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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 고장의 옛이야기
jmh0**** 조회수 21,978 작성일2018.04.25

북구 운암동 운암초 3학년 사회숙제 입니다.

우리 고장의 옛이야기를 조사계획서를 작성해서 그것을 토대로 조사를 해오랍니다.

아니는 "청옥동 호랑이바위 유래를 알아보자"고 조사 목적을 썼는데

답이 잘 나오질 않아요.

청옥동 호랑이바위 에 대해서 조사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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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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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광주 북구의 옛 이야기)


1. 김덕령에 대한 이야기

 

① 치마바위

 

충장공의 누님인 김응희 부인도 힘이 천하장사로서, 원효계곡에 있는 치마바위는 김부인이 치마폭에 싸서 갖다 놓은 바위라서 치마바위라 일컬어지고 있다.

 

② 뜀바위

 

무등산 정상은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의 삼대로 형성되어 있다. 삼대는 어느 것이나 선돌이 즐비하게 솟아 있어 기이하고도 장엄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지왕봉은 일명 비로봉이라고도 하는데 여기 정상에 뜀바위가 있다.

 

김충장공이 어렸을 때 지왕봉 정상의 이쪽 바위에서 저쪽 바위로 뛰어다니면서 무술을 연마하고 담력을 기르던 훈련장이었다는데서 이곳을 뜀바위라 전해 오고 있다. 왜정 때 이 전설을 들은 일본군 장교 하나가 나도 뛸 수 있다고 뛰어 내리다가 죽은 일이 있다.

 

③ 문바위

 

무술 훈련에 관한 전설도 다양하다. 지금의 송암동 옥천사 뒤 금당산 옥녀봉을 말을 타고 뛰어 넘으면서 애마를 조련했다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무등산 문바위의 기사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다. 무등산 지공너덜에서 주봉으로 가노라면 진조삭창의 왼쪽에 높은 돌기둥이 두개 서있고 그 사이로 통로가 있어서 이곳을 문바위라 한다.

 

충장공이 어려서 이 문바위에서 말을 달리고 활을 쏘았는데 하루는 이곳에 이르러 백마에게 이르기를 “내가 큰 일을 이룩하려면 백마야 너 또한 출중해야 하느니라 이제 내가 활을 쏠 터인데 이 화살이 건너편 마살리에 이르기 전에 네가 거기에 먼저 당도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너의 목을 치겠노라”
고 했다. 백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살리는 문바위에서 30리 가량 되는 화순 땅인데 화살이 충장공의 활시위를 떠나자마자 말도 번개처럼 앞발굽을 하늘 높이 쳐들더니 마살리를 향해 질풍처럼 달려갔다. 마살리에 도착한 김장군은 화살이 미처 날아오지 않자 화살이 먼저 와서 어딘가에 박혀 있는 줄로 단정하고 약속대로 칼을 뽑아 백마의 목을 치려 하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제야 화살이 횡하고 날아와 말 앞에 꽂히었다는 것이었다. 김장군도 장군이지만 말도 그에 못지 않게 준마였다는 전설이다.

 

④ 김덕령의 어머니

 

김덕령의 어머니가 그를 뱄을 때의 일이다. 김덕령의 어머니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팔자였다. 어느 날 김덕령의 어머니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늙은 중 하나가 나타나서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나는 중이 아닙니다. 호랑이입니다. 나는 이제 저기 저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여자를 잡아먹고 사람으로 다시 환생하게 됩니다. 내가 하는 것을 보고 계십시오”
하고서 재주를 세 번 벌떡벌떡 넘고 나서 남산만한 큰 호랑이가 되어 밭으로 달려왔다.

 

호랑이는 밭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호랑이는 한참 동안 밭 주위를 뛰어 다니면서 돌다가 다시 재주를 세 번 넘고 다시 중이 되어 지나가는 사람에게로 와서
“암만해도 저 여자를 못 잡아먹겠는데요. 밭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불칼이 밭 둘레를 삥 둘러 쌓여 뛰어 들어 갈 수가 없게 하는군요. 오늘은 시각을 놓쳐서 나는 사람으로 환생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호랑이는 이렇게 말하고서 어디론지 가버리고 말았다.

 

김덕령의 어머니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팔자였는데 명산의 정기를 탄 김덕령이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천지 신명이 불칼을 내 보내서 뱃속에 있는 김덕령을 살린 것이다.

 

⑤ 덕령의 용기

 

덕령이 열다섯살 나던 해 서봉사로 글공부를 떠났다. 부모님이 챙겨준 책과 문방구하며 식량과 옷가지, 침구 등을 하인에게 지워 여섯 명의 마을 아이들과 함께 갔다. 덕령소년 일행이 주지 스님에게 인사하고
“스님, 오늘부터 서봉사에서 글을 읽고 싶습니다.”
라고 간청했다. 주지는 이를 선뜻 받아들여 방 한 칸을 지정해 주었다. 소년들은 모두 좋아라 하고 짐을 풀었다. 그리고 불당에 들어가서 부처님 앞에 합장배례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봉사의 둘레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싱그러운 나뭇잎과 노래하듯 흐르는 개울물, 지저귀는 산새의 울음에서도 삶의 희열을 느끼게 했다. 덕령은 절에서 지어 주는 식사도 마음에 들었고 또 모두 친절하게 대해 주어 이 절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소년들은 날마다 글을 읽고, 쓰고, 외우고 하며 공부에 열중했다. 서봉사의 조용하고 아늑한 환경은 공부하기에 더 없이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다만 밤에는 사나운 짐승들이 울며 지나다니기 때문에 다들 무서워서 방문 밖을 얼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덕령소년만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녔고 게다가 친구들의 심부름까지 도맡아 해 주었다.

서봉사에 온지 일년이 지난 어느 날, 덕령이 글을 읽다말고 뒷간에 가기 위해 뜨락에 나간 순간 어둠 속에 커다란 짐승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참 이상한 짐승도 다 있군.”
하고 달려가 덮치려고 하는데 오히려 산짐승이 앞발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어흥!”
“이것 보게나, 예사 짐승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뭐지?”

덕령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먼저 냉큼 동물의 역습을 피하는 듯 하다가 이내 날쌔게 다가서면서 주먹으로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말이 주먹이지 그것은 바윗돌 같은 강렬한 힘이 있었다. 이번에는 발길로 짐승의 배를 걷어찼다. 짐승은 더 저항하지 않았다. 한 마리의 짐승을 잡기가 수월한 일은 아니었지만 덕령은 그것을 대청 기둥에 밧줄로 묶어 두었다. 용변을 마치고 되돌아온 덕령이 짐승을 살펴보니 동물은 마루 밑에 들어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덕령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얼른 나가 마루 밑을 보고 오너라.”
“무슨 일이 있느냐?”
“어서 나가 마루 밑을 보면 알게 아냐”
“어젯밤 집에서 먹을 거라도 가져왔어?”
“글쎄, 그건 마루 밑을 보면 알게 될 거다.”
친구들은 의아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다시
“먹을 것이라면 덕령이 네가 이 방으로 가져오지 않겠어?”
“덩치가 커서 나 혼자는 어려울걸, 하하하.”
덕령의 말에 모두 밖으로 나갔다. 대청 기둥에 밧줄이 매어져 있고 그 밧줄은 마루 밑으로 들어가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소년들은 다시 엎드려 마루 밑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모두 놀랬다. 그 중에는 어머니하고 비명을 지르는 소년도 있었다.

 

그때서야 덕령이 나와서 범을 힐끗 쳐다보면서 저놈이 어제 밤에 내가 뒷간에 가는데 옆에서 서성거리기에 격투를 하여 잡았노라고 설명하면서 자기의 손등과 발등을 살펴보는데 범에게 할퀸 자국과 피가 묻어 있었다. 덕령의 말을 듣고 난 스님들과 동무들은 놀라우면서도 덕령의 용기에 감탄하였다.

그날 절 밖에서는 범고기 잔치가 벌어졌고 호랑이 가죽을 선사받은 주지 스님은 덕령의 용기를 몹시 칭찬하였다.

 

⑥ 덕령의 지혜

 

어느 날, 폭우가 이틀간이나 쏟아져 산골짜기마다 물이 넘쳐흘러 홍수가 졌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뚝 그치니 이틀간이나 방안에 갇혀 있던 아이들과 중들이 모두 절 밑의 냇가에 나아가 물 구경을 하는데 나무토막, 짚다발, 가축들이 떠내려왔다. 그때 건너편에서 한 총각이 이쪽을 향해 물 속을 건너오고 있었다. 총각은 냇가 중간쯤에서 물살이 세어서 그런지 더 오지 못하고 “만수 도련님 !” “만수 도련님!”하고 이쪽을 향해 외친다.

 

총각의 말인즉 덕령의 글동무인 만수 도령의 어머님이 돌아가셨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만수는 그 이웃 동네의 호반의 자제로서 서봉사에 와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다. 만수는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기별을 받고 이 홍수진 물을 어떻게 건널까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통곡을 하였다. 열 여덟 살의 만수가 서럽게 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여러 사람들은 그저 안타깝게만 여기고 있었다.

 

이때 덕령이 이러고만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듯이 곁에 있는 중에게 어서 절로 가서 큰 함지를 가져오라고 한다. 중은 무엇 때문에 함지를 가져오라는 것인지 미심쩍게 생각하면서도 절에 가서 큼직한 나무 함지를 가져왔다. 함지를 받은 덕령은 그것을 물에 띄우고 만수더러 옷을 벗어 머리 위에 얹혀 매라고 이른 다음 자기의 바지 가랑이를 걷어올리고 함지 속에 들어서더니 한 손으로 만수의 손목을 잡고 한 손으로는 나무막대기로 물 속을 짚으면서 건너기 시작했다.

 

둘이 냇물 한가운데쯤에 이르렀을 때 물살이 빨라 자칫하면 함지가 뒤집히고 떠내려갈 듯 하였지만 덕령이 막대기를 집고 버티면서 조금씩 건너편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두 소년이 저쪽 냇가에 도달하자 이쪽 냇가에서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울렸다.

 

저편 언덕에 올라선 만수가 고맙다고 인사하고 집으로 향하는 것을 본 덕령이 다시 함지 속에 편히 앉아서 이쪽으로 되돌아오니 모두가 덕령의 지혜와 용기를 칭찬하였다.

 

⑦ 누나와의 경주(환벽당의 돌담과 누나)

 

덕령의 누이는 청계 김경회에게 출가했으며 평소 도량이 크고 힘과 지혜가 뛰어난 여장부였다. 덕령의 누나가 어머님의 병환이 걱정되어 친정인 석저촌에 와있을 때의 일이다. 덕령은 형 덕홍과 동생 덕보가 화순 다녀오면서 주막집에서 있었던 일을 누나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여자에게 행패를 부리던 불한당 5~6명을 호통쳐 무릎 꿇고 빌도록 했던 일이다. 앉아서 덕령의 얘기를 자초지종 듣던 누이는 조용히 덕령을 불렀다.
“덕령아, 힘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다. 꼭 쓸데에만 써야지”
“……”
“네가 그렇게 힘이 세다면 나와 경주를 한번 할까?”
“어떻게 무슨 경주를?”
“나는 정오까지 이 무명베로써 너의 도포를 지을 테니 너는 그 동안 환벽당 밑의 언덕에 돌로 성을 쌓아라”
두 남매는 서로의 지혜와 용력을 다했다. 누나는 무명베를 끊어 도포를 만들고 덕령은 10여리나 떨어진 무등산 중턱까지 뛰어 달리며 돌을 날라 성을 쌓았다. 막상막하 누가 이길지 모르는 숨막히는 시합이었다.

 

누나는 누나대로 덕령은 덕령대로 온힘을 다해서 도포짓기와 성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동생 덕령의 밖에 나타나는 슬기와 용력을 억제하고 자성케 하기 위한 누나의 동생에 대한 형제애였다. 누나는 이미 도포를 지었으나 마지막 마무리인 동전을 달지 않고 서성대며 문밖에 신경을 썼다. 정오가 약간 못미처 덕령은 숨을 헐떡이며 집에 들어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덕령은 누나가 오른손에 바늘을 들고 왼손에 동전잎을 들고 있음을 보고,
“천하 여장부 누나도 별 수 없구만. 보라구 환벽당 밑의 성을. 내가 이겼지”
덕령은 승리감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덕령의 누나는 덕령의 재능을 눌러주지 못한 것이 후회됐으나 덕령이 치밀하고 견고하게 쌓아온 50m의 성을 보며 흡족해 했다. 덕령은 누나를 이긴 승리감보다는 자신이 하려고 노력하면 능히 이룰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⑧ 누나의 씨름 시합

 

덕령은 어려서부터 무등산에 들어가 무술을 익혀 여러 큰 씨름판에서 득판을 했다. 그러나 덕령의 바깥 활동을 은근히 걱정한 것은 그의 누나였다.
‘남아가 어려서 너무 뛰어나면 화를 당한다는데’

 

덕령의 누나는 덕령의 기를 꺽어주고 또 씨름에 미친 버릇을 고쳐줄 결심을 했다. 창평장터에 씨름판이 서고 여기에 덕령이 출전한다는 소식을 들은 덕령의 누나는 남장을 하고 씨름판에 나왔다. 그날은 9월 9일 중구날이어서 달이 일찍 져서 씨름판은 횃불을 밝히고 상씨름에 들떠 있었다. 덕령은 마침 이웃 고을 창평 출신의 ‘홍장사’라는 장정을 물리치고 씨름판을 휘젓고 있었다.
“누구 이 총각 당할 사람 없소? 없으면 판 뜯네”
판장이의 외침에 덕령의 누나는 대답을 했다.
“여기 내가 있소이다!”

 

그녀는 이마에 수건을 동여 메고 나풀거리는 수건 끝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상대방을 얼핏 바라본 덕령은 좀 안심했다. 덩치로 보아 만만하고 별 힘도 없어 보였다. 덕령은 이 친구를 한번 혼줄을 내놓기로 작정했다.

 

“자 마음대로 잡으쇼.”
덕령은 그대로 서서 양팔을 늘어뜨린 채 말했다. 상대방을 깔보고 한 팔로 잡아 주는 그런 태도였다.
‘동생의 이런 오만을 내 기어이 고쳐줘야 한다.’
덕령의 누나는 맘속으로 다짐하며 덕령의 앞 무릎을 짚고 허리를 뒤로 쭉뺐다.

 

덕령의 장기인 ‘반들임’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상대방의 만만치 않은 실력을 알아차린 덕령은 정신이 번쩍 들어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 샅바를 잡아 쥐려 했으나 맘대로 되지를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초조해진 덕령을 보고 누나는 자신이 조금만 손을 쓰면 간단히 끝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동생이 행여나 다칠까봐서 그렇게 하질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오랜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 그녀는 바싹 다가가 덕령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두서너 발 앞에다 바둥거리는 덕령을 그대로 땅에 내려놓았다.

 

승부가 결정나자 구경꾼들은 환성을 질러 뜨내기 씨름꾼에 경의를 표했으나 덕령의 패거리는 덕령의 궁둥이가 땅바닥에 닿지 않았다며 재시합을 요구했다. 덕령의 누나는 뒤로 조용히 물러나서 동생의 태도를 지켜봤다. 멍하니 땅바닥에 앉아 있던 덕령은 궁둥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내가 졌습니다. 정말 어른 한번 잘 만났습니다.”

 

자신의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고 의외의 상대방에게 치하 인사라도 하려는 덕령이였다. 생각 밖으로 덕령이 떳떳하고 겸손하게 나오자 덕령의 누나는 구경꾼들을 헤치고 만족한 마음으로 그 자리를 피해 버렸다.
‘과연 동생은 큰그릇이구나, 내 괜한 생각으로 사내 대장부의 의기를 꺾은 것은 아닌지’

 

그 뒤부터 덕령은 일체 씨름판을 찾는 일이 없었다. 그는 이름도 모르는 무명 청년에게 무참하게 패배한 일에 충격을 받았고 또 그것을 반성의 기회로 삼았다. 그 뒤부터는 그는 크게 깨우쳐 학문과 무술 익히기에 전념하였다. 훌륭한 장수가 되어 나라를 위해 큰 힘이 되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되었다.

 

⑨ 김덕령의 신기

 

김덕령의 할아버지는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김덕령의 아버지는 장사 아들을 낳아서 그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김덕령의 아버지는 이십 년 동안이나 각지의 명산 대천을 돌아다니며 훌륭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치성을 들인 끝에 김덕령을 낳게 되었다. 김덕령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어 여러 가지 술법을 배우고 있었고 아버지에게서 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자주 들어왔다. 그래서 그는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결심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김덕령은 유명한 대장장이에게 신검을 한 자루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대장장이는 온갖 정성을 들여서 칼을 만들었다. 대장장이는 자기가 만든 칼을 김덕령에게 주면서
“이 칼에는 내혼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이 칼로 내 목을 쳐서 시험해 보시오”
하고 말했다.

김덕령은 이 말을 듣고 대장장이의 손을 잡고
“고맙소. 이 칼을 만들었다는 말을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마시오”
하고 단단히 부탁을 했다.

어느 날 김덕령은 친구와 바둑을 두다 말고 잠깐 어디론가 나갔다 들어왔다. 그는 신검을 들고 축지법을 써서 서울로 가서 할아버지의 원수인 대신의 목을 쳐죽이고 돌아온 것이었다. 서울에서는 갑자기 대신이 칼을 맞고 죽었으므로 야단이 났다. 그리하여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데 대신 집의 하인의 말이 대신을 죽인 놈이 자기를 광주에 사는 김덕령이라고 말하더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졸들이 광주까지 김덕령을 잡으러 내려왔다.

 

나졸들이 광주에 와서 조사해 보니 그때 김덕령은 친구와 바둑을 두다가 잠깐 밖에 나갔다 온 일밖에 없는데 그 사이에 어떻게 광주에서 서울까지 천리 길을 갔다 올 수가 있겠는가하고 나졸들은 김덕령을 잡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김덕령 장군에 대한 전설이 여러 가지 전해 내려오는데 당시 사람들은 김장군을 천하 대장군이라고 불렀다.

 

2. 금다리 전설

 

김덕령의 작은할아버지 김윤제가 이곳 북촌에서 만석꾼 부자로 살고 있었다. 그는 어렸을 적 글공부를 위해 식영정으로 자주 내왕을 했는데 그 곳을 가기위해서는 다리가 없는 냇가를 건너야 했다. 조그마한 징검다리가 있기는 했지만 불편하여 그냥 물을 건너다니곤 했다. 부자가 된 김윤제는 많은 돈을 들여 다리를 돌로 만들고 그 위를 버선발로 걸어다닐 정도로 돌을 다듬어 놓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조정에까지 소문이 퍼졌다. 김윤제는 돈이 많아서 다리까지도 황금으로 만들어 놓고 걸어다닌다는 것이다. 시기하는 사람들이 조정에 모략을 했던 것이다. 조정에서 현지에 내려와 보니 사실과는 달랐다. 김윤제는 다리를 헐고 그 돌로 그 밑의 강남 보를 막아 농민들이 가뭄을 걱정하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금다리는 다시 조그만 징검다리로 되었다. 다시 서민의 다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 다리가 금다리로 불리고 있다.


3. 배재의 장군대 전설

 

충장사가 자리잡은 고개를 배재 또는 이치라 부른다. 이 배재는 김덕령이 살던 석저면 성안 마을과는 4㎞ 거리로 김덕령의 집안 13기의 묘가 있다. 이 13기의 묘 중심에 덕령의 고조부 문손의 묘가 있는데 이 자리가 장군묘의 명당묘라 덕령과 같은 명장이 태어났다고 한다.

 

어느 때부터 이 집안이 이곳에 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설로는 덕령의 고조 문손이 이곳에서 살 때 하루는 남루한 형색의 젊은이가 찾아와서 머슴 살 것을 자원하였다. 문손은 부인인 광산 노씨가 일찍 죽어 일손이 부족한 터라 이 젊은이를 집에서 부리는데 밤이면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기가 일쑤였다. 문손은 이 머슴이 하는 짓이 기이하기도 하고 의심도 나서 머슴 몰래 그의 뒤를 밟아 보기로 했다. 이 머슴은 성안을 벗어나 십리 거리의 배재로 오르더니 지금 그의 묘가 자리잡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회룡고조(꿈틀거리는 용이 할아버지를 돌아보는 형국)’라 분명 명지가 틀림없다고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앉아 쉬었다가 귀가하는 것이었다.

 

문손은 왠지 이 놈이 머슴은 살지만 분명 이인이다 싶어 더욱 그의 거동을 관찰키로 했다. 이튿날 밤에는 이 머슴이
“주인 어른 제가 쓸 곳이 있으니 달걀 하나만 꾸어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문손은 이 머슴을 시험키 위해 기다리라 하고 달걀 하나를 얼른 끊는 물에 넣어 숨을 죽인 뒤 이 머슴에게 주고 그날 밤 동정을 살폈다.

 

머슴은 밤이 깊어지자 집을 나서 배재의 어제 그 자리에 올라갔다. 머슴은 땅을 한참 파더니 가지고 간 달걀을 묻어 놓고 담배 한 대를 피운 뒤 달걀을 꺼내 귀에 대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상하다. 이 자리가 틀림없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산을 내려왔다.

 

이튿날 저녁 이 머슴은 다시 달걀 하나만 더 달라고 하였다. 문손은 이번에는 삶지 않은 달걀을 주고 밤이 되어 이 머슴의 뒤를 쫓아 보았다. 이 머슴은 어제 그 자리에 이르러 달걀을 파묻고 한참을 있다가 귀에 대보는 것이었다. 한참 귀에 달걀을 대고 있던 이 머슴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그 자리에 묻은 표시를 해놓고 산을 내려갔다.

 

며칠이 지나자 이 머슴은 고향 부모에게 말도 없이 나온 몸이라 집에 다녀오겠다면서 집이 멀어 좀 늦겠으니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문손은 선뜻 승낙하고 여비를 주어 보낸 뒤 낮에 배재에 올라 머슴이 돌로 표시해 놓은 자리에서 주위를 바라보니 멀리 보이는 투구봉이 안산(安山)을 이루어 손짓하는 형국이요, 왼쪽에는 뽑아든 칼등처럼 곧은 맥이 뻗어 있고, 오른쪽은 철퇴모양의 산맥인데, 뒷산은 마치 꿈틀거리는 큰 용이 무등산을 떠나 서북쪽으로 달리다말고 돌아보는 형국이라 풍수지리에 서투른 사람의 눈에도 명당임이 분명했다. 그는 급히 산을 내려와 부랴부랴 먼저 죽은 그의 부인 광산 노씨를 이곳으로 이장해 버렸다. 두달쯤 지나 그 머슴이 돌아왔는데 무엇인가 석작 하나를 등에 짊어지고 배재를 오르더니 노씨 묘를 바라보며 “아차 늦었구나”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튿날 날이 밝아 그의 머슴이 문손에게 배재에 새 무덤이 하나 생겼던데 누가 묘를 썼는지 모르겠냐고 물으므로
“내가 우리 집 사람 묘를 옮겼는데 큰 흉이나 없겠냐”
고 시치미를 떼고 물어보았다.
그 머슴은 한참 난감한 표정을 짖더니
“주인 어른께서 쓰셨다면 할 수 있습니까 사실 나는 중국에서 이곳까지 자리를 구하러 온 사람입니다. 주인어른께서 쓴 묘는 후에 대장군이 나올 자리나 중국 사람이라야 알맞은 자리니 저에게 양보하시면 그 대신 삼정승이 나올 자리를 잡아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문손을 이 자가 속임수를 쓰는 것 같아 이를 거절했는데 이 중국인은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떠나는 길에 좌향을 바로잡아 주었다 한다.

 

이 자리가 장군 대좌로 훗날 덕령과 같은 장군이 태어났다는 전설로 충장사에 가면 새로 옮긴 충장공의 묘가 있다.

 

4. 무등산 전설

 

금곡동에 포함된 무등산에 관련된 전설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켜 삼신산을 찾아 삼신산신을 불러 초청연을 베풀려 했으나 무등산만이 이를 거절해 등급이 없는 무등산이라 했다 한다.

 

다른 전설로는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백대에 이르도록 왕업이 이어지기를 바라고 혁명을 일으켜 죽인 고려말 명신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기도하려 이곳에 들렀다는 얘기다.

불교가 국교이던 고려조에 무등산 일대에는 360암자가 있었다 한다.

 

이 산에서 백팔나한이 살았고 부처가 설법을 다니던 사자좌가 있어 인근 모든 산신들이 이곳에 공양하기 위해 드나들었다. 이 같은 명산이라 이성계도 이 산에 와 3일 기도를 했다. 태조대왕은 온갖 정성을 다해 기도했지만 아무런 영험이 없었다. 태조는 그의 정성이 부족한 때문이거나 이 산신령의 가호를 받지 못할 몸임을 알고 다시 3일 기도를 더하기로 작정했다.

 

마음의 작정을 하고 어슴프레 잠이든 태조대왕의 꿈에 그가 죽인 정몽주 등 고려조의 명신들이 칼을 들고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이런 악몽에 시달리던 태조는 얼마쯤 뒤에 입석대를 향해 걷는 또 다른 꿈을 꾸었다. 서기가 감도는 서석대에 이르니 한 선인이 그를 맞으며
“그 동안 대왕께서 3일 기도중인 것을 알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법회가 열리고 있던 중이라 찾아 뵙지 못하고 있던 차에 석가부처께서 대왕의 악몽을 아시고 즉시 자신을 보내 정몽주 등 고려 충신들을 질책하시고 대왕을 맞도록 한 것이요.” 라고 말했다. 태조는 석가 앞에 이르러 여러 치정의 도를 배우고 석가가 가르키는 것을 바라보니 사람인자 형국을 한 산이 우뚝서 있는데 석가는 이 산 한쪽의 붓바위를 가리키며 석가는 저 붓바위가 대왕의 취적을 하늘에 기록할 것이라 말했다. 태조는 잠에서 깨어 괴이한 일도 다 있다고 곁에 있던 대랑에 그 꿈속의 산을 찾도록 일렀더니 무등산에서 서북쪽으로 담양 수북면에 삼인산(三人山)이 있었다. 태조는 이 산을 찾아가 다시 제를 올리고 산 이름을 몽성산이라 했다는 얘기가 있다.

 

무등은 우리말 사전에 등급이 없고 그 위에 더할나위 없는 최상의 등급을 이룬다고 풀이하고 있으며 불가에서는 무등등과 같은 뜻이라 말한다.

 

무등호인이란 말이 그지없이 마음 착한 사람을 이름과 같이 무등산은 그 덕스런 산의 자태나 자유, 평등을 사랑하는 이 고장 주인정신을 표현한 산 이름임에 분명하다.

 

5. 서천사에 얽힌 유래


삼십여 년 전에 어느 보살님의 꿈에 누군가가 나타나 ‘이곳 밤지실에 옹달샘이 있으니 그 위에 절을 지어라’는 지시를 받아 밤지실에 와 옹달샘을 찾고 절을 지었다.

 

그런데 그 옹달샘은 날씨가 맑은 날에도 샘 가운데 무지개가 서리고 무지개가 뜰 때면 샘물 가운데가 뱅뱅 돌았다고 한다.

 

그 후 삼 년 동안의 가뭄에도 이 샘물은 마르지 않았으며 항상 그대로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샘물은 위장병과 당뇨에 특효가 있었다고 한다.

 

이 샘은 바가지모양의 바위로 조그만해서 샘을 더 크게 넓히고 오염방지를 위해 뚜껑을 했는데 오히려 지금은 오염이 되어 마실 수 없다고 한다.


6.정금남 전설

 

선조 조의 충신인 금남군 정충신은 고려말의 명장 정지 장군의 7대손이다. 정충신의 자는 가행이고 호는 일운이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사리 분별이 분명해서 당시 광주 목사이던 권율 장군의 통인으로 있게 되었다. 그는 차분하면서도 재빠르며 대담하고 명석하여 어린애라고 해서 어른들이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권율 목사가 여섯 살 난 정충신의 지혜를 시험하고 싶었다. 그때가 여름인지라 덧문을 높이 들어올려 처마 밑에 선반처럼 걸어 두었다. 그리고 걸어 올린 문짝 위에 물을 가득 담은 그릇을 올려 두었다. 만일 누가 이 사실을 모르고 걸어 놓은 문을 급히 내리다가는 물벼락을 맞을 판이었다. 이렇게 해 놓고서 권장군은 마당에서 뛰놀고 있는 정충신을 급히 불러 비가 와서 기후가 몹시 차니 급히 덧문을 내려 닫으라고 일렀다. 아이는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려가는데 마루로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광에 들어가 나무 의자처럼 된 디딤돌을 가지고서 마루 위로 달려왔다. 그런데 이 아이의 오른손엔 가는 대막대기 하나가 들려 있었으며 그 불호령 속에서 차분하면서도 민첩하게 발판을 마루에 놓더니 그 위로 올라서서 문짝 위에 혹 얹혀진 것이 없나 하여 대막대기로 문짝 위를 더듬어 그릇이 걸리자 조심히 물그릇을 내려놓은 다음 문걸이를 벗겨 내렸다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함께 목격한 관원들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으며 권율 목사는 마음 속 깊이 이 아이의 장래를 점치고 있었다.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는 어지러웠으며 임금은 난을 피하여 의주에 머물고 있었다. 나라 전체에 왜군들이 들끓고 있어 각 전선에서의 보고가 두절되었으며 권율 목사도 군정을 알리는 장계를 올리지 못해 마음이 조급한 판이었으나 믿고 보낼 사람이 없었을 뿐더러 누가 감히 목숨을 걸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안 정충신은 권목사 앞에 나아가 자기를 보내 줄 것을 간청했다. 권목사는 깊이 생각한 끝에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사려가 깊고 영민해서 과연 큰 일을 맡길 만하여 극비의 장계를 써서 정충신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막상 길을 떠나는 정충신을 보고 권목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소중히 간수하라는 장계는 몸에 지니지도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나무꾼 행색에 망태기 하나를 매고 있었다. 의아해하는 권목사에게 정충신은 바싹 다가가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이 망태기가 장계올시다. 봉서를 그대로 몸에 지니고서야 적진을 헤쳐 무사히 도착할 수 없겠기에 봉서를 길게 찢어 새끼를 꼬아 이 망태기를 엮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권목사는 정충신의 기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길로 정충신은 적진을 뚫고 권율목사의 사위이며 병조판서인 이항복 대감에게 무사히 도착했다. 망태기를 풀어 장계를 순서대로 다시 펴 이대감에게 올리자 한눈에 이 소년의 비범하고 대담한 용기와 사람됨을 알아보고 크게 기뻐하여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거두어 들였다. 이대감의 배려로 정충신은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학문과 무예를 닦으며 계곡 장유, 지천 최명길 등과 친교를 맺었고 얼마 안 있어 무과에 급제했다.

 

광해군 13년(1621)에는 만포검사로서 청나라에 잠입, 적의 정세를 을 탐지했으며 인조 원년(1623)에는 안주목사 겸 방어사를 역임했고, 이듬해 이괄의 난에는 반도(叛徒)들이 서울까지 쳐들어와 신왕을 옹립하기까지 했으나 정충신은 전부대장으로서 이괄을 무찔러 하루만에 천하를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 2등으로서 금남군에 봉해졌다. 그후 평안도 병마절도사에 올라 연변 대도호부사를 역임했으며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는 도원사에 이르렀다.

 

1633년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세폐가 날로 증가하는데 반대하여 단교사신을 파견하자고 했는데 정충신은 이에 반대하다가 당진에 유배되었고 다시 장연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이듬해에 포도대장을 역임한데 이어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있다가 인조 13년(1635) 4월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학문에도 깊이 골몰하여 『일운집』,『금남집』,『백소북천록』등의 책을 만들었다.


7. 양한림 이야기

 

옛날 거 다라실 양씨들이 있었드라요. 양씨들이 응 능주 다라실 양씨들이. 말이 있지 않허요. 다라실 양씨 집으로 장개를 갔으면 갔지 과거는 안헐란다고. 모두 양반들 집안이요. 다라실 양씨 집안에 가서 청천과수로 유복자를 하나 낳아 놓고 카운단 말이요. 그렁께 유복자를 혼자 키워서 인자 여닐곱살 안짝으로 키워서 서당에 입학을 시켜 놨는디 서당에를 갈라치면 꼭 재를 넘어 댕기는 갑디다. 인자 서당에를 갈라면 지그 어무니는 재산이 없이 산께. 남의 품팔이나 해서 묵고 살고, 어찌튼가 노력히서 잘 살려고 혔어. 나이 여삼십됐고 아들은 나이가 열댓살이 되어서까지 서당에를 당긴디.

 

하루는 서당에를 간디 비가 어떻게나 많이 퍼붓더라요. 그러니 서당에를 갈 수가 없어. 인자 재를 넘어 가는 질이 하도 멀어 시방으로 말허자면 한 십리길이나 되던 갑디다. 하도 비가 많이 퍼붓어 이제나 그칠까, 저제나 그칠까 기다리다가는 애라 내일까지는 집에서 공부나 해보고 서당에 가든지 못가든지 인자 공부나 허자고 그리고 있어. 지그 어메는 베틀을 방에다 놓고 베를 짠디 서당에 다시 간다고 헌 놈이 책보를 걸머지고 다시 들어오거든. 긍께 너 어찌서 서당에를 안가는가 허니, 어무니 이래 저래 갈려고 했는디 어떻게 비가 많이 퍼붓든지 도중에서 가지를 못허고 앞길이 안보여 다시 오던 중이요 허니 어무니는 그리야 허면서 나는 너 하나를 믿고 이렇게 고생허면서 유복자 너를 공부시킬려고 허는디 이제보니 너를 키워 봤자 쓸것이 없을것 같응께 나도 고생헐 필요가 없다허며 가세(가위)로 앞에 놓인 베틀에 매진 베를 싹싹 다 잘라 부리고 일어서 부링께 아들이 어무니의 손을 꽉 붙잡으며 허는 말이 어무니 나 서당에 갈라요. 갈라요. 용서해 주세요. 어무니가 하도 그리쌍께 가기는 가야 쓰겄는디 비는 더욱 억쑤로 쏟아지고 허지만 지그 어무니의 청에 못이기어 재를 넘어 간디 비는 억쑤로 쏟아지제.

 

옛날에는 공동산에다가 초분을 했어라우. 사람이 죽으면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산에다가 그대로 시체를 놔두었거든. 육탈 헐때까지. 어찌나 비가 억쑤로 쏟아지든지 어찌 헐 수가 없응께. 초분 하나에 의지허고 앉았어. 앉어 있는디, 비가 이제나 저제나 갤까 해도 안 갠께 밤이 어두어져 부렀단 말이여.

서당에 가자니 어두워서 오도 가도 못허고 있다가 밤중이 되어 부렀어.

 

한밤중찜 되니 귀신소리가 났어. 초분 옆에 사는 한 귀신이 다른 귀신 이름을 부르더라우. 아무개 아무개 부르며 오늘 이 동네 누구집엘 가세. 거그 누가 애개를 나께 첫국밥이나 얻어 묵고 오자고.

 

가만히 들어보니 내 옆 귀신이 허는 말이 나는 양한림을 모셔서 못가겠으니 너나 다녀오라고 허드라여. 손님을 모셨다고? 한림이라는 벼슬은 선생님이거든. 그 보다 더 높은 벼슬은 선생님이거든. 그 보다 더 높은 벼슬은 없응께. 그리야 허고 자네들이나 갔다오소. 허고는 얼마쯤 있응께, 또 부르더라여. 잘 댕겨왔는가 허니 잡어묵을 것들이 첫국밥을 허면서 돼지막을 뜯어다가 불을 때길래 생전 빌어묵고 살어라 허고는 와부렀네. 그러더라여.

 

옛날에는 애기가 나서 첫국밥을 헐려면 좋은 나무를 때서 첫국밥을 허제. 궂은 나무는 안땠거든.
그리가지고는 내가 이대로 공부를 열심히 허면 훌륭한 선생이 되것구나. 큰 벼슬을 허것구나 허고는 생각해서 그 후부터는 열심히 공부를 해각고 양한림이 안 되었소.

 

8. 소문산·대문산

 

여그가 소문산인디, 소문산이라는 것은 이 마을(북구 문흥동 6통) 입구 아까 마을에 들어서면 삼거리 안 있습디까? 거그가 소나무가 있었어요. 얼마나 모냥이 좋았다구요. 크기도 허고, 옛날부터 사람들이 와서 사진 찍어가고 그랬다요.

 

영판 좋았어. 여그서라도 사진 한 장 박어 놨드라면 좋았을 것을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못했제. 징그럽게 좋았어요. 소나무가 어찌나 크고 모냥이 좋았든지 그 소나무 하나가 두 마지기 땅을 다 덮었당께요.
옛날에는 송정이라 불렀는디 그 뒤 소문산으로 했다고 들었어요. 그 소나무 때문에 송정, 소문산이라 했어요.

 

이마을 아래 정자나무 있는 마을이 대문산인디 대문산 이름도 즉 말허자면 저 마을(북구 문흥동 5통)은 당산나무가 많이 있어 당산제를 많이 지냈었는디 대(竹)가 많아서 대문산이라고 불렀어요. 그 마을 앞 뒤 잔등에가 대나무가 아주 좋았어요. 여그가 담양이 가까웅께 대밭이 많이 있었고, 대가 잘라서 보기가 좋았어요. 속모르는 사람들은 대문산, 소문산 허니께 대문산은 큰 마을이고 소문산은 작은 마을이라서 그랬을 꺼라고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지요.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좋은 소나무가 있어서 소문산, 대나무가 많이 있어 대문산이라고 그러고 말해요.

 

그러나 오래 전에 광주가 커지면서 그 좋던 소나무나 대나무는 온데 간데 없어져 부렀어요. 얼마나 안타까운지 몰라요. 더군다나 택지 개발인가 무엇인가 때문에 우리 마을까지도 없어져 부린다니 섭섭함이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훗날에는 이야기로나 듣겠지요.

 

9. 깐치 이야기

모정옆에 드릅나무가 하나 있었는디 아주 크제. 초여름이여. 모정에 가만히 드러누워 있응께 큰 대명이란 놈이 그 드릅나무를 슬슬 기어 올라가드라여. 가만힌 보니 나무 꼭대기에 깐치집이 있는디 깐치집에서 알을 깠던가봐. 그 깐치알을 묵고 있거든. 그런디 옆에서 농부 하나가 그것을 보고 큰 독덩이를 던져 대명이를 때리니 땅으로 그만 딱 떨어져 부렀어. 긍께 다시 가서 죽여부렀제. 그리고는 그것을 불살라 부렀어. 지그 밭 가상에다가.

 

그 후 한 삼년 지냈는디 지그 밭 가상에 가서 먹때깔 나무가 요렇게 많이 열렸어. 그런디 이상헌 것이 먹때깔은 시껌히야 되는디 아주 많이 열렸는디 모도 다 노랗거든. 이상도히여. 다시 곰곰히 생각히보니 그 자리가 구랭이를 불살라부린 자리거든.

 

그리서 참 이상도 허다 허면 낫으로 비어붓어. 그리고는 그 이튿날 다시 가서 불질러 부렀제.

그렁께 한 삼년 먹때깔 나무가 안보이더니만 또다시 먹음직스럽게 뻘겋게 많이 열렸거든. 아주 맛있게 보이고 그러제. 또다시 이상도 허다 힛는디 그 사람도 모르게 먹때깔로 자기 손이 가드니 하나를 따서 입에다 넣고 묵어 부렀어.

 

그런 후로는 이 사람이 배가 불러오기 시작힛써. 노랗게 부어서 움직이지도 못해서 밥도 못먹게 되어 부렀어.
아마 그 먹때깔 하나가 구랭이 원수 갚을라고 그 사람 입으로 들어갔던 모냥이여.

 

그리각고는 한 여름이 되었는디 배가 노랗게 호박같이 불러서 손톱으로 퉁겨도 터질것만큼 되어부렀어. 죽을 날만 기다리제. 어떤 약을 묵어도 배가 주러들지 않으니 어쩔것이여.

 

그리각고는 온 동네가 난리가 났제. 영영 죽을 상이구나 허고 그 집 마루에 누웠제. 그러고 있는디 느닷없이 깐치 두마리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날아오더니 그 사람 배우에 앉더니 암놈 수놈 두놈인가비여. 두마리가 앉아서 잠시 조잘거리드니 그 뱃속에서 구랭이 새끼를 수백마리를 끄집어 내어. 그리고는 어디론지 날아가 부렀어.

 

그래서 다시 배가 줄어들어 살아나 부렀제. 그래 깐치도 보통 동물이 아니라고 그리 안허요. 까치가 짖으면 손님이 온다고도 허고.

 

그렁께 구렁이가 깐치알을 묵고 있던 것을 그 농부가 구해주어 깐치가 은혜를 갚은 것이제.

 

호랭이가 나와도 깐치가 짖응께. 성님은 모를 것이요(옆에 있는 할머니를 가리키며). 요 마을 넘어 도동고개가 있어요. 그리로 너물을 캐러 여럿이 갔거든.

 

그 고개를 넘어서 불두덩으로 넘어 온단 말이여. 나 혼자만 먼저. 근디 다른 사람들은 조금 뒤에서 쑥을 캐고 나는 곧바로 도동고개를 올라왔단 말이여.

 

근디 어째 깐치가 지슬 것이요. 그래서 밭가세로 오는디 꼭 저 괭이(마당에 놀고 있는 고양이를 가리키며)만 허드만. 근디 무늬가 아롱다롱 껌허고 저것보다 더 이쁘드만. 고것이 있는디 깐치가 그렇게 짖어대여. 그리서 뒤를 보고 성님 성님 이리 오시요. 여그 괭이가 있으니 잡읍시다. 허고 막 소리를 크게 질렀어. 그래도 그 말을 못들었는가 안와. 그러드니 더 크게 소리를 친께 다시 그놈이 산으로 슬금 슬금 갑디다.

 

그 때까지 깐치가 계속 짖어. 다시 성님 성님 얼른 내려 오랑께 허면서 소리를 질르드란 말이여. 어서 성님 거그 두고 얼른 내려 오란말일세. 나는 산중에 살아서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제. 고 놈이 호랭이 새끼여. 그래서 그 뒤에는 거그가 호랭이 새끼가 산다는 것을 알고는 절대로 나물캐러를 가지 안했어용.

 

호랭이가 그런다여. 까막 깐치가 아니면 가랑잎에라도 몸을 감추겄다고. 그렇게 깐치는 영험히여. 깐치를 속일 수는 없는 갑디다. 깐치는 옛날부터 영물이라고 그랬어.

 

10. 효자이야기

 

옛날 여그 웃마을에 효자 하나가 살았어. 지그 어메가 혼자 기신디. 이 효자가 잘 모셔도 아퍼서 돌아가시게 생겼어. 지그 어메가 하루는 허는 말이 내가 죽기전 죽순죽을 한 그릇만 묵고 죽었으면 원이 없겄다. 그랬거든. 동지 섣달이라 흰 눈이 펑펑 쏟아진디. 어참, 동지 섣달에 죽순이 왠말이여. 시방 같으면 냉장고에 사시사철 없는 것이 없을텐디.

 

그러나 효자인 아들은 어머님의 마지막 소원을 안 들어줄 수가 없어서 그 추운 엄동설한에 대밭은 대밭은 사방 각처를 찾아 다 다녔어. 그리도 죽순이 나올리가 없제.

 

그렇게 죽순을 찾으러 한 보름 이상 다녔을 것이여. 하도 돌아다녀서 손발이 다 얼어 동상이 다 들었제. 그러나 계속 죽순을 찾아 다녔어. 그러다가 어느날 한 대밭에 도착허자마자 쓸어지고 말았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등이 따뜻해서 일어나보니 바로 앞에서 김이 모락 모락 나거든. 옳다 됐다 여그가 죽순이 있을 것 같다 허고 파보니 아니나 다를까 팔뚝만헌 죽순이 나오고 있지 않겄어 천지 신명이 돌봤던 것이제.

그 죽순으로 어메를 살린 것은 물론이제. 병이 낫어 잘 살았다는 이야기여.

아까 죽순이 나온 것이 대밭의 양지바른 두엄을 쌓아두었던 것이더라여.

옛날부터 효자란 범도 안 물어간단 말이 있어.


11.용의 여의주 태봉산 전설

 

옛날 사람들은 광주의 지형을 이무기가 용이 되어 여의주를 물고 하늘에 오르려는 ‘화룡승천’ 의 형국이라 했다.

 

무등의 영봉은 광주시가 쪽으로 두 지맥으로 뻗고 있는데 그 하나는 원효사 뒤의 화암봉을 지나 지산동 쪽으로 장원봉을 이루고 또 하나는 증심사 뒤에서 제 1수원지 뒤를 거쳐 전남대학교 부속병원 뒤까지 뻗어 있다.


이 두 산맥은 두 마리의 뱀형국으로 옛날에는 실제로 지산동을 편방 또는 단사동 즉 붉은 뱀골이라 했다 한다. 이 뱀들은 오랜 세월을 사는 동안 이무기가 되고 용이 되어 여의주를 물고 하늘에 오르는 법인데 그 여의주가 바로 태봉산이라는 것이다.

 

이 태봉산은 높이 해발 52.5m 안팎에 3천평 가량이 둥글고 아담해서 마치 여의주와도 같은 모습이었으며 광주시민에게는 마을앞 동산과도 같은 친근한 산이었다. 이 산이 태봉이라 불리우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1624년 평안병사 이괄이 인조에게 반정을 도모하여 서울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무례한 놈, 그 놈이 나를 배반하고 난리까지 일으켜…” 인조는 분을 참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함께 반정을 일으켰던 이괄이 인조 2년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인조 임금께서는 이괄을 믿었던 만큼 그에 대한 실망도 컸던 것이다.

 

그러나 인조가 임금에 오른지 2년째 되는 해라 아직 국가 기틀이 잡히지 않아 사회의 민심은 혼란했으며 모든 것이 안심할 수가 없는 정황이었다. 그래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김류 등 여러 신하들의 권유로 인조 임금은 공주로 난을 피하게 되었다.

 

인조임금과 함께 공주로 피난 온 인렬왕후는 태기가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난 후 왕후는 옥동자를 낳았는데 그가 아지대군이다. 피난중이지만 아들을 얻게된 인조 임금은 물론 함께 피난 온 신하들까지 모두들 기뻐하였다.

 

왕자 아기를 순산한 후 태를 태합에 담아 계룡산의 좋은 자리에 정성껏 묻었다. 그런데 갓난 왕자 아기가 자주 앓기만 하는 것이었다. 왕후는 왕자 아기를 안고 약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어린 아이이기에 항상 몸에 품고 근심만 하였다. 그래서 왕후는 절에 가서 부처님께 왕자 아기의 건강을 위해 불공을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왕후가 정성을 다해 불공을 드린지 며칠이 지났다.

 

그날도 불공을 드리기 위해 몸을 단정히 하고 부처님 앞에 나가려고 하는데 방문이 소리없이 열리는 것이었다. 왕후는 깜짝 놀라 방문쪽을 보니 백발이 성성한 노승이 붉은 도복을 입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왕후는 깜짝 놀라면서 “아, 어인 일로 노스님께서…”
아무리 스님이라도 왕후가 홀로 있는 여자의 방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었다.

이때 노승은 왕후 앞에 머리를 숙이며
“소승은 계룡산에 있사온데 마마께옵서 왕자로 인하여 심려가 많으시다고 하여 여기까지 왔사옵니다” 하는 것이었다.
“소승이 생각하기에는 태어나신 왕자께옵서 이 세상에 나오실 때 시(時)를 잘못 잡으셔서 액상이 미친 것으로 아옵니다”

 

이런 노스님의 말에 왕후는 이상이 여기면서도 왕자의 일이기에 다시 물었다.
“그러면 스님, 어떻게 하면 액상을 물리쳐 왕자께서 건강하시겠습니까?” 애원하듯 왕후는 노스님에게 묻는 것이었다.
“지금 이대로 놓아두면 왕자께서는 돌을 넘기기가 어렵겠습니다. 왕자님의 태를 묻은 지금의 장소가 연에 맞지 않으니 왕자님의 태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왕자님의 태를 묻기에 가장 좋은 곳은 무등산(無等山)이 있는 무등벌이온데 그곳은 옛날에 도선국사께서 절터로 잡아 두었던 곳입니다. 그 표식으로 도선국사께서 은행나무 한 그루를 그 곳에 심어 놓았는데 해마다 붉은 은행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 은행나무를 베어내고 그곳에 왕자의 태를 묻으시면 왕자님은 오래오래 수(壽)를 누리실 것이며 무등산의 지맥을 얻어 영특하심이 뛰어날 것입니다”

 

이렇게 일러주고 노스님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왕후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뒤따르며 “스님, 스님의 성함이 뉘시옵니까?”하고 물었으나 문을 열고 나간 노승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참 이상도 하다. 어떻게 노스님께서…”

왕후는 이러한 사실을 인조임금께 말했다.
“그러하오나 이같은 노스님의 말씀은 부처님의 지시라고 생각됩니다. 곧 지리에 밝은 사람을 무등산 밑 무등벌에 내려보내 사실을 알아보는 것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스님의 말대로 그곳에 붉은 열매가 열리는 은행나무가 있다면 그 곳이 길지임에 틀림없습니다”

 

왕후의 이야기를 듣고 기이하게 생각한 인조 임금은 바로 지리에 밝은 세 사람의 신하를 불러 무등산 밑 고을로 내려보냈다. 며칠 후 이 일행들은 무등고을에 도착하여 이곳 저곳을 세밀히 살피기도 하고 은행나무에 대해서 묻기도 하여 그 은행나무 있는 곳을 찾아내었다. 과연 무등산 밑 한 마을에 수백 년이 묵은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마을 사람들의 얘기가, 붉은 은행이 매년 주렁주렁 많이 열렸다는 것이다.

 

이 일행들은 은행나무 있는 곳을 확인하고 말을 재촉하여 인조임금이 계신 곳에 도착하여 “스님의 말대로 무등산 아래 고을에 붉은 열매가 열리는 은행나무 있는 곳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인조임금께서는 매우 기뻐하시고 바로 계룡산에 있는 왕자의 태를 파서 그곳으로 옮기기로 하고 스님이 일러준대로 은행나무를 베어낸 다음 흙을 모아 작은 산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리고 인부를 시켜 계룡산에 가서 왕자의 태합을 캐냈는데 석분(태합을 넣는 돌함지로 절구모양의 직경 4자 정도 된다)이 꺼멓게 죽은 이끼가 끼어 있었으며 수많은 개미떼들이 붙어 있었다. 태를 파는 날 또다시 왕후에게 그때의 노스님이 나타났다.

“소승이 일러드린대로 왕자님의 태를 옮기시게 되어 다행이옵니다. 그러하온데 태합을 새로 묻으실 때 반드시 손바닥만한 금을 함께 묻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땅 속의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왕비는 즉시 명하여 왕자의 새 태무덤엔 손가락만한 금괴를 함께 넣게 되었다.

 

태를 묻은 후부터는 왕자는 아무탈 없이 잘 자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괄의 난이 평정되고 임금의 일행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이 왕자는 장차 성군의 재목으로 잘 자랐다고 한다.

 

이 태무덤은 오랜 세월 전설로만 전해져 왔는데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자 이 지방 사람들은 태무덤 때문에 가뭄이 심하다고 생각하고 그곳을 파헤친 일이 있었다. 그러자 태무덤에서 여섯구의 시체가 나왔다. 이것은 이 태무덤이 명당자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몰래 매장한 것이었다.


12. 신거무 장의 유래 : 지원 고을

 

담양 신평마을에 살던 홍주 송씨가 진월 고을 원님으로 왔는데, 민치도 잘하고 지방통치를 잘할려면 신거무를 조심해라. 주변에서들 그랬는데, 신거무를 조심하라는 것이 신거무를 없애란 말로 알았어. 제일 위험한 인물인께 그래서 뚜드려서 없애 부렀단 말이여.

 

그런디 신거무 죽은 뒤로 며칠안가서 신거무 죽은 귀신한테 새원님이 죽게 되았어. 뭐, 흰거미, 독거미가 나와서 원님 부랄을 물어서 죽었다고 글던가, 어쨌든 죽은 원님의 생이를 뜸고 간디, 생이가 못가요. 신거무 죽은 귀신이 생이 앞에서 춤을 추고 있은께.

 

그래서 그 송원님 아버지가 송미암 선생인디, 나와 가지고 보니까 아들 생이가 못가고 잡귀가 앞에서 춤을 추면서 못가게 하거든,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인디, 미암 선생 눈에만 뵈여. 그래서 생이를 내리라고 했어. 그래놓고 니가 누구냐 그런께 신거무라고 하거든.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 나를 무고하게 이렇게 죽였다. 그러니 내 원한을 풀어줘야 하겠다, 그러거든. 그래서 관을 꺼내 자기 아버지가 회초리로 때렸단 말이여. “네 이놈 민치를 잘하고 행정을 잘하라고 그랬제. 신거무를 죽이라고 그러디 이놈아!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관을 내려다가 두들겼다는 것이다. 그런께 신거무가 “반분이나 풀립니다.” 그러더란 것이여.

 

그것이 사실인가 어쩐가 몰라도 그래서 “그러면 네 소원이 무엇이냐?” 그러니 “여기다 장터나 하나 만들어 주쇼”. 그러면 내가 거그서 귀신이나 얻어 먹고 살아야겄습니다. 그래서 송미암이 장을 하나 세워 줬다는 것이여. 그것이 신거무 장이여. 그런디 신거무 장은 파짝 장이 돼야. 제일 늦게 가는 놈이 그날 죽어 장을 세웠어도 잘돼는디, 제일 늦게 가는 사람이 죽어. 근께 얼른 싸서 도망 가야제. 석양에 제일 늦게 간 사람이 죽은께. 그래서 나중에 장이 없어져 불고 비야 장터로 옮겨 갔다는 것이여. 사람이 죽어싼께, 그래서 신거무 장이 유명하재(*사투리 원음 그대로 적음)

 

이 신거무 장 이야기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하고 결부시켜서 후백제 건국인 제 2인자 견훤의 아들인 장수 신검의 이름이 송미암 선생의 아들을 죽인 흰거미하고 발음이 비슷하여 신거무란 이름이 붙어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하기도 한다.

 
13. 복룡마을과 솔무대기

 

삼각산 용이 내려와 영산강가에 접해 누워 있다고 해서 복룡이라 했다. 마을에서 강변 쪽으로 나서면 ‘솔무대기’란 나즈막한 동산이 있다.

 

이곳에는 30여 년 전만해도 300m 길이로 소나무숲이 울창하게 있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임곡 용진산이 화산(일곡의 뒷산)이므로 이 산이 건너보지 못하도록 소나무를 심어 마을을 가려야 화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영산강에서 모래무지를 잡아 솥에 끓이다가 불이 나서 마을까지 전소되어 버렸다.

 

그러나 광주 목사의 도움으로 다시 소나무 숲을 가꾸어 마을이 안녕을 찾고 자자손손 번창했다고 한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목사의 은혜를 못잊어 비를 세워 기렸다고 한다.


14.연제동과 새암


장구봉 아래 연꽃모양의 명당이 있다 하여 ‘연제’라 하였다. 풍수지리상 연제동은 배 형국이라 한다. 이 마을은 옛부터 물이 귀해 500m나 떨어진 ‘통시암’이란 곳에서 길러 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 중이 찾아와 시주를 많이 하면 샘터를 일러주겠다고 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약속하자 샘자리를 가르쳐 주었다. 이어 샘을 파서 이용했는데, 그 후 마을이 서서히 몰락해갔다. 배 한가운데 구멍이 나서 그렇다는 이치였다. 지금도 마을에서 700여 미터 떨어진 자리에 ‘통시암걸’이란 땅이름이 남아 있다.


15. 할미당

 

우리 마을 안고랑에는 할미당이 있어요. 그것도 유래가 묘히여.

얼른 들으면 할머니 할미당이라 허기 쉬운디 그렇지 않고 그런디 그곳 할미당 자리에 지금은 수녀들이 살고 있지요. 그래서 요즘에는 사람들이 맞다고들 그러제. 할미당이니 수녀들이 살게 되었다고도 이야기 허제.
그 자리가 어디인고 허니 여그 106번 종점가는디 사레지오 고등학교 앞이여 특별한 유래를 들은 적은 없고 수녀들이 살게 되어서 이름 지대로 되었다 그리지요.

 

16. 경양방죽 전설

 

광주고을 효천면에 김부자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김부자는 고리대업을 하여 더욱 부유해지고 인근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큰 흉년이 든 어느 해 효성이 지극한 박경양이라는 젊은이가 어머니를 위해 김부자를 찾아와 곡식을 빌려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김부자는 곡식을 주려고 하지 않았고 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이 와중에 그만 김부자는 박경양을 죽이고 말았다. 박경양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에 충격받아 죽고 말았다.

 

그후 죽은 박경양의 노모가 밤마다 김부자의 꿈속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참다못한 김부자가 회개하고 박경양의 노모가 시키는 대로 마을사람들에게 품삯을 주고 그의 넓은 농토에 큰 연못을 만들었다. 이 공사로 인해 받은 품삯으로 마을사람들은 굶주림을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못은 총각귀신 박경양의 넋이 깃든 연못이라 하여 경양방죽(경양지)이라 부르게 되었다.

경양방죽에 대해서는 이런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광주의 서방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형편이 어려웠지만 마음씨는 아주 착하였다. 어느 해였다. 이상하게도 그해에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닥쳤다. 마을사람들은 농사걱정에 안절부절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런 근심을 씻어주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시원히 내리는 비를 보기 위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이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씨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물위에 이상한 것이 떠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는 곧 그 물체를 건졌다. 그건 개미집이었고 흙더미에 개미들이 우글거렸다.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지만 이씨는 개미집을 땅에다 잘 두고 먹을 것을 놓아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며칠 후 이씨는 아침에 눈을 떴는데 이상한 일을 겪었다. 마당에 한 섬 가량의 쌀이 누가 퍼다 부은 것처럼 있었다. 다음날 또 그 다음날에도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났다. 이씨는 잠을 자지 않고 지켜본 적도 있었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몇해가 지났다. 가난했던 이씨는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때쯤에 흉년이 들어 고을에 식량난이 극심하게 되었다. 관가에서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모아 두었던 의창이라는 곡식 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의창의 문을 열자 곡식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관가에서는 곧 범인을 잡기 위해 수소문하였다.

 

그러자 빠른 시일에 부자가 된 이씨가 불려갔다. 이씨는 자신이 모은 재산의 과정을 설명하였다. 그랬지만 관가에서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씨는 곧 매를 맞았고 맞으면서도 주장하였지만 허사였다. 그때였다. "죄없는 이에게 매를 거두시오."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런 정체불명의 소리를 들은 관가측은 확실한 증거없이 매질을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느끼고 이씨를 풀어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이씨의 꿈에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집 마당에 개미떼가 잇달아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물에 떠내려 가는 개미집을 구한 것에 대한 감사였던 것이다. 그 개미들이 의창의 쌀을 하나씩 물어 이씨의 집에 옮겼던 것이었다. 그 후 이씨는 쌀이 의창의 쌀인 것을 알고는 고을에 베풀려 하였다.

 

그는 먼 훗날에 다시 가뭄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방죽을 쌓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방죽을 짓게 하고는 그 댓가로 쌀을 나눠주었다. 비록 그의 쌀은 다 없어졌지만 그 후 고을은 풍족하게 되었다 한다.

 

17.신촌마을 호랑이 바위

 

옛날 이 마을 앞을 지나는 중이 있었는데 마을 청년 몇이서 그를 잡아 도둑 누명을 씌워 가두고 며칠을 굶겨서 결국 죽게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 절의 주지 스님이 허름한 농민복을 입고 신촌 마을 어귀에 와서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을 앞에 있는 호랑이 바위 때문에 얼마 안 가서 흉년이 들고 각종 질병과 재앙이 닥쳐 굶어 죽는 자가 많고 선비들도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을 괘씸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어 마을 어른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그 사람에게 재앙을 면하기 위해 방법을 물어 보기로 하여 그 방법을 물어 보니 호랑이 바위를 불에 태워 두 동강을 내면 마을이 재앙을 면하겠다고 이야기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대로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 바위 밑에 놓고 열심히 불을 질러 호랑이 바위를 두 동강 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마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잘 자라던 농작물이 갑자기 죽어 가고 또 각종 질병이 마을에 퍼져 동네 청년들이 죽어 가는 등 마을이 폐촌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은 그 중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바위를 돌로 괴는 등 옛 모습으로 해 놓았다. 그리고 죽은 그 중을 위로하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이 재물을 모아 제를 지내고 명복을 빌었다.

 

그후부터 이 마을엔 재앙도 없어지고 다시 풍년이 들었으며 젊은이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도 급제하는 자가 다시 나왔다고 한다.

 

18. 금산전설

 

옛날부터 충효 마을에서 그 앞산인 금산에 보화가 많이 들어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어느 날 금산 아래에 있는 평촌 마을에 문병식이라는 사람이 금산에 올라갔다. 금산에 올라가니 돌로 된 커다란 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금, 은은 물론 베틀, 물레, 샘, 쌀, 바가지 등이 있었다. 그 비밀을 문씨 일가만 대대로 가르쳐 주어 오래도록 잘 살았다.

 

그러다가 그 어느 대에 와서 내려오는 비밀을 다른 성씨의 사람에게 가르쳐 주어 버렸다. 그래서 지실 정씨가 그곳에 찾아갔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 후부터 쇠 금(金) 대신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19. 금산성 전설

 

옛날 정감록에 광주 목사가 어느 날 무등산에 올라 창평 지실을 내려다보고 저 동네가 어느 동네냐고 물으니 “송강 할아버지가 탄생한 자리 지실이요”하니 “아 그래 저기는 불이 위태롭다. 불에 안 맞을까?”

불을 맞지 않으려면 금산에 있는 성게 바위를 안보이게 성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지실 정씨들이 금산에 성을 쌓았다. 그래서 그 성을 금산성이라 했으며 지금도 성곽이 그대로 남아 있다.

 

20. 충효동 전설목(오류송)

 

배재의 갈림길에서 무등산 도요지가 있는 금곡리를 지나 약 3㎞ 지점에 위치한 충효동은 담양군 남면 지곡리와 하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마을 앞에는 자그마한 정려각이 서 있으며 이 정려각에는 김덕령 장군이 나고 자란 마을이라 하여 충효리라는 마을 이름을 내린 정조의 윤음이 현판에 담겨져 있고 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이 정려각 5m 앞에는 오류송이 서 있는데 수령 400년을 헤아리는 4그루의 왕버들과 소나무 한 그루가 바로 오류송이다. 이 오류송에는 충장공 6남매가 태어나 기념식수를 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충장공과 그 형제들은 오류송과 함께 자라면서 그 그늘 밑에서 공부도 하고 뛰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나무는 일제 말기 공출미를 싣고 가던 소달구지가 휘어진 소나무 가지를 받아 부러져서 죽고 왕버드나무 4그루만 남아있다.

 

21. 지실과 정철의 전설

 

지실은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이름난 곳이며, 송강의 잔뼈가 굵어진 마을로 이 고장 창평의 산수에서 꿈을 키웠다. 정철이 열 살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화가 정씨 일가에도 미쳐 매부인 계림군 유가 모함에 죽고 큰형도 귀향 길에 죽었으며 아버지도 귀양살이를 갔다.

 

지실과 송강의 인연은 이 무렵에 비롯된다. 그가 14세 때의 어느 여름날 때마침 순천의 처가에 몸을 의지하고 있던 형을 찾아가려고 지실을 지나게 되었다. 중앙천 용소 앞에 이르자 송강은 몸을 씻고싶어 목욕을 시작했다. 용소는 지금 충효교의 상류 30m 지점에 있는 깊은 웅덩이로 옛날 이곳에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그때 바로 그 위 동산에 환벽당을 짖고 사촌 김윤제가 낮잠을 자다가 용소에서 용이 놀고 있는 꿈을 꾸었다. 사촌이 꿈에서 깨어난 뒤 용소를 내려가 보니 미소년 정철이 혼자서 멱을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눈으로 그가 비범한 기골임을 알고 가까이 불러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에 놀라 순천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고 자기 슬하에서 학문을 닦도록 하였다.

2018.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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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광주광역시 북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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