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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인간의 문제는 논술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나요?
kin_**** 조회수 11,730 작성일2009.10.22

지식활동 후원제도를 통해 <지식활동대>로 선발되신 gsygy님께 드리는 미션 질문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논술에서 어떻게 다루어지나요?

gsygy님,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정성스러운 답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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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인간 본성

 1. 인간 본성을 보는 관점의 변화

 2. 인간의 본성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가, 인의(仁義)를 따르는가?

 3. 인간의 본성을 고려한 사회 제도

 4. 인간의 어떤 본성이 사회를 발전시키는가?

인간형

삶의 태도

 1. 내 마음속의 도덕률

 2. 현실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3. 역사와 허구 속의 인간형들

 4. 삶의 태도와 현대 사회

 

                  

                

 Ⅰ인간 본성(人間本性)

 


1. 인간 본성(人間本性: Human Nature)을 보는 관점의 변화


  인간 본성에 관한 다음과 같은 논의를 인용하여 이 장(章)의 성격을 시사(示唆)하고자 한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단 하나의 정의란 없다. 인간을 천사보다 한 단계 낮은 초월적인 존재로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호모사피엔스란 진화의 과정을 거쳐 온 여러 동물 가운데 한 종(種)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을 신의 지배를 받는 특별한 피조물로 보려는 견해와, 목적없이 존재하는 유전자의 다발로 보는 견해 사이의 논란은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인간의 이성은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고서, 어느 때라도 스스로 발현하는 능력을 갖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성을 통해 신성의 불꽃을 보는 철학자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인간의 이성 능력은 회의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사회적이며 심리적인 온갖 종류의 무의식적인 힘이 진짜 주인이라는 견해가 대두하고 있다.
  한때 철학자들은 ‘나’는 영원불멸의 존재로, ‘나의 이성’은 어느 정도까지는 사물의 참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지난 세기에 이미 끝났거나, 아니면 나는 나의 참된 본성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존재로 생각되기에 이르렀다. ‘나’란 나의 유전자들, 내가 속한 사회, 나의 유아기 경험 등의 산물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요소들의 결합에 불과하다. 인간의 이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며, 이성이 파악하려는 진리는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적어도 니체 같은 사상가는 그러한 결론에 이르렀다.  
  인간 본성에 관한 사상들은 본질적으로 철학적이다. 그러한 사상들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들의 결과가 아니라, 합리적인 논증을 통해 도달한 일반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본성에 관한 사상들은 자주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지만, 개진된 이론들은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리고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적 논의들은 인간의 활동에 관심을 두는 여타 학문들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다른 학문적 관점에서 인간 본성에 관한 저작을 했던 사상가도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자로서, 다윈은 생물학자로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자로서, 그리고 프로이드는 심리학자로서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를 펼쳤다. 그렇지만 이들의 연구를 어떤 하나의 학문 분과에 속한 것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그들의 사상 또한 인간 존재의 뿌리를 파헤쳤으므로 철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저 트리그 <인간 본성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 11~17쪽 발췌

 

 

 

 

2. 인간 본성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가, 인의(仁義)를 따르는가?

 

  때로는, 이 세상의 만상(萬像) 가운데서 인간이 별스럽게 유난을 떨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 이라거나 ‘이성적 동물(zoon logon echon)’ 이라거나 하는 희랍적 사고에서 시작해서 인간은 제일의 존재자를 자임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최근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따라 이른바 ‘이성’ 과 ‘도덕’ 이라는 각질에 덮여 있던 인간이라는 ‘동물적인 존재’ 에 대한 되물음이 시도되고 있다. 예컨대 다음의 논제는 이러한 되물음을 논술에 반영하고 있는 사례이다.

 

◈< 문제>◈
분자생물학 등 현대 자연과학의 발달이 전통적 인간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 있다. 아래의 제시문 (가)와 (나)의 견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되, 글 (다)를 참조하여 논술하시오. <‘99 이화여대(자연계)/정시>

 -  제시문-
(가) 인간이 동물적인 존재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동물성에 더하여 이성(理性) 등 인간 고유의 능력이나 특성을 지니고 있어, 인간은 스스로를 동물 이상의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현대 분자생물학의 유전자 분석에 따르면, 인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여타의 동물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존재이다.
  분자생물학자들은 모든 생명체의 기초는 유전자라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생명체들의 모든 특징이나 기질은 물론, 인간의 행위 방식, 심지어 성품까지도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동물의 유전자를 분석해 보면, 길이 1mm밖에 안되는 미물인 선충(線蟲)과 인간간의 유전자적 동일성은 40%에 이른다. 인간과 오랑우탄 간의 유전자적 동일성은 96.4%나 된다. 나아가 인간과 침팬지간의 유전자적 동일성은 98.4%에 이르며, 양자 간의 차이는 겨우 1.6%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유전자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거의 침팬지와 같은 존재라는 말이다. 


(나)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살기를 원하지만, 삶보다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으므로 구차하게 삶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죽기를 싫어하지만, 죽음보다 심하게 싫어하는 것이 있으므로, 죽음을 가져오는 환난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 삶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없다면,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에게 죽음보다 싫어하는 것이 없다면,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삶을 위한 일이라도 의(義)가 아니면 하지 않는 일이 있고, 피할 수 있는 환난과 죽음이라도 의를 위해서라면 피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사람에게는 삶보다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고,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다. 군자(君子)만이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다만 군자는 그런 마음을 잃지 않을 뿐이다.
  인(仁)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義)는 사람의 길이다. 사람들이 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않으며.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 찾을 줄 모르니 딱하기 그지없다.
  사람이 닭과 개가 도망가면 찾을 줄 알되, 마음을 잃고서는 찾을 줄을 알지 못하니, 학문하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맹자(孟子)』
  (다) 알프스 영양(羚羊)들이 당신들을 잘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들이 사람들처럼 생각을 하거나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기능은 산악 지대에서 어떠한 공격을 만나도 몸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도록 특수화되어 있습니다. 어떤 동물종은 자연도태의 결과로 어떤 특정한 육체적 기능을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발달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동물종(動物種)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바로 이러한 특수화된 기능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외계의 조건이 심하게 변하면 이들은 변화된 환경에 순응하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유독 사람의 경우에만 이 특수화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신경계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말할 수 있게 하는데, 사람들은 이를 통해 동물보다 훨씬 큰 규모의 공간과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과거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기억할 수 있고,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측 할 수도 있습니다. 공간적으로 먼 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의미로는 동물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많고 환경에 잘 순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와 같은 융통성의 면에서 특수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고와 언어가 이렇게 우선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지능이 과도하게 발달함에 따라 개체적인 목적에 봉사하는 본능적인 동작 능력은 오히려 위축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동물보다 열등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동물처럼 예민한 후각을 갖지 못하고 있으며, 저 알프스 영양들처럼 마음대로 산을 뛰어 오르내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공간적, 시간적으로 광범위한 영역을 지배함으로써 이와 같은 결점을 보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언어의 발달은 아마 결정적인 제일보였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까닭은 언어와 사고의 능력은, 다른 모든 육체적인 능력과는 달리, 개체적인 개인들 안에서 발달한 능력이 아니라, 개체들로 구성된 사회 속에서 발달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웁니다. 따라서 언어란 인간들 사이에 펼쳐진 그물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자기의 인식과 행동의 가능성으로서 이 그물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제』 -

 

 

▣분석 & 해설▣
   (가) 제시문에는 인간이 유전자적 동일성의 측면에서 동물과 그리 다른 존재가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간이 이성(理性)을 가진, 동물 이상의 존재라고 자임해온 데 대하여 분자생물학은 인간의 행위방식이나 성품도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나)의 제시문에서 맹자는 인간이 본능적인 이기심에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인의(仁義)를 실천하는 도덕적․이성적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다. (다)제시문에는 영양(羚羊)과 인간의 사례를 들어, 진화론의 관점에서 동물과 인간이 자연에 적응해 온 ‘특수화’된 방식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즉, 영양이 환경에 지배되어 살아남기 위해 개체적 본능적 동작을 발달 시켰다면, 인간은 언어를 통한 사고의 발달 (혹은 지능의 과도한 발달)로 인해, 동물적인 본능은 도태되었지만 대신 공간적, 시간적 영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안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지 생각해 보자. 우선 <문제>에서 ‘분자 생물학 등 현대 자연과학의 발달이 전통적 인간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 있다.’라고 답안의 방향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말인가? 전통적 인간관을 부정하는 영향이란 말인가, 전통적 인간관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영향이란 말인가, 우선 두 가지 방향 가운데 하나를 자기의 주장의 방향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전자를 택한다고 할 경우,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고 이성적·도덕적 존재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면 침팬지와 유전자가 98.4%가 같은 범속한 동물일 뿐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터무니없는 우월성을 비판하면서 자연 가운데 뭇 생명들과 다를 바 없이 어울려 겸허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방향으로 주장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후자를 택한다고 할 경우, 결과적으로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있음을 주목하며, 비록 인간이 침팬지와 유전자의 차이가 1.6%밖에 되지 않지만 그 차이가 질적으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거나, 비록 유전자의 차이는 그것밖에는 되지 않더라도 위대한 인간의 본성을 생물학적 유전자로만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쪽으로 논의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방향으로 나의 주장을 펼칠 것인가? 이 지점에서 (다)에 나타난 인간과 동물의 진화가 어떻게 분화되었는지 말하고 있는 하이젠베르크의 말에서 의문 해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동물과 인간이 각각 육체적 기능과 사고의 능력 쪽으로 진화를 해왔다면 그렇게 되도록 한 인자(因子)가 무엇일까, 그것이 혹시 1/6%밖에 차이 나지 않는 유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과학의 발전이 인간에 대한 그간의 인문학적 이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 오히려, 그 인문학적 이해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한다는 쪽으로 주장의 가닥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과학이 인간에 대한 전통적 이해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해주기만 할 것인지는 아직은 간단히 판단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쨌든 새로운 과학이 전통적 인간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최근에 생명과학분야인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은 생명체의 모든 특징과 기질은 물론 인간의 행위방식․성품․도덕․능력 등 모든 ‘인간가치’ 까지도 유전자를 통해 설명하고 있고, 또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문제는 동물의 행동체계에서 얻어지는 현상과 원리를 인간 행동의 기초와 뿌리로서 받아들이느냐 않느냐에 있는 것 같다. 찰스 다윈의 『종(種)의 기원』이 나왔을 때 윌버포스목사의 부인은 인간의 조상이 동물이라는데 대해 <오! 하느님 맙소사:Oh, My God> 라고 외쳤다.   신(神)의 아들인 인간이 어떻게 한갓 동물과 같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제 13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인간을 동물에서 다시 유전자로 ‘떨어뜨리는’ 또 다른 이론에 충격을 받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이 널리 수용되는데 100년이 넘게 걸린 바 있듯이, 모든 생물과 인간은 유전자의 운반체에 불과하다는 사회생물학이 다시 수용되는 데는 과연 얼마나 더 걸릴 것인가?
   확실히 우리는 인간관에서 제 2의 혁명을 맞고 있다. 더욱이 사회생물학이 증명했거나 세웠던 가설들을 최근 분자유전학의 발전으로 더욱 지지되고 있다. 사회생물학의 유전자, 집단생물학, 진화학적 분석과 접근 그리고 종합은 새로운 생명관으로 인간의 자화상을 재구축해 나가고 있으며, 사회학, 인류학, 심리학, 정치학 그리고 역사학 등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마치 다윈의 진화론이 인류의 모든 사상에 두루 영향을 미친 것처럼 말이다.
- 이병훈 <유전자들의 전쟁> 머리말에서

 

 

 

3. 인간 본성을 고려한 사회제도

 

 

◈< 문제>◈
※ 주어진 제시문을 읽고 아래 문제에 대한 답을 작성하시오. <2009, 인하대학교 인문계열 정시>

【논제 1】(가)를 요약하시오. (10점, 250±25자)
【논제 2】(나)와 (다)를 참조해 (라)의 두 번째 단락과 유사한 전개방식으로 (라)의 세 번째 단락을 완성하시오. (20점, 400±40자)
【논제 3】 아래에 제시된 프랑스와 독일의 정책 가운데 어느 쪽이 개인의 행복과 조화로운 사회 발전에 바람직한가에 대해 주어진 [유의 사항]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논술하시오. (50점, 900±90자)

 

사 례

프 랑 스

독 일

거리에 휴지 버리기

제재 없이 자율에 맡긴다

범칙금을 부과한다

보행자 신호 지키기

보행자의 판단에 맡긴다

위반 시 처벌한다

쓰레기 분리 배출

특별히 요구하지 않는다

세밀한 법령으로 강제한다

 

[유의 사항]

1. 프랑스와 독일 중 한 나라를 선택하시오.

2. (다)와 (마)에서 2~3개의 논거를 찾아 자신이 선택한 쪽을 옹호하되 제시문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지 마시오.

3. 서론과 결론은 쓰지 말고 본론에 해당하는 내용만 쓰시오.

 

 (가) 인간에게 선천적 본성이 있는가? 만일 있다면 과연 어떤 성질을 지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는 동서양 모두 먼 옛날부터 다양한 답변이 제시되어 왔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 본성은 신에 의해 부여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더러 우주적 에너지와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했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 진화론의 영향으로 인성(人性)의 생물학적 기초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특히 최근에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극히 미세한 단위에 대한 연구가 가능해지면서 유전자 수준에서 인성을 논하는 시도까지 등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전자의 ‘이기적 성격’ 혹은 ‘이타적 성격’에 관한 이론을 고도로 복잡한 생명체인 인간과 그러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 즉각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리적 비약의 문제도 있는 만큼 주도적인 유전자결정론자들을 포함해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아직은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전통적인 인성론이든 유전자 연구에 기초한 최신 이론이든, 복잡다양한 인간의 품성을 한 가지 성질로 환원하여 논하는 데에는 근본적으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실제에 있어 선험론이나 환원론의 비합리성 혹은 그것에 내재한 정치적 의도를 이유로 반대하는 주장은 예로부터 제기되어 왔다. 그리하여 한편에서는 인간의 이기적 성품을 암시하거나 강조하는 것에 대해 억압적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뿐이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이타적 성품을 낙관하고 신봉하는 것이 방임적 교육을 조장하고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키는 폐해를 낳는다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인간의 품성이란, 말하자면 어느 방향으로나 흐를 수 있는 물, 어떤 모양으로도 조각될 수 있는 나무토막, 어떤 그림도 그려질 수 있는 백지 등과 같은 것이므로 경험적, 환경적 요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맹점들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좀더 견고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뿌리 깊은 열망은 인간의 본성을 ‘선’ 혹은 ‘악’ 어느 한 쪽에 두고자 하는 논리에 여전히 더 큰 매력을 느끼게 하는 듯하다. 유전자의 성격에 관한 연구자들의 논의가 특정한 인성론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며, 이렇게 형성된 가설적 인성론은 오늘날 대중들 사이에서 작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적 흐름이 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일시적인 유행으로 치부될 수 없으며, 실은 세심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충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모여 살아가는 사회를 어떤 원칙 위에서 조직하고 운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물론, 사회 구성원인 개개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교육적 차원에서 볼 때 인간 본성에 관한 대중사회 내의 지적 흐름은, 그 합리성 여부와 관계없이, 바람직한 교육을 위한 방향 설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인간을 본성상 선량하고 이타적이며 협동적인 존재로 볼 경우 교육의 방향은 그와 같은 성품을 계발하고 극대화시키는 한편, 그 성품을 오염시킬 수 있는 환경적 요인들을 차단하는 데에 강조점을 두게 마련일 것이다. 반면 인간의 본성을 사악하고 이기적이며 공격적, 쟁투적인 것으로 볼 경우 교육의 초점은 그러한 성품을 억제하고 교정하는 동시에, 사회 유지와 공공선을 위해 양보심과 협동정신을 습득하도록 유도하는 데에 맞춰질 것이다. 이렇게 피교육자인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교육의 구체적인 방법과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어느 쪽이 조화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공동의 궁극적 목표 실현에 가장 적합한가를 정확히 아는 것은 어쩌면 영원한 숙제거리일지도 모른다.


(나) 일벌이 침을 쏘는 행위는 꿀 도둑에 대한 아주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다. 그러나 침을 쏘는 벌은 육탄 특공대이다. 쏘는 행위로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한 내장이 침과 함께 빠져 버리기 때문에 그 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게 된다. 벌의 자살적 행위가 집단의 생존에 필요한 먹이를 수호했을지는 몰라도 침을 쏜 일벌 자신은 그 이익을 누리지 못한다.
  지상에 둥지를 짓는 대부분의 새는 여우와 같은 포식자가 접근할 때 이른바 ‘혼란 과시’를 행한다. 어미새는 한쪽 날개가 꺾인 양 몸짓을 하며 여우를 둥지로부터 먼 곳까지 유인한다. 포식자는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목적물에 유인되어 새끼가 있는 둥지에서 멀어진다. 마침내 어미새는 이 몸짓을 멈추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여우의 습격을 피한다. 이 어미새는 자기 새끼의 생명은 구했으나 이러한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위험한 상태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검은머리갈매기는 커다란 집단을 이루어 집을 짓는데 둥지와 둥지 사이는 불과 수 미터밖에 안 된다. 갓 태어난 어린 새끼는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에 포식자에게 먹히기 쉽다. 어떤 갈매기는 종종 이웃 갈매기가 먹이를 찾으러 집을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둥지를 습격하여 어린 새끼를 삼켜 버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 갈매기는 먹이를 잡으러 나가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이 자기 둥지를 지키는 동시에 풍부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다.
  남극의 황제펭귄은 바다표범에게 잡아먹힐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물가에 서서 물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중 한 마리가 뛰어들기만 하면 나머지 펭귄은 바다표범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당연히 어떤 펭귄도 자기가 희생물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그저 다른 펭귄이 뛰어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때때로 서로 밀치다가 무리 중의 하나를 떠밀어 버리려고까지 한다.


(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 차마 해를 끼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옛 왕들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잔혹하게 대하지 않는 정치를 시행하였다. 그렇게만 한다면 천하를 다스리기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움직이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까닭은 이렇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려는 상황을 마주치게 된다면 누구나 깜짝 놀라며 측은해 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이런 마음이 이는 것은 아이를 돕는 것을 빌미 삼아 그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고 해서도 아니고, 지역사회의 친구들에게서 칭찬을 바라서도 아니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서도 아니다. 이로부터 보건대,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중략) 이 네 가지를 잘 계발하면 천하를 조화롭게 안정시킬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제 부모 섬기기에도 부족하게 된다. <맹자(孟子)>

   인간의 본성은 악하며 인간이 선할 수 있는 것은 인위의 결과다. 인간의 본성이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데, 그러한 본성을 따르면 싸우고 빼앗음만이 있게 되고 물러나고 양보함은 없게 된다. 나면서부터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러한 본성을 따르면 남을 해침이 생겨나고 성실과 신의는 없게 된다. 나면서부터 눈과 귀의 욕망이 있어 좋은 소리와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는데, 그러한 본성을 따르면 무절제가 있게 되고 예의와 질서는 없게 된다. 그러니 인간의 본성을 따르고 인간의 정욕을 따른다면 필연적으로 싸우고 빼앗는 데에서 시작하여 직분을 무너뜨리고 도리를 어지럽히는 데로 나아가고 종래에는 폭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반드시 스승의 법도에 의한 감화와 예의에 의한 가르침이 있은 연후에야 사양하는 데에서 출발해 조화와 질서로 나아가고 사회적 안정으로 귀결하게 된다. 이로부터 보건대, 인간의 본성이란 악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이 선해지는 것은 인위의 결과다. <순자(荀子)>

 

(라)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도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생물 종 중 하나이다. 인간을 생물 종의 하나로 보면 인간은 유전자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인간의 행동, 그리고 인간 행동의 근원적 바탕이 되는 본성 또한 유전자의 특성에 근거해 설명될 수 있다. 유전자를 ‘이기적’ 또는 ‘이타적’으로 보는 것이 유전자를 지나치게 의인화한 것이기도 하고, 고도의 사고력을 가진 인간이 한낱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는 것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동물이나 인간의 행동이 궁극적으로 이타적인가 이기적인가에 대한 해석의 차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계에서 발견되는 이기적이기도 하고 이타적이기도 한 행태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상반된 주장은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생물계에서 발견되는 개체의 이타적 행동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맹자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집단의 생존에 필요한 먹이를 수호하기 위해 침입자를 쏘고 자신은 죽는 일벌의 행위나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 남에게 해가 안 돌아가게 하려는 배려는 모두 선한 본성을 드러내 준다.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위험에 내던지는 어미새의 노력과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아이를 보면 깜짝 놀라 측은해 하는 인간의 모습 또한 선한 본성의 발로이다. 적을 쏘고 곧 죽는 일벌이 그 행위로 이익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위험에 처한 아이를 측은해 하며 돕는 인간이 그 부모와의 특별한 교분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점은 결국 동물이나 인간 모두 남을 돕는 선한 본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생물계의 일원인 인간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이타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맹자가 말하는 선한 본성으로 발현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생물학계에서 발견되는 개체의 이기적 행동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순자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마) 공자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미루어 다른 이를 대하는 원리에 기초한 인(仁)의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엄격한 법치는 백성들 사이에 정해진 죄만 짓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조장할 뿐,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지 못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회 질서를 바로 세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주는 오직 덕(德)으로써 백성을 너그럽게 대해야 본래의 착한 본성을 일깨우고 조화로운 인간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맹자에 의해 계승, 발전된 이러한 공자의 이념은 과거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웃의 선의에 대한 믿음에 토대를 둔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협업에 기초한 벼농사 중심의 농경생활 양식과 결합함으로써 상부상조와 협동 단결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전통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레, 품앗이, 계, 향약 등이 그 구체적인 예가 되는데, 이러한 것들은 인과 예를 근간으로 하는 덕치가 단순한 사회질서 유지 차원을 넘어 한층 더 아름다운, ‘인간적인’ 인간관계를 가능케 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론』으로 유명한 밀(J. S. Mill)도 인간의 본성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맹자와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인간을 선한 품성을 타고난 사회적 존재로 그리고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 감정을 지니는데, 이웃이나 동료와의 일체감, 서로 돕고 협력하는 공생 욕구, 공동의 이익을 위한 헌신 등이 그것이다. 인간의 보편적 특성으로 간주되는 사회성도 이 감정에 토대를 둔 것으로, 그 미덕과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에서 밀은 당대의 통상적인 공리주의자들과 달랐다. 일례로 타인과의 협력만 하더라도 벤덤이 보기에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때 뭔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밀에 의하면, 사람은 본시 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하고 그렇게 할 때 기쁨을 느끼며 이기심의 장벽을 뛰어넘는 선한 생활을 되풀이하면서 성숙해간다. 이제까지의 인류 역사가 입증하듯 문명 발전의 수준은 그러한 이타적 심성이 실제로 발현되는 정도와 정비례한다. 개인의 행복한 삶은 물론, 사회 전체의 발전도 그러한 인간의 선한 본성이 부당하게 왜곡되거나 억제되지 않을 때 비로소 기대될 수 있는 것이었다. 밀이 개인의 자유를 그토록 소중히 여긴 것도 그 때문이다.

  순자의 인성론을 이어받은 한비자(韓非子)는, 군주란 모름지기 명확한 법을 만들고 엄격한 형벌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백성을 혼란에서 구하고 천하의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엄정한 법치를 폭정이라 여기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로 규정했으며, 인의(仁義)와 혜애(惠愛)의 명분에 사로잡힌 당대의 군주들에 대해서도 실상을 모르고 본분을 망각하고 있다며 비판하였다. 빈민들에게 베풀고[인의], 백성을 가엾게 여겨 벌주기를 꺼리는 것[혜애]은 곧 나라를 망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빈곤한 사람에게 무작정 베풀어 주면 나라에 공이 없는 사람이 상을 받는 셈인데, 그런 일이 생기면 백성은 밖으로는 적과 맞서 목을 베는 일에 힘쓰지 않게 되고, 안으로는 힘을 다해 농사짓지 않게 된다. 또한 백성을 차마 벌하지 못하면 난폭한 일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엄중한 형벌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물론 백성은 이를 두려워하고 싫어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사람의 사악한 마음을 끊고 간교한 행위를 방지할 수 있으며, 나아가 나라도 안정되고 난폭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한비자는 오직 엄형과 중벌로써만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변방의 소국에 불과했던 진(秦)나라가 강대국으로 성장하여 마침내 중국 최초로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법가(法家)의 가르침을 현실 정치에 충실히 적용한 데 있었다.
   근대 영국의 정치이론가 홉스도 유사한 주장을 폈다. ‘서양의 순자’로 불리기도 하는 그의 인간론 역시 성악설로 요약될 수 있는데, 『리바이어던』에 따르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욕구로 가득찬 존재이다. 사람들이 종종 파괴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이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반(反)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아무런 제약 없이 ‘자연 상태’에 그냥 방치한다면 서로 간에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을 것이며, 극도의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 누구든 생존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인간이 각자 서로에 대해 탐욕스럽고 난폭한 늑대처럼 살아가는 한 불행한 삶에서 헤어날 길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안전한, 그리고 예측 가능한 안정적 삶을 희구하므로 그런 상황은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이기적이고 사악한 본성을 억압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행복한 삶의 기본 전제이다. 홉스가 전권(全權)을 지닌 지배자가 통치하는 정치체제를 이상으로 제시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분석 & 해설
【논제 1】과 【논제 2】는 대학측이 제시한 답안 사례를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하고 【논제 3】을 중심으로 이 문제의 분석을 해 보겠다.
  먼저 【논제 1】의 요약문은 다음과 같이 작성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는 전통적인 설명이나 근대 이후의 생물학적인 접근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 선험적 인성을 전제하거나 인성을 어느 한 쪽으로 성급히 환원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인성론은 오늘날 주요한 지적 흐름이 되었고, 사회 조직과 운영의 문제, 교육의 문제 등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주목을 요한다.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 쪽을 따르느냐에 따라 교육의 방법과 내용은 크게 달라질 텐데,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는 것은 영원한 숙제일지 모른다.

 

다음 【논제 2】의 단락은 다음과  같이 완성할 수 있다.

 

검은머리갈매기가 이웃 갈매기 새끼를 잡아먹는 행위와 인간이 남과 싸우고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는 모두 악한 본성을 드러내 준다. 자신의 새끼를 지키고 편하게 먹이를 지키기 위해 동족의 새끼를 먹는 검은머리갈매기의 행동과, 눈과 귀의 욕망에 따라 예의와 질서는 버린 채 무절제하게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 또한 악한 본성의 발로이다. 바다표범의 위험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다른 펭귄이 먼저 바다에 뛰어들기를 바라다가 동족을 바다에 밀치려고 하는 황제펭귄의 모습이나, 성실과 신의를 저버리고 도리를 어지럽히다가 종래에는 폭력으로 귀결되는 인간의 모습은 모두 악한 본성에 바탕을 둔 것이다. 결국 생물계의 일원인 인간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순자가 말하는 악한 본성으로 발현된다고 볼 수 있다.

 

 【논제3】은 이 논술의 중심 부분이다. 이 논제는 결국 프랑스와 독일의 정책 가운데 어느 정책이 ‘개인의 행복과 조화로운 사회 발전’에 바람직한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 의견은 [유의사항]에서 제한하고 있는 것처럼 (다)와 (마) 지문에 나타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상이한 두 관점 가운데 하나를 취하여 그 관점에서  논거를 찾아서 말해야 하는 것이다. (다)와 (마) 내용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동서양의 인간론(공자와 맹자, 그리고 J. S. 밀)과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동서양의 인간론(순자와 한비자, 그리고 홉스)의 쟁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정책을 비교해 보면, 프랑스의 경우는 개개인의 자율성에 맡기는 정책을, 독일의 경우는 제도적 강제성의 부과를 통해 질서를 잡으려는 정책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나라 정책 차이의 저변에는 각 나라가 개개 인간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철학적 관점의 차이가 깔려 있다. 이 논제의 의미심장함이 바로 이 점이다. 따지고 보면 크고 작은 집단의 모든 정책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관점이 의식적 혹은 무의적적으로 녹아 있다는 점, 지금 우리가 다니는  학교 규율의 엄격성 차이에도 해당 학교가 ‘인간의 본성, 혹은 인간의 천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들어 있음을 인식하면서 위 논제에 대한 답변을 쓴다면 살아 있는 내용의 논술문을 쓸 수 있을 것이다.
 

 


4. 인간의 어떤 본성이 사회를 발전시키는가?

 

 

◈< 문제>◈
* 다음 제시문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2006, 한국외대 정시>
 

 <제시문 1>
1-1. 동물이 인간이나 동물로부터 어떤 물건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 사람 또는 그 동물의 호의를 얻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어떤 설득 방법이 없다. 강아지는 어미에게 꼬리를 치며 아양 떨고, 애완용 개는 먹을 것을 원할 때 온갖 아양을 떨어 식사중인 주인의 주의를 끌려고 한다. 사람들도 자기의 동료에게 이와 같은 수법을 때때로 사용한다. 남들로 하여금 자기의 기분에 맞게 행동하도록 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을 때, 사람은 남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온갖 아첨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이렇게 할 만큼의 시간 여유를 가지지 않는다. 문명사회에서 그는 항상 무수한 사람들의 협력과 원조를 필요로 하지만 그는 평생에 몇 사람의 친구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거의 모든 다른 동물류에서 각각의 동물은 성숙하면 완전히 독립하며, 자연 상태에서는 다른 동물의 원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동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을 오직 동료의 자비에만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동료의 이기심을 자극하고 자기의 요망 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그들 자신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낫다. 타인에게 어떤 종류의 거래를 제의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렇게 하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주면,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 이러한 모든 제의가 의미하는 바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호의의 대부분을 상호간에 얻어낸다. 우리가 식사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이기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이익을 이야기한다. 
- 아담 스미스, 『국부론(國富論)』-


1-2. 물론 스미스는 인간이 오직 이기적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는 하지 않았다. 스미스는 다만 이기적 본능이 친절성, 박애심, 희생정신 같은 것보다 더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인간에게 동기 부여를 할 수 있다고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인간 심성의 고귀한 측면에만 사회를 맡기고 미래를 의지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인간의 본능 중 가장 강한 본능인 이기심을 어떻게 하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잘 활용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한다.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우리 사회는 마치 신호등이 고장나 버린 고속도로 인터체인지처럼 혼란스럽게 되어 버리지 않을까? 각자의 이해관계가 부딪칠 때 우리는 자동차들의 연쇄충돌 소리를 듣게 되는 건 아닐까? 교통정리하는 경찰관 없이는 도로가 안전할 수 없듯이 중앙에서 경제활동을 계획하고 통제하는 사람 없이 사회가 존속해 나갈 수 있을까?
그렇다. 그냥 생존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어떤 중앙경제기획 체제를 가진 사회보다 훨씬 더 번영하고 발전해 나갈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사회야말로 투철한 박애심에 기초한 사회들보다 생산량은 물론이요 사회적 화합이나 단결과 같은 측면에서도 앞선다는 사실이다.
- 토드 부크홀츠,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제시문 2>
살펴보건대 혼란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신하와 자식이 그의 임금이나 아버지에게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것이 이른바 혼란이다. 자식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아버지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를 해치고 자신을 이롭게 한다. 아우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형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형을 해치고 자신을 이롭게 한다. 신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임금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임금을 해치고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혼란이다.
   만약 아버지가 자식에게 자애롭지 않고 형이 아우에게 자애롭지 않고 임금이 신하에게 자애롭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천하의 혼란이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면서 자식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식을 해치고 자신을 이롭게 한다. 형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면서 아우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우를 해치고 자신을 이롭게 한다. 임금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면서 신하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하를 해치고 자신을 이롭게 한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모두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천하의 도적들도 역시 그러하다. 도적은 자신의 집은 사랑하면서도 다른 집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집의 것을 훔쳐 자신의 집을 이롭게 한다. 도적은 또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남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을 해치고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한다. 이것은 어째서인가? 모두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대부(大夫)들이 서로 남의 집안을 어지럽히고 제후들이 서로 남의 나라를 공격하는 데서도 역시 그러하다. 대부들은 각기 그의 집안은 사랑하면서도 다른 집안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집안을 어지럽혀 자신의 집안을 이롭게 한다. 제후들은 각기 자신의 나라는 사랑하면서도 다른 나라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나라를 공격하여 그의 나라를 이롭게 한다. 천하를 어지럽히는 것들은 모두 여기에 원인이 있다. 이것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를 살펴보면 모두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 묵자, 『겸애(兼愛)』-


[문제 1] <제시문 1>과 <제시문 2>에 나타난 각각의 핵심적 주장은 무엇이며, 또 가장 중요한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를 300자 내외로 기술하시오.

 

[문제 2] <제시문 2>의 관점에서 <제시문 1>의 입장을 논하고, <제시문 2>의 문제점도 포함하여 500자 내외로 논술하시오.

 
[문제 3] <제시문 2>의 입장을 실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 방안들에 대해 400자 내외로 논하시오.

 


▣분석 & 해설▣
  이 논제는 앞의 ‘인간 본성을 고려한 사회 제도’에서 살펴본 논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요컨대, 두 논제 모두 사회의 문제점을 인간본성의 문제와 결부시켜 논하는 내용이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가 사회 제도의 문제를 인간의 본성과 결부시켜 논하는 문제라면, 후자는 사회 발전을 인간 본성과 결부시켜 논하는 문제이다.
   <제시문1>과 <제시문2>는 공통적으로 인간에게 이기심과 이타성(‘사랑’)이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제시문2>에서 묵자가 특정 인간이 자신만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그리고 인간이 타인을 사랑한다고 했을 때는 인간이 각가 이타적 본성을 발휘해야 함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두 제시문의 차이점이 더 주목할 만하다.
   <제시문1-1>에는 인간이 이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사회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아담스미스의 주장이 나타나 있다. <제시문1-2>는 아담스미스도 인간에게는 이기적인 본성 외에 박애심이나 희생정신과 같은 이타적인 본성도 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문제는 이기적 본능에 충실한 사회가 박애심이나 희생정신에 기대는 사회보다 사회발전을 이룩하는 데 더욱 유용하다고 주장했음을 말하고 있다.
  <제시문2>에서 묵자는 사회 혼란이 일어나는 원인을 인간 상호 간의 사랑이 부족한 데서 찾고 있다. 그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형과 아우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 도적이 자신의 집만 사랑하고 다른 집은 사랑하지 않는 것, 대부들이 자신의 집안만 사랑하고 남의 집안은 사랑하지 않는 것, 그리고 제후가 자신의 나라만 사랑하고 남의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 등을 열거하면서 나 아닌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두 가지 관점은 각각의 의의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우선 <제시문2>의 관점에서 보면 <제시문1>의 관점은 인간의 이기심이 갖는 생산성을 지나치게 긍정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특히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개인 간, 국가 간의 빈부의 격차를 얼마나 심화시키고 있는지를 목도하건대, <제시문1>의 관점은 더더욱 문제점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 반면 <제시문1>의 관점에서 보면 <제시문2>의 관점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의미 자체가 모호한 ‘사랑’이라는 묘약이 거대하고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지 그 한계가 자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문제1]과 [문제2]에 대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한다.
   <제시문1>과 <제시문2>는 결국 인간의 어떤 본성을 발현시키는 것이 인간사회가 혼란을 극복하고 번영·발전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두 단서를 담고 있다.  여기서 질문은 [문제3]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에 대해 답을 해 보자.
   묵자가 말하는 ‘사랑’으로 사회 구성원들을 통합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은 비유컨대, ‘거미줄로 방귀 동이는’ 격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사랑’이라는 개념이 추상적이며 막연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안이하게 ‘우리 모두 각자 서로 사랑해야 한다’거나 ‘사랑으로 충만한 사회를 만들자’거나 하는 선언적인 글을 쓰는 것은 출제자의 눈 밖에 나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출제자는 논제의 이러한 함정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이 논제에 대한 답변이 힘들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가령, 나도 먹고 살기가 힘든 데 상대방을 배려하며 살라는 말이, 빈부격차가 격심한 사회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 얼마나 공염불인지 안다면 이 논제의 답변이 어려움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점이 또한 이 논제에 대한 대답의 열쇠가 있다. 그러니까 묵자가 말하는 ‘사랑’이 현실에서 실현되려면, 그 사랑은 개인의 의지나 도덕심에 전적으로 의지하기보다는 사랑이 실천될 수 있는 사회의 물적 조건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곳간이 차야 남도 돕는다’는 속담이 달리 있는 게 아니다.
   묵자가 인간이 자기만 위하고 남을 위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 자체에서 해결이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묵자는 인간에게는 이기적 본성이 더욱 강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이런 이기적 인간에게 어떻게든 남을 사랑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논제에 대한 답변을 다음과 같이 풀어나갈 수도 있다. 즉, 묵자가 말하는 사랑의 실천을 긍정하되, 어떤 대가도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타인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점을 개개인이 인식하게 하는 것,  그런 사회구조를 만드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비록 이기심이 더욱 깊이 잠재된 인간의 본성이라 하더라도  이타적 사랑이 더욱 부각되는 사회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이기심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라도 실제 삶은 사랑으로 넘칠 수도 있다. 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정기적으로 수입금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일을 두고 자신의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해서라고 그 이기심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 정도는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기적 본성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사장은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실천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물론 가진자들의 자기만족이나 면피성에 그치는 자선만 믿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되고, 그런 자선쇼를 보면서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고 그릇된 인생긍정론을 펼치면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공동체의 아름다운 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이와 함께 사회의 구조적 모순도 단계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갈등이 적은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참고 문헌-
   。로저 트리그 (최용철 역) 『인간본성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 자작나무
   。레즐리 스티븐슨(임철규 옮김) 『인간본질에 관한 일곱 가지 이론』 종로서적
   ° 方立天 (박경환 역) 『중국 철학과 인성의 문제』 예문선원
   ° 리처드 도킨슨(홍영남 역)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 이병훈 『유전자들의 전쟁』 민음사
   ° 우기동 <인간의 행위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진리인가. 』 웅진 출판사
   ° 고정식 『생각을 키우는 철학』 문이당


 

 

 

 

 

Ⅱ인간형 · 삶의 태도



   동양 사회에서 ‘인간형’이나 ‘삶의 태도’를 이야기할 때 ‘굴원’을 빼놓을 수 없다. 그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번 카테고리의 성격을 시사(示唆)하고자 한다.
  굴원(屈原)은 이름이 평(平)으로 초(楚)나라 회왕의 좌도(左徒:官名)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나라의 법령을 기초하기까지 했으나 그와 서열이 같은 상관대부(上官大夫: 官名) 근상(靳商)의 참소를 입은 바 되어 마침내 왕이 굴원을 멀리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기까지 그간의 사정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회왕이 진나라의 혜왕이 보낸 장의(張儀)의 속임수에 넘어가 땅까지 떼어주게 되고, 이후 진나라 소왕의 혼인을 빙자한 유인술에 넘어가, 회왕 자신이 진나라로 유인되어 객사(客死)하기까지 굴원은 왕의 잘못을 간(諫)하기도 했으나, 소외된 직책에 있었던 터라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굴원은 이소(離騷)를 지어 임금이 신하의 말을 가려듣기에 총명하지 못하고, 방정한 선비가 용납되지 못하는 것을 한탄했다.
   회왕이 죽자 그 장자인 경양왕이 즉위하고, 막내 아우 자란(子蘭)이 영윤[재상]이 되었다. 자란은 그 아버지 회왕이 진나라에 유인될 때 굴원과 의견충돌이 있기도 했으므로 (자란은 회왕에게 진나라로 가도록 권유했다)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마침내 자란은 굴원이 자기를 미워한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상관대부 근상을 시켜 굴원을 경양왕에게 참소하게 했으며 결국 경양왕이 노하여 굴원을 귀양 보냈던 것이다.   이상 <사기열전: 굴원․가생열전>

   귀양 간 이후 굴원의 태도를 <어부사>를 통해 살펴보자.
 
  굴원이 이미 추방되어 양자강에 노닐매, 강가를 걸어가면서 시를 읊는데, 안색이 초췌하고 형용이 여위었더라. 어부가 보고 물어 가로되, 그대는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닌가,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 이르렀는가?  굴원이 가로되, 온 세상이 다 흐렸는데 나 홀로 맑으며, 뭇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었으니, 이로써 추방을 당함일세.
  어부가 가로되, 성인(聖人)은 물(物)에 구애받지 않고 세상과 더불어 추이(推移)를 같이할 수 있을 것을, 세상사람이 모두 흐렸으면 어찌하여 그 진흙을 휘저어 그 물결과 같이하지 않으며, 뭇 사람이 다 취했으면 어찌하여 그 찌꺼기를 먹는 것과 그 박주(薄酒)를 빨아들이는 것을 하지 않는가. 무슨 까닭으로 깊이 생각하고 높이 행하여 스스로 추방을 당하게 하였단 말인가.
굴원이 가로되, 내 들었읍네. 새로 머리를 감은 자는 반드시 관(冠)의 먼지를 털고, 새로 몸을 씻은 자는 반드시 옷의 먼지를 털어서 입는다고. 어찌하여 맑고 밝은 몸이 더러운 물건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차라리 양자강에 달려가 고기의 배에 장사할지언정 어찌하여 결백한 몸에 세속의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 쓰겠는가. 어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뱃바닥을 울려 장단을 치며 가는데, 이에 노래를 불러 가로되,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리라.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마침내 가버리니 더불어 말할 것이 없더라. <어부사(漁父辭) 屈平>

 

  마침내 굴원은 <회사(懷沙)의 부(賦)> [모래를 품고 강물에 몸을 던지는 노래]를 짓고, 돌을 품고 스스로 멱라(汨羅: 汨水․羅水의 합류점 북쪽)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사람들은 동일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도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  굴원처럼 강직한 절조를 지니고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고, 어부처럼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여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살아가든 굴원과 어부의 삶의 태도는 나름의 확고한 가치관 위에 서 있음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아무런 의식없이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삶은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지 않는다. ‘새로 머리를 감는자’를 표방하는 굴원의 가치관이나, ‘창랑의 물’로 표방되는 어부의 삶의 방식은 모두 그 의미의 심장함을 지나 아름다움의 경지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요컨대 전자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강한 신념을 나타낸 것으로, 후자는 세상의 맑고 흐림에 따라서 출처와 진퇴를 적당히 하고 세상과 거슬리지 않음이 좋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굴원은 세상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절조를 갖고 있다. 죽음을 불사하고 선과 악, 옳음과 그름을 분명히 하는 염결(廉潔)이 빛난다. 이에 어부는 난세(亂世)를 살아가는 나름의 방식을 굴원에게 제시한다. 자기만의 결백을 표명할 것이 아니라, 세파(世波)에 적절히 어울리면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굴원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다가 스스로 추방됨을 자초한 것이다. 
  굴원의 뚜렷한 가치관과 정의로움은 분명히 우리가 전범(典範)으로 삼아야 할 인간형의 덕목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지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인(異人)의 면모가 보이는 어부의 ‘가르침’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세상사람과 같이 취하라는 그의 말에는 무자각적인 순응의 논리 그 이상의 것이 함축되어 있다. ‘나만이 맑다’는 굴원의 확신은 지나친 자기 염결성에 빠져 있지나 않을까?
  오늘날 사회는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 또한 그만큼 복잡다기(複雜多岐)해 졌다. 특히 자본주의하에서 선악(善惡)․ 진위(眞僞) 혹은 ‘맑고 흐림’은 각자의 이해관계와 결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구별 또한 모호하기가 짝이 없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행위는 바야흐로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로 판별해내기가 그만큼 힘들어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콩쥐 아니면 팥쥐, 흥부 아니면 놀부라는 식의 순도 100%의 선 혹은 악으로 똘똘 뭉쳐진 인간형은 존재하지 않는다.(사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고전의 인간형에게도 각각 ‘불순물’이 그 자체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
  특정한 인간형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라는 논술은 실제 다수 출제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동양의 고전에서 전형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인간형에 관한 것이었다. 예컨대 홍길동과 흥부라는 인간형을 제시하고 오늘날 관점에서 이 중 어떤 삶의 지향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묻는 문제 (’96 전국학생논술경시대회 문제)가 그 하나이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공맹(孔孟)을 본받지 못할 바에야 병법을 배워 동정서벌(東征西伐)하고 국가에 대공(大功)을 세우고 이름을 만대에 빛낼 것인가,(홍길동),  장원급제는 고사하고 동리 좌장이 될 가능성도 없으니, 대신 볼기짝이나 맞고 돈벌어서 ‘식구포식’이나 시킬 것인가(흥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이다. 공자와 자로의 대화를 통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을 쟁점(爭點)으로 주고, 한 가지를 골라 현대사회의 맥락에서 정당화하라는 논제(97 연세대 모의고사) 또한 이 범주에 해당한다. 전체적으로, 고전작품에서 어떤 특징이나 덕목을 가진 인간형을 제시하고, 현대사회의 관점에서 누가 더욱 긍정적인가를 묻는 논제이다. 이러한 논제 유형 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논제를 골라 살펴보기로 하자.

 

 

 1. 내 마음속의 도덕률

 

◈< 문제>◈
<논제> 아래 두 제시문에서 석저와 자베르가 처한 문제 상황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 <2003년 건국대학교 정시/1,100~1,200자>

 (가)형(荊)나라 소왕(昭王) 때, 석저(石渚)라는 선비가 있었다. 사람됨이 공정하고 사사로운 정(情)이란 것을 몰랐기 때문에 왕이 치안관으로 일을 보게 했다. 어느 날 길에서 사람이 죽은 사건이 생기자, 석저는 범인의 뒤를 밟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범인이 자기 아버지였다. 석저는 그대로 수레를 돌려 왕궁으로 나아갔다.
  “살인범은 저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를 제 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 차마 할 수 없었습니  다. 하지만 범인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것으로 불가(不可)한 일입니다. 법을 범한 이상 벌을 받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입니다.”
  석저는 이렇게 말하고 형틀에 엎드려 왕에게 죽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뒤를 좇았으나 잡지 못한 것뿐이니 어찌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할 것인가. 계속해서 맡은 일에 충실하도록 하라.”
   하지만 석저는 사양하며 말하기를,
  “아비에게 정을 두지 않으면 효자라고 할 수 없고, 임금을 섬기며 법을 굽힌다면 충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임금께서 그것을 용서하시는 것은 은혜로운 일이지만, 감히 국법을 어길 수 없는 것이 신하의 도리입니다.”
하고 형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나) 몇 시간 전부터 자베르는 아주 간단한 일도 뚜렷하게 결론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곤란한 일에 부딪혀도 그토록 단순하고 명쾌하던 그의 두뇌가 혼란에 빠진 것이다. 수정과 같은 맑은 머리에 먹구름이 낀 것이다. 자베르는 자신의 확고한 의무감이 산산조각이 난 것을 느꼈고, 자기 자신한테 이 사실을 속일 수가 없었다. 뜻밖에도 센 강변에서 장 발장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의 마음은 사냥감을 찾은 늑대와 같은 기분과, 주인과 다시 만난 사냥개와 같은 기분을 맛보았던 것이다.
그의 입장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악인에게 목숨을 구출받고, 그 빚을 갚는다. 본의 아니게도 범죄자와 동등한 입장이 되어서, “가라!”고 말해 주었던 자에게 이번에는 자기 쪽에서 그 은혜에 대한 답례로 “도망쳐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자기의 양심에 충실하려고 한 것이 사회를 배신해 버린 것이다. 이런 부조리한 일이 모두 현실이 되어 그를 내리눌렀다.
   이제 방금 자기가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그는 몸서리쳤다. 명색이 자베르라는 이름의 그가 경찰의 모든 법규와 모든 사회적 및 법률적인 조직과 법률 조항을 완전히 어기고, 한 죄인을 자신의 의사에 따라 석방해 버린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남은 해결책은 단 한 가지, 급히 롬 아르메 거리로 되돌아가서 장 발장을 체포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그의 길을 가로막고 서서 방해했다.
   장 발장은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의 일생의 지주(支柱)가 되어 있던 공리(公理)가 하나도 남김 없이 이 사나이 앞에서 무너져 버린 것이다. 여러 가지 다른 사실을 상기해 보니, 전에는 거짓말이나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지금은 진실같이만 생각되었다. 마들렌 씨의 모습이 다시 장 발장의 등 뒤에 나타나, 두 모습이 서로 겹쳐져 단 하나의 존경해야 할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다. 자베르는 무언가 무서운 것이 영혼 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범죄자를 존경하는 감정이었다. 범죄자에 대한 존경, 그런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되자 몸이 떨렸다.
   그의 가장 큰 괴로움은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된 일이었다. 왠지 모르게 뿌리째 뽑혀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의존해 왔던 법전(法典)도 이제 산산조각 난 파편이 되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불안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단 하나의 척도였던 법률적인 확신과는 전혀 다른 감정적인 계시가 마음속에 끓어올랐다. 하나의 새로운 세계의 모습이 훤히 그의 영혼에 보였다. 즉, 그가 받은 자비를 갚아야 한다는 것, 헌신·연민·관용·동정이 미치는 격렬한 힘에는 위엄조차도 무너져 버린다는 것, 인간을 존중하는 것, 결정적으로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인간의 정의(正義)와는 반대로 나아가는 신(神)의 정의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미지의 도덕이라는 무서운 해돋이를 보았다. 그 해돋이가 무서워져서 눈이 아찔했다. 억지로 독수리의 눈을 갖게 된 올빼미처럼.(······)
   자베르는 암흑의 입구를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얼마 동안 꼼짝도 않고 있었다.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처럼, 뚫어지게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은 찰싹 찰싹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모자를 벗어 난간 언저리에 놓았다. 다음 순간, 검고 키 큰 사람 그림자가 난간 위에 똑바로 서서, 강물 쪽으로 몸을 구부렸다가 이내 다시 일어난 후에 어둠을 향해 똑바로 떨어졌다. 이어 희미하게 물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물 속으로 사라진 이 희미한 그림자의 충동적인 행위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암흑뿐이었다.  
-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에서


 
▣분석 & 해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 소중한 두 가지 가치가 맞부딪치는 상황을 겪곤 한다.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허구의 세계에서도 이와 같은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의 문제에 직면한 인간의 모습이 단골소재였다. 예를 들어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로 잘 알려진 이야기에서는 두 인물 모두가 두 가지 가치의 충돌로 비극을 맞는다. 낙랑의 공주 최씨녀는 고구려의 연인 호동 왕자와의 사랑과 조국 낙랑의 흥망이라는 양가적(兩價的) 선택에 직면하여 사랑을 선택하다 왕인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호동왕자는 원비(元妃)가 적자(嫡子) 대신 호동왕자[호동왕자는 차비(次妃)의 혈통이었음]를  태자로 삼을까 우려하여 호동왕자를 왕(대무신왕)에게 참소하자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자결을 한다.


  “내가 만약 나의 무고함을 해명하면 이는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부왕의 근심거리를 만들게 되는 것이니 이 어찌 효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삼국사기>권14,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돈이냐 사랑이냐?’는 통속물에서 주인공이 단골로 직면하는 상충된 가치이다. <장한몽>(조중곤이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를 번안하여 <매일신보>에 연재한 작품)에서 ‘심순애’는 어려서 정혼한 이수일을 버리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세운 부호의 아들 김중배에게 시집을 간다. 이와 같은 사랑과 물질, 도덕적 책임감과 현실감각 간의 가치 충돌은 <무정>(이광수)에서 주인공 이형식이 정혼녀인 스승 박진사의 딸 박영채를 버리고 김 장로의 딸 김선형과 결혼하여 미국 유학을 떠나는 데서도 나타난다. 통속물에서  황순원의 <학>에서 주인공 성삼은 이데올로기와 우정(휴머니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문헌이나 허구적 작품들에서 주인공들은 상충되는 두 가지 가치 사이에서 심한 내면갈등을 겪거나 아마도 겪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기록물에서나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나 누구나 겪음직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해봄으로써 나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해 볼 수도 있고 또 틀림없이 살아가면서 겪게 될 실제 상황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도 있으리라 본다.
제시문 (가)는 법(法)과 효(孝)의 딜레마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주목할 것은 주인공 석저가  두 가지 가치가 상충되는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검거하지 않은 ‘효(孝)’를 실천함과 동시에 국법에 따라 처벌받는 형식으로 취함으로써 두 가지 가치에 모두 소홀하지 않고자 한다.
    제시문 (나)에서 자베르가 처한 문제 상황은 석저의 경우와 통하는 점이 있다. 그는 법(法)이라는 가치와 양심(良心)이라는 인간적 가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그 양심이란 자기가 입은 은혜의 보답이라는 개인적 측면을 넘어 법 이상의 근원적인 도덕적 가치[신(神)의 정의]로 인식되고 있다. 자베르는 석저와 달리 남 모르는 죽음을 택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문제의 정면 해결을 회피한다. 이것이 공개적으로 처형되는 방식을 택한 석저와 차이다. 석저의 공개적 처형방식은 스스로의 희생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타인들을 경계할 수 있다는 의미가 부여된다. 이에 비해 사사롭고 비밀스러운 죽음을 택한 자베르는 그런 사회적 가치의 준수 문제보다는 인간 개인의 실존과 고뇌의 심연(深淵)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두 사람 모두 두 가지의 가치를 지키고자 했지만, 그 방식이 자살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에는 물론 비판의 여지가 있다. 즉, 두 사람이 자살을 통해서 정말 두 가지 가치를 다 지켜낸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좀 더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2. 현실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 문제>◈
 인간은 때때로 극복하기 어려운 역경과 고통에 처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는 페스트로 인한 재난의 상황(제시문 A)에서 고통받는 오랑 시(市) 주민들의 사고와 행동이 나타난다. 제시문 (가), (나), (다)의 세 인물(기자 랑베르, 신부 파늘루, 의사 리유)이 각각 역경에 대처하는 방식을 정리하고, 그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을 자신의 인생관과 관련지어 비판적으로 논술하라. (서강대 2000년정시/ 1,600자)

 <제시문>
(A) 며칠이 지나자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죽은 쥐들의 수는 날로 늘어만 갔다. 나흘째 되는 날부터 쥐들은 떼를 지어 거리에 나와 죽었다. 집안의 구석진 곳으로부터, 지하실로부터, 지하 창고로부터, 수챗구멍으로부터 쥐들은 떼를 지어 비틀거리면서 기어 나와서는 햇빛을 보면 어지러운지 휘청거리고, 제자리에서 맴을 돌다가 사람들 곁에 와서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 밤이면 복도나 골목길에서 그놈들이 찍찍거리는 마지막 작은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중략)... 마치 건강한 사람의 짙은 피가 돌연 역류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여지껏 그렇게도 고요하기만 했다가 불과 며칠 사이에 발칵 뒤집혀 버린 이 자그마한 도시의 아연실색함이 어느 정도일 것인가를 상상만이라도 해보라!···(중략)···
   갑자기 병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망자의 수가 다시 30명으로 늘어난 날, 리유는 전보 공문을 받았다. 전보에는 <페스트 사태를 선포하고 도시를 폐쇄하라.>라고 적혀 있었다.
그 때부터 페스트는 우리들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그때까지는 그 이상한 사건들로 인한 충격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오랑 시민들은 각자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맡은 자리에서 그럭저럭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그 상태는 그대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오랑 시의 문들이 폐쇄되자 그들은 한 독 안에든 쥐가 되었으며 거기에 그냥 적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가령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같은 개인적인 감정도 처음 몇 주일부터 당장 모든 사람들 전체의 감정이 되었고, 공포심이 가세하면서 저 오랜 귀양살이 시절의 주된 고통거리가 되었다.

 

(가) 랑베르는 몹시 흥분해서 말했다. 그는 파리에 아내를 두고 온 것이었다. 정식 아내는 아니었지만 아내나 마찬가지였다. 시가 폐쇄되자 그는 곧 아내에게 전보를 쳤다. 처음에는 그저 일시적인 것이려니 하고 편지 왕래나 할 방도를 궁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랑의 동료 기자들은 자기들로서는 아무 방도가 없다고 말했고, 우체국에서는 상대도 하지 않았고, 도청의 한 여자 서기는 그에게 콧방귀를 뀌었다. 마침내 그는 두 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만사 순조로움. 곧 다시 봅시다.>라고 쓴 전보를 한 장 접수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얼마 동안이나 이 사태가 계속될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개장을 갖고 있었으므로 도청의 비서실장과 접촉할 수 있었다(직업이 기자이고 보니 여러가지 편의가 있었다). 자기는 오랑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일도 없고, 우연히 자기는 여기에 있게 되었고, 일단 나가서 격리 수용되는 한이 있더라도 어쨌든 퇴거를 허가해 주는 일이 마땅하리라고 그에게 말했다. 비서실장은 이에 대해서, 잘 알아듣겠으나 예외를 만들 수는 없다, 검토는 해 보겠지만 요는 사태가 중대한 만큼 선뜻 어떤 결정도 내릴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랑베르는 말했다. "나는 이 도시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마 그렇겠죠. 그러나 어쨌든 전염병이 오래 가지 않기를 피차에 바랄 뿐입니다"
결국 그는 랑베르를 위로하면서, 오랑에서 흥미있는 기사거리를 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무슨 일이건 간에 잘 살펴보면 반드시 좋은 면이 있는 법이라고 말해 주었다. 랑베르는 어깨를 으쓱 치켜 올렸다. 그들은 시가의 중심지에 도착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선생님. 저는 기사를 쓰려고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떤 여자하고 살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그 쪽이 더 어울리는 얘기가 아닙니까?"
어쨌든 그 쪽이 더 이치에 맞을 것 같아 보인다고 리유는 말했다. ···(중략)···
 "이건 그야말로 인도적인 문제입니다. 서로 마음이 잘 맞아서 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이러한 이별이 어떤 건지를 아마 선생님께서는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리유는 금방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도 그걸 잘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랑베르가 아내와 다시 만나게 되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다시 결합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바이지만, 포고와 법률이 있고 페스트가 있으니, 자기의 역할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니지요." 입맛이 쓰다는 듯이 랑베르는 말했다. "선생은 이해하지 못해요. 선생님 말씀은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선생님은 추상적이십니다." ···(중략)···
"아! 알겠어요." 랑베르가 말했다. "공적인 일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러나 공공 복지도 개개인의 행복으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나) 그 달 말경에, 우리 시의 고위 성직자 측에서는 집단 기도 주간을 설정함으로써 그들 특유의 방법으로 페스트와 싸우기로 결정했다. 대중 신앙심의 표시가 담긴 이 행사는 일요일에 페스트에 걸렸던 성(聖) 루가에게 드리는 장엄한 미사로 끝맺기로 되어 있었다. 그 기회에 파늘루 신부는 강론을 위촉받았던 것이다. ···(중략)···
 "오늘 페스트가 우리에게 닥쳐온 것은 반성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들이 벌벌 떠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주라는 거대한 곳간 속에서 가차없는 재앙은 짚과 낟알을 가리기 위해서 인류라는 밀을 타작할 것입니다. 낟알보다는 짚이 더 많을 것이며, 선민들보다는 버림받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행은 하느님이 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세상은 악과 타협해 왔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이 세상은 성스러운 자비 위에서 안식하고 있었습니다. 회개하는 것으로써 충분했고 모든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개라면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때가 오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회개를 하고 싶은 심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는 가장 쉬운 길은 그냥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이요,그 밖의 것은 하느님의 자비로 해결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그 연민의 얼굴을 보여 주시던 하느님께서도, 기다림에 지치고 실망하시어, 마침내 외면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광명을 잃고 우리는 바야흐로 오랫동안 페스트의 암흑 속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중략)···
"그렇습니다. 반성할 때가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일에 하느님을 찾아뵙기만 하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서너 번 무릎을 꿇는 것으로 여러분의 그 죄스러운 무관심에 대한 대가를 하느님께 갚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미지근하지는 않으십니다. 그처럼 드문드문 찾아뵙는 관계 정도로는 하느님의 넘쳐흐르는 애정을 만족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더 오래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이며, 그것만이 유일한 사랑의 방식입니다. 이리하여, 여러분이 찾아뵙는 것을 기다리다가 지치신 하느님은, 인류가 역사를 가진 이래 재앙이 죄 많은 모든 도시를 찾아들었듯이, 여러분에게도 찾아들게 하신 것입니다. 카인과 그 자손들이, 노아의 대홍수 이전의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 애굽의 왕과 욥, 그리고 또한 모든 저주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았듯이, 이제 여러분은 죄가 어떤 것인가를 알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시가 여러분과 재앙을 벽으로 둘러싸고 가두어 버린 그 날부터, 여러분은 그네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새로운 눈으로 모든 존재와 사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야, 마침내 근본적인 것에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중략)···
 "우리가 좀더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본다면 그것은 모든 고민 속에 가로놓인 저 영생의 황홀한 빛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확고하게 악을 선으로 변화시키는 신의 뜻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또 다시, 죽음과 고뇌와 아우성의 길을 통해서, 그 빛은 우리들을 본질적인 침묵으로 이끌어 가며, 모든 생명의 원천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광대무변한 위안입니다. 이 위안을 여러분에게 가져다 주고자 합니다. 부디 여러분은 이 자리에서 응징의 언사를 듣고 돌아가시는 데에 그치지 말고 여러분을 진정시키는 '말씀'도 잘 듣고 가시기 바랍니다."

 

(다) "그래도 선생님은 파늘루 신부처럼 페스트에도 그 것대로의 유익한 점이 있어서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한다고 여기고 계시겠죠!"
리유는 답답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이 세상의 모든 병이 다 그렇죠.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고통에 있는 것은 페스트에도 역시 있습니다. 하기야 몇몇 사람들을 위대하게 만드는 구실도 하겠죠. 그러나 그 병으로 해서 겪는 참상과 고통을 볼 때,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리유는 어조를 높였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타루는 그를 진정시키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좋습니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리유가 말했다. "한데, 내가 아까 한 말에 대해 아직 대답을 안 하였습니다. 잘 생각해 보셨나요?"
타루는 안락의자에서 좀 편안하게 고쳐 앉으면서 머리를 불빛 속으로 내밀었다.
"선생님은 신을 믿으시나요?"
질문은 역시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리유가 망설였다.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는 어둠 속에 있고, 거기서 뚜렷이 보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 그러는 것이 유별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된 지가 벌써 오래됩니다."
"좋아요." 타루가 말했다. "선생님 자신은 신도 믿지 않으시면서 왜 그렇게까지 헌신적이십니까? 선생님의 답변이 제가 대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늘에서 얼굴을 내밀지도 않은 채 의사는, 그 대답은 이미 했으며, 만약 어떤 전능한 신을 믿는다면 자기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을 그만두고 그런 수고는 신에게 맡겨 버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파늘루까지도 그런 식으로 신을 믿는 이는 없는데, 그 이유는 전적으로 자기를 포기하고 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며,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리유 자신도 이미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며 투쟁함으로써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 타루가 말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자신의 직업을 그렇게 보고 계시는군요?"
"대충은 그렇습니다." 의사는 다시 밝은 쪽으로 몸을 내밀면서 말했다.
 타루는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고 의사는 그를 보았다.
"그럼요." 그는 말했다. "아마 자존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시겠죠. 그러나 나는 최소한의 자존심밖에는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앞으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이 일들이 모두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당장에는 환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치료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반성할 것이고, 또 나도 반성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긴급한 일은 그들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나는 힘이 미치는 데까지 그들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그뿐이지요." ···(중략)···
"내가 이 직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나는 말하자면 그냥 막연히 택했지요. 직업이 필요했었고, 딴 직업이나 마찬가지로 괜찮은 직업이었고, 젊은 사람이 한 번 해볼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죠. 또 어쩌면 나 같은 노동자의 자식으로서는 특별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택하고 났더니 죽는 장면을 보아야만 했지요. 죽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아시나요? 어떤 여자가 죽는 순간에 '안돼!' 하고 외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나요? 나는 있어요. 그때 나는 절대로 그런 것에 익숙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때는 나도 젊었고, 해서 나의 혐오감은 세계의 질서 그 자체에 대하여 솟구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그 후 나는 한층 더 겸허해졌어요. 다만, 죽는 것을 보는 일에는 여전히 길들여지지 못한 채로요.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리유는 입을 다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입안이 마른 듯싶었다.
"결국은요?" 하고 타루가 나직하게 물었다.
"결국······" 의사는 말을 계속하려다가 타루를 물끄러미 보면서 또 주저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떠세요? 그러나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니 만큼, 아마 신으로서도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 주지 않는 편이 더 낫고, 신이 그렇게 침묵하고 있는 하늘만을 쳐다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 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릅니다.


▣분석 & 해설▣
  먼저 논제에서 쓸 것을 요구하는 것부터 살펴보자.
논제는 첫째, 제시문의 세 인물이 각각 역경에 대처하는 방식을 정리하고, 둘째, 그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자신의 인생관과 관련지어 비판적으로 논술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세 인물이 처해 있는 현실을 페스트가 창궐하고 있는 극한적 상황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지 페스트와 같은 상황을 맞닥뜨릴 수가 있단 말인지, 그 점부터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페스트가 창궐하는 상황이 사람이 잘 경험하기 힘든 극단적인 경우여서 상황의 전형성이 없다면 이 논제에 대한 대답은 결코 인간이 처할 역경 전반의 문제로 확대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논제부터가  인간은  때때로 극복하기 어려운 역경과 고통에 처한다‘고 하여 페스트라는 상황이 인간이 언제든지 조우할 수 있는 역경 일반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논제는 페스트에 대처하는 세 인물의 태도를 살펴봄으로써 이를 인간의 역경에 대처하는 방식 일반으로 확장 해석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때 주의할 것은 논술문을  페스트 자체에 대한 대처방식 문제로 국한하여 논한다거나, 페스트와 그 성격상 공통점이 부족한 인간의 문제와 연관짓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우선 논제의 첫 번째 질문, 즉 제시문의 세 인물이 각각 역경에 대처하는 방식을 정리해 보자. (이것은 반드시 정리해야 한다. 제시문의 내용을 재구성하는 것은 고전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평가하기 위함이고, 논의가 제시문의 맥락과 무관한 추상화된 내용으로 일관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제시문 (A) 는 페스트가 창궐한 오랑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진 세 제시문에는 이에 대처하는 세 인물의 생각과 태도가 나타난다. (가) 에서  취재차 잠시 들렀던 기자 랑베르는 개인의 행복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그는 오랑시의 재난상황으로부터 탈출하기를 바란다. 그는 자신이 ‘기사를 쓰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어떤 여자하고 살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 같‘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이다.
   이방인인 랑베르와 달리 오랑시의 주민인 (나)의 신부 파늘루나 (다)의 의사 리유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상황을 인식하고 이에 대처한다. 그 과정에서 두 인물의 의식과 태도는 대조된다. 파늘루 신부는 구체적인 고통의 현상보다 그 근본적 원인이나 의미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가 보기에 페스트 사태는 악과 타협하며 살면서 적당히 형식적으로 회개해온 인간에게 내린 처벌이다. 그러면서도 페스트의 재난을 통해서 하느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영생할 수 있는지 ‘황홀한 빛’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자신의 설교에서 ‘응징의 언사’만이 아니라 여러분을 진정시키는 ‘말씀’도 듣고 갈 것을 종용하고 있다. 이에 반해 의사 리유는 무신론자이고 지극히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페스트가 들끓은 상황 그 자체를 중시하고 의사로서 구체적으로 대응하고자 한다. 그는  ‘페스트에도 그것대로의 유익한 점이 있어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하는 식의 초월적 관념론에 대하여 역정을 내며 페스트로 인해서 겪는 참상과 고통을 볼 때,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라고 쏘아붙이며 가장 긴급한 일은 그들을 치료하는 것‘이며 신(神) 또한 ‘하늘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서 죽음과 싸워주기를 더 바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논제의 다음 질문은 세 사람의 사고방식을 자신의 인생관과 관련지어 비판적으로 논술하는 것이다. 우선, 기자 랑베르의 개인주의, 신부 파늘루의 재난 사태에 대한 종교적 의미부여와 인간의 회개 종용, 그리고 의사 리유의 실천주의 가운데 바람직한 태도로 판단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기자 랑베르는 기자로서의 편의를 재난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도청의 비서실장과 접촉하는 일에만 써먹는, 신분의 역할을 망각한 자이므로 그의 대처방식을 자신의 인생관과 결부시켜 정당화하기란 부담스럽다. 이에 비해 신부와 의사 리유의 대처방식은 각자의 신분이나 직업에 충실한 면모를 보인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그리고 각각의 대처방식은 나름대로 의의와 한계를 보인다. 신부의 대처방식은 현실에 대한 과학적 대응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사태를 냉정하게 직시하고 해결하는 일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의사 리유의 실천적 대응은 현실적인 처방이긴 하지만, 그의 대처방식은 직업의식의 발로일 뿐으로, 상황의 원인과 나아갈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 것을 아니라는 점에서는 문제가 있다. 여기서  논제가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페스트 사태를 인간이 때때로 부딪치는 ‘극복하기 어려운 역경과 고통’이라는 훨씬, 일반화된 맥락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이점에서 논술문의 서론은 오늘날 인류가 처한 역경을 나열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닥쳐온 역경과 고난의 상황에서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지 기자 랑베르나 신부 파늘루, 그리고 의사 리유가 취한 대처방식의 양상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인간들이 겪어온 그 숱한 역경과 고통은 어떤 한 사람만의 대처방식으로 극복되어온 것이 아니라, 이끄는 지도자가 있고, 지도에 따라 실천하는 다수가 있는가 하면, 여러 사람들이 내놓은 처방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해서 문제를 더 효율적으로 해결하기도 했다는 점에 착안하자. 그렇다면 위 제시문에 나타난 세 사람 어느 한 사람만의 대처방식만이 절대적으로 좋다고 취사선택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이른다. 기자 랑베르조차도 좀 낮 두껍긴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사실 그처럼 생존본능에만 이끌리는 존재가 많다는 냉엄한 사실은 안다면 좀더 차분하고 냉정하게 세 인물들을 평가하여 역경과 고통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자세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3. 역사와 허구 속의 인간형들


◈< 문제>◈
 아래 예시문은 「맹자(孟子)」의 「만장(萬章)」편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글에 서술된 세 인물은 각기 독특한 고전적 덕목을 갖고 있지만 현대적 관점으로 보면 보완되어야 할 점도 없지 않다. 이들의 덕목이 갖는 의의와 한계를 대비적으로 활용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점 하나를 제시하고 그것을 해결하기에 가장 적합한 현실적 인간상을 구상하여 논하시오. (’98 성균관대  정시)

  1. 백이(伯夷)는 눈으로는 나쁜 빛을 보지 아니하며 귀로는 나쁜 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섬길 만한 군주가 아니면 섬기지 아니하고 다스릴 만한 백성이 아니면 다스리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이 다스려지면 나아가고 혼란하면 물러나서, 옳지 못한 정치가 나오는 곳과 옳지 못한 백성들이 머물러 사는 곳에는 차마 거주하지 못하였으며, 예(禮)를 모르는 향인(鄕人)들과 함께 거처하는 것을 마치 관복(官服)과 관모(冠帽)를 갖추고 더러운 길바닥에 앉은 것처럼 생각했다. 주(紂)가 다스리는 시대가 되자 북해(北海)의 바닷가에 거주하면서 천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므로 백이의 기풍을 들은 자들 가운데 몰지각한 지아비는 분별력을 갖게 되고 나약한 지아비는 뜻을 세우게 되었다.
  
  2.이윤(伊尹)은 『어떤 군주인들 섬길 수 없겠으며, 어떤 백성인들 다스릴 수 없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세상이 다스려져도 나아가고 혼란해도 나아갔다. 그래서 『하늘이 이 백성을 낸 뜻은 먼저 안 사람으로 하여금 나중에 아는 사람을 깨우치게 하신 것이며, 먼저 깨달은 자로 하여금 나중에 깨달은 자를 깨우치게 하신 것이다. 나는 하늘이 낸 백성 중에 먼저 깨달은 자이니, 내가 장차 이 도(道)로써 백성을 깨우치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천하의 백성 중에 필부필부(匹夫 匹婦)라도 요순(堯舜)의 혜택을 입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를 밀쳐서 도랑 속으로 빠뜨린 것처럼 생각하였으니, 이것은 천하의 중책을 스스로 맡은 것이다.  

 

  3. 유하혜(柳下惠)는 더러운 군주 섬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작은 벼슬을 사양하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아가면 현명함을 숨기지 아니하여 반드시 그 도리에 맞게 하였으며 버림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고 곤궁을 당해도 걱정하지 않았다. 예(禮)를 모르는 향인(鄕人)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유유히 차마 떠나지 못하여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니, 비록 네가 내 옆에서 옷을 함부로 걷어올리고 벗어버린다 한들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유하혜의 기풍을 들은 자들 가운데 옹졸한 지아비는 관대해지고 야박한 지아비는 돈독해졌다.  


 ▣분석 & 해설▣
  이 논제는 우선 세 인간형의 덕목이 갖는 의의와 한계를 분석할 수 있어야 올바른 논리의 전개가 가능하게 설정되어 있다. 그 다음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무엇으로 제시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인간형들의 미덕을 중심 모델로 삼을 것인가가 결정될 것이다.  
  백이는 도덕적으로 청렴하지만 사회문제의 적극적인 해결에는 부적합한 면이 있고, 이윤은 소명의식은 있지만, 선민(選民)의식과 시혜(施惠)의식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유하혜는 평등주의자이고 인간미가 돋보이지만 가치기준이 뚜렷하지가 못하다.
  그 다음 사회의 문제점은 지엽말단적인 사례보다는 전형적인 사례로 제시되면 좋다. 물론 제시된 사례는 구상해 낸 인물이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구상화된 인물이 모조품이 아닌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 보인다.

 

 

 다음 문제를 보자.
 
◈< 문제>◈
다음 제시문은 루쉰(魯迅)의 ‘아Q정전(阿Q正傳)’에서 발췌한 것이다. 주인공의 사고와 행동에 드러나는 모순을 기술하고, 이를 통해 인간이 지향해야 할, 역사적 존재로서의 진실한 삶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1천 4백자 내외로 논술하라.(1999년 서강대 인문사회계열/정시)

 <제시문>
(가) 아Q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을 나중에 하나하나 다 입 밖으로 말했기 때문에 아Q를 놀리던 사람들은 그에게 일종의 정신적인 승리법이 있다는 것을 거의 다 알게 되었고, 그 뒤로는 그의 노란 변발을 잡아챌 때마다 사람들이 먼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Q, 이건 자식이 애비를 때리는게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다 네 입으로 말해봐. 사람이 짐승을 때린다고!"
 아Q는 두 손으로 자신의 변발 밑동을 움켜잡고 머리를 비틀면서 말했다. "벌레를 때린다. 됐지? 나는 벌레 같은 놈이다······ 이제 놔 줘!"
벌레가 되었어도 건달들은 놓아주지 않았다. 전과 똑같이 가까운 아무데나 그의 머리를 대여섯 번 소리나게 짓찧었고, 그런 뒤에야 만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그들은 이번에는 아Q도 꼼짝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십초도 지나지 않아 아Q도 만족해 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그는 자기가 자기 경멸을 잘하는 제일인자라고 생각했다. `자기 경멸'이라는 말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은 `제일인자'이다. 장원(壯元)도 `제일인자'가 아닌가?
"네까짓 것들이 뭐가 잘났냐!?"
 아Q는 이처럼 여러가지 묘법을 써서 적을 극복한 뒤에는 유쾌하게 술집으로 달려가 술을 몇 잔 마시고 또 다른 사람들과 한바탕 시시덕거리고 한바탕 입씨름을 하여 또 승리를 얻고, 유쾌하게 사당으로 돌아와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잠이 들었다. 돈이 생기면 그는 야바위 노름을 하러 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아Q는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그 속으로 끼어 들었다. 목소리는 그가 제일 컸다.
"청룡(靑龍)에 사백!"
  "자― 열어요― 얏!" 물주가 상자 뚜껑을 열고서 역시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노래를 읊어댔다. "천문(天門)이군요― 각(角)은 텄고요― 인(人)이랑 천당(穿堂)은 아무도 안 걸었고요―! 아Q 돈은 가져오고요―!"
"천당에 백― 백오십!"
아Q의 돈은 이렇게 노래를 읊는 사이에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는 다른 사람의 허리춤으로 점점 옮겨갔다. 그는 결국 거기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뒤쪽에 서서 구경하며 자리가 파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애를 태우고 그런 뒤에 못내 아쉬워하며 사당으로 돌아갔고, 다음날에는 눈이 부은 채 일하러 갔다.
그러나 참으로 `인간 만사는 새옹지마'인 것인지, 아Q는 불행히도 딱 한번 이기기는 했는데 도리어 더 낭패를 보았다.
그것은 웨이주앙(未莊)에서 마을 제사를 지내는 날 밤이었다. 그날 밤에는 관례대로 연극을 했는데, 무대 왼쪽에서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노름판이 잔뜩 벌어졌다. 연극판의 징소리와 북소리가 아Q의 귀에는 십리 바깥에서 나는 것 같았고 아Q에게 들리는 것은 오직 물주의 노랫소리 뿐이었다. 그는 따고 또 땄다. 동전이 작은 은전으로 바뀌었고, 작은 은전이 큰 은전으로 바뀌었으며, 나중에는 큰 은전이 두둑이 쌓였다.
그는 대단히 신바람이 났다.
"천문에 두 냥!"
누가 누구와 무엇 때문에 싸움을 시작했는지 그는 몰랐다. 욕하는 소리, 때리는 소리, 발걸음 소리,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한바탕 소란이 지나고 그가 간신히 일어나 보니 노름판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으며, 몸이 여기저기 아픈 걸로 보아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몇 번 당한 것 같았다. 몇몇 사람들이 이상스러워 하며그를 쳐다 보았다. 그는 넋을 잃고 사당으로 돌아왔는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기의 은전 뭉치가 없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제삿날 벌어지는 노름판은 대부분 이 마을 사람들이 아니니 어디 가서 재산을 찾는단 말인가?
하얗게 반짝이는 은전더미! 더구나 자기 것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자식이 가져간 셈치자고 해도 여전히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자기를 벌레라고 해 보아도 역시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는 이번에도 실패의 고통을 조금 느꼈다.
그러나 그는 금세 패배를 승리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자기 뺨을 힘껏 연달아 두 번 때렸다. 얼얼하게 아팠다. 때리고 나서 마음을 가라앉히자 때린 것이 자기라면 맞은 것은 또 하나의 자기인 것 같았고, 잠시 후에는 자기가 남을 때린 것 같았으므로 ─ 비록 아직도 얼얼하기는 했지만 ── 만족해 하며 의기양양하게 드러누웠다.
그는 잠이 들었다.

(나) 아Q의 귀에도 혁명당이라는 말은 진작부터 들려오던 터였고, 올해는 혁명당을 죽이는 것을 제 눈으로 구경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혁명당은 곧 반역이며 반역은 곧 자기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껏 `깊이 증오하고 극히 원통'해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것이 백리 사방에 이름이 높은 거인(擧人) 어른을 그토록 겁먹게 하였으니, 그는 자기도 모르게 `동경'을 품게 되었고, 더구나 웨이주앙 사람들의 당황한 표정에 아Q는 더욱 유쾌해졌다.
  "혁명도 좋은 거구나."라고 아Q는 생각했다. "그 개같은 놈들을 혁명해 버리자 .혐오스러운 놈들! 가증스러운 놈들!······ 그래, 나도 혁명당에 항복해야지."
 아Q는 요즈음 돈이 궁해서 아마 다소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빈 속에 낮술을 두 잔 마셨는지라 더욱 빨리 취해서 한편으로 생각하고 한편으로 걷다 보니 다시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어찌 된 것인지 갑자기 자기가 혁명당이고 웨이주앙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포로인 것 같았다. 그는 득의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떠들었다.
"반역이다! 반역이다!"
웨이주앙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불쌍한 눈빛은 아Q가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보자 그는 유월에 빙수를 마신 것처럼 속이 시원해졌다. 그는 더욱 신이 나서 걸어가면서 고함을 질렀다.
"좋아,······. 원하는 것은 전부 다 내 것, 마음에 드는 여자도 전부 다 내 것.
뚜뚜, 창창!
후회한들 어쩌리, 술김에 잘못 알고 쩡 아우들 목을 쳤네.
후회한들 어쩌리, 아아아······
뚜뚜, 창창, 뚜, 챙그랑창!
내 손은 쇠채찍을 들어 너를 때린다······"
짜오 씨 댁의 남자 두 분과 두 사람의 친척이 대문 앞에 서서 혁명을 논하고 있었는데 아Q는 그것도 보지 못하고 머리를 꼿꼿이 쳐든 채 노래를 하면서 지나쳐갔다.
"뚜뚜······"
"라오Q(老Q)" 짜오 노어른이 겁먹은 태도로 맞이하면서 낮은 소리로 불렀다.
"창창," 아Q는 자기 이름에 `라오(老)'자가 붙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므로 자기하고는 무관한 어른 말이려니 여기고 노래만 불렀다.
"뚜, 창. 챙그랑창,창!"
"라오Q"
"후회한들 어쩌리······."
"아Q!" 수재가 할 수 없이 직접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Q는 그제야 멈춰서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뭐요?"
"라오Q······ 요즘······" 짜오 노어른은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요즘,······ 벌이가 좋은가?"
벌이가 좋냐구요? 물론이죠. 원하는 것은 전부······"
"아······ Q형, 우리같이 가난한 동무들은 괜찮겠죠······" 짜오바이옌이 조심스럽게 말했는데. 혁명당의 속셈을 떠보려는 것 같았다.
"가난한 동무들? 당신은 나보다 돈이 많잖아."라고 말하면서 아Q는 가 버렸다.
사람들은 낙심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짜오 노어른 부자는 집으로 돌아가 밤에 등불을 켤 때까지 의논했다. 자오바이옌은 집으로 돌아가 허리춤에서 전대를 끌러내려 자기 처에게 주면서 상자 밑에 숨겨 놓으라고 했다.

(다) "반역이라? 재미있구나······ 하얀 투구에 하얀 갑옷의 혁명당이 온다. 청룡도에 쇠채찍, 폭탄, 총, 삼첨양인도(三尖兩刃刀), 구겸창(鉤鎌槍)을 들고서 사당 앞을 지나가며 부른다. `아Q'같이 가세 같이 가! 그래서 같이 간다······
그때가 되면 웨이주앙 사람들은 꼴 좋겠지. 무릎을 끓고 부르겠지, `아Q, 살려줘!' 누가 들어준대? 제일 먼저 죽여야 하는건 샤오디와짜오 노어른이야, 그리고 수재도, 그리고 가짜 양놈도······ 몇 놈이나 남겨둘까? 왕 털보는 원래 남겨둬도 되겠지만 그래도 안돼...
물건은······ 곧장 들어가서 상자를 열면 원보(元寶: 은으로 말굽 모양같이 만든화폐)에 은화, 옥양목 셔츠······수재 마누라의 영파(寧波)침대부터 사당으로 옮기고,그밖에 치앤씨 댁의 탁자랑 의자를 놓고······ 아니 짜오씨 댁 것을 쓰자. 나는 손대지 말고 샤오디를 시켜 옮기자, 빨리 옮겨야지 안 그러면 따귀를 때릴 테다...
짜오쓰천의 누이동생은 너무 못생겼어. 쪼우치댁의 딸은 젖비린내 나고. 가짜 양놈의 마누라는 변발도 없는 남자랑 잤으니. 흥, 좋은 물건이 아냐! 수재 마누라는 눈까풀에 흉터가 있지······ 우마는 못본지 오래 됐는데, 어디 있나 몰라. 아깝게도 발이 너무 크지."
 아Q는 미처 생각을 매듭짓기도 전에 벌써 코를 골았다. 넉 냥짜리 초는 아직 반치도 채 타지 않았고 붉은 빛이 그의 벌려진 입을 비추었다.
"어어!" 아Q는 갑자기 큰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들어 황망히 사방을 둘러보더니 넉냥자리 초가 보이자 다시 머리를 처박고서 잠들어 버렸다.
 다음날 그가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거리로 나가 살펴보니 모든 것이 다 전과 똑같았다.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고, 생각해보려 해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뭔가 생각이 떠오르는 것 같았고,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정수암(靜修庵)에 도착했다.
암자는 봄에도 그랬던 것처럼 고요했으며 흰 벽에 검은 문이었다. 그가 잠시 생각해보다가 다가가서 문을 두드리자 개가 안에서 짖었다. 그는 급히 벽돌 조각을 몇 개 집어들고서 다시 좀더 힘껏 두드렸다. 검은 문에 곰보 자국이 숱하게 생기고 나서야 누군가 문을 열기 위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Q는 얼른 벽돌 조각을 움켜쥐고 다리를 떡 벌리고 서서 검은 개와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암자 문이 빠끔이 열렸을 뿐 검은 개는 뛰쳐나오지 않았다. 들여다보니 늙은 비구니 한사람만 있었다.
"자네 왜 또 왔나?" 그녀는 크게 놀라며 말했다.
"혁명하려고요······알아요······" 아Q는 아주 모호하게 말했다.
"혁명 혁명, 벌써 혁명했잖아······ 자네들이 우리를 어떻게 혁명한다는 거야?" 늙은 비구니가 두 눈을 붉히며 말했다.
"뭐라고요?······" 아Q는 의아했다.
"그 수재하고 가짜 양놈이!"
아Q는 너무 뜻밖이어서 자기도 모르게 대경실색을 했다. 늙은 비구니는 그의 예기(銳氣)가 사라진 것을 보자 날쌔게 문을 닫았다. 아Q가 다시 밀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고, 다시 두드려보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분석 & 해설▣
   이 작품은 청조 말기, 신해혁명을 전후한 봉건사회를 ‘아Q’라는 날품팔이 노무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가 사는 한 지방을 중심으로 그 지방의 권력가와 그 가족, 그리고 연고자들의 권세에 얽힌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인물들의 혁명에 대한 불안한 모습과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되는 아Q의 허무한 인생이 나타나 있다.  
   제시문으로 출제된 부분에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기기만으로 살아가는 주인공 아Q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즉,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을 냉철하게 보지 못하고 항상 자기만족으로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가는 이른바 ‘정신 승리법’이 그것이다. 혁명도 주인공 아Q에게는 역사적인 의미에서의 그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 승리법을 확인해 보는 잡다한 일상사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참고로 말하면 작가는 아Q의 정신 승리법을 통해서, 민족적인 위기에 처했으면서도 대국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구시대의 지식인과 중국민들의 우매함을 그리고자 했다.
  ‘중국은 흘러드는 모든 강물에 소금을 타는 바다와 같다(China is sea which salts all the rivers that flow into it.)’는 말이 있다. 근대 이전 중국의 이른바 중화주의, 철저한 자문화우월주의, 흘러드는 외래 문화도차도 중화의 소금을 타고 중화화(中華化)하는 중국 중심주의는 봉건시대에는 유효한 것이었다. 그러나 훨씬 뛰어난 정치 제도의 전통을 가졌으며 과학기술과 신식무기로 무장한 서구열강과 서구의 문물을 먼저 배운 제국주의 일본 앞에 중국이 노출되고 대비되면서 중화는 자국의 문호(文豪)에 의해 아Q로 희화화되고 말았다.
   아Q는 동네 건달들에게서 수모를 당하면서도 어이없는 자기합리화를 통해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아Q는 동네 건달과 같은 강자에게는 한없이 비굴하면서도 정수암 젊은 여승과 같은 약자에게는 한없이 위세를 부리는 인물이다. 그에게 혁명[신해혁명]은 중국 봉건왕조를 무너뜨리는 역사적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괴롭히는 건달들에게 복수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는 처음에는 혁명당이 해서는 안 될 반역이라 생각하다가 존경해마지 않는 거인어른[아Q가 마을을 떠났다가 일을 도와 준 적이 있는 집의 어른으로, 그는 명청(明淸) 시대 향시에 합격한 적이 있음]이 혁명당을 피해 웨이주앙[미장] 마을로 피난을 왔다는 사실을 알고 “혁명도 좋은 거구나.”고 생각하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그는 곧 혁명당이 되어 웨이주앙의 “그 개 같은 놈들을 혁명해 버리”고 동네 부자들의 금은보화를 마음대로 약탈하고 예쁜 여자들을 마음대로 골라잡겠다는 꿈을 꾼다.
   아Q와 같은 인간형은 < 아Q정전>외 다른 소설작품에서도,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전형성이 있다. 윤흥길의 <아홉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의 주인공 ‘권씨’가 자신을 합리와 하는 방식은  아Q와 닮은 점이 있다. 그 역시 자신이 불리한 처지에 놓일 때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냉철하게 반성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안동권씨 가문의 후예이며 자신이 대학 나온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거나 여러 켤레의 구두에 광을 내는 것으로 권씨다운 ‘정신승리법’으로 현실과 자신을 기만하며 살아간다. 자신이 화랑의 먼 후손이라는 가문의식에 젖어  객관적으로 변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줄 모르는 김동리의 <화랑의 후예>의 주인공 ‘황진사’가 또한  아Q 같은 부류이다.
   위에서 작가 노신은  아Q를 통해서 , 민족적인 위기에 처했으면서도 대국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구시대의 지식인과 중국민들의 우매함을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는데, 이 점이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내용이기도 하다. 당시 중국의 청왕조가 서구 열강과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 앞에서 허둥댔던 모습은 세계사의 진행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때까지 대국의식, 중화 의식[중화사상은 이전 한족이 세운 왕조 중심의 중화에서 청왕조를 포함하는 중화사상으로 이어짐]에 젖어 세계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아Q의 모자라는 현실 대처방식으로 형상화됐던 것이며, 그러니까 찬란했던 중화는 아Q의 ‘정신승리법’으로 위축되고 왜곡되고 한없이 희화화되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땠던가? 한족의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조선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족의 중화가 우리나라로 옮겨왔음을 말하면서 스스로 ‘소중화’라 일컫기에 이르렀다. 청나라는 청나라대로, 당시 조선은 조선대로 재해석한 ‘중화’로 동시대에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맞이했다면, 우리 조선에게도 아Q는 있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대원군이 아Q였으며 황진사가 아Q였고 ‘오두가단(吾頭可斷) 차발불가단(此髮不可斷)’이라  외쳤던 딸깍발이 선비들이 아Q가 아니었을까.
   현실적으로 대응할 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내가 네보다는 우월함을 고집하고자 할 때는 왜곡된 자존심, ‘정신승리법’이라는 극복의 기제(機制)가 작동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Q가 도둑으로 몰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면서도 사람들에게서 동정 받지 못하는 것과  등가적인 결과에 이를 뿐이다. 아Q의 이야기는 물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바 크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면서 역사적 존재이다. 우리 각자는 오늘 역사의 한 순간을 살고 있으며,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에 동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만의 일상은 나를 떠나서 내가 속한 집단, 그 집단들로 이루어진 국가. 그리고 국가를 둘러싼 세계사와 연결되어 있다. 오늘 내가 속하는 직장이나 단체에서 내가 한 발언이나 행동은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 나의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촛불을 들고 거리 시위를 했든, 아니면 정당한 공권력을 행사하기에 단호하지 못한 정부를 비판했든 간에 그것은 지금 우리사회가 세계사 가운데서 놓여 있는 위치에 대한 냉철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했어야 했다.  아Q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4. 삶의 태도와 현대 사회



 ◈< 문제>◈
  ※ 다음 세 글에 나타난 삶의 태도를 밝히고,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갖는 의의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사례를 들어 논술하시오. (2001 전남대 정시/1,200±100)

 가) 자공(子貢)이 남쪽의 초(楚)나라를 여행하고 진(晉)나라로 돌아오려고 한수(漢水) 남쪽을 지나다가 한 노인이 마침 밭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노인은 굴 속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에 물을 담아내어 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애써 열심히 일했지만 그 효과는 아주 적었다.
자공이 말했다. "여기에 기계가 있으면 하루에 백 이랑까지도 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힘을 적게 들이고도 효과는 큽니다. 노인께선 그렇게 해보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노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 말했다. "어떻게 하는 거요?"
자공은 대답했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기계를 만드는데, 뒤쪽은 무겁게 하고 앞쪽은 가볍게 합니다. 그러면 물을 퍼 올리는 것이 콸콸 넘치도록 빠릅니다. 그 기계를 두레박이라고 합니다."
밭일을 하던 노인은 순간 낯빛을 붉혔다가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내 스승에게 들었소만, 기계 따위를 갖게 되면 그 기계로 말미암은 일이 반드시 생겨나고, 그런 일이 생기면 기계에 얽매이는 마음이 생겨나는 법이라오. 그런 마음이 있게 되면 곧 순진결백(純眞潔白)한 본래 그대로의 것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이 없어지면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게 되오. 정신과 본성이 안정되지 않은 자에겐 도(道)가 깃들이지 않소. 내가 두레박을 몰라서 쓰지 않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 쓰지 않을 뿐이오."

나) 점심을 먹고 잠시 낮잠을 자던 사람이 깨자마자 고개를 쳐들고 "무슨 뉴스 없소?" 하고 물어 본다. 마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초라도 서고 있는 것같다. 어떤 사람은 30분마다 깨워달라고 하고 잠을 자는데 이 사람도 같은 생각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깨워준 답례로 자기의 꿈 얘기를 해준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뉴스는 아침 식사만큼이나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된다. 그는 "이 세상 어디서 그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든 상관없으니 무슨 새로운 일이 있었으면 꼭 좀 알려다오" 하는 태도로 커피와 롤빵을 들면서 신문을 읽는다. 그가 읽고 있는 뉴스는 와치토 강변에서 어떤 사람이 싸우다가 눈이 빠진 사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 세상이라는 어둡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동굴에 살고 있으며, 그 자신 역시 퇴화되어서 흔적만 남은 눈을, 그나마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하고 있다.
나는 우체국이 없어도 별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다. 우체국을 통해 중요한 연락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좀 비판적으로 말하면, 내가 지금까지 받은 편지 중에서 우표 값이 아깝지 않은 것은 한두 통밖에 없었다. '페니 우편제도'는 "1페니 줄 테니 자네 생각을 알려 주게" 하고 농담하던 것이 이제 실제로 1페니를 내게 된 제도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는 신문에서도 기억해 둘 만한 뉴스를 읽은 적이 없었다고 확신한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당했다든가, 살해되었다든가, 사고로 죽었다든가, 어떤 집이 불에 타고, 어떤 배가 침몰되고, 어떤 증기선이 폭발했다든가, 어떤 소가 서부 철도에서 기차에 치이고, 어떤 미친 개가 죽임을 당했다든가, 겨울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든가 하는 따위의 신문 기사는 두 번 읽을 필요가 없다. 한 번이면 충분하다. 원리를 알면 됐지 구태여 수많은 사례와 응용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철학자에게 뉴스라는 것은 모두 하찮은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을 편집하거나 읽는 사람은 차나 마시고 있는 늙은 부인네들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깃거리에 걸신들린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는 것같다. 듣자하니 얼마 전 어느 신문사 사무실에서는 방금 도착한 해외 뉴스를 알려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통유리 몇 장이 깨져 나갔다고 한다.
뉴스란 도대체 무엇인가? 새로운 것보다는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더 중요한가. 위(衛)나라의 대부 거백옥(據伯玉)은 공자(孔子)에게 사람을 보내 그의 근황을 물었다. 공자는 사자(使者)를 자기 옆에 앉히고 이렇게 물었다. "그대의 주인은 요즘 무엇을 하시는가?" 사자는 공손히 대답했다. "저의 주인께서는 자신의 허물을 줄이려고 하시지만 여의치 않사옵니다." 사자가 간 다음에 공자는 말했다. "훌륭한 사자로다. 참으로 훌륭한 사자로다."
때때로 사람들은 고전 연구가 더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에 밀려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탐구자는 그것이 어떤 언어로 씌어졌든 얼마나 오래 되었든 항상 고전을 연구할 것이다. 고전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고귀한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전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신탁이며, 그 안에는 가장 현대적인 물음들에 대한, 아폴로 신의 신탁이나 제우스 신의 신탁도 밝히지 못한 해답들이 들어 있다. 고전 연구를 그만 두는 것은 자연이 낡았다고 해서 자연 연구를 그만 두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달갑게 여기지 않는 전기 회사에 매여 있다. 나는 전기를 적게 사용함으로써 거기에 덜 매이려고 노력한다. 일을 하면서도 나는 가능한 한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농부로서의 나는 일을 대부분 말[馬]을 이용해서 하며, 작가로서의 나는 연필이나 펜으로 종이에 글을 쓴다.
내 아내는 30여 년 전에 구입해서 지금도 잘 작동하고 있는 로얄 스탠다드 타자기로 내 글을 쳐준다. 타자를 치면서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가장자리에 조그맣게 표시를 한다. 아내는 나의 가장 훌륭한 비평가인데, 그것은 나의 습관적인 실수나 약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또 무엇을 써야할 지를 잘 알고 있으며, 어떤 때는 심지어 나보다도 더 잘 안다. 나는 우리가 기분 좋게 잘 돌아가는 문학의 가내공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지금까지 꽤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사면 많은 것이 개선될 수 있다고 나에게 말해 왔다. 내 대답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훌륭한 이유가 있다.
나는 작가로서의 내 일이 노천 탄광에서 나오는 석탄에 직접적으로 의지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가 싫다. 글을 쓰는 나의 행위가 자연을 약탈하는 일에 연루되어 있다면 어떻게 양심적으로 그에 반대하는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같은 이유로 나에게는 전깃불이 필요 없는 낮 시간에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전기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컴퓨터 제조 회사들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힘들게 농사 일을 하고 있거나 농사를 망쳐버린 사람들에게 값비싼 새 장비를 사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도록 유혹하는 광고들을 보아 왔다. 책이 필요한 공립학교에 컴퓨터를 들여놓게 한 그들의 광고 술책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미래에는 컴퓨터가 텔레비전만큼 보편화되리라는 사실이 내게는 감명을 주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 나는 컴퓨터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즉 평화, 경제적 정의, 생태계의 건강, 정치적 정직성, 가족과 사회의 안정, 그리고 그 밖의 훌륭한 일들에 우리를 한 걸음도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컴퓨터는 나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할까? 우선 나는 지불 능력 이상으로, 또 달갑지 않은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 이상으로 돈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돈 문제만이 아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기술상의 혁신은 항상 '낡은 모델'을 버릴 것을 요구하는데, 이 경우 '낡은 모델'은 로얄 스탠다드 타자기만이 아니라 나의 비평가요 가장 가까운 독자이며 동료인 아내까지도 포함한다. 즉 대체되는 것은 물건만이 아니라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기술 혁신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기술적으로 현대적인 작가가 되고자 한다면 나는 내가 의지하고 소중히 여기는 관계들을 희생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컴퓨터를 갖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어느 누구라도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연필로 쓰는 것보다 더 잘 쓰거나 더 쉽게 쓸 수 있다고 믿지 않으며, 그런 생각이 불쾌하기까지 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단테의 작품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작품을 쓰는 데에 컴퓨터를 사용했고 이 뛰어난 점이 분명히 컴퓨터의 사용 때문이라면, 그때는 나도 컴퓨터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말하겠다. 그래도 컴퓨터를 사지는 않을 테지만.

 

▣분석 & 해설▣
  (가)는 <장자(莊子)> 외편 ‘천지(天地)’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 대목은 각 종 논술시험이나 교재에서 즐겨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장자>의 이 대목이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장자가 살았던 그 당시에 벌써 기계와 인간에 대한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졌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어쩌면 오늘날 기계 문명 시대를 예견이라도 한 듯한 ‘노인’의 말이 바로 어제 어떤 일간지의 칼럼에서라도 나온 듯 생생한 목소리로 들린다. "(···) 기계 따위를 갖게 되면 그 기계로 말미암은 일이 반드시 생겨나고, 그런 일이 생기면 기계에 얽매이는 마음이 생겨나는 법이라오. 그런 마음이 있게 되면 곧 순진결백(純眞潔白)한 본래 그대로의 것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이 없어지면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게 되오.” 노인이 이 말은 현대 서양 철학에서 인간 소외 현상을 말할 때 들 수 있는 예와 다르지 않다. 기계문명 시대, 그 기계 문명의 최첨단인 디지털 기기의 시대, 그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루 아니 한시라도 기계가 옆에 없으면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한다. 집에 핸드폰을 두고 등교한 하루가 얼마나 불안한지 경험한 학생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쯤 무슨 메시지가 왔는지 궁금해서 하루 종일 공부가 안 되고 당장 스팸 메일이라도 받아야 지금 이 시간과 이 공간이 낯설지 않고 편안해진다. 이거야말로 노인이 말한 ‘기계에 얽매이는 마음’이며 이 이 기계의존성으로 인해 사람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순진결백(純眞潔白)한 본래 그대로의’ 마음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언제부턴가 인간은 기계에 일을 전적으로 맡기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사고하는 데에 불안과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컴퓨터 자판으로 글쓰기에 길이든 작가들은 때로 자기가 작품을 쓰는지 컴퓨터 자판이 글을 쓰는지 헷갈린다고도 한다. 그래서 아직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만년필에 새 잉크를 채우고 앉은뱅이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육필로 원고지에 글을 한 칸 한 칸 채우는 작가들이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지도 모른다. 물론 기계 사용을 전적으로 거부하긴 힘들 수도 있다. <장자>에 나오는 저 노인은 아주 최소한의 기계장치인 ‘두레박’조차도 사용하기를 거부했지만, 오늘날 저 정도로까지 기계를 멀리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기계가 인간을 가혹한 노역에서 해방시켜 준 공적까지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간디가 왜 물레를 돌려 옷을 만들 것을 당시 인도인들에게 종용했는지 그 의미를 새겨볼 필요가 있다. 간디는 거대한 기계가 인간을 예속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인간적 규모의 물레, 인간의 소외시키지 않은 최소한의 기계로서 물레 사용을 말한 것이다. 물론 간디에게 물레의 사용은 거대한 기계를 공장에 설비하고 임노동자들을  착취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한 방편이었지만. 기계가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을 경계한 그의 기본적인 생각은 기계문명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암시하는 바가 크다.

   (나)는 19세기 미국의 뛰어난 저술가인 헨리 소로우(Henry D. Thoreau)의 <월든>(Walden)의 일부를 발췌하고 윤문한 것이라고 대학측에서 밝히고 있다. 글쓴이는 현대인들이 시시각각 쏟아지는 뉴스에 신경을 과도하게 쓰며, 새로운 뉴스를 알고자 안달한다고 하면서, ‘새로운 것보다는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 것’, ‘고전’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매스미디의의 발달로 과도한 정보와 뉴스로 넘쳐나고 있다. 글쓴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 뉴스라는 것이 누가 강도를 당하고 살해되었다든가. 사고로 죽었다든가, 어디 누구 집에 불이 타고 있고, 겨울에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는 둥, 자질구레하기가 짝이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현상의 배후에 있는 원리를 탐구하는 데 관심을 두는 대신 이런 자질구레한 뉴스들을 접하면서 호기심을 채운다든가 일희일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뉴스의 느림에 참지 못하고 사람들은 인터넷 자판을 두드리고 마우스를 요란하게 클릭하면서 국내외에서 흘러들어오는 온갖 소식들에 접속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정보들을 어떻게 걸러내고 종합하여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지럽게 떠도는 정보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푸네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포도나무에 달려 있는 모든 잎사귀들과 가지들과 포도알들의 수까지도 지각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뿐인가! 그는 1882년 4월 30일 새벽 남쪽 하늘에 떠 있던 구름들의 형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니 정말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본인은 정작 자신의 유별난 기억력이 썩 탐탁지 않았던 모양으로, 자신의 기억력이 마치 ‘쓰레기하치장’과 같다고 토로했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푸네스의 그 풍요로운 기억의 세계에는 종합이 없었고 잡다한 뉴스들을 한 줄로 꿰어주는 원리가 없었으며, 단지 자질구레한 사실들만이 난무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에는 너도 나도 푸네스가 되어 넘치는 자질구레한 뉴스에 호기심을 느끼고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은 좀 묵고, 발효되어 은근한 의미가 우러나는 지식을 사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석간신문이 나오자 반나절만에 조간신문이 폐지로 수거되어 가고, 뉴스는 주식 시장 전광판의 주가처럼 요란스럽게 명멸하고 등락하고 있다. 이런 자질구레한 뉴스에 일희일비해서는 역사의 지평을 바라볼 수가 없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해질 녘에야 날개 짓을 한다고 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와 뉴스들을 멀리서 냉정하게 관조하며 그 의미를 종합해 보는 여유가 현대인들에게 필요하다고 하겠다.        

   (다)는 미국의 저명한 시인이며 문필가인 동시에 생태 운동의 이론가이며 실천가인 웬델 배리(Wendell Berry)의 <인간의 목적>(What Are People For)에 실린 ‘나는 왜 컴퓨터를 안 살 것인가’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자신은 가급적 전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낮에 글쓰기를 하는데, 그 이유는 생태주의자로서 환경의 파괴에 반대하는 글을 쓰는 자신이 자연을 파괴해서 채굴한 석탄으로 일으키는 전기에 의지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 양심상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또한 컴퓨터 사용하기를 거부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컴퓨터의 유용함을 말하는 것은 컴퓨터 회사들의 상술이며, 컴퓨터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며,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내키지 않게 과중한 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며, 컴퓨터가 지금까지 만족하게 사용해온 자신의 낡은 로얄 스탠다드 타기는 물론 자신의 가장 가까운 비평가이자 독자인 아내까지도 교체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컴퓨터 사용으로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고,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이 글을 훨씬 더 잘 쓰고 더 쉽게  쓸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 글의 필자와 같은 시각은 오늘날 생태운동가들의 일반적인 시각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근본 생태주의자들(Deep ecologists)은 인간이 생명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연 “자원”을 개발하는 것을 억제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아프리카부족이 생존을 목적으로 곡식을 기르기 위해 들을 사용하는 것은 생명적 필요성의 사례인 반면, 상류층을 위한 골프코스를 만들기 위해 늪을 개조하는 것은 생명적 필요성이 될 수 없다. 광산 개발, 과다한 작물의 수확, 우리 기술 시대의 발전 또한 생명의 필요라는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동차 생산을 높이는 방법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고속도로, 도로, 주차장 건설로 인한 자연 파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방법으로 인간의 이동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을 둔다. 그들은 피터드러거와 같은 산업주의자의 세계관인, “소유되고 사용되기 전에는 모든 식물은 잡초이며, 모든 광물은 바위에 불과하다.”는 말에 정면 도전한다. -근본생태주의자들의 시각은  Thomas Berry, 에서 인용함-

   이상과 같은 (가), (나), (다)에 나타난 삶의 태도가 현대 사회에서 갖는 의의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사례를 들어 논술하라는 위 논제의 출제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오늘날 산업사회, 후기 산업사회[정보사회]가 (가), (나), (다)와 같은 시각과 삶의 태도가 나오게 한 시대적 배경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 급속하게 산업사회의 발전상을 누렸으며, 그 결실과 폐단을 동시에 맛보았다. 더욱이 우리나라가 지금 세계 최강의 초고속 인터넷망을 갖춘 정보사회를 실현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 할 때 위 논제의 (가), (나), (다)와 같은 삶의 태도가 갖는 의의는 그만큼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큰 의의를 사례를 통해 논하는 것이 또한 이 논제의 요구하는 사항이다.

 


Ⅱ.

 ◈< 문제>◈
제시문 (가)와 (나)에서 '공통으로 나타난 삶의 자세들과 그러한 삶의 자세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하여 논술하라.(2001 서울대 인문, 사회, 예능 계열 정시/1,600자 내외. 제목, 띄어쓰기 포함, ±200자)

 <제시문>
(가) 내가 시골을 떠나 북경(北京)으로 온 지가 어느새 6년이 지났다. 그동안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국가의 대사를 헤아려 보면 무척이나 많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 마음 속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고 있지 않다. 만약 그런 사건의 영향을 찾아내 보라고 한다면, 나로서는 단지 내 신경질만 늘게 하였을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날이 갈수록 나 자신과 남을 무시하는 인간으로 만든 것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하나의 작은 사건만이 나에게 의의가 있고, 나를 신경질에서 멀어지게 해 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 일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1917년 겨울, 심한 북풍이 몰아치던 날의 일이었다. 나는 생계를 위한 일로 아침 일찍 외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리에는 거의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인력거 한 대를 붙들어 S문까지 가자고 하였다. 조금 있자 북풍의 기세는 어느 정도 수그러졌다. 길거리의 티끌이 말끔히 바람에 날려가 한 줄기 깨끗한 대로(大路)만 보였다. 인력거꾼의 발걸음도 차차 가벼워졌다. 이윽고 S문에 거의 다다른 지점에서 갑자기 인력거 채에 누군가가 걸려 천천히 넘어졌다.
넘어진 것은 한 노파였다. 머리에는 백발이 희끗희끗 하였고, 옷은 남루하였다. 그녀는 길가에서 갑자기 인력거 앞을 가로질러 가려 했던 것이다. 인력거꾼은 급히 방향을 돌렸으나, 솜이 삐져나와 있는 그녀의 저고리 단추가 채워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저고리 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면서 인력거 채에 걸렸던 것이다. 인력거꾼이 얼른 걸음을 늦추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틀림없이 거꾸로 넘어져서 머리를 다쳐 피를 흘렸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땅바닥에 엎드린 채 있었다. 인력거꾼은 인력거를 멈추었다. 나는 그 노파가 별로 다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아무도 보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인력거꾼을 쓸데없는 짓을 하는 녀석이라 생각하였다. 일부러 제가 일을 만들어 나까지 예정을 어긋나게 하다니······.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가."
인력거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 혹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는지 모르겠다. ― 인력거 채를 내려놓고 노파에게 손을 내밀어 천천히 부축해 일어서게 해 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어찌 됐어요?"
"부딪혀서 넘어졌단 말이야."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당신이 천천히 넘어지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다치기는 어디를 다쳐요. 미친 수작임에 틀림없어. 정말 밉살스러운데. 인력거꾼은 인력거꾼대로 또 쓸데없는 참견만 하려고 들어. 스스로 즐겨 난처한 꼴을 당하고 싶거들랑 마음대로 그래 봐.
인력거꾼은 노파의 말을 듣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  팔을 부축한 채로 한 발 한 발 맞은편 쪽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내가 이상히 생각하여 그쪽을 보니 거기에는 파출소가 있었다. 세찬 바람이 분 뒤라 파출소 문 밖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인력거꾼은 노파를 부축하면서 그 파출소 정문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이 순간 갑자기 일종의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먼지투성이의 그의 뒷모습이 갑자기 커다랗게 느껴졌다.   그리고 멀어져감에 따라 더욱더 커져서 우러러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것같이 느껴졌다. 더구나 그는 나에게 차차 일종의 위압적인 존재로 변해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털가죽으로 안을 댄 내 저고리 속에 감추어져 있는 '비소(卑小)'를 쥐어짜 낼 듯한 기세였다.
이때 나는 잠시 얼어 붙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인력거에 탄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윽고 파출소에서 순경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비로소 인력거에서 내렸다.
순경은 내가 있는 데까지 오더니 말했다.
"다른 인력거를 타시죠. 저 인력거꾼은 인력거를 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외투 주머니에서 한 움큼의  동전을 꺼내어 순경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걸 인력거꾼에게······."
바람은 완전히 그쳐 있었다. 길거리는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였다. 나는 걸으면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생각이 나   자신에게 미치게 되는 것을 스스로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 전 일은 덮어둔다 해도 도대체 저 한   움큼의 동전은 무슨 뜻이었을까? 그에게 주는 상금? 내가  인력거꾼을 심판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신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은 지금에 와서도 끊임없이 내 마음 속에 떠오른다. 이 일로 인해 나는 끊임없이 고통을 참으며 나 자신에게로 생각의 방향을 돌리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지난 몇 해  동안의 문치(文治)나 무력(武力)도 나에게는 어렸을 때 읽었던 "자왈(子曰), 시(詩)에 이르기를……." 하는 식과 마찬가지로, 한 구절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 작은 사건만이 언제나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때로는 전보다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나를 격려하며, 나아가서 나의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는 것이었다.

(나)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이상적인 의욕 중에서 공적(公的)으로 나타나는 행동은 언제나 매우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나머지 모든 부분은 눈에 띄지 않는 가운데 다양하게 실현되어, 실제로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보다 수천 배 이상의   가치를 나타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과 눈에 보이는 부분의 관계는 깊은 바다와 그 표면에서 일어나는 파도의 관계와도 같다. 봉사(奉仕)를 일생의 업으로 삼을 수 없는 사람들은 봉사를 부차적인 일로 행하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선(善)의 힘이 작용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계 유지를 위하여, 또는 사회에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따분한  일을 직업으로 가져야 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해 있는 운명이다. 이들은 자기 안에 있는 인간성을 풍부하게  발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발휘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기계에 가까울 정도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를 인간으로 내세울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업무가 조직화·전문화·기계화됨에 따라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 문제가 인간의 인격을 해치는 것이라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가능한 한 인간의 인격을 옹호하는 쪽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운명에 복종할 뿐 아니라,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온 정력을 다하여 인격체로서의 자기를 주장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비록 보잘것없는 일에서도, 우리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을 때, 우리는 직업 생활과는 다른 인간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할 때 인간은 정신적이고 선한 것에 봉사하게 된다. 여하한 운명에 처한 사람이라도 이러한 봉사라면 누구나 부업으로 해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이 실제로 많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 기회를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환경에 처하여 있더라도 모두가 인간을 진정한 인간성으로 대하려고 노력하는 것, 바로 여기에 인류의 장래가 달려 있다.
큰 가치가 순간순간 우리들의 소홀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의지나 행위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될 재산이다. 우리의 인간성이란, 사람들이 어리석게 늘 떠드는 것처럼 그렇게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의 마음 속에는 표면에 나타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이상적인 의욕이 있다고 확신한다. 땅   속을 흘러가는 물이 눈에 보이는 흐름보다 많은 것처럼, 인간의 마음 속에 갇혀 있거나 간신히 해방되어 있는 이상적인 의욕은 세상에 나타나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 속에 갇혀 있는 이상적인 의욕을 해방시키는 일, 땅 속 깊이 있는 물을 표면으로 끌어내는 일,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을 인류는 갈망하고 있다.


분석 & 해설
  (가)는 중국의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루쉰(魯迅, 1881∼1936)의 장편(掌篇) 소설 <작은 사건(一件小事)> 전문(全文)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자전적인 일화를 제재로 한 작품으로 1917년 북경에서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겪은 작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생계를 위한 일로 인력거를 타고 가던 도중, 자신이 탄 인력거에 남루한 노파가 부딪히는 사고를 겪게 된다. 이때 나는 그 노파가 별로 다치지도 않았으며, 사건을 목격한 사람도 없으니 그냥 가자고 인력거꾼을 재촉한다. 그러나 인력거꾼은 이런 나의 생각이나 재촉과는 달리, 그 남루한 노파를 부축하여 파출소로 데리고 가서 일을 처리한다. 이같은 인력거꾼의 행동을 보면서, 나는 나 자신이 작고 '비소(卑小)'해지며, 인력거꾼이 더 이상 인력거를 끌 수 없다는 말을 전하러 온 순경에게 인력거꾼에게 주라고 한 움큼의 동전을 건넨다. 이런 행동의 끝에 나는 또다시 한 움큼의 동전을 건넨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은 사건은 이후 나에게는 그동안 겪은 국가의 큰 일이나 어릴 적에 배운 학문보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상, 제시문 (가) 요약문은 대학 측의 것을 전재함)
   제시문 (나)는 사상가요 종교인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의 자서전 <슈바이처의 생애>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땅속을 흐르는 물처럼 이상적인 의욕이 가득 흐르고 있으며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의 행동은 지표면으로 흘러나온 나온 물처럼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봉사를 업으로 살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부업을 통해 우리로 필요로 하는 타인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봉사에 충실할 때 우리는 직업 생활에서 전혀 누릴 수 없던 인간적인 생활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마음속에 갇혀 있는 이상적인 의욕을 끌어내기를 인류는 갈망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T.V텔런트가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인 ○○○을 통해 필리핀, 중남미, 아프리카 등지의 어린이들을 1:1 결연 양육프로그램을 톻해 후원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봉사활동은 일회성에 끝나지 않았으며, 처음에는 ‘부업’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본업’으로 삼지 않았나 싶을 만큼 봉사활동에 심취한 것 같았다. 그의 표정에는 숭고한 일을 실천할 때 나타나는 따뜻함과 인간미와 행복감이 물씬물씬 묻어난다. 아마도 그는 (나)의 슈바이처가 말처럼  ‘마음속에 있는’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이상적인 의욕’을 발견했지 않나 싶다. 그 탤런트가 이미 국내의 고아를 두 명이나 입양해서 잘 키우고 있으면서 먼 아프리카에까지 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자기 가족들만을 위하여 생업의 전선에서 얽매이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선을 향한 욕망이 땅 속을 흐르는 물처럼 흐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자신의 선의지를 발견하고 이를 실천하는 데만 이른다면 인간 사회는 한층 더 밝아질 것이다.  그 ‘이상적인 의욕’이나 착한 마음씨가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나타날 수 있음은, (가)의 인력거꾼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생업에 쫓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력거에 부딪힌 노파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노파의 부상 여부를 살피고 파출소로 부축해 가는 그 순간에 인력거꾼은 그냥 빨리 가자는 ‘나’의 재촉을 완전히 무시할 만큼   ‘인간을 진정한 인간성으로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바쁜 와중에서도 완전히 고귀한 인간성을 실천하기에 심취해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모습이 결국 ‘나’를 각성시키고 두고두고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나를 격려하며, 나아가서 나의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게 된 것이다.
   구조의 문제를 근본 원인으로 보고, 이른바 구조적 해결에만 치중하다보면 개별 인간이 가진 인간성의 고귀함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우려가 있다. 그리하여 마르크시즘과 같이 자본주의 착취제도의 자체의 문제점에 매달리기만 한다든가, 개인은 도덕적이지만 그가 속한 집단이 비도덕적이라는 말을 금언처럼 외고 믿는다. 하지만 슈바이처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북경의 인력거꾼이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생활 속에서 사소한 일 하나하나마다 타인을 인격체로 대하고, 그를 배려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한다면 이 사회는 한결 더 살만해지고, 최소한의 생계도 잇지 못하는 절대궁핍 가운데서 허덕이는 사람은 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구조적 문제 해결을 외면하다는 것은 아니다. 서방세계의 강대국이 아프리카와 같은 제3세계에 해마다 의례적으로 베푸는 ‘자선(Charity)’에 대해서 마치 ‘가진 자가 흡입하는 아편과 같다’(나이지리아의 작가 차아누 아케베의 말)는 조롱 섞인 비판을 하는 이유를 새겨볼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국제 사회에서 강대국들은 정치적으로 얽힌 이해관계를 해결함으로써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정치적인 사안의 미봉책으로 ‘인도적인 구호’만 생색내기로, 건성으로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른바 구조적인 문제도 고귀한 인간성의 실천으로 해결하지 못할 법은 없다. 21세기는 이념 대립의 시대가 아니다. 자본주의제도는 다른 제도로 부정되기 어려워졌고,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안에서 그 문제점을 해결할 수밖에 없어졌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이웃과 이웃이 생활 속에서 서로를 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이와 같은 따뜻한 인간미가 실천될 때, 제도의 문제라든가 구조의 문제라든가 하는 것들은 그 실상이 부풀려져 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이와 같은 따뜻한 인간미가 실천될 때 제도의 모순도 구조의 모순도 사랑을 실천하는 개별 인간들의 정성에 밀려서 지금까지 꽉 쥐고 놓을 줄 모르던 사회 문제 해결의 열쇠를 사랑을 실천하는 그들에게 건네주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참고문헌-
。  사마천(홍석보 역) 『사기열전』 삼성출판사
。  황견(편) (최인욱 역) 『고문진보』 을유문화사
。  루쉰(윤화중 옮김) 『아큐 정전』 학원사
。  안동림 역주 『장자』 현암사
。  범선균 역해 『맹자』 을유문화사

 

 

-끝-
 

200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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