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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봉화 문화재 소개글 좀~~
만두 조회수 4,941 작성일2016.10.06
안녕하세요 사회 달력만들기 에서 그림 을 봉화 에 문화재를 붙이려고 하는데요 소개글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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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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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의 문화재 26개를 올려드립니다. 이 중에서 골라서 적어 가세요.

 

(봉화군의 문화재)

 

1.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종 목 국보 제201호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 657-1

시 대 신라

 

경상북도 봉화군 북지리에는 신라시대의 ‘한절’이라는 대사찰이 있었고, 부근에 27개의 사찰이 있어 500여 명의 승려들이 수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자연암벽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거대한 방모양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높이 4.3m의 마애불을 매우 도드라지게 새긴 것이다.

 

넓고 큼직한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전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박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깨는 다소 움츠린 듯하지만 체구는 당당한 편이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에서 U자형의 굵직한 주름을 이루면서 양 팔을 거쳐 길게 늘어져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까지 덮고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고 왼손은 무릎에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큼직하게 표현되어 불상의 장중한 멋을 더해주고 있다.

 

불상 뒤편의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였으며, 곳곳에 작은 부처를 표현하였고, 머리광배의 중심에는 정교한 연꽃무늬를 새기고 있다.

 

불상을 만든 시기는 얼굴이나 신체에 표현된 부드러운 모습 등을 고려할 때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영주가흥리마애삼존불상(보물 제221호)과 함께 이 시기 영주·봉화 일대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신라 불교조각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2.봉화 서동리 동ㆍ서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5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원촌길 8-14 (서동리 104)

시 대 통일신라

 

춘양중학교 안에 동·서로 마주 서있는 2기의 탑으로 쌍탑형식을 띤다. 이 곳은 신라의 옛 사찰인 남화사의 옛터로 알려져 있는데, 신라 문무왕 16년(675)에 원효대사가 여기서 서북쪽으로 6㎞ 정도 떨어진 곳에 현재의 각화사를 창건하면서 이 절은 폐사되었다고 한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두 탑 모두 같은 양식이다.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층으로 갈수록 규모가 줄어들어 뚜렷한 체감율을 보인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서쪽 탑에만 네모난 노반(머리장식받침)이 남아있을 뿐이며, 동쪽 탑은 모두 없어졌다.

 

기단부가 땅 속에 파묻혀 있고 탑이 몹시 기울어져 있어 1962년 10월에 해체 ·복원하였는데, 이 때 서탑에서는 사리함을 넣었던 공간이 발견되었고 동탑에서는 사리병과 함께 99개의 작은 토탑이 발견되었다.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비례와 정제된 조형미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

 

종 목 보물 제995호

지 정 일 1989.04.10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물야면 월계길 739 (개단리 1) 축서사

시 대 통일신라

 

문수산 정상 가까이에 자리잡은 축서사에 모셔져 있지만,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불상의 높이는 1.08m이며, 얼굴은 가는 눈, 꼭 다문 입, 반듯하고 넓은 신체에서 고요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주름이 평행 계단식으로 표현되어 다소 형식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릎 사이의 부채꼴 모양으로 넓게 퍼진 주름은 다른 불상들의 U자형과는 달리 물결무늬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평행 계단식 옷주름과 함께 9세기 후반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대좌는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8각으로 상·중·하대를 모두 갖추고 있다. 하대에는 각 면에 사자 1구씩을 새겼고, 중대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인물상을, 상대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현재 불상 뒤에 나무로 만들어진 광배(光背)가 있는데 여기에는 화려한 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원래의 돌로 만든 광배는 윗부분만 남아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비로자나불상 가운데 하나로 대구 동화사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과 동일한 특징을 보여주어 당시 조각수법과 신앙형태를 알 수 있다. 석탑기에 의해 9세기 후반에 만들었다는 절대연대가 밝혀져 통일신라 후기의 불상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4.축서사 괘불탱

 

종 목 보물 제1379호

지 정 일 2003.08.21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물야면 월계길 739 (개단리 1) 축서사

시 대 조선시대

 

괘불탱이란 사찰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축서사에 있는 이 괘불탱은 모시바탕에 채색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으로, 정면을 향한 입불상을 화면에 가득 차도록 그린 다음 광배 주위로 화불과 보살상을 배치한 독존도형식이다. 원래는 보광전에 걸어두고 예배용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대웅전에 보관 중이다. 주불은 얼굴 형태가 원만하고 사용된 색채 또한 선명하고 화려하여 전반적으로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한편 괘불탱에 걸려 있던 복장주머니에서 후령통(1구)을 비롯하여 사리(2과)와 씨앗류, 다라니(4종 4매), 괘불원문(1매) 등이 발견되었다.

 

그림의 아래쪽 부분에 있는 기록과 조성내용을 밝혀주는 ‘괘불원문’에 의하면, 이 괘불탱은 조선 영조 44년(1768)에 정일(定一)스님 등 10명이 참여하여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축서사 괘불탱화는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며, 인물과 문양의 세련된 표현 및 화려하면서도 조화로운 색채의 사용 등이 돋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복장주머니에서 사리를 비롯한 복장품과 함께 다른 불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괘불원문’이 발견되어 학술적으로도 자료 가치가 높다.

  

 

5.태백산 사고지

 

종 목 사적 제348호

지 정 일 1991.02.26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산126-5

시 대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오던 태백산사고가 있던 자리로 조선시대 5대 사고중 하나이다.

 

조선왕조는 오대산·마니산·적상산·춘추관·태백산에 각각 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하였다. 태백산사고터는 경상감사 류영순이 추천하여 선조 39년(1606)에 짓고 1913년까지 실록을 보관하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보관되었던 실록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건물은 해방 전·후 불타 없어지고 산사태 등으로 매몰되었던 것을 1988년 발굴하였다. 실곡각·선원각·포쇄각·근천관의 부속 건물들이 남아있다.


 

 

6.해저 만회고택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69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1길 51 (해저리 485)

시 대 조선시대

 

해저리마을의 오른쪽 깊숙한 곳에 우거진 뒷동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있는 집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 김건수가 살던 집이다. 김건수는 순조 30년(1830)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현감, 부사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냈다. 사랑채인 명월루는 그가 지었으며 철종 1년(1850)에 수리한 바 있다. 안채는 김건수의 6대조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서 이곳에 살던 여씨에게 삿다고 전한다.

 

ㄷ자형의 안채와 T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중문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안채는 남향한 중앙에 대청이 있고, 대청 양쪽에 안방과 상방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원래는 一자형 중문간채가 있었으나 없어져 현재는 남쪽이 트인 상태이다. 사랑채는 안채의 동쪽 날개 끝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위치에 있다.

 

안채는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측되며, 안방과 사랑방 뒷쪽에 수납공간을 두고 있는 옛 경북지방의 ㅁ자 집 평면배치법과 통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주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7.가평리 계서당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71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물야면 계서당길 24 (가평리 301)

시 대 조선시대

 

 

소나무 숲이 우거진 동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집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 계서 성이성(1595∼1664)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지었다고 전한다. 성이성은 문과에 급제한 후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3차례나 어사로 등용되었을 정도로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사랑채는 후에 넓히거나 다시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쪽 마당 끝에 대문간채를 두고 그 북쪽 높은 곳에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로 연결되어 ㅁ자형 집을 이루고 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맞은편 높은 곳 서쪽에 중문간채가 있다. 동쪽에는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고, 사랑채 서쪽의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채가 있다. 또한 동북쪽에 따로 담장을 둘러 사당을 배치하였다. 이곳의 안채와 사랑채는 다른 곳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안채는 도장방이 많은 것이 특징이고, 사랑방은 대부분 홑집으로 구성하는데, 이 집은 겹집으로 만들어 안채의 날개집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안채부분은 약간 변형은 되었지만 경북 북부지방 ㅁ자 민가의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집으로 주택발달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8.봉화 설매리 3겹 까치구멍집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247호

지 정 일 2007.01.12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상운면 설매2길 50-12 (설매리 519)

시 대 조선시대

 

상운면 설매리는 깊은 산속에 숨겨져 있는 산골마을로 예전에는 까치구멍집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 170여년 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는 이 건물은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인데 입구의 봉당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외양간을 우측에는 부엌을 두었는데 외양간 상부에는 다락을 두고 마루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뒤쪽에는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사랑방과 아랫방을 우측에는 안방을 두었으며 안방과 부엌사이에는 작은 바라지창을 달았다

 

가구는 5량가이며 각방 천정은 고미반자를 하고 흙을 올렸으며 반자와 지붕틀 사이의 지붕에 까치구멍을 내어 채광과 환기용으로 사용하였으며 1970년대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된 것을 문화재 지정이후 다시 초가로 복원하였다.

 

3칸 겹집이라는 점과 사라져가는 까치구멍집의 좋은 표본이 되는 점, 산간지역 서민생활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9.청량사 유리보전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

지 정 일 1974.12.10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길 199-152 (북곡리 247)

시 대 조선시대

 

청량산에 위치한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지은 절이다.

 

청량산에는 연대사라는 절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26개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불교의 요람을 형성했던 곳이다.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를 모시는 법당으로 약사전이라고도 한다. 늘 바람이 세찬 산골짜기의 한쪽에 나즈막하게 지어졌는데, 법당 앞이 절벽이라 마당이 좁은 편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의 대들보 밑에 사이기둥을 세워 후불벽을 설치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징으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10.천성사 삼층석탑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4호

지 정 일 1979.01.25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봉성면 금봉리 263

시 대 고려시대

 

천성사 입구의 길 왼쪽에 놓여 있던 것을 절 안으로 옮겨 세운 것으로, 원래는 쌍탑이 나란히 서 있었으나, 나머지 하나는 봉성초등학교로 옮겨 놓았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을 1층으로 쌓고, 그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이 비록 1층이지만, 높게 마련해 두어 안정감을 잃지 않았다. 기단의 네 면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가느다란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얇아 보이는 지붕돌은 처마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으며, 밑면의 받침은 1, 2층은 4단으로 각이 지게 마련하고 3층은 둥글게 깎아 놓았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줄어들고 기단부의 퇴화, 지붕돌의 모습 등에서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11.봉화 한수정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7호

지 정 일 1982.02.24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134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선조 31년(1608) 동촌마을에 세워진 정자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충재 권벌(1478∼1548) 선생이 세운 거연헌이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없어지자 그의 손자인 권래가 이 정자를 세웠다. 권벌은 중종(재위 1505∼1544) 때 사람으로 예조판서 등을 지내고 죽은 후에 좌의정에 올랐다.

 

건물은 T자형 평면으로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에 지붕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과 바닥을 한단 높여 온돌 2칸과 사방에 마루를 둔 건물이 붙어있다.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 하여 ‘한수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하며, 3면에 연못이 둘러져 있고 주위에 수목이 정자와 잘 어우러져 있다.


 

 

12.봉화향교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3호

지 정 일 1990.08.07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봉성면 향교길 11-10 (봉성리 267)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처음 지어졌으며 조선 선조 12년(1579)에 다시 지었다. 그 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고 1950년에는 학교로 사용하다가 폐지했다. 이때 크게 훼손되어 1975년에 군수 권명흠이 보수했다.

 

정문인 사주문을 들어가면 휴식공간인 누각이 있다. 그 뒤로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명륜당이 있으며, 양 옆에는 유생들의 거처인 동·서재가 마주보고 있다. 명륜당 뒤 왼쪽에는 내삼문과 그 안에 사당인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공자의 제자와 조선시대 여러 성현들을 모시고 있다. 전체적으로 공부하는 곳이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이 뒤쪽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건물배치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만 지내고 있다. 봉화지방 향토사연구의 좋은 자료들을 가지고 있는 전통 깊은 곳이다.


 

 

13.종선정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4호

지 정 일 1991.05.14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상운면 상운로 476 (문촌리 722)

시 대 조선시대

 

 

금응석 선생(1508∼1583)의 선행을 감사하게 여긴 마을 주민들이 세운 정자이다.

 

당시는 오랫동안 가뭄과 흉년으로 인해 마을 주민들은 굶어 죽어가고 땅에 뿌릴 씨 조차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 때 금응석 선생은 굶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농민에게는 무료로 씨를 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그것을 알게 된 퇴계 이황 선생은 이 정자를 ‘종선정’이라 부르고 직접 쓴 현판을 달아주었다고 한다.

 

 

건물의 구조는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ㅡ자형이며, 출입구는 뒷쪽에 있고 온돌방과 대청마루 시설이 되어있다.


 

 

14.구가암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83호

지 정 일 1993.11.30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법전면 갈산로 1994-99 (눌산리 579)

시 대 조선시대

 

 

이동표 선생의 둘째 아들 이제겸(1683∼1742)의 묘를 보호하기 위해서 조선 순조 25년(1825)에 증손자인 이한정을 중심으로 친척들이 세운 재실이다. 이곳에서 제사와 집안일을 논의하였으며, 지방 사림들이 모여서 시를 짓거나 시에 대해 토론도 했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6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부엌과 방, 누각이 ㄱ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앞쪽에 툭 튀어나온 누각의 기둥 사이 간격이 서로 다른 기발함을 보이고 있다.

 

15.해저 김건영가옥

 

종 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117호

지 정 일 1996.12.05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길 27 (해저리 739-1)

시 대 조선시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인 해관 김진영(1848∼1924)이 지은 집이다.

 

앞면 6칸·옆면 6칸 규모로 비교적 큰 ㅁ자형 평면을 갖춘 집이다. 안채 출입은 오른쪽에 있는 중문으로 하게 하였다.

 

안채는 一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는데,안방 2칸은 마당 쪽으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사랑채는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가운데 공간을 나누어 좌우의 작은사랑과 큰사랑으로 분리시켰다.


 

 

16.개암종택

 

 

종 목 경상북도기념물 제138호

지 정 일 2000.04.10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길 17-10 (해저리 709-1)

시 대 조선시대

 

 

의성 김씨 개암공파의 종가이다.

 

해저마을은 영남의 대표적인 동성촌으로 의성 김씨 가문에서 정조(재위 1776~1800)대에 많은 문과 급제자들을 배출하였고, 이 시기 영남 사람들의 정치·사회적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영남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자리잡았다.

 

 

1·2차 유림단 사건으로 불리는 항일 독립운동에 김창우가 주도적으로 활약하여 건국포장을 받았고, 이러한 독립운동이 주로 이 종가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뜻깊은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7.봉산리사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49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황전길 13-19 (거촌리 70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 문신인 김종걸(1628∼1708)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사림들이 세운 건물이다.

 

선생은 학문과 덕행에서 뿐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이 병들자 소태산에 올라가 7일 동안 금식 기도를 드렸다. 그 후 약을 구하러 가는 길에 호랑이가 나타나 인도하여 명약을 구해 부모님의 병을 낳게 했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그는 죽은 뒤에 이조 참판으로 추대되었다.

 

정조17년(1793)에 세운 이 사당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 폐쇄되었다가 1925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관실이 딸린 문간채와 一자형의 본채가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앞쪽에는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8.장암정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0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 628

시 대 조선시대

 

일명 만축정으로 불리는 장암정은 지방 유생들과 사림들이 모여 당시 일어나는 일이나 정세를 토론하고 시에 대해 평론을 하며 후학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곳이다.

 

장암 김창조(1581∼1637)의 학문과 덕을 생각하고 기리기 위해 조선 경종 4년(1724)에 풍산 김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다. 선조 38년(1605)에 과거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 때에는 안방준이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향할 때 쌀을 내어 군량을 도왔으며, 왕이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들 시성에게 태백산에 들어가서 살라고 이르고 관직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왼쪽에 2칸 온돌방을 들이고 오른쪽에 대청마루를 두었는데, 오른쪽 방을 왼쪽 방보다 조금 뒤로 물려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19.청간당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1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록3길 81-2 (오록리 1154)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기 문신인 청간당 김정원(1655∼1735)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던 분으로 그의 후손인 김탁연이 그를 추모하며 세웠고 후손들의 학문을 지도하는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20.무진장재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2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상운면 무진장길 245 (문촌리 505)

시 대 조선시대

 

 

신라시대 절이었으나 조선 전기 문신인 금원정(1472∼1557)선생이 성종 11년(1480) 이 건물을 인수하면서 ‘무진장재’라고 개명하였고 용도도 재실로 바뀌었다.

 

그는 연산군 때 진사가 되었고, 중종 10년(1515) 장사랑 영해 훈도를 역임하고 현량이 되었다. 그러나 중종 14년(1519) 훈구세력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세력이 화를 당했던 ‘기묘사화’가 발생하자 벼슬을 버리고 자연에 묻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힘쓰며 살았다. 당시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모임인 ‘사마회’를 주관하였으며 현재 보존하고 있는 현판으로 그의 필법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앞면 5칸·옆면 6칸 규모로 전체적으로 ㅁ자형구조를 이루고 있다.


 

22.야옹정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3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상운면 귀내창팔길 58-8 (구천리 348)

시 대 조선시대

 

 

야옹 전응방(1491∼1554)이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 세운 정자로 도덕과 학문을 강의하고 토론하던 곳이다.

 

 

전응방은 중종 때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단종 때 왕위찬탈의 추함을 몸소 겪은 할아버지 휴계 전희철의 유언을 받들어 관직에 뜻을 버리고 산수 좋은 이곳에 야옹정을 세워 도덕과 학문을 수련하였으며, 퇴계 이황과 자주 만나 도학을 강론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현판은 퇴계 이황이 직접 쓴 것이다.

 

23.구만서원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4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상운면 구만서원길 5 (화천리 436)

시 대 조선시대

 

 

송계 금인·삼송당 남몽오·수서 박선장·도은 권호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묘호를 기영사라고 부르다가 영조 42년(1766)에 구만서원으로 승격하였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67년 지방 유림들이 복원하여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 지내고 있다.

 

위패를 모시고 있는 상현사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24.몽화각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5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화천리 363

시 대 조선시대

 

 

송파 박전과 그의 부인 신안 주씨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웠다.

 

박전(1514∼1558)은 조선 명종 1년(1546)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정랑, 북평사를 역임하였고 명종 13년(1558)에 죽었다. 그 뒤 부인 주씨는 3년상을 치른 후 어린 아들과 함께 친정인 울진으로 갔다. 그리고 순흥 땅 화천리로 이사하여 아들 박선장을 남삼송에게 가르침을 받게 해 문과에 급제하여 크게 이루니, 후세 사람들이 주씨 부인의 행적을 추모하여 정자를 세웠다.

 

‘몽화각’이라는 이름은 박전이 돌아가신 후 그의 부인이 꿈에서 계시를 받아 꽃 ‘화(花)’자가 든 화천리를 택하여 그의 아들이 급제하고 크게 번성했다는 설화에 따라 지은 것이라고 한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25.이오당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6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법전리 252-1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현종 때 문신인 강흡(1602∼1671)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강흡은 인조 8년(1630)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세마부위란 벼슬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중국 청나라에 무릎을 끓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와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당시 태백오현으로 추앙 받던 정양·심장세·홍석·홍우정 등과 어울려 공론을 벌이며 자연을 벗삼아 지냈다.

 

이 건물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숙종 5년(1679)에 세웠고 그 뒤 1938년 다시 고쳐 지었다. 규모는 앞면 2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특히 이오당이란 이름은 ‘낙오천, 종오년’ 즉 자연을 즐기다가 생을 마친다라는 뜻에서 붙였다고 한다.


 

26.축서사 삼층석탑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7호

지 정 일 1985.08.05

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물야면 월계길 739 (개단리 1)

시 대 통일신라시대

 

 

선방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원래는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여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아래층 기단의 일부와 탑신의 2층 지붕돌 이상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위층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본 뜬 조각을 두었으며, 탑신의 1층 몸돌을 괴는 곳에 얕은 받침을 새겨 놓았다. 2층 몸돌까지만 남아있는 탑신은 1층 몸돌만 따로 만들었고 1층 지붕돌과 2층 몸돌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몸돌의 모서리에는 기단에서와 같은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고,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새겼다. 2 층몸돌 위에 놓인 길쭉한 석재는 그 용도를 알 수 없다.

 

탑신의 2층 몸돌이 1층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긴 하였으나 단정한 자태를 잃지 않고 있다. 탑 안에서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만든 사리그릇이 발견되어 이 시기의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201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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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문화재청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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