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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광주광역시
adel**** 조회수 3,346 작성일2016.03.14

광주광역시에 관한 유래담이나 이야기 알려주세요. 학교 국어 숙제가 옛날이야기 간추려서 설명하는 건데

흔하지 않은 옛날이야기도 좋고요 광주광역시에 관한 이야기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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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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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의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1.김방 할아버지와 개미떼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전 이조 4대 세종임금 때 김방이라는 분이 전라북도 김제군수로 있다가 광주목사로 전임해 오고 되었다. 일찍이 김방 할아버지는 김제군수로 있으면서, 김제의 벽골제라는 저수지를 중수하여, 김제평야를 문자 그대로 곡창지대로 만들어 놓은 공로자였다. 이 광주 고을은 높고 우람스런 무등산 물줄기를 타고 뻗어 내려온 평원지대 임에도 해마다 가뭄이 들어 흉년이 계속되었다. 이종시기가 되면 이 고장 백성들은 하늘을 우러러 비가 빌었으나 가뭄은 풀리지 않아 날이 가고 해가 거듭할수록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 무렵 광주에 부임해온 김방 할아버지 마음은 무겁고 답답하였다. 그러면서도 항상 이 불쌍한 백성들을 구해내는데 좋은 묘안이 없나 골돌히 생각한 끝에, 「옳지, 저 높고 푸른 무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모아 메마른 땅을 옥토로 만들어 놓아야지」하고 그때부터 이 큰「경양방죽」을 파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에도 몹시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의 가난과 굶주림은 날로 심해갔을 뿐이다. 그럴수록 김방 할아버지의 마음은 하루 속히 이「경양방죽」을 파는데 힘을 도와주실 것을 하나님 앞에 경건히 무릎을 끓고 기도를 열심히 계속하였다. 이 방죽을 파는데는 엄청난 경비와 많은 인력이 동원되지 않고서는 팔 수 없는 전남에서 제일 큰 저수지였기 때문이었다. 이 거창한 일을 계속하는 가운데 두 가지 큰 시련이 닥쳐왔다. 하나는 인력 부족이고 하나는 식량난이었다. 그중에도 식량문제는 무엇보다 골치가 아팠다. 가뭄에 시달리고 일에 시달린 백성들에게, 배부르게 해 줄 식량이라고는 거의 소비되어 바닥이 나다시피 되었다. 김방 할아버지는 날마다 마음에 고충이 심해가기만 했다.

 

그런데 하루는 일꾼들을 격려하면서 방죽을 파고 있었는데 개미굴이라고 할까 개미총이라호 할까, 몹시 큰 개미집을 건드리게 되었다. 무너진 그 개미굴에서는 수만마리의 개미떼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본 김방 할아버지는, 이를 측은히 여겨 즉시 일꾼을 지휘하여 이 개미집을 가까운 장원봉 기슭으로 곱게 옮겨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후 김방 할아버지가 날마다 정성껏 기도드리는 자기 집 뒷뜰에서 이상한 기적이 나타났다. 어디서 모여든 개미떼인지 김방 할아버지가 기도드리는 곳에 셀 수 없이 많은 개미떼가 모여들지 않겠는가? 그 다음날 아침 미명에 김방 할아버지가 그곳후정을 찾아갔을 때에는 새하얀 쌀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여전히 새로운 쌀이 또 쌓여 있었다. 김방 할아버지는 이 사실은 필연코 하나님께서 저의 뜻을 갸륵히 여기시어, 개미의 힘을 빌어 쌀을 모으게 하여 우리 백성들의 굶주림이 없도록 해주신 것이라 믿으며, 모인 쌀을 그곳에서 일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백성들은 모두 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 일을 더욱 열심히 해치우는데 온 힘을 다했던 것이다. 이렇게해서 김방 할아버지의 숙원이며 또한 광주지방 사람들의 염원이던「경양방죽」을 완공하게 되었다 한다.

 

김방 할아버지가 예상했던 대로 이 방죽에는 무등산 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마치 아름다운 호수처럼 잔잔한 물결을 이루고 석양에 비치는 풍치는 누구나 경탕하였다고 한다. 그후부터는 가뭄이 계속되어 기근이 들어도 광주평야는 기름진 옥토로 변하고, 해마다 풍년가의 노랫소리가 곳곳에서 들리어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윤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위대한 김방 할아버지의 업적은 길이 우리들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도시 확장사업으로 이「경양방죽」은 그 형태마저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제 김방 할아버지의 업적과 개미떼에 얽힌 전설만이 우리들의 귓전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2.경호대와 경호루

 

지금은 쓰레기와 흙으로 메워져 그 자취를 잃어버린「경양방죽」은, 옛날부터 왜정시까지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저수지였다. 광주시 계림동과 중흥동 사이에 자리잡은 이「경양방죽」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전 이조 세종임금 때 광주 출신 김방이라는 위대한 건설자의 머리와 손으로 오랜 시일과 많은 경비와 연 수십마의 인력을 동원·투입하여 이룩한 못이 바로 이「경양방죽」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는 농사가 유일한 생산 산업으로서,「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고 말하듯이,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을 잘 살게할 수 있는 민생의 기본이었기 때문에, 이 전천후 사업으로 경국제민의 큰 뜻을 이룩한 분이 김방이라는 인물이었다. 그 규모나 그 설계에 있어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며, 치밀한 계획과 실천으로 준공을 보았다고 한다. 크기가 4만6000평이 넘는 수면과 10미터 이상의 깊이로 된 이 방죽 밑바닥과 4키로의 수로를 시멘트가 없었던 옛날 백회와 황토로 한국식 콩크리트 공사를 시공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방수 장치까지 하였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다 같이 이 장한 일을 찬양하고 경탄해 마지않는 바이다.

 

이리하여 그 당시 광주고을 사람들은 김방 할아버지의 공덕을 찬양하고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지금의 상업고등학교 옆, 아담하게 솟아있던 동산 위에 경호루라는 다락을 지었다고 한다. 이 다락의 현판과 주련에는 방죽물의 맑음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와 공로를 기록한 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 경호루가 서있는 일대를 경호대라 일컬었다고 한다. 그러나, 1900년경 일본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유물을 모조리 일소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이 방죽도 경호대의 크고 작은 산을 헐어다 메워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얼마나 우리 조상들의 뜻을 짓밟아 버린 야만의 행위이겠는가?

 

그 당시 경호루가 서 있던 경호대 일대의 물은 그 밑바닥이 하얀 회로 포장되어 있어 더욱 맑게 비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방죽의 둘레에는 우람스런 노송들이 울창하여, 학과 두루미들이 날개를 펴며 깃을 접으며 물가에서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백구와 제비떼들이 이 맑은 물 위를 날아 다니는 광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기가 선경인가 의심하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바람 없는 조용한 날이면 그 잔잔한 수면은 마치 큰 거울이 놓여있는 차각을 일으켜 주었던 것이다. 거울이 희귀한 옛날이었기 때문에 이 맑고 깨끗한 물가를 찾아드는 여성들은 그 치렁치렁한 머리를 감고는 자기의 머리를 맑은 물 위에 거울처럼 비춰 보았다고 한다. 한편, 선비들은 다락에 모여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태평성대를 구가했다고 한다.

 

이렇듯 남녀노소가 이 방죽물을 들여다보면서 얼굴을 비춰 보고 마음을 비춰 보았던 거울같은 호수는 자자손손 그 아름다운 전설과 노래와 글이 전해졌건만, 임진왜란으로 그 못의 경호루는 소실되어 버리고, 또 제 2차대전을 앞두어 일본인들의 광분속에 경호대 언덕은 허물어져 버렸으나 어찌 우리들 마음속에 간직된 맑고 아름다운 경호대의 전설마저 사라질 수 있으랴!

 

3.비단깔린 현몽으로 인도받은 수구로

 

이조 세종시 광주 덕림마을에 김방이라는 성주가 있었다. 이분이 광주목사로 오기 전에는 김제군수로 지내면서 국리민복을 위하여 많은 치적을 남겼다. 그 하나의 예로서 허물어져가는 김제땅 벽골제를 확장 보수하여 김제 만경평야를 옥토로 만든 사실을 들 수 있다. 공은 문학에도 탁월한 소질을 가져 글을 잘하는 군수로, 총명한 성주로 그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문학이라고 하여도 실학에 가까운 온 겨레가 잘 살 수 있는 학문을 좋아했고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일하는 군수로서 칭송이 자자할 무렵 광주목사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방군수가 떠나올 때 김제고을 백성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수립리 밖에까지 나와 울면서 전송의 석별을 안타까와 했던 것이다.

 

광주에 부임한 김방 목사는 여장을 풀겨를도 없이 먼저 백성들의 소리를 듣기에 귀를 기울렸는데, 몇 개월동안 여론을 조사한 결과, 주민의 요청은 여출일구로「이번 오신 성주님이 김제군수로 계실 때 별골제를 늘리고 보수했다는데, 우리 광주땅에도 큰 방죽 하나 파 주었으면...」하는 뚜렷한 민성이었다. 측근관리들의 의견도 광주에 큰 저수지가 하나만 있다면, 가뭄에는 메마른 논에 물을 대는 수원으로 쓰고 큰 물이 지면 무등산에서 마구 쏟아져 내리는 급류가 꾸불꾸불한 수로를 흘러내리는 동안 완류로 바꾸어 방죽으로 이끌면 홍수의 피해도 막을 수 잇다는 것이었다. 소위 풍수학자연하는 사람들도 찾아와서「성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광주는 문자 그대로 불빛 곧 화가성한 까닭에 조해로 말미암은 흉년이 간삼년 찾아들어 농민을 울리는 실정입니다. 물이 적고보니 불이 왕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뿐만 아니라, 가끔 불이 나도 연쇄적인 화재의 불길을 끌 만한 큰 저수지가 없는 고을입니다. 성주님, 김제 벽골제에 못지 않는 큰 저수지 하나를 만들어 수화가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시는 것도 현명하신 시책의 하나가 아니겠습니가?」하고 오행설까지 내세워 저수지 방축을 간청하는 것이었다. 김방목사는 심사숙고한 끝에 드디어 뜻을 정하였다.「대왕의 중농정책을 받들어 내 필생의 사업으로 광주에도 벽골제에 못지 않은 큰 방죽 하나를 만들고 말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즉시 관계관을 불러 연구와 조사, 그리고 실지 답사를 거쳐 후보지를 선정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당시는 비교적 저습한 와지로서 농토에서 별 가치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경양리 아랫 들이 이 거창한 저수지의 후보지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가지 큰 문제점이 따른 것은 장원봉, 향로봉, 각화, 경양 일대의 물을 집결시키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으나. 무등산 골짜기 물을 어떻게 인수해 오느냐 하는 점은 큰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의 기술진을 총동원하여 날마다 구수회의를 하여 얻은 최종안은 현금 새 수원지인 석곡에서 작고개를 뚫어 경양까지 인수해 보자는 것이었다. 실학연구에 있어서 일가를 이룬 김옹은 그의 연구한 이론과 실지경험에 비추어 이 무리한 계획에 대하여 얼른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안으로서 무슨 묘계가 있는 것도 아닌 김옹의 고민은 날로 심각해지기만 했다. 그러나, 이미 착수한 저수지 공사는 날로 진척을 보아 백성들은 대중의 열원이 현실화한 기쁨에 이 사업을 결단한 김방옹에게 대한 찬사가 자자하였다. 그러나, 김옹의 마음에도 근심의 구름이 덮여 명랑할 수가 없었음은 인지상정이라고 할까?

 

때는 유월 유도절밤,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없으니 비록 서쪽으로 흐르는 광주 냇물에서나마 머리를 감고 액을 씻어버렸다고 믿는 아낙네들과 용신제를 지내고 금년에도 대풍일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귀가하는 농부들의 발길이 끊인지도 이미 오래되어 유두일의 자정, 김옹은 비몽사몽간에 공의 할아버지가 엄위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니「방아, 너의 수고가 많구나. 그러나 작고개를 어떻게 뚫는단 말이냐. 그런 무모한 헌책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지금 곧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그 물길을 가르쳐 주겠노라.」하며 앞서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김방이 뒤따라 간 곳은 양파정 및 부동방 세칭「조참보」라는 고아주에서는 제일 깊은 소의 소재지였다. 이곳은 무등산에서 내려치는 냇물이 양파정 모퉁이에서 다시한번 격하여 굽이치는 바람에 바닥이 패여 수십 길이 깊이로 소가 된 곳이다. 이곳까지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희귀한 비단이 조개보 위에서부터 깔려 있는데 할아버지는 이미 이비단 위를 아무 말없이 걸어가는 것이었다. 김방도 묵묵히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햇는데 시중을 이리 꾸불 저리 꾸불 통과하며 경양까지 다달았는데 홀연히 할아버지는 간 곳이 없었다. 김방이 깜짝 놀라 잠을 깨었는데 시간은 아직 샛별이 반짝이는 여명이었다. 김방목사는 즉시 차마를 준비하여 보좌관을 대동하고「조참보」로 달려가 보니 거기에는 새벽꿈 환상에 나타난 비단은 없고, 초여름 새벽인데 때아닌 서리가 하얀 비단같이 물길을 가리킨 듯 깔려있지 않은가. 김옹은 이 서리 길을 따라 경양까지 이르렀는데, 이 길이 바로 무등산 물을 인수해올 수로였다. 그리하여, 작고개를 뚫어 인수해 보려는 처음 계획을 변경하고,「조개보」(현 적십자병원 구기일대)에서 취수구를 시설하여 현 불로동, 황금동, 충장로, 대인동, 계림동을 통관하는 작은 도랑을 만들어 경양방죽까지 관류하도록 새로운 인수로 공사가 순조롭게 진척되어 드디어 거울같은 경양호수를 보게된 것이다. 특히 오백년 뒤 우리가 경탄하여 마지않는 바는 장장십리의 수로 밑바닥과 넓은 경양지 바닥을 평균 다섯치의 한국식 콘크리트로 포장을 과학적인 방수장치로써 시공하였으니, 지금도 파보면 그 흔적이 뚜렷하다.

 

4.흑석리 옥승지이야기

 

흑석리는 본래 광산구 흑석면의 지역으로서 검은돌이 있으므로 검은돌 또는 흑석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이리, 하신리의 각 일부와 마야면의 금구리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흑석리라해서 하남면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본래 이 마을에는 광산 김씨들이 자자일촌해서 사는 김촌이었는데 옥씨 가운데 승지가 한분 나왔다. 옥승지, 그래서 마을 유래를 검은돌에 가서 옥이 박히면 빛을 본다. 그래서 붙여진 것이다. 그 뒤로 한일합방이 돼 가지고 이조가 망할 때까지 그 부락에서 옥씨가 성했다. 그 옥승지는 이조말엽 사람인데 이름이 구슬옥자 벼슬경자 연마할련자 옥 경련 이란 분이었다. 이 마을에는 마을 길 가운데 샘이 하나 있었다. 그 마을에 사는 김씨 하나가 저녁에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그 샘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옥승지가 그 날 과거를 보러 과거길을 떠나려고 할때 새벽밥을 먹고 일찍 가려고 들시암으로 세수를 하러 나갔다. 그런데 김씨가 꿈을 깬뒤에 샘에 가서 물을 묻히면 자기가 통과를 하든지 아니면 무엇이든 좋은 일이 있다고 하는 속전을 믿고는 그 샘을 쫓아 나갔다. 그러자 옥승지가 벌써 세수를 하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옥승지가 자기 꿈에는 아니고 김씨 꿈에 꾼 것을 자기가 따서 승지를 했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그 들시암도 경지정리로 없어지고 말았다.

 

5.흑석(검은돌)이야기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구름운(雲)자 볕양(陽)자 운암이라고 하는 사람이 경기도 흑석이라는 곳에서 와서 이곳에 터를 일궈 떠들썩하게 살았다. 또 그 삼촌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호는 남부라 했다. 그는 참 호제기상하고 굉장한 인물이라서 서울까지 이름이 상당히 많이 났었다. 그래서 나주 관장이 연락이 내려올때에는 그 남부라는 양반이 숙지를 청하기도 했고 고을로 또 들리기도 했다는 소문이 있다. 따라서 운양이라고 하는 사람과 그 삼촌이라는 사람이 경기도 흑석에서 왔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그렇게 따온 것이다. 그 당시부터 마을 이름이 흑석이었다.

 

6.풍영정애사

 

극락강변에 있는 풍영정은 산수의 경치를 고루 갖춘 이곳 들녘에서는 보기드문 크고 아름다운 정자이다. 이 정자에는 갖가지 전설도 많지만 그 중 강원도 소금장수 총각과 근동마을 장씨 문중 처녀와의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

 

조선조 말기에는 극락강에 바닷물이 밀려 작은 범선이 와 닿았다고 한다. 해마다 늦여름철에 멀리 강원도에서 소금배를 젓고 오는 한 총각이 가까운 마을에 사는 장처녀와 상사 (相思)의 뜨거운 사이가 되었다. 일년에 단 한번의 남의눈을 피해서 만나는 짧은 상봉일 「우리 죽어도 서로 헤어지지 말기로 해요」이것은 사랑의 여원을 다짐하는 두 남녀의 피맺힌 맹세였다. 하지만 양가집 규수와 뜨내기 소금장수와의 결합이 가당할 리가 없었다. 무슨 연고인지 3년동안 소금장수 총각의 종적이 뚝 끊어졌다. 장처녀는 부모님의 영을 어기지

 

못하고 출가 를 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강원도 소금장수 총각이 4년만에 소금배를 젓고 이곳을 찾아왔다. 재회의 부푼 희망을 안고.... 그러나 남의 아내가 된 사람이 어찌 외간남자를 만날 수 있겠는가. 기다리다 지친 총각은 미망의 쓰린 한원(恨怨)을 품은 채 돌아갔다.

 

장여인은 밤마다 지금 풍영정이 있는 높은 언덕에 서서 극락강 맑은 물속에 떠오르는 연인의 모슴을 그리면서 한숨과 눈물로 나날을 보내다가 이내 이승을 떴는데 그녀가 서 있던 그 자리에 한그루 괴목이 북쪽(강원도쪽)을 향해 자라 강물을 덮었다고 한다.

201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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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광주광역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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