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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빨리좀 부탁요.경기도 화성에 대해서요.
dleo**** 조회수 4,213 작성일2008.03.23

1)경기도 화성시의 유래

2)경기도 화성시의 변천 과정

 

 

화성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재 

 

1)국가 지정 문화재 (3가지)

2)지방문화재

 

 

화성지역의 문화재를 한가지 선정하여 쓰세요

 

1)명칭

2)위치

3)종류

4)특징

 

 

 

 

빨리좀 부탁요..

내공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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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학교숙제 지식인으로 하래

 

선생님한태 혼난다!

 

 

 

자자

 

1)화성시의 유래와 변천과정

 

우리가 살고 있는 시 명칭이 왜 ‘화성(華城)’인가.
그 유래와 뜻에 대해 널리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수원시에는 ‘화성’이라는 같은 명칭의 성곽이 존재하고 있는데 수원시를 화성시라 부르지 않고 왜 우리 지역을 ‘화성’이라 부르는지,,,,
1789년(정조 13) 정조는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배봉산(拜峰山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소재,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서 지금의 화산(花山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으로 옮겼다. 그리고 화산 지역에 있던 읍치(고을 관아)는 수원 팔달산 밑으로 옮기고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정조는 1794년부터 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미 그 전해에 수원을 화성이라 부르고 유수부로 승격시킨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39권 정조 18년(1794) 1월 15일자 화성 축조와 관련된 정조의 말씀에는 화성이라 부르게 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이다. 옛날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화(華)자와 화(花)자는 서로 통용된다. 화산의 뜻은 대체로 8백개의 봉우리가 이 한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라 마치 꽃송이 같다 하여 이른 것이다.
園所花山也此府柳川也 取華人祝聖之意名此城曰華城 花如華通花山之義 蓋以八百峰巒拱護一岡圓正如花瓣之謂也

여기서 華사람이 요임금에게 세 가지 축원을 올린 것을 가리켜 화봉삼축(華封三祝)이라 하며 그 내용은 장자(莊子) 천지편(天地編)에서 유래된 것이다.

화봉인(화사람)이 요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하였는데 화봉인이 말하기를 “성인(요임금)에게 축원하오니 오래 사십시오”하니 요임금은 “싫다”하였다. 이어 화봉인이 “부자가 되십시오”하니 요임금은 다시 “싫다”하였다. 이어 화봉인이 “자식을 많이 두십시오”하니 요임금이 “싫다”하였다. 그러자 화봉인이 “壽, 富, 多男은 모든 인간이 바라는 바인데 혼자서 마다하는 연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요임금은 “多男는 걱정이 많고 富는 일이 많으며 壽는 욕됨이 많다. 따라서 이 세 가지는 덕을 기르는 소이(所以)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堯觀乎華 華封人曰 嘻 聖人 請祝聖人 使聖人壽 堯曰 辭 使聖人富 堯曰 辭 使聖人多男子 堯曰 辭 封人曰 壽富多男子 人之所欲也 女獨不欲 何郁 堯曰 多男子 則多懼 富則多事 壽則多辱 是三者 非所以養德也

즉 이 화봉삼축 이라는 고사가 강조하는 바는 부나 장수, 자손 등 평범한 세인이 바라는 차원을 한층 넘어서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덕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정조가 이 고사를 취하여 성의 이름을 화성이라 부여한 것은 결국 덕을 기리는 고을이 되라는 깊은 뜻으로 이해 될 수 있다.

그럼, 왜 수원의 ‘화성’과 우리가 살고 있는 ‘화성’시는 이름이 같을까?
1949년 8월 수원읍이 시로 승격되고 여기에 편입되지 않은 나머지 지역을 화성군으로 칭하면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을 ‘화성’이라 불려지게 된 것이다. 결국 당시 행정당국의 단순한 논리로 인해 행정명칭이 뒤바뀐 모습이 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참고적으로 수원대학 부근에 토성이 있는데 이를 수원고읍성 또는 수원성이라 부르고 있다.(세종실록지리지 권148 수원도호부조)

 

 

화성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재

 

1) 국가지정문화재

이거는 1번 범종하고, 2번 목아미타불좌상?..

머..그런거같고;;

 

화성지역의 문화재 한가지를 선정하여 쓰는건 밑에 내용에따라서 골라쓰삼 ㅋㅋ

 

 

 

 

1.용주사 범종

종    목  국보  제120호 
지 정 일  1964.03.30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태안면 송산리 188 용주사  
시     대 고려시대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 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어깨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 위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무늬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4곳의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가 있는데, 남아 있는 것은 1곳 뿐이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두었고,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종 입구 부분의 넓은 띠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덩굴무늬를 두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조성된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2.봉림사 목아미타불좌상

종    목  보물  제980호 
지 정 일  1989.04.10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남양면 북양리 642 봉림사  
시     대 고려시대

봉림사 법당에 모셔져 있는 목불좌상으로 1978년 불상 몸에 다시 금칠을 할 때 발견된 기록을 통해 고려 공민왕 11년(1362)을 하한으로 아미타불상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얼굴은 단아하고 엄숙한 표정이며 무게있는 몸은 단정하고 앞으로 약간 숙여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싸 흘러내린 옷은 가슴에서 매는 띠매듭이 사라지고, 3줄의 옷주름이 묘사되어 특징적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작품이다. 



3.융릉·건릉

종    목  사적  제206호  
면    적  705,653㎡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태안면 안녕리 1-1  
시     대 조선시대 

융릉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무덤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의황제로 봉해졌다. 이때 혜경궁 홍씨도 의황후로 봉해졌다.

융릉은 원래 양주의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합장릉인 융릉은 병풍석을 세우고 모란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건릉과 예릉의 기준이 되고있다. 무덤의 석인도 사실적이고 예전에 가슴까지 숙여진 머리가 들려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내며, 문인석에서는 머리에 금관을 쓴 예가 나타나고 있어 19세기 이후의 무덤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여 창의적으로 만들었다.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많은 인재를 등용하고, 조선 후기의 황금문화를 이룩하였다.

건릉은 현융원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죽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무덤은 한 언덕에 2개의 방을 갖추었으며 난간만 두르고 있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혼이 앉는 자리인 혼유석이 하나만 있으며, 융릉과 같이 8각형과 4각형을 조화시켜 석등을 세웠다. 문무석은 사실적이며 안정감이 있는 빼어난 조각으로 19세기 무덤의 석물제도의 새로운 표본을 제시하였다.


4.당성

종    목  사적  제217호 
면    적  134,545.46㎡ 
지 정 일  1971.04.15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 
시     대 삼국시대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남북으로 길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는 동문·남문·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성의 내벽은 흙으로 쌓고, 외벽은 돌로 쌓았다.

이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하였으나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하고,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성벽은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이지만, 흙성의 성벽을 돌로 쌓아 올린 흔적이 남벽 쪽에 약간 남아있다.

당성이 소재하는 남양지역은 지금은 화성시이지만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으로서, 중국과의 교통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해서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당항성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5.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종    목  사적  제299호 
면    적  301㎡ 
지 정 일  1982.12.21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322-4 
시     대 일제강점기

3·1운동때 일제가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현장이다.

3월 10일경에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그후 4월 5일에 발안장날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교회 청년들과 시장에 모인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사격과 매질을 가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격분한 군중들은 돌을 던져 경찰부장을 죽였다.

4월 15일 일본군은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한 후, 출입문과 창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제히 집중사격을 했다. 또 교회당 밖으로 시체를 끌어다 모아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불을 질렀다.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다니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마구 칼로 찔러 죽였다.

이 사건은 죄없는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일본이 저지른 잔악행위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1982년 제암리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의 증언으로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23위의 유해와 희생자들의 조끼단추, 동전, 못, 병들이 함께 출토되어 이곳에 표석을 세우고 합동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불탄 예배당터에는 순국기념탑을 세우고, 국·내외 관계자료를 모아 기념관에 전시해 국민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6.마하리 백제고분군

종    목  사적  제451호 
면    적  76,394㎡ 
지 정 일  2003.08.29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봉담읍 마하리 산40외 
시     대 삼국시대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마하리에 있는 화성 마하리 백제고분군은 1995년 경부고속철도 경기·충청권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1996∼1997년 사이에 서울대학교박물관과 호암미술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원삼국∼삼국시대에 이르는 많은 고분이 밀집되어 분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고분의 형태는 널무덤(목관묘), 덧널무덤(목곽묘), 돌덧널무덤(석곽묘) 등 여러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출토유물은 유리제·구슬·철기류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토기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화성 마하리 백제고분군은 당시의 묘제와 토기의 변천과정, 편년 연구 및 한강유역에 한정되었던 초기백제의 형성과 전개과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7.정용채가옥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24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109  
시     대 조선시대 
 
나즈막한 동산이 둘러있는 명당 터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는 큰집이다. 솟을대문에 적힌 기록에는 고종 24년(1887)에 문을 세웠다고 적혀 있으나, 안채와 사랑채는 이 문보다 약 50년 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문은 정면으로 내지않고 북쪽측면으로 내어 언뜻보면 집이 커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50칸이 넘는 큰 규모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이며, 마당의 왼쪽으로 길게 줄행랑채가 뻗어있고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 맞은편의 마당끝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대문이 있다. 중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ㄷ자형의 안채는 앞이 개방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안방·찻방(과방)이 있고, 오른쪽에 부엌·건넌방·마루를 배치하였다. 특이한 것은 사랑채의 안사랑방 뒤에 있는 골방이 뒷마루를 통하여 은밀하게 안채의 대청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대부 집에서 통상 쓰는 수법이다.

길다란 행랑채는 안채와 사랑채의 앞을 가로막아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형성하고 있다. 대문채는 여기에 연결이 되어 있다. 안사람들의 아늑한 생활공간이었던 뒷뜰은 우물과 장독대를 두어 안살림의 옥외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주위에 심은 감나무와 소나무는 뒷산으로 이어져 자연에 파묻힌 아름다운 공간구성을 만들고 있다.

전체적으로 평면형태가 月자형을 나타내고 있으며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모습을 보이는 주택이다.
 
 
8.정용래가옥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25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108  
시     대 조선시대

1800년대 말에 지은 초가집이다.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행랑채가 모여 경기도의 전형적인 튼 ㅁ자형의 평면구조를 보이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마당이며, 대문의 왼쪽에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에 행랑채가 세로로 길게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사랑채가 마주보이는 곳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꺾이는 왼쪽 아래로 찻방·안방·부엌을 두었다. 대청의 뒷벽에는 왼쪽으로 뒷창을 내고 오른쪽으로 벽장을 만들어서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당을 따로 두지 않는 민가에서 통상 쓰는 수법이다. 바깥마당은 사랑방 앞으로 터져 있으며 왼편에 헛간채가 있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민가의 격식과 쓰임새를 갖추었던 부유한 농민의 집으로 추정된다. 
 
 
9.금동향로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 188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정조(재위 1776∼1800)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용주사에 내려준 향로이다.

4면으로 된 몸체의 각 면에는 순금으로 덩굴무늬를 만들어 부쳤고, 사각으로 된 뚜껑에도 금 장식을 하였다. 뚜껑 꼭지 부분의 순금 장식물은 없어지고, 붙였던 흔적만 남아있다. 향로는 4개의 높다란 다리가 받치고 있으며 용모양이 조각되 있다.

형태나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명나라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추측된다.
 
 
10.윤계선생 순절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5호
지 정 일  1979.09.03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남양동 1392-1 
시     대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순절한 남양부사 윤계(1585∼1636)의 추모비이다.

윤계는 조선 인조 5년(1627)에 문과에 급제한 후 전적, 교리의 벼슬을 거쳐 남양부사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 군비를 갖추기도 전에 청나라 군대가 기습하여 패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장렬히 싸우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항상 오랑캐와 화의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친동생 윤집은 청과의 화의를 강경하게 반대한 3학사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비는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돌 위에 비문을 세운 간결한 모습이다. 현종 9년(1668)에 세운 비로, 당시 우의정이었던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민유중이 썼다.
 
 
11.남이장군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3호 
지 정 일  1973.07.10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145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무신인 충무공 남이(1441∼1468) 장군의 묘소이다.

세조 3년(1457)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세조 13년(1467)에는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여 적개공신 1등에 봉해진 후, 여진을 토벌하여 이등군공에 올랐으며 26세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1468년에 예종이 즉위하자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모를 꾀한다하여 28세 때 처형당하였다. 그 뒤 순조 18년(1818)에 복직되었으며,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과 부인이 합장되어 있고 봉분은 2기이며, 봉분 아랫부분은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1쌍씩 있다.
 
 
12.수원고읍성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93호 
지 정 일  1986.09.07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산1 
시     대 고려시대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고려 때 수원에 읍성으로 쌓았으며, 조선 정조 13년(1789)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읍성을 쌓을 때까지 사용되었던 곳이다.

본래 낮은 산능성을 이용하여 계곡 아래의 평지까지 에워 싼 형태였으나, 성터의 대부분이 무너지고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가 540m 안팎이다.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성벽은 윗부분이 2∼2.5m이고 높이는 4∼5m이며, 동문터와 서문터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1200m쯤 되며 성안에는 2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 복원하여 보면 3,500m쯤 되어 큰 차이가 난다.

결국 이 성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조선시대까지 읍성의 기능을 하다가 행정조직상의 정비와 무덤의 이장에 따라 너무 좁아지자 사용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13.남양향교

종    목  문화재자료  제34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남양면 남양리 335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남양향교는 조선 태조 6년(1397)에 음덕리 면역곡동에 처음 세웠다고 하며, 고종 10년(1873)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도 이 때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앞쪽에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뒤쪽으로 제사 공간인 대성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외 출입구 구실을 하는 내삼문·외삼문, 제사를 준비하는 수복실 등이 있다. 옮겨 지을 당시에는 모든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나, 동무·서무·명륜당이 없어졌다가 후에 명륜당만 새로 지었다.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객사처럼 좌우에 날개채를 붙인 평면으로 구성되어 매우 독특하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이며, 동재와 서재는 기숙사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14.홍승인고가

종    목  문화재자료  제74호 
지 정 일  1985.09.20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정남면 문학1리 628 
시     대  조선시대

경기도 지방 부농의 전통적인 주거 생활을 보여주는 가옥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모두 ㄱ자형이며, 전체로는 ㅁ자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마당과 면하는 기단 부분을 계단처럼 3중으로 구성한 점이 특이하며, 사랑채 앞쪽으로 一자형의 행랑채가 있다. 9칸으로 구성된 행랑채 왼쪽에서 4번째 칸에 솟을대문을 두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담장을 쌓아 행랑마당과 사랑마당을 나누고 가운데에 중문을 두었다. 사랑채에서 서쪽으로 꺾인 날개채에는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별도의 문을 두었다.

안채는 가운데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동쪽에 안방, 맞은 편에 건넌방을 두고 안방 앞쪽에 부엌을 두었다. 부엌 뒤쪽은 우물과 장독대 따위가 있는 뒤꼍으로 안방 부분에 쪽마루를 붙여 쉽게 출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사랑채는 앞면 7칸에 툇마루를 두었는데 구성이 특이하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1칸 방을 들이고 창호를 툇마루 바깥쪽에 달아 방 앞쪽에서는 툇마루가 복도처럼 되었다. 띠살창의 정교한 가공이 돋보이는 집이다.

지은 시기를 밝혀주는 자료는 없지만 사랑채에 사용된 부재나 가구의 수법 들로 미루어 19세기 말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안채는 그보다 앞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15.용주사 대웅보전

종    목  문화재자료  제35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 188 
시     대  조선시대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호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세운 절이다.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옮긴 다음해인 정조 14년(1790) 세웠다.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 때 세워 고려시대 때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라고 전한다.

대웅보전은 삼존불상을 모시고 있는 건물로 내부·외부를 대단히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삼존불상 뒤에는 세울 당시에 그린 석가모니불·아미타불·약사불의 삼존불화가 있다.
  목  국보  제120호 
지 정 일  1964.03.30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태안면 송산리 188 용주사 
시     대 고려시대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 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어깨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 위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무늬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4곳의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가 있는데, 남아 있는 것은 1곳 뿐이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두었고,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종 입구 부분의 넓은 띠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덩굴무늬를 두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조성된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200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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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의 유래와 변천과정

 

우리가 살고 있는 시 명칭이 왜 ‘화성(華城)’인가.
그 유래와 뜻에 대해 널리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수원시에는 ‘화성’이라는 같은 명칭의 성곽이 존재하고 있는데 수원시를 화성시라 부르지 않고 왜 우리 지역을 ‘화성’이라 부르는지,,,,
1789년(정조 13) 정조는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배봉산(拜峰山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소재,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서 지금의 화산(花山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으로 옮겼다. 그리고 화산 지역에 있던 읍치(고을 관아)는 수원 팔달산 밑으로 옮기고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정조는 1794년부터 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미 그 전해에 수원을 화성이라 부르고 유수부로 승격시킨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39권 정조 18년(1794) 1월 15일자 화성 축조와 관련된 정조의 말씀에는 화성이라 부르게 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이다. 옛날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화(華)자와 화(花)자는 서로 통용된다. 화산의 뜻은 대체로 8백개의 봉우리가 이 한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라 마치 꽃송이 같다 하여 이른 것이다.
園所花山也此府柳川也 取華人祝聖之意名此城曰華城 花如華通花山之義 蓋以八百峰巒拱護一岡圓正如花瓣之謂也

여기서 華사람이 요임금에게 세 가지 축원을 올린 것을 가리켜 화봉삼축(華封三祝)이라 하며 그 내용은 장자(莊子) 천지편(天地編)에서 유래된 것이다.

화봉인(화사람)이 요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하였는데 화봉인이 말하기를 “성인(요임금)에게 축원하오니 오래 사십시오”하니 요임금은 “싫다”하였다. 이어 화봉인이 “부자가 되십시오”하니 요임금은 다시 “싫다”하였다. 이어 화봉인이 “자식을 많이 두십시오”하니 요임금이 “싫다”하였다. 그러자 화봉인이 “壽, 富, 多男은 모든 인간이 바라는 바인데 혼자서 마다하는 연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요임금은 “多男는 걱정이 많고 富는 일이 많으며 壽는 욕됨이 많다. 따라서 이 세 가지는 덕을 기르는 소이(所以)가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堯觀乎華 華封人曰 嘻 聖人 請祝聖人 使聖人壽 堯曰 辭 使聖人富 堯曰 辭 使聖人多男子 堯曰 辭 封人曰 壽富多男子 人之所欲也 女獨不欲 何郁 堯曰 多男子 則多懼 富則多事 壽則多辱 是三者 非所以養德也

즉 이 화봉삼축 이라는 고사가 강조하는 바는 부나 장수, 자손 등 평범한 세인이 바라는 차원을 한층 넘어서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덕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정조가 이 고사를 취하여 성의 이름을 화성이라 부여한 것은 결국 덕을 기리는 고을이 되라는 깊은 뜻으로 이해 될 수 있다.

그럼, 왜 수원의 ‘화성’과 우리가 살고 있는 ‘화성’시는 이름이 같을까?
1949년 8월 수원읍이 시로 승격되고 여기에 편입되지 않은 나머지 지역을 화성군으로 칭하면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을 ‘화성’이라 불려지게 된 것이다. 결국 당시 행정당국의 단순한 논리로 인해 행정명칭이 뒤바뀐 모습이 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참고적으로 수원대학 부근에 토성이 있는데 이를 수원고읍성 또는 수원성이라 부르고 있다.(세종실록지리지 권148 수원도호부조)

 

 

화성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재

 

1) 국가지정문화재

이거는 1번 범종하고, 2번 목아미타불좌상?..

머..그런거같고;;

 

화성지역의 문화재 한가지를 선정하여 쓰는건 밑에 내용에따라서 골라쓰삼 ㅋㅋ

 

 

 

 

1.용주사 범종

종    목  국보  제120호 
지 정 일  1964.03.30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태안면 송산리 188 용주사  
시     대 고려시대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 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어깨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 위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무늬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4곳의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가 있는데, 남아 있는 것은 1곳 뿐이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두었고,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종 입구 부분의 넓은 띠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덩굴무늬를 두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조성된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2.봉림사 목아미타불좌상

종    목  보물  제980호 
지 정 일  1989.04.10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남양면 북양리 642 봉림사  
시     대 고려시대

봉림사 법당에 모셔져 있는 목불좌상으로 1978년 불상 몸에 다시 금칠을 할 때 발견된 기록을 통해 고려 공민왕 11년(1362)을 하한으로 아미타불상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얼굴은 단아하고 엄숙한 표정이며 무게있는 몸은 단정하고 앞으로 약간 숙여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싸 흘러내린 옷은 가슴에서 매는 띠매듭이 사라지고, 3줄의 옷주름이 묘사되어 특징적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작품이다. 



3.융릉·건릉

종    목  사적  제206호  
면    적  705,653㎡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태안면 안녕리 1-1  
시     대 조선시대 

융릉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무덤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의황제로 봉해졌다. 이때 혜경궁 홍씨도 의황후로 봉해졌다.

융릉은 원래 양주의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합장릉인 융릉은 병풍석을 세우고 모란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건릉과 예릉의 기준이 되고있다. 무덤의 석인도 사실적이고 예전에 가슴까지 숙여진 머리가 들려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내며, 문인석에서는 머리에 금관을 쓴 예가 나타나고 있어 19세기 이후의 무덤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여 창의적으로 만들었다.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많은 인재를 등용하고, 조선 후기의 황금문화를 이룩하였다.

건릉은 현융원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죽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무덤은 한 언덕에 2개의 방을 갖추었으며 난간만 두르고 있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혼이 앉는 자리인 혼유석이 하나만 있으며, 융릉과 같이 8각형과 4각형을 조화시켜 석등을 세웠다. 문무석은 사실적이며 안정감이 있는 빼어난 조각으로 19세기 무덤의 석물제도의 새로운 표본을 제시하였다.


4.당성

종    목  사적  제217호 
면    적  134,545.46㎡ 
지 정 일  1971.04.15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 
시     대 삼국시대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남북으로 길다란 네모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는 동문·남문·북문 터와 우물터,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성의 내벽은 흙으로 쌓고, 외벽은 돌로 쌓았다.

이 지역은 처음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한때 고구려의 영토로 당성군이라 하였으나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게 되자 당항성이라 하고, 바다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길목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성벽은 쌓은 벽이 무너져 마치 흙과 돌을 합쳐서 쌓은 것처럼 보이지만, 흙성의 성벽을 돌로 쌓아 올린 흔적이 남벽 쪽에 약간 남아있다.

당성이 소재하는 남양지역은 지금은 화성시이지만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으로서, 중국과의 교통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신라 후기에는 이곳에 당성진을 설치해서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근거지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당항성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5.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종    목  사적  제299호 
면    적  301㎡ 
지 정 일  1982.12.21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322-4 
시     대 일제강점기

3·1운동때 일제가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현장이다.

3월 10일경에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그후 4월 5일에 발안장날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교회 청년들과 시장에 모인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사격과 매질을 가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격분한 군중들은 돌을 던져 경찰부장을 죽였다.

4월 15일 일본군은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한 후, 출입문과 창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제히 집중사격을 했다. 또 교회당 밖으로 시체를 끌어다 모아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불을 질렀다.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다니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마구 칼로 찔러 죽였다.

이 사건은 죄없는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일본이 저지른 잔악행위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1982년 제암리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의 증언으로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23위의 유해와 희생자들의 조끼단추, 동전, 못, 병들이 함께 출토되어 이곳에 표석을 세우고 합동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불탄 예배당터에는 순국기념탑을 세우고, 국·내외 관계자료를 모아 기념관에 전시해 국민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6.마하리 백제고분군

종    목  사적  제451호 
면    적  76,394㎡ 
지 정 일  2003.08.29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봉담읍 마하리 산40외 
시     대 삼국시대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마하리에 있는 화성 마하리 백제고분군은 1995년 경부고속철도 경기·충청권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1996∼1997년 사이에 서울대학교박물관과 호암미술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원삼국∼삼국시대에 이르는 많은 고분이 밀집되어 분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고분의 형태는 널무덤(목관묘), 덧널무덤(목곽묘), 돌덧널무덤(석곽묘) 등 여러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출토유물은 유리제·구슬·철기류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토기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화성 마하리 백제고분군은 당시의 묘제와 토기의 변천과정, 편년 연구 및 한강유역에 한정되었던 초기백제의 형성과 전개과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7.정용채가옥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24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109  
시     대 조선시대 
 
나즈막한 동산이 둘러있는 명당 터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는 큰집이다. 솟을대문에 적힌 기록에는 고종 24년(1887)에 문을 세웠다고 적혀 있으나, 안채와 사랑채는 이 문보다 약 50년 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문은 정면으로 내지않고 북쪽측면으로 내어 언뜻보면 집이 커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50칸이 넘는 큰 규모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이며, 마당의 왼쪽으로 길게 줄행랑채가 뻗어있고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 맞은편의 마당끝에는 안채로 통하는 중대문이 있다. 중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ㄷ자형의 안채는 앞이 개방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부엌·안방·찻방(과방)이 있고, 오른쪽에 부엌·건넌방·마루를 배치하였다. 특이한 것은 사랑채의 안사랑방 뒤에 있는 골방이 뒷마루를 통하여 은밀하게 안채의 대청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대부 집에서 통상 쓰는 수법이다.

길다란 행랑채는 안채와 사랑채의 앞을 가로막아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형성하고 있다. 대문채는 여기에 연결이 되어 있다. 안사람들의 아늑한 생활공간이었던 뒷뜰은 우물과 장독대를 두어 안살림의 옥외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주위에 심은 감나무와 소나무는 뒷산으로 이어져 자연에 파묻힌 아름다운 공간구성을 만들고 있다.

전체적으로 평면형태가 月자형을 나타내고 있으며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모습을 보이는 주택이다.
 
 
8.정용래가옥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25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108  
시     대 조선시대

1800년대 말에 지은 초가집이다. ㄱ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행랑채가 모여 경기도의 전형적인 튼 ㅁ자형의 평면구조를 보이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마당이며, 대문의 왼쪽에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에 행랑채가 세로로 길게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사랑채가 마주보이는 곳에 대청과 건넌방을 두고, 꺾이는 왼쪽 아래로 찻방·안방·부엌을 두었다. 대청의 뒷벽에는 왼쪽으로 뒷창을 내고 오른쪽으로 벽장을 만들어서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당을 따로 두지 않는 민가에서 통상 쓰는 수법이다. 바깥마당은 사랑방 앞으로 터져 있으며 왼편에 헛간채가 있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민가의 격식과 쓰임새를 갖추었던 부유한 농민의 집으로 추정된다. 
 
 
9.금동향로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호
지 정 일  1972.05.04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 188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정조(재위 1776∼1800)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용주사에 내려준 향로이다.

4면으로 된 몸체의 각 면에는 순금으로 덩굴무늬를 만들어 부쳤고, 사각으로 된 뚜껑에도 금 장식을 하였다. 뚜껑 꼭지 부분의 순금 장식물은 없어지고, 붙였던 흔적만 남아있다. 향로는 4개의 높다란 다리가 받치고 있으며 용모양이 조각되 있다.

형태나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명나라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추측된다.
 
 
10.윤계선생 순절비

종    목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5호
지 정 일  1979.09.03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남양동 1392-1 
시     대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순절한 남양부사 윤계(1585∼1636)의 추모비이다.

윤계는 조선 인조 5년(1627)에 문과에 급제한 후 전적, 교리의 벼슬을 거쳐 남양부사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 군비를 갖추기도 전에 청나라 군대가 기습하여 패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장렬히 싸우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항상 오랑캐와 화의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친동생 윤집은 청과의 화의를 강경하게 반대한 3학사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비는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돌 위에 비문을 세운 간결한 모습이다. 현종 9년(1668)에 세운 비로, 당시 우의정이었던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의 명칭은 민유중이 썼다.
 
 
11.남이장군 묘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13호 
지 정 일  1973.07.10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145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의 무신인 충무공 남이(1441∼1468) 장군의 묘소이다.

세조 3년(1457)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세조 13년(1467)에는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여 적개공신 1등에 봉해진 후, 여진을 토벌하여 이등군공에 올랐으며 26세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1468년에 예종이 즉위하자 유자광의 모함으로 역모를 꾀한다하여 28세 때 처형당하였다. 그 뒤 순조 18년(1818)에 복직되었으며,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과 부인이 합장되어 있고 봉분은 2기이며, 봉분 아랫부분은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1쌍씩 있다.
 
 
12.수원고읍성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93호 
지 정 일  1986.09.07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산1 
시     대 고려시대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고려 때 수원에 읍성으로 쌓았으며, 조선 정조 13년(1789)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읍성을 쌓을 때까지 사용되었던 곳이다.

본래 낮은 산능성을 이용하여 계곡 아래의 평지까지 에워 싼 형태였으나, 성터의 대부분이 무너지고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가 540m 안팎이다.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성벽은 윗부분이 2∼2.5m이고 높이는 4∼5m이며, 동문터와 서문터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1200m쯤 되며 성안에는 2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 복원하여 보면 3,500m쯤 되어 큰 차이가 난다.

결국 이 성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조선시대까지 읍성의 기능을 하다가 행정조직상의 정비와 무덤의 이장에 따라 너무 좁아지자 사용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13.남양향교

종    목  문화재자료  제34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남양면 남양리 335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남양향교는 조선 태조 6년(1397)에 음덕리 면역곡동에 처음 세웠다고 하며, 고종 10년(1873)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도 이 때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앞쪽에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뒤쪽으로 제사 공간인 대성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외 출입구 구실을 하는 내삼문·외삼문, 제사를 준비하는 수복실 등이 있다. 옮겨 지을 당시에는 모든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나, 동무·서무·명륜당이 없어졌다가 후에 명륜당만 새로 지었다.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객사처럼 좌우에 날개채를 붙인 평면으로 구성되어 매우 독특하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이며, 동재와 서재는 기숙사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14.홍승인고가

종    목  문화재자료  제74호 
지 정 일  1985.09.20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정남면 문학1리 628 
시     대  조선시대

경기도 지방 부농의 전통적인 주거 생활을 보여주는 가옥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모두 ㄱ자형이며, 전체로는 ㅁ자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마당과 면하는 기단 부분을 계단처럼 3중으로 구성한 점이 특이하며, 사랑채 앞쪽으로 一자형의 행랑채가 있다. 9칸으로 구성된 행랑채 왼쪽에서 4번째 칸에 솟을대문을 두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담장을 쌓아 행랑마당과 사랑마당을 나누고 가운데에 중문을 두었다. 사랑채에서 서쪽으로 꺾인 날개채에는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별도의 문을 두었다.

안채는 가운데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동쪽에 안방, 맞은 편에 건넌방을 두고 안방 앞쪽에 부엌을 두었다. 부엌 뒤쪽은 우물과 장독대 따위가 있는 뒤꼍으로 안방 부분에 쪽마루를 붙여 쉽게 출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사랑채는 앞면 7칸에 툇마루를 두었는데 구성이 특이하다.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1칸 방을 들이고 창호를 툇마루 바깥쪽에 달아 방 앞쪽에서는 툇마루가 복도처럼 되었다. 띠살창의 정교한 가공이 돋보이는 집이다.

지은 시기를 밝혀주는 자료는 없지만 사랑채에 사용된 부재나 가구의 수법 들로 미루어 19세기 말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안채는 그보다 앞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15.용주사 대웅보전

종    목  문화재자료  제35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 188 
시     대  조선시대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호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세운 절이다.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으로 옮긴 다음해인 정조 14년(1790) 세웠다.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 때 세워 고려시대 때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라고 전한다.

대웅보전은 삼존불상을 모시고 있는 건물로 내부·외부를 대단히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삼존불상 뒤에는 세울 당시에 그린 석가모니불·아미타불·약사불의 삼존불화가 있다.
  목  국보  제120호 
지 정 일  1964.03.30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태안면 송산리 188 용주사 
시     대 고려시대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 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어깨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 위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무늬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4곳의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가 있는데, 남아 있는 것은 1곳 뿐이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두었고,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종 입구 부분의 넓은 띠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어깨띠와는 다르게 덩굴무늬를 두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조성된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와 일치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진 것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각한 수법이 뛰어나 고려 종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200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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