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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미이라 3 에서 진시황 궁금한거요 ,,
milk**** 조회수 25,221 작성일2008.08.02

제가 오늘 미이라3 를 봤는데요

제가 평소에 진시황에 대해서 잘 몰라서 질문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 보신 분들이 답변하시는게 더 쉬울거예요 ^^

정확한 답변 해주시구요 내공냠냠 하거나 심리테스트 장난글 올리시는 분들 신고하겠습니다

 

 

1. 영화에서 보니까 진시황이 죽던데 실제로는 어떻게 죽은건가요 ?

 

2. 영화에서 진시황릉을 발굴했을 때 흙으로 된 군사들 사이로 화살이 날아오던데

    실제로 화살이 날아오도록 설계 되있나요 ?

 

3. 사람들이 화살을 피해서 군사들 사이로 뛰어가던데 네이버 이미지에서 보니까

    군사들 사이에 땅이 올라와있던데 뭐가 진짜인가요 ? 땅이 올라와있는 거예요 아님

    그냥 평지로 되있습니까 ?

 

4. 진시황릉이 정말로 발굴된거 맞아요 ? 발굴되었다면 정확히 언제쯤 ?

 

5. 진시황릉이 발굴 되었다면 진시황의 시체는 찾았나요 ? 아니면 못찾았나요 ?

 

6. 미이라3 에서 무슨 파란색 보석나오고 무슨무슨 눈 이라면서 그렇게 부르던데 뭐였어요 ?

   그리고 그건 실제로 당연히 없었겠지요 ?

 

7. 미이라3 에서 나온 진시황릉 모습이요.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가요 ?

 

8. 진시황릉 사진 첨부요

 

 

 

내공 추가 30 

정확한 답변 해주시구요 내공냠냠 하거나 심리테스트 장난글 올리시는 분들 신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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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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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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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까전에 미이라 3 보고 왔어요^^ㅋㅋ

그래서 한번 적어봅니다.

 

1. 영화에서 보니까 진시황이 죽던데 실제로는 어떻게 죽은건가요 ?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으러 여행을 떠나는데 불로초를 찾지 못해 여행중에 죽습니다.

 

2. 영화에서 진시황릉을 발굴했을 때 흙으로 된 군사들 사이로 화살이 날아오던데

    실제로 화살이 날아오도록 설계 되있나요 ?

 

예,실제로 설계 되었습니다. <사기>에 따르면 "진릉지궁에는 장인을 시켜 기계활화살을 만들게 하여, 함부로 들어오는 자는 쏘도록 하였다"고 나와있습니다.

여기에서 장치한 것은 자동으로 발사되는 석궁일 것으로 보이고,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대 최초의 자동도난방지장치가 될 것이라고 하네요.

 

3. 사람들이 화살을 피해서 군사들 사이로 뛰어가던데 네이버 이미지에서 보니까

    군사들 사이에 땅이 올라와있던데 뭐가 진짜인가요 ? 땅이 올라와있는 거예요 아님

    그냥 평지로 되있습니까 ?

 

이건 잘 이해가 안되는데여

땅이 올라와있단것이 무슨뜻인지^^?

쪽지로 좀더 자세히 말해주시면 가르쳐드릴게여ㅋㅋ

 

4. 진시황릉이 정말로 발굴된거 맞아요 ? 발굴되었다면 정확히 언제쯤 ?

 

1999년 백희용갱의 발견, 2000년 문관용갱의 발견, 2001년 금수갱의 발견되었습니다.

 

5. 진시황릉이 발굴 되었다면 진시황의 시체는 찾았나요 ? 아니면 못찾았나요 ?

 

진시황릉이 너무 커서 아직 발굴 중이라고 하네요

시체는 아직까지 찾진 못했습니다.

 

6. 미이라3 에서 무슨 파란색 보석나오고 무슨무슨 눈 이라면서 그렇게 부르던데 뭐였어요 ?

   그리고 그건 실제로 당연히 없었겠지요 ?

 

샹그릴라의 눈이고요

네 영화상에만 존재 하는것입니다.

 

7. 미이라3 에서 나온 진시황릉 모습이요.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가요 ?

 

실제 진시황릉은 세계 유네스코에 지정된 문화재로서 촬영이 불가능해여

그래서 아마 전부 제작한걸겁니다.

 

8. 진시황릉 사진 첨부요

 


실제 유네스코에 지정된 진시황릉입니다.

 

 

힘들게 적었어요~ ㅠ 채택 꼭! 해주세요~~

2008.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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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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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까전에 미이라 3 보고 왔어요^^ㅋㅋ

그래서 한번 적어봅니다.

 

1. 영화에서 보니까 진시황이 죽던데 실제로는 어떻게 죽은건가요 ?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으러 여행을 떠나는데 불로초를 찾지 못해 여행중에 죽습니다.

 

2. 영화에서 진시황릉을 발굴했을 때 흙으로 된 군사들 사이로 화살이 날아오던데

    실제로 화살이 날아오도록 설계 되있나요 ?

 

예,실제로 설계 되었습니다. <사기>에 따르면 "진릉지궁에는 장인을 시켜 기계활화살을 만들게 하여, 함부로 들어오는 자는 쏘도록 하였다"고 나와있습니다.

여기에서 장치한 것은 자동으로 발사되는 석궁일 것으로 보이고,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대 최초의 자동도난방지장치가 될 것이라고 하네요.

 

3. 사람들이 화살을 피해서 군사들 사이로 뛰어가던데 네이버 이미지에서 보니까

    군사들 사이에 땅이 올라와있던데 뭐가 진짜인가요 ? 땅이 올라와있는 거예요 아님

    그냥 평지로 되있습니까 ?

 

이건 잘 이해가 안되는데여

땅이 올라와있단것이 무슨뜻인지^^?

쪽지로 좀더 자세히 말해주시면 가르쳐드릴게여ㅋㅋ

 

4. 진시황릉이 정말로 발굴된거 맞아요 ? 발굴되었다면 정확히 언제쯤 ?

 

1999년 백희용갱의 발견, 2000년 문관용갱의 발견, 2001년 금수갱의 발견되었습니다.

 

5. 진시황릉이 발굴 되었다면 진시황의 시체는 찾았나요 ? 아니면 못찾았나요 ?

 

진시황릉이 너무 커서 아직 발굴 중이라고 하네요

시체는 아직까지 찾진 못했습니다.

 

6. 미이라3 에서 무슨 파란색 보석나오고 무슨무슨 눈 이라면서 그렇게 부르던데 뭐였어요 ?

   그리고 그건 실제로 당연히 없었겠지요 ?

 

샹그릴라의 눈이고요

네 영화상에만 존재 하는것입니다.

 

7. 미이라3 에서 나온 진시황릉 모습이요.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가요 ?

 

실제 진시황릉은 세계 유네스코에 지정된 문화재로서 촬영이 불가능해여

그래서 아마 전부 제작한걸겁니다.

 

8. 진시황릉 사진 첨부요

 


실제 유네스코에 지정된 진시황릉입니다.

 

 

힘들게 적었어요~ ㅠ 채택 꼭! 해주세요~~

2008.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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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도 어제 봤습니다....ㅎ

 

 

1. 영화에서 보니까 진시황이 죽던데 실제로는 어떻게 죽은건가요 ?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에 마지막 순행을 하였다. 여기에는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인 환관 조고, 그리고 자신의 26번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호해가 자신을 뒤따랐다. 사기에 따르면 시황제는 돌아오는 도중 평원진에서 유성이 떨어졌는데 그 운석에 누군가가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즉,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고 써놓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시황제는 병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시황제는 사구 지방에 이르자, 병이 매우 위독해졌으며 유언장을 조고에게 쓰라 하고, 그 내용은 옥새를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에게 전달케 하고, 부소에게 함양에서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라 명하였다.

기원전 210년 음력 9월 10일, 진시황제 영정은 50세의 나이로 붕어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인 여산에 묻혔다. 이 능묘는 1974년 우물공사를 하면서 부장품인 병용(군사모양의 인형)과 더불어 발견되어 지금도 발굴 중이다.

그러나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겼으며 시황제의 시신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 황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부소는 자결하였으나 몽염은 이 명에 대해 의심을 품어 자결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들에게 체포당해 압송된 후 처형당했다. 얼마 뒤, 시황제의 26남 호해는 황제에 오르니 그가 진 이세황제이다.

2. 영화에서 진시황릉을 발굴했을 때 흙으로 된 군사들 사이로 화살이 날아오던데

    실제로 화살이 날아오도록 설계 되있나요 ?

   제가 알기론 진시황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는데...설사 발견하더라도 그건 충분히 가능..ㅎㅎ

하지만 현대가 아니기에 50퍼센트 랍니다

 

3. 사람들이 화살을 피해서 군사들 사이로 뛰어가던데 네이버 이미지에서 보니까

    군사들 사이에 땅이 올라와있던데 뭐가 진짜인가요 ? 땅이 올라와있는 거예요 아님

    그냥 평지로 되있습니까 ?

     뭔말이신지....

4. 진시황릉이 정말로 발굴된거 맞아요 ? 발굴되었다면 정확히 언제쯤 ?

    .............

5. 진시황릉이 발굴 되었다면 진시황의 시체는 찾았나요 ? 아니면 못찾았나요 ?

 .............

6. 미이라3 에서 무슨 파란색 보석나오고 무슨무슨 눈 이라면서 그렇게 부르던데 뭐였어요 ?

   그리고 그건 실제로 당연히 없었겠지요 ?

  당연하죠...

7. 미이라3 에서 나온 진시황릉 모습이요.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가요 ?

 

2008.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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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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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진시황은 불로장생을 원하여 수은으로 실험을 하다 수은 중독으로 죽은 걸로 알고 있어요 ㅋ

 

2.진시황릉을 설계할때 도굴꾼이 침입하면 자동으로 화살이 날라오게 설계는 되있다고 있는데

 

발견하진 못했어요 ㅋㅋㅋㅋ

 

3.진시황릉은 진시황의 무덤입니다. 자신의 힘을 상징 하기 위해 군사들을 같이 묻은거죠

 

그러면서 퇴적 되어 더 쌓이게 된거에요

 

4.진시황릉의 위치는 알지만 진시황릉을 발굴 하진 못하고 있답니다. ㅋㅋㅋ

 

그 이유는 진시황의 무덤을 발굴하는자는 진시황의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때메 발굴작업을 하지 않죠 ㅋ

 

군사들은 농부가 밭을 갈다 발견되어 나온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5.진시황의 저주를 받는다는 이유로 더는 발굴 하지 않고 있어요

 

6,진시황의 보물은 있을법 한데 실제로 똑같은 보석은 아니 겠죠 ㅋㅋ 발굴을 하지 않아서 보물이 있는지 없는지

 

도 모릅니다 ㅋ

 

2008.08.02.

  • 출처

    사진은 네이버 뉴스에서 가져왔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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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군단



알렉산더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 보병은 직사각형 방진(方陣)을 이루었다. 밀집된 그들은 방패를 나란히 세워 앞을 가리고 창끝을 가지런히 앞으로 겨눈 채 밀집 대형을 유지하며 나아갔다.



그들은 두 방향으로 갈라져,오른쪽 부대가 적의 왼쪽을 공격했다. 상대는 진시황 휘하 진(秦)나라 대군. 알렉산더의 계획대로라면,중국군이 자기편을 응원하면서 공격해온 마케도니아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중앙의 주력군이 왼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 틈에 알렉산더는 날랜 기병부대를 이끌고 적진의 중앙을 폭풍이 몰아치듯 돌파해 곧바로 진시황의 지휘부를 유린할 것이다. 이른바 예진(銳陣). 송곳처럼 예리하게 적의 심장부로 파고든다는 뜻인데,그가 가우가멜라에서 페르시아군의 양쪽 날개를 분산시킨 후 중앙으로 파고들어 다리우스 대왕을 일거에 패퇴시킨 전법이다.



그러나 중국군은 녹록지 않았다. 왼쪽 보병 군단은 마케도니아군이 공격하자 즉시 반격했다. 방진의 최전방 궁수들이 ‘서서 쏴’ 자세로 쇠뇌(석궁)를 쏘고 앉으면,뒷열 궁수들이 ‘앉아 쏴’로 활을 쏘았다. 적의 예봉이 꺾이자,보병 주력이 파도처럼 적을 덮쳤다.



중앙 지휘부의 진시황은 왼쪽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기병·전차 부대에 적의 측면을 공격해 포위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중앙부의 주력은 그대로 대기시킨다. 적의 주력이 움직이는 데 따라 보병 대군단을 안행지진(雁行之陣;V자 형으로 비스듬히 줄지어 공격하는 진법)으로 운용해,전차병·기병의 소군단들과 서로 호응케 하려는 용병술이다.



알렉산더로 하여금 가우가멜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세계사를 바꾸게 한 예진과,중국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안행지진. 세계를 평정한 마케도니아의 정예와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한 진나라 보병·기병 대군단의 이 가상 전투는 어느쪽 승리로 끝날까.



고대에 유럽 군대와 중국 군대간에 실제로 전쟁이 벌어졌다면(알렉산더나 로마군이 중국에까지 원정했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가 꽤 있다) 당시 중국(춘추전국시대∼진나라)의 군사력이 페르시아의 칼날을 단 전차나 알렉산더의 막강한 기병부대,로마제국의 장갑 보병군단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전에는 누구도 이 질문에 ‘막을 수 있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시황릉에 딸린 제1,제2,제3 병마 용갱(兵馬俑坑)이 잇달아 발굴된 1976년 이후로는 그 답을 진시황의 지하군단(地下軍團)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고대 중국의 군세(軍勢)와 전술이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카르타고 로마를 능가했을 수도 있음을.



고대 세계의 군사작전은 지역마다 달랐다.서아시아에서는 전차와 기병,즉 말(馬)이 전술의 중심이 되었다.유럽은 장갑 보병,즉 사람 중심이었으며 동아시아에서는 사람과 말이 고루 쓰였다.



서아시아에서 최초로 대제국을 세운 아시리아는 ▲기마 궁수부대 ▲궁수·방패병·마부를 태운 전차부대 ▲보병부대를 조합해 무적의 군대를 만들었다.그 뒤 페르시아도 기병과 전차를 중심으로 군대를 운용했다.



산악이 많은 그리스에서는 보병 전술이 발달했다.아테네·스파르타같은 도시 국가의 보병은 긴 창을 앞으로 내밀고 밀집해서 네모꼴(方) 전투대형(陳)을 유지하며 전진했다.울타리처럼 둘러친 방패가 장갑(裝甲)이 되었고,고슴도치 가시처럼 빽빽한 창끝이 적의 접근을 허락지 않았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서아시아식 기병과 그리스식 보병을 결합했는데,기병은 서아시아처럼 궁수가 아니라 돌격병이었다.그러나 뒷날 로마군은 다시 그리스 식으로 돌아가,장갑 보병이 두텁게 밀집 대형을 이루었다.



서양의 전투대형이 팔랑크스(밀집 방진)를 기본으로 했다면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공격과 후퇴,분산과 포위를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는 열 가지 진법이 쓰였다.



진시황의 보병 군단도 방진이지만,창을 내밀고 전진만 하는 그리스·로마의 팔랑크스와는 전혀 달랐다.맨 앞에 석궁수(石弓手)와 궁수,좌우에 석궁수,중앙에 돌격대,뒤편에 후방 경계 병사로 짜인 봉(鋒)·본(本)·익(翼)·위(衛) 대형이다.‘봉’이 석궁과 활로 적진을 흐트러뜨리면 ‘본’이 돌격해 백병전을 펼치고,‘익’은 적을 포위하거나 아군의 측면을 방어하며,‘위’는 후방을 지켰다.



보병 방진 여러 개가 중앙의 주력 방진 양옆에 V자 대형으로 비스듬히 줄을 지어 적을 공격하는 것이 안행지진이다.진시황은 여기에 기병·전차 부대의 기동력을 가미한 전술을 창안했다.보병이 돌격한 뒤 전차·기병이 적의 측면을 협공하면,보병 방진이 옆으로 흩어져 적을 포위하는 전법이다.



용병(用兵)과 전술은 상대에 따라 달라야 하는 법.알렉산더는 예진(銳陳)으로 다리우스를 격파했지만,로마군은 예진을 썼다가 카르타고의 명장 하니발에게 패했다.칸나이 평원에서 적의 중앙을 돌파하려다가 중앙을 사다리꼴로 짜고 양날개를 돌출시킨 사진(斜陳)에 포위당해 전멸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독립적인 보병 대군단과 기병·전차 부대의 기동력을 조합해 적이 어떤 전술을 써도 변화 무쌍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한 진시황의 전술은 고대 어느 강대국 군대와도 겨룰 만했으리라고 짐작된다.





병마용갱의 발견



3월29일.4m쯤 파들어가자 땅속에서 진흙을 구워 만든 사람 인형 조각이 나왔다.



“벽돌 가마터인 줄 알았더니 웬 도용(陶俑;도기 인형)이지? 자 어서들 팝시다.어쨌든 물만 나오면 되니까.”



양취안이의 말에 농부들은 다시 곡괭이를 휘둘렀다.그러나 땅속에서 쏟아져나온 것은 물이 아니라 곡괭이 세례를 받아 깨어지고 부러진 도용 조각과 청동 화살·창·쇠뇌(석궁)의 촉 따위였다.땅속에는 인형 몇 개가 아니라 인형 군대가 묻혀 있는 것 같았다.이 심상치 않은 사건은 때마침 고향을 찾은 신화사 통신 기자 린안인의 눈에 띄어,‘인민일보’를 통해 마오쩌둥에게까지 보고되었다.



위안중이가 이끄는 산시성 고고학발굴팀이 용갱(俑坑;인형이 묻힌 땅굴)을 발굴하기 시작한 날은 1974년 7월15일.지하군단 군사들은 4.6∼6m 깊이의 땅속에서 벽돌 바닥 위에 줄지어 서있었다.병사들만 서있는 보병 대열,전차와 병사가 함께한 기병 대열이 규칙적으로 섞여 있었다.말 4마리가 끄는 전차에는 병사가 3∼4명씩 타고 있고,그 뒤에는 보병이 12명씩 서있었다.



그런데 1주일이 지나도록 발굴팀은 용갱이 어느 시대,어느 유적인지 알 수 없었다.‘심증’은 진시황릉의 유적이었지만 ‘물증’이 없었으므로 진시황릉 울타리에서 1.5㎞나 떨어져 있는 용갱을 진시황릉에 딸린 것이라고 확정하기 어려웠다.



발굴이 2주째로 접어들던 날 마침내 확실한 증거물이 나왔다.‘여불위가 승상이 되고 나서 3년째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진 구리 극(戟;창의 한 가지)을 찾아낸 것이다.여불위는 진시황의 아버지라고 전해진다.발굴팀이 그 다음으로 알아내야 할 것은 병마(兵馬) 용갱의 규모였다.발굴팀장 위안중이는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에는 보름이면 다 발굴하리라고 예상했다.기껏해야 무덤에 부장된 유물이니 용갱이 크면 얼마나 크겠느냐고 만만하게 생각했다.그런데 아무리 파들어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문제는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백발 노인이 가르쳐 준 대로 우물 파던 곳에서 서쪽으로 200m 떨어진 곳을 파자 해결되었다.노인은 용갱의 가장자리를 정확히 지목하고는 사라졌다.





병마용갱의 위용



1975년 7월21일 신화사 통신이 마침내 ‘진시황릉 병마용갱’ 발굴 소식을 보도했다.길이 230m,너비 62m에 군사 8,000여 명과 말 500여 필,전차 130대가 열한 줄로 늘어서서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달려나갈 듯이 대기하고 있는 전투대형이었다.



물론 이 군대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친위대는 황제가 죽을 때 산 채 함께 묻히는 대신,그들의 모습과 크기를 그대로 본뜬 도기 인형으로 만들어져 무덤 곁에 묻혀 지금까지 시황제를 호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인형들은 2200년 전 위풍당당했던 모습을 어제 일인 양 생생히 보여준다.그들은 한결같이 손에 무기를 들고 있으며,키가 175∼195㎝나 되는 늠름한 체격이다.말 또한 키 150㎝,몸길이 2m로 귀를 바짝 세우고 우뚝 선 당당한 모습이다.8,000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얼굴이 너무나 생생하고 저마다 다른 것으로 보아,이 인형들은 실제로 진시황이 거느렸던 사람들을 한 사람씩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금방이라도 전통(箭筒)에서 화살을 빼내 시위를 당길 듯한 병사,오른발을 모로 하고 서서 활 쏘는 자세를 취한 병사,몸을 살짝 굽히고 두손을 내밀어 고삐를 잡은 전차병….병사들은 모두 계급,나이,출신에 따라 얼굴 표정까지도 다르게 살아 움직이는 듯이 만들어져 있다.



그들은 모두 진짜 칼,창,쇠뇌를 지니고 있었다.발굴자들을 기쁘게 한 것은 이같은 쇠붙이 무기들이 20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잘 조사해 보니 화살촉과 칼 등에는 구리,주석,마그네슘,니켈,코발트 같은 성분들이 열세 가지나 섞여 있었다.



특히 진시황의 것으로 추측되는 도금한 청동검은,발굴팀이 실험해 보았더니 종이뭉치를 단번에 잘라 감탄을 자아냈다.놀랍게도 그 칼의 표면은 녹슬지 않도록 크롬 화합물로 산화 처리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두 가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전포(戰袍;군인이 겉에 입는 긴 웃옷)만 입은 병사와,전포 위에 갑옷을 걸친 병사.갑옷은 거의 위통과 어깨만 가린 가뿐한 차림이었는데,장교들 것이 더 화려했다.사병은 상투를 오른쪽으로 틀었고,장교는 가운데에 상투를 틀고 괭이 모양의 모자를 썼다.



이 도기 병마들에는 하나하나에 그것을 빚어 구운 도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비록 항우(項羽)가 진시황 무덤을 일부 파헤치고 불을 질러 조금씩 그을려 있기는 했지만,그 빼어난 솜씨로나 2000년 전 전투대형과 무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땅굴은 그 자체가 거대한 군사 박물관이었다.



1976년 4월 용갱 발굴장소에서 북동쪽으로 20m 떨어진 곳에서 병마용갱이 또 하나 발견되었다.L자 형인 2호 용갱은 길이 96m,너비 84m로 1호 용갱의 절반 크기였다.여기서는 2,000여 병사와 전차 89대,청동 병기 수만점이 나왔다.거의가 보병인 1호 용갱과 달리 2호 용갱에서는 궁노병·경차병·차병·기병의 네 병과가 대형 군진(軍陳)을 이루고 있었다.



1976년 5월11일에는 1호 용갱 북서쪽 25m 지점에서 아주 작은(300㎡) 3호 용갱이 또 발견되었다.여기서는 4명이 승차한 지휘용 전차와,출전하기 전에 점을 친 흔적으로 보이는 동물의 뼈와 사슴뿔 조각이 나왔다.지휘부의 군영이라는 증거였다.지휘부 군영은 세계 고고학사에서 유일한 발견이다.병마 용갱 1,2,3호가 다 발견됨으로써 마침내 비밀에 싸였던 고대의 군사 포진도(布陣圖),즉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막강한 안행지진의 전체 모습이 드러났다.



안행지진이 위력을 발휘한 데는,방진에 배치된 궁노병의 활약과,방진과 호응하는 기병 군진의 협공이 절대적이었다.궁노병이란 궁(弓·활)과 노(弩·쇠뇌)를 쓰는 병사이다.활보다 멀리 쏠 수 있는 쇠뇌(석궁)는 전국시대부터 쓰였는데 ‘무려 600걸음 밖을 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게다가 쇠뇌의 촉은 아주 크고 청동으로 만들어져 살상력이 강했다.쇠뇌로 군대를 무장시킨 나라는 중국이 세계에서 처음이다.서양에는 중세까지도 쇠뇌 같은 강력한 살상무기가 없었다.



진나라 보병 방진에서는 쇠뇌 입사수(서서 쏘는 사수)와 활 궤사수(꿇어앉아 쏘는 사수)가 교대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활과 쇠뇌를 쏘았다.그렇게 적의 진격을 막고 대열을 흐트러뜨림으로써 보병으로 하여금 백병전을 수월하게 펼치도록 기선을 제압했다.



진시황은 또 기원전 3세기부터 전술에 응용된 기병을 독립 병과로 두어 보병과 전차를 능가하는 주력 군단으로 만들었다.병마 용갱의 말에는 안장이 조각되어 있었다.학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진나라 군마에 안장이 쓰였다는 사실은,기병이 양손을 자유롭게 써서 전투능력이 뛰어났음을 뜻한다.또 2호 용갱의 기병 군진은 전체 대형의 왼쪽에 있어 기병이 신속한 측면돌파에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시대 후기부터 전쟁 규모가 커지고 전투 횟수가 늘어나자 지휘관은 군진 맨앞에서 뒤쪽으로 옮겨갔다.전체 군진의 북서쪽에 자리잡은 3호 용갱이 지휘부라는 사실은,지휘관이 작전을 면밀히 짜거나 적진을 한눈에 파악하려 했다는 의미이다.진나라의 군사 전술이 매우 발달했다는 증거이다.





진시황제



기원전 246년 성을 잉(瀛),이름을 정(政)이라 하는 열세살 소년이 진나라 왕위에 올랐다.그는 스물세살 때 실권을 잡고 기원전 230년부터 군사를 일으켜 이웃 나라들을 정복했다.그의 군대와 전술이 어찌나 뛰어났던지 여섯 강국이 무너지자 나머지 나라들은 지레 겁을 먹고 무릎을 꿇었다.10년도 못돼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그는 전설에 나오는 3황5제를 모두 겸했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황제라 일컬었다.



뒷날 그는 황제 칭호를 처음 썼다는 뜻으로 시황제 또는 진시황이라 불렸다.오늘날 차이나라는 말은 진(秦·Chin)나라 이름에서 비롯한 것이다.



진시황은 대륙을 통일하자 왕이나 제후가 다스리던 봉건제 정치를 황제가 직접 다스리는 중앙집권제로 바꿨다.그는 넓은 영토와 여러 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철권 통치를 일삼았다.그리하여 백성의 무기를 모두 빼앗았으며,지방 세력가의 성을 모조리 깨뜨리고 그들의 가족 12만명을 수도에 데려다 볼모로 삼았다.또 봉건제도를 뒷받침해온 유교 철학을 없애려고 유학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 460명을 산 채로 땅에 파묻었다.



진시황은 이처럼 전제 군주로 악명이 높지만 치적도 눈부시다.성문법을 만들고 도량형 표준을 정했으며 금화와 동전의 무게를 일정하게 해 화폐를 통일했다. 또 글자를 간단하게 만들어 통일함으로써 넓은 중국땅 어디에서나 뜻이 통하게 했다.



그는 또한 식량과 물자를 나르기 위해 수도 셴양을 중심으로 거미줄같이 퍼져나간 ‘황제 도로’를 닦았고 마차 크기를 통일해 새 길에 맞추었다.땅을 파고 물을 끌어 운하도 만들었는데,이 가운데 몇몇은 지금도 잘 쓰이고 있다.특히 중국 대륙의 남과 북을 잇는 운하는 오늘날에도 요긴한 교통망이다.중국 역사상 저수지를 처음 만든 이도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또 건축물을 많이 세워 호화로움의 극치인 아방궁 외에도 궁전 270채를 지었으며 만리장성을 쌓고 자신의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다.그의 최고 걸작이라 부리는 만리장성은 용의 등처럼 솟구쳐 올랐다가 깊은 골짜기로 떨어지는 축성술이 기적같은 데다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볼 때 육안으로 본 유일한 건축물일 정도로 방대해 인류의 7대 불가사의에 들었다(길이는 2,413㎞,너비는 말 6마리가 나란히 달릴 수 있다).



그러나 지하군단이 발굴되자 사정이 달라졌다.병마용갱이 세계 여덟번째 불가사의가 되면서 만리장성의 명성을 뛰어넘어 진시황의 건축물 중 첫손에 꼽히게 된 것이다.







병마용갱의 규모



진시황의 무덤은 겉으로 보아서는 그 신비스러운 안 모습을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널따란 옥수수밭 한가운데의 초라한 언덕,높이 55.5m 길이 300m쯤 되는 3층 무덤 위에는 소나무와 들꽃이 뒤덮여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의 참모습은 1917년에 이곳을 찾은 프랑스 탐험가 사갈랭이 제대로 짚은 바 있다.



“중국에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기념할 만한 것이 바로 이 무덤이다.”



과연 그의 말이 맞았다. 무덤은 아직 발굴되지도 않았는데,기껏해야 부장품을 묻었을 뿐인 주변의 땅굴(병마용갱)이 벌써 인류의 8대 불가사의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정작 무덤의 안 모습이 드러난다면 인류는 또 어떤 불가사의한 유산을 갖게 될까. 그같이 기대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시황제는 진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자기 무덤터를 잡고 공사를 벌였다. 36년이나 걸려 만든 그의 무덤은 왕성을 그대로 지하에 옮긴 듯이 거대하고 호화롭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유명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가 황제가 되자마자 리(驪) 언덕에서 엄청난 토목공사가 시작되었다. 온 나라에서 끌려온 70만명이 거기서 일했다. 그들은 세 군데나 지하수가 흐르는 곳까지 파들어가 무덤을 만들었다. 그 지하수들은 무덤 안 지하 도시를 흐르는 황허ㆍ양쯔 두 강이 되었으며,수도 셴양을 본뜬 이 도시는 궁궐들의 축소판으로 가득 찼다. 온갖 금붙이와 보물이 큰 궤 3개에 가득 담겼다. 황제의 관 둘레는 구리를 녹여 둘렀으며,이 구리벽을 뚫고 들어가는 사람은 화살 세례를 피할 수 없게 설계되었다. 진나라의 왕성이 재현된 이 지하 도시에,고래기름으로 만든 초가 황제의 영생를 밝히며 꺼지지 않고 탔다.



시황제의 무덤가에는 성벽과 망루·탑·사원 따위가 있었는데,이곳을 침략했던 반달족이 불태웠다. 그러나 내성(둘레 2,543m) 외성(둘레 6,294m) 두 겹으로 둘러싸인 지하 도시만은 침략자의 말발굽을 피했다. 무덤을 파헤친 항우도 지하 도시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중국 사람들은 ‘대칭’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무덤의 동쪽에만 병마 용갱을 만들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 학자들의 추측이다. 무덤과 그 서·남·북 둘레를 모두 발굴한다면,아마도 인류 역사에서 가장 방대한 유적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때가 언제일까? 진시황릉이 언제쯤 전부 발굴되겠느냐는 질문에 한 중국 고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내는 중국의 미덕이다. 발굴은 천년을 더 갈지도 모른다. 그때는 우리도 유물이 되어 있으리라


2008.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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