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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나치 미술의 모든것!
ssk8**** 조회수 3,627 작성일2009.03.18

나치 미술이 무엇인지

나치미술 작품에는 뭐뭐가 있는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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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미술 [Nazi Art]

1930 - 1940년대 독일 나치스가 예술가들을 나치즘에 봉사시키기위해 부흥시킨 미술 운동.

 

제 2차 세계대전 즈음 독일의 독재자인 히틀러의 파시즘을 대변한 예술이다.

히틀러는 '확고한 시대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라고 단언하고, 자신의 사상을 지지하는 예술을 찬양하였다. 1935년 나치 선전 단체장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는 미술가들에게 인종차별주의에 바탕을 두고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찬양하는 작품을 제작할것을 강요했다.

이러한 작품들의 기법은 조각과 건축에서는 주로 신고전주의 기법이 쓰였으며 회화에서는 농민, 노동자의 투쟁적 생활상을 강조하는 사회적 리얼리즘을 추구하였다. 내용은 승리, 애국심, 투쟁, 혁명 등의 기념비적 성격이 강한 것들이었다.

나치스는 특히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고 현대적이며 급진적인 표현주의와 추상미술은 '퇴폐와 타락'이라 규정하고 작품을 압수, 소각하는 등 탄압하였다. 1937년 표현주의와 추상주의 미술 작품을 모아 '퇴폐미술전'을 개최했는데 이것은 현대 미술을 한꺼번에 매도하는 행위였다. 심지어는 에밀 놀데(Emil Nolde)와 같은 작가는 나치스에 동조했음에도 표현주의 미술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제작을 금지당하였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열린 '나치 아트'전은 나치스 지도자들의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독일 군의 영웅주의, 땅과 소작인, 아리안 남녀의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나체를 찬양하고, 기념비적 건축물과 초상화들을 전시했다. 이것들은 오로지 히틀러의 권력과 권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한 작품들이었다.

독일이 패전한 후 대부분 폐기되었던 나치미술 작품은 1970년대 제 3 독일 제국 예술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나면서 논쟁이되었다. 이 논쟁은 나치미술을 문화적 유산으로 간주하려는 사람들과 부끄러운 과거로 보려는 이들로 나뉘었다. 문화적 유산으로 보려는 이들 가운데는 나치 훈장 수집가들이 있고, 나치 미술을 일반 예술사 속에 정착시키려는 이들도 있었다.

한편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은 1974-75년 독일을 순회하며 '제 3 독일제국의 예술-억압의 기록들'이라는 전시회를 개최하며 파시즘의 실상과 나치미술의 비예술성을 폭로하였다.

이 전시회에 이어, 구스타프 메츠거(Gustav Metzger)는 1976년 런던에서 나치예술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의 <The Guard>, 아돌프 비셀(Adolph Wissel)의 <Farm Family from Kahlenberg>, 후베르트 란징거<Hubert Lanzinger)의 <The Flag Bearer>, 카를 알비커(Karl Albiker)의 <Relay Runner> 등의 작품이 있다.

 

나치 예술가로는 알베르트 스피어(Albert Speer), 루드비히 트로스트(Rudwing Troost), 이보 살리거(Ivo Saliger), 파울 파두아(Paul M. Padua), 요하네스 슐츠(Johannes Schult), 베르너 파이너(Werner Peiner), 아돌프 치글러(Adolf Ziegler)등이다.

 

 

* 두산백과사전 발췌.

 

 

 

 


 

 

제 3 제국 선전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는 통치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적 감정의 호소에 있었다. 1933년 5월 12일 공포된 '농업소유의 새 질서'를 통해 히틀러와 괴벨스는 '혈연과 땅(Bult und Boden)'의 단일성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민족 공동체라는 새로운 국가목표에 대한 법적규약을 마련하였다.

히틀러는 '게르만 종족을 보존하고, 증식시키기위해서는 토지가 필요한데 토지는 단지 영웅적 덕성을 보여주는 강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주장하면서 '국경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에 의해 바뀌는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고향과 고국이라는 개념을, 정서적인 핵심으로 부각하기위해 어머니와 가족의 개념이 전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괴벨스는 1933년 '어머니의 날'에 '독일의 어머니는 민족의 사상을 전달하는 유일자이다. 어머니의 사상은 독일인이 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하고 전근대적인 회귀 의식을 포함하고 있던 나치 이데올로기는 괴벨스의 선전물(포스터, 화보, 선전영화, 엽서등)뿐 아니라, 동시대의 조각, 회화, 건축등의 예술활동의 결과를 통해서도 나타났다.

나치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들 속에 나치 이데올로기를 투영시켜야하는 임무를 너무나도 충실하고 훌륭히 해내었다.

'전근대적 회귀의식'속에는 그리스, 로마 고전주의 및 중세적 요소가 포함되어있다. 즉 아리안인의 인체에 대한 아름다움, 게르만적 위대함, 땅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농촌, 자연과 가족, 소시민과 노동자, 전쟁 발발 후 강인한 병사의 모습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데이비드 웰시는 <독일 제 3제국의 선전정책>을 통해 '전근대적 회귀 의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민족과 고향'이라는 개념은 이 '피와 땅'의 원리에서 직접 도출된 것으로서, 이는 '우월민족'이 갖는 힘의 원천을 농민의 미덕과 북방인의 과거, 영웅전사, 그리고 독일 땅의 신성함으로 규정하고자했다.

나치혁명은 신비로운 과거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현재의 혼란을 극복하려는 유일한 희망을 제공하는 오랜 전통들을 다시 부여잡으려 했다. 그러므로 나치에 의해 고무된 민족주의 유형이란 게르만 겨레의 과거에서 기안한 도덕성을 다시 부여잡으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이러한 도덕성에다 당의 서열제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그 형태와 내용을 부여하는 것이 나치문화의 의도였다.

 

제 3 제국의 예술가들은 (중략) ... 첫째, 선전은 그림과 조각 분야에서 등장한 퇴폐 경향으로서 표현주의로부터 큐비즘까지를 공격했다. 둘째, 그러한 문화는 우월민족인 게르만적 유토피아 공동체의 건전한 본성을 표현하도록 되어있던 공식적인 나치 예술로 대체 되었다. 나치 작가들은 당시대의 가장 순수한 인종이 아리안종이며 그 종의 내적 자질인 본질적으로 외모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것은 한 인종이론가가 "황금발, 큰 키와 긴 두개골, 갸름한 얼굴, 우뚝 솟은 턱, 높고 뾰족한 코, 부드러운 직모의 머리카락, 큼직하고 연한 색깔의 눈, 하얀 연분홍 피부로 묘사한 황금색 북방인의 전형적 모습을 이상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당연히 묘사할 수 있는 주제의 범위를 제한하였다.

 

이렇게 해서 주로 다루어진 것은 약간 이상화된 형태로서 전원적 배경에 피와 땅의 원리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농민의 미덕이었다. 여기에다 강철 헬멧을 쓰고 주먹을 불끈 쥔 스바스티가 깃발을 든 길쭉한 턱의 돌격대가 동반되기도 하고, 혹은 북방인종 유형의 생생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나체의 인간형상 실험이 동반되기도 하였다. 초상화와 누드 연구의 경우, 게르만의 육체를 묘사할때야 비로소 독일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치 미술에서 크게 권장되었던 조각은 대 독일미술전에서도 거의 200점이 등장하는 가운데 전시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였다. 나치 체제에서 영광을 누렸던 토락과 브레커의 조각상들이 보여주듯이, 대부분의 나치 조각가들은 고전주의 성향 속에 거의 고정된 자세로 서있는 건강하고 힘센 남성 누드 조각을 거대한 규모로 제작했으며, 이는 순수한 독일 혈통인 아리안 종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나치의 미술정책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나치 조각가들은 인체의 볼륨을 강조하는 표피적인 감각의 세계에 매달렸다.

 

나치는 집단적인 대중교육의 효과를 위해 공공 건물 앞에 서있는 거대한 규모의 조각상을 장려했으며, 서양 미술의 절정기는 항상 고대를 모범으로 삼았고 빈켈만 역시 그리스 조각을 최상의 미술로 간주했다는 명분 아래 고전주의 조각을 우선적으로 선호하였다.

 

 


 

 

순수한 혈통, 즉 생물학적으로 우수하게 진화된 인간상의 표현이 중요한 목적을 이룬다.

나치의 남녀인물화는 신체의 볼륨과 매끄러운 피부를 강조한 건강한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나치가 추구하고자했던 새로운 독일 미술은 사실상 별다른 특성 없이 모더니즘 미술이 극복하고자했던 19세기의 전통으로 돌아가 아카데미의 고전주의와 자연모방에 충실한 사실주의에 머물렀다.

특히 프란츠 클라인(Franz Klein)이 설계한 대 독일 미술전 포스터에는 나치의 갈고리 십자와 독수리, 불타는 횃불과 함께 투구로 무장된 아테네가 나치 미술의 수호여신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나치 미술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 http://blog.naver.com/enigma1942?Redirect=Log&logNo=40058585865 자료출처

나치미술... "게르만의 인체미, 위대함, 땅의 신성함을 표현하다!!" / 제 3제국의 역사

 

 

200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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