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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KAL기 폭파사건과 노태우의 당선의 관계
jang**** 조회수 18,112 작성일2007.07.10

제가 궁금한 점은 질문 제목 그대로 이고요.

물론 확실히 근거 있는 이야기는 아니고 가설이겠지만 KAL기 폭파사건과

관하여 검색을 하다 보면 제일 많은 기사나 자료가 자작극이냐 아니냐라는

내용이더군요.

 

근데 자작극이라는 가설중에 하나가 정치적으로 이용됬다는 설이있는데

대통령 선거 바로 전에 테러범 김현희(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우리나라로 이송되었다고 하네요.

 

이에 관해서 예전 자료를 찾아보니

 

"대선을 앞둔시점에서 KAL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115명의 탑승객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정부는 KAL858기 탑승객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여당출신 대통령 후보자는 200만에 이르는 표를 확보했다."

 

"당시 중앙일보와 조선일보는 1987년 11월 말까지 노태우후보가 김영상후보에 열세인 것으로 나타났지만 선거후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KAL기 사건으로 반전되었다."

 

요렇게 나오던데 이거는 이유야 어찌됬건 KAL기 폭파사건 = 노태우 당선 이란

이야기가 되는게 아닌가요?

근데 이 일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거에 어떻게 관련이 있는 건가요?

 

노태우가 이 사건을 정치적인 전략으로 이용을 했나요? 이용했다면 어떤식으로

이용을 했길래 불리하던 선거에 역전을 해서 당선이 된건가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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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복잡하고도 간단한 문제인데

 

당시 칼 858기 사건의 경우

일본명 하치야 신이치(일명 김승일)과 하치야 마유미(일명 김현희)

이 두사람이 서울로 가던 칼858기의 선반위에 C-4콤포지션이라고하는 라디오로 위장한 폭탄과 액체폭탄으로 테러를 한 사건을 말하는데

당시 일어난 시기가 1987년 12월 17일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일어난 테러 사건인지라.

거기에다가 바레인에서 탈출하려다가 공항에서 김승일이 음독 자결하고

김현희는 극적으로 살아났다고 해서 북한에서 저지른 테러 사건으로 무조건 단정지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당시 사건조사는 전적으로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했으므로 그 정확한 진실을 알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칼 858기가 공중폭파 테러를 당하던 순간 정치권의 반응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거 큰일 났구나... 약 200만표는 그냥 날라가버리게 생겼어... 이번 선거는 끝장났다고 봐도 되겠네 휴유............ㅠㅠ"

(당시 평화민주당 김대중 대통령 후보 정책 보좌관 설훈(전 열린우리당 의원))

 

"이거 북한이 또 장난치는 것 같은데 공안정국이 형성되면 노(태우)후보만 유리해 지는 것 아녀? 선거는 이제 역전되겠구만 휴우.........................ㅠㅠ"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대통령 후보 선거지원단장 김동영 의원(1990년 지병으로 사망))

 

따라서 당시는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 앞에서 북한에서 장난을 쳤거나 테러를 저질렀다면 당시 분위기상 야당보다는 여당으로 표가 몰리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군중심리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 전날 김현희를 당시 5공 정부가 계획적으로

김현희를 압송해오고 언론과 방송은 계속적으로 하루종일 보도함으로 하여 국민들의 불안감을 조성하였고 결국 1노 3김의 대결에서 노태우 후보가 극적으로 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1990년인가요 91년인가요

당시 대법원 사형확정 선고를 받은 김현희가 몇일뒤 노태우 대통령에 의하여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것이 결국 김현희의 테러사건으로 노태우 자신이 당선될 수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보답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로써 그 사건의 진실은 아직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어째뜬지 사건 직후부터 정부에서 대통령 선거와 연계시켜

사건수사의 초첨을 만들어 갔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럼 좋은 하루되세요^^

2007.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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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858기 사건'는 지난 1987년 11월28일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을 출발해 아랍에미레이트연합 아부다비를 경유, 태국 방콕을 거쳐 서울로 향하던 KAL858기가 11월29일 미얀마 근해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폭발 추락하여 승객, 승무원 등 115명이 전원 사망한 사건이다.당시 당국은 수사결과 '88서울올림픽 참가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여객기를 폭파하라'는 김정일의 친필 지령을 받은 북한 공작원 김승일, 김현희에 의해 저질러진 행위라고 발표했다.이 사건은 지난 2005년 12월 국가정보원이 자체 기관 내에 '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를 설치, 자체 조사를 실시한 사건 중의 하나로 지난해 8월1일 중간발표를 통해 1987년 대통령선거에 특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일명 '무지개 공작' 차원에서 적극 활용됐다는 중간발표를 하기도 했다.

전에올린답변입니다.

노태우의 대선승리.
전두환의 야망으로 5공은 탄생하였습니다.군부를 등에업은 전두환의 5공화국은 중앙정보부같은 정보통치기관이 판을 치고, 말한번 잘못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만신창이가 되도록 고문을 당하던 시기였습니다.그러나 시간은 흘러 5공의 전두환정권말기에 대통령을 직접선거로 뽑을 것이냐, 간접선거로 뽑을 것이냐 하는 논의가 뜨겁던 때였습니다.

그즈음인 1987년 1월 14일에 물고문으로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데모학생 색출과정에서 연행되어 고문을 받다 죽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큰 파문을 몰고 왔습니다. 그 파장은 추모대회와 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운동본부"라는 범국민적 기구를 탄생시켰던것입니다. 순결한 한 대학생을 고문으로 죽여놓고서도 발뺌을 하는 그 부도덕성이 국민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것입니다. 이런 흐름에 위기를 느낀 당시 전두환 정권은 4월 13일, 대통령 직선을 위해 법을 고치는 문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라는 이른바 "호헌조치"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국민들은 더욱 큰 분노를 느끼면서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호헌반대 여론이 각계각층으로 번지면서 교수,교사,시민단체,예술인,연예인 등이 잇따라 성명을 발표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던 중에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그 동안 마음으로만 지지를 보내던 시민들도 거리로 나섰습니다. 6월 10일, 민정당이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던 그날, 전국에서는 "독재타도","직선제 쟁취"의 함성이 온종일 메아리쳤습니다. 6월 26일에 있었던 평화대행진의 날에는 전국에서 1백 80여 만명의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한 항의의 표시로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고, 전국의 교회와 사찰에서는 일제히 종을 쳐댔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되자 마침내 6월 29일 노태우 대통령후보는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의"시국수습을 위한 8개항"을 선언하였습니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빛나는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6월 민주항쟁은 진정한 민주화 시대의 발판이 되기에 충분하였던것 입니다.

양김의 분열노린 전두환의 전략.
그러나 후에 밝혀진바에 의하면 이 6.29 선언은 대통령 전두환의 구상으로 노태우후보에게 지시하여 발표케하고 자신이 노태우의 구상을 받아들이는것으로 하여 노태우의 인기를 상승시켜 대통령에 당선시키려는 고도의 전략으로 밝혀졌습니다.그리고 또 민주화세력인 김대중을 복권시켜 대선에 참여케하여 또하나의 민주화세력인 김영삼과 분열하게하고 표를 분산시켜 노태우를 당선시키려는 전략이였습니다. 후에 전두환의 전략은 그대로적중되어 김대중과 김영삼은 합심하지 못하고 서로 대선에 나갈뜻을 밝혀 서로 대립하더니 결국 둘다 후보로 나서 노태우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게 합니다.

비록 정권이 칼기사건을 호기로 삼아 정략적으로 이용했을수는 있겠으나 무고한 인명과 자국국적기를 격추하는 자작극이란 있을수 없다고 생각합니다.그이유중 하나가 김현희를 사면하였습니다.폭약을 비행기 선반에 장착한 두 명의 북한공작원 중 한명인 김현희가 아직 살아있고 이 사건을 담당했던 조사관들이 살아있습니다. 모든 조사가 끝나고 김현희는 법정에서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습니다. 그토록 흉악한 테러범을 왜 살려 주느냐고 반발하는 유족들도 있었지만 그 사건의 진실여부를 놓고 오늘과 같은 물의가 발생했을 때 범행에 직접 참여했든 장본인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조사관들이 증거를 제시해도 의혹의 그림자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사건이 선거에 영향을 미쳤을수도 있겠으나 이는 미약하게 작용했을뿐 가장큰이유는 양김의 분열이였습니다.

2007.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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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의 1987년의 국내정세는 북한의 도발이 상시적인것이라 생각했던겁니다.

박정희,전두환의 집권기가 지나면서 대공전략,대북한전략의 수정이 필요했습니다.

문제는 남한에서 북한을 조종할수있는 수단이 없었다는겁니다.

하지만 미국을 통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었습니다.

전두환의 쿠데타 역시 미국의 암묵적인 동조를 받지않았다면 실패했습니다.

일례를들면 광주항쟁당시 광주지역에 투입된 군병력의수가 무장병력 2만이 파견됐답니다.

완전무장한 병력 2만이면 완전히 전쟁을 작정하고 준비했다는 이야기인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당시역시 군병력의 지휘권은 미군사령관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이상한쪽으로 흘렀는데요.

다시말씀드리면 미국과의 합작에 의한 조작일가능성도 있다는겁니다.

그당시의 국내 정서는 반공이 대세였으니까요.

그런상황에 북한에서 민항여객기를 폭파시켰다면 선거 판세가 뒤집히는건 순식간인거 당여한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선거를 조작한겁니다.

미국의 도움없이는 절대 할수없는짓입니다.

노태우,전두환,미국의 공작정치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정권유지를 언제까지 이어갈수는 없었던거지요.

 

2007.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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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고이즈미에게 김현희 일어교사 이은혜

납치에 대하여 사과한것 보면 김현희가 북한공작원인건 틀림없지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15년동안 김현희에 대하여 조사했지만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는 증명 하지 못했고요.

 

그리고 노태우가 그때 승리한건 김현희 보다는 71년

김대중과 김영삼 약속(이번대선에서는 김영삼이 김대중 밀어주고

다음대선에서는 김대중이 김영삼 밀어준다는 약속을 깨버린

김대중 잘못이 더많지요.

그때 노태우가 투표수 40%로 승리했고 김영삼 32% 김대중 28% 을

얻었으니까  야권에서 단일후보로 한명이 나왔으면 노태우 대통령은

없었겠지요

2007.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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