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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해 4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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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해
이상해 대학교수

1948년 경북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 대학 대학원에서 건축설계 전공으로 건축학 석사학위, 건축사 전공으로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건축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2004년 현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KOREA) 집행위원,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성균관대 건축, 조경 및 토목공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다.

  • 창덕궁(昌德宮)은 조선 왕조의 도성인 한양 북쪽에 위치한 이궁이었다. 응봉(膺峯)에서 뻗어나온 산줄기 자락에 자리잡았는데, 궁의 동쪽으로는 창경궁이, 동남쪽으로는 종묘가, 서쪽으로는 정궁인 경복궁이 위치해 있다. 1392년 건국된 조선 왕조는, 새로 지은 경복궁에서 왕자들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다시 천도한다. 이때 태종은 무악 아래 새 도성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한양으로 재천도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태종은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교동에 궁궐을 하나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고 이름지었다. 창덕궁은 1411년(태종 11)에 조성한 진선문(進善門)과 금천교, 1412년에 건립한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에 이어 여러 전각들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나갔다. 세조(世祖)는 즉위하면서 인정전(仁政殿)을 다시 짓고 궁궐의 각 전각 명칭을 새로 정하였다....

  •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위치한 종묘(宗廟)는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 그리고 실제로 왕위(王位)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죽고 나서 왕의 칭호를 올려받은 왕과 그 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행하던 왕실의 사당이다. 조선 왕조를 연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재위 1392∼1398)는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오른 뒤부터 종묘 건설과 도읍지를 정하는 일에 무엇보다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종묘는 왕조의 뿌리를 상징하는 시설이고, 도읍지는 국가 통치의 기반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태조는 즉위 12일만인 7월 28일 자신의 4대조에게 차례로 목왕(穆王), 익왕(翼王), 도왕(度王), 환왕(桓王)으로 왕의 칭호를 올리고, 그 비에게도 각각 효비(孝妃), 정비(貞妃), 경비(敬妃), 의비(懿妃)의 존호(尊號)를 올렸다. 8월에는 신하를 한양에 파견하여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을 손질케 하고, 수리를 끝내는 대로 한양으로 천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소수서원은 1541년(중종 36) 7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1542년(중종 37) 8월에 이곳 출신의 성리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配享)하는 사당을 설립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543년 8월 11일에 완공하여 안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같은 해에 설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주세붕이 서원 이름을 '백운동'으로 한 것은 소수서원의 자리가 중국 송(宋)나라 때 주희(朱熹, 1130∼1200)가 재흥시킨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 있던 "여산(廬山)에 못지않게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이며, 강물이며, 그리고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을 세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기" 때문에 '백록동'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주세붕이 편찬한 『죽계지(竹溪志)』 서문에는 "교화는 시급한 것이고, 이는 어진 이를 존경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므로 안향의 심성론(心性論)과 경(敬) 사상을 수용

  • 전주향교(全州鄕校)는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에 위치하고 있다. 전주향교는 고려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당시의 위치는 현재 경기전(慶基殿) 근처였다.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경기전이 세워지자 1410년(태종 10) 향교에서 경기전에 들려오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하여 전주성의 서쪽 6·7리 되는 황화대 아래 현재의 화산동으로 이전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에 부성(府城)과 너무 떨어져 있고 객사를 기준으로 하여 왼쪽에 문묘(文廟), 오른쪽에 사직단(社稷壇)을 두도록 한 좌사우묘(左社右廟) 제도에 어긋난다 하여 순찰사 장만(張晩)과 유림들이 힘을 합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향교 앞 교동 일대는 현재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이 때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1654년(효종 5), 1832년(순조 32), 1879년(고종 16), 1902년(고종 39), 1904년(고종 41)에 중수하였다. 조선 후기

  • 기둥은 지붕의 하중을 받아서 초석(礎石)에 전달하는 수직 구조물로, 건축공간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가 된다. 기둥은 대들보와 함께 목조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재인데, 대들보가 수평력을 받는 부재라면 기둥은 수직력을 받는 부재라 할 수 있다. 기둥을 세울 때는 원래 목재가 자라던 방향과 일치하도록 기둥을 세워야 기둥의 비틀림이나 갈라짐을 줄일 수 있다. 기둥은 그 재료나 단면 혹은 입면의 모양, 그리고 쓰임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양하다. 입면 형태별 종류 기둥의 입면에 따른 세부 명칭은 상중하로 나누어 윗부분을 기둥머리, 중간을 몸통(기둥몸) 혹은 기둥허리, 밑부분을 밑동 혹은 기둥뿌리라고 부른다. 기둥머리와 몸통, 밑동의 크기가 모두 같은 형태를 직립주라 하고, 각 부분의 크기가 다른 기둥을 흘림기둥이라 한다. 흘림기둥에는 민흘림기둥과 배흘림기둥이 있다. 민흘림기둥 기둥머리 지름보다 밑동 지름이 큰 기둥을 말한다. 지름이 줄어드는 비율은 길이에 따라 일정하지...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에 위치한 남계서원(灆溪書院)은 1552년(명종 7)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고, 1566년(명종 21년)에 '남계(灆溪)'라는 이름으로 사액되었다. '남계'는 서원 곁에 흐르는 시내 이름으로, 서원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된 뒤 나촌(羅村)으로 터를 옮겼다가, 1612년(광해군 4)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다시 옮겨 중건되었다. 남계서원은 풍기 소수서원,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이어 창건된 아주 오래된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남계서원이 위치한 함양 땅은 예로부터 '좌안동 우함양'이라 하여, 한양에서 볼 때 낙동강 왼쪽인 안동과 오른쪽인 함양은 모두 훌륭한 인물을 배출해내어 학문과 문벌에서 손꼽히던 고을들이다. 안동이 퇴계 이황으로 유명하다면, 함양은 남계서원에 모신 정여창으로 유명한

  • 도산서원(陶山書院)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선비인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현재의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퇴계 사후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크게 나뉜다. 서원 전체 영역의 앞쪽에 자리잡은 건물들은 도산서당 영역에 속하고, 그 뒤편에 들어선 건물들은 도산서원 영역에 속한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조영하기 훨씬 전부터 학문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칠 건물을 지었다. 1546년 퇴계가 마흔여섯 되던 해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경상도 예안 건지산 남쪽 기슭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고, 1550년에는 상계의 퇴계 서쪽에 3칸 규모의 집을 짓고 집 이름을 한서암(寒棲庵)이라 하였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자 1551년 한서암 동북쪽 계천(溪川) 위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제자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 창경궁(昌慶宮)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上王)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이다. 1483년(성종 14)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憙王后)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예종의 계비(繼妃)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왕궁 중에 유일하게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남향을 하지 않고 동향을 한 이유는 이 궁이 별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지형상으로도 동향이 적합하였던 듯하다. 성종 때 건립된 창경궁의 건물은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령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 등이었고, 궁의 둘레는 4,325

  •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주두(柱頭), 소로(小擄), 살미[山彌], 첨차(檐遮) 등으로 짜 맞추어 댄 부재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간단히 포(包)라고도 한다. 공포는 그 위에 올려진 보, 도리, 장혀 등으로 지붕의 무게를 합리적으로 기둥에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보는 앞뒤로 위치한 두 기둥이나 벽 위에 수평으로 걸친 구조 부재이고, 도리는 보와 직각 방향으로 걸어 바로 그 위의 서까래를 받는 수평 부재로 지붕을 형성하는 뼈대가 된다. 공포는 그 조합 방식에 따라 크게 포작계, 비포작계, 익공 형식으로 나뉜다. 공포를 구성하는 부재들 주두(柱頭) 기둥머리 위에서 살미, 첨차 등 공포 부재를 받는 됫박처럼 넓적하고 네모난 부재로, 상부의 하중을 균등하게 기둥에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소로(小攎) 공포를 구성하는 됫박 모양의 네모난 나무쪽으로, 첨차·살미·장혀 등의 밑에 틈틈이 받쳐 괸 부재로, 주두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크기가 작다. 모양에 따라 접시소로·팔모접시소로·육모소

  • 도동서원(道東書院)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도학과 덕행을 숭앙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에 있다. 현풍에서 구지면사무소를 지나 낙동강을 오른편에 끼고 약 4㎞쯤 가면 닿는 곳이다. 도동서원은 원래 1568년(선조 1)에 현풍 비슬산 기슭 쌍계동에 건립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605년(선조 38) 지금의 자리에 '보로동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중건되었고,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는데, '도동(道東)'으로 사액한 것도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東來]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동서원이 건립된 현풍 땅과 김굉필이 관계를 맺게 된 연유는 증조부 김중곤이 현풍 곽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현풍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성장기를 현풍면 대니산 남쪽 솔례촌에서 보낸 한훤당은 호탕하게 놀기를 좋아하고 거리낌이 없었는데

  • 임진왜란 이후 270여 년 동안 폐허로 있다가 1865년(고종 2) 중창되기 시작한 경복궁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파괴, 훼철되는 등 수난을 겪는다. 1895년 8월 경복궁으로 난입한 일본 군대에 의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듬해 2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이어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난 이후 경복궁의 수난은 시작된다. 1910년 이후 경복궁 내의 많은 건물을 헐고 민간에 팔던 일제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시정 5주년 기념사업으로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며 경복궁의 면모를 엄청나게 추락시키고 훼손하였다. 그 후 1917년 창덕궁 침전 일곽에 불이 나자 일제는 창덕궁 침전을 복원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 교태전 등을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헐어서 창덕궁의 침전을 복구하였고, 1916년부터는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과 영제교 등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6년 완공하고, 광화문은 건

  • 새 궁궐인 경복궁은 1395년(태조 4)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집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 1차로 완성되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 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태조 4년 9월 29일)에는 건물의 명칭과 규모, 기능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새 궁궐은 연침(燕寢)이 7칸, 동·서 이방(東西耳房)은 각각 2칸, 북천랑(北穿廊)이 7칸, 북행랑이 25칸이다. 동쪽 구석에 연달아 이은 것이 3칸, 서쪽에 연달아 이은 누(樓)가 5칸이고, 남천랑(南穿廊)이 5칸이다. 동쪽의 소침(小寢)은 3칸이며, 천랑(穿廊) 7칸은 연침의 남쪽에 있는 행랑에 닿았고, 또 천랑 5칸은 연침의 동행랑에 닿았다. 서쪽의 소침은 3칸이며, 천랑 7칸은 연침의 남천랑에 닿았고, 또 천랑 5칸은 연침의 서행랑에 닿았다. 보평청(報平廳)은 5칸으로, 정사를 보는 곳이며, 연침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에 이방이 각

  • 지붕은 건물의 꼭대기 부분을 덮는 덮개로, 비나 눈, 햇빛과 이슬 등을 막는 구실을 할 뿐만 아니라, 건물의 품격과 위상을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지붕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에서 건축술이 발달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지붕은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삼국시대 초기에 기와 굽는 일이 시작되면서 기와지붕 구조법이 발달했고 사찰 건축이 활발해지면서 와박사(瓦博士)를 두어 전담시킬 만큼 그 기술이 발전하여 외국에까지 전해줄 정도였다. 지붕은 목구조의 형식에 따른 형태에 따라 크게 맞배지붕,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모임지붕으로 나뉜다. 맞배지붕 건물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이다. 일자형 건물 평면에 알맞은 지붕으로, 가장 간결한 구성미를 가진다. 맞배지붕은 주로 주심포(柱心包) 계통의 건물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서원의 사당과 궁궐의 회랑, 일반집의 행랑채 등에 사용되었다. 우진각지붕 건물 네 면에 모두...

  • 덕수궁(德壽宮)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덕수궁은 조선 태조의 계비 강씨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으로, 능은 태종 때 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 성종의 형 월산대군(1454∼1488)의 저택이 들어섰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 갔다가 1593년 10월 왕과 조정이 서울로 돌아와서 거처할 왕궁이 없자 왕실의 개인 저택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삼아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규모가 좁아서 인근에 있던 계림군(桂林君, ?∼1545)과 심의겸(沈義謙, 1535∼1587)의 저택을 합하여 궁내로 편입시키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부른 것이 후일 덕수궁이 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선조는 1608년 2월 이곳 침전에서 승하하였고, 광해군은 행궁의 서청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잠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다음 즉위 3년인 1611년 행궁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게 하고, 경운궁으로 돌아와 왕궁으로

  •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중앙의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 그리고 지방의 향교(鄕校) 등 관학이 교육기관의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사학(私學)인 서원이 성립되어 교육기관이 확대되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자제들은 7∼8세가 되면 사설 서당에 들어가 초보적인 학문과 습자를 배운 후, 15∼16세가 되면 서울에서는 사학(四學)에, 지방에서는 향교에 들어가 공부하고 소과(小科)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받았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대과(大科)에 합격하여야 비로소 관직에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성균관은 조선시대에 인재 양성을 위하여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인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3가 53 성균관대학교 구내에 설치한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국자감(國子監), 국학(國學), 태학(太學), 반궁(泮宮)으로도 불렸다. 성균관에는 향교와 마찬가지로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孔子)와 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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