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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60년대 방송개국의 분위기,, 현실 내공50
jenn**** 조회수 11,464 작성일2003.07.27
방송국이 개국했잖아요/.

그때의 사회는 방송국을 어떻게 생각했고,

또 어떤 청취층이 주였는지...어쨋든 그때 분위기를 알려주세요..

60년대의 방송현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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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몇개 올리죠. 님이 알아서 판단하시길. ^^.

개국 35주년 맞은 동아방송을 회고하며/김영효 전 동아방송 PD

[동아일보] 1998-04-27 (문화) 기획.연재 32면 1104자


◎“독재에 안꺾인 곧은 소리”/“다큐는 곧 동아” 명성 개국초부터 청취율 선두/군사정권엔 ‘눈엣가시’ 80년 통폐합 “청천벽력”
아! 동아방송.
청취율이라는 천하의 패권을 놓고 라디오 방송사(DBS KBS MBC CBS 등)들이 8월 염천의 불볕 더위보다 더 뜨거운 경쟁을 연출하던 60년대를 ‘라디오 춘추전국시대’라고 부른다. 동아방송은 그 치열한 청취율 경쟁시대에 언제나 선두를 달려 청취자들로부터 한국방송의 확고한 주역임을 공인받았다.
4월25일은 그 동아방송이 35년전 개국의 첫 전파를 발사한 기념비적인 날이다. 동아방송은 그날 개국 특집방송을 통해 “민족최고의 표현기관임을 자임하는 ‘신문의 동아’가 이제 티없는 젊은 지성들이 자유와 민주를 위해 족쇄에 항거하는 깃발을 흔들던 그 4월의 푸른 계절을 기려 ‘방송의 동아’ DBS를 이룩하게 되었다”며 개국 첫 인사를 했다.
동아방송은 개국 후 1년여만에 청취율 1위를 확보했고 인기프로그램 20위안에 7개가 오를 만큼 타방송사를 압도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역사의 고삐를 휘어잡은 군사정권은 동아방송이 ‘눈엣가시’였다. 63년 10월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박정희후보는 생방송중의 동아방송 인터뷰 마이크를 향해 ‘거짓말 방송하지 말라’고 내뱉기도 했다.
이것은 개국 후 동아방송의 보도 내용에 대한 군사정권의 불만을 감정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동아방송 청취권 지역에서는 야당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동아방송 뉴스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이 국민의 분석과 평가였다.
‘격조높은 민족의 방송’임을 자부하는 동아방송은 특히 다큐멘터리에 제작역량을 집중시켰다. ‘여명 80년’으로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동아방송은 민족사와 세계사의 재조명이라는 사명감과 거시적 안목을 갖고 계속 정진해 ‘다큐멘터리는 곧 동아’라는 명망과 평판을 얻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언론통폐합조치로 80년 11월30일 특별고별방송을 마치고 뿔뿔이 흩어진 지 벌써 17년이 넘었다.
그동안 우리는 그날의 충격과 좌절감 등 착잡한 심정을 어찌할 수 없어 헤매다 개국기념일을 전후해 다시 만나 변함없는 동아에 대한 긍지와 애정을 확인하곤 했다.
DBS 동아방송이여 영원하라!!<작가>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61)라디오

[경향신문] 2001-05-04 (특집) 기획.연재 31면 45판 3055자


저녁상 설거지를 끝낸 어스름 무렵. 가족들은 누렇게 변색된 플라스틱 케이스의 *‘제니스 라디오’나 사각형 나무통 속에 진공관이 촘촘히 박힌 *금성라디오 앞에 둘러앉았다. 라디오에서는 ‘동심초’나 ‘이 생명 다하도록’ 같은 연속극이 흘러나왔다. 엄마와 누나는 이별을 앞두고 한껏 감정을 돋운 남녀의 목소리에 몰래 눈물을 찍어냈다. 선반이나 경대 위, 대청마루에 ‘모셔놓고’ 들었던 당시의 라디오는 지금 같은 누름단추가 아니라 *다이얼을 돌려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었다.
치직거리는 잡음 섞인 방송조차도 잘 나오지 않아 팡팡 치고 이리저리 다이얼을 맞추느라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라디오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친구'였다. 솜씨 좋은 형들은 부속품을 사다가 라디오를 조립하기도 했다.
그 시절 라디오의 꽃은 바로 연속극이었다. '아낌없이 주련다' '빨간마후라' '떠날 때는 말없이' 등은 나중에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라디오 연속극이다. 김수현의 *'저 눈밭에 사슴이'도 인기였다. 이미자가 구성지고 정감어린 목소리로 불렀던 '총각선생님'은 같은 제목의 연속극 주제가였다. 연속극이 시작되면 온식구가 성우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따라 마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인양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펼쳤다.
'태권동자 마루치 정의의 주먹에 파란 해골 13호 납작코가 되었네…'. 아이들은 *'태권동자 마루치'에 홀딱 빠져 있었다. '손오공'도 참 재미있게 들었던 라디오 연속극이었다. 아버지는 샛바람 시원한 툇마루에서 성우 구민씨의 '전설따라 삼천리'나 오승룡씨의 '오발탄', 11시55분이면 '어이타 북녘땅은 핏빛으로 물들었나'로 시작되는 '김삿갓 북한방랑기'를 들었다.
'재치문답'은 '재치박사'로 불리는 남녀 패널들이 나와 퀴즈, 놀이, 재치 경쟁 등 다양한 게임을 진행하는 공개 방송이었다. 한국남.안의섭씨 등이 단골 재치박사로 출연했다. 장소팔.고춘자씨가 따발총처럼 쏟아내던 만담도 오랫동안 인기를 누린 오락프로였다.
TV가 드물었던 1960년대와 70년대 초엔 라디오 연속극에서 희로애락을 연기하던 성우의 인기가 대단했다. 구민.고은정.오승룡.장민호씨 등은 당시 최고의 인기 스타였다. 고은정씨는 영화에서 엄앵란씨 목소리를 도맡았기 때문에 같은 인물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진공관 라디오가 퇴조하고 광석 라디오가 나온 뒤에는 집집마다 몸통보다 더 큰 *'빳데리'를 고무줄로 친친 감아 뒤에 매단 낡은 *트랜지스터가 있었다. 트랜지스터는 진공관 라디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성능이 좋았다. 들로 산으로 들고 다니며 축구나 권투 같은 스포츠 중계방송을 들을 수도 있었다. 임택근.이광재.박종세씨 같은 아나운서는 "고국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으로 분위기를 띄운 뒤 극적인 장면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온국민을 흥분시켰다. 중계방송만 듣고 있으면 모든 경기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월등한 실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게임에서 지면 국제심판의 편파적인 판정 때문이라는 식으로 '애국적 중계'를 했다. 누나들은 김을 맬 때나 보리를 벨 때도 라디오를 들고나가 이미자.패티김.하춘화.김상진.펄시스터즈.김추자.장미화.바니걸스.김상희.남진.나훈아의 노래를 배우고 따라불렀다.
사춘기 아이들은 임국희.최동욱.피세영.이종환씨 같은 디스크자키가 진행하는 심야음악 방송을 즐겨 들었다.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날에는 왠지 따뜻한 커피 한잔을 사이에 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밤 10시만 되면 감미로운 멜로디와 함께 이종환씨의 달콤한 목소리가 청소년들의 마음을 감싸주던 *'별이 빛나는 밤에'는 최고 인기의 심야방송이었다. 폴 모리아의 '이사도라'가 울리면서 시작되던 '밤의 플랫폼'이나 '밤을 잊은 그대에게' '0시의 다이얼' 같은 프로그램도 전국 청소년들을 라디오 앞에 불러모았다. 전축 역시 드물 때여서 듣고 싶은 노래를 관제엽서에 적어 신청하는 일은 그 시절 누구나 한번쯤 경험하는 통과의례였다.
청소년들은 시험공부를 할 때도 라디오를 틀어놓았고 이불 속에까지 갖고 들어가 음악을 들으며 잠이 들었다. 가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웬즈데이 차일드' '예스터데이' 같은 먼 이국의 노래가 왜 그리 좋았던지. 진행자에게 이런저런 삶의 사연들을 털어놓는 외로운 사람들은 또 왜 그리 많았는지. 심야의 달콤한 음악과 사연을 들으며 한밤중 깨어있는 사람들만의 동류의식이나 유대감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남진.나훈아.이미자만 알고 지내던 청소년들은 심야프로를 통해 송창식.윤형주.이장희 등 국내의 포크 가수들을 알게 됐다.
60년대 중반 몇몇 집에서는 흑백 텔레비전을 들여놓거나 야외전축을 사들였다. 고등학생들은 삼촌이나 형님의 야외전축을 몰래 들고나가 '울리 불리'나 '상하이 트위스트'에 맞춰 신나게 개다리춤을 췄다. 킹스컵 축구나 김기수의 권투, 박치기왕 김일 선수가 나오는 프로레슬링 중계가 있는 날에는 돈을 내고 만화방에 가거나 이웃집을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텔레비전, 컴퓨터 등에 익숙한 영상시대. 그러나 라디오에는 보여 주는 것이 결코 다 채워주지 못하는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가 있었다. 귀와 가슴을 활짝 열고 들었던 라디오. 머리맡에서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었던 그 '옛친구'의 향기가 그립다. 김석종 기자sjkim@kyunghyang.com

*그시절 이런말 저런말
*제니스 라디오미국의 전자회사로 트랜지스터가 나오기 전까지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1950년대까지 미제 제니스 라디오 한 대는 나락 열섬과 바꿀 만큼 고가품이었다고 한다.
*금성 라디오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가 국산품 라디오를 내놓으면서 많은 가정에 라디오가 보급됐다. 왕관 마크와 금성의 영문표기인 골드스타(GoldStar) 등이 새겨져 있었다.
*다이얼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하도 많이 돌려대서 플라스틱 다이얼이 부러져 나가고 쇠만 삐죽 나와있는 경우가 많았다.
*저 눈밭에 사슴이현재까지 최고의 인기작가인 김수현씨의 69년 라디오 드라마 데뷔작.
*태권동자 마루치태권 소년 마루치와 아라치가 외계에서 온 악당들과 맞서 싸우는 내용이었다.
*빳데리건전지.
'로케트 밧테리'가 가장 흔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69년 3월 시작돼 지금까지 방송되고 있는 심야 음악방송의 '원조'. 이종환씨를 비롯해 차인태.서세원.이수만.이문세.이휘재 등이 진행을 맡았다.



동아방송 개국 40돌 / 동아방송을 말한다 - 개국멤버 3인좌담

[동아일보] 2003-04-24 (특집) 칼럼.논단 15면 40판 4469자


언론학자들로부터 ‘정치 권력에 비판적이었던 유일무이한 전파 매체’라는 평가를 받았던 동아방송(DBS)이 25일 개국 40주년을 맞는다.
1963년 4월 25일 오전 5시 서울 한복판 세종로에서 첫 전파를 쏘아 올린 동아방송은 선구적 프로그램과 칼날 같은 비판의 목소리로 방송 문화를 선도했으나 80년 신군부의 언론 강제 통폐합조치로 문을 닫았다.
이정석 이윤하 안평선씨 등 동아방송 개국 멤버 3인이 개국 40주년을 맞아 23일 당시를 회고하면서 현재의 방송의 위상과 현주소를 되짚어 봤다. ‘동아방송을 생각하는 모임’은 25일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02-782-1754)에서 조촐한 개국 40주년 기념모임을 갖는다. 방송은 중단됐지만 그 정신만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대담자>
·이정석(李貞錫·70)=방송뉴스 부장. 현 대한언론인회 회장
·이윤하(李潤夏·70)=편성과장 제작1부장(부국장). 현 한국방송인회 자문
·안평선(安平善·66)=제작2부 부장대우. ‘정계야화’ 등 연출. 현 한국방송인회 상임부회장
●청취자의 목소리가 최초로 담기다
▽안평선=동아방송은 쌍방향 제작시스템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제작자가 마이크를 들고 시민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줬다. 미국식 프로듀서 시스템도 처음 도입했다. 그 결과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프로그램들이 나왔다.
▽이정석=비판 정신이 강한 동아일보의 ‘우산’ 밑에 있는 덕분에 뉴스에 대한 청취자의 기대가 대단했다. 시간 단위로 기사를 마감해 계속 업데이트(update)된 뉴스를 보도했다.
▽이윤하=편성의 골간은 뉴스와 파인(fine)뮤직이었다. 다른 방송들은 멜로 드라마를 방영했으나 동아방송은 다큐멘터리나 논픽션 대작을 국내 처음으로 선보였다.
▽안평선=개국 간판프로그램은 세미 다큐멘터리 ‘여명 80년’이었다. 이후 심층 고발 프로그램 ‘앵무새’가 그 뒤를 이었다. 반공드라마 ‘특별수사본부’, 전쟁드라마 ‘독립투쟁 비사’ 등 동아방송 드라마의 방향은 ‘논픽션’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을 둘러싼 ‘경무대’ 이야기를 다룬 ‘잘돼 갑니다’를 시작으로 ‘정계야화’ 등 정치 드라마도 본격적으로 나왔다.
▽이윤하=동아방송은 한마디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국내 디스크자키(DJ) 1호인 최동욱씨가 턴테이블 4개를 동시 조작하면서 연출 진행 엔지니어의 1인 다역을 해낸 ‘톱튠쇼’가 특히 인기였다. 여대생들이 그를 만나려고 방송사 앞에 줄을 섰다. (웃음) 당시 ‘3시의 다이얼’에는 청취자의 전화와 엽서가 쇄도했다. 체신부(현 정보통신부)에선 “전화 회로에 과부하가 생긴다”며 볼멘소리를 했고 우체국에선 우편 수입이 급증하자 반색을 했다.
▽안평선=미국의 포크와 팝, 프랑스 샹송, 이탈리아 칸초네를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했다. ‘0시의 다이얼’의 윤형주, ‘밤의 플랫폼’의 김세원씨 등이 동아방송이 배출한 ‘목소리 스타’이다. ‘노변야화’에는 김두한을 포함한 한국 정계의 거물도 많이 나왔다. 진행자였던 권오기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김수환 추기경에게 “예수와 부처, 마호메트가 지금 세상을 내려다보면 뭐라고 한마디할까요?” 하고 물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윤하=‘방송 캠페인’의 효시이기도 했다. 당시 서울 시내버스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컸다. 이런 시민들의 요구와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동아방송은 ‘상쾌한 아침이다. 걸어서 가자’란 노래를 만들어 캠페인을 벌여 호응을 얻었다. 이후 ‘마른 행주를 씁시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시다’와 같은 캠페인도 벌였다.
●권력과 대척점에 선 동아방송
▽이윤하=63년 말 대선 때였다. 투표장에서 투표를 끝내고 나오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동아방송 김남호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들이대고 투표 소감을 물었다. “어느 방송이오?”(박정희) “동아방송입니다.”(김남호) “동아방송은 거짓말 방송 그만하시오.”(박정희) “무슨 그런 말씀을….”(김남호) 등 ‘날’이 선 대화가 생방송으로 전해졌다. 군부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동아방송은 박 대통령에게 못마땅한 상대였던 것이다. 64년 ‘6·3 사태’ 와중에 정부는 동아방송이 ‘앵무새’라는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내란을 선동하고 학생시위를 배후 조종했다며 최창봉 방송부장 등 6명을 구속하기도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앵무새 사건’이다.
▽이정석=육영수 여사도 동아방송을 애청했다. “동아방송에 이런 얘기가 나왔는데 맞습니까?” 하고 주위에 자주 물으니 중앙정보부장이나 비서실장도 매일 동아방송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동아방송이 한국 정치 기상도를 만들었다고나 할까. 당시 방송언론 중에선 유일하게 권력에 맞선 ‘작은 거인’이었다.
▽이윤하=당시 KBS나 MBC는 그런 방송을 엄두도 못 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다. 요즘 방송을 보면 화만 난다.
▽이정석=아직도 방송은 권력의 ‘눈치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윤하=세계적으로 미디어 업계가 도약하던 80년대, 한국은 오히려 언론통폐합으로 20년 이상 후퇴했다. 이후 방송은 정권의 도구가 됐다. 지금 지상파 방송 3사는 선정적이고 바른 언어를 파괴하는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정석=방송 통폐합의 목적은 눈엣가시 같은 동아방송을 없애는 것이 초점이었다. ‘뉴스 나우(News now)’란 개념으로 매 시간 정권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담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전파 매체의 특성을 살린 것이다.
▽안평선=노무현 대통령이 “방송이 아니었으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집권자가 그런 말을 하면 방송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어쩌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드라마를 통해서도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심어주던 40년 전 동아방송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이정석=권력에 대한 비판은 언론의 기본이다. 독재 정권의 압박이 더 강하게 다가올수록 동아방송은 야성(野性)을 강하게 지켰고, 청취자들은 그 점을 높이 평가했다. 비판 정신을 잃는 순간, 언론 매체는 생명을 잃는 것이다.
정리=이승재기자 sjda@donga.com
▼특별기고 '동아방송의 의의'▼
1980년 동아방송이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게 된 것은 한국 방송의 비극이요, 손실이다. 동아방송은 세계적 기준의 ‘방송 언론’으로 손색없었고, 언론으로서 동아방송은 세계 방송 저널리즘사에 기록될 만하다.
방송의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보도가 편성과 경영 정책의 중심이 된 것은 1960년대다. 보도 편성이 확대되고 뉴스가 대형화된 시기가 1963년이고 바로 그해 동아방송이 개국했다.
동아방송 뉴스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방송 저널리즘’의 산실이었다. 당시 동아방송은 매 정시 뉴스 등 하루 17차례 뉴스를 내보냈으며 동아일보의 부장들이 진행했던 ‘뉴스쇼’도 ‘방송 언론’의 모델을 제시했다.
60년대 한국 방송의 저녁 뉴스는 석간 신문이 나온 뒤에야 가능했다. 국영 방송은 정부 정책 홍보나 계몽 방송을 했고 민영 방송은 오락과 흥행 편성이 기본이었다.
이 같은 방송환경 속에서 동아방송은 ‘언론 매체’임을 선언하고 나섰다. 동아방송은 자율적 저널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이 존중되는 동아일보의 전통에 따라 방송 보도의 새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동아방송의 뉴스는 포맷부터 새로웠다. 당시 라디오와 TV 뉴스는 ‘읽는 뉴스’였지만 동아방송은 ‘보도하는 뉴스’를 선보였다. 기존 방송들이 아나운서에 의해 ‘읽히는’ 뉴스를 내보낸 것과 달리 동아방송은 뉴스를 직접 취재하는 전문가들이 보도하는 ‘최초의 방송 언론’으로 청취자들의 신뢰를 받았다. 동아방송은 ‘퍼스낼리티(Person-ality)’로 부르는 뉴스 진행자를 내세웠는데 이것이 한국 방송에서 뉴스 앵커의 시초가 됐다.
동아방송의 프로그램에는 격조와 창의성이 넘쳤다. 한국에서 처음 시도하는 포맷과 프로그램들을 개국과 동시에 선보였다.
‘여명 80년’ ‘정계야화’ ‘특별수사본부’는 저널리즘과 드라마를 조화시켰고 동아방송의 마이크가 국내외 이슈를 찾아 누빈 ‘DBS 리포트’도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냈다.
동아방송은 한국 방송 사상 디스크자키(DJ)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첫 DJ 최동욱씨는 ‘톱튠쇼’와 ‘3시의 다이얼’을 진행하며 젊은 방송 문화를 일으켰다. 동아방송은 또 편성의 사각지대라는 오후 3시와 심야 시간을 황금 시간대로 바꿔 놓았다. 청취자 참여 프로그램인 생방송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는 ‘사카린 밀수 사건’ 등을 다루며 한국 최초로 방송의 ‘의제 설정 기능’을 보여줬다.
동아방송이 ‘방송 언론’의 날을 세울수록 정권과의 대립은 숙명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앵무새 사건’으로 최창봉 방송부장 등 6명을 구속, 한국 최초로 방송 언론 탄압이 시작되었다. 동아방송을 강제로 문닫게 한 전두환 신군부의 방송 통폐합 조치는 이 탄압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동아방송이 사라진 뒤 한국에서는 ‘방송 언론’과 프로페셔널리즘의 입지가 좁아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 방송사의 창립 기념식에서 대통령이 되는 데 방송의 도움이 컸다고 말했다. 이 말은 방송인들에게는 오히려 부끄러운 것이다. 언론으로서 방송은 정권과의 공생이 아닌 ‘대립(Adversary Journalism)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동아방송 개국 40주년을 맞아 그 저널리즘 정신이 새삼 그리워진다.
강현두 서울대 명예교수 언론정보학 profkang37@yahoo.co.kr

2003.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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