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진주시 대곡면 월아리 지명에서 牙의 의미
비공개 조회수 4,486 작성일2013.08.05
제목 그대로입니다.

월아리란 이름이
달처럼 생겼다 해서
이름 지어졌다는데
월아에서 '아'자가
牙(어금니 아)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로
붙은 겁니까.
무슨 유래가 있는걸까요.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1 개 답변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우엉조림은 아람농산
절대신
연애, 결혼 1위, 사람과 그룹 5위, 창원시 1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월아리 지도를 보니 약간 길쭘한게 초승달과 모양이 비슷해서

그런 유래가 있을수도 있어요.

월아: 초승달

 

내고장유래연혁

 

월아(月牙) : 조선조 전기 때는 진주목 북면 사죽리 월가동(月家洞)이었다. 구한말 때까지는 사죽면 월아동(月牙洞)이었다가 1914년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으로 던날, 달갈, 외또리, 바람이, 감나무골, 뻣정지(보정지)를 병합하여 월아리(月牙里)라 하여 대곡면에 편입되었다. 북쪽은 단목리, 동쪽은 금산면, 남쪽은 집현면, 서쪽은 미천면을 접하고 있다. 총가구는 92호이고 인구는 432명(남 213, 여 219)이다.
던날 : 월아 중심지에 있는 땀이다.
회관 : 월아리 회관이다.
창고 : 월아마을 창고이다.
창고 : 대곡농협 창고이다.
달갈 : 알마을, 안마을, 던날 북쪽에 있는 지역이다. 산지세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태라 하여 지어진 명칭이다.
애또리 : 외또리, 던날 북쪽에 있는 땀이다.
민두지 : 애또리 옆에 있는 땀이다. 옛날 민씨가 살았다. 민씨가 벼슬을 하여 하직대 (下直 旗台)를 세웠다고 한다.
솔밭 : 월아 북쪽 솔밭 밑에 있는 지역이다.
바람 : 풍암(風岩) 마을 입구 지역이다.
감나무골 : 던날 서쪽에 있는 지역이다. 옛날 감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뺏정지 : 던날 서쪽에 있는 지역이다.
뻣정지보 : 뻣정지 계천에 있는 보(洑)이다. 1968년 경지정리 사업으로 없어졌다.
보정지보 : 뻣정지보이다.
못골(池內) : 지곡 던날 뒤쪽 골짝기이다.
낙석걸 : 낙석골, 월아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개밧골 : 월아 서북쪽에 있는 산이다.
남전짓골 : 남생원뒷골(南生員뒷골) 월아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금사골(金梭谷) : 금샛골, 월아 서북쪽 집현면 경계선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모래같이 금이 나왔다고 한다.
구실못 : 월아 남쪽에 있는 늪(沼)이다.
구시못 : 구실못, 소구시 같이 생긴 못이라 한다. 경지정리로 지금은 없어졌다.
머니미 : 월아 남쪽에 있는 들이다.
몰가대 : 월아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말가대(馬加) : 몰가대라고도 한다.
창멀리 : 월아 남쪽에 있는 들이다.
들멀리 : 월아 남쪽 남강변에 있는 들이다.
앞들 : 월아 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너다리 : 던날 앞에서 남쪽 집현면 불티로 가는 도중에 있는 다리이다. 1968년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대곡농협 집하장과 분소 : 월아마을 입구 들녘에 시설원예 산지집하장이 92년도 개설되고 대곡농협 월아분소는 1993년 4월 21일 개장 산지공판장으로 활기를 찾고 있다.
월아교 : 1988년 가설, 폭 8.5m, 길이 33.2m로 이전 다리는 6.25때 대부분 파손되어 신설된 것이다.
향양제 : 월아마을 앞 제방을 말한다. 1968년에 면적 45.70㏊ 규모로 축조되었다.

 

 

조선조 전기까지는 진주목(晋州牧) 동면(東面) 대곡리(大谷里) . 오곡리(吳谷里), 그리고 북면(北面) 사죽리(沙竹里) . 설매곡리(雪梅谷里) . 월배곡리(月背谷里) . 잉옥리(芿玉里)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월배곡(月背谷) . 잉옥곡(芿玉谷) . 미곡리(迷谷里)는 설매곡리(雪梅谷里)에, 오곡리(吳谷里)는 대곡리(大谷里)에 합하여 대곡리(大谷里) . 설매곡리(雪梅谷里)라 하였다.

순조 32년(1832) 이래로는 대곡리(大谷里) . 설매곡리(雪梅谷里) 사죽리(沙竹里)라 하였고, 고종1년(1864) 이래로는 대곡면(大谷面) . 사죽면(沙竹面) . 설매곡면(雪梅谷面)이라 하였다.

1914는 3월 1일, 진주군(晋州郡) 대곡면(大谷面) . 사죽면(沙竹面) . 설매곡면(雪梅谷面) . 대여촌면(代如村面) 송곡동(松谷洞) . 미천면(美川面) 정성동(正星洞) . 호동(孤洞) 등을 통폐합하여 대곡면(大谷面)이라 하였다.

그리고 대곡면(大谷面) 마진동(麻津洞) . 대동(大同) 일부로서 마진리(麻津里)라 하고, 대곡면(大谷面) 대동(大同) 일부로서 대곡리(大谷里)라 하고, 대곡면(大谷面) 하촌동(下村洞) . 덕곡동(德谷洞) . 대여촌면(代如村面) 송곡동(松谷洞) 일부로서 덕곡리(德谷里)라 하고, 대곡면(大谷面) 중촌동(中村洞) . 가정동(佳亭洞) . 용동(龍洞) 각 일부로서 가정리(佳亭里)라 하고, 사죽면(沙竹面) 유곡동(楡谷洞) . 대포동(大浦洞) . 지석동(芝石洞) . 대여촌면(代如村面) 송곡동(松谷洞) . 미천면(美川面) 정성동(正星洞) 각 일부로서 유곡리(楡谷里)라 하고, 사죽면(沙竹面) 월아동(月牙洞) 일부로서 월아리(月牙里)라 하고, 사죽면(沙竹面) 월아동(月牙洞) . 단동(丹洞) . 미천면(美川面) 호동(孤洞) . 정성동(正星洞) 각 일부로서 단목리(丹牧里)라 하고, 설매곡면(雪梅谷面) 하감동(下甘洞) . 상감동(上甘洞) 각 일부로서 설매리(雪梅里)라 하고, 설매곡면(雪梅谷面) 창촌동(倉村洞) . 태곡동(態谷洞) . 가야동(可也洞) 일부로서 광석리(廣石里)라 하여 10리(里)로 개편되었다.

1983년 2월 11일에는 미천면(美川面) 월암리(月岩里)와 용암리(龍岩里)가 편입되었다.

1987년 1월 1일에는 와룡리(臥龍里) 일부를 금산면(琴山面) 가방리(加芳里)로 이속하고, 금산면(琴山面) 가방리(加芳里) 일부를 단목리(丹牧里)로 편입하였다.

그리하여 대곡면(大谷面)은 12리(里)를 소관하고 있다.

 

 

전설 및 설화

 

의적(義賊) 강목발(姜木達)

의적 강목발은 진양에 있어서는 홍길동(洪吉童)에 버금가는 인물로 꼽히고 있다.

강목발은 지금의 진양군 대곡면 대방산 줄기 가정(佳亭)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한 도승(道僧)이 찾아와 사립 밖에서 묻기를 “아이를 낳았느냐”고 물어 “아직 안 낳았다”고 하니 다시 와서 물었다.

도승은 세 번째로 다시 와서 또 물어 아직도 안 낳았다고 하자 이번에는 혀를 끌끌 차면서 사라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 강목발은 축(丑)시에 났다. 자(子)시에 태어날 사람이 축시에 났다는 것이다.

도승이 찾아온 것은 비범한 인물이 태어날 줄 알고 대인(大人)이 날 시를 물어보고, 다시 대적(大敵)이 날 시에 물어 왔는데, 그는 대적이 날 시에 태어났다고 한다.

또 그가 난 집터에서 보면 축(丑) 방향에 바위덤이 보이는데 이 또한 길조(吉兆)는 아니었다고 하며, 조금만 일찍 태어났어도 거룩하게 되었을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천부적으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살던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의 도독실이라는 마을에는 삼백석 지기의 부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와 잠을 자던 묵발이 몰래 집을 빠져 나가는 것이었다. 이를 눈치챈 아버지가 목발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그랬더니 도독실로 가더니만 부잣집 대문을 손가락으로 열고, 뒷 방으로 들어가 돈궤를 열어 제끼는데 역시 손가락으로 돈궤를 열었다.

크게 놀란 아버지는 아들의 목덜미를 잡아 집으로 끌고 왔다.

그런데 부잣집 주인이 잠에서 깨어보니 돈궤가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그 집의 ‘업’이 운 것이다. 옛날에는 집안을 지켜주는 ‘업’이 있다고 믿었으며, ‘업’은 큰 구렁이가 되기도 하고 두꺼비가 되기도 하였다.

놀란 주인은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정장을 하고 돈궤앞에서 비손을 했으나 ‘업’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업’은 바깥 바람을 쐬어야 하겠다면서 돈궤문을 열라는 것이었다. 주인이 어쩔 수 없이 문을 제껴주니 ‘업’은 가정숲으로 갔는데 그만 숲에서 ‘업’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중에사 보니 강목발의 집으로 들어 가더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는 낮동안은 평범한 사람과 같이 성장했으나 밤이면 부잣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 즉 부잣집에서 도둑을 맞았다 하면 없는 사람 집에 귀물이 쌓이는 것이었다.

그는 머리가 비상한데다 힘 또한 장사였고, 밤이면 높은 담장은 말할것도 없고 삼간집을 펄펄 뛰어넘는, 신출귀몰한 재주를 지녔었다.

어려서 삼촌(아버지가 없었다고도 함)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머리는 좋았으나 글공부를 게을리 하면서도 남의 눈을 속이는 일에는 탄복을 금치 못했다.

어느 날은 그의 숙부가 방바닥에 엽전을 던져놓고 내 모르게 가져보라며 시험해 보았다.

목발은 밖을 잠깐 나왔다가 들어오더니 “숙부님 가져 갑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없어졌다.

목발은 밖에서 발바닥에 보리밥알을 이기어 붙였던 것이다.

주윗 사람들로부터 목발이 남의 눈을 속인다 하기에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하고 의심했으나 그게 사실이었다.

숙부는 방바닥에 놓인 목침을 들고 그의 다리팍을 내리쳤다. 이때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다녔다고 하나 신빙성은 적다.

목발은 성장하여 진주를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 길목인 단목(丹牧)에 사는 하백립의 집을 종종 털었다 한다. 하백립은 그 당시 꽤 부자로 살았다. 목발이 덜미가 잡힐 일도 만무하거니와 하백립은 목발의 소행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한 두 번도 아니어서 하인들을 시켜 목발을 붙들어 오도록 했다. 목발은 순순히 잡혀와 심한 꾸중을 들은 뒤부터는 손을 씻겠다는 자백을 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던 하인들이 참지 못하고 당장 죽여버리겠다며 맷돌을 치켜들고는 목발에게 내리쳤다.

맷돌을 내리치는 순간, 목발은 어느 결에 건너편 밤나무에 올라서며 하는 말이 “강목발이 제 길로 갑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목발은 말티고개를 넘어 진주에서 살다시피 했다. 기생집을 드나든 그는 돈도 잘 썼으며 술도 말술인데다 노래와 춤도 일품이어서 당대로서는 큰 인기였다.

그런 그가 하루는 유흥비가 모자라 한 부잣집을 털어 말티고개를 넘어 가는데 어느 산모(産母)가 등성이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의협심이 강한 그는 그 날 밤에 털었던 돈과 귀물을 죄다 주어버렸다.

그런데 도둑맞은 부잣집의 소문이 파다할 즈음에, 무일푼의 여인이 돈을 잘 쓰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돌아 뒤를 캐보니 강목발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관아에서는 목발을 잡아다가 자백까지 받았으나 어려운 임산부를 도운 정상을 생가하며 오른쪽 다리를 끊고는 풀어 주었다.

이때부터 외발로 생활하는 목발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말티고개만 넘어서면 목발은 필요 없는 물건이 되버렸다. 그는 땅을 주름잡는 축지법(縮地法)을 익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도 진주 인근의 살만하다는 부잣집은 도둑을 맞았고, 대신 가난한 집에는 쌀이며 돈이 쌓였다.

이때부터 의적의 신화는 삼남일대에 번져 나갔다. 문제는 관아의 포졸들이 큰 골치거리였다. 관아에서 피해자들을 불러 조사해 볼라치면, 진술은 한결같이 ‘외다리’의 소행으로 일치되었다.

관아에서도 그 의적은 강목발이라는 심증이 갔으나 목발에 의지않는 ‘외다리’라는데 의문이 생겨 확증을 잡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저러나 강목발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목발을 짚은 채 절뚝거리며 관아에 붙들리는 신세가 되어 옥살이를 해야 했다.

붙들리기는 했지만 목발은 일언반구(一言半句)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태연히 부인했다.

이에 관아의 꾀많은 형리(刑吏)가 있어 목발에게 넌지시 말하기를, “번번이 붙잡고 붙들려 옥살이를 시키는 우리도 귀찮다. 그러니 진양성을 한 식경(10분 정도)에 세 바퀴만 돌면 모든 허물을 벗겨 주겠다”고 했다. 때에 목발은 일생의 실수인 줄 모르고 귀가 솔깃하여 그러마고 했다. 그리고 한 식경 안에 외다리로 진양성을 세 바퀴를 돌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는 형리의 함정에 빠졌고, 꼼짝없이 모든 허물을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삼남일대에 번진 의적은 강목발로 판명되었으며, 그는 구 법원 앞 객사(客舍) 뜰에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목발이 사형으로 집행되던 날 그 일대는 의적의 최후를 보려고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그 중에는 목발의 은혜를 입은 가난한 자들이 그의 명복을 빌고자 모인 사람도 많았다.

때가 되어 형리(刑吏)의 칼이 강목발의 목을 벴는데, 괴이하게도 목발의 목에서는 피만 흐를 뿐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놀란 것은 형리들이었고, 질겁을 한 형 집행관이 일어서 목발을 향해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목발은 대답하기를 “탐관오리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다 못 도우고는 참아 죽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행 집행관은 “관연! 천하에 다시 보기 드문 의적이로다.”라고 하니 불사신(不死身)처럼 버티던 의적 강목발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생전에 그는 말티고개를 넘어 다니며 사귄 의누이가 있었다. 의누이는 주막집을 하고 있었는데, 목발이 사형 당하던 날 밤에도 그 곳에 들러 술 한 단지를 마시고 가면서 하는 말이 “내가 진주목사를 죽이고 갈 것이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튿날 목발의 의누이가 들으니, 과연 목발의 말대로 목사가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강목발의 이야기는 전하는 이마다 서로 다를만큼 그에 관한 전설은 진양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개똥밥과 효부

 

옛날 어떤 사람이 시집을 갔는데 시집이라는게 말이 집이지 지옥이었다.

시어머니는 봉사고 남편은 앉은뱅이라. 집이라고 있는 건 비가 오면 방바닥이 흔건히 젖어 물난리를 겪는 게 예사고 먹을 건 좁쌀 한 톨도 없었다.

시집가는 날부터 남의 집 이를 해주고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데 여자 몸으로 벌어 봐야 시어머니와 남편 뒷바라지도 어려웠다. 하루는 남의 집 방아품을 가려는데 장대 같은비가 내려 이나마 어렵게 됐다. 하루라도 일을 안 나가면 세 식구가 굶어 죽을 판이라 비가와도 방아를 찧나 하고 길을 나섰다.

길을 가다 보니 방앗간 집 개가 변을 보는 데 채 삭지도 않은 보리쌀이 가득 섞여 있었다. 방앗간 집 개가 찧어 놓은 보리쌀을 실컷 먹고 길에다 변을 갈기는 모습을 보고 며느리는 절로 한숨을 쉬었다.

“사람은 양식이 없어 굶어 죽을 판인데 개는 무슨 복이 많아 저렇게 먹는가?”

그러다 그는 방앗간 가는 것을 그만두고 남들이 안보는 새 개똥을 긁어모아 빗물에 씻고 우물물을 떠다 또 씻었다. 그렇게 하고 보니 보리쌀이 바가지에 반쯤 찬다.

그길로 곧장 돌아와 보리밥을 지어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드렸다. 시어머니와 남편은 만날 죽만 먹다가 보리밥이나마 먹고 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이웃에서 모심기를 한다며 좀 도와 달란다. 어느새 하늘이 개고 별이 나자 서둘러 모를 심어야 하는 게 장마철 농사다. 막 모를 심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면서 천둥 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런데 모를 심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소리를 지른다.

“여기 누구 중에 죄지은 사람이 있다. 하늘이 노해서 저러니 죄지은 사람은 빨리 나서라.”

이때 며느리가 모춤을 던지면서 나섰다.

“죄를 지은 것은 나예요. 세상에 개똥 속에 섞인 보리쌀로 시어머니 밥지어 드린 년이 죄지었지 누가 죄를 지었겠어요?”

하면서 울상을 짓는다.

다른 사람이 말을 잇기도 전에 하늘이 쩍 갈라지면서 번개가 치면서 불칼 같은 벼락이 며느리 앞에 떨어지는데 모드 논에 넘어지고 자빠지며 혼이 나갔다.

벼락맞아 죽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며느리는 지은 죄가 있어서 차라리 죽겠다는 각오가 돼 있었던지 꼼짝도 안하고 그대로 서 있는데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 뜻밖에도 이상한 궤짝이 하나 놓여 있었다. 모내기를 하던 사람들이 겨우 제정신을 차리고 보니 궤짝이 하나 있는지라 논 주인이 먼저 나선다.

“이건 우리 거야. 우리 논에 떨어졌으니......”

하면서 궤짝을 열려고 했으나 꼼짝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차례대로 열려고 해 봤으나 아무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며느리가 손을 갖다대니 저절로 열렸다.

그 안을 보니 쌀이 가득했다. 모인 사람들은 며느리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내린 선물이라고 궤짝을 주었다. 며느리는 궤짝을 집에 모셔 놨는데 쌀을 퍼내면 그만큼 생기고 또 쓰고 나면 쓴 만큼 채워져 그 식량으로 불쌍한 시어머니와 남편을 극진히 모셨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삼년상을 마치자 며느리는 궤짝을 마당 가운데 놓고 촛불과 정화수를 준비해 기도를 했다.

사림도 어느 정도 윤택해진 마당에 계속해서 공것에 의지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다.

“내가 부모를 위청해서 하늘이 내려준 복이지 나를 위청해서 주신 복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거두어 가소서.”

그리고 나서 조금 있으니 하늘에서 무지개가 서더니 정화수에 닿아 궤짝을 달고 올라갔다.

그런 후 열심히 일하여 많은 후손을 두고 잘살았는데 나라에서 그 며느리에게 효부 정문을 내렸다.

 

엄마다리

대곡면(大谷面) 단목(丹牧)에는 ‘엄마다리’란 교량이 있었다.

새로운 다리가 생기면서 길고 납작한 돌다리는 개울 속의 모래에 묻히고 말았지만 그 이전에는 마을로 들어오는 중요한 통로였다.

옛날 단목의 옆 동네인 미천면(美川面) 반지마을에 아들 형제를 둔 과부가 살고 있었다. 그의 아들이 일찍 성혼하여 함께 사는데 어느 날부터 어머니가 밤이 되면 살짝 나갔다가 새벽이 되면 돌아왔다.

아들 며느리 몰래 하는 행동이라 한동안 눈치를 못 챘으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아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데 나갈 때는 모르겠는데 돌아올 때 보면 치마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매번 그런 사실을 안 아들은 하도 이상하여 한번 따라가 보기로 했다. 밤이 이슥하여 어머니가 문을 열고 나가자 아들도 몰래 어머니의 뒤를 밟았다.

개울에 이르자 추운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버선발로 걸어 개울을 건넌다. 아들도 먼발치에서 이를 보고 있다가 개울을 건넜다. 차가운 물이 온 몸을 얼어붙게 한다. ‘이런 물을 건너다니’라고 중얼거리며 개울을 건너고 들길을 가로질러 계속 어머니의 뒤를 밟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는 마을의 홀아비가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홀아비가 기다렸다는 듯 마당으로 내려와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며 방까지 안내하는 것을 보고 아들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남자는 후처(後妻)를 들여도 여자는 개가(改嫁)를 금지했던 시대에 어머니에 대한 불륜을 탓하는 게 아니다. 무심한 자식들이 어머니의 마을을 헤아리지 못한 죄, 추운 개울물을 그냥 건너는 불편을 해결해 주지 못한 게 죄 서러울 뿐이었다. 그렇다고 세상 눈이 있으니 공개적으로 관계를 인정해 줄 형편도 아니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은 형제들과 의논해 아무도 모르게 개울에 돌다리를 놓았는데 이는 어머니가 편하게 건너 다니라는 뜻이다. 나중에 이 사실이 알려져 이 다리를 ‘엄마다리’라고 했다.

 

부모입에서 효부난다

어느 집 며느리가 제법 드셌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시아버지를 우습게 알아 애초에 효부소리 듣기는 글렀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이웃 잔치에 가겠다고 의관을 좀 챙겨 달란다. 그러자 며느리는 쌍심지를 돋우며 대든다.

“쓸데없는 소리 마세요. 이 가을에 바빠서 똥오줌도 못 가리는데 놀러가 무슨 놈의 놀러 입니까. 안됩니다, 안돼요. 절대 못 가요.”

드센 며느리라 더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모처럼 잔치 음식을 먹고 싶었고, 오랜만에 또래의 친구들도 만나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방안으로 들어가 옷을 뒤져 입고는 그냥 도망가듯 내달렸다. 일을 하던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잡으려고 뒤쫓아갔다. 도망가는 시아버지와 잡으러 가는 며느리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다.

골목을 지나 밭을 가로질러 뛰는 두 사람은 어느새 잔칫집에 당도하자 시아버지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박신거리는데 차마 집안까지 뛰어 들어간 수 없어 담장 위로 머리를 내밀고 씨근덕거리는데 며느리를 떨친 시아버지는 잔칫상 앞에 앉자 말자 일하는 사람을 부른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음식을 시킨다.

“이 사람아, 음식 한 접시 더 갖고 오게. 힘에 겨워서 나 혼자 못 온다고 우리 며느리가 예까지 모셔다 주고 저 밖에서 기다리는데 우리 며느리도 좀 먹여야 되지 않겠나?”

그러자 심부름하는 사람이 상을 따로 차려 나와 며느리를 주는데 상을 받은 며느리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시아버지를 구박만 했는데 정작 시아버지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다니.

감격스럽고 죄 서러워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느리도 마음을 고쳐 먹고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옛말에 ‘부모 입에서 효자 난다’는 말이 생겼다.

 

아내 효부만든 효자

어느 마을에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홀로 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아들이 장가를 들었는데 그의 아내가 시아버지를 섬기는 게 영 신통찮았다. 사랑에 거쳐하는 시아버지한테는 꽁보리밥에 간장만 드리고 자기와 남편의 상에는 쌀밥에 고기반찬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남편이 아버지께 고기를 드렸느냐고 물으면 그랬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남편은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믿었는데 날이 갈수록 아버지의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알아보니 아내의 말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그렇다고 아내를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궁리를 하는데 아버지는 계속 수척해져 갔다.

제대로 먹지를 못했으니 기운도 없어 사랑방에 죽은 듯이 누워만 있었다. 그러다 하루는 아들은 짚신을 삼고 아내는 길쌈을 하며 한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편이 넌지시 묻는다.

“어느 누구는 자기 아버지를 팔아 집도 사고 논도 사고해서 부자가 됐다는구먼.”

“늙은이를 뭐 하러 산대요?”

아내의 대답에 남편은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잇는다.

“아버지 없는 자식이 자기 아버지 삼으려고 그런대.”

그러자 아내는 남편 가까이 다가앉으며 매달린다.

“살림도 어려운데 우리도 아버지를 팔아 논도 사고 밭도 사도록 합시다.”

그 말을 듣고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중얼거린다.

“누가 우리 아버지를 탐낼꼬. 야위고 몰골도 사나운데 힘도 없으니 사갈 사람이 있으려고......”

그러자 아내는 알았다는 둣이 다짐한다.

“알았소. 내 오늘부터 시아버지 잘 먹여 남이 탐낼 정도로 해 놓겠소.”

한마디로 시아버지를 팔기 위해 짐승 키우듯 살을 찌우겠다는 뜻이다.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는 듯 자기 일에만 열중했다.

다음 날부터 아내의 시아버지 대접이 완전히 달라졌다. 맛난 것은 물론이고 몸에 좋다는 것은 무조건 시아버지 차지였다. 곧 시아버지는 눈에 띄게 살이 오르고 힘도 솟았다. 힘이 있으니 방안에 누워있지 않고 마당을 쓸고 장작을 패거나 물을 길어오며 손자도 업어 주니 며느리의 일손이 한결 수월해졌다. 집안도 활기를 되찾아 일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아내를 조용히 불러 말한다.

“이제 아버지도 기력을 되찾았으니 누가 살 사람이 있는지 한번 알아 볼까?”

남편의 이 말에 아내는 질겁하면서 대답한다.

“무슨 소리요? 남이 아버지가 필요하면 우리도 필요한 법. 우리 아버님이 어때서 남에게 판단 말입니까? 안되오. 절대 안되오.”

남편의 지혜로 아내는 지극한 효부가 됐다고 한다.

 

글풀이 재판

어느 사람이 일흔이 넘어 아들을 하나 낳았다.

딸만 줄줄이 낳은 후에 대를 이을 아들을 봤으니 그로서는 여한을 푼 셈이다.

재산은 무척 많았던 탓으로 자칫 딸과 아들간에 재산 싸움이 생길 것이 틀림없었다. 아들을 낳은 지 얼마 안있어 영감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눈을 감기 전에 유서를 남겼는데 내용이 이러하다.

‘七十生男 非吾子 吾之財産 附之女? 外人勿關’

이렇게 유언장을 써 놓고 아들이 크면 보라고 일렀다.

어느덧 아들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아들과 딸.사위들이 모여 유언장을 뜯어 봤다. 사위 중에 똑똑한 사람이 있었던지 유언장을 해석하는데 재산 분배에 있어 아들 몫이 없고 모두 달에게 주란다

七十에 生男하니 非吾子라(칠십에 아들을 낳으니 내 자식이 아니다)

吾之財産을 附之女?하노니(내 재산을 여서한테 부치노니)

外人은 勿關하라(외인은 간섭말라)

틀림없이 재산은 딸의 몫이다. 아들이 생각하니 기가 막힌다. 늦둥이지만 아들임이 분명한데 아들이 아니라니 어처구니없어 말도 안나왔다.

딸과 사위들은 유언장을 해석한 대로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하고 아들은 속절없이 당해야 할 판인데 앉아만 있을 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관가에 소송을 했다. 사또는 유언장을 유심히 읽어 보더니 판결을 내린다.

“이 글은 그런 뜻이 아니니라. 해석을 잘못한 것이니 재산은 모두 아들에게 주라.”

사또의 해석은 이렇다.

七十에 生男인들 非吾子리오(칠십에 낳았던들 어찌 내 자식이 아니리오)

吾之財産을 附之하노니(내 재산을 부치노니)

女參는 外人이라(여서는 남이니)

勿關하라(간섭하지 말라)

똑같은 글이지만 해석하기에 따라서 정반대의 뜻이 되는 게 한자(漢字)다.

 

제 복에 사는 딸

어는 고을 원이 아들은 없고 딸만 여럿 낳아 딸들이 모두 컸다. 어느 날 딸들을 불러 놓고 물었다.

“너는 누구 복으로 사느냐?”

한 딸이 말했다.

“아버님 복으로 삽니다.”

흐뭇하게 생각해 다음 딸에게 물었다.

“네, 아버님 복으로 삽니다.”

다음 딸도, 그 다음 딸도 모두 자기 아버지의 복으로 산다고 대답한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딸에게 똑같이 물었는데 그의 대답은 다르다.

“제 복으로 삽니다.”

전혀 뜻밖의 대답에 다시 물었다.

“내 복이 아니고 네 복으로 산단 말이냐?”

“네. 분명히 저는 제 복으로 살지 아버님 복으로 살지 않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는 당장 딸을 집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그래도 달을 쫒아내는 어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아서 패물을 몸에 지녀 줘 당장 살기에 는 걱정이 없도록 해주었다. 집에서 쫓겨난 막내딸은 정처없이 길을 가다 깊은 산골의 숯 굽는데까지 가게 됐다. 마땅하게 갈 데가 없는 그는 숯 굽는 곳에서 밥도 짓고 빨래를 해주며 살아가다 그 곳의 숯굽는 사람과 정이 들어 혼례를 치르고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그녀는 열심히 일하는 남편을 위해 밥을 해다 나르고 같이 숯굽는 일을 거들기도 했는데 이것도 내 복이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밥을 광주리에 담아 이고 남편의 작업장에 갔다. 불을 때던 남편이 밥을 먹을 동안 아내가 숯가마에 불을 대신 때는데 아궁이로 쌓은 돌이 이상했다. 새까맣게 검정칠이 되어 있지만 그냥 돌과는 뭔가 달랐다. 부지깽이로 검정을 벗겨 보니 이건 돌이 아니다. 누런 황금덩어리다. 부지깽이로 이것 저것 검정을 벗겨 보니 모두가 금덩이다. 그는 그만 불 때는 일을 중단하고 남편더러 숯가마를 부수자고 한다.

“그게 무슨 소리요. 세상에 숯 구워 먹고 사는 놈에게 숯가마를 부수라니.”

“아무말 말고 그렇게 하세요. 다른 사람이 알면 안되니까 아무도 몰래 그렇게 하세요.”

남편은 자기의 아내가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이 일만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남편은 평생 숯굽는 일만 하다 보니 금덩이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인데 여러 날 동안 아내와 실랑이를 하다 결국 부수기로 했다.

그리고 돌이 아닌 금덩이를 씻어 방안에 가득히 보관해 놓고 남편더러 금덩이 몇 개를 지게에 지라고 한다. 남편은 영문도 모른 채 짊어지니 아랫마을의 김부자를 찾아가 보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과 더욱이 이런 게 집에 많이 있다는 소리는 입밖에도 내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어쨌든 남편은 금덩이를 지고 김부자 집을 찾아가니 깜짝 놀란 김부자는 입도 제대로 다물지 못한다.

“야 이사람아, 왜 그냥 서 있느냐. 어서 내려 놓고 올라오지 않고.”

호들갑을 떠는데 남편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아, 그걸 내게 주면 요 앞의 논을 주마.”

남편은 김부자의 이런 제안에도 대답이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어서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야 이사람아, 그럼 저 논하고 이 집을 주겠네.”

그래도 말이 없자 이번에는 더욱 안달이 나서 전답문서, 집문서, 종문서까지 다 내준다.

이렇게 해서 김부자는 금덩이만 갖고 다른 데로 이사가고 그 집은 숯굽던 무식쟁이가 들어 앉았다.

염천에도 불을 피우며 숯을 굽던 사람이 졸지에 고대광실에서 하인을 부리며 살게 됐으니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을 못할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 아니 이젠 마님 소리를 듣게 된 아내가 남편을 불렀다.

“영감, 이제 여기다 문을 하나 달아야겠는데 목수 한 사람 구해 오세요.”

아내 덕에 팔자를 고친 사람이 무슨 짓인들 못할까.

이 마을 저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수소문을 하니 목수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그러자 마님은 돈은 얼마든지 줄 터이니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시나나’ ‘시나나’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 달란다.

엉둥한 주문에 다른 목수들은 그냥 돌아가고 오직 한 사람만이 나서서 과연 그런 소리가 나는 문을 만들었다.

문을 열 때도 ‘시나나’ 닫을 때도 ‘시나나’하는 게 어찌 보면 신기하고 어찌 보면 소름이 끼치기도 하지만 마님이 좋아하니 어느 누구도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한편 마님의 친정은 집안이 망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자기를 쫓아 낸 아버지라도 자기의 핏줄이니 그립지 않을 수 없었고 부모와 형제의 안부가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람들은 문 여닫는 소리를 듣고 괴이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하루는 남루한 옷차림의 노인이 지나가다 문소리를 들었다.

‘허 거참, 희한한 소리를 내는 문이구먼.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그 소리가 꼭 내 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같으니.’

그러면서 가던 길을 멈추고 혼자 중얼거린다. 노인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하인이 마님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래 어떻게 생겼더냐?”

“키는 크고 눈 옆에 큰 사마귀가 있더이다. 그러나 행색을 보니 거렁뱅이였습니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마님은 다시 이른다.

“얼마나 배가 고프겠느냐. 사랑방으로 모셔 음식을 잘 차려 드려라. 그리고 영감마님 오시라 해서 의관 정제하고 기다리시라 해라.”

주섬주섬 몇 가지 일러 놓고 자신도 좋은 옷으로 갈아 입은 후 남편과 함께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아버님, 절 받으소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남편을 손짓해 큰절을 올리니 놀라는건 거렁뱅이 영감이다.

“아버님이라니...... 그리고 그 절은 또 웬일이오?”

하면서 따라 절을 하려는데 그때야 마님이 영감의 손을 잡으며 그 동안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제서야 그의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지난날의 사정을 얘기한다.

“네 말이 괘씸해 널 쫓아낸 후 집안이 망하더구나. 네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고 나니 세상살이가 하도 허망하고 네가 제일 보고 싶대. 그래 죽기 전에 네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이렇게 떠돌아다녔는데 이렇게 잘살고 있는 너를 보니 반갑고도 부끄러워 고개를 못들겠구나. 그래 네 말이 맞았어. 너는 네 복에 살고 나는 재 복에 사는 게 틀림없어.”

그렇게 해서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잘 살았다는데 그의 딸 이름이 ‘시난’이었고 딸은 그의 아버지가 이름 소리를 듣고 찾아올 것이란 생각에서 문소리가 그렇게 나도록 만든 것이었다.

 

베 팔아 산 이야기

 

 

어느 외톨이 집에 멍청한 부부가 살았는데 밤이 되면 외롭기 짝이 없었다.

하루는 아내가 베 한 필을 주면서 팔아 이야기를 사 오란다. 이야기라도 하면 외로움이 덜 할까 싶어서다.

주변머리없는 남편은 아내가 시킨 대로 베를 갖고 시장에서 팔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사야겠는데 어디가서 어떻게 사야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이리저리 싸다니는데 나무 그늘에 나이 많은 노인이 하릴없이 담배만 빨고 있었다.

“그래 나이가 많아야 이야기를 많이 갖고 있을 거야.”

그리고는 노인에게 다가가서 돈을 디밀면서 이야기를 팔라고 조른다. 노인은 이런 딱한 사람 봤나 하고 눈만 끔벅이는데 이야기를 팔라고 성화를 부리는 게 빚 받으러 온 빚쟁이 같았다. 노인도 아는 이야기가 없어 논 가운데를 보니 황새 한 마리가 논에 내려앉는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휑 날아든다.”

황새가 성큼성큼 걸어 다니자

“성큼성큼 걸어온다.”

황새가 목을 빼고 두리번두리번하니,

“둘레둘레 살핀다.”

다시 논고동을 입에 물고 휑 날아가자.

“물고 달린다.”

이렇게 말하자 그것도 이야기라고 잊지 않기 위해 외우며 집으로 돌아왔다. 밤이 되어 남편이 마주앉은 아내에게 이야기 사온 것을 알려 준다.

“휑 날아든다.”

그때 도둑이 담을 넘어 마당에 내려 서다가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설마 자기를 보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데,

“성큼성큼 걸어온다.”

그런다. 이게 무슨 소리냐. 누가 보고 있는가 싶어 고개를 빼 이리저리 살피니,

“둘레둘레 살핀다.”

들켰구나 싶어 부엌의 솥을 들고 막 나가려는데

“물고 달린다.”

아이쿠 내가 하는 짓을 모두 보고 있었구나 하고 도둑은 솥을 내동댕이치고 도망을 가버렸다.

부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그것도 이야기라고 밤새도록 그 말만 되풀이하더란다.

2013.08.06.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