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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박철순 기록
jusu**** 조회수 25,626 작성일2011.08.09
박철순의 기록(경기 수, 승/패, 방어율, 탈삼진 등)에 대해 (왠만하면 통산으로)알려드리는 분께 채택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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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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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통산 15년 동안 231경기 76승 53패 20세이브, 통산 방어율 2.95를 기록한 것이 박철순의 기록이다. 매년 고작 5승 정도를 올렸을 뿐이라고 보여지는 이 기록의 박철순..

 

그러나 그는 야구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한국 야구 불세출의 영웅이다. 국보급 투수 선동렬, 한시즌 최다승에 빛나는 장명부, 세대를 풍미했던 최동원등.. 기록과 성적으로 박철순을 압도하는 투수들은 많다. 그리고 왕년의 홈런왕 이만수, 김봉연.. 영원한 3할타자 장효조등.. 타자까지 찾아본다면 박철순의 통산 기록은 어쩌면 그의 선후배들이 적어간 기록에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야구라는 스포츠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이름.. 그것은 바로 박철순 이다.

 

배명고, 연세대를 거쳤으며 한국 최초의 쿠바전 승리투수인 박철순은 79년 한미 대학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인상적인 피칭을 보여주며, 한국인 사상 최초로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한다.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싱글 A 팀에 입단한 그는 빠르게 실력을 향상시켜 가며 트리플 A 까지 오른 한국 최초의 선수이다. 1982년 한국에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두산의 전신인 OB의 구단주였던 박용민 단장은 평소 친분이 있던 LA다져스를 통해 밀워키 브루어스의 구단주와 독대를 하게됐고, 어렵사리 박철순을 영입하는데에 성공을 한다.

박철순이 1956년 3월 12일생이니 당시의 나이 26세.. 이렇게 한국으로 돌아온 박철순은 주위의 기대를 저 버리지 않았다. 82년 3월 28일 LG의 전신인 MBC 청룡과의 경기에 처음 등장한 그는 타자를 압도하는 스피드와 스크류볼, 팜볼등을 구사하며 상대를 유린, 9-2로 승리하고 첫 승을 신고한다.

특히나 당시에 박철순이 던지던 너클볼은 이전까지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구질로 타자들에게 마구 라는 소리를 들으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투수는 공만 잘던지면 된다던 당시의 우리 야구 수준을 뛰어넘는 뛰어난 수비로 "투수는 제 5의 야수"임을 증명했다.

 

 

이러한 박철순은 프로야구 원년인 이 82년에 세계 야구사에 남는 대기록을 수립하는데, 그것이 바로 22경기 연승이라는 한시즌 최다연승 세계 신기록이다.

 

4월 10일부터 9월 18일까지 161일간 30경기에 등판해서 22연승을 거둔 박철순은 시즌을 24승(13완투승, 7구원승) 4패 7세이브, 방어율 1.84 로 마치면서 원년MVP와 방어율 승률 다승 기록상등 투수부분 타이틀을 독식하기에 이르고, 나아가 한국시리즈에서 한수위의 전력이라 평가받던 삼성에게 4승 1무 1패로 OB가 역전 우승을 하는데에 기폭제가 된 1승 2세이브를 올렸다.

 

그러나 박철순의 영광은 여기서 주춤하게 되는데. 허리디스크를 앓고 있던 그가 전지훈련중 요추간판 헤르니아라는 허리 부상을 입게 되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결국 83년 시즌을 뛰지 못하던 그는 MBC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인 9월 22일 팬서비스 차원에서 등판했으나, 그를 성원하는 팬들의 함성이 그치기도 전인 1회 1사 1,2루서 송영운의 타구에 허리를 맞고 쓰러져 실려나가게 된다. 이해 11월 30일 결국 그는 LA의 센트럴 메모리얼 병원에 허리치료차 입원을 하게되고, 4개월 만인 84년 4월 다시 돌아오는데.. 그런 그를 바라보던 팬들을 놀라게 한것은 지속적인 약물치료와 진통제의 복용으로 그의 머리카락이 탈모증세로 빠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고 꾸준히 자기 페이스를 찾아 나가던 박철순은 85년 9월 22일 또다시 허리통증이 재발하여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되고, 이듬해 8월 17일 대전서 한화의 전신인 빙그레전에 등판하여 4-2의 역전승을 거두면서 9개월만의 첫승을 거둔다. 이 해에 박철순은 13경기에 등판해 5승 3패, 방어율 3.54를 기록했고, 사람들은 이때부터 그를 불사조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88년 3월 15일, 그의 날개를 완전히 꺽어 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고야 만다. CF촬영중에 왼쪽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하고 만 것이다. 수술을 마친 그에게 닥친 문제는 야구를 계속할 수 있느냐가 아닌, 정상인의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철순은 포기하지 않았다. 정상인의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그는 물리치료와 한방치료, 싸우나등을 병행하며 철저한 자기관리를 했고 걷는 것 조차 자연스럽지 못했던 스스로를 다시금 다잡아 갔다. 그리고 마침내 89년 6월 1일, 청주 빙그레전에 그 모습을 드러냈고, 감격의 승리를 기록하니 87년 10월 1일 기아의 전신인 해태 전 이후 650일만의 승리였으며, 33세라는 운동선수로선 적지 않은 나이를 감안하건데, 그것은 차라리 기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철순의 전설은 이제 부터였다. 90년 7월 5일 해태전에서 5-0 완봉승으로 1500일만에 완봉승을 거두고는 91년부터 94년 매년 7승을 기록했다. 92년 10월 9일 해태전에서 다시 완봉승을 거두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최고령 완봉승 기록이며 이때 그의 나이 37세(36년 5개월)였다.

 

93년 8월21일 빙그레전에서는 6타자를 연속으로 삼진으로 돌려 세웠는데 이것은 당시의 연속타자 삼진 기록과 타이었다. 그리고 열흘뒤 해태와의 경기에선 개시와 동시에 2이닝동안 6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워 경기개시 연속삼진 기록을 세웠다.

 

94년 7월 8일 삼성전서는 개인 최다 기록인 한경기 11탈삼진을 기록하며, 10회 연장까지 완투승을 기록, 연장전 최고령 완투기록을 수립했다. 8월12일 현대의 전신인 태평양과의 경기에서는 다시 완봉승을 기록, 자신이 갖고 있던 현역 최고령 완봉승 기록을 38세 5개월로 연장 시켰다.

 

95년 4월19일 LG전서의 승리로 7연승을 기록하며 최고령 연속경기 승리 신기록 (39년 1개월 7일)을 수립하며, 이 시즌 9승 2패를 기록, OB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공헌했으며, 10월 20일 13년만에 한국시리즈 등판해서 한국시리즈 최고령 등판 기록을 세우고(39세 7개월 8일), 끝내는 우승.. 13년 만의 우승을 기록하고는 선수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려 많은 야구팬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96년 7월 30일 LG전에서는 세이브를 기록하여, 최고령 세이브 기록(40세 4개월 18일)을 세웠으며, 9월 4일 한화전 승리로 최고령 승리 투수 기록을 40세 5개월 23일로 연장시켰다.

 

기록의 사나이, 불사조, 한국야구의 산증인으로 한국야구의 역사와 영욕을 같이해왔던 거인 박철순은 결국 세월의 흐름앞에 42세에 이른 1997년 4월 29일 LG전이 끝난 후 공식 은퇴식을 갖고, 선수생활을 마감했으며, 그의 백넘버 21번은 2002년 4월 5일 두산베어스의 영구결번으로 남아, 잠실 구장 한켠에 그의 이름과 함께 남아있다.

 

두산베어스라는 구단이 존재하는 한, 한국 야구가 계속되는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선수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그 이름을 기린 것이다. 그의 은퇴경기를 보러 대학교 2학년이던 당시 시험 두 과목을 펑크내고 잠실로 갔다. 경기는 엉망이었다. 박철순은 등판하지 않았고, 두산은 서울 라이벌이라는 LG에 맹폭당하며 10점 이상을 실점하고 대패하고 말았다.

 

스포츠는 이벤트가 아니기에, 경기에 최선을 다한 LG를 뭐라할 수 없거늘... 하지만 그럼에도 박철순이라는 거인을 보내는 마당에 실력 이상의 플레이를 보이는 LG가 너무나 미웠다. 그리고 공 하나조차 던지지 않고 경기가 끝난뒤에야 마운드에 볼을 뿌리는 박철순 선수를 보며, 왜 한 개의 공이라도 경기에서 보여주지 않고 은퇴하는가.. 하는 작은 원망이 일었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았다. 박철순이라는 선수는 이미 공을 던질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박철순이라는 투수는 지금 나보다도 더 정확히 공을 던질 수 없을 정도로 어깨가 부서진 상태라는 걸.. 언젠가 경기중에 박철순이 145Km/H 의 볼을 뿌리자 "저 박철순 선수가 140을 넘기는 스피드로 볼을 던져요!!" 라면서,

 

조금은 울먹이던 하일성 해설위원이 생각난다. 40을 넘긴 나이라 해도 미국의 놀란 라이언은 이미 160Km/H 에 육박하는 볼을 뿌린 바 있거늘 그것이 뭐가 대수인가.. 라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후에 내가 알게된 사실은 조금 더 충격적이었다. 노장 박철순의 투구폼을 기억하는가? 그는 와인드 업 후 유독 키킹을 높이 해서 발을 머리위까지 끌어 올려 공을 던지곤 했다. 텍사스에서 뛰는 박찬호가 LA 입단 초기에 했던 것 처럼 말이다. 그의 투구폼이 그렇게 바뀐 이유를 당연히 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제와서 몇몇 지인들을 통해 안 사실은 너무도 충격이었다. 이미 그때에 박철순의 어깨는 만신창이가 되어서 제대로 된 스피드의 볼을 던질 수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는 발을 높이 들어 올려, 발이 내려갈 때의 속도와 탄력을 이용해서 몸의 회전을 가져와 볼에 스피드를 붙였다는 것이다. 정상인처럼 걷기조차 힘들다는 그 왼발을 들어올려서 강하게 땅에 내려꽂아 내고, 디스크에 이은 세 차례의 부상으로 그를 괴롭혔던 허리를 회전 시켜서... 그는 그렇게 볼을 미트에 꽂아 왔던 것이다.

 

 

작년 올스타전에 앞서 열렸던 올드 스타전이 기억난다. 등판한 박철순은 웃으면서 볼을 뿌렸지만 공은 타자들에게 얻어맞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결과는 중요치 않다. 그런 그가 아직도 볼을 만지며 많은 사람들의 의미가 되어 준다는 것..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야구가, 또 스포츠가 얼마나 사람에게 감동과 눈물을 선사할 수 있는지 증명되는 것이다.

 

 

지금은 야구 평론가로 또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철순..

그가 이후 어떤 일을 하고 무슨 삶을 살아가던 간에, 그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에이스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잠실 야구장에 울려 퍼질 때마다 팬들의 가슴을 적셔왔던 권인하의 "에이스를 위하여"와 프랑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와 더불어....

201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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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트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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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iny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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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기타 13위, 외국국기, 국가정보 8위, 화학, 화학공학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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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 선수

다승 1위(1982) / 방어율 1위(1982) / 승률 1위(1982) / 탈삼진 2위(1982) / 구원 2위(1982), 구원 5위(1992) / 세이브 3위(1982), 세이브 5위(1992) / 선수권대회 MVP(1982)

 


 

201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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