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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KAL 858기 테러사건에 미스테리의 관해서..
stay**** 조회수 12,423 작성일2003.11.30
가장 근본적인 궁금증은

왜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KAL 858기에 대한 미스테리한 부분들의

재수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냐는건데요..

(공소시효가 끝났는데.. 이제와서 몰 그러느냐라고 말하던

고위 관계자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비통한 심정뿐입니다..

국가의 고위 관계자라는 분이 저따위 말이나 하고있으니 나라꼴이 말이죠..)

대체 왜 정부는 이렇게까지 이사건을 묻어두고 싶어하는것일까요..??

실제로 이것이 북한의 의한 테러사건이라면 낱낱이 조사하고 파헤쳐서

국제사회에 북한의 만행을 알려야 정상적인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와 반대로 국가 고위관계자 분들은 이사건을 입밖에 내는것도

싫어하는것 같더군여..

대체 왜 이러는겁니까??

정말로 이사건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자작극 음모론에 불과한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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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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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명 죽은 사고에 사진 한장 없을수 있나?"
[인터뷰] KAL 858기 진상규명가족회 차옥정 회장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정세연 기자



KAL 858기 폭파 사건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유가족들이 진상규명을 요구
하며 광주, 대전에 이어 20일 청주 순회설명회를 갖는 등 진실 찾기에 적
극 나섰다. <오마이뉴스>는 유가족 회장을 만나 유가족들이 직접 경험하
며 느낀 또 다른 의문을 들어보았다....편집자 주

관련기사 "국정원, ' 김현희 충성맹세문 없었다 ' 했다"

▲ 차 회장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남편에 대한 마지막 도리라고 말
한다.

ⓒ2003 오마이뉴스 안현주
"그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면 숨이 멎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무섭
고 두려웠을까. 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살아있는 가족들이 진실을
밝히는 것 뿐입니다."

'KAL 858기사건 진상규명가족회' 차옥정(68) 회장은 17년 전 그 날 자신
의 삶이 멈췄다고 말한다. 차 회장은 사건 이후 줄곧 진상규명을 위해 정
신없이 달려왔다.

1987년 11월 29일 115명의 탑승객과 함께 인도양 상공에서 실종된 KAL 858
기는 여전히 의혹 사건으로 남아있다. 차 회장의 남편(고 박명규. 공사 6
기)은 당시 운항을 마친 후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KAL 858기에 탑승했
다.

의문 1: 사고 두시간에 만에 '테러' 판명

"남편이 타고있던 비행기가 실종됐다는 뉴스를 보고 황망해하고 있는데 2
시간 만에 테러라는 보도가 나오더군요. 대형 비행기 사고가 어떻게 2시
간 만에 사고 판명이 나는지. 수 백개의 인공위성도 떠있다는데 왜 실종
된 비행기 하나 찾을 수 없는 것인지. 수사가 열흘만에 종료되면서 사건
의 진실이 묻혔습니다. 분명 누군가의 의도대로 사건이 은폐되고 있다고
봅니다."

차 회장은 KAL 858기 실종 보도 2시간 후 '테러'라는 보도를 접했다. 비행
기 사고가 나면 블랙박스부터 찾고봐야하는 것이 상식인 줄 알았던 차 회
장은, 가족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관계자들이 시큰둥한 반응만 보여 더 깊
은 의혹을 갖게 됐다.

"블랙박스를 찾으려면 제조사인 보잉사에 탐색장비를 요청해야 하지만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의 아우성과 절규에도 시큰둥한 반
응만 보였습니다. 또 어디서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정작 가족에게는 아
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뉴스와 신문기사만을 보고 알 뿐이었죠.
신문 지상에는 보도되면서 왜 가족에게는 알려주지도 보여주지도 않았을
까요?"

의문 2: 보상금 누가, 왜 줬나?

사고 한 달여 만에 가족들은 79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하지만 그
보상금을 누가 지급한 것인지, 액수는 어떻게 산정된 것인지 조차 가족
중 누구 하나 아는 이가 없었다.

"아직까지도 보상금이 정부의 위로금이었는지, 보험회사의 보험금인지,
대한항공의 돈인지도 모릅니다. 보험회사에 연락을 해봤는데 그 쪽에서
는 모르는 일이며 대답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대한항공 이사는 오히려
자기가 피해자라고 하구요."

차 회장은 또 "보상금이 지급된다면 대한항공의 담당 보험사인 영국 로이
드사에서 지급되는 것이 맞겠지만, 실제로는 국내 D보험사에서 지급했
다"며 "그러나 보상금을 지급한 D보험사 역시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뗐다"고 말했다.

의문 3: 사고 3개월 만에 전원 사망처리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유품 하나 발견되지 않은 탑승객들을 정부는 사
고 3개월 만에 전원 사망신고를 했던 것. 차 회장은 아들의 취직관계로 호
적 초본을 뗐다가 가족들도 모르게 남편의 사망신고가 돼 있던 걸 보고
아연실색했다.

"항공, 선박사고의 경우 시신이 발견되지 않으면 1년이 지나서야 사망으
로 간주하는데 정부는 3개월 만에 일괄적으로 사망신고를 했습니다. 어떻
게 아무런 증거도,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가족들도 모르게 사망신고를
할 수가 있습니까."

의문 4: 사진자료 한 장도 없다?

115명의 탑승객의 생사를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대형사고였
지만 사고와 관련한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차 회장은 교통부·안기부·
건교부 등 찾을 수 있는 곳은 다 찾아다녔지만, 사건 현장 수색 장면을 담
은 사진 한 장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교통부 차관에게 수색현장 자료라도 보여 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랬
더니 오히려 '제발 보여 달라고는 하지 말라'고 저에게 빌더군요. 안기부,
건교부에 찾아가 비행기 찾아내라고 애걸복걸도 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
지였습니다. 어떻게 사진 한 장 없을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희생자 가족에 대한 예우도 없었습니다."

사건 3년 후 사형을 선고받았던 김현희는 사형 선고 1달 만에 특별사면 조
치됐다. 하지만 KAL 858기 '폭파범'이라는 김현희를 가족들은 만나볼 수
도 없었고, 김현희로부터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다고 한다.

의문 5: 김현희와 희생자 가족 만남 왜 막아서나

"반공교육 명목으로 전국 순회강연을 다닌 김현희를 희생자 가족에게는
만날 기회를 주지 않았죠. 그래서 강연이 끝날 때까지 숨어서 기다렸다
가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습
니다. 가족들은 김현희가 범인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데 그에게 해라도 끼
친답니까? 왜 김현희와 가족들이 만나면 안되는 거죠?"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차 회장의 집에는 정체
모를 이의 방문도 잦았다고 한다. 또 주변 사람을 통해 차 회장의 활동을
중단시키기 위한 압력도 많았다고 그는 말한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덮어둔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밝혀내는 것이 남편
에 대한 제 마지막 도리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왜 진실을 밝히고자하는
일을 막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습니다. 대한항공 관계자부터 정부 관
계자까지 저희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습니다. 먹히지 않으니까 남편의
지인을 통해서도 이야기를 전하더군요. 제발 이 일에서 손을 떼라고."


느닷없는 국정원의 방문 "한 점 부끄럼 없다...나서지 말라"


KAL사건진상규명대책위원회(대표 김병상 신부)의 집행위원장을 맡은 신
성국 신부는 지난 10월 중순 경 국정원 관계자의 느닷없는 방문을 받았
다. 신 신부는 "예고도 없이 국정원 직원이라고 밝힌 사람들이 내가 있는
수련관으로 찾아와 이 일(진상규명)에 나서지 말라고 강하게 요구했
다"고 밝혔다.

"수사에 최선을 다했으니 한 점 부끄럼이 없다더군요. 또 대책위의 주장
은 근거 없는 것이며, 당시 북한이 주장했던 내용들이라고 했습니다. 때
문에 저나 대책위의 활동은 의미가 없는 것이니 나서지 말아 달라고 하더
군요."

하지만 신 신부는 "거리낄 게 없다면 제기된 의혹에 답하면 될 것을 왜 일
방적 주장만 되풀이 하고 의문마저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냐"며 항변했
다.

"떳떳하다면 왜 자꾸 숨고 가로 막으려고만 하는 것입니까? 왜 진실을 밝
히고자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지난 2001년에 결성된 대책위는 지난 달부터 광주·대전·청주 등 전국
을 돌며 순회 설명회를 갖는 등 KAL 858기 사건의 진상규명 활동을 벌이
고 있다.

진실이 밝혀지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변의 압력에도 차 회장은 굴하지 않았다. 남편에 대한 마지막 도리가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건 직후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가족회가 결성됐다. 100여명
의 희생자 가족이 함께 하고 있는 가족회는 지금이라도 진실이 밝혀졌으
면 하는 바람 하나뿐이다.

"유품 하나라도 나온다면 죽었다는 걸 인정하겠지만 유품 하나 없고, 어
디에 추락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인정하겠습니까. 모든 게 음모라 할
수 밖에요. 지금이라도 진실이 밝혀져야 합니다. 사건을 이렇게 은폐하
는 것은 국민 전체를 우롱하는 겁니다. 10년을 넘게 싸웠습니다. 오로지
진상규명 하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알면서도 밝히지 못한다는 것은 말
도 안 됩니다. 꼭 밝힐 것입니다."

차 회장은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 남편과 함께한다. 안방에 놓인 남편
의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건넨다. '여보, 나 오늘은 00에 다녀올 거야. 무
척 바쁘겠지? 조심해서 잘 다녀올께요'하고.

"너무나 자상한 남편이었어요. 30년간 살면서 화 한 번 안 내고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던 사람이었죠.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결혼 전에 남편과 주고
받았던 편지를 다시 읽어봤습니다. 그러고는 며칠간 밥도 못 먹었죠. 마
치 남편이 옆에 살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진상규명 하나에만 매달려 살아온 차 회장은 지금도 남편 이야기만 나오
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자식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밤길 조심해서 다니라고 합니다. 이 일에
만 매달려 17년간 쑤시고 다닌 데가 여간 많겠어요. 하지만 전 무섭지 않
습니다.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도움 됫으면 해요 ^^

200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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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기 폭파사건

1987년 11월 28일 밤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한 대한항공 858기가 아랍 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 기착한 뒤 방콕으로 향발했다.

이 여객기는 11월 29일 14시 1분 미얀마의 벵골만 상공에서 방콕공항에 "45분 후 방콕에 도착하겠다.비행중 이상 없다"는 보고를 무선으로 보낸 것을 끝으로 소식이 끊어졌다. 이 여객기에는 중동에서 귀국하던 한국인 근로자 등 승객 93명과 외국인 2명,승무원 20명 등 모두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여객기 잔해가 태국 해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태국 내무부가 발표하였고,30일 오후 858기의 추락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12월 1일 사고 비행기에 한국입국이 금지된 "요주의 인물"인 일본인 2명이 탑승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수사는 급진전되었다. 문제의 두 일본인은 '하치야 신이치'·'하치야 마유미'라는 여권을 가진 남녀로 바그다드에서 탑승한뒤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으며,이중 마유미의 여권은 위조여권임이 바레인(탈출로 중간기착지)공항에서 밝혀졌다. 이들은 바레인에서 요르단으로 탈출하려다 위조여권 적발로 체포되자 담배 속에 숨겨둔 독극물을 삼켜 자살을 시도하여 남자는 숨지고 여자는 중태에 빠졌다.

한국으로 신병이 넘겨진 '마유미'여인은 중국어와 일본어를 사용하며 중국인행세를 해오다가 12월23일 범행을 자백했는데 본명이 김현희(당시 26세)이며 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공작원으로서 음독자살한 김승일(당시 70세)과 함께 "88 서울올림픽 개최방해를 위해 KAL기를 폭파하라"는 북한 김정일의 친필 공작명령을 받고 기내 좌석선반에 라디오와 술병으로 위장한 폭발물을 놓고 내려 공중에서 폭발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 후 김현희는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1990.3.27)되었으나 전향의사 표명과 김정일의 도구로써 이용된 점이 정상참작되어 대통령 특별사면(1990.4.12)으로 석방되었다.

 

의문점 1. 실종자 가족들이 확인할수 있는 유품이 없다?

안기부는 사건 발생 2년 반만에 안다만 해역에서 비행기 잔해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안기부는 이 잔해에 남아있는 88올림픽 표기 및 태극마크 표시로 보아 폭파된 KAL기 잔해가 틀림없다고 발표했다.
이에 비해 1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115명이나 되는 탑승객의 유해 또는 유품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세계 여객기 사고사상 탑승객의 유품 또는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사건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 발생 2년 반만에 찾았다는 잔해는 발견 확률이 불과 1/40000밖에 되지 않는 부위다.(발견된 잔해는 OFFICIAL이라는 단어가 나뉘어 씌어진 동강난 두 조각. 해상에 떠도는 수만 개의 파편 중 꼭 맞는 두 조각을 찾을 가능성은 1/40000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안기부의 대답이 걸작이다. KAL기 사고 직후 탑승객 가족들은 유해가 발견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안기부에 질의했으며, 이에 대해 안기부는 안다만 해역에 식인상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의문점 2.김현희가 KAL기에 놓고내렸다던 폭탄은 어디에 있는가?

안기부 발표에 따르면 사건 당일 김현희 일행은 폭탄은 비닐 쇼핑백에 넣어 기내 선반에 놓고 내렸다고 한다.
또한 사건발생 1주일 후 국내 일간지들은 김현희 일행의 소지품에서 화약 반응이 나왔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당시 김현희 일행을 기내에서 목격한 KAL 박길영 사무장은 남자는 짐이 없었고, 여자는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고 진술했다.(87년 12월 2일자 조선일보) 즉 목격자의 진술에 따르면 안기부의 발표에서 나온 비닐 쇼핑백은 애초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88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김현희 일행의 소지품을 화학적 시험법 등 정밀감정을 한 결과 화약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88년 1월 15일자 동아일보)

 

의문점 3. 미사일 격추에도 12분간 버티는 KAL기가 두부 크기의 폭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가?

88년 1월 안기부 수사 발표에 의하면 KAL기에 사용된 폭탄은 콤포지션 350g과 PLX액체 폭탄 700cc. 안기부는 정상고도를 비행하고 있던 KAL기가 이 폭탄이 터지자마자 산산조각이 나서 구조 신호를 보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우선 89년 2월 검찰공소에 따르면 안기부가 발표한 폭탄은 확인되지 않은 추정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더구나 일본과 미국의 군사전문가들에 의하면 KAL기에 사용된 폭탄은 겨우 두부 크기 정도로서 덩치 큰 비행기를 공중분해 시킬 수 없다고 한다. 즉, 폭탄이 비행기 내부에서 터진다 해도 적어도 수 분간 활공 후 폭파되기 때문에 구조신호 발신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 한 예로 83년 사할린에서 KAL007편은 미사일에 격추되었으나 약 12분간 활공하면서 긴급 구조신호를 보냈다.

 

의문점 4. 엉뚱한 데서 발견된 겉은 멀쩡한 구명보트.

안기부는 사고 발생 15일만에 육지근처 근해에서 25인승 구명보트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안기부는 ‘구명보트에 있는 공기압축펌프가 높은 열을 받아 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공중폭발 가능성이 크다’는 미얀마 내무성의 추정과 함께 발견사실을 발표했다.

우선 구명보트의 발견지점이 엉뚱하다. 당시 미해군이 작성한 안다만 해역의 해류도에 의하면 사고 발생 15일 후 구명보트는 육지근처 근해가 아니라 서쪽 대양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또한 당시 발견된 구명보트는 바람이 안 들어간 개어진 슬리핑백 형태로서 공기압축펌프 외 비상식량, 약품, 조명탄 등 49점의 물품이 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구명보트는 인조피혁 외 나머지 물품은 멀쩡한데 펌프만 파손된 채로 발견되었다.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날 정도로 폭파된 비행기 안에서 외부는 물론 펌프만을 제외한 나머지가 멀쩡한 구명보트가 발견될 수 있는가.

 

의문점 5. 김정일의 친필지령, 그 물증은 어디에 있는가?
당시 안기부는 KAL기 사건이 김정일의 친필지령으로 자행된 것이라고 밝혔다. 테러동기는 88올림픽 방해를 목적으로 한다고 발표했다.

88년 1월 15일 수사발표 당일 안기부 수사관은 소위 ‘친필지령’ 문제에 대해 ‘실제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그는 ‘친필지령’에 대해 친필지령 사실은 상부기관에 의해 구두로만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즉, 김정일의 ‘친필지령’은 한번도 사실로 확인된 바가 없었다.
또한 북의 테러동기라고 밝힌 88올림픽 방해에 대해서도 일본 언론은 부정적이다. 당시 일본 언론보도에 의하면 북은 남한과 합의한 88올림픽 분산개최를 위해 경기장을 새롭게 건설하고 선수촌, 아파트, 도로, 비행장 등 부대시설 건설이 한창이었다. 이를 두고 국내언론들은 북이 부대시설을 건축하는 것은 88올림픽 때문이 아니라 89년에 있은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위해서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축전을 위해 선수촌과 경기장을 짓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의문점 6. 일본 침투 북괴간첩 이경우는 이미 2년전에 사망한 사람이었다.

당시 발표에 따르면 김현희 일행에 일본 위조여권을 만들어준 사람은 일본에 침투한 북괴간첩인 ‘이경우’라고 소개하고 있다.

88년 1월26일자 요미우리 신문에 의하면, 일본 공안당국은 ‘이경우’라는 자가 KAL858기 사건 발생 2년 전인 85년 간암으로 사망했을 것이 유력하다고 추정했다.

 

의문점 7. 김현희의 일본어 선생은 술집종업원?

당시 안기부는 북이 일본에서 ‘이은혜’라는 여성을 납치하여 김현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고 밝혔다.

일본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은혜’라고 불리우는 여성은 일본에서 술집 종업원으로 종사했던 여자로 이 ‘이은혜’ 납치사건은 현재 북일수교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북에 입장에서 보면 일본인과 다름없이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조총련계 동포들이 한마디로 널려있다. 일본어 교육을 시키기 위해 술집 종업원을 납치할 필요가 과연 있는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의문점 8. 극약 앰플은 북에서만 사용하는 행동수법이다?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 일행이 바레인에서 극약 앰플을 사용하여 음독했다면서 이는 종전의 북한 간첩이 사용했던 행동수법과 동일하다고 발표했다.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김현희가 음독했다는 사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극약 앰플로 자살을 시도했으므로 북의 소행이라는 식의 논리는 억지에 가깝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72년 5월 북에 밀사로 파견된 이후락 정보부장도 극약 앰플을 소지한 바 있다고 보도했다.

 

의문점 9. 가족 동의 없이 사망처리 강행

정부는 KAL858 사건 발생 후 실종유예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일괄적으로 실종자들을 사망처리했다. 심지어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다.

희생자 가족 중 일부는 이에 항의하여 실종신고 심판청구 재판을 제기하여 97년 7월 21일 서울 가정법원으로부터 정식 실종신고를 받아냈다. 이들은 유품 하나라도 발견되면 ‘사망’ 처리에 동의하겠다고 울면서 호소하고 있다.

의문점 10. 엉뚱한 장소에서 수색작업을 벌였다.

당시 정부는 어디스에 최종 교신 후 사라진 KAL858기의 추락예상지역에서 인명구조 및 기체 수색작업에 만전을 기했다고 발표했다.

87년 12월 5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은 최종교신지점이 어디스에서 서쪽으로 403km떨어진 토리스 상공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부는 어딧해역을 추락예상지역이라고 보고 수색작업에 만전을 기했다고 발표했다.


87년
11월29일 KAL858기 사건 발생. 29일 오후 2시1분 인도양 상공에서 KAL858기 실종, 방콕과 최후 교신 뒤 실종된 것으로 보고. 바그다드 아부다비 방콕 서울(8시 40분 도착 예정) 승객 115명의 생존 미확인.
11월30일오전 정무 외무부 제2차관보 등 현지조사반 급파. 바레인측은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대 수색, 육상수색작업 진전 없음. 관계당국 및 KAL858기 측 인도양과 뱅골만 상공에서 공중폭파 가능성 시사. 당시 홍콩측은 기체내부 문제로 추락가능성 시사, 미국측 역시 추락가능성 시사.
12월1일 아랍 에미레이트 주재 한국대사관, 남한 입국이 금지된 요주의 인물인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 2명이 바그다드에서 탑승하여 아부다비에서 내렸다고 정부에 보고, 검거. ‘하치야 신이치, 하치야마유미’ 연행 후 조사 중 음독자살을 기도했다고 발표.수색구조반은 추락지점인 밀림을 수색하였으나 수색작업 진전 없음.
12월2일 당시 청와대 비행기에서 내린 2명의 추정인물이 북한계로 추정언급, 대북한 안보체제 강화와 선거방해 책동에 대한 엄단 지시. 정부 재판관할권과 신병인도 요청. (보통 국제범죄의 경우 범인 체포나라, 피해국의 순으로 재판관할권이 부여. 따라서 당신 신병인도는 바레인과 일본이 자신들의 관할권을 포기해야만 가능.)
12월3일 ‘하치야 신이치’는 북한 스파이의 중요관계자로서 ‘미야모토 아키라’와 동일인일 가능성 시사. 이에 일본경찰은 ‘신이치’와 ‘아키라’는 다른 인물임을 확인.
12월4일 마유미 회복
12월5일 3명의 수사요원 파견, 바레인 수사 간접지원 및 정확한 신원과 행적 등 수사방향과 범인 인도 합의. 치안본부는 ‘미야모토 아키라’를 배후인물로 추정.
12월7일 바레인에서 사실상 수사 종결, 정부는 북한의 88올림픽 방해 책동으로 사건 분석.
12월9일 정부, 현지조사단 철수 결정(KAL858기는 실종 처리) 당시 KAL858기 유족,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침묵시위.
12월11일 KAL858기 잔해로 추정되는 물체 발견. 방콕측은 신빙성이 희박하다고 반박.
12월15일 ‘하치야 마유미’ 신병인도. 일본측 음성조사결과 ‘하치야 마유미’는 북경어권 출신. 즉, 조선족일 가능성 시사. 미국방성은 발견된 잔해추정물체가 KAL858기의 잔해가 아니라고 보고.
12월16일 대통령 선거 실시.‘하치야 마유미’ 신상확인 조사 본격착수(안기부 주관), 북한 테러공작임을 확증적으로 표현.

88년
1월15일 ‘하치야 마유미’, 김현희라는 이름으로 TV기자회견. 본인이 KAL858기 폭파범이며 북한 김정일의 사주로 88올림픽 방해, 선거분위기 혼란 야기, 남한내 계급투쟁 촉발을 목적으로 KAL858기를 폭파했다고 발표.
1월21일 미국, 대북한 제재조치로 테러국으로 단정. 북한외교관과의 교류지침 철회, 북한인의 미입국 제한 강화, 세계의 규탄유도를 위한 상징적 대응 발표.
2월4일 일본 조청련, 김현희의 자필선서문은 안기부의 조작이라고 기자회견. 미국, 88올림픽 개최시기에 맞추어 팀스리리트 훈련 실시에 대해 협의.
2월11일 한·일 정부 UN안전보장이사회 소집 요구, KAL858기 폭파사건 북한 규탄 논의. 2월17일 UN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채택 거부
2월22일 북, IOC위원 경질.

89년
2월3일 서울지검, 김현희에 대해 6차례 조사(88.12.2~89.1.23) 결과 발표. △살인죄 △항공기폭파치사죄 △국가보안법 적용하여 불구속 기소.

90년
3월27일 대법원 사형선고
4월12일 김현희 극히 이례적인 특별 사면 조치

91년
6월2일 수기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 발간, 사건당시 진술과 80여곳 엇갈리는 내용

97년
12월28일 김현희 전직 안기부 요원과 결혼, 개명. 행방묘연.

 

http://www.kal858.or.kr/main_kor.htm 발췌.

홈페이지에 찾으시면 좀 더 많은 정보를 접할수 있습니다.

200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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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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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s****
평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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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kal858notice 칼진상규명모임입니다.

그당시 국내외 정세와 외신자료 김현희를 미화시킨 언론들

여러가지 자료를 올려놓았습니다.

김대중정권초기에 수사를 하려했으나 자민련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무언가 구린게 있는것이지요

지금의 한나라당 총재인 최병렬씨가 공보처장관, 대법관이 이회창, 정형근, 안무혁
모두는 이 사건의 공범자 이지요. 김현희도 마찬가지구요

언론조차도 사실을 왜곡시켜 김현희 미화하기에 바빴던것으로 보입니다.
김현희의 자서전조차도 그녀가 쓴것이 아닙니다.

국민들을 속이기기에 바빴지요...

안기부(현 국정원)는 헌법에서 명시한 기관도 아닌데 그 집단이 권력을 행사하여왔다는
사실이 참 비통합니다.

이제는 진실을 밝힙시다. 국민이 나서서 밝혀야 할때입니다

200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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