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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만주국와 난징국민 정부가 공존했던 이유는 뭐죠?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4,183 작성일2008.01.25

만주국 (1932년 - 1945년) : 일본 관동군이 주체가 되어 건국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잡았다고 한다. 이들을 2키 3스케라고 불렀는데, 특히 도조 히데키는 후에 총리가 되어 일본을 전쟁으로 몰고 갔다고 한다.

 

난징 국민 정부 (1940년 - 1945년) 왕징웨이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난징에서 설립한 국민당 정부이다.

 

[위키 백과에서 인용] http://ko.wikipedia.org/wiki/%EA%B4%B4%EB%A2%B0_%EC%A0%95%EA%B6%8C

 

 

안녕하세요, 제가 장융의 대륙을 딸을 읽다가 일본이 중국에 세운 괴뢰정권이 두개라는걸 알게 되었어요.

그전에는 만주국 하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난징 국민정부도 있고, 장제스의 공화국도 있던 거죠.

 

게다가 난징국민정부- 왕징웨이의 친일 괴뢰국은 만주국에 적대적이었다고하는데,

일본은 왜 만주국이 있는 상태에서도 난징 국민정부를 성립을 허용했을까요?

(괴뢰국가의 세력을 나누어 일본이 얻는 실질적 이익이 있나요?)

 

같은 괴뢰 국가끼의 사이를 반목시켜 민족간의 단합을 막으려 한것 일까요?

아니면, 우연히 된 결과인지?

궁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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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
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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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 중국근대사를 거시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중국은 1911년까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지배하는 단일국가였습니다.

청나라는 1616년에 만주족이 세운 후금의 후예인데, 그들은 고대엔 말갈족, 중세엔 여진족,

근대엔 만주족이라 불리웠습니다.

 

고대의 말갈족은 한민족이 세운 부여나 고구려, 발해에 의해 다스려진 피지배계급으로 남아있거나

산개한 북방민족으로 살아오다가 발해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

금(金)이라는 민족국가를 세우고 고려와 송나라를 압박해 들어가, 나중엔 중국의 화북지방을 재패했고,

이후 새로 일어난 몽고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중세엔 북방의 패자로 군림했던 적도 있습니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한족 농민 출신인 주원장에 의해 쫓겨나고 명나라가 건국된 이후,

여진족은 다시 누르하치에 의해 전 부족이 통일되고 후금을 세웠는데, 이 후금이 다시 중국의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대륙을 장악하여 청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청나라는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유명했던 8기라는 군사조직이 있었는데,

19세기에는 만주족 자체가 한족으로 거의 융화가 되다시피 했고, 8기도 유명무실해져

아편전쟁이 일어날 무렵에는 서양의 외국군대에 대해서나, 남쪽에서 일어난 태평천국군에 대해서나

무력으로 그들을 다스릴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만주족이 세웠던 청은 멸망하게 되었고,

우리에게 마지막 중국의 황제로 알려진 선통제(부의)는 자금성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만주족의 부의를 돕는다는 명분 하에

그를 만주족의 황제로 세우고, 만주에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워 중국의 동북을 다스린 것입니다.

 

1937년 북경 인근의 노구교(마르코폴로 다리)에서 일본군과 중국 국민당 군대 간에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 유명한 중일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는 중국과 일본과의 전쟁이지만, 명목상으로는 만주국과 중화민국 간의 전쟁이었고,

당시 국민당을 이끌던 장제스는 신해혁명 이후 군벌이 다스리던 중국을 국민당 중심으로 통일하여

북벌을 완성하고 공산당을 때려 잡는데 혈안이던 시절이었기에,

일본과의 전쟁은 최대한 피하고, 공산당을 타도한 후 만주를 회복할 계획이었습니다.

본래 만주의 군벌이었던 장학량은 일본군이 일으킨 봉천역 폭발사고로 죽은 아버지 장작림 때문에,

장제스를 구금하는 시안사건을 일으켰고, 결국 장제스는 공산당과 합작해 일본과 전면전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강력한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 불리하였기 때문에,

국력을 총동원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적이었던 중국공산당의 홍군을 무너뜨린 이후에야

일본과의 전면전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만주사변을 만주의 봉천군벌과 만주국의 정변으로

받아들이려 하였고, 중일전쟁을 촉발시킨 노구교 사건 역시 동일한 정변으로 파악하려 했습니다.

이는 일본이 이 사건들을 모두 사변이라고 부르며 선전포고 없이 군사행동을 했던 것과 궤가 같습니다.

그래서 중국 국민의 여론은 국민당이 공산당과 일단 합작하여 항일전쟁을 해야 한다고 보았고,

시안사건 이후 억지로 전쟁에 나선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는 일본과 열심히 싸우지 않은 채, 계속해서

공산당을 탄압하는데에만 열중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일본군은 북경, 천진, 상해, 남경 등 중국 대륙 연안의 주요 대도시를 차례로 점령하였고,

중국 국민당 정부는 내륙으로 정부를 옮기며 항전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국민당 군대는 일본군을 만나면 최대한 후퇴하여 군사력을 보존하여 차후 일본이 물러나면

공산당을 없애기 위해 역량을 보존하려 하였고,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홍군은

일본군과 유격전을 펼치며 항일전쟁에서 성과를 얻으며 여론을 공산당에 유리하게 조성해 나갔습니다.

 

이처럼 중일전쟁은 명목상 중화민국과 일제가 괴뢰정부로 세운 만주국과의 군사적 충돌이었기 때문에,

난징(남경)을 내주고 철수한 국민당 정부의 남은 세력들은 2차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후

비시정부를 세워 프랑스의 남쪽을 다스렸던 것처럼,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의 동쪽 연안지역을 다스릴

괴뢰정부를 국민당 내부의 다른 정치세력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만주국이나 왕징웨이의 국민당 정부나

모두 일본제국의 괴뢰정부였던 것은 맞지만, 그곳을 점령할 때 내세운 명분 때문에, 행정적인 문제마저

일원화하여 처리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 질문은 바꿔서 질문하면,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는데,

왜 한국과 만주국을 병합하여 단일한 식민지로 통치하지 않았느냐는 질문도 가능한 것입니다.

만주는 중국 동북지역의 군벌이던 장작림의 세력권이었고, 일본은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내세워

장작림의 만주를 빼앗아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웠던 것이며,

중국을 공격하여 난징에 괴뢰정부를 수립했을 때는, 중국대륙을 통치할 별도의 정부가 필요하며

그들의 협력을 얻어야 했기에 이러한 통치기구를 만주국으로 대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군사적인 점령으로 식민지를 다스려야 할 경우에, 중국처럼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려면

일단은 나누어 통치하는 것이 유리하며 명목상의 괴뢰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식민지의 주민들의 끊임없는 반발을 겪게 되어 효율적인 통치가 어렵기 때문에,

한국처럼 총독부를 세워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닌, 식민지 주민의 여론에 가장 적합한 세력을

통치 주체로 내세우는 괴뢰정부를 수립하는 것입니다.

 

이상 답변이 되었을런지요. 더 의문나는 사항 있으시면 메일이나 쪽지 주세요 ^^

200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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