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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박정희 만주국 장교 시절, 친일행위
Pp 조회수 2,913 작성일2019.11.23
박정희가 일제시대떄 만주국 장교였잖아요? 혹시 거기서 뭐 친일해위나 아니면 만주국 성립에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나 기록이 있나요? 있다면 자세히 알려주세요. 제가 역사충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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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
태양신
개신교 37위, 세계사 32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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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없고

독립군과의 전투는 열성적으로 했다고 함.

2019.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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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전투했다는 기록은 전무하고,토벌 드립은 한 문명자라는 사람의 발언입니다.

문명자라는 사람은 한국 전쟁을 맞아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본 메이지 대학 상학과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했습니다.

조차 와세다 대학 대학원에 재학하고 1956년 대한민국 최대 여성지 <여원>의 도쿄 지국장으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같이 군복무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기자에요 그것도 일본에서 쭉 있던 기자.

저 발언의 신뢰성이 얼마나 갑니까?

부관이 된 이후 박정희와 같이 복무하게 된 신현준, 방원철 등은 “박정희는 단장 부관으로 직접 전투보다는 놀고 술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알아서 판단하시길. 물증은 하나도 없습니다.

박정희가 복무하던 시절 독립군이 만주에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국민공통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에는 1940년 이후 한국의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근거지를 중국 대륙에 위치한 충칭(重慶)으로 옮겼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1930년대 이후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공작인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최소 500여 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숙청되거나 학살당하였고 만주 지역 내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중국 공산당이 이를 방관함으로써 민생단 사건 이후 만주 지역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은 위축되었고 조선인과 중국 공산당 간의 연대도 약화했습니다.

박정희가 때려잡은 걸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공산당의 만행이나, 소련군의 만주공세는 무시하더군요.

오마이뉴스의 취재에서 보면 박정희와 같이 만주국군 제8단에서 복무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인 동기생 고경인에 따르면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며, 초임 소위 시절 토벌에 나갔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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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과 귀국 (1945~1946)

박정희는 만주 보병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북경의 김학규 (대한민국 임시정부입니다)

가 지휘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

빈털터리 상태로 돌아온 그를 고향의 가족도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고 한다. 셋째 형 박상희(朴相熙)는 “그냥 선생질이나 하면 좋았을 걸 괜히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박정희는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는데 만주국군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광복군에 바로 입대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광복군이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에게 선전했던 투쟁지침과 관련짓는 주장도 있다.

비밀리에 일본군 내 조선인 장교들에게 살포된 이 선전문을 보면 일본군에 위장 침투한 한국인에게 고하는 것으로서 본문에는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하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는 토벌 주장과 마찬가지로 증언에만 의존한 주장이다 1945년 8월 이전에 박정희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물질적인 증거는 없다.

광복 직후(1946~1950)

1946년 5월 8일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그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박정희와 2기생도들은 1946년 12월 14일에 졸업하였다. 교육 중 동기 군번 69명이 탈락하고 194명이 졸업하였고, 군번은 성적순 으로 받았다. 1등은 신재식 (육군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역임)이었고, 박정희는 3등이었다.

(실력으로 다시 장교 된겁니다, 친일파라서 그냥 된게 아니고요)

직업적 친일파로 규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냥 군인 하고 싶어서 친일한 사람으로 보는게 더 맞습니다.

이는 일제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요...당시 일본군에 입대하고 싶어서 지원한 조선인의 수가 수십만명입니다.

애당초 1새대 과학자, 의사 모두 친일파입니다.

박춘금의 사례가 있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B6%98%EA%B8%88

20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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