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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만주국

[ 滿洲國 ]

요약 1932~1945년 일본이 중국 둥베이[東北]지방에 세운 국가.
옛 만주국 국무원

옛 만주국 국무원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거한 뒤 1932년 3월 1일 '만주국' 성립을 선언하고, 청조(淸朝)의 폐제(廢帝:宣統帝) 푸이[溥儀]를 집정(執政)에 앉혔으며, 수도는 신경(新京:지금의 長春), 연호를 대동(大同)이라 하였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日滿議政書)에 조인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이어 독일·이탈리아·교황청·에스파냐·헝가리·폴란드 등의 일부 국가가 승인하였다. '만주국'은 러허작전[熱河作戰]으로 청더[承德]가 점령됨으로써 국토는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러허의 4성(省), 인구는 3000만 명에 이르렀고, 1934년 3월 제정(帝政)이 수립되면서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쳤다.

만주국 본문 이미지 1

만주국은 일본·조선·만주·몽골·중국의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표방하였으나, 실권은 관동군사령관이 장악하였고, 중국인의 국무총리 및 각부대신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또 경제면에서도 일본인의 만철(滿鐵)이 전철도를 경영하고 닛산[日産] 콘체른이 진출하여 개발사업을 독점하였다. 1945년 8월 소련의 참전으로 인해 관동군이 괴멸하자 곳곳에서 민중반란(民衆叛亂)이 일어나 푸이가 잡히고 '만주국'도 무너졌다.

한국에 미친 영향

친일 만주국의 등장은 식민치하의 조국을 등지고 만주, 즉 둥베이에 근거를 잡은 200만 명의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고, 만주에서의 한국독립운동에도 큰 타격을 주어 무장 독립군은 최후의 거점을 상실하게 되었다. 만주국 출범 직후 만주 곳곳에는 의적을 자처하는 일본의 낭인배들이 횡행하여, 반만(反滿)·항일의 기치를 들거나 배일(排日) 부락으로 지목되는 곳에는 반드시 그들이 나타나 방화·약탈·살육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친일 중국인으로 조직된 '대도회(大刀會)' 등 테러 단체는 일본 낭인배의 행패를 한국인의 소행이라 선전하면서 창·칼로 한국농민을 살상하였는데, 관동군은 이들 낭인배·테러단을 조종하였다.

한국독립군을 몰아내면서 테러단을 조종하여 벽지(僻地)의 한국농민을 살육하는 정책을 썼다. 초기에는 한국 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에서처럼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차차 근거지를 상실하여 국권피탈 후 20여 년 간 무장독립항쟁의 기지였던 만주를 버리고 중국본토로 그 근거지를 옮겨야만 하였다.

만주국 본문 이미지 2
쌍성보전투 사도하자전투 대전자령전투 동경성싸움 영릉가성전투 만주국 만주사변(만주전쟁) 조선혁명군 조선혁명군

관련이미지

위만황궁 입구

위만황궁 입구 중국 지린성 창춘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둥베이 지역에 세운 만주국의 수도가 있던 도시이다. 실권은 일본 관동군의 사령관이 장악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출처: doop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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