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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요나라에 대해서,
kitt**** 조회수 10,217 작성일2006.03.20

 

 

 제가 야율씨에 대해 관심이 생기다 보니 저절로 요나라에 관심이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이것저것 조사해보니, 요나라 황제들이 한 업적들도 대충대충 나와있고,

역대황제표,몇년에서 몇년까지 통치를 하였는지,황제들의 정실 황후들,요나라에서

여걸이라 불린 세명의 여인(전 그렇게 알고있습니다)까지.

 

 근데 저는 자세하게 황제들의 첩실인 후궁들과 후궁과 황후가 낳은 소생들,

그리고 요나라의 충신과 간신,아니면 요나라 관직(고위직에서 하위직까지)에 대해,

그리고 그 관직에 앉아있던 사람들(간략하게나마), 그리고 요나라 내명부에 대하여,

황후와 후궁인 여인들의 품계표하고 서열표 등 까지 아주 세세하게까지나마 알고싶어요.

 

 뭐 황제들이 이룬 업적만 알면됬지, 뭐하러 세세하게 알려고 하느냐 하겠지만,

이런것을 모아서 저장해놓는 취미가 있어서 멈출 수가 없네요..(..)

 

 물론 저 위에처럼 요구하고 부탁하는 사항이 많지만, 아는 몇가지만이라도

적어주세요. 전 지금 황후,후궁,소생 서열,품계표하고 요나라 관직명,관직에 앉은 사람에

대하여 알고싶은 욕망이 많거든요.

 

 많이 알면 좋지만, 자신의 아는 것에 한계량이 있다 하시는 분들은 대충 네다섯가지정도

만이라도 알려주세요~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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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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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님이 알고싶어하시는게 너무 광범위해서 이쪽으로 전문인이

아니면 잘 모르겠네요.

 

요나라는 야율씨의 나라이다.

 

요나라는 황후를 간택하여 책봉하는 술율부가 있었는데,

술율부에 들어온 여인들은 원래의 자기 성을 모두 소씨로 고쳤습니다.

그래서 요나라의 모든 황후들은 성이 소씨입니다.

 

건국자 야율아보기의 4대조부모가 황제,황후로 추존되었는데

4대조 추존은 모든 국가가 공통적으로 시행하는 일입니다.

 

고조부  숙조(肅祖)    고조모    소열황후 소씨(昭烈皇后 蕭氏)
증조부  의조(懿祖) -  증조모   장경황후 소씨(莊敬皇后 蕭氏)
조부      현조(玄祖) -  조모        간헌황후 소씨(簡獻皇后 蕭氏)
부           덕조(德祖) -  모         : 선간황후 소씨(宣簡皇后 蕭氏)

1. 태조(太祖) 야율아보기는 916년부터 927년까지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정실 황후는 순흠황후(淳欽皇后)이며 성은 소씨이다.

순흠 소황후가 장남 동단왕, 차남 야율덕광, 삼남을 낳았다.

야율아보기의 장녀는 순흠 소황후의 남동생과 혼인하였다.

당혼란기에 군을 일으켜 화북지방의 부족을 통합했고 유능한 한인을 등용했다.

916년 요녕성 임한부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고, 그후 여러 부족을 정벌했다.

야율아보기는 거란문자를 만들어 민족이 중화되는것을 막기위해 노력했고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는 발해의 마지막 왕 애왕과 그 왕후에게

각각 이름을 하사했는데, 발해왕에게 내린 이름은 그가 타고다니던 애마(愛馬)의

이름이었고 발해 왕후에게 내린 이름은 순흠황후가 타고다니던 애마의 이름이다.

927년에 55세의 나이로 죽었다.

2. 태종(太宗) 야율덕광은 태조와 순흠소황후의 차남이다.

927년부터 947년까지 20년간 재위하였다. 장자인 동단왕이 살아있었음에도

황제가 되었다. 후당의 장수였던 석경당이 '연운 16주'를 할양하는 대신

후진의 황제가 될 수 있게 도와달라 하여 이를 돕고 연운 16주를 획득하였다.

그 이후에 후진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개봉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황후는 정안황후 소씨(靖安皇后 蕭氏)이며 4대 목종과 태평왕을 낳았다.

 

추존황제 의종(義宗)

추존황제 의종(義宗)의 이름은 야율 배 이며 야율아보기와 순흠황후의 장남이다.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자리에 건립한 동단국의 왕위를 직책하였으므로

동단왕이라고 부른다. 그는 황제가 되지 못하고 동생이 황제가 되었다

그의 아들이 3대 세종이 되어 그를 황제로 추존하였다.

또 두명의 여인도 황후로 추존되었다. 단순황후 소씨(端順皇后 蕭氏)는 정후이며

유정황후 소씨(柔貞皇后 蕭氏) 제1계후 이다.

3. 세종(世宗)은 동단왕과 동단왕비의 아들로 야율아보기의 손자이다.
재위 4년이며 회절황후(懷節皇后)가 정비인데 5대 야율현과 진국(晉國)공주와

진국(秦國)공주를 낳았다.

 

4. 목종(穆宗)야율경은 2대 태종과 정비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18년간 재위했고
황후 효열황후 소씨(孝烈皇后 蕭氏)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했다.

5. 경종(景宗)야율현은 세종과 회절황후의 아들이다.
정비 예지황후 소씨(睿智皇后 蕭氏)  6대 성종을 낳는데 성종때의 전연의 맹을 맺는다.

아들 성종이 12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자 섭정하였고 소황후를 승천황태후라고도

부른다. 세종,목종,경종 3대 35년간은 정쟁과 내분이 심하고 제위계승싸움이 일어나

남하정책이 제대로 계획되지 못했다

6. 성종(聖宗) 야율융서는 경종과 승천황태후의 아들이다

12세의 즉위하였고 50년(982~1031)간 재위하였다. 재위기간중 세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으나 고려 장군 양규와 강조, 강감찬등에 의해 모두 패배하고

물러났다. 고려와의 전쟁에서는 졌지만 동만주를 정복하고 서쪽으로는 티벳,탕구트

위구르에게 조공을 받으며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1004년의 송과 전연의 맹을 맺어

정치,경제면에서 이익을 취했다.

재위 기간중 요를 가장 강성하게 하고 송과의 평화정책을 유지했으며

정치,군사의 제도가 잘 정비되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고

뒤를 이은 흥종과, 도종때도 번성하여 3대 120년간 요나라는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황후 인덕 소황후(仁德皇后)가 황장자와 황차자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했다.
계후 흠애 소황후(欽哀皇后)가 7대 흥종, 3명의 자식을 낳았다.

고려를 침공한 소배압, 소손녕은 경종의 사위로 성종의 매형들이다.

1031년에 60세의 나이로 죽었고 감릉에 묻혔다

7. 흥종(興宗) 야율종진은 성종과 소황후의 아들이다
거란대장경을 발행했다. 24년간 재위했고 인의황후 소씨(仁懿皇后 蕭氏)가

8대 도종을 낳았다.

8. 도종(度宗)야율홍기는 46년간 재위했고 흥종과 인의소황후의 아들이다.

보수파와 혁신파의 갈등으로 인해 내부의 타락과 반란이 일어났지만

잘 처리하여 성종때부터 손자 도종에 이르기까지 요나라는 전성시대였지만

동부만주에서 완옌부가 성장하여 요를 압박했다.
선의황후 소씨(宣懿皇后 蕭氏)가 야율 준을 낳았다.

추존황제 순종(順宗)
추존황제 순종은 야율준이며 도종의 아들이다. 황제가되지 못하고 황태자일때

죽었다. 그의 아들이 황제가 되어 추존되었다.

정순황후 소씨(貞順皇后 蕭氏)가 천조제 야율연희를 낳았다.

9. 천조제(天祚帝) 야율연희는 24년간 재위했고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다.

그가 완옌부의 부족장 아골타를 우롱하고 죽이려 한일이 있었는데 천조제때

동만주의 완옌부가 급속히 성장하여 요나라와 송나라를 압박했다.

완옌부는 1115년에 금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요,송,고려를 압박하여 동아시아의

형세를 바꿔놓았다. 다급해진 요는 고려의 원병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고

1121년에는 금과 송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1125년에 금나라의 침공을 받고

수도 상경 임황부가 함락되었고 여도곡에서 금군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

이로써 태조때부터 천조제때까지 요나라는 9대 209년만에 멸망했다.

야율아보기의 8대손 야율대석이 서쪽으로 도망하여 서요를 세웠다.

 

야율대석의 황후 탑불연은 서요의 2대 야율이열의 어머니다.이 여인이 감천후이다.

덕종 야율대석과의 사이에서 인종을 낳는다. 1144년부터 1150년까지 재위하였고

연호를 함청으로 개원했다.

 

서요 2대 인종 야율이열은 13년간 재위했고 덕종과 감천후의 아들이다.

19년을 재위하지만 어머니가 7년간 재위했으니 사실상 12년 재위했다

 

서요 3대 천희제의 고모로 야율대석과 감천후의 딸인 야율 보속완이

1164년부터 1178년까지 14년동안 황제의 자리에 앉는다. 야율씨로서 황제즉위의

명분을 삼았다.  요덕종 야율대석의 딸이면서 인종의 여동생이고,

천희제(天禧帝)의 고모이다. 조카의 정치에 섭정하였으나 정부가 있는데도

불륜을 하였다. 승천후라고 부르며 숭복이라고 개원했으나 반란군에 의해 살해된다.

 

서요 4대 천희제 야율직로고는 인종의 아들이다. 고모에게 농락당하는

일이 있었다. 사실상 서요의 마지막 황제이다. 48년을 재위했다.

이중 14년은 고모가 황제의 자리에 있었으나 사실상 34년을 재위했다.

 

서요의 마지막 황제는 야율 굴출률로 마지막 황제이다.

 

 

요나라는 퉁구스어가 섞인 몽골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

920년 태조 야율아보기가 거란문자를 만들어 민족을 고취시켰고

거란문자의 제작은 한족문화의 대항하기 위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거란의 고유한 종교는 샤머니즘이지만 국초()에 농경민을 통치하기 위한

필요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던 바 점차로 유행하였다. 한인과 발해인에서는 물론, 거란인 등의 유목민 사이에서도 불교가 흥행하여 성종 ·흥종 ·도종의 3대에는

최전성기에 달하였다. 요왕실의 불교열()은 매우 왕성하였는데 사탑()의 조영(), 기타 방대한 국비()가 소비됨으로써 이것이 국력쇠퇴의

한 요인이 되었다.

 

요의 사회경제

요의 지배하에는 잡다한 민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지배민족인 거란 및 그 근친관계인 해() 등의 유목민과, 한인() 및 발해인() 등의 농경민으로 대별된다. 유목민에 대해서는 부족제로써, 농경민에 대해서는 중국과 같이 주현제()로써 통치하였다. 특히 요의 본거지인 동()몽골에서는 당초부터 이주시켰던 한인을 위하여 주현을 만들어 이에 편입시키고 성곽을 세워 거주시켰기 때문에 농경민과 유목민과의

거주지역이 혼합되었다.

 

이와 같이 국민을 그 생활양식에 따라서 둘로 나누었던 것이 요나라 사회의 특징이었다. 법률상으로 당()의 법률을 계승하면서도 거란 고유의 법률을 보존한 것도, 관제()에 있어서 북면 ·남면의 2중체제를 간직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농경민의 민정()을 관장하기 위하여 남면관(:최고관청은 )을 두었으며, 유목민의 군() ·민() 양정()은 이것을 북면관(:최고관청은 )에게 관할하도록 하였다. 남()추밀원에는 군정()을 맡기지 않고, 북()추밀원이 이를 통할하도록 하였고, 그 장관에는 원칙적으로 거란인을 임명하였다.

 

이 2중체제로 말미암아 유목민이 농경민에 의하여 한화()되는 정도는 극소수였으나, 양자의 융합은 잘 진척되지 않아, 그 대립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따라서 요의 경제에는 유목 생산적 경제와 농경 생산적 경제가 병존하였으나, 점차로 농경적 생산에 중점이 놓여지게 되었다. 상업 무역은 전연(澶)의 맹약() 이후 현저히 발달하여, 국경의 몇 개소에 각장(榷:다른 민족과의 교역을 위하여 국경에 설치된 관청)이 개설되어 교역이 활발하였고 국내에서도 유통경제가 발달하였다.

 

 

 

힘들게 작성하였 습니다.

 

 

 

 

제 지식을 수집하실때는 출처를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6.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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