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춘화 나이 고향 프로필 학력 남편 집안 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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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춘화 나이 고향 프로필 학력 남편 집안 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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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화평론가는 "1970년대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기부를 하기 시작해서 하춘화 씨 생활에 기부가 뱄다고 한다. 공연을 하면 공연 수익금을 정산하고 기부하는 순간 내 공연이 끝났다고 머리에 박혀 있다고 한다. 천만원 단위로 기부하다보니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00억 원 정도라고 한다"고 설명한바 있습니다.

하춘화는 1955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4녀 중 2녀로 출생하였습니다. 하춘화는 부산에서 유년기를 보내다가, 전라남도 광주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워낙잘 했으며 그 명성이 자자하여서 하춘화의 노래실력을 일찍이 알고 있던 아버지가 하춘화를 가요계에 입문시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춘화는 1961년 만 6세에 8개월 동안 서울 동아예술학원 가요과를 수료한 이후 데뷔곡 《효녀 심청 되오리다》(오종하 작사/형석기 작곡)가 수록된 레코드를 취입하게된 기회를 얻게 됩니다.
당시 그녀는 불과 만 6세의 나이로, 대한민국에서 최연소 데뷔로 당시 기준 세계 최연소 음반 출반 가수로 기롣되고 있습니다. 하춘화가 너무 어렸으므로 그녀의 아버지가 줄곧 따라다니면서 매니저 역할을 하였고 데뷔한지 5년 만인 1966년에 《아빠는 마도로스》가 처음으로 히트하개됩니다.


하춘화는 17세가 되던 1971년에 정규 1집 음반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데뷔해 정식 가수가 되었고, 1집 음반의 타이틀곡이였던 정통 트로트 《물새 한마리》(이용일 작사/ 고봉산 작곡) 가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합니다.

1972년 가수 겸 작곡가였던 고봉산과 신민요 《잘했군 잘했어》(원작: 이고범/ 개작: 반야월/ 작곡: 고봉산)를 듀엣으로 불러 TBC 동양방송에서 여자가수상을 4년 연속으로 수상하며 불과 18세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톱 가수로 성장했습니다. 그후 고향을 소재로 만든 아리랑의 맥을 이어나간 신민요 《영암 아리랑》(작사: 백암/ 작곡: 고봉산)도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당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배 가수였던 이미자, 패티 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성 가수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 후 학업에 열중하던 하춘화는 은퇴 선언 2년 만인 1981년에 가수로 복직하였습니다. 가수로 활동하면서도 학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가수로 복직한 뒤에는 슬픈 감정과 느린 템포의 곡 《우리 사랑 가슴으로》(작사: 이성만/ 작곡: 이범희)가 히트하였고 1983년에 자신의 무대의상 150벌을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어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이로인해 대중들로부터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성 가수였던 하춘화는 1985년에 남북 예술인 교환공연시 남측 여자가수 대표로 3박 4일간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하춘화 프로필
출생일 1955년 6월 28일 (64세)
출생지 전라남도 영암군

학력
서울수송초등학교
정화여자중학교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
경남대학교 병설 산업전문대학 가정학과 전문학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학과 학사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과 석사과정 졸업, 예술학과 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예술철학 전공 박사과정 졸업, 철학박사 졸업
고려대학교 자연자원대학원 최고정책과정 수료

경력사항
2012년 여의도클럽 방송인상 특별공로상
2011년 제2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2011년 보건복지부 장관상
2010년 대한민국 가수 왕중왕상
2003년 성인가요대상 특별상
2003년 사회복지부문 영암군민의 상
2001년 옥관문화훈장
2001년 제16회 골든디스크 공로상
1994년 제13회 가톨릭 가요대상 공로상
1978년 MBC 10대 가수상
1977년 MBC 10대 가수상
1976년 MBC 10대 가수상
1975년 MBC 10대 가수상
1974년 MBC 10대 가수상
1973년 MBC 10대 가수상
1972년 MBC 10대 가수상
1971년 MBC 10대 가수상
1971년 제 6회 핑크리본상 인기가수상
1966년 최우수 가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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