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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사도신경의 성경적인 근거는? (2)
비공개 조회수 1,433 작성일2019.02.27

10년만에 다시 드리는 질문입니다.

저는 10년 전에 가톨릭 디렉토리에 열심히 질문을 한 적이 있지요.

정말 궁금해서이기도 하고,

다른 분들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해서지요.


하지만 답변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냥 채택을 한 것도 있고,

그 동안에 교회의 방침이 바뀐 것도 있을 수 있으며,

시대가 바뀌었으니 답변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요.

지금의 가톨릭 전문가분들의 생각을 듣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듯해서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질문은 가톨릭 전문가를 상대로 가톨릭 디렉토리에 올리는 것이니

다른 종교 신자분들은 답변을 피해주셨으면 고맙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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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개신교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기도문이

주님의기도와 사도신경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기도는 신약성경에 잘 나와 있지만,

사도신경은 어떤 근거로 성립된 것인지 궁금하군요.

 

어린 시절에 주일 학교에 다닐 때,

그 때 선생님께 이렇게 배운 것으로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자 제자들은 용기백배하여 신앙을 증거하였다.

 

사도 베드로가 큰 소리로 외치며 문을 나섰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그러자 다른 제자가 그 말을 받으며 따랐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

 

이렇게 말씀하신 12가지 믿음이 사도신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가 없는 듯하군요.

성경 어느 곳에도 사도신경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고요.

 

저의 질문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언제부터 사도신경이 교회의 공식 믿음으로 정착되 것일까요?

2)사도신경을 기도문으로 채택한 근거는 무엇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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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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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은하신 열심답변자
교통, 길찾기, 개신교 55위, 한국사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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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초대교회 때 세례문답으로 바치던 것이 사도신경으로 정착된 것입니다.


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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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맨
식물신
개신교, 종교, 가톨릭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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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신경’(使徒信經)은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의 수많은 신자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신앙 선언이나 진술로서 암송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도 신경’(使徒信經)으로 알려진 이것은 아타나시우스 신경이나 니케아 신경과 함께 그리스도교국의 교회의 공개 숭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처럼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연합에 필수적인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도 신경을 암송하였는가? 성서는 그것에 관해 언급하는가? 하는 질문들이 생깁니다.

해스팅즈저 「종교 윤리 백과사전」(Encyclopedia of Religion and Ethics)과 맥클린톡과 스트롱 공편 「백과사전」 같은 표준 참고 도서들에 의하면, 오늘날 알고 있는 교회의 신경은 초기 교회에서 사용된 바 있는 침례시의 신앙 고백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침례 지원자들은 그 신경들 중 요약된 얼마의 공식문을 암송함으로써 적어도 기초적인 신앙 만큼은 받아들였다는 것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그러한 고백문들이 상당히 있었으며, 여러 지역의 교회들은 나름대로의 수정판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 4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일부 신경들이 다른 수정판들보다 현저하게 사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살펴 보건대, 신경들은 한 교회의 신앙을 타 교회와 구별하여 규정짓고자 하는 수단으로써 사용되었음이 명백합니다. 

교리상의 변천에 따라 발전된 갖가지 신경들이 채택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니케아 회의’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품성에서 하나’라는 말이 초기 침례시의 신경에 첨가되었습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성령은 ‘아버지 및 아들과 함께 숭배받고 영광을 받는다’는 또 다른 말이 첨가되었습니다.

이러한 신경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되었다 해도, 미국 가톨릭 대학교의 애버리 듈리스가 “아마 역사상 어느 기간에도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전혀 엉뚱한 신앙 고백문들이 급속히 발전된 적은 없었다”고 말한 점은 흥미롭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오늘날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 사이에는 “공식 인정된 신경들이나 신앙 고백문이 150개 이상이나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와 사도들은 신경을 사용하였는가?

처형을 당하시기 전날 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제자들에 관하여 하늘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 17:17) 

그분은 제자들이 거룩하게 될 것을, 즉 따로 구별될 것을 기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기록된 어떤 법전이나 신경을 언급하셨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진리가 제자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로 구별해 줄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기도 문제를 거론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 (마태 6:7) 이렇게 예수께서 기록된 혹은 암기된 기도문을 반복하는 일을 승인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공개적 숭배에서 신경을 암송하는 것 역시 그분은 승인하지 않으리라고 추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사실상, 숭배시에 예수께서 신경을 사용하셨다든가 또는 신경을 사용하도록 제자에게 가르쳤다는 언급을 성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한 4:24.

그러면, ‘사도 신경’은 어떠합니까? 그 명칭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그 신경을 실제로 작성한 줄로 믿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이들은 사도들 각자가 이 신경을 작성하기 위하여 한 문장씩 기고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합니다.

이 점에 관하여, G.C. 스테드 교수는 「해제(解題)시대」(The Expository Times)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의 문헌을 광범위하게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한 가지 색다른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주장하기를, 만약에 사도들이 공식적으로 작성하고 승인한 하나의 신경이 존재했더라면, 초기 교회들 사이에 왜 그렇게도 심히 다양한 ‘신앙 고백문’ 및 ‘신앙 선언문’들이 존재해 있었는지 설명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제반 사실은, “말의 표현법에 있어서 ‘사도 신경’과 대충 일치하는 그리스도인 신앙의 진술은 기원 340년 이전의 현존하는 어떠한 기록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밝혀 줍니다.

성서가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사도들과 연로자들의 회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회합의 목적은 하나의 신경을 작성하거나 수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 출신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인지 숙고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 믿사옵니다”를 증명하는 방법

신경의 문장들은 항상 “나는 ··· 믿사옵니다.” 또는 “우리는 ··· 믿사옵니다”라는 식으로 끝납니다. 이러한 표현은 라틴어 “크레도”(credo)에서 번역된 것인데, 이 단어에서 “신경(Creed)”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들을 반복하는 것이 참으로 믿는다는 것을 증명합니까?

그 유명한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분은 또한 그 당시 종교인들이 인간의 전통에 고착하는 것을 정죄하셨습니다.—마태 7:21; 15:8.
이러한 예수의 말씀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믿는다고 주장한 것을 그저 반복만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승인을 받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성서를 조사하고 그것을 부지런히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신경들을 암기하거나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자기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 가운데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새번역 성경.



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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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가 잘못된 말임을 증명하는 내용입니다. 복음서에도, 본서에도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사도행전 3장]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마태복음 27장]

23 빌라도<권력자>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惡(악할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十(십)字(아이 밸, 글자 자)架(시렁{물건 걸어두는 기구} 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권력자>가 아무 效(본받을 효)驗(시험 험)도 없이 도리어 民(백성 민)亂(어지러울 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對(대할 대)하여 나는 無(없을 무)罪(허물 죄)하니 너희가 當(대할 당)하라

25 百(일백 백)姓(성, 겨레 성)이 다 對(대할 대)答(대답할 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子(아들 자)孫(손자 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위 기록을 보면 빌라도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이라는 것을 보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렸다’ 는 사도신경이, 높음과 채움을 향해 달려가는 공의 관장자인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죄를 덮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내용입니다. 그 사도신경을 오늘날 외우게 한 것도 공의 관장자들입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를 엉망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는 문구인 것입니다.


기득권의 유지 차원에서 욕심이 첨가된 비 성경적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의 손으로 조각한 우상’ 중의 하나입니다.



네이버 까페 "갈릴라이아"에 있는 글입니다.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쉽게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 놓은 성경 까페입니다. 님께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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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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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란 특별히 무릎을 꿇거나 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법안에서는 그 마음에 가지고 있는 ‘생각’ 자체가 곧 기도가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것, 즉 악을 생각하고 근심하는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은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이 됩니다.


성령의 법안에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남은 여생 동안에 거룩함을 향하여 먹어도, 자도, 깨어도,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오늘이라고 하는 매일, 눈을 뜨면서부터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 것이므로 생각 자체가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인생들이 자식을 위하여, 친척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부모를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의 바탕에는 모두 하나같이 높음을 추구하는 마음과 채움을 추구하는 마음뿐입니다. 자기 유익에 반하는 것을 기도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나도 죽는 길로 가고, 타인의 영도 죽는 길로 가기를 바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는 의(하나님이 옳다 하시는 것)에 속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외 것을 기도하는 것은 악만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는 말은 마음으로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상태가 되거나 혹은 삶을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에 속하기 위하여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이유는 거룩해지기 위해서 낮아지고 비우기 위함입니다.

기도는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들어 주시기도 하시고 안 들어 주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의에 속한 것을 구하시면 거의 즉시 들어 주시며 세상에 속한 것을 구하시면 사단에게 절하는 것이므로 사단이 들어주는 것입니다.


의에 속한 것이란 "낮아짐과 비움" 을 향하기를 원하는 것이고 세상에 속한 것이란 "높음과 채움" 을 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님은 세상의 행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하므로 세상이 나를 미워하느니라"


인생들은 누구든지 나면서부터 높음과 채움을 배우고 그것을 목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반대의 길로 가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야만 영이 살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에 속한다는 것은 낮아짐과 비움의 길로 가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말씀을 따라가며 자기를 거룩함에 나아가게 하는 말씀인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가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祈(빌 기)禱(빌 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하늘에 계신 - : “우리” 라고 가르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일대일의 문제임에도 ‘우리’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구원을 받기 전까지는 우리 중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배워야 하고, 도움을 받고 도와주며, 열매를 맺으며 가야 하므로 우리 중에 살되 하나님과는 ‘독대’ 해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가 열매이므로 그의 도움이 필요하고 배우는 자는 가르침을 받아야 자기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우리’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이며,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하신 새 율법인 성령의 법, 어미의 법이 있는 성전입니다.


10 나라이 臨(임할 림,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나라: 내 마음속에 서게 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면 내 영이 살게 되는 곳,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 나라가 내게 임하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 뜻이: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살아가는 동안 내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질 때만, 온전한 의뢰가 있을 때만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뜻이 행하여져 내가 택함을 받은 것 같이 나 또한 그에 부응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며 내 땅에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기도입니다.

 

#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하늘은 ‘구원의 법’ 이며,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것 같이’ 입니다.

 

# 땅: 내 마음 밭을 말합니다. 아울러 “마음이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한 것과 같이 내게 주어질 피전도자의 마음 ‘밭’ 의 의미도 포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밭에서도 이루어져야만 내가 구원을 받기에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에서는 이루어지고 다른 사람의 밭에서도 이루어졌으나 내 밭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나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내 밭의 열매 맺음도 하나님이 뜻하고 계시지 않으면 맺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 밭에 열매가 맺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우선 나를 죽이고 온전한 의뢰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라고 지시하는 것에 부응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은 ‘구원을 받고 싶다면 먼저 너부터 죽여라. 또 그런 뒤에라야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나를 첫 열매로 드려야 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기본 조건입니다. 결국, 이 기도는 “내가 반드시 구원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의 부인이라는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日(해 일)用(쓸 용)할 糧(양식 양)食(밥 식)을 주옵시고


# 성경 본문에는 ‘오늘날’ 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현재 시대’ 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매일의 오늘밖에 허락됨이 없음을 매일 자각하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죽거나 잠을 자지 않거나 비몽사몽간이 아닌 인식하고 있는 ‘지금’ 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다시 어떤 사람에게든지 보장된 ‘내일’ 이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만 역으로는 사람이 온전히 내일이 없는 오늘을 살 수 있게 될 때 그것이 곧 ‘영원’ 하게 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어제’ 혹은 ‘내일’ 이라는 개념은 시간이라는 한정된 개념의 바탕 위에서 한정된 삶을 사는, 육체를 입고 있는 인생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영원을 사는 영이 산 자라면 더 이상 그 시간적 개념 안에서 살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깨어 있는 ‘지금’ 만을 사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안식’ 이 찾아오는 것이며 아울러 그것이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닮아 가면 그것이 하나님의 자식이 되어 가는 것이며, ‘흙으로 빚은 사람’ 이 ‘신’ 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땅에서 하늘에서의 날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우리를 하나님의 ‘자식’ 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시편 89장] 

27 내가 또 저로 長(길 장)子(아들 자)를 삼고 世(대 세)界(지경 계) 列(벌일 열)王(임금 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28 저를 爲(할 위)하여 나의 仁(어질 인)慈(사랑할 자)함을 永(길 영)久(오랠 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言(말씀 언)約(묶을 약)을 굳게 세우며

29 또 그 後(뒤 후)孫(손자 손)을 永(길 영)久(오랠 구)케 하여 그 位(자리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30 萬(일만 만)一(일) 그 子(아들 자)孫(손자 손)이 내 法(법 법)을 버리며 내 規(법 규)例(법식 례)대로 行(갈 행)치 아니하며

31 내 律(법 율)例(법식 례)를 破(깨뜨릴 파)하며 내 誡(경계할 계)命(목숨 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32 내가 지팡이로 저희 犯(범할 범)過(지날 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罪(허물 죄)惡(악할 악)을 懲(징계할 징)責(꾸짖을 책)하리로다


위에 언급된 율법은 모세의 율법이 아닙니다. 성령의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법이 빠진 이전 공의에 속한 유태교와 이슬람과 천주교와 기독교와 및 모든 교단은 시편을 연구하고 또 말합니다. 시편의 처음 말씀이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시편 1장]

2 오직 여호와의 律(법 율)法(법 법)을 즐거워하여 그 律法을 晝(낮 주)夜(밤 야)로 默(잠잠할 묵)想(생각 상)하는 者(사람 자)로다


이 묵상하는 율법은 모세의 율법이 아닙니다. 그러면 또 다른 율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있어야 묵상을 할 터인데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유태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성령의 법을 모르는 그 외의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묵상할까요?


[야고보서 1장] 

25 自(스스로 자)由(말미암을 유)하게 하는 穩(평온할 온)全(온전할 전)한 律(법 율)法(법 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者(사람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者가 아니요 實(열매 실)行(갈 행)하는 者니 이 사람이 그 行하는 일에 福(제사에 쓰는 고기와 술, 복 복)을 받으리라


시편에도 율법은 없고 서신에도 율법은 없습니다. 다만, 율법이 있으니 들여다보고 묵상하라고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그날그날 하루를 사는 동안 한 구절의 말씀씩을 묵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먹을거리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은 내게 주어진 ‘오늘’ 이라는 시간에 전하여 열매 맺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양식을 받지 못하면 그날의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한시라도 말씀에서 떨어져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는 말씀의 본뜻입니다. 온전히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주어진 상황에서 성령이 깨닫게 하시고 행하도록 도우시는 말씀이 곧 일용할 양식입니다.


12 우리가 우리에게 罪(허물 죄) 지은 者(사람 자)를 赦(용서할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罪를 赦하여 주옵시고


#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된 상황에서 너희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너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지 않으면서 어찌 하나님이 너의 죄를 사해주시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에 평온을 찾은 뒤에, 화평을 이룬 뒤라야 이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원수라도 사랑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지 않고는 이런 기도를 할 자격이 없습니다. ‘준 것 같이’ 라고 ‘과거’ 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3 우리를 試(시험할 시)驗(시험 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惡(악할 악)에서 求(구할 구)하옵소서 (나라와 權(권세 권)勢(기세 세)와 榮(꽃 영)光(빛 광)이 아버지께 永(길 영)遠(멀 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진실로>)


# 시험에 - :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성령이 떠나지 않을 수 있게 내 속에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단의 시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온전히 하나님께 속하라는 지시인 것입니다.

 

# 악에서 - : 악이란 세상에 속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악에서 구하옵소서” 란 나 스스로의 노력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노력 없이는 일단 자격 미달이 됩니다.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 :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은 의뢰가 있습니다. 온전한 의뢰 없이 권세 아래 있다고 자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세를 인정한다면 ‘나’ 를 철저히 죽여야 합니다.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 라는 것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는 선한 길에서 열매 맺는 것과 자신을 연단하는 작업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자기 자성 없이는 이렇게 기도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를 죽이는 이 죽임을 행하는 것이 씨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장 작은 자의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 말씀으로 ‘나’ 를 세상에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기우지 않은 자는 모두 하나님이 심은 것이 아니어서 뽑힐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 기도는 조건이 선행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속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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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이 있는 곳은 네이버 카페명 "마음의 율법" 입니다. 님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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