 버팀목 등을 만들어 조달하는 인원이 필요한데, 어림 계산으로도 족히 10만 명은 필요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목재들을 주변에서 절목해 운반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인원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또, 피라미드로 돌을 운반하기 위해 10:1 의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었다면, 거기에 소요되는 석재는 대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든 석재의 7배 이상이나 된다. 보조 석재를 줄이기 위해 다른 방법을 쓴다고 해도 어쨌든 추가로 최소한 두 배의 인원이 더 있어야 한다. 또, 이들 전부를 먹이기 위한 식량 조달, 운송, 요리사들, 그리고, 그들을 재우기 위한 숙박 시설의 건설자들, 피복의 조달자들, 총무, 노무, 재무관리자들까지, 고려하면 실제로 소요된 인원은 적어도 5배가 넘는 5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변에 얼마나 충분한 목재가 있었을까 하는 문제도 생각해봐야 한다. 주변에 충분한 목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를 먼 곳에서 운반해와야 하는데 이는 돌의 운반에 못지 않게 큰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돌의 무게가 평균 2,5톤 정도인 것으로 보고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2.5톤은 제일 작은 돌의 무게이며, 이보다 더 무거운 돌들이 피라미드 내부 곳곳에 사용되었다. 특히 왕의 현실로 알려진 곳을 구성하는 개당 70톤에 이르는 100개의 석재는 다른 작은 돌들과 같은 석회암이 아니라 화강암이다.

주류학계에서는 피라미드가 단단한 지반위에 건설됐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믿고 있다(600만 톤이 넘는 초거대건축물이). 지반침하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1878년 영국인들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이라는 애칭이 붙은 186톤짜리 오벨리스크를 영국의 런던으로 옮긴 일이 있다. 맨 처음에는 이 첨탑을 국회의사당 앞에 세우려고 했으나 그곳의 지반이 약하여 탑이 가라앉을 가능성이 있다는 조사 결과에 따라 현 위치인 임뱅크멘트(Embankment) 로 옮겼다고 한다.

대피라미드의 총무게는 이 첨탑의 3만배가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피라미드는 오늘날까지 침하된 정도는 5mm 정도라고한다. 이것은 오늘날 미국에서 대형 빌딩에 적용하는 지반 침하 기준인 100년간15Cm 와 비교해보면 그 건축 연대를 고려할 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수치임을 알수 있다.

우리나라의 예로는, 63빌딩이 건축되고 한동안 주변 지역의 지반 침하로 민원이 쇄도했었다. 또,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는 누구라도 아는 일이다. 삼풍백화점은 부실공사였다는 것을 다들 알고는 있지만 아무리 부실공사라고 하지만 주류학자들의 말대로, 원시인이었던 5000년전의 이집트인들보다 더 원시인이란 말인가. 삼풍건물 설계자들이? 그건 아니라고 본다.

오늘날 전세계의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건축회사들에게 "대피라미드" 정도의 초거대건축물을 어떤 지역에 만들라고 주문 한다면 정밀한 주변 지반 조사와 거기에 맞추어 그런 설계도를 자신있게 제시할수 있는 회사가 과연 몇 군데나 될까? 오늘날 지어지는 일반적인 건물의 건축에도 1% 정도의 훨씬 큰 오차가 적용된다. 그러나 이집트의 대피라미드는 0.몇몇 % 이하다(못믿겠다면 여러분의 근처에 건축공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건설쪽으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의 직각의 오차가 몇% 까지가 규정이냐, 아니면 건물전체의 공차의 규정이 몇 %가 한정치 인가"라고 물어보라).

일본의 돈많은 어느 재력가가 축소판 피라미드를 지으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설계 초기에 포기한 일이 있다.(시카고 대학의 레너박사팀은 모형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며....? 어떻게 된거야..?) 그러나 레너 교수는 초소형 피라미드를 만든 것 가지고 이런 말을 단정적으로 말할 자격이 없는 듯하다.

대피라미드에는 무려 70톤이 넘는 돌들이 많이 사용된 반면, 그는 고작 최대 3톤 정도의 돌들을 사용했을 뿐이다. 대피라미드가 230만 개의 돌로 140m 높이의 거대한 건축물인데 비해 그는 수미터에 불과한 모조품을 만들었을 뿐이다. 레너 교수는 이런 모형을 만드는데, 굳이 맘모스급 건축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건축공학적인 고려를 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고서 어떻게 그 옛날 대피라미드가 몇 번의 실습을 통한 노하우 축적으로 충분히 재현할 수 있는 기술로 평가를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주류 이집트학자들은 대피라미드가 건설되기 100년 전부터 피라미드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소형피라미드 건설부터 시작해 점점 건축 노하우를 쌓은 후 마침내 기자의 거대 피라미드군을 건설할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시대에 고대 이집트에서는 100년 남짓 동안 일대 기술 혁명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 처음 자그마한 몇 개의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동안 측량학, 지질학, 건축, 운송, 의료, 자원개발 등에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지 않고는 이런 초대형 건축을 시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그 공사 자체는 당시 한 국가의 사회, 경제 문화 체제 전부를 좌우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쌓인 노하우는 문명의 발전에 어떤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정도로 지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피라미드 건설후 그 찬란한 문명은 도대체 어디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단 말인가.?

기자의 대피라미드는4왕조 때 건설되었다. 그렇다면 5왕조 때는 기자의 피라미드보다 더 거대하고 더 정밀하고 더 완벽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지만 5왕조때의 피라미드는 지금 현재 그 형상을 원래대로 간직한 게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기타 관련자료

- 스핑크스의 침식흔적에 관한 자료

기자의 세 피라미드 중에 가운데 있는 카프레왕 피라미드와 연결된 하안신전, 그 신전옆에 스핑크스가 있다.

스핑크스의 머리부분은 파라오, 몸은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집트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스핑크스 중에서 가장 크다. 전체 길이는 57m, 높이는21m, 석회암으로 되어있다. 완성 당시에는 전신에 채색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무덤의 수호신이며 동시에 제단으로도 사용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스핑크스에는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것과, 사람의 머리에 짐승의 몸을 가진 두가지 형식이 있다.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스핑크스는 토테미즘Totemism(동물이나, 특정 대상을 조상으로 인식하는 관념)에 따라 표현되어 마스타바, 피라미드를 비롯해서 신전과 궁전의 내부에다 입상으로 안치 했고, 사람의 머리에 짐승의 몸을 가진 스핑크스는, 신과 사람을 동격으로 보는 관념Anthropomorphism에 따라 신전참도(Dromos) 양측에 노변 스핑크스로 나열시키거나 피라미드와 독립시켜 대형화시켰다.

노변 스핑크스로 유명한 것은 카르낙의 아몬 대신전 경내에 위치한 콘즈신전에서 룩소르의 무트신전까지 4.2km 거리에 이르러 정면 파일론 앞에 있는 것으로 수도 양측 노변에 각각 20기 씩 총 40기가 있는데, 양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한 형태이고, 람세스2세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기자에 있는 인두사자신의 형태를 한 대스핑크스는, 카프레왕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믿을만한 것은 아니다.

스핑크스는 아랍어로 '아불 하울' 이라고 불리며, 이는 '공포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처음 발견당시에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지만, 아랍군의 침입 후에는 코가 깎여 나갔고, 영국군에게는 수염이 뽑혀 나갔다. 지금은 공포의 아버지로 보이기보다는 측은한 경애심이 생길 정도로 되어있다. 스핑크스의 수염은 지금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이집트에 있는 모든 것이 신비롭고 미스테리이지만, 스핑크스만큼이나 신비에 쌓인 것도 드물다. 그 신비중에 가장 예측이 불가능한 것은 바로 스핑크스의 연대측정이다.

스핑크스의 건조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아직까지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학자들 마다 연대측정이 다른데, 일부는 기원전 2400년전 카프레왕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주장과, 제3왕조 시대의 종교도시 " 헬리오폴리스" 의 태양신의 예배소의 하나로서 그 영지의 경계에 세워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3왕조때 세워졌다는 주장의 근거는, 스핑크스가 세워져 있는 바닥면과 카프레 왕의 "하안신전"의 바닥면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나, 양쪽 모두에 사용되고 있는 석재의 생산지가 다르다는 점, 카프레 왕의 참배길이 의도적으로 스핑크스를 피해서 만들어져 있다는 점들의 근거를 들어, 4왕조 이전에 세워졌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보스턴 대학의 저명한 지질학자가, 스핑크스의 제작연대를 기원전 8000년 이전이라는 주장을 해서 주류학계를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기원전 8000년 이전이라는 근거는, 스핑크스의 몸에 있는 가로로 난 "홈" 이, 물에 의한 침식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핑크스가 세워져 있는 바닥면이 주위를 깎아서 만들어져 있다는 것과, 깎인 부분에 생긴 절벽에 무수한 세로 도랑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로 도랑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리면서 생긴 것이고, 그 정도 홈이 생기려면 홍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핑크스가 홍수가 나기 이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이 지질학자의 주장이다.

그럼 홍수는 언제 났는가?

스핑크스의 거대한 몸이 잠길만큼, 이렇게 큰 비는 언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10000년 이상 전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최근 지질학자의 주장이다. 분명히 지금부터 1만 년 또는 1만 1000년 전쯤에 빙하기가 끝나고, 홍수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신전말고 이와같은 거대한 상을 만들어야만 했는가 하는 문화적 관점에서의 이론도 없다. 또, 빙하기가 끝나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도 없다.

다른 학자는 빙하기 이후 온난기에 큰 비가 내렸다고 생각하는 고 기상학자도 있다. 실제로 중왕국 시대에는 지금의 사막은 더욱 뒤로 후퇴되어 있고, 그 곳에는 녹지가 있었다고 한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
상기에 서술한 피라미드에 대한 내용은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진 보편적인 내용이지만 여전히 피라미드가 지닌 수수께끼는 남아 있고 세계 각국의 과학자와 수많은 사람들이 피라미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지만 아직도 속시원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이집트의 대 피라미드가 축조 방식이나 규모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대부분 이집트의 대 피라미드를 위주로 연구되고 있다
.
과연 고대의 이집트인이 직접 만든 축조물이냐 하는 점에서부터도 의문은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 피라미드는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기원 전 28세기에 이집트를 통치한 쿠프 왕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일반인들이 알고 있지만 이것은 쿠프 왕의 장식물이 피라미드 내부의 왕실 위에 있는 5개의 방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할 뿐이며 사실은 기원 전 3만6천 년경에 전설적인 아틀란티스의 토트라는 사람에 의해 축조되었으며 이 피라미드 축조 기술은 이미 전설 속의 시리우스 문명권에서 사용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기자 피라미드 군이 오리온 별자리의 3개의 별들과 동일하게 배치되었다는 이론이 제기되면서 더욱 외계인이 건설하였다는 점이 설득력을 갖게 한다. 즉, 외계인들이 자신의 별에서 피라미드를 사용하였고 그 기술대로 지구에 건설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외계인들이 축조할 당시에는 지구가 빙하기였고 지금의 이집트 주변만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축조했기 때문이고 그 후에 이 대 피라미드를 모방해서 다른 지역에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주장도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피라미드의 신비한 에너지는 바로 이 대 피라미드의 형태에서 더욱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피라미드는 무슨 목적으로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것은 외계인인 시리우스 문명권에서 만들었을 경우와는 목적 자체가 다르겠지만 시리우스 문명권의 외계인이 만들었다면 차후에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에 다시 오기 위한 하나의 표적이나 자신들의 물품을 지하에 보관하기 위해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고 이 피라미드를 해체해서 구석구석 확인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피라미드 지하나 내부가 막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알 수 없는 공간에 그들이 사용했던 발달된 기계나 기구 등이 그대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기술로는 알 수 없지만 이 막힌 공간을 손쉽게 열 수 있는 방법 역시 그들이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쿠프 왕이 건설했다면 쿠프 왕이 건설할 당시는 예수가 태어나기 약 2.900년 전이었으며 이집트 파라오(국왕)는 한층 더 위대한 태양신에게 보내지게 하기 위해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태양과의 거리가 지상보다 훨씬 가까운 위치로 위대한 신께 국왕을 보낸다.
즉, 죽은 국왕을 승천시켜 태양신에게 조금이라도 빠르게, 정확히 가깝게 보내기 위해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는 것이며 그리고 정치적 권력의 상징으로 만들었다는 설이 유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는 것이다. 250만 개 이상의 돌을 쌓아서 만든다면 수십만 명의 인력이 20년이 넘게 걸려야 겨우 만들 수 있고, 단순히 쌓아서 만든다면 높이가 144.6m인 이 거대한 석조물을 어떻게 쌓아 올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영국의 월리엄 델라 교수는 "물체를 낙하시키면 중력에 의해 지면으로 떨어진다는 법칙과 반대로 부상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말한다.
물리적인 힘과 상관없이 공중으로 부상시켰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 또한 설득력이 약하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집트인이 만들었다면 이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서 수십만 명의 노예와 노무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노예들이 있었다면 잘 훈련된 군대와 일부 성직자, 그리고 농부, 공무원들과 황실 관리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건축 연대를 약 B.C. 3000년경으로 추정한다면 그 당시에는 나일강 주변의 비옥한 농지는 삼각주뿐이였는데 이 나일강 주변의 농산물로 이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한 가지 가능성이 있는 대답은 그들이 나무로 된 굴림대를 따라서 밀어가거나 나무로 된 선로 위로 돌을 단지 미끄러뜨렸다면 가능할 수 있다.
이런 목재를 얻기 위해 그들은 이런 목재들을 어디선가 가져와야 할 것이다. 이곳의 목재의 대부분은 대추야자나무로 태양빛이 강렬한 그런 나라에서 필요한 그늘을 제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식량원인 그것을 잘라낸다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그래서 이 나무를 이용했다는 점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목재 굴림대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선로를 따라돌을 끌고 왔거나 끌어당겼을 가능성도 있다. 상형문자로 그려진 것에서 돌에 밧줄을 묶고 수백 명의 사람이 이것을 당기고 있고, 한 남자가 돌 위에 서서 사람들이 일치하여 돌을 끌 수 있도록 독려하는 그림은 가끔 발견된다. 그렇다면 각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에는 적어도 1m정도의 일할 수 있는 공간은 필요하다. 약 천 명의 사람들이 이 로프에 매달려 있다고 가정해보면 이 사람들의 총 길이는 약 1,000m의 길이가 된다. 이런 상태로 작업의 통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시의 인구를 고려해보아도 단순 노동력으로는 그런 대규모 공사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인력만으로 작업을 할 때에 그들을 먹이고, 잠재우고 하면서 건설해야 하는 문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해진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수백 명의 인력을 대체할 수 있는 기계 장치의 도움 없이는 피라미드 건설이 무리일 수밖에 없다.

덴마크의 토목공학자인 가드 헨슨(P.Garde Hanson)은 덴마크 공학학회에서 발간된 책자에서 당시에 순전히 인력을 이용해서 대 피라미드 공사를 했다고 가정하고, 엔지니어의 입장에서 그 공정을 면밀하게 분석해보았다.
그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이 그 보고서를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런 공사를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키루스 2세, 알렉산더 대왕을 합쳐 놓은 천재에 의해 조직된 군대가 투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외계인과 교신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박주원 씨가 쓴 「외계인과의 교신기록」이라는 책에서 피라미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이 외계인과 교신을 해서 지구의 몇 가지 비밀을 알아내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피라미드는 당시의 학자가 외계인과 우연한 기회에 대화를 나누게 되고 그 외계인의 행성에 가서 피라미드, 축조 기술을 배워서 지구로 되돌아와서 피라미드를 촉조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돌을 외계인들이 어딘가에서 날라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 축조 기술은 아래에서 쌓아서 위로 올라가는 방식이 아닌 위에서 아래로 쌓는 방법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먼저 피라미드 건설할 위치를 선정한 다음 밑변의 네 귀퉁이에 레이저를 쏠 수 있도록 기계를 장치한다. 그러고 나서 네 귀퉁이로부터 공중의 한 꼭지점을 향해 레이저를 쏘게 되는데 이는 레이저를 통해 건축물의 틀을 잡는 것이다. 그 다음 맨 꼭대기 꼭지점부터 돌을 쌓아 아래로 내려간다. 이 때 쌓은 돌을 고정시켜 주는 것은 네 귀퉁이에서 쏘아지는 레이저 판이다. 돌 아래를 책받침처럼 레이저판이 받치고 있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다. 맨 위 꼭지점을 제외한 나머지 돌들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내려왔거나 아래에서 위로 쌓아 놀려졌다는 것이다. 상기와 같은 방법은 외계인에 의한 방법이고 기자의 피라미드를 제외한 나머지 피라미드는 모두 사람들이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아래로부터 위로 쌓아 올렸다.
작은 돌들을 쌓아 하나로 만들었는데 돌덩어리가 10톤이라면, 벽돌 쌓듯이 그 당시에 외계인에게서 배운 기술을 이용해서 특수한 모르타르를 만들어 발라가면서 작은 돌 100개 정도를 먼저 쌓아 올렸다. 그리고 미장하듯이 그 외부를 또다시 특수모르타를 발랐다.
하나의 돌처럼 되어버리는 특성이 있는 모르타르이기 때문에 마치 하나의 돌처럼 보이게 되며 면도칼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빈틈없이 접착되는 특수한 모르타를 만드는 것이 기술이었다. 단지 추측만 할 뿐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축조 방법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여전히 세계 7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축조물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피라미드 내부는 회교도들에게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맨 처음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간 인물은 9세기경 칼리드 아리아문이라고 한다. 그는 꼭 닫혀진 입구를 발견했는데 어떻게 하든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돌을 조금씩 파고 들어가 피라미드 내부에 들어갔다. 돌을 불로 달구고 산을 부어 약하게 된 곳을 부수어 들어가는 방법을 취했는데 그 때 무언가 무거운 것이 멀리서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따라 방향을 정해 더욱 파고 들어갔는데 결국 그는 왕의 관이 놓인 방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방은 빈 껍데기인 미완성이었고 거기서 되돌아 나오기 위해 지진에 의해 삐뚤어진 돌 사이를 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피라미드의 독특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널따란 46.6m가 되는 경사 26°의 긴 복도였다. 벽은 8.5m이고 잘 연마된 석회담으로 받혀져 있었다. 그 정점에서 안으로 들어가니 일ㄹ반인들에게 왕묘로 알려진 곳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왕의 묘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곳이 왕이 묻힌 곳일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 칼리드 아리아문 일행이 발견한 왕의 묘실은 통풍구, 그리고 5개의 기둥이 각각 중량 70톤을 받치고 있는 사실도 대단한 것이다. 5천 년 전에 정말 인간에 의해 축조되었다면 현대의 과학기술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정확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미 설명했다시피 피라미드 아래의 한 변의 길이가 230.34m이고 네 변의 합계가 931.392m이고 이것의 높이 146.6m로 나누면 원주율π(3.141596...)의 정확히 두 배인 6.285...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그냥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피라미드는 기저부의 방위가 동서와 남부 축에 의해 정확하게 0.065°로 맞아 있고, 정확한 기하학적 건물이며 피라미드 정점의 중심이기도 하다. 19세기의 대표적인 고고학자로 이집트학의 선구자였던 플린디스피트리 경(Sir Flinders Petrie)은 그가 직접 측정해보고서 기자 피라미드에 적용된 정밀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쿠프 왕의 피라미드로 추정되는 대 피라미드는 밑변의 길이 230.34m에 대해서 겨우 1.52㎝의 오차만 내었을 뿐이다. 이것은 1/15,000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모서리는 직각에서 각도 12′의 오차만 있을 뿐이다. 낮 동안의 온도 변화에 의해서 자의 길이 번화는 이보다 더 큰 오차를 낼 수도 있다. 수평과 돌을 다듬어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데 적용된 정밀도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180㎝ 길이에 달하는 접합 면은 직선에서 0.25㎜ 정도만 벗어난다.

카프리 왕의 피라미드는 이보다 3배 정도 오차가 커서 밑변 길이 215.265m에 대해 3.81㎝를 벗어나고 모서리가 직각에 대해서 33′ 벗어나 있다. 멘카우라 왕의 피라미드 경우는 이보다 더 심해서 각각 105.512m에 대해 7.62㎝, 직각에 대해 1′50″벗어나 있다.
이 이후의 시대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이 초기 왕조의 건축물에 비견한 만큼 정밀하게 건축된 건물은 없다."

피트리 경은 남아 있는 몇 장의 외장재를 측량해보고 180㎝가 넘는 길이를 측정한 결과 직선에서 겨우 0.25㎜ 정도의 오차만 있을 정도로 정밀하게 가공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이런 외장재들이 서로 붙어 있는 틈새 사이에는 매우 고운 모르타르가 발려져 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기술인데 외장재 접합부의 면적은 대략 2.4m ×1.5m인데 이렇게 넓은 면적에 0.5㎜ 두께로 고르게 깔 수 있는 기술을 가진 미장 전문가가 현재에도 없다. 우주왕복선에 사용된 스페이스 셔틀의 표면에 붙이는 내화 타일간의 간격도 0.5㎜보다는 크다.
그리고 15톤 이상 되는 외장재를 그 높은 곳에서 제자리에 올려놓은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정밀한 두께의 모르타르로 이음매를 처리하면서 한두 개의 돌도 아닌 데도 그렇게 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힘들다. 피라미드 밑변의 네 모서리는 직각에 가깝다. 최근에 측정한 바에의하면 밑변의 남동쪽 모서리는 89°56′27″, 북동쪽 모서리는 90°3′2″, 남서쪽 모서리는 90°0′33″,북서쪽 모서리는 89°59′58″로서 90°에 대해서 최대 오차는 0.07% 이내이다. 또한 방향을 보면 네 밑변이 각각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우선 북쪽 면은 2′28″서쪽으로 돌아가 있고, 남쪽 면은 1′57″서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동쪽 면은 5′30″북쪽으로, 서쪽 면은 2′30′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방향에 따른 오차는 0.015%로 어긋난 최대 면으로 따지면 1.1m에 해당된다. 이 정도로 정밀한 각도와 방향으로 건축할 수 있었을까?

밑변과 방위를 잘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건물 전체의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는 대각선 측량이 불가능했다. 돌출된 암석이 측량을 위한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각 면은 뒤틀림없이 정확하게 사각뿔의 중앙으로 모이도록 건축되는 상당히 어려운 기술인 것이다.
오늘날 모서리가 직각에 가깝고, 그 방위가 가장 정확해야 하는 건물은 천문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저너세계 시간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의 자오선 빌딩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이 건물 중앙의 정남북을 잇는 선인 자오선이 바로 경도가 0°이기 때문에 이 건물의 남북 방이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 피라미드는 남북 방위가 고작 3′정도 어긋나 있는데 비해 이 건물은 자오선에 대해서 9′이나 기울어서 지어졌다.
미루어 짐작하면 현대의 건축물에 사용하는 측량 장비보다 더 정밀한 측량 장비가 이미 5,000여 년 전에 사용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늘날 지어지는 건축물의 허용공차가 1% 정도 적용된다. 건축을 함에 있어서 너무 지나친 정밀도를 요구할 경우에 비용과 시간,노력 면에서 엄청난 투자가 들어갈 뿐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별다른 효용가치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피라미드는 무덤이라기보다는 천문대보다 더 정확성이 요구되는 건축물이었거나 아니면 당시의 건축기술이 그 정도로 발전된 수준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존 로머(John Romer)는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대 피라미드에 대해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실제로 피라미드는 현재까지 지어진 세계의 모든 건물 중에서 가장 정밀한 건물이라는 것이다.
저변으로부터 3분의 1 지점에 어떤 연유로 왕의 관이 놓여지게 되었으며,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피라미드는 과연 무덤인가에 대한 의문은 역시 남는다.

폴 브런튼은 「이집트의 신비」라는 그의 책에서 대 피라미드가 무덤이 아니라는 몇 가지 강력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일부 무덤으로 추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로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여기의 이교도 왕의 무덤이 비어 있고, 관의 뚜껑도 없으며,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상자가 왕의 방이 있는 층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왕의 석관이라고 당시의 이집트 학자들은 말하고 있지만 이 관의 면에는 보통의 상투적인 본문이나 종교적인 해석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거기에는 단 한자의 단어나 상형문자도 보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다른 모든 관들은 그것의 용도를 나타내기 위해 글이 써져 있거나 기념할 만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만일 이것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이집트 왕의 무덤이 확실하다면 왜 여기에는 그것이 없는 것이냐는 것이다.

둘째, 이 관의 천장으로는 200피트 이상의 구멍이 나 있는데 이는 외부의 공기를 접촉하려는 공기 통로로 보인다. 이러한 공기 통로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미라에게는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지 않고 반면에 노동자들도 그것에 뚜껑을 덮고 나면 다시 그곳에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는 데도 말이다. 이것은 왕족의 묘로 만들어진 이집트의 어떠한 건축물에서 이런 공기 구멍을 가지고 있는 방을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셋째, 다른 이집트인들은 실제적으로 매장을 위하여서는 지표면 보다 낮은 곳에 돌을 잘라내고 둥근 매장용 구덩이를 팠다. 이러한때에 이 관으로 추정되는 것은 왜 지표면으로부터 150피트나 올라온 공간 속에 있는 것일까? 사실상 즉은 자를 땅 밑이나 땅 바로 위에 두는 것이 과거에나 지금도 전 세계적인 관습이다.

넷째, 왕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 왜 대회랑 같은 넓은 공간이 그렇게 높은 곳에 지어졌을까?
그리고 거의 30피트의 높이로 만들어졌을까? 단지 4피트의 높이 위로 통하는 통로들만으로도 동일하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대 회랑 자체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노동력도 덜 들이고 그 일을 마칠 수 있었는데도,

다섯째, 왜 두 번째 방은 소위 여왕의 방으로 불리는 첫 번째 방에 그러허게 가까이 있는 것일까? 파라오[이집트 왕의 칭호]는 결코 자신의 곁에 여왕들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미라에게는 두 개의 무덤이 필요치 않다. 왕비의 방에는 이집트인 무덤으로서 대화하고 있는 벽 그림들과 묘비가 있다. 그것의 존재로 곁방을 FWJD당화하고 있는데 이것은 텅빈 것이고 왕의 방이라는 장식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왜 공기 구멍을 설치하였다가 그것이 발견되기 전에 막아버렸을까? 왜 이 피라미드를 건축했던 자들은 이 두 개의 무덤에 그 어려움을 겪으면서 환기구를 만들려고 했을까? 즉은 자는 숨쉬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데도 말이다. 이 환기구에서 다시 한 번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는데 1837년 대 피라미드를 탐사하던 하워드 비제(Howard Vyse)는 그의 조수에게 화약을 사용해서 환기구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라고 시켰다. 그러자 그 안에서 가로 1피트9약 30,48㎝), 세로가 4인치(약 10,16㎝) 두께 1/8인치(약 3.2㎜)인 철제판이 발견되었다.

이 철판은 환기구 구멍에 막혀 있는 문의 일부가 폭발로 떨어져 나온 것으로 판명되었다.
1881년 이 철판을 조사하던 플린더스 피트리 경은 철판 표면에 생긴 녹에 화석화된 원생 생물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똑같은 화석을 함유하고 잇는 석회암과 그 철판이 대 피라미드가 건설했을 당시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트리 경은 이미 이집트 구왕국 초기에 철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하는데 최소한 이집트 구왕국 6왕조 때부터라는 주장이다. 이 6왕조는 기원 전 2200년경으로 기원 전 1500년경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히타이트족보다 무려 700년이나 앞섰다는 것이 된다.
이 철판을 분석한 결과 그것은 채광되어 정련된 철이지 운석 등에서 얻은 것이 아님이 밝혀졌다. 1989년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자원학과 존소(M.P.Jones) 박사와 세이드 엘 게이(Sayed 띠 Gayer) 박사의 조사 결과 그 철판이 주석을 매우 적게 함유했기 때문에 운석에서 나온 철이 아니라고 판정했다. 이들의 실험결과 그 철판은 1,000℃ 이상에서 녹았다. 피트리의 놀 리가 맞다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선사시대부터 철을 사용했다는 것이 되는 셈이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1989년의 정밀 분석에서 철판의 한쪽 면에 금이 도금되어 잇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전기 도금과 아연 도금은 1800년 경 이탈리아의 볼타가 전지를 발명한 이후에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는 금을 수은에 녹여 아말감을 만들어 금속 표면에 입힌 다음 열을 가해 수은을 증발시켜 금만 남기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럴 경우 금박의 두께가 두껍고 균일하지도 않다. 독일인 아르네 에게브게트(Arne Eggebrecht)는 고대 이집트의 여러 조각상에 입혀진 금 도금의 두께가 얇고, 그 표면의 두께가 매우 고르다는 사실로부터 혹시 전기 도금법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다른 방법은 그런 형태의 도금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환기구에서 나온 철판의 금 도금도 전기 도금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그렇다면 렐레니즘시대(B.C. 약 300년경)에 바그다드 근처에서 사용되던 전지와 비슷한 종류가 그 시대로부터 무려 2,000년 전부터 사용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철과 전기를 사용했다면 현재 석재를 가공할 때 사용하는 전기를 이나 석재의 표면을 매끈하게 갈아내는 회전식 물갈기 공구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피라미드 내부에서 발견된 석관은 피트리 경에 의하면 이 석관의 외부체적이 2.332.8ι로서 정확히 외부 체적의 2배임을 확인하고는 고도의 정밀도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 정도의 정밀도로 가공하는 데는 어떤 도구가 사용되었다는 것인가. 크리스토퍼 던(Christopher P.Duun)이라는 공구 제작자는 그의 <고대 이집트의 진보된 기계 가공술>이라는 논문에서 '왕의 방'에서 사용된 43개의 들보를 다듬은 기술을 검토하고 나서 "비록 고대 이집트 시대에 어떤 기구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화강암 들보에 나 있는 기계자국은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들은 아마도 직선톱과 둥근 톱, 드릴과 같은 오늘날 사용하고 잇는 장비와 유사한 것을 사용했음이 틀림없다."라고 주장했다. 시대적인 관점으로 보면 청동기 시대에 단단한 서거재를 가공할 수 있는 것이 가능했겠느냐 하는 점이며 더욱이 이 석관은 평평한 석재를 짜맞춘 것이 아니라 내부를 정교하게 파내어서 만들고 화강암 표면을 물을 뿌리면서 갈아내어 매끈하게 하는 현대의 기법처럼 윤기나게 만든 기술은 시대적인 관저머에서만의 섣부른 추정은 상당한 혼란을 야기한다. 조세르의 피라미드 양옆으로 5기 왕조의 첫 번째 왕인 우제르카프와 마지막 왕인 우나스 왕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이 피라미드들은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제3 왕조에서 제5 왕조까지의 세월은 불과 300년 정도인데 4왕조의 대 피라미드에서 보여주는 완벽한 건축기술이 갑자기 보잘 것 없는 수준으로 전락해벼렸다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역사란 연속성이 있기 마련인데 시대적이고 연대적인 분류에 땨르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너무나 많다. 4왕조의 피라미드와 5왕조의 피라미드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또다른 변화가 존재한 것임에 틀림없다. 즉, 4왕조 피라미드 축조기 술은 분명히 5왕조 피라미드와 다른 무언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 가면 사카라 고분에서 출토된 돌 항아리가 많이 진열되어 있다. 그 당시 약 3만 점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의 돌항아리는 좌우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형태로 제작되어 있다. 단단한 암석을 대칭 상태로 둥글게 깎은 후에 그 속을 파내서 겨우 5㎜정도의 두께로 항아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뿐 더더 더구나 시대적인 연대로 추정하면 그것을 만든 시기는 구석기 시대인데 어떻게 그렇게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인가. 이미 1만 년 전의 사람들은 선반과 같은 기계를 이용해서 깎아 만들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영국 런던대학의 이집트학 교수였던 울터 에머리(Walter B.Emery)는 고대 이집트의 돌 항아리들이 고도의 정밀도로 다양한 형태를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 낼수 있는 기술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아직 우리는 이런 석기 그릇들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만족스런 설명을 할 수 없다. 그리고 비록 몇몇 과정에 대해 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다른 과정은 완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어떻게 밑이 얕은 그릇이나 접시 둘레에 손가락을 대고 돌려보았을 때 완벽한 원이 아니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최고의 정밀도를 달성한 것일까?

어떻게 수정으로 관상의 항아리를 만들면서 그 두께가 1㎜가 안되도록 깎아 만들 수 있을까? 비록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당시의 기술자들이 고정된 공구에 대해서 가공물을 회전하도록 하는 선반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많은 횟수를 반복하고 세심한 노력을 들여서 한다 하더라도 손으로 수가공에 의해 그 정도의 정밀도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피라미드의 표면은 현재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고 한다. 기자의 제2 피라미드 상부에 외장재가 일부 남아 있지만 최초에는 태양빛 아래에서는 빛을 발하고 그 광선을 반사하면 달에서도 그 빛을 볼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피라미드 한 개당 그 위에 매끄럽게 가공된 석회암 1만5천여 개로 구성된 외벽이 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부드럽고, 잘 닦여진 석회암으로 쌓여 네 면에 걸쳐 22에이커(약 89.029.6㎡)의 돌들은 주변의 수만 마일을 비출 수 있는 횃불처럼 그 아름다운 자태를 반사하는 거대한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 외장이 얼마나 정교했던지 돌과 돌 사이의 틈새는 면도 칼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외부의 피라미드 케이스 역할을 하는 돌들은 밀도가 높고 하얀 대리석과 같은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단단해지고 윤기가 나는 것이었다. 이런 돌들은 맞추었을 때 정확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오늘날 안경재료로도 사용 가능한 것들이다. 이런 돌들은 높이가 5피트(152.4㎝)이고 길이는 12피트(365.76㎝)이며 각각의 무게는 16∼20톤 정도이다. 각 35평방 피트(3.25㎡)의 면적에 대한 이음매는 알루미늄 호일 한 장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이 매끈한 표면에는 하얀 시멘트와 같은 막이 종이처럼 얇게 씌워졌다.

오늘날의 화학자들도 여전히 이 뛰어난 시멘트의 구성성분을 완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으며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이집트 연구가인 W.M. 플린더스 페트리 경은 이 케이스 역할을 하는 돌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이음매의 평균 두께는 14분의 1인치(약 1.8㎜)정도이다. 직선 방향이나 정방형에서 잘려진 것의 평균오차는 표면 길이 75인치(약 1.905㎜) 중에서 단지 100분의 1인치도 되지 않는다. 그가 누구였던지간에 석공이 그 정도의 오차 범위 내에서 그렇게 훌륭하게 작업했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16∼20톤에 달하는 돌을 옮겨서 그것을 꿰맞춘 일을 상상할 수 있다.
이것처럼 정확성을 가지고 오늘날 다시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과 더욱이 그 각 돌을 끼우는 것이 144,000번 이상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던 것이 지난 14세기초 카이로에 대지진이 일어나 모든 건물이 폐허로 변했지만 피라미드는 조금의 피해도 없었고, 시민들이 지진에 대한 재해 복구를 하기 위해 피라미드 외장재를 벗겨내어 쓰는 바람에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건물들이 모두 폐허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끄덕없이 버텨낸 것을 보면 이 대 피라미드에 적용된 고도의 건축공학적 기술을 엿볼수 있다.

19세기 영국의 고고학자 코로넬 하워드 비세는 이 알 수 없는 시멘트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시간의 흐름과 폭풍우에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 하나하나에서 일부 부서져 버렸는 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래의 배열대로 견고하게 붙은 채로 남아 있게 하는 것이 이 시멘트가 가지고 있는 불가사의다." C. 피아제 스미스 박사는 케이스가 되고 있는 돌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저렇게 모범적이 케이스 돌은 없었다. 저렇게 당당하고도 크고 불가사의한 것은 이집트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볼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건축공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불가사의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고 있다. 600만 톤이 넘는 초대형 건물을 건축하면서 어떤 특수한 방법으로 지반을 견고하게 처리했든지 아니면 이구조가 자체 하충을 충분히 흡수하는 어떤 기술이라도 있었던가에 대한 의문이 떠나지 않고 있다. 뛰어난 구조계산에 의한 구조적인 안정성과 하중을 견딜 수 있는 지반공사는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현존하는 세계의 대형 건설회사에게 이 대 피라미드의 규모의 건축물을 지어보라고 하면 가능하겠는가, 정밀한 지반조사와 구조계산에 의한 설계도를 자신있게 제시하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허용공차자 0.1% 이내의 정밀도로 시공할 수 있는 회사가 과연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반 침하에 대한 문제는 건축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도 이 대 피라미드는 현재까지 지반 침하 정도는 약 5㎜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에서 적용하는 대형 빌딩의 침하 기준인 100년간 15㎝와 비교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수치이다.
역사적 연대감에 상당한 혼돈을 가져오게 하는 또다른 것이 있다.
피라미드 옆에서 발견된 기원 전 26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체 길이 43m의 대양용 범선은 15∼20톤 무게의 석회암 뚜껑 아래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실제 항해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16세기 콜럼버스가 향해에서 사용했던 산타 마리아호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크기인데 이것은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기원 전 2600년경에 이미 콜럼버스가 사용했던 선박제조 기술을 능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1986년 스위스 취리히의 방사선 가속 장치를 이용해서 마크 레너 박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자 피라미드인 이 대 피라미드가 다른 어떤 피라미드보다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것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1,000년이나 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결과는 피라미드 건설에 사용된 모르타르를 탄소 동위 원소법으로 분석해서 얻은 자료인데 레너 박사는 다움과 같이 설명한다.

'피라미드 건설 시기는 기원 전 2809년부터 2869년까지로 나왔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그 건설 시기는 이집트학 학자들이 지목하는 쿠프 왕의 시기보다 훨씬 빠른 시기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자면 측정한 샘플에 따라 탄소 동위 원소법의 결과는 그 건설 시기가 기존 이집트 연대기에서 적게는 200년에서 1,200년까지 차이가 난다는 첨을 시사한다. 이것은 정말로 혁신적이다. 그래서 정통 이집트 학자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를 제기한다. 기자 피라미드는 그들이 믿고 있는 것보다 평균적으로 따져도 400년이나 더 오래된 것이다.'
피라미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현재 우리가 이용하는 피라미드 에너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이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만약 외계인이 만들었다면 그들이 언젠가는 찾아오게 될 지구에 대한 거대한 표적일 수도 있고, 인간이 발견하지 못한 막힌 공간 속에 공상과학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엄청난 과학 기자재들이 고스란히 그 외계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 미지의 축조물이 주는 의미는 아직도 상상만 무성할 뿐명쾌한 해답은 없다.
참고로 조선시대에 혹시 피라미드에 관한 내용이 있는지 찾아보았으나「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이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200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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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는 어떻게 세워졌는가?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정점에 위치한 기자지역에 세계최고, 최대규모이면서 가장 정밀한 석조건축물이 우뚝 서있다. 주류고고학계에서도 4천5백여년전에 (비주류학계에서는 5천여년전이전이나 7천5백여년전까지라는 주장도 한다)건설됐다고 인정하는 건축물이다. 쿠푸왕 피라미드는 엄청난 수의 둘과 벽돌을 쌓아올려 만들어졌다.

도대체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어떻게 건설했을까? 정답은 아직까지 그 방법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류학계든, 비주류학계든 정확하게 이런 방법을 썼다, 혹은 이랬을 것이다라는 추측만 난무할뿐, 이렇다 할 힘있는 "설"은 나오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도.

예를 들어 '미라'라든지 다른 소장품 같은 건 연대 측정이 어느정도 가능하다. 대표적인 방법이 탄소동위원소분석법(라디오카본 데이팅:방사성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으로, 방사성 탄소 14C는 거의 일정한 농도로 모든 유기물에 함유되어 있다. 생물이 죽으면, 새로운 14C가 몸에 공급되어야만 하므로, 그 양은 시간과 함께 반감기에 따라 감소한다. 그 감소량에서 연대를 구하는 방법)이다.

쿠푸왕피라미드 건축방법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알려진 게 없고, 우리가 이해될 만한 어떠한 정보도 없으므로 여기에서는 "주류학계"와 "비 주류학계"의 주장을 같이 논해보기로 한다.

[읽기전에 알아둘 일]

※ 주류학계 주장의 글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겠지만 , 비 주류학계 주장의 글은 현실에 맞지 않거나 황당한 부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차피 알려지지 않고, 알 수 없는 것이니, 어느 쪽의 주장을 믿고 ,믿지 않고는 여러분이 판단하기 바라고, 두 학계의 주장의 방법을 비교해서 논해봅니다.


주류학계의 주장

■ 주류학계의 피라미드 건축법

1. 기초 만들기

피라미드의 완성 후 위로부터의 막대한 하중을 견디기 위해 암반 위에 세워졌다. 건설지에 가로 세로로 수로를 파고, 수면의 높이에 맞춰 지표의 요철을 깍는다. 마지막에 도랑을 메워 암반을 수평으로 한다.

2. 방위를 잰다

피라미드의 네 측면은 거의 정확히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올바른 북쪽 위치 측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건설지에는 원형의 벽이 만들어지고, 밤이 되면 관측자가 그 중앙에 서서 주극성 안에서 어떤 특정한 별을 선정한다. 그 별이 벽 위에 나타난 위치와 진 위치에 표를 하고, 정확한 남북 방위를 측정한다.

3. 현실을 만든다



현실이나 통로의 벽에는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돌쌓기와 병행하여 만들어졌다. 현실 천장의 합각머리 모양의 지붕은 현실에 모래를 채우고, 그 모래를 다시 빼내는 방법으로 꼭 겹쳐지게 하였다.

4. 경사로를 만들고 돌을 쌓아올린다



크고 무거운 석재를 높은 곳으로 운반하는 데에는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만든 경사로가 이용되었다(경사로의 형태에 대해서는 나선형 등 몇몇 설이 있다). 기울기가 항상 일정해지도록, 돌을 높이 쌓아올라감에 따라 경사로도 길게 만들었다.

5. 캡 스톤을 끼운다

6. 화장석을 연마하여 완성. 화장석을 위에서 아래로 차례로 깎아서 연마해 간다. 이렇게 하여 번쩍이는 듯한 아름다운 피라미드가 완성된다.


쿠푸왕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풍부한 기하학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부 고고학자들은 기하학의 요람이 이집트임에 동조하고 있다. 이들은 이집트에서 기하학이 발달한 이유의 하나로 나일강의 범람을 제시한다. 쿠푸왕피라미드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비록 현대인들에게 거대한 피라미드에 많은 비밀이 간직돼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에 의해 당시의 기술로만 건설된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논할 때마다 우선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신석기 후반으로 볼 수 있는 고대이집트에서 어떻게 커다란 피라미드를을 건설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피라미드를 만든 공구를 알아보자.

이집트인이 사용한 공구는 단단한 돌덩어리, 나무에 묶는 원형 망치나 도끼류, 날카롭게 갈은 칼과 같은 돌 종류와 동과 은 금속류로 만든 칼이나 가위이다. 구리와 같은 연한 금속의 경우 현재의 합금과 같이 몇가지 불순물을 사용해 강도를 높이는 방법을 알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연장의 대부분은 단단한 석재였다고 추측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원시적인 공구로 대형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돌 항아리의 숫자와 가공 기술을 근거로 특수한 기술을 가진 공구가 사용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사용된 돌덩어리의 거의 대부분이 석회암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석회암은 석화물질이 물밑에 쌓여 굳어진 퇴적암으로, 경도가 가장 무른 활석 다음으로 가공하기 쉬운 재료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초보적인 공구로도 충분히 자신들이 원하는 규모로 재단하거나 가공할 수 있다.

한 예로, 시카고 대학의 레너 교수는 50명도 채 안되는 인원과 3주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0.75톤에서 3톤에 달하는 1백86개의 돌로 8층짜리 피라미드를 고대의 연장만으로 건설했다. 즉, 고대인들이 충분히 피라미드를 고대의 공구만으로도 건설할수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을 했다.

어떤 사람은 피라미드 안에 단단한 화강암이 사용됐는데, 이것을 어떻게 가공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화강암도 돌의 형태와 결을 잘 알면 쉽게 가공할 수 있다는 것을 석공들은 잘 알고 있다. 화강암이 석회암 보다 단단한건 사실이지만, 화강암은 6각의 얇은 판모양의 운모, 기둥 모양의 석영, 두꺼운 판모양의 장석 등3가지 성분이 비균질적으로 섞여 있어, 어떤 때는 화강암이 설탕처럼 쉽게 조각나기도한다.

쿠푸왕의 치세가 시작되고 나서 17년이 되었을 때 바로 그 높이까지 건조된 것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의 높이는 146.5m이므로 완성되기까지는 20여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조의 노동력은 농민이었다. 왕은 나일강의 증수로 경지가 물에 잠기는 시기에 농민을 노동자로 고용한 것이다. 농한기에 식량과 의복, 일을 지급한다는, 말하자면 일종의 실업 정책인 것이다.

피라미드는 마치 모래 위에 세워져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 기자대지의 단단한 암반 위에 건설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50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피라미드 건조는 파라오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에 즉위하면 곧바로 착공을 시작했을 것이다.

우선 건설지가 선정되고, 설계도나 축소 모형도 작성되었다. 장소가 결정되면 우선 기초 다지기부터 시작하고 수로를 사용하여 암반을 수평으로 하고, 별을 관찰하여 정확한 방위를 측정하였다. 피라미드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국내에서 농민들이 징용되고, 마침내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일 강이 증수하여 경지가 물에 잠기게 되는 기간 동안 농민들은 피라미드 건설에 종사하였다. 노동자들에게는 주거와 의복, 식사가 제공되고, 피라미드 건설은 농한기에 실시되는 국가 사업이었다. 또 나일 강 수위의 상승은 석재를 운반하기에 적합하였다.

피라미드의 건재는 주로 석회암이었는데, 부분적으로는 아스완산 화강암도 사용되었다. 석회암은 기자 부근의 투라에서 좋은 질의 것이 채굴되었다. 대 피라미드는 약 270만개로 어림되는 석재를 사용하였다. 돌을 파 내는 일은 엄청난 작업이었을 것이다. 청동제의 끌과쇄기로 돌을 파내고, 현장에 운반되고 나서 모양이 다듬어 졌을 것이다.

석재의 운반에는 나무로 만든 썰매가 사용되었다. 돌을 어떻게 해서 쌓아 올렸는가는 피라미드의 큰 수수께끼 중의 하나인데, "람프"라는 경사로를 이용했다는 것이 유력한 주장이다.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만들어진 람프에는 썰매가 잘 미끄러지도록 석고를 뿌리거나, 역레일을 만드는 등의 고안이 되어 있었다. 썰매에 실린 석재는 기울기 10분의1(10m 에 1m 오르는 기울기)의 경사로로 운반되고, 위치를 결정할 때에는 산륜이 사용되었다. 기울기는 항상 일정하게 되도록, 높이가 높아지면 경사로의 길이도 연장된다. 내부의 구조도 돌을 쌓아올리면서 만들어 나갔다. 정상에 캡 스톤을 끼우면,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쌓아올린 석재를 발판으로 하면서 단을 깎고 표면을 연마하여 마침내 피라미드를 완성시킨 것이다.

여기까지가 주류학계가 주장하는 가장 현실적인 피라미드 건축법이다. 하지만 이 주장도 최근에는 근거없는 것으로 취급되고, 인정하지 않는 추세이다.


비 주류학계의 반박

많은 고고학자들은 당시가 절대왕권 체제로서 자본과 노동력, 그리고 시간을 무제한으로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피라미드의 건축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요점은 석기와 간단한 청동기 도구로 석회암을 채굴하고, 통나무와 지렛대, 그리고 윤활유를 사용해서 돌을 운반했으며, 완만한 경사로를 피라미드 상부까지 건설해서 돌을 쌓아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언뜻 생각하기에는 가능할 것 같아도 건축의 규모를 헤아려보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주류학계에서는 왜, 피라미드의 건축자인 파라오 쿠푸가 암석을 사막에 있는 공사장으로 운반하게 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못한다. 그 이유에 대해선, 원래는 그 지역에 천연의 암벽 협곡이 있었는데 거대한 공사로 인해 암석을 다 써 버렸다는 것과, 궁색하긴 하지만, 파라오가 여름 궁전에서 작업이 진척되는 것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라는 가정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도대체 어떤 힘으로, 어떤 "기계"와 기술을 사용하여 암석층을 수평으로 다듬었을까? 어떤 방법으로 건축가는 갱도를 파나갔을까? 그리고 무엇으로 갱도 안에 불을 밝혔을까?(주류학계의 방법대로 밑에서부터 건물 외벽과 안에 있는 현실을 같이 쌓아 올렸다고 하지만 어느정도 진척후에는 갱도 안의 내각을 맞추거나 갱도 앞에서 뒤까지의 길이를 직선으로 맞추려면 작업을 갱도안에서 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왕들의 계곡에 있는 암석 묘지에서도 횃불이나 그 어떤 유사한 조명기구는 사용되지 않았다. 더럽혀진 천장이나 벽도 없고, 그런 흔적이 제거됐을지도 모를 최소한의 증거조차 없다. 260만 개의 거대한 석재가 채석장에서 잘라지고 연마되어 운반되고, 건축부지에서는 밀리미터 단위로 정확하게 맞추어졌다.

피라미드를 세울 장소는 파라오가 마음대로 결정했으며, 피라미드의 비교할데가 없는 크기는 건축가에 의해 우연히 떠올랐으며, 몇 십만 명의 인부들이 12톤이나 되는 무거운 석재를 (지금은 없는) 밧줄로 (지금은 없는) 미끄럼 틀을 사용해 경사면 위로 밀고 당기고, 수많은 인부들이 (지금은 없는) 곡식으로 연명했으며, 파라오가 여름 궁전 앞에 짓도록 한 (지금은 없는) 오두막에서 잠을 잤고, (지금은 없는) 확성기로 140m 여미터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인부들에게 "영차 영차" 소리를 내어 인부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12톤짜리 석재를 하늘을 향해 밀어 올리게 하고, 인부들이 날마다 10개의 석재를 쌓아 터무니 없는 도급일을 달성 했을까?

만약 이런 식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했다면, 20년은 고사하고, 약 250,000일(684년)에 걸쳐 대충 250만 개의 석재를 그 멋진 피라미드에 쌓아 올렸을 것이다.

방위각 즉, 정확한 북쪽을 별의 움직임으로 측정을 했다.? 눈대중으로 어떻게 0.몇%의 오차를 극복했을까. 네모난 석재를 도르래로 이동시켰다고 한다(그것도 나무도르래로). 하지만 그 당시 이집트에서 주로 자라던 몇 그루 안 되는 종려나무를 벌채해서, 그것을 가공해 미끄럼 도르래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려나무의 열매는 식량으로 꼭 필요했고, 그 줄기와 잎은 말라 버린 대지에 그늘을 제공하는 유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학계에서는 나무 도르래가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피라미드 건축에 관해 가장 뻔한 공학적 설명조차 찾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무를 수입한 것일까? 외국에서 나무를 수입하려면 상당히 큰 선박이 필요하며, 선박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서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 카이로까지 나무를 운송해야 했을 것이다. 육지에서는 어떻게 운송했을까? 역시 도르래로 밀면서? 그럼 말과 마차로 옮기지 않았냐고? 말과 마차가 이집트에 도입된 건, 기원전1600년, 제17왕조 때 일이다.

● 주류 고고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의 절대 군주가 1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서 나일강 건너 수킬로미터 떨어진 채석장에서 굴림대, 로프, 나무썰매, 뗏목 등을 이용해서 이 돌들을 20여 년 동안 운반해 쌓았을 것이라지만, 이런 거석들을 1톤당 몇 명이 며칠 걸렸을 것이라는 식으로 산술적인 계산을 하여 책상 앞에서 상상만으로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는 고고학자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는 토목 공학에 조금이라도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깨달을 수 있다.

토목 공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대피라미드는 노예나 일반인을 마구잡이로 불러다가 건설된 것이 아니라 극도로 효율적인 관리 체계와 고도의 기술이 제공된 아래에서 매우 숙련된 노동력이 투입된 것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굴림대, 나무 썰매, 뗏목, 버팀목 등을 만들어 조달하는 인원이 필요한데, 어림 계산으로도 족히 10만 명은 필요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목재들을 주변에서 절목해 운반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인원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또, 피라미드로 돌을 운반하기 위해 10:1 의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었다면, 거기에 소요되는 석재는 대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든 석재의 7배 이상이나 된다. 보조 석재를 줄이기 위해 다른 방법을 쓴다고 해도 어쨌든 추가로 최소한 두 배의 인원이 더 있어야 한다. 또, 이들 전부를 먹이기 위한 식량 조달, 운송, 요리사들, 그리고, 그들을 재우기 위한 숙박 시설의 건설자들, 피복의 조달자들, 총무, 노무, 재무관리자들까지, 고려하면 실제로 소요된 인원은 적어도 5배가 넘는 5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변에 얼마나 충분한 목재가 있었을까 하는 문제도 생각해봐야 한다. 주변에 충분한 목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를 먼 곳에서 운반해와야 하는데 이는 돌의 운반에 못지 않게 큰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돌의 무게가 평균 2,5톤 정도인 것으로 보고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2.5톤은 제일 작은 돌의 무게이며, 이보다 더 무거운 돌들이 피라미드 내부 곳곳에 사용되었다. 특히 왕의 현실로 알려진 곳을 구성하는 개당 70톤에 이르는 100개의 석재는 다른 작은 돌들과 같은 석회암이 아니라 화강암이다.

주류학계에서는 피라미드가 단단한 지반위에 건설됐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믿고 있다(600만 톤이 넘는 초거대건축물이). 지반침하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1878년 영국인들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이라는 애칭이 붙은 186톤짜리 오벨리스크를 영국의 런던으로 옮긴 일이 있다. 맨 처음에는 이 첨탑을 국회의사당 앞에 세우려고 했으나 그곳의 지반이 약하여 탑이 가라앉을 가능성이 있다는 조사 결과에 따라 현 위치인 임뱅크멘트(Embankment) 로 옮겼다고 한다.

대피라미드의 총무게는 이 첨탑의 3만배가 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피라미드는 오늘날까지 침하된 정도는 5mm 정도라고한다. 이것은 오늘날 미국에서 대형 빌딩에 적용하는 지반 침하 기준인 100년간15Cm 와 비교해보면 그 건축 연대를 고려할 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수치임을 알수 있다.

우리나라의 예로는, 63빌딩이 건축되고 한동안 주변 지역의 지반 침하로 민원이 쇄도했었다. 또,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는 누구라도 아는 일이다. 삼풍백화점은 부실공사였다는 것을 다들 알고는 있지만 아무리 부실공사라고 하지만 주류학자들의 말대로, 원시인이었던 5000년전의 이집트인들보다 더 원시인이란 말인가. 삼풍건물 설계자들이? 그건 아니라고 본다.

오늘날 전세계의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건축회사들에게 "대피라미드" 정도의 초거대건축물을 어떤 지역에 만들라고 주문 한다면 정밀한 주변 지반 조사와 거기에 맞추어 그런 설계도를 자신있게 제시할수 있는 회사가 과연 몇 군데나 될까? 오늘날 지어지는 일반적인 건물의 건축에도 1% 정도의 훨씬 큰 오차가 적용된다. 그러나 이집트의 대피라미드는 0.몇몇 % 이하다(못믿겠다면 여러분의 근처에 건축공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건설쪽으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의 직각의 오차가 몇% 까지가 규정이냐, 아니면 건물전체의 공차의 규정이 몇 %가 한정치 인가"라고 물어보라).

일본의 돈많은 어느 재력가가 축소판 피라미드를 지으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설계 초기에 포기한 일이 있다.(시카고 대학의 레너박사팀은 모형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며....? 어떻게 된거야..?) 그러나 레너 교수는 초소형 피라미드를 만든 것 가지고 이런 말을 단정적으로 말할 자격이 없는 듯하다.

대피라미드에는 무려 70톤이 넘는 돌들이 많이 사용된 반면, 그는 고작 최대 3톤 정도의 돌들을 사용했을 뿐이다. 대피라미드가 230만 개의 돌로 140m 높이의 거대한 건축물인데 비해 그는 수미터에 불과한 모조품을 만들었을 뿐이다. 레너 교수는 이런 모형을 만드는데, 굳이 맘모스급 건축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건축공학적인 고려를 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고서 어떻게 그 옛날 대피라미드가 몇 번의 실습을 통한 노하우 축적으로 충분히 재현할 수 있는 기술로 평가를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주류 이집트학자들은 대피라미드가 건설되기 100년 전부터 피라미드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소형피라미드 건설부터 시작해 점점 건축 노하우를 쌓은 후 마침내 기자의 거대 피라미드군을 건설할 수준에 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시대에 고대 이집트에서는 100년 남짓 동안 일대 기술 혁명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 처음 자그마한 몇 개의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동안 측량학, 지질학, 건축, 운송, 의료, 자원개발 등에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지 않고는 이런 초대형 건축을 시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그 공사 자체는 당시 한 국가의 사회, 경제 문화 체제 전부를 좌우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쌓인 노하우는 문명의 발전에 어떤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정도로 지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피라미드 건설후 그 찬란한 문명은 도대체 어디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단 말인가.?

기자의 대피라미드는4왕조 때 건설되었다. 그렇다면 5왕조 때는 기자의 피라미드보다 더 거대하고 더 정밀하고 더 완벽해야 하는게 아닌가? 하지만 5왕조때의 피라미드는 지금 현재 그 형상을 원래대로 간직한 게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기타 관련자료

- 스핑크스의 침식흔적에 관한 자료

기자의 세 피라미드 중에 가운데 있는 카프레왕 피라미드와 연결된 하안신전, 그 신전옆에 스핑크스가 있다.

스핑크스의 머리부분은 파라오, 몸은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집트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스핑크스 중에서 가장 크다. 전체 길이는 57m, 높이는21m, 석회암으로 되어있다. 완성 당시에는 전신에 채색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무덤의 수호신이며 동시에 제단으로도 사용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스핑크스에는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것과, 사람의 머리에 짐승의 몸을 가진 두가지 형식이 있다.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스핑크스는 토테미즘Totemism(동물이나, 특정 대상을 조상으로 인식하는 관념)에 따라 표현되어 마스타바, 피라미드를 비롯해서 신전과 궁전의 내부에다 입상으로 안치 했고, 사람의 머리에 짐승의 몸을 가진 스핑크스는, 신과 사람을 동격으로 보는 관념Anthropomorphism에 따라 신전참도(Dromos) 양측에 노변 스핑크스로 나열시키거나 피라미드와 독립시켜 대형화시켰다.

노변 스핑크스로 유명한 것은 카르낙의 아몬 대신전 경내에 위치한 콘즈신전에서 룩소르의 무트신전까지 4.2km 거리에 이르러 정면 파일론 앞에 있는 것으로 수도 양측 노변에 각각 20기 씩 총 40기가 있는데, 양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한 형태이고, 람세스2세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되어있다.

기자에 있는 인두사자신의 형태를 한 대스핑크스는, 카프레왕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믿을만한 것은 아니다.

스핑크스는 아랍어로 '아불 하울' 이라고 불리며, 이는 '공포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처음 발견당시에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지만, 아랍군의 침입 후에는 코가 깎여 나갔고, 영국군에게는 수염이 뽑혀 나갔다. 지금은 공포의 아버지로 보이기보다는 측은한 경애심이 생길 정도로 되어있다. 스핑크스의 수염은 지금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이집트에 있는 모든 것이 신비롭고 미스테리이지만, 스핑크스만큼이나 신비에 쌓인 것도 드물다. 그 신비중에 가장 예측이 불가능한 것은 바로 스핑크스의 연대측정이다.

스핑크스의 건조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아직까지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학자들 마다 연대측정이 다른데, 일부는 기원전 2400년전 카프레왕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주장과, 제3왕조 시대의 종교도시 " 헬리오폴리스" 의 태양신의 예배소의 하나로서 그 영지의 경계에 세워진 것이라는 주장이다.

3왕조때 세워졌다는 주장의 근거는, 스핑크스가 세워져 있는 바닥면과 카프레 왕의 "하안신전"의 바닥면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나, 양쪽 모두에 사용되고 있는 석재의 생산지가 다르다는 점, 카프레 왕의 참배길이 의도적으로 스핑크스를 피해서 만들어져 있다는 점들의 근거를 들어, 4왕조 이전에 세워졌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보스턴 대학의 저명한 지질학자가, 스핑크스의 제작연대를 기원전 8000년 이전이라는 주장을 해서 주류학계를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기원전 8000년 이전이라는 근거는, 스핑크스의 몸에 있는 가로로 난 "홈" 이, 물에 의한 침식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핑크스가 세워져 있는 바닥면이 주위를 깎아서 만들어져 있다는 것과, 깎인 부분에 생긴 절벽에 무수한 세로 도랑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로 도랑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리면서 생긴 것이고, 그 정도 홈이 생기려면 홍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핑크스가 홍수가 나기 이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는 것이 지질학자의 주장이다.

그럼 홍수는 언제 났는가?

스핑크스의 거대한 몸이 잠길만큼, 이렇게 큰 비는 언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10000년 이상 전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최근 지질학자의 주장이다. 분명히 지금부터 1만 년 또는 1만 1000년 전쯤에 빙하기가 끝나고, 홍수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신전말고 이와같은 거대한 상을 만들어야만 했는가 하는 문화적 관점에서의 이론도 없다. 또, 빙하기가 끝나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도 없다.

다른 학자는 빙하기 이후 온난기에 큰 비가 내렸다고 생각하는 고 기상학자도 있다. 실제로 중왕국 시대에는 지금의 사막은 더욱 뒤로 후퇴되어 있고, 그 곳에는 녹지가 있었다고 한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
상기에 서술한 피라미드에 대한 내용은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진 보편적인 내용이지만 여전히 피라미드가 지닌 수수께끼는 남아 있고 세계 각국의 과학자와 수많은 사람들이 피라미드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지만 아직도 속시원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이집트의 대 피라미드가 축조 방식이나 규모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대부분 이집트의 대 피라미드를 위주로 연구되고 있다
.
과연 고대의 이집트인이 직접 만든 축조물이냐 하는 점에서부터도 의문은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 피라미드는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기원 전 28세기에 이집트를 통치한 쿠프 왕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일반인들이 알고 있지만 이것은 쿠프 왕의 장식물이 피라미드 내부의 왕실 위에 있는 5개의 방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할 뿐이며 사실은 기원 전 3만6천 년경에 전설적인 아틀란티스의 토트라는 사람에 의해 축조되었으며 이 피라미드 축조 기술은 이미 전설 속의 시리우스 문명권에서 사용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기자 피라미드 군이 오리온 별자리의 3개의 별들과 동일하게 배치되었다는 이론이 제기되면서 더욱 외계인이 건설하였다는 점이 설득력을 갖게 한다. 즉, 외계인들이 자신의 별에서 피라미드를 사용하였고 그 기술대로 지구에 건설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외계인들이 축조할 당시에는 지구가 빙하기였고 지금의 이집트 주변만이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 축조했기 때문이고 그 후에 이 대 피라미드를 모방해서 다른 지역에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주장도 어느 정도는 설득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피라미드의 신비한 에너지는 바로 이 대 피라미드의 형태에서 더욱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피라미드는 무슨 목적으로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것은 외계인인 시리우스 문명권에서 만들었을 경우와는 목적 자체가 다르겠지만 시리우스 문명권의 외계인이 만들었다면 차후에 빙하기가 끝나고 지구에 다시 오기 위한 하나의 표적이나 자신들의 물품을 지하에 보관하기 위해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고 이 피라미드를 해체해서 구석구석 확인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피라미드 지하나 내부가 막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알 수 없는 공간에 그들이 사용했던 발달된 기계나 기구 등이 그대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기술로는 알 수 없지만 이 막힌 공간을 손쉽게 열 수 있는 방법 역시 그들이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쿠프 왕이 건설했다면 쿠프 왕이 건설할 당시는 예수가 태어나기 약 2.900년 전이었으며 이집트 파라오(국왕)는 한층 더 위대한 태양신에게 보내지게 하기 위해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태양과의 거리가 지상보다 훨씬 가까운 위치로 위대한 신께 국왕을 보낸다.
즉, 죽은 국왕을 승천시켜 태양신에게 조금이라도 빠르게, 정확히 가깝게 보내기 위해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는 것이며 그리고 정치적 권력의 상징으로 만들었다는 설이 유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는 것이다. 250만 개 이상의 돌을 쌓아서 만든다면 수십만 명의 인력이 20년이 넘게 걸려야 겨우 만들 수 있고, 단순히 쌓아서 만든다면 높이가 144.6m인 이 거대한 석조물을 어떻게 쌓아 올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영국의 월리엄 델라 교수는 "물체를 낙하시키면 중력에 의해 지면으로 떨어진다는 법칙과 반대로 부상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말한다.
물리적인 힘과 상관없이 공중으로 부상시켰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 또한 설득력이 약하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집트인이 만들었다면 이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해서 수십만 명의 노예와 노무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노예들이 있었다면 잘 훈련된 군대와 일부 성직자, 그리고 농부, 공무원들과 황실 관리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건축 연대를 약 B.C. 3000년경으로 추정한다면 그 당시에는 나일강 주변의 비옥한 농지는 삼각주뿐이였는데 이 나일강 주변의 농산물로 이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한 가지 가능성이 있는 대답은 그들이 나무로 된 굴림대를 따라서 밀어가거나 나무로 된 선로 위로 돌을 단지 미끄러뜨렸다면 가능할 수 있다.
이런 목재를 얻기 위해 그들은 이런 목재들을 어디선가 가져와야 할 것이다. 이곳의 목재의 대부분은 대추야자나무로 태양빛이 강렬한 그런 나라에서 필요한 그늘을 제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식량원인 그것을 잘라낸다는 것 역시 쉽지 않다. 그래서 이 나무를 이용했다는 점은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목재 굴림대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선로를 따라돌을 끌고 왔거나 끌어당겼을 가능성도 있다. 상형문자로 그려진 것에서 돌에 밧줄을 묶고 수백 명의 사람이 이것을 당기고 있고, 한 남자가 돌 위에 서서 사람들이 일치하여 돌을 끌 수 있도록 독려하는 그림은 가끔 발견된다. 그렇다면 각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에는 적어도 1m정도의 일할 수 있는 공간은 필요하다. 약 천 명의 사람들이 이 로프에 매달려 있다고 가정해보면 이 사람들의 총 길이는 약 1,000m의 길이가 된다. 이런 상태로 작업의 통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시의 인구를 고려해보아도 단순 노동력으로는 그런 대규모 공사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인력만으로 작업을 할 때에 그들을 먹이고, 잠재우고 하면서 건설해야 하는 문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해진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수백 명의 인력을 대체할 수 있는 기계 장치의 도움 없이는 피라미드 건설이 무리일 수밖에 없다.

덴마크의 토목공학자인 가드 헨슨(P.Garde Hanson)은 덴마크 공학학회에서 발간된 책자에서 당시에 순전히 인력을 이용해서 대 피라미드 공사를 했다고 가정하고, 엔지니어의 입장에서 그 공정을 면밀하게 분석해보았다.
그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이 그 보고서를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런 공사를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키루스 2세, 알렉산더 대왕을 합쳐 놓은 천재에 의해 조직된 군대가 투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외계인과 교신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박주원 씨가 쓴 「외계인과의 교신기록」이라는 책에서 피라미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이 외계인과 교신을 해서 지구의 몇 가지 비밀을 알아내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피라미드는 당시의 학자가 외계인과 우연한 기회에 대화를 나누게 되고 그 외계인의 행성에 가서 피라미드, 축조 기술을 배워서 지구로 되돌아와서 피라미드를 촉조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돌을 외계인들이 어딘가에서 날라다 주었다는 것이다. 그 축조 기술은 아래에서 쌓아서 위로 올라가는 방식이 아닌 위에서 아래로 쌓는 방법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먼저 피라미드 건설할 위치를 선정한 다음 밑변의 네 귀퉁이에 레이저를 쏠 수 있도록 기계를 장치한다. 그러고 나서 네 귀퉁이로부터 공중의 한 꼭지점을 향해 레이저를 쏘게 되는데 이는 레이저를 통해 건축물의 틀을 잡는 것이다. 그 다음 맨 꼭대기 꼭지점부터 돌을 쌓아 아래로 내려간다. 이 때 쌓은 돌을 고정시켜 주는 것은 네 귀퉁이에서 쏘아지는 레이저 판이다. 돌 아래를 책받침처럼 레이저판이 받치고 있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다. 맨 위 꼭지점을 제외한 나머지 돌들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내려왔거나 아래에서 위로 쌓아 놀려졌다는 것이다. 상기와 같은 방법은 외계인에 의한 방법이고 기자의 피라미드를 제외한 나머지 피라미드는 모두 사람들이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아래로부터 위로 쌓아 올렸다.
작은 돌들을 쌓아 하나로 만들었는데 돌덩어리가 10톤이라면, 벽돌 쌓듯이 그 당시에 외계인에게서 배운 기술을 이용해서 특수한 모르타르를 만들어 발라가면서 작은 돌 100개 정도를 먼저 쌓아 올렸다. 그리고 미장하듯이 그 외부를 또다시 특수모르타를 발랐다.
하나의 돌처럼 되어버리는 특성이 있는 모르타르이기 때문에 마치 하나의 돌처럼 보이게 되며 면도칼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빈틈없이 접착되는 특수한 모르타를 만드는 것이 기술이었다. 단지 추측만 할 뿐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축조 방법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여전히 세계 7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축조물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피라미드 내부는 회교도들에게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맨 처음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간 인물은 9세기경 칼리드 아리아문이라고 한다. 그는 꼭 닫혀진 입구를 발견했는데 어떻게 하든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돌을 조금씩 파고 들어가 피라미드 내부에 들어갔다. 돌을 불로 달구고 산을 부어 약하게 된 곳을 부수어 들어가는 방법을 취했는데 그 때 무언가 무거운 것이 멀리서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따라 방향을 정해 더욱 파고 들어갔는데 결국 그는 왕의 관이 놓인 방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방은 빈 껍데기인 미완성이었고 거기서 되돌아 나오기 위해 지진에 의해 삐뚤어진 돌 사이를 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피라미드의 독특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널따란 46.6m가 되는 경사 26°의 긴 복도였다. 벽은 8.5m이고 잘 연마된 석회담으로 받혀져 있었다. 그 정점에서 안으로 들어가니 일ㄹ반인들에게 왕묘로 알려진 곳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왕의 묘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곳이 왕이 묻힌 곳일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 칼리드 아리아문 일행이 발견한 왕의 묘실은 통풍구, 그리고 5개의 기둥이 각각 중량 70톤을 받치고 있는 사실도 대단한 것이다. 5천 년 전에 정말 인간에 의해 축조되었다면 현대의 과학기술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정확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미 설명했다시피 피라미드 아래의 한 변의 길이가 230.34m이고 네 변의 합계가 931.392m이고 이것의 높이 146.6m로 나누면 원주율π(3.141596...)의 정확히 두 배인 6.285...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그냥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피라미드는 기저부의 방위가 동서와 남부 축에 의해 정확하게 0.065°로 맞아 있고, 정확한 기하학적 건물이며 피라미드 정점의 중심이기도 하다. 19세기의 대표적인 고고학자로 이집트학의 선구자였던 플린디스피트리 경(Sir Flinders Petrie)은 그가 직접 측정해보고서 기자 피라미드에 적용된 정밀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쿠프 왕의 피라미드로 추정되는 대 피라미드는 밑변의 길이 230.34m에 대해서 겨우 1.52㎝의 오차만 내었을 뿐이다. 이것은 1/15,000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모서리는 직각에서 각도 12′의 오차만 있을 뿐이다. 낮 동안의 온도 변화에 의해서 자의 길이 번화는 이보다 더 큰 오차를 낼 수도 있다. 수평과 돌을 다듬어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데 적용된 정밀도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180㎝ 길이에 달하는 접합 면은 직선에서 0.25㎜ 정도만 벗어난다.

카프리 왕의 피라미드는 이보다 3배 정도 오차가 커서 밑변 길이 215.265m에 대해 3.81㎝를 벗어나고 모서리가 직각에 대해서 33′ 벗어나 있다. 멘카우라 왕의 피라미드 경우는 이보다 더 심해서 각각 105.512m에 대해 7.62㎝, 직각에 대해 1′50″벗어나 있다.
이 이후의 시대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한 이 초기 왕조의 건축물에 비견한 만큼 정밀하게 건축된 건물은 없다."

피트리 경은 남아 있는 몇 장의 외장재를 측량해보고 180㎝가 넘는 길이를 측정한 결과 직선에서 겨우 0.25㎜ 정도의 오차만 있을 정도로 정밀하게 가공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이런 외장재들이 서로 붙어 있는 틈새 사이에는 매우 고운 모르타르가 발려져 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기술인데 외장재 접합부의 면적은 대략 2.4m ×1.5m인데 이렇게 넓은 면적에 0.5㎜ 두께로 고르게 깔 수 있는 기술을 가진 미장 전문가가 현재에도 없다. 우주왕복선에 사용된 스페이스 셔틀의 표면에 붙이는 내화 타일간의 간격도 0.5㎜보다는 크다.
그리고 15톤 이상 되는 외장재를 그 높은 곳에서 제자리에 올려놓은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정밀한 두께의 모르타르로 이음매를 처리하면서 한두 개의 돌도 아닌 데도 그렇게 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힘들다. 피라미드 밑변의 네 모서리는 직각에 가깝다. 최근에 측정한 바에의하면 밑변의 남동쪽 모서리는 89°56′27″, 북동쪽 모서리는 90°3′2″, 남서쪽 모서리는 90°0′33″,북서쪽 모서리는 89°59′58″로서 90°에 대해서 최대 오차는 0.07% 이내이다. 또한 방향을 보면 네 밑변이 각각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우선 북쪽 면은 2′28″서쪽으로 돌아가 있고, 남쪽 면은 1′57″서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동쪽 면은 5′30″북쪽으로, 서쪽 면은 2′30′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방향에 따른 오차는 0.015%로 어긋난 최대 면으로 따지면 1.1m에 해당된다. 이 정도로 정밀한 각도와 방향으로 건축할 수 있었을까?

밑변과 방위를 잘 결정했다고 하더라도 건물 전체의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는 대각선 측량이 불가능했다. 돌출된 암석이 측량을 위한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각 면은 뒤틀림없이 정확하게 사각뿔의 중앙으로 모이도록 건축되는 상당히 어려운 기술인 것이다.
오늘날 모서리가 직각에 가깝고, 그 방위가 가장 정확해야 하는 건물은 천문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저너세계 시간을 정하는 기준이 되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의 자오선 빌딩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이 건물 중앙의 정남북을 잇는 선인 자오선이 바로 경도가 0°이기 때문에 이 건물의 남북 방이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 피라미드는 남북 방위가 고작 3′정도 어긋나 있는데 비해 이 건물은 자오선에 대해서 9′이나 기울어서 지어졌다.
미루어 짐작하면 현대의 건축물에 사용하는 측량 장비보다 더 정밀한 측량 장비가 이미 5,000여 년 전에 사용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늘날 지어지는 건축물의 허용공차가 1% 정도 적용된다. 건축을 함에 있어서 너무 지나친 정밀도를 요구할 경우에 비용과 시간,노력 면에서 엄청난 투자가 들어갈 뿐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별다른 효용가치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피라미드는 무덤이라기보다는 천문대보다 더 정확성이 요구되는 건축물이었거나 아니면 당시의 건축기술이 그 정도로 발전된 수준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존 로머(John Romer)는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대 피라미드에 대해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실제로 피라미드는 현재까지 지어진 세계의 모든 건물 중에서 가장 정밀한 건물이라는 것이다.
저변으로부터 3분의 1 지점에 어떤 연유로 왕의 관이 놓여지게 되었으며,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피라미드는 과연 무덤인가에 대한 의문은 역시 남는다.

폴 브런튼은 「이집트의 신비」라는 그의 책에서 대 피라미드가 무덤이 아니라는 몇 가지 강력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일부 무덤으로 추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로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여기의 이교도 왕의 무덤이 비어 있고, 관의 뚜껑도 없으며,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상자가 왕의 방이 있는 층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왕의 석관이라고 당시의 이집트 학자들은 말하고 있지만 이 관의 면에는 보통의 상투적인 본문이나 종교적인 해석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거기에는 단 한자의 단어나 상형문자도 보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다른 모든 관들은 그것의 용도를 나타내기 위해 글이 써져 있거나 기념할 만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만일 이것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이집트 왕의 무덤이 확실하다면 왜 여기에는 그것이 없는 것이냐는 것이다.

둘째, 이 관의 천장으로는 200피트 이상의 구멍이 나 있는데 이는 외부의 공기를 접촉하려는 공기 통로로 보인다. 이러한 공기 통로를 가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미라에게는 신선한 공기가 필요하지 않고 반면에 노동자들도 그것에 뚜껑을 덮고 나면 다시 그곳에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는 데도 말이다. 이것은 왕족의 묘로 만들어진 이집트의 어떠한 건축물에서 이런 공기 구멍을 가지고 있는 방을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셋째, 다른 이집트인들은 실제적으로 매장을 위하여서는 지표면 보다 낮은 곳에 돌을 잘라내고 둥근 매장용 구덩이를 팠다. 이러한때에 이 관으로 추정되는 것은 왜 지표면으로부터 150피트나 올라온 공간 속에 있는 것일까? 사실상 즉은 자를 땅 밑이나 땅 바로 위에 두는 것이 과거에나 지금도 전 세계적인 관습이다.

넷째, 왕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 왜 대회랑 같은 넓은 공간이 그렇게 높은 곳에 지어졌을까?
그리고 거의 30피트의 높이로 만들어졌을까? 단지 4피트의 높이 위로 통하는 통로들만으로도 동일하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대 회랑 자체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노동력도 덜 들이고 그 일을 마칠 수 있었는데도,

다섯째, 왜 두 번째 방은 소위 여왕의 방으로 불리는 첫 번째 방에 그러허게 가까이 있는 것일까? 파라오[이집트 왕의 칭호]는 결코 자신의 곁에 여왕들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미라에게는 두 개의 무덤이 필요치 않다. 왕비의 방에는 이집트인 무덤으로서 대화하고 있는 벽 그림들과 묘비가 있다. 그것의 존재로 곁방을 FWJD당화하고 있는데 이것은 텅빈 것이고 왕의 방이라는 장식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왜 공기 구멍을 설치하였다가 그것이 발견되기 전에 막아버렸을까? 왜 이 피라미드를 건축했던 자들은 이 두 개의 무덤에 그 어려움을 겪으면서 환기구를 만들려고 했을까? 즉은 자는 숨쉬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데도 말이다. 이 환기구에서 다시 한 번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는데 1837년 대 피라미드를 탐사하던 하워드 비제(Howard Vyse)는 그의 조수에게 화약을 사용해서 환기구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라고 시켰다. 그러자 그 안에서 가로 1피트9약 30,48㎝), 세로가 4인치(약 10,16㎝) 두께 1/8인치(약 3.2㎜)인 철제판이 발견되었다.

이 철판은 환기구 구멍에 막혀 있는 문의 일부가 폭발로 떨어져 나온 것으로 판명되었다.
1881년 이 철판을 조사하던 플린더스 피트리 경은 철판 표면에 생긴 녹에 화석화된 원생 생물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똑같은 화석을 함유하고 잇는 석회암과 그 철판이 대 피라미드가 건설했을 당시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트리 경은 이미 이집트 구왕국 초기에 철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하는데 최소한 이집트 구왕국 6왕조 때부터라는 주장이다. 이 6왕조는 기원 전 2200년경으로 기원 전 1500년경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히타이트족보다 무려 700년이나 앞섰다는 것이 된다.
이 철판을 분석한 결과 그것은 채광되어 정련된 철이지 운석 등에서 얻은 것이 아님이 밝혀졌다. 1989년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자원학과 존소(M.P.Jones) 박사와 세이드 엘 게이(Sayed 띠 Gayer) 박사의 조사 결과 그 철판이 주석을 매우 적게 함유했기 때문에 운석에서 나온 철이 아니라고 판정했다. 이들의 실험결과 그 철판은 1,000℃ 이상에서 녹았다. 피트리의 놀 리가 맞다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선사시대부터 철을 사용했다는 것이 되는 셈이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1989년의 정밀 분석에서 철판의 한쪽 면에 금이 도금되어 잇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전기 도금과 아연 도금은 1800년 경 이탈리아의 볼타가 전지를 발명한 이후에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는 금을 수은에 녹여 아말감을 만들어 금속 표면에 입힌 다음 열을 가해 수은을 증발시켜 금만 남기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럴 경우 금박의 두께가 두껍고 균일하지도 않다. 독일인 아르네 에게브게트(Arne Eggebrecht)는 고대 이집트의 여러 조각상에 입혀진 금 도금의 두께가 얇고, 그 표면의 두께가 매우 고르다는 사실로부터 혹시 전기 도금법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다른 방법은 그런 형태의 도금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환기구에서 나온 철판의 금 도금도 전기 도금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그렇다면 렐레니즘시대(B.C. 약 300년경)에 바그다드 근처에서 사용되던 전지와 비슷한 종류가 그 시대로부터 무려 2,000년 전부터 사용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철과 전기를 사용했다면 현재 석재를 가공할 때 사용하는 전기를 이나 석재의 표면을 매끈하게 갈아내는 회전식 물갈기 공구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피라미드 내부에서 발견된 석관은 피트리 경에 의하면 이 석관의 외부체적이 2.332.8ι로서 정확히 외부 체적의 2배임을 확인하고는 고도의 정밀도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이 정도의 정밀도로 가공하는 데는 어떤 도구가 사용되었다는 것인가. 크리스토퍼 던(Christopher P.Duun)이라는 공구 제작자는 그의 <고대 이집트의 진보된 기계 가공술>이라는 논문에서 '왕의 방'에서 사용된 43개의 들보를 다듬은 기술을 검토하고 나서 "비록 고대 이집트 시대에 어떤 기구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화강암 들보에 나 있는 기계자국은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들은 아마도 직선톱과 둥근 톱, 드릴과 같은 오늘날 사용하고 잇는 장비와 유사한 것을 사용했음이 틀림없다."라고 주장했다. 시대적인 관점으로 보면 청동기 시대에 단단한 서거재를 가공할 수 있는 것이 가능했겠느냐 하는 점이며 더욱이 이 석관은 평평한 석재를 짜맞춘 것이 아니라 내부를 정교하게 파내어서 만들고 화강암 표면을 물을 뿌리면서 갈아내어 매끈하게 하는 현대의 기법처럼 윤기나게 만든 기술은 시대적인 관저머에서만의 섣부른 추정은 상당한 혼란을 야기한다. 조세르의 피라미드 양옆으로 5기 왕조의 첫 번째 왕인 우제르카프와 마지막 왕인 우나스 왕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이 피라미드들은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제3 왕조에서 제5 왕조까지의 세월은 불과 300년 정도인데 4왕조의 대 피라미드에서 보여주는 완벽한 건축기술이 갑자기 보잘 것 없는 수준으로 전락해벼렸다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역사란 연속성이 있기 마련인데 시대적이고 연대적인 분류에 땨르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너무나 많다. 4왕조의 피라미드와 5왕조의 피라미드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또다른 변화가 존재한 것임에 틀림없다. 즉, 4왕조 피라미드 축조기 술은 분명히 5왕조 피라미드와 다른 무언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에 가면 사카라 고분에서 출토된 돌 항아리가 많이 진열되어 있다. 그 당시 약 3만 점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의 돌항아리는 좌우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형태로 제작되어 있다. 단단한 암석을 대칭 상태로 둥글게 깎은 후에 그 속을 파내서 겨우 5㎜정도의 두께로 항아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뿐 더더 더구나 시대적인 연대로 추정하면 그것을 만든 시기는 구석기 시대인데 어떻게 그렇게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인가. 이미 1만 년 전의 사람들은 선반과 같은 기계를 이용해서 깎아 만들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영국 런던대학의 이집트학 교수였던 울터 에머리(Walter B.Emery)는 고대 이집트의 돌 항아리들이 고도의 정밀도로 다양한 형태를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 낼수 있는 기술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아직 우리는 이런 석기 그릇들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만족스런 설명을 할 수 없다. 그리고 비록 몇몇 과정에 대해 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다른 과정은 완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어떻게 밑이 얕은 그릇이나 접시 둘레에 손가락을 대고 돌려보았을 때 완벽한 원이 아니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최고의 정밀도를 달성한 것일까?

어떻게 수정으로 관상의 항아리를 만들면서 그 두께가 1㎜가 안되도록 깎아 만들 수 있을까? 비록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당시의 기술자들이 고정된 공구에 대해서 가공물을 회전하도록 하는 선반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많은 횟수를 반복하고 세심한 노력을 들여서 한다 하더라도 손으로 수가공에 의해 그 정도의 정밀도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피라미드의 표면은 현재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고 한다. 기자의 제2 피라미드 상부에 외장재가 일부 남아 있지만 최초에는 태양빛 아래에서는 빛을 발하고 그 광선을 반사하면 달에서도 그 빛을 볼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피라미드 한 개당 그 위에 매끄럽게 가공된 석회암 1만5천여 개로 구성된 외벽이 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부드럽고, 잘 닦여진 석회암으로 쌓여 네 면에 걸쳐 22에이커(약 89.029.6㎡)의 돌들은 주변의 수만 마일을 비출 수 있는 횃불처럼 그 아름다운 자태를 반사하는 거대한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 외장이 얼마나 정교했던지 돌과 돌 사이의 틈새는 면도 칼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외부의 피라미드 케이스 역할을 하는 돌들은 밀도가 높고 하얀 대리석과 같은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단단해지고 윤기가 나는 것이었다. 이런 돌들은 맞추었을 때 정확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오늘날 안경재료로도 사용 가능한 것들이다. 이런 돌들은 높이가 5피트(152.4㎝)이고 길이는 12피트(365.76㎝)이며 각각의 무게는 16∼20톤 정도이다. 각 35평방 피트(3.25㎡)의 면적에 대한 이음매는 알루미늄 호일 한 장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이 매끈한 표면에는 하얀 시멘트와 같은 막이 종이처럼 얇게 씌워졌다.

오늘날의 화학자들도 여전히 이 뛰어난 시멘트의 구성성분을 완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으며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이집트 연구가인 W.M. 플린더스 페트리 경은 이 케이스 역할을 하는 돌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이음매의 평균 두께는 14분의 1인치(약 1.8㎜)정도이다. 직선 방향이나 정방형에서 잘려진 것의 평균오차는 표면 길이 75인치(약 1.905㎜) 중에서 단지 100분의 1인치도 되지 않는다. 그가 누구였던지간에 석공이 그 정도의 오차 범위 내에서 그렇게 훌륭하게 작업했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16∼20톤에 달하는 돌을 옮겨서 그것을 꿰맞춘 일을 상상할 수 있다.
이것처럼 정확성을 가지고 오늘날 다시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과 더욱이 그 각 돌을 끼우는 것이 144,000번 이상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던 것이 지난 14세기초 카이로에 대지진이 일어나 모든 건물이 폐허로 변했지만 피라미드는 조금의 피해도 없었고, 시민들이 지진에 대한 재해 복구를 하기 위해 피라미드 외장재를 벗겨내어 쓰는 바람에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건물들이 모두 폐허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끄덕없이 버텨낸 것을 보면 이 대 피라미드에 적용된 고도의 건축공학적 기술을 엿볼수 있다.

19세기 영국의 고고학자 코로넬 하워드 비세는 이 알 수 없는 시멘트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시간의 흐름과 폭풍우에 노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 하나하나에서 일부 부서져 버렸는 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래의 배열대로 견고하게 붙은 채로 남아 있게 하는 것이 이 시멘트가 가지고 있는 불가사의다." C. 피아제 스미스 박사는 케이스가 되고 있는 돌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저렇게 모범적이 케이스 돌은 없었다. 저렇게 당당하고도 크고 불가사의한 것은 이집트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볼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건축공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불가사의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고 있다. 600만 톤이 넘는 초대형 건물을 건축하면서 어떤 특수한 방법으로 지반을 견고하게 처리했든지 아니면 이구조가 자체 하충을 충분히 흡수하는 어떤 기술이라도 있었던가에 대한 의문이 떠나지 않고 있다. 뛰어난 구조계산에 의한 구조적인 안정성과 하중을 견딜 수 있는 지반공사는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현존하는 세계의 대형 건설회사에게 이 대 피라미드의 규모의 건축물을 지어보라고 하면 가능하겠는가, 정밀한 지반조사와 구조계산에 의한 설계도를 자신있게 제시하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허용공차자 0.1% 이내의 정밀도로 시공할 수 있는 회사가 과연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반 침하에 대한 문제는 건축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도 이 대 피라미드는 현재까지 지반 침하 정도는 약 5㎜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에서 적용하는 대형 빌딩의 침하 기준인 100년간 15㎝와 비교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수치이다.
역사적 연대감에 상당한 혼돈을 가져오게 하는 또다른 것이 있다.
피라미드 옆에서 발견된 기원 전 26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체 길이 43m의 대양용 범선은 15∼20톤 무게의 석회암 뚜껑 아래 보관되어 있던 것으로 실제 항해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16세기 콜럼버스가 향해에서 사용했던 산타 마리아호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크기인데 이것은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기원 전 2600년경에 이미 콜럼버스가 사용했던 선박제조 기술을 능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1986년 스위스 취리히의 방사선 가속 장치를 이용해서 마크 레너 박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자 피라미드인 이 대 피라미드가 다른 어떤 피라미드보다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것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1,000년이나 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결과는 피라미드 건설에 사용된 모르타르를 탄소 동위 원소법으로 분석해서 얻은 자료인데 레너 박사는 다움과 같이 설명한다.

'피라미드 건설 시기는 기원 전 2809년부터 2869년까지로 나왔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그 건설 시기는 이집트학 학자들이 지목하는 쿠프 왕의 시기보다 훨씬 빠른 시기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자면 측정한 샘플에 따라 탄소 동위 원소법의 결과는 그 건설 시기가 기존 이집트 연대기에서 적게는 200년에서 1,200년까지 차이가 난다는 첨을 시사한다. 이것은 정말로 혁신적이다. 그래서 정통 이집트 학자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를 제기한다. 기자 피라미드는 그들이 믿고 있는 것보다 평균적으로 따져도 400년이나 더 오래된 것이다.'
피라미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현재 우리가 이용하는 피라미드 에너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이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만약 외계인이 만들었다면 그들이 언젠가는 찾아오게 될 지구에 대한 거대한 표적일 수도 있고, 인간이 발견하지 못한 막힌 공간 속에 공상과학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엄청난 과학 기자재들이 고스란히 그 외계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 미지의 축조물이 주는 의미는 아직도 상상만 무성할 뿐명쾌한 해답은 없다.
참고로 조선시대에 혹시 피라미드에 관한 내용이 있는지 찾아보았으나「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이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2008.04.01.

  •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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