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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이미자 태어난 곳
kyk5**** 조회수 45,589 작성일201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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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c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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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혜장철학관
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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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가수 이미자 프로필 

 

이미자 가수

출생     1941년 10월 30일 (서울특별시)

신체     160cm, 48kg

가족딸  정재은

학력     문성여자고등학교

데뷔    1959년 열아홉순정

수상    2013년 MBC 방송연예대상 공로상

경력    2000.10 환경부  환경홍보사절

 

  • Why

     

    [김신영 기자의 별★사람]

     

     

    그녀의 노래는 고향이자 엄마…

    그냥 눈물이 납니다

 
입력 : 2014.03.15 08:16
 
 
'가수인생 55년'
공연 앞둔 이미자
"일생 최고의 공연은 월남戰때…
참전 장병들이 송아지처럼 울더라"

이번 공연 테마는 恨과 애환
전 팬들과 나이 함께 먹어요.
월남戰 장병·派獨 광부…
그 시절 고생했던 분들이 좋아해주시니 행복하죠

뽕짝 가수란 말이 좋다
쿵작쿵작~ 이 리듬 속에 우리네 삶이 담겨 있죠
요즘 트로트는 별로예요 그 유치한 노랫말이라니…

노래 2069곡, 음반 560장
연습 안해도 잘 부른다고 천재라고들 하지만…
'태어나서 평생 노래하라'
이런 계시는 받은 것 같다

보톡스?
싫어요
나이 들면 주름도 있어야죠 늙음이 오면 오는 대로…
가슴 아픈 일도 많았지만 '
잘 견뎌왔구나'
생각해요

평생의 라이벌 패티김
어휴~
무슨 라이벌?
그분을 따라갈 순 없죠
항상 보면서 용기 얻었는데 은퇴하시니 제가 외롭네요

 


한국적 한(恨)과 애환을 가장 잘 표현하는 가수로 꼽히는 전통 가수
이미자가 지난 11일 한 호텔에서 자신의 옛 음반들에 둘러싸인 모습.
4월 10~1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이미자 노래 55년’ 공연을 여는 그는 “
우리 세대가 느끼는 그 서글픈 애환이라는 게 있다.
표현은 안 되지만 느낌으로는 안다”고 했다.
사진 속 LP 재킷은 ‘대중가요 LP 가이드북’ 저자 최규성씨 소장품.
/이명원 기자
 
월남의 밤엔 맥주도 더웠다.
스물세 살 박길호 병장은 먼 하늘을 가끔 밝히는 조명탄을 깜빡깜빡 쳐다보며 들큼한 맥주를 홀짝였다.
 
모여 앉은 파릇한 병사들에겐 엄마 얘기가 안주였다.
장병들은 목숨 걸고 받은 봉급의 대부분을 고향으로 보냈다.
 
박 병장은 자투리 돈을 모아 일제(日製)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하나 샀다.
누군가 고향서 가져온 낡은 테이프가 돌기 시작하자 전쟁터 한가운데의 작은 술자리에서
가수 이미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헤에에에이일 수 없이 수많은 바암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동백 아가씨) 엄마 얘기가 가만히 멈췄다.
어떤 이가 노래를 따라불렀다.
몇몇은 훌쩍였다.

경북 봉화에 사는 박길호(67)씨는 1960년대 말 월남전(베트남전)을 회상하며
"요즘은MP3 플레이어인가 뭔가 해가지고 이미자씨 노래를 수십 곡씩 담아 다니며 듣는데
그때 생각이 참 많이 나더라"며 웃었다.
 
"그때 죽고 사는 건 이차적인 문제였어요.
한국이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었으니까 (월남전에) 덜컥 자원을 해서 갔지요.
그때 한국서 일하면 월급이 몇백원 나올 때였는데
한 달에 오십이불(52달러·당시 환율로 약 1만4000원)인가를 줬어요.
세계 평화도 좋죠,
좋은데….
그때는 우리나라가 워낙 어려운 형편이어서 세계 평화보다는 외화(外貨)를
한국에 보낸다는 자부심이 훨씬 더 컸죠,
하하.
혈기왕성한 때라 죽기야 하겠나 하고 덜컥 가긴 했는데 집 생각이 너무 나는 거라…."

이미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목해 월남전 때 네 번 베트남에 위문 공연을 갔다.
박길호씨도 공연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는
"우리 엄마가 (이미자의 노래) '여자의 일생'을 참 좋아하셨다.
 
이미자 노래를 들으면 누구라도 고향 생각,
부모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전화는커녕 편지도 오가기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서울에서 온 이미자는 사선(死線)을 오가는 장병들에겐 엄마고 누이고 대한민국이었다.
그가 무대에 서면 산(山)만 한 장병들이 송아지처럼 울었다.
이미자는 다소곳이 선 자세로 차분히 노래를 불렀다.
 
그는 "
요즘 이미자의 노래를 들으면 배고파도 삶이 지금만큼 메마르지는 않았던,
그때 그 세월의 추억에 젖는다"고 했다.

가장 한국적인 향수와 애환을 노래에 담는 가수 이미자(73)가 4월 10~12일 '
이미자 노래55년'
공연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연다.

지난 11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만난 이미자는
"50주년 기념 공연 때 마지막이라는 마음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세월이 또 흘렀다"고 했다.
 
"50주년 때는 신곡도 내고101곡을 묶어 모음 음반도 냈어요.
하지만 이번엔 덤으로 하게 된 것 같은 감사한 기분이랄까…
그래서 너무 야단스럽지 않게 조용히 최선을 다하려 해요."

봄 분위기 나는 사진을 찍으려고 화사한 차림을 부탁했는데
이미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검정을 입고 왔다.
 
"화려한 옷이 있지도 않고 어색해서"라는 게 이유였다.
 
매니큐어 바르지 않은 두 손은 부끄러운 듯 서로를 자꾸 만지작거렸다.
노래2069곡을 발표해 기네스북에 오르고 음반560장을 냈으며 수만 번 무대에 섰던
한국 최고의 이 전통 가수는 생각보다 숫기가 없어 보였다.
 
그는 소파에 등 한 번 기대지 않고 꼿꼿이 허리를 펴고 지난 세월을 이야기했다.
볼펜으로 눌러 쓰듯 느리고 또박또박한 말투였다.

◇"나와 함께 팬이 늙어간다"
이미자는 일생 최고의 공연으로 월남전 위문공연을 꼽았다.
한국은1964~1973년 총31만명을 파병했다.
 
파병 명분은 두 가지였다.
우방(友邦) 미국 지원과 외화 벌이였다.
이미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
지목'을 받아 월남에 가서 공연을 했는데 객석은 매번 울음바다였다.
 
이미자는 "
위로가 되기는커녕 장병들 맘을 상하게 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고 했다.
 
이미자는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노래로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를 꼽았다.
모두 1960년대에 발표한 곡이다.

―50년 전 팬들을 아직 몰고 다니지요.

"그러네요.
저의 팬들은 저와 똑같은 것 같습니다.
제가 삼사십대였을 때 그분들이 제 공연에 오셨고,
제가 칠십대가 됐으니까 그때의 그 팬들이 또 칠십대가 되어 이어졌다고 생각해요.
제 공연엔 연세 높으신 분들이 전부예요.
젊은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대부분 부모님 부축하고 온 분들이지요.
이제는 손녀가 할머니를 모시고 오기도 하고요."

―지난해 조용필이 유럽풍 노래를 담은 음반 '
헬로'를 내고 대히트를 쳤죠.
변신 생각은 없으십니까.

"조용필은 조용필 나름대로 좋죠.
개혁하고 자기 변신을 한다는 것,
참 칭찬해주고 싶어요.
하지만 나는 못 한다기보다…
내 노래를 들으러 오시는 분들이 오랫동안 품었던 노래를 그리다가 오시니까 쉽게 바꿀 수가 없죠.
그 시절,
 저희 시대는 참 어려웠잖아요.
그 시대의 향수라 그럴까…
뭐,
그런 느낌을 사랑해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또 이 나이에 다른 스타일을 해본다는 게 좀 그렇기도 하고…."

 

이미자가 한창 이름을 날리던
1960년대에 한 방송국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
/조선일보 DB
 
―트로트라는 장르 자체는 많이 변했죠.

"나는 트로트라는 단어 정말로 싫어해요.
촌스러워요.
요즘은 트로트의 질이 낮아진 것만은 사실이에요.
가사 내용이라든가…
정말 노래라고 생각할 수 없는,
또 노랫말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유치한 가사를 해가지고 그것도 하나같이 빠른 템포를 해서
그냥 두들기고 신나게 부르는 건데 그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디스코,
차차차 이런 걸로 템포를 바꿔서 나오는 게 전부 트로트 가수라고 하잖아요.
나는 내 노래를 내 나름대로 '
한국의 전통가요'라고 고집하고 있어요.
한(恨)이 많은 한국인의 애환을 재현해주는 노래들이랄까요."

―노래에 비해
'전통가요'란 단어는 어감이 너무 경직된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차라리 '뽕짝'이 트로트보다는 나아요.
난 '뽕짝 가수'란 단어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요.
'쿵작쿵작' 하는 리듬을 정감 있게 표현한 거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트로트라는 이상한 외래어는 정말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
요즘같이 트로트가 유치한 노래로 낙인이 찍혀버린 때에는 더더욱 그래요.
얼마 전KBS '불후의 명곡' 녹화를 했어요.
노래 잘하는 젊은 발라드 가수들이 참 많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트로트는…
가수가 너무 없어요."

―특별히 맘에 드는 요즘 가수가 있으신가요.

"내 입으로 말하긴….
" 그는 몇 초간 주저하다가 "
요즘 (뮤지컬 배우) 임태경이가 노래 참 잘하더라"고 했다.

◇"패티김 은퇴… 제가 외롭습니다"
이미자는 5년 전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 때 "
이번 공연이 마지막 대규모 공연일 것 같다"고 했다.
예언은 빗나갔다.
 
대신 동지이자 라이벌로 불렸던 패티김이 지난해 말 은퇴를 선언했다.
반면 1970년대 활동했던 또 다른 가수 김추자는33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다고 최근 발표했다.

―은퇴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물론 나도 파워(힘)라든가 하는 것은 전보다 부족하겠지요.
하지만 혼자서 '아우어(hour·가수 한 명이 주도하는 무대를 뜻하는 공연계 은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렇게 잘 지탱하고 있잖아요.
실력이 분명히 있다면 일을 계속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제 노래는 들으시는 분들이 평을 해줘야지 내가 이렇다저렇다 말할 수는 없어요.
제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제가 예전에 냈던 음폭은 그대로 소화할 수 있다는 거예요."

―패티김과는 평생 라이벌 사이셨지요.

"저는 절대로 그렇게 안 느꼈어요.
항상 '
그분이 위다'라고 생각했지 나하고 동등하다 생각은 안 했어요.
저는 그분에 비하면 스케일이 요만해요.
체격으로 보나 체력으로 보나….
저는 웅크리는 스타일이고 그분은 대담하게,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분이고.
그분을 따라갈 수는 없죠.
그 양반이 저보다 조금 연세가 있으시거든요.
제가 기운이 없어지면 '
저분도 하는데 나는!'
하면서 용기도 내고 그랬어요.
이젠 그럴 분이 안 계시니까…
제가 굉장히 외로워요,
사실은."

―김추자처럼 돌아오는 분도 계시잖아요.

"하하하…
김추자가 그런대요?
잘 부르죠.
노래 좋죠.
그런데 꼭 김추자 얘기가 아니라 너무 오랜 세월 있다가 다시,
그러니까 몸도 모든 것도 변화된 다음에 나와서 하는 건 보기가 안 좋더라고요.
사람들이 젊었을 때 상상을 하는데 지금은 몸도 많이 변했을 거고…
뭐,
음색이야 크게 변하지 않았겠지만요.
대개 오랜만에 컴백해 가지고 하는 가수들을 잘 못 보더라고,
사람들이…."

―다들 무대에 들고 나는데,
참 꾸준히 하셨네요.

"그러게 어쩌다 보니 나도55년이 됐어요.
난 연습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 집 양반(김창수 전 KBS PD)과 1970년 결혼하고 나서 늘
'집에 들어가면 난 가수가 아니다'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집에는 피아노도,
그 흔한 기타도 한 대 없어요.
 
연습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조용히CD 플레이어에 노래를 틀고
이어폰을 꽂고 혼자 몇 번 따라부르는 정도예요.
공연 전에 악단이랑 좀 맞춰보고요."

음악인들 사이에서 이미자는 '
참 연습을 안 하는데 노래는 진짜 잘하는 가수'로 통한다.
'동백 아가씨'의 작곡가 백영호 선생(1920~2003)의
아들인 백경권(경남 진주 서울내과 원장)씨는
"아버지는 생전 '이미자는 한 번 맞춰 보면 끝이다.
그러고도 작곡가의 의도를 착착 잡아내는 가수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해본 적 있나요?

"그런 거보다도…
이건 근래에 든 생각인데 '
너는 태어나서 노래를 평생 해라' 이런 계시가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은 했어요.
아직까지 숭(흉) 없게 관객들을 모실 수 있으니까….
내가 애쓰는 게 있다면 원래 녹음한 소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는 정도예요.
레코딩을 하고 세월이 흐르면 아무래도 군더더기가 붙고 기교도 들어가고 이렇거든요.
이상한 목소리를 낸다거나 꺾고 뒤집고 하는 기교,
 
하하.
그런 재주를 부리면 한두 번은 듣기 좋을지 모르지만 결국 나중에는 듣기 싫어질 것 같아요.
그런 걸 주의하는 정도예요.

◇"요새 사람들은 맺힌다는 걸 모르지"
이미자의 공연장엔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얼굴에 주름이 그득한 이들이 이미자의 노래를 들으며 발개진 눈가를 훔치는 모습은
이미자 콘서트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그는 "
아마 과거가 회상되어서 울지 않겠나"라고 했다.
"지금 시대 분들은 모르겠지요.
우리가 고생했던 거 말이에요.
그건 표현은 안 돼요…
표현은 안 되고,
느낌으로 아는 거예요.
우리 세대가 느끼는 그 서글픈 애환이 똑같을 거예요."

―아픈 기억을 굳이 끄집어내서 울고 싶어 한다고요?

"물론이죠.
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
그 시대에 대한 향수… 참…."

이미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쓸쓸한 듯 '
호호호' 웃었다.
'저 나이 사람이 알아듣겠나'라고 말하고픈 표정이었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참 울고 나서 가슴이 후련하다고 하잖아요.
맺힌 게 많으니까 내 노래가 처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가 봐요.

요새 사람들은 맺힌 거 이런 걸 모르지…."

 


열여덟 살 때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가수 이미자는 데뷔 55주년 기념 공연을 약 한 달 앞둔 13일 서울 정동을 걸으며 “
인생은 주어지는 것이라서 시간을 되돌려 바꾼다는 상상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또 “
공연이라고 보톡스 같은 거 맞을 생각 없다.
나이가 들면 있을 건 있어야지…
”라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12일 전화로 만난 이미자의 팬이자 월남전 참전 용사 박길호씨도 '많이 맺힌' 사람이었다.
그는 월남에서 밤이면 이미자 노래 들으면서 맥주를 홀짝이다가 낮에는 '
사방 천지에 실탄이 날아다니는 곳'에서 전쟁을 했다.
 
한국군의 작전은 두 단계로 진행됐다.
베트콩과 싸우고 나면 산더미처럼 쌓인 탄피를 주우러 나가는 '
이차적 작전'이 바로 이어졌다.
젊은 장병들은 나라에 보탬이 되라고 땀 흘려 그러모은 탄피를 배에 실어 부산항으로 보냈다.

월남에서2년을 살아남은 박씨는 돌아온 후 현대중공업·현대건설 등에 다녔다.
 
거기서도
사우디·
오만·
아랍에미리트·
이라크·
바레인·
예멘을 누비며 다시 외화를 끌어모았다.
"내가 역마살이 끼었나,
하하.
엄청 헤매고 다녔지마는 그때만 해도 혈기왕성했고 무언가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뿌듯함이 있었어요.
" 그는 가장 좋아하는 이미자 노래로
'우리는 외로운 형제 길 잃은 기러기'로 끝나는 '기러기 아빠'를 꼽았다.

1967년 월남전에 참전했던 이재선(69)씨도 전장에서 이미자 공연을 보았다.
월남 백마부대 연대본부에 있었던 그는 12일 "
우리 연대에서만 수백 명이 죽어나갔다.
 
큰 전투가 있으면 사흘 동안 시체를 헬기로 실어 날랐는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나 컸다"고 했다.
"한국에 보릿고개가 있어서 밥을 제대로 못 먹고 이럴 때니까,
집에 돈 넉넉히 보내드리려고 자원입대를 했어요.
경제 발전에 많은 보탬이 되지 않을까 했죠.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보냈다며 연예인들이 많이 왔어요.
이미자씨가 왔을 땐 정말 굉장했어요.
그때는 대부분 시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향수가 정말 강했어요.
이미자씨가 '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동백 아가씨) 하고
노래를 하면 고향 생각에 죽은 전우 생각이 겹쳐 하염없이 울곤 했죠."

12일 전화로 만난 파독 간호조무사 출신 독일 교포 강미용(64)씨는
지난해 10월 함부르크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600㎞ 차를 몰아
이미자의 '한국 근로자 파독50주년' 공연을 보러 갔다고 했다.
 
그러고는 공연 내내 울었다.
경기도 용인 출신인 강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
좋은 나라에서 대학이라도 다녀봐야겠다'는 욕심으로 독일에 갔다.
 
"조국하고 부모 형제 친척하고 지인들 뒤에다 두고 떠나올 때는 안 울고 온 사람이 없었어요.
한국이 너무너무 살기 힘들어…
 아휴…
눈물부터 나네.
저,
대학은 결국 못 갔지만 이래 봬도 효녀 노릇 했어요.
돈 벌어 가지고 고향에 얼마나 많이 보냈는데요."
웬만큼 벌어 한국에 돌아가려던 그는 독일에 간 지1년 6개월 만에
파독 광부였던 남편을 소개로 만나 독일에 눌러앉았다.

그는 한국 생각에 시달릴 때마다 이미자의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향수를 달랬다.
 
'왜 하필 이미자였느냐'는 질문엔 깔깔 웃었다.
 
"아휴,
그때 시골에선 집에 라디오가 없어서 동네 스피커로 라디오를 틀었거든요.
그땐 노래가 딱 두 종류예요.
'잘살아보세'
그리고 이미자 노래.
떠나온 우리에게 이미자는 한국 그 자체였어요.
요즘은 '
노래는 나의 인생'이란 노래가 그렇게 좋네요.
'아득히 머나먼 길을 따라 뒤돌아보며는 외로운 길….'"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몸으로 버텨온 이런 사람들의 삶을 노래로 달래온
이미자는 데뷔 55주년 기념 공연의 테마를 '
한과 애환'으로 잡았다.
"나이 든 팬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내가 참 많은 세월을 이들과 함께 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주저앉더라도 (노래를) 해야지요."

◇"인생은 주어질 뿐… 되돌리고 싶지 않다"
이미자는 열 여덟살 때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했다.
몇년 후
'동백 아가씨'가 큰 인기를 끌면서 거의 평생을 스타로 살았다.
그러나 그의 삶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젖먹이 때 친어머니가 집을 떠나 엄마 정을 못 느끼고 살았고
동료 음악인과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는데 출산 직후 이혼했다.
 
재혼 후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아들을 한 명 더 낳았지만
일본 엔카(演歌) 가수가 된 첫딸 정재은(50)씨와는 내내 서먹하게 지냈다.
 
6·25 전쟁 직후 어린 시절엔 배가 너무 고파 남은 짜장면 양념을 긁어먹었다.
그만큼 가난도 쓰리게 겪었다.
 
그는 "
고생했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요즘은 평탄하게 지내시지요.
노래에서 애환이 빠져나가진 않습니까.

"지금의 삶이 그냥 주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는 내가 괜찮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까지 그만큼 가슴 아픈 일도 많았고 힘들었던 일도 많았어요.
그런 생각을 할 때 '
잘 참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만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하루는 어떻게 보내세요?

"큰 재미 없어요.
그냥 뭉개고 있다가 요리도 하고….
강아지를 길렀는데 강아지도 없어요 이제.
죽었어요.
나는 운전도 할 줄 모르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노래방도 가 본 적 없어요.
너무 재미없을 것 같아서요."

―시간을 되돌려 바꾸고 싶은 일도 있나요.

"하…
인생은 주어지는 거잖아요.
그런 상상은 하고 싶지도 않아요.
주어진 과제를 하나씩 해결해 가면서 지금까지 이끌고 왔으니까,
또 이렇게 참고 견디면서 이루어 왔으니까 다시 돌아가서 무언가를 고치고 싶다 하는 상상은 하지 않아요."

―첫딸 재은씨와는 여전히 서먹하세요?

"아휴,
사람들 말처럼 사이 안 좋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일절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속마음은 누구도 몰라요.
두 사람만 알지."

―요즘 젊은 가수들도 공연 앞두면 보톡스 정도는 맞는다는데….

"보톡스?
싫어요.
나이가 들면 있을 건 있어야지요.
주름도,
그리운 것들도 좀 있어야지요.
난 우리가 손대봤자 효과도 없으리라고 봐요.
젊은 사람들이야 애쓰면 화사하게 만들어지겠지마는….
나는 늙음이 오면 오는 대로,
그 늙음으로 내 시간을 이어가려고 해요."

공연 문의는 1544―1555
김신영 | 기자 [Why]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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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3.09 03:42
 

"목소리 하나로 반백년…

요즘 세상이라면 대접받기 어려웠겠죠"

560장의 음반 취입 내달부터 전국 투어 19세 데뷔땐 나도 발랄…

동백아가씨 부를때부터 촌스럽단 얘기 들어 집에선 가수아닌 주부…

이미자 남편으로 지낸 우리집 양반에 미안 누구나 자기 길 있는 법…

그때 패티김 따라했다면 난 그분 밑에 있는 셈

 
 "'엘레지의 여왕(女王) 가수 이미자(68)씨가 자신의 노래인생
   50년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진부 민봉기 기자"; '엘레지 여왕' 이미자는

이미자씨는 4월 2일부터 사흘간 세종문화회관에서 '
노래인생 50주년'
기념공연을 한다.
 
공연 타이틀은 '
세상과 함께 부른 나의 노래 101곡'이다.
전국투어도 예정되어 있다.

50년 세월 동안 그녀는 2069곡을 발표했고,
560장의 음반을 취입했다.
 
그녀는 "
내 목소리는 세월 속에서 많이 변했다.
음폭은 넓어졌지만,
과거처럼 카랑카랑하고 힘 있는 목소리는 줄어들었다"고 했다.

그녀는 1958년 국내 첫 TV방송 HLKZ의 콩쿠르 프로그램에 가요부문1등을 차지해,
이듬해 '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했다.
 
그때 우리나이로 열아홉살이었다.
 
그녀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것은 '
동백아가씨'(1964년).
신성일과 엄앵란이 출연한 같은 제목 영화의 주제곡이었다.
 
영화가 뜨면서 노래가 대히트를 쳤고,
그 당시에 100만장 이상 팔렸다.
 
그러나 1965년 말 '
왜색조(倭色調)'라는 이유로 방송 및 음반 판매가 금지됐다.

그녀는 "
1970년대 말 일본의 후쿠다 수상이 왔을 때 청와대 영빈관 연회석상에 불려갔다.
 
그때 내가 불러야 할 지정곡이 동백아가씨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금지곡이 된 줄을 몰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시절 다른 히트곡인 '
기러기 아빠'는 '비탄조'라는 이유로, '
섬마을선생님'은 '
표절'이라는 이유로 방송과 음반판매가 금지됐다.
 

이들 금지곡은 모두 1987년 풀려났다.

 


이미자씨는“
한때 히트곡마다 금지곡이 되자‘
나보고 노래 부르지 말라는 건가’하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잘 참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엘레지의 여왕(女王)'이라면 도도하게 앉아 객(客)을 맞거나 늦게 등장해야 하는데,
이미자(68)씨는 약속장소 호텔의 현관문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승용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내다보면서.
5성급(五星級) 호텔에 처음 들어온 사람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자꾸 잊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
노래인생 50주년' 기자회견에서도 그녀는 "
난 촌스러운 사람이고 촌스럽게 남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녀는 본래 서울 출생이다.

―가수로 데뷔한 19세 시절에는 결코 촌스럽지 않았겠지요?

"아,
그때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발랄했지요.
데뷔곡 '
열아홉 순정'(1959년)은 경쾌한 스윙템포의 음악이었죠.
'동백아가씨'(1964년)가 나온 뒤로 사람들이 '
촌스럽다'고 했어요.
저를 '뽕짝 가수'로 불렀지요.
미니스커트,
장발,
팝송,
재즈,
발라드 등 서구풍이 들어와 유행하던 때라,
내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 수준 낮은 사람으로 취급했어요.
내 공연에는 '
고무신 신은 아줌마들만 온다'고도 했어요."

―그 어린 나이에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나요?

"솔직히 흔들렸고,
노래를 바꿔볼까 하는 마음이 있었지요.
그렇게 못한 것은 신념 때문이 아니라,
내가 '
주변머리'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앞에 나서 개척하는 쪽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뒤에서 가만히 따라가는 쪽이었지요.
 
그러면서 '
난 어떤 노래도 소화해낼 수 있지만 발라드풍 가수들은 내 노래를 나처럼 감정 넣어 부를 수 없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지요.
세월이 지나고 보니 '
뽕짝 가수'로 살아온 데 대해 자부심을 가져요."

아마20년 전까지도 그녀는 '
촌스러운 것'에 대해 당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가 1989년 '
데뷔30주년 기념 공연'을 세종문화회관에서 하려고 했을 때도,
"당신 노래에는 질 낮고 수준 낮은 관객들이 올 것"이라는 이유로 대관(貸館) 불가 통보를 받았다.
 
그녀는 "
정말 처참한 기분이었다"고 떠올렸다.

그녀는 당시 고건 서울시장을 만나 '
재작년(1987년)에 내 금지곡들이 해금(解禁)이 됐다.
 
그 노래를 마음껏 부르고 싶으니 한을 풀게 해달라'고 사정해 공연은 겨우 성사됐다고 한다.

그 공연에는 4당(黨) 총재 부부가 모두 참석하는 등 대성황을 이뤘다.

 


1964년 발매된 공전의 히트곡‘동백아가씨’앨범 재킷(왼쪽),
'한국대중가요 60년 60인의 스타전(展)'에 전시된 앨범(오른쪽).
 
―인생의 슬픔을 알면 얼마나 알았기에,
이 선생의 노래는 왜 대부분 슬픈가요?

"당시 '
동백아가씨'가100만장 이상 팔리는 대히트를 하면서,
비애와 한(恨)을 담은 그런 노래들만 내게 주어진 겁니다.
 
내가 그 나이에 인생의 깊은 면을 알았다기보다 노래 가사의 감정을 잘 살려 표현했던 게 아닌가.
나를 데뷔시킨 작곡가 나화랑 선생님이 '
가사 전달이 정확해야 하고 가사의 내용대로 감정을 실어라.
가사가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불러라'라고 주문했어요."

햇볕에
그은 얼굴,
주름들,
세월로 인해 검게 염색한 머리,
왜소한 체구로 이뤄진 그녀가 과거 시절을 말할 때면 우는 것이 아닌데도 눈빛은 젖어 보였다.

―혹시 천성이 슬픈 것을 좋아합니까?

"그건 아니나,
나는 활동성이 있지는 않아요.
일이 없으면 집에서 조용히 있어요.
과거에는 뜨개질을 그렇게 많이 했어요.
친구들끼리 어울려 나돌아다니지를 않아요.
실제로 한두명 빼면 내겐 친구도 없어요."

내가 "
그런 분이 어떻게 십대부터 가수가 되겠다고 쫓아다녔습니까?"
 
하자,
그녀는 "그건 내 염원(念願)이었으니,
가수 하겠다는 용기는 있었나 보지요"하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름 앞에 따라붙는 '
엘레지(悲歌)의 여왕'이란 빛나는 타이틀은 누가 지어줬나요?

"'동백아가씨'가 나온 뒤 제 일대기를 영화로 만든다고 했어요.
지금의 제 나이도 아니고 갓 나온20대 가수의 일대기라는 것이 너무 우스운데,
그때는 멋모르고 너무 어려서,
그냥 영화 스토리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영화는 장삿속으로 내 성장 과정의 가장 아픈 부분을 과장되고 처절하게 만들어 놓았어요.
너무 속상했지요.
영화 내용은 그렇지만 그 타이틀 자체는 불만이 없어요."

―데뷔 연도가 같고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패티김에 대한 경쟁의식은?

"당시는 그분의 전성기였어요.
미모와 노래실력이 뛰어난데다 세련됐고 외국 생활을 해 무대매너도 너무 좋았어요.
내게 없는 걸 갖추고 있었으니,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
난 저렇게 될 수 없을까'
하는 부러운 존재였고 선망의 대상이었어요.
하지만 그분처럼 따라간다면 그분 밑에 있게 된다는 걸 알았어요.
누구나 자기의 길이 있는 것이지요."

―지난번 '
노래인생 50년' 기자회견에서 "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주부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요?
평범한 주부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빼어난 가수를 갖기는 정말 어려운 것이 아닐까요?

"누구나 주부를 할 수 있다고요?
저는 주부를 여성의 대표라고 봅니다.
 
인기를 얻어 유명해져도,
가정이 없으면 허울만 좋은 것이지요."

―재혼한 뒤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
힘든 시집살이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갈등은 없었어요.
그건 아닙니다.
시어머니는 완고하고 과묵한 분이었지요.
내가 바쁜 가수생활을 하다가,
전혀 살림을 모르고 종손(宗孫) 집안에 들어오니 너무 힘들었지요.
제사(祭祀)가 있으면 집안 사람들이40명 이상 모입니다.
 
부침개만 두세 광주리씩 부치고 제사 음식을 만들어 상(床)을 차려야 하는데,
해보지 않았던 것이었지요.
'내가 가정을 얼마나 잘 꾸려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도 있었지만,
'무엇이든 어려움 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서 한 가정을 이뤄야 한다'는 다짐을 많이 했지요."

―진정 예인(藝人)이라면,
그런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로 갔을 텐데요.

"내가 초혼(初婚)에 실패하고 나니까,
'가정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인생의 낙오자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집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어요.
집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가수가 아니고 주부입니다.
 
그렇게 쭉 살아왔어요."

―만약 노래와 가정 중에 택하라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요?

"노래와 가정…,
지금에 와서 둘 중 하나를 묻는다면 말할 수 없어요."

―자신의 유명세로 가려진 남편에 대한 미안함으로 통장,
집문서에 이 선생의 명의는 물론 남편과의 공동 명의로도 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제 이름으로 하는 것을 피해왔어요.
우리가 공식석상에 함께 나갈 때,
옆에 있는 분이 '
누구의 부인'이 아니라 '
누구의 남편'이 됩니다.
 
그게 너무 미안했어요.
이분은 자존심 상한 적이 많았을 겁니다.
 
나는 '
남편'이란 말도 안 썼어요.
그 말이 좋지 않게 들릴 거라 생각했어요.
'우리집 양반',
'우리집 주인'이라고 했어요.
세상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디지털 시대가 왔지만,
나는 옛날 사람이 맞아요."

―한 음악평론가의 말로는 '당일 곡을 받아 가사를 외웠고 음반취입을 했고,
미모도 율동도 안 되지만 마이크 앞에서 똑바로 서서 노래 하나로만 대성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요즘 세상이었다면 과연 성공했을까요?

"노래는 타고나야 하는 것은 맞아요.
아버지 친구분들이 한잔하고 유행가를 부르면
다음날 이 조그만 애가 그 노래를 전부 외워서 구성지게 불렀어요.
그때는 오로지 라디오밖에 없어 노래만 잘하면 됐지요.
 
하지만 요즘은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모습이 좋아야 되고
그 모습을 갖추기 위해 경제적 뒷받침도 있어야 하지요.
요즘 세상이라면 내가 지금처럼 되기가 어려웠겠지요."

―이제 젊은 가수들은 "
이미자 선생님처럼 오래도록 노래하고 싶다"며 이 선생을 찾습니다.
당사자로서 어떤 기분이 듭니까?
50년 세월 동안 '
같은' 노래를 부르면 지겨움은 없을까요?

"듣는 입장에서,
내 노래를 지겹게 듣는 분이 많은가요?
나는 노래를 계속 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정말 좋아해 주시기 때문에 그 성원에 힘입어 오늘날이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답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늘 무대에 섰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앞서 말한 1989년 데뷔 30주년 세종문화회관 기념 공연과,
첫 월남파병 부대였던 비둘기부대에 위문공연을 갔던 때지요.
가면 죽는다고 다들 안 가려고 했어요.
박정희 대통령께서 나를 위문단에 넣었어요.
 
당시 우리 국적기가 없어,
사흘 만에 사이공(호찌민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부대에 갔더니 사단가(歌)가 '동백아가씨'였어요.
장병들의 이글이글 거리는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그 장면이 아직 생생해요.
그 무대 위에서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고,
완전히 눈물바다가 됐지요.
그건 잊을 수 없더라."

그녀의 눈자위가 젖었다.

―그 시절이 지금보다 더 좋은가요?

"그건 아니고….
지금이 낫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못 알아들어요.
나도 이들의 말을 잘 못 알아들을 때가 있지만."

―잘 살아왔지요?

"잘 참고 살아온 것이지요.
사람이 사는데 속상하지 않고,
기쁜 일만 있을 수는 없지요.
그러니 참고 견디어왔지요.

혼자 가슴에 새겨 넣고…."

'엘레지의 여왕(女王) 가수 이미자(68)씨가 자신의 노래인생 50년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진부 민봉기 기자 
보식 선임기자 cong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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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 만난 사람]

 

데뷔 55주년 기념 전국투어 앞둔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내인생의 노래는 `동백아가씨`…

 

 

유신시절 비록 금지곡이었지만 박정희 前대통령도 좋아했죠

월남병사·파독광부 위문공연 무대마다 눈물바다된 이유?…

그 시절 애환을 어찌 잊을까요

5년전 무대가 마지막이라 생각 55주년 맞은 지금 내인생의 덤…

관객들이 아쉽지않게

 

기사입력 2014.04.04 16:15:11

종수정 2014.04.04 16:34:23


 
올해로 데뷔 55주년을 맞는 `엘레지의 여왕` 가수 이미자(73)는 천생 여자다.

지난 2일 약속 장소인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 가니 그녀는 1층 로비에 있는

커피숍 한 귀퉁이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하얀색 재킷에 검정 정장치마,

깔끔한 머리와 화장,

귀고리ㆍ

목걸이ㆍ

반지까지 꾸밈에 빈틈이 없었다.

 

이미자는 인터뷰 내내 소파에 등 한번 기대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말솜씨가 없다`며 인터뷰 요청을 번번이 거절했던 그녀다.

이미자는 기자에게 본인 인생사를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 목소리는 커피숍에서 틀어주는 음악 소리에 묻힐 정도.

기자 귀를 쫑긋 세웠다.

이미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가수다.

 

1959년 `열아홉순정`으로 데뷔한 그녀는

1960년대 매년 꼬박꼬박 10여 장의 음반을 발표해 연이어 히트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1964년 발매한 `동백아가씨`는 10만장 넘게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가 발표한 노래만 2100곡.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과 노래를 취입한 가수로 1990년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힘으로(억으로) 된 건 아니고 자연스레 그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지금이야 한두 곡 만드는 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당시엔 많은 곡을 한꺼번에 녹음하고,

라이브로 부르던 시절이니까….

노래가 계속 히트를 치니까 작곡가들이

이미자에게 노래를 줄 수 있게 해 달라고 몇십 명이 찾아올 정도였어요.

하루에 10~20곡 녹음한 적도 있죠."

이미자는 가요계에서 `연습 안 하고도 노래 잘 부르는 가수`로 통한다.

 

대표곡인 `흑산도 아가씨`도 1965년 당시 지방 공연이 겹쳐 노래 연습을 한 번도 할 수 없었다.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스튜디오로 직행해 즉석에서 이 노래를 비롯한 4곡을 녹음해 완성했다.

 

"너무 바빠서 연습할 시간이 정말 없었어요.

악보를 받아서 그 자리에서 바로 녹음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1960년대 말쯤이었을 거예요.

한 해에 수십 곡을 부르고 나니 철도 없이 제가 (노래의)질은 전혀 생각지 않고

양으로만 녹음을 해왔구나,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죠.

" 이미자는 노래 멜로디를 가장 중시하고 가사가 그다음이다.

 

삶과 시대의 애환을 가사가 잘 그려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여기에 특별한 에피소드까지 붙으면 금상첨화다.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를 묻자

이미자는 주저 없이 유신정권 시절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인

`동백아가씨`

`섬마을선생님`

`기러기 아빠`를 꼽았다.

이 노래들은 민주화운동 이후에야 해금이 됐다.

 

그녀는 1989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연 데뷔 30주년 기념공연 때 보란 듯이 목놓아 불렀다.

김영삼ㆍ

김대중ㆍ

김종필 등 당시 내로라하는 유력 정치인들도 모두 참석했다.

 

잠시 회상에 잠긴 그녀 눈가에 눈물이 약간 고였다.

역설적이게도 `동백아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저를 참 예뻐해 주셨어요.

귀빈들이 오시거나 영빈관에 만찬이 있을 때는 제가 청와대에 꼭 갔어요.

`동백아가씨`와 `황성옛터`를 워낙 좋아하셔서 그 노래는 빠지지 않고 꼭 불렀죠.

(박정희 대통령)성격은 소탈하고 깐깐하세요(웃음).

존경스러운 분이에요.

" 이미자가 당시 소녀였던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도 1960년대 이 시기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으니 옛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라고요.

박근혜 대통령이 어렸을 때 청와대 안뜰에서 뵌 적이 엊그제 같은데….

어머니(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다음에 상가에 갔을 때도 뵙고,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제 50주년 공연(2009년)에 직접 무대까지 찾아오셔서 격려도 해주셨어요.

저한테 좋은 감정이겠죠."

유명한 월남 공연도 박 전 대통령 지시에 따라 전격적으로 추진된 행사다.

 

박 전 대통령이 위문공연 주인공으로 이미자를 지목했고,

월남전 때 네 차례 공연을 했다.

 

이미자는 외국 국적의 비행기를 빌려 타고

김포공항과 홍콩을 거쳐 필리핀 클라크 군용비행장에 내렸다.

 

문공연 때마다 장병들은 눈물바다가 됐다.

"위로가 되기는커녕 장병들 마음을 상하게 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어요.

월남에 가면 베트콩한테 죽는다고 해서 연예인 중에 가려는 사람이 없었지만

대통령께서 저를 특별히 지목해 주실 정도로 저를 각별히 아끼셨죠.

정말 잊을 수가 없는 공연이에요."

이미자 공연엔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1960년대 월남 공연에서부터 지난해 독일에서 열린 파독 광부 위문공연에 이르기까지

이미자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늘 눈시울을 붉힌다.

 

이미자는 무대가 늘 눈물바다가 되는 이유로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꼽았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잘 모를 거예요.
우리 또래 세대는 나라 잃은 설움,
6ㆍ25전쟁을 겪은 설움이 있고,
휴전 후 새마을운동 하면서 서독으로 리비아로 월남으로 가서 고생했어요.
저도 (1951년)1ㆍ4후퇴 때 언 한강을 넘어 피란을 갔었어요.
먹을 게 없어서 양조장 술지게미를 먹고 체해서 드러누운 경험도 있어요.
이런 애환을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이미자 스스로 고백했듯 그녀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첫 남편과는 3년 만에 이혼했고 첫딸과는 생이별을 했다.
 
PD였던 현 남편과 재혼한 뒤 시부모 밑에서 눈물겨운 시집살이도 했다.
 
전처 소생인 두 딸을 거두고 아들도 낳았다.
남편 밥도 못 해 주는 며느리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매일 새벽에 일어나 아침상을 차리며 살아 왔다고 한다.
일본 엔카 가수가 된 첫딸과는 내내 서먹하게 지냈다.

데뷔 50주년을 기념해 이뤄진 매일경제와의 2009년 인터뷰에선 "
눈을 감고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동백꽃잎처럼 빨갛게 멍이 든 세월"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동안 삶이 고단하진 않았느냐고.
"맞아요.
전 어려서부터 너무나 고단하게 살았어요.
세월을,
시대를 그렇게 만났던 거죠.
전쟁 터지니까 학교도 제대로 못 가고 피란생활을 했어요.
가요계에 들어와선 아픔도 많이 겪었고,
평탄하지만은 않았죠.
그런 건 회상하고 싶지 않아요.
다시 들추고 말하고 싶지 않은 기억은 누구나 다 있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사람이니까….
즐거운 것보다는 아픈 게 많았어요."
인생사의 아픈 기억들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말아 달라는 완곡한 표현이다.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그녀는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스타`로 살아왔다.
`평범한 삶`은 천생 여자인 이미자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저는 `평범`을 참 좋아해요.
어디 나서는 것 안 좋아해요.
한발 뒤에 물러서서 내 마음에 들면 그 사람 의사대로 따라하고,
마음에 안 들면 포기하는 거죠.
는 성격상 뒤따라가는 사람이지 앞서나가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러고 보면 저는 움츠린 생활을 참 많이 했네요.
게 습관이 됐어요.
어디를 가도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되니까 저 자신도 모르게 (생각과 행동이)굳어졌어요.
" 그녀가 나이가 한참 어린 기자 앞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이유를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의 삶은 어땠을까.
"어느 한 가지도 쉬운 건 없었어요.
그래도 그럭저럭 잘 견뎠던 것 같아요.
저한테는 인내가 참 많이 필요했어요.
인내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데 인내한 보람과 행운이 있었어요.
감사한 일이죠.
(데뷔)초창기는 너무 고생스러웠고 힘이 많이 들었다는 기억밖에 없어요."

이미자는 오는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시작으로 6월까지
경주ㆍ
춘천ㆍ
일산ㆍ
대구ㆍ
부산ㆍ
성남ㆍ
수원 등지에서 데뷔 55주년 기념 전국투어를 한다.
"며칠만 지나면 막이 오르는데 정말 조심스러워요.
제가 아프든 죽든 제 사정은 중요치 않아요.
관객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 매일 긴장의 연속이죠."

`나이도 있는데 전국 공연이 힘들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이미자는 유독 `마지막`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선배 연예인들 숭(흉)한 마지막 모습을 많이 봤어요.
마지막까지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방향에서 마무리가 돼야겠다고 생각하고,
내 모습이 남들 보기에 숭하지 않나 늘 자문해요.
데뷔 50주년 때도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무대에 섰는데 55주년은 `덤`인 것 같아요.
잘하다가 마지막에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 그런 공연이 된다면 팬들한테 너무 실망을 드릴 것 같아요.
이번 공연은 관객들이 아쉽지 않게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혹시 새 앨범을 기대해도 되느냐고 묻자 "
생각 없다"고 잘라 말했다.
"현재에 충실하려고 하기 때문에 앞으로 계획이나 포부도 말씀드릴 게 없어요.
너무 떠들어대지 말고 조용히 (55주년 행사를)치르자는 생각이에요."

이번 공연엔 외국인임에도 한국 전통가요를 부르는 독일인 `로미나`가 게스트로 출연한다.
공연 문의는1566-2505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는…
△1941년 10월 서울 출생
△1959년 `열아홉순정`으로 데뷔
△1962년MBC 10대 가수상 수상
△1964년 `동백아가씨` 발표, 초유의 판매기록
△1965년 첫 월남 위문공연
△1967년 무궁화훈장 수훈
△1968년 `동백아가씨` 등 앨범제작 금지 처분
△1987년 `동백아가씨` 등 10여 곡 해금
△1989년 대중가수로선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 공연
△1990년 30년 동안 노래 2069곡 발표로 기네스북 등재
[이기창 기자 / 사진 = 박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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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승준 기자의 TV POP

    이것이 바로 이미자 목소리의 비밀

  • 권승준
    문화부
    E-mail : virtu@chosun.com
    디지털뉴스부에 있을 때 김연아 금메달, 천안함 폭침, 월드컵, ..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 조선일보 2009년 입사신이 내린 목소리’….

입력 : 2014.04.07 05:39

 

 

‘엘레지의 여왕’,
‘신이 내린 목소리’….
오는 10일 데뷔 55주년 공연을 앞둔 가수 이미자를 수식하는 말은 무수히 많습니다.
 
반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놓은 음반만 560장.
이런 대기록을 쌓아올리는 동안,
이미자에게는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의 목소리입니다.
저음에서는 비음 섞인 잔잔함을,
고음에서는 꺾어질 듯 말 듯한 가성을 적절히 섞는 애절함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그 목소리 하나로 수많은 사람을 55년간 웃기고 울려왔습니다.

‘신이 내려준 선물’이라는 이미자의 목소리는 학자들의 탐구 대상이 될 정도입니다.
 
2009년 숭실대 소리공학연구소 배명진 교수는 이미자의 발성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
그의 노래 10곡을 골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이미자 특유의 말 하듯 노래하는 발성으로 내뿜는 폐활량의 지속 시간이
일반인의 2.5배 이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소리를 내면서 공기를 한번 최대한으로 들이마셨다가 내뿜을 수 있는 최대량이
일반인보다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숨을 자주 쉬지 않고 노래하는 능력이 타고났다는 것이지요.
이미자가 저음과 고음 모두에서 풍부한 바이브레이션을 쓸 수 있는 것도 이 남다른 폐활량 덕분입니다.

 

 
또 이미자의 성대 떨림의 기본음이 매우 정교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를 두고 배 교수는 “
이미자의 소리는 저음부터 고음까지 전 스펙트럼 대에 걸쳐 정확한 소리를 낼 수 있다”며 “
이 덕분에 사람들이 듣기에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배 교수는 이미자가 발성 이외에도 음감을 느끼는 재능이 남다르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이 덕분에 마이크의 성능,
음의 울림 등 공연장마다 다른 환경에도 탁월하게 적응해 한결같은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이미자의 한결같은 목소리의 비밀을 풀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1993년 한 방송사가 이화여대부속병원 음성관리소에 의뢰해
이미자의
성대,
음폭,
발성,
공기역학 부문으로 정밀 검사했을 때도 “
이씨의 성대는 점액질이 풍부하고 훈련이 아닌 천부적인 창법,
발성법을 체득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런 결과를 종합해보면,
한 마디로 노래를 하기에 타고난 재능을 가진 셈입니다.
 
그의 변함없는 목소리가 워낙 화제가 되다 보니
일본에서 그의 사후 성대를
영구 보존해 해부학적으로 연구하고 싶다고 제안을 했다는 낭설까지 흘러나올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미자는 “
그런 제안을 받은 적은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사람들을 매료시킨 덕분에 이런 낭설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 비밀을 밝히는 것에 앞서,
공연장에서 직접 그의 목소리를 듣고 즐기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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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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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m****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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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한자이름긍금해요

2020.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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