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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묘

(대중가수) 고복수, 황금심

by 보현당 2016.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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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72년. 민족항일기부터 1950년대 말까지 활약한 대중가요 가수.  경상남도 울산 출생. 호적상으로는 1912년생이나 실제 생년은 1911년이다. 그의 아내 황금심()도 광복 전후 최고의 인기여가수 중의 하나였다. 1933∼1934년 콜럼비아레코드사 주최 조선일보사 후원의 전국남녀가수신인선발대회에서 3등으로 입상, 가요계에 등장하였다. 1934년 손목인() 작곡의 「타향」(후일 「타향살이」로 개칭)과 「사막의 한」을 불러 인기가수가 되었고, 1939년까지 오케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활약하면서「짝사랑」·「휘파람」·「이원애곡()」·「풍년송()」등을 불러, 인기의 절정에 달하였다. 1942년 이후 「풍년송」을 부부가 열창하였고,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도 활동하였다. 광복 후 전옥()이 주관하던 백조악극단()의 주요단원으로 활약하였다. 1950년 괴뢰군에 붙잡혀 의용군에 강제 입대되었고, 그해 늦가을 국군에게 구출되어 군예대에 편입, 활동하였다. 1957년 8월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가수생활 25년을 결산하는 은퇴공연을 가졌고, 1959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자리) 5층에 동화예술학원()을 개설,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학원을 경영하면서 이미자()·안정애() 등의 인기가수를 배출하였다. 1959년 극영화 「타향살이」를 제작하였으나 흥행에 실패하여 서적외판원 등으로 전전하며,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다가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복수[高福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22년 부산 동래(東萊)에서 태어나 13살 때인 1934외로운 가로등으로 가요계에 데뷔한 뒤, 1938년 빅터레코드사에서 알뜰한 당신을 발표하면서 대중가수로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후 1950년대까지 4,000여 곡을 발표하며 가요계의 여왕, 꾀꼬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8살 때 같은 레코드사 소속이었던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高福壽)와 결혼해 최초의 스타 커플로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으나 1958년 남편이 사업과 영화에 실패하면서 좌절을 겪기도 하였다. 1972년 고혈압으로 남편을 잃었고, 1996년부터 파킨슨병을 앓다가 2001730일 사망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말부터 일본·만주·사할린섬으로 위문공연을 다니며 나라 잃은 동포들의 애환을 달랬고, 일제 말기에는 남편과 함께 '고복수와 그 악단'을 결성해 공연 활동을 펼치는 한편, 6·25전쟁 동안에도 남편과 위문단을 만들어 공연을 다녔다. 1990년 원로 연예인들의 모임인 상록회 최고위원을 지냈고, 대중문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 받아 1992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대표적인 가요에는 울산아가씨》《삼다도 소식》《뽕따러 가세》《사람팔자 몰라요》《한양낭군》《장희빈》《양산도 맘보》《화류춘몽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금심 [黃琴心]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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