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질문 백차승이 청소년대표시절 감독이누군가요?
mins**** 조회수 18,457 작성일2007.09.28

백차승선수가 청소년대표시절 팔굽치부상의 아픔을 호소하며 강판할것을 요구한일을 무리하게 경기에 참가하게 했다는데,그때의 감독님은 대체 누구인가요?또한 그때 그감독님의 무엇때문에 그렇게 했던걸까요?단지 승부욕때문입니까?아님 다른 이유가있었던걸까요?궁금하네요.

프로필 사진

답변자님,

정보를 공유해 주세요.

2 개 답변
2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유니콘
우주신
프로야구 6위, 야구 기술, 규칙 5위, 야구 선수, 감독 3위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1998년 아시아청소년대회(백차승 선수가 영구제명된 계기가 된 대회)의 감독은 최주현 감독(당시 천안북일 감독,최주현 감독은 2년전까지 휘문고 감독을 지냄)입니다.

 

                               

                                      최주현 감독

 

당시 대표팀 명단.

 

◇청소년 대표팀 명단 ▲감독=최주현(천안북일고 감독)▲코치=권정화(대구상고 감독)▲투수=백차승(부산고)김사율(경남상고)송승준(경남고)권오준(선린정보고)문용민(천안북일고)마일영(대전고)▲포수=이택근(경남상고)정종수(선린정보고)▲ 내야수=이성권(천안북일고)신민기(경남고)조재영(신일고)곽주섭(경남상고)이현곤(연세대)권도영(대구상고)▲외야수=이상훈(경남고)이진영(군산상고)이종욱(선린정보산고)김광삼(신일고)

 

어느 팀을 맡고 있는 감독의 마음은 어느 정도 비슷할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기기 위해 대회에 출전하는 것은 당연하며(국제대회라면 더하겠죠?) 부상을 감수하고라도 승리를 원하는 것은 감독뿐 아니라 선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물론 경기를 뛸 수 없을 정도의 부상이라면 예외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얘기를 백차승 선수가 지난해 국내언론사(일요신문)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그 기사내용을 가져와 보겠습니다.

 

Q.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1998년으로 돌아가 보자. 9월 12일 일본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대만과의 준결승에서 선발 등판했다가 오른쪽 팔꿈치 통증으로 자진해서 경기를 포기했다. 그런데 이 일로 대한야구협회로부터 영구 제명이란 중징계를 받았다. 당시 기사를 검색해 보니까 미국 진출을 위해 팔을 아끼려고 일부러 공을 던지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A. (한참을 생각하다가) 당시 한 스포츠신문의 미확인 보도로 인해 난 '배신자'로 내몰렸다. 대만과의 준결승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지만 정말 팔꿈치가 너무 아팠다. 일본전에서도 통증이 있었는데 안티프라민을 바르면서까지 통증을 참고 던졌다. 그러나 대만전은 그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 그래서 감독님께 통증이 심해 더 이상 던질 수 없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나더라 1루를 맡으라고 하시더라. 팔이 아파서 공을 못 던지겠다는 선수에게 1루를 보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그래서 못하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마운드에서 내려온 이후 팀이 역전패를 당했다. 나때문에 진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을 갖고 귀국을 했다. 그런데 협회에서 상벌위원회를 열었고 거기에 내가 불려나가게 됐다. 우리가 대만에 진 이유가 내가 감독의 지시를 어기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팀 분위기가 엉망이 됐고 이게 팀 전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내용이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런데 상벌위원 중 한 분이 모 스포츠신문 기사를 내보이면서 '아버지가 일본에 와서 더 이상 던지지 말라고 했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 기사에 그렇게 나왔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일본에 오질 않았고 나에게 던지라 말라 말한 적이 없었다고 강변했지만 그분들은 내 말보다 그 기사를 더 믿는 눈치였다.
그 이후 상벌위원회에선 날 한국 야구계에서 더이상 뛸수 없게끔 영구 제명을 시켰다.

Q. 그런 사연이 숨어 있는 줄 몰랐다. 그런데 학생 야구였고 국제친선 대회였는데 영구 제명을 시킨 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A. 정말 내가 이해 못하는 부분이다. 팔이 아파서 더 이상 던지지 못하겠다고 말한 게 그리 잘못한 건가. 그렇다면 팔이 부러지거나 말거나 감독의 지시라면 무조건 공을 던져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 지면 결과에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건가. 너무 너무 화가 났고 감독님에 대해 실망했다. 제자의 앞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만약 내가 미국으로 가지 못했다면 난 야구를 접어야 할 판이었다. 어떻게 그런 상황이 나오게 됐고 그런 상황을 묵인하셨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그 기사를 쓴 기자도 너무 무책임했다. 우리 아버지가 일본에 왔는지 안 왔는지 직접 확인이라도 해봤나. 어떻게 아버지가 일본까지 와서 미국 가야하니까 팔을 아끼라고 말할 수 있겠나.

Q. 98년 시애틀 매리너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을 때도 팔이 좋지 않았다고 들었다.

A. 한국에서부터 팔꿈치 인대가 좋지 않았는데 예상대로 시애틀에서의 신체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았다. 시애틀 측에선 계약을 맺기 전이라 날 그냥 한국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애틀은 129만 달러를 주고 계약을 강행했다. 그후로 오랫동안 제대로 된 공을 던지지 못했다. 정말 너무나 던지고 싶었고 그럴 수 있도록 피나는 훈련을 했는데 속도가 붙지 않았다. 그러다 조금 남은 인대마저 다 나갔고 어쩔 수 없이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할 때 상벌위원회 분들이 생각났다. 내가 미국 와서 팔꿈치 인대가 다 나가서 수술하는 걸 안다면 날 영구제명시킨 사람들이 어떤 심정일까 하고 그 대회에서 정말 아파서 못 던진 게 사실로 드러난 거 아닌가.

Q. 입단 계약 후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바로 출국할 예정이었는데 이듬해 6월이 돼서야 미국으로 들어갔다. 무슨 사연이 있었나.

A. 난 참 운이 없는 놈이다. 우여곡절 끝에 입단 계약을맺고 출국해 스프링캠프에 합류하려 했지만 이번에 비자가 내 발목을 잡았다. 내가 시애틀과 입단 계약을 맺은 사실까지 알면서도 미국영사가 계속 퇴짜를 놨다. 결국 스프링캠프에 참가하지도 못했고 6월까지 기다리다가 시애틀 구단측에서 변호까지 선임해 일을 처리한 덕분에 가까스로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3개월짜리 조건부 비자였다. 6월 25일이 출국일이었는데 결코 잊지 못한다 그 날짜를.

Q. 요즘 국적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다. '제2의 유승준'이란 말로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여부를 밝혀달라.

A. 너무나 어렵게 미국에 들어왔다. 다시 돌아가서 또 다시 비자를 거절당하면 미국에 올 방법이 없었다. 한국에 남을 경우 제명된 상태라 공을 던질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미국에 남기로 한 것이다. 인터넷 보니까 내가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국적을 바꿨다고 하는데 만약 병역 면제를 받으려 했다면 팔꿈치 수술만으로도 면제 대상이 되는 것으로 안다. 또 국제 대회에 참가해서 정정당당히 면제 혜택을 받으면 된다. 그러나 그럴 기회가 과연 나한테까지 오겠나 싶었다. '배신자' 백차승을 국가대표로 뽑아 줄 감독이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솔직히 두렵고 용기가 안 났지만 욕 먹을 각오를 하고 국적을 포기했다.
98년에 날 '배신자'로 내몬 그 스포츠신문에서 또 다시 내가 병역 기피를 위해 미국으로 도주했다고 썼더라. 난 야구만을 생각했을 뿐이다. 미국이란 큰 무대에서 야구를 하고 싶었고 야구를 할 수 있게 기회를 준 곳도 이곳이다.

Q. 미국 시민권자와의 결혼을 통해 시민권을 얻었다는 소문이 있다 사실인가.

A. 그 부분에 대해선 지금 말하고 싶지 않다. 물론 나에 대해 어떤 얘기가 나도는지 알고 있다.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닌것 같다. 좀 더 내 상황이 안정된 이후에 밝히겠다. 미안하지만 기다려달라


Q. 그래도 궁금하다. 워낙 이 부분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이 많기 때문이다.

A. 이 얘기만 하겠다. 내가 미국 시민권을 딸 때 나 말고도 미국시민권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70-80명 정도 됐다. 그들은 시민권을 받아 들고 서로 부둥켜 안고 기뻐했는데 난 가슴으로 울었다. 오랜 고민끝에 선택한 길이었지만 막상 미국 시민권자가 된다는 게 정말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야구를 할 필요가 있을까 갈등이 있었지만 7년동안 젊음을 바친 미국 무대에서 꼭 성공하고 싶었고 주어진 기회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Q. 미국 시민권을 딴 후 생활이 달라졌나.

A. 이렇게 생각하면 쉽다. 만약 외국 사람이 한국으로 귀화했다고해서 우리가 그들을 한국인으로 보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시민권만 가졌을뿐 난 영원히 한국 사람이고 그들 눈에는 용병일 뿐이다.


백차승은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되뇌었다. '미국이란 이 넓은 땅덩어리가 나한테는 철창 없는 감옥'이었다고.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지난 8년간의 세월을 훑어 내려간 그는 <일요신문>을 통해 처음으로 심경 고백을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씌어진 '매국노'란 굴레가 없어지겠냐며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나 사연이 많은 스물여섯 살 청년이었다.

 

최주현 감독의 성격과 지도 스타일을 다룬 짧은 기사.

 

그의 지휘방식은 ‘자율야구’다. 선수들이 스스로 훈련할 수 있도록 감독은 여건만 조성해준다는 게 그의 신념. 그는 “스스로 알아서 모든 일을 하도록 가르치되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선 책임을 지우게 한다”고 소신을 밝힌다.

최감독은 워낙 대쪽같은 성격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는다. 철저히 원리원칙을 따지기 때문에 손해도 많이 보는 스타일. 그의 꼬장꼬장한 성격은 가는 곳마다 주위사람들과 불화를 일으켜 여러팀을 전전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중앙대감독시절엔 학교관계자들의 부당한 압력을 참지 못해 스스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해당 글은 지식스폰서가 활동 기간 (04년~08년 6월 종료)중에 작성한 글 입니다.
  • 지식스폰서가 작성한 답변은 본문 내 자기소개 및 출처란의 실명, 상호명, URL표시를 허용합니다.
  • 출처란에 표시된 정보가 지식iN 운영원칙에 위배되는 음란성, 불법성, 청소년 유해사이트 등으로 변질된 경우는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지식스폰서란

2007.09.28.

  • 채택

    질문자⋅지식인이 채택한 답변입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
1번째 답변
프로필 사진
snag****
고수
프로야구, 야구 기술, 규칙, 야구 선수, 감독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 그때 당시의 감독은 모르겠구요. 감독이 무리하게 등판을 요구한것도 아닌것 같습니다.

  단지, 백차승선수가 그때 팔꿈치가 아파서 자진 강판을 요구했고, 감독은 승락 했으나, 야구협회에 김희련 전무라는 분이 백차승 선수가 태업을 했다고 생각하고 징계를 내린것 같습니다. 아래내용 참조 하시길...

 

백차승은 1998년 9월 12일 아이사청소년선수권대회 대만과의 준결승전에서 5회까지 던지다가 팔꿈치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감독의 허락아래 더이상 등판을 하지 않았다.(<일요신문> 747호 참조). 그러나 백차승은 그 일로 인해 대한야구협회로부터 '무기한 자격 정지'를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 한 스포츠신문에서는 당시 대표팀 총무로 참가, 백차승의 징계를 건의했던 대한야구협회 김희련 전무이사의 말을 통해 '백차승이 태업을 했다' 고 밝혔다. 즉 백차승이 자진 강판 후 다음 날 캐치볼을 하는 걸 봤고 이것은 당시 시애틀 입단이 확정적이었던 백차승의 팔을 아끼려고 태업한 것이라 볼 수밖에 없어 징계를 건의했다는 내용의 기사다.
그러나 백차승은 대만전 다음날 캐치볼을 한 적이 없다. 백차승은 "팔이 아픈 선수가 어떻게 캐치볼을 할 수 있겠나. 다음날 다른 선수가 스트레칭하고 있는 걸 도와주려 했을 뿐 결코 공을 만진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은 당시 백차승과 같이 대표팀에서 뛰었던 송승준(26. 캔자스시티 산하 로열스 더블A 위치타 랭글러스)도 의견을 같이했다. 송승준은 7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백)차승이가 대만전 이후 캐치볼을 한 적이 없었다. 그건 당시 같이 뛰었던 김광삼이나 우용민 등도 증언해줄 수 있을 것" 이라면서 "차승이가 (우)용민이 스트레칭하는 걸 도와주려 그라운드에 나갔을 뿐 공을 만진 적이 없었는데 왜 그런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다" 라고 밝혔다. (65면 송승준 인터뷰 참조)

2007.09.28.

  • 출처

    아이엠자이언츠 카페 참조

도움이 되었다면 UP 눌러주세요!
UP이 많은 답변일수록 사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